"참말로 이상타. 발바닥이 왜 이리 가려운지 모르겠구먼. 한번 긁기 시작하면 그것들이 숨어있다 한꺼번에 덤벼드는 것 같어." 어머니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발바닥을 긁는다. 바싹 오그라든 그녀의 젖가슴처럼 굳은살과 각질로 딱딱한 갑옷을 입은 발바닥이다. 아이가 저런다면 가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병원을 다녀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라는 것은 모든 일에 대범할 수 잇어 좋다. 통증이라는 직접적인 고통이 없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옆에서 가려워야 하며 연신 발바닥을 긁는 이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내심 불쾌했을 터였다. "식사준비 다 됐어요. 현호야, 손 씻고 와라." 아이에게 손 씻고 오라는 것을 강조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온다. 식사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아내의 선명한 입술선은 뾰족하다. 정작 손을 씻어야 할 어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식탁으로 느릿느릿한 걸음을 옮긴다. 껄꺼름한 표정의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주방의 개수대로 향한다. 주방의 개수대는 음식을 조리하는 아내의 성역이다. 깔끔한 아내는 어머니가 그릇에 물방울을 튀며 대충 손을 씻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리오세요." 어머니의 팔을 끌고 욕실로 향한다. 수도꼭지에 어머니와 손을 나란히 대고 씻는다. 어머니의 손마디는 심하게 휘어진 활모양이다. 관절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조그만 단추는 끼지 못해 큰 단추가 달린 옷만 입어야 한다. 거칠고 투박한 손은 나무껍질 같다. 빗물을 받아 나의 손이며 목을 씻겨주던 매운 손길이 생각난다. 어머니의 몸은 구멍이 숭숭 뚫린 낡은 런닝셔츠를 닮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은 방 한구석에 던져놓고 들로 산으로 내달았었다. 하루 종일 마을 친구들과 뛰어다니다 해가 떨어져 어둑해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장독대 옆에 물 한대야를 떠놓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하얀 수건을 목에 두른 어머니의 손길이 얼굴과 목을 지날 때면 하루가 끝이 나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 오는 구나. 긴 밤을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야하는구나. 생각하면 콧날이 찡해지곤 했다. 그 때 어김없이 어머니의 손은 코로 왔고 나는 하루 동안 콧속에 쌓였던 이 물질과 마음의 허전함을 팽 소리가 나도록 밖으로 끄집어내야 했다. 소년기에 조금은 내성적이고 우울했던 나를 지켜주었던 것은 야물고 결기 있던 어머니의 손이었는지 몰랐다. 저녁 메뉴는 된장찌개와 햇나물, 갈치지짐이다. 반찬의 가짓수는 많지 않아도 입맛이 돈다. 식탁의 한 옆의 노란색 후리지아가 작은 크리스탈 꽃병에서 향기를 ?는다. 향기 좋은데. 하니 아내의 얼굴에 웃음이 돈다. 꽃 기르기와 정원 가꾸기가 취미인 아내는 이런 유의 말을 좋아한다. 아내의 취미에 관심을 가져주는 남편. 더구나 얼마 전에 시골에서 어머니를 모셔온 나로서는 가정의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해 특히 신경을 써야하는 부분이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본다. 책이나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어머니가 내 곁에서 잠시라도 편안한 마음을 갖길 바라며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연속극을 본다. 아내는 과일 접시를 들고 와 거실 한구석에 저리를 잡는다. 지구 한 쪽에서 전쟁이 나도, 환율이 계속 오르고 있다는 신문의 굵은 활자도 걱정이 되지 않는 잠시 동안의 평화로운 시간이다. 연속극이 끝나고 9시 뉴스시간이다. 평상시에 뉴스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어머니가 오늘따라 유심히 텔레비전을 본다. 아나운서는 미국의 소고기가 한국에 상륙했다는 말과 함께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여 설명을 한다. "들어가시게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을 느낀 아내가 인사성 바르게 말한다. "그랴, 자네들도 잘 자고 내일 봄세." 어머니는 화장실 옆의 방으로 걸음을 뗀다. 마른 등의 휜 활꼴이다. 어머니가 저렇게 작고 왜소했나, 늘 당당하고 의연하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어머니의 뒷모습은 처음 보는 듯 생경하다. "현호도 자고 어머니도 들어가셨으니 이제 자유네. 우리도 자자." 퇴근하여 처음 듣는 아내의 쾌활한 목소리다. 침대에 눕자 아내의 머리에 팔베개를 해주며 나머지 한 손으로 가슴을 더듬는다. 잘 익은 홍도를 만질 때의 부드러운 촉감과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손에 힘을 주어 꽉 쥐어본다. 복숭아를 베어 물었을 때 입안 가득히 차는 달착지근한 과즙이 나올 것 같다. 아야. 하는 아내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하체에 힘을 돋군다. 아내의 몸속에 들어가는 일은 일종의 의식 같다. 화초에 물을 주듯 일정한 날짜에 내 안의 정기가 자신을 적시기를 원한다. 흙에 물기가 있어 물을 줄 때가 아니면 아내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의 방문을 허락지 않는다. 그러다 물을 주는 날짜를 놓쳐 땅이 푸석하고 메마르면 아내는 밤새 나를 보챈다. 그런 때면 꼭 가라앉은 색의 정장과 단색의 넥타이를 매고 어느 기업의 신년회에 참석한 느낌이랄까. 아내는 자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날에는 어디선가 온 야한 농담들을 침대 위에 풀어놓는다. 그것이 나의 긴장을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정상을 향하여 돌진하다가 산중턱에서 점잖게 산을 내려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김부장. 이 달 컨셉은 사라져 가는 것들 어때?" "사라져 가는 것들도 많잖아요." "새로 생긴 신종어 중, 신모계 사회란 말도 생겼다던데. 부권의 상실은 어떨까. 너무 딱딱할까?" "한 가지로 가는 것보다는 몇 가지로 초안을 잡아가지요?" 신모계 사회라. 그동안 사회통념 중 가장 많이 바뀐 부분은 여성의 지위다. 로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집을 나왔지만 요즘은 그것을 뛰어넘었다. 가정을 자신이 접수하여 편의대로 운영하듯이 사회조차도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려는 모양이다. 그녀들의 당당함이 아름답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소유의식을 보면 진땀이 나고 무서워진다. 이런 시대에 부권이라는 단어가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지난달 모처럼 경쟁사와 판매 부수가 조금 차이가 났다. 이번에 현저하게 굳히기를 해야 한다. 독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취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남성의 권위, 아버지의 뒷모습, 규범, 예의... 생각나는 대로 메모지에 끄적인다. 어머니의 굽은 등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이 시간 무엇을 할까. 또 아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내는 뜰에서 자신의 정원을 가꾸고 있을 것이다. 넓지 않는 뜰 한쪽으로 등나무를 심어놓고 수선과 마가렛과 영산홍을 심었다. 그 꽃들은 계절이 바뀌어 햇빛의 양이 늘어날 때마다 바톤을 이어가듯 꽃망울을 터뜨렸다. 아내는 갓난아이를 돌보듯이 세심한 관심을 쏟았다. 아침마다 새로 피어난 꽃들을 보며 경이로운 탄성을 질렀다. 빈터에는 잔디를 깔고 돌확과 조그만 탁자를 내어놓았다. 아내는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있을 터였다. 자신의 정원에서 하얀 면장갑을 끼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아내는 해맑은 소녀와 같았다. 동네 산에서 캐온 민들레와 제비꽃을 꽃삽으로 옮겨 심는 모습은 성직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언제까지나 아내가 여백이 많은 수묵화와 같은 여성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내의 이런 순수하고 평화로운 모습도 어머니를 모셔온 후부터 변해갔다. 엷고 투명한 수채화가 아닌, 색깔과 농도가 진한 유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한 그루의 라일락 같았다.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서서 화려하지도 고결하지도 않은 수수한 모습으로 소박한 향기를 뿌어냈다. 어머니는 외근 공무원인 아버지가 밖으로 돌 때 의연히 집을 지켰다. 깡촌에서는 드물게 나를 서울의 작은 아버지 집에 유학을 보냈다. 방학이 되어 내가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늘 같은 자리에서 서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때 어머니의 손에는 낫과 호미가 들려 있었다. 머쓱한 내가 어머니의 손에서 그것들을 빼앗고 쓰고 간 모자를 씌어드리면 어머니는 모자를 벗어 쉽게 깨지는 유리그릇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손으로 가져가곤 했다. 개학 때가 되어 서울로 향하는 나를 배우할 때도 꼭 그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가물가물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장승처럼 서 계셨으리라. 어머니는 냐게 절대로 외로움이나 고됨을 내보이지 않았다. 평생을 논밭에서 보내신 어머니는 직장을 퇴직한 정정한 노인들이 갑자기 늙어가듯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 얼마 남지 않ㅇ은 전답을 마을의 육촌형에게 처분하고 내 집으로 온 것도 어머니에게는 허망하고 내키지 않는 일일 터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이가 들으면 자식에게 몸을 의지하는 것이 아들의 얼굴을 세워주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색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가까운 산에도 가고 노인정에도 갔지만 노인정에게 하루를 소일하는 것을 어머니는 답답하다고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 가을 어느 날부터 집 앞의 공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동네의 쓰레기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서 오가며 눈살을 찌푸렸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쓰레기 더미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뒹굴던 깨진 벽돌과 돌들도 가지런한 모습으로 도로와의 경계구역을 알리는 돌담이 되었다. 두 세달만에 어머니의 노력으로 쓸모없이 버려졌던 공터가 텃밭의 모양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제야 정붙일 데를 찾았다며 아침저녁으로 텃밭에 신경을 쓰셨다. 정원에서 사용하는 호미와 꽃삽으로 아내가 사다놓은 퇴비와 비료를 내다 뿌기리도 하며 어머니는 텃밭을 일구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세요." 오전에 새 화보 목록을 결정하고 사진작가와 작품촬영 방향에 대한 면담을 하려고 나선 길이다. 전철의 단조로운 울림에 잠깐 졸은 듯싶다.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로 60세가 넘었을 할머니가 말을 하고 있다. "여러분, 이제 곧 세상의 종말이 옵니다. 노아의 방주를 기억하세요."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눈을 뜨고 불쾌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좀 조용이 못 하슈." 옆에 있던 젊은 청년이 그에 못지않은 목소리로 면박을 준다. "여러분, 천당가고 싶지요, 그러면 예수를 믿으세요."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소리로 말을 한다. "믿으려면 당신이나 믿지 왜 여기서 난리야 난리가." 할머니는 젊은이의 면박에 굴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믿음을 이어나간다. 열에 받친 젊은이는 할머니를 칠 듯이 덤빈다. 주위의 중재로 전철안은 평온을 되찾았지만 기분이 영 개운치가 않다. 인륜의부재현장이랄까. 노인의 행동이 주변의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 그렇다고 젊은이가 노인을 칠 듯한 행동도 좋은 모습이 아니다. 충무로 역에서 내려 대한극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제과점이 보인다. 문을 열자 종모양의 풍경이 청아한 소리로 반긴다. 김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사라져 가는 것들요?" "예. 주변에 흔히 보이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없어진 것도 있을 테고...." "취지가 그렇다면 꼭 실물체에 국한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렇지요. 우리의 전통 문화도 좋고, 들어올 때 울리던 풍경소리 같은 것도 괜찮구요." "가까운 곳에 있는 한옥마을은 어떨까요?" "남산의 한옥마을 말입니까?" "예, 마침 점심시간도 되고 하니 식사 후 간책 겸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한데요." 김 작가는 장사동 골목길에 즐비한 백반집으로 나를 안내한다.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놓고 꽁치를 구워 상에 올려 놓는 집이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연탄불에 밥을 지어먹고 난방을 하고 했었는데요. 이제는 이런 것들이 별식이 되어 버렸어요." "우리가 제대로 오긴 왔네요. 이런 모습도 사라져가는 이 시대의 한 모습이니 말이죠. 하하." 나의 말에 김 작가도 흔쾌한 웃음으로 동의를 한다. 한옥마을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한가로운 산책을 하는 직장인들과 관광객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솟을대문을 통과해 들어가니 자그마한 야생초들로 이어진 둔덕과 냇물이 흐르는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좌측으로는 장중한 기와집들의 한옥촌이다. 주위의 고층빌딩사잉에서 한옥의 부드러운 곡선은 밀집된 직선의 도시에 길들여지지 않은 우람하고 장중한 모습이다. 믿음직스럽고 강직해 보인다. "도심에 이런 곳이 있으니, 참 좋군요." "예, 원래 이 곳은 수도경비 사령부 자리였지요. 이제는 이렇게 시민의 공원이 되었지만요. 이곳의 한옥들은 이조시대 대갓집 한옥들을 그대로 옮겨나 재건한 것과 실물과 똑같이 복원시켜 놓은 것 두 종류에요. 우리나라 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지요. 목조건물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목조 집과는 큰 차이가 있거든요. 한옥은 구들과 마루의 구조로 되어있어요. 그런데 일본은 마루와 다다미를 깐 방은 있으나 구들 놓은 온돌방은 없어요. 또, 중국은 구들도 없고 마루도 없지요. 구들은 추운 지방에서 나타나는 폐쇄적인 구조인데 반해 마루는 고온다습한 고장에서 생긴 개방성이 강한 구조이죠. 이질적이면서도 이율배반적이라고 할까요. 서로 다른 것을 오랜 세월동안 조금씩 절충하고 접합하면서 마침내는 공존시키는 것이 한옥이죠. 세계 여러 곳을 가보았지만 폐쇄적 구조와 개방성 구조를 적절히 사용한 집은 못 봤어요." "개방성 구조라는 말이 와 닿는데요." 김작가의 말을 들으며 높은 현대식 빌딩과 함께 있는 한옥을 보니 멀리는 산이 보이고 앞으로는 넓은 논이 있어 어느 곳 하나 막힘이 없었던 고향집이 생각났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진정한 한옥은 없어졌다고 봐야할 지도 몰라요. 자연을 끌어들여 나와 하나가 되게 하는 한옥과 나를 보호하는 개념의 요즘 집들과는 그 느낌부터가 다르니까요. 더구나 집 몇 채 옮겨다 놓고 한옥마을이라 칭하는 것조차도 우리의 진정한 문화를 이해 못하는 일이지요." "그렇군요. 참. 물건이든 사람이든 놓여야 할 자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빛이 나는데 말이지요." 김작가와 기사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회사로 돌아왔다. 이사가 찾는다는 전달이다. 이사는 특집기사거리와 연재소설에 대해 간단하게 묻는다. 한옥마들의 이야기를 해주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김부장,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우리 주변에 사라지고 잊혀져 가는 것이 없고 항시 똑같은 환경이 되풀이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기존의 것 위에 새로운 것을 절충시키면서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나가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오래 이어지지 않았을 거야. 매일의 반복된 일상이 숨막혀 질식했을 지도 모르겠구 말이야." "그렇지요.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지는 것이없다면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르구요." 자리로 돌아오며 이제는 그만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가 버렸으면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출장이 잦던 아버지는 결국 새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아버지의 외도는 어머니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다. 조용하던 성품은 아버지에게 저항하듯 거세고 그악스러워졌다. 자신에게 모든 것이 걸려있다는 듯한 어머니의 눈길, 어머니가 밭에서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혼자 맞아야 했던 어둑한 저녁의 모습. 이제는 그만 잊고 싶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 기억만큼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한 기억들이 가슴속으로 깊숙이 낮게 똬리를 틀며 더 선명해지곤 했다.
기획부에서 올라온 자료들을 검토한다. 광고액과 할당 페이지를 정하며 고정광고와 새로운 광고의 페이지의 지면을 정해 논 결재안이다. 광고와 기사가 들어갈 지면을 일일이 체크하는 이삼 일의 작업량이다. 오늘은 얼개만 잡았는데도 벌써 퇴근시간을 한참 넘겼다.속옷, 여행사, 계절에 맞는 명품숍, 아이들 학습지는 앞부분에 새로 들어온 퓨전 레스토랑과 전원주택 광고 기사 중간에 배열을 한다. 전원주택의 사진이 누구나 한 번쯤은 그곳에서 살고싶어질 만큼 산뜻하면서 격조있다. 한동안 일던 전원주택의 붐이 펜션산업으로 불길을 옮긴 요즘이다. 남양주에 있는 작은 전원마을이 소개가 되고 새로운 방식의 주택개념을 알리는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양지바른 곳에 뜰이 넓고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듯한 목조주택은 아내가 좋아하는 집이다. 하얀 페인크로 나무를 칠한 사진 속의 집은 낮에 보고 왔던 묵직하고 장중한 느낌의 한옥과 대비를 이루며 경쾌한 느낌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기에 가장 아쉬운 것은 무엇일까. 독자의 기억 속에는 어떤 것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있을까. 퇴근하는 내내 생각을 해본다. 집 어귀에 들어서자 익숙한 공기가 느껴진다. 집에는 평상시와 다른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른다. "아빠." 달려드는 아이를 품에 나자 아이는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다. 어머니께 퇴근을 알리는 인상를 하고 아들을 안고 방으로 들어간다. 조그만 침대와 책상 그리고 옷장이 자잘한 장난감과 함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재미있었나. 우리 아들." "응, 근데 할머니가 어떤 할아버지랑 막 싸?다. 그래서 엄마가 할머니한테 창피하다고 화냈다." 자신에게는 엄격해도 남에게는 후한 어머니였다. 이웃이나 친지들과도 말다툼 한 번 없이 살아온 어머니가 무슨 일로 이웃과 싸움을 하셨을까.아내는 왜 그런 어머니에게 화를 냈을까. 씻고 저녁을 먹으라는 아내의 말에 옷을 갈아입는다. 식탁에는 어머니의 긴장감과 아내의 냉정함헤 현호의 불안한 장난끼가 뒤섞여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낮에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냥 그랬지, 뭐 별다른 일이 있었냐?" "동네집 할아버지와 싸우셨잖아요. 그 얘기 좀 하세요." 아내는 쇳소리가 섞인 차가운 목소리로 낮게 말한다. "갱우없는 사램 야그는 해서 뭐한다냐. 정신만 사납지." 어머니는 사투리가 섞인 말을 무심코 내뱉는다. 얼떨결에 튀어나온 사투리이다. 어머니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나보다. 입을 다문 어머니 곁에서 아내는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낮의 일을 이야기한다. 메마르고 황폐한 땅도 어머니를 알아보는 듯했다. 아침저녁으로 서로 조우를 해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친구를 새로 사귄 어머니는 다시 강단 있고 결기 있는 모습으로 돌아가신 듯했다. 어머니는 겨울이 지나고 봄에 싹을 틔우는 채소의 씨앗을 구해 늦은 가을날 파종을 했다. "저실은 이러코롬 추버야 혀는 것이여. 그랴야 저것들도 단맛이 밸 것이구만." 서울와서는 안쓰려고 노력하는 사투리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었다. 날이 추울수록 어머니의 관심은 집 앞의 공터에 가 있었다. 추위가 가고 여기저기서 개나리와 철쭉들의 꽃망울이 터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올 제가 됐구먼. 저것들이 저실 내내 얼매나 밖으로 나오잡고 싶었을 껴.” 하루하루를 떡잎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어머니였다. 그런데 어제 저녁 무렵 동네의 어떤 노?이 어머니의 텃밭을 갈아 엎어놓은 모양이었다. 아내가 마음 편히 있으라고 하루의 빈 시간을 노인정에서 보내고 오던 어머니는 시금치의 자그마한 떡잎들이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로 갈아놓은 땅위에서 말라버린 모습을 보았다. 해산달을 맞은 며느리의 배를 보듯 애면글면하던 ?든이었다. 자식든은 정수기 물을 먹으니 니든이라도 좋은 물 배부르게 먹으라고 새벽에 산에 ?라 길어? 약수를 뿌려주던 ?들이었다. 내 니들이 없었으면 어디다 마음 붙였을고, 하며 자식에게 말하듯 마음을 털어놓던 것들이었다. 다리에 맥이 풀린 어머니는 간신히 집으로 들어와 텃밭을 망친 범인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출근하는 내게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지만 내심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그동안 공들였던 텃밭을 망친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아침부터 목에 힘을 주고 기다리던 어머니의 어깨가 조금은 뻐근해질 무렵인 점심때쯤 한 노인이 나타났다. 텃밭에 심을 씨앗을 가지고 였다. 어머니는 신발도 신지 안은 채로 뛰어나갔다. “뭣이여, 임자. 지금 내 밭을 어떠케 한거여.” “이것이 누구 밭이라고라?” “히야, 가실내내 갈어서 씨 뿌려논 내 밭이구만.” “여기는 나라가 인정한 내 땅이여. 봄도 됐으니께 야채나 심으려고 하는디 뭐가 잘못이여?” “누구 맘대로 여그에 뭐실 심는다고?” “내 땅에 내가 농사를 짓을 거구만.” 어머니와 텃밭 주인의 말다툼은 동네가 들썩할 정도로 요란하였다. 하지만 그 싸움은 어머니의 완패로 끝났다. 할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와 땅의 소유주임을 내내 들먹이는 합법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땅을 사용하려면 최소한 주인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에 어머니는 할 말을 잃었다. 힘없이 집으로 들어오는 어머니는 뽑혀진 물기없이 시들은 시금치 떡잎이었다. 그 뒤 어머니는 바깥출입을 삼갔다. 말없이 칩거하는 어머니는 고향집 부뚜막에 놓여있던 무쇠솥 같았다. 한동안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한없이 달구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효용성을 인정해 주지 않는, 이제는 쓸모가 없지만 뜯어버릴 수도 없는 무쇠솥. 무거운 침묵 속에 안으로 안으로 자식을 밀어 넣는 어머니. 아내가 정원을 손질하고 짐안으로 들어오면 어머니는 아내의 그런 모습을 거실의 창을 통해 쭉 지켜보고 계셨던 듯 아내를 뚤어져라 쳐다보시곤 했다. 아내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부담스럽고 싫다고 했다.
제작회의 중이다. 기사의 방향을 최종 결정하는 시간이다. 요즘 주부들의 관심은 재테크과 자녀교육 문제에서 머무르고 있다. 현실문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은 자신의 취미나 관심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사회적인 현상을 지적하며 주제를 좀더 깊이 있는 문화 쪽으로 틀자는 결정을 한다. 우리의 전통 문화 중에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을 대조하는 테마로 컨셉을 결정하자 마음이 바쁘다. 김작가가 찍은 한옥과 장터의 사진, 전철의 경로석과 젊은이들,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잊혀져 가는 것과 문명이 발달하면서 잊혀져 가는 것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급. 집에 전화해 주세요. 빨리요.” 아내의 문자메세지다. 웬만해선 회사로 전화를 하지 않는 아내이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이상해요….” “왜? 차근차근 말해 봐.” “내 모자와 장갑을 끼고 밭으로 나간다며 나한테 인사를 하고 나가네요.” 어머니를 쫓아 밖으로 나간다며 아내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자그마한 체격으로 분주히 걸음을 옮기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슴이 뛴다. 퇴근 후 집으로 달려가니 어머니는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평온한 모습이다. 아내도 전화로 상황을 알리던 흥분된 음성은 가라?고 평상시의 모습으로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를 찬찬히 살펴본다. 어머니의 눈동자는 아직 맑고 투명하다. 굵게 패인 주름 속으로 세상에 대한 인내와 체념의 이치가 들어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조금씩 변하는 중이다. 생각과 행동이 유치했던 어린 내가 조금씩 세상에 적응하며 어른이 되었듯이 어머니 또한 선을 긋는 듯한 도시의 생활과 인간관계에 조금씩 익숙해진다. “악, 여보, 어떡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꿈결 속에 있을 때이다. 아내의 놀린 비명소리에 소스라쳐 몸을 일으킨다. 푸르스름한 밖은 아침을 준비한다. 뜰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요즘 도둑은 새벽에 드나. 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맨발인 채로 밖으로 뛰어나간다. 아내의 정원이 모두 파해쳐져 있다. 아내가 심어놓은 수선과 마가렛이 뿌리 채 뽑혀 있다. 민들레 제비꽃도 예와가 아니다. 잔디가 심어졌던 곳도 호미로 밭을 매듯 모두 뒤집히고 뒤섞여 있다. 인삼이나 장뇌삼을 밤새 훔쳐 달아나는 도둑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누가 가정집의 잘 가꾸어진 조그마한 뜰을 이렇게 갈아 엎어놓았을까.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무지몽매함에 피가 거꾸로 흐른다. 찾으면 그냥 놔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둘러볼 때이다. 아내의 모자와 흰 장갑을 낀 어머니가 뒤꼍에서 나온다. 어머니의 손에 맥없이 늘어져 있는 것은 아내가 줄을 맞추어 심어놓았던 기린초와 옥잠화이다. "오랜만에 집에 왔는디 푹 주무시지 벌써 나온데유. 바실 매느라고 아참이 늦었구만유. 쪼매 기달리래유." 어머니는 나를 아버지로 착각한 모양이다. 가끔 집에 와서 늘 위엄과 체면을 차리던 그 아버지로. 입꼬리 약간 올리고 웃는 어머니의 얼굴은 수줍음과 행복으로 환하게 물든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여자다운 미소이다. 어머니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 무표정한 모습으로 어머니의 행동을 지켜본다. 어머니는 한참을 부엌과 어머니의 밭이 되어버린 아내의 정원을 왔다갔다한 후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이후로 이른 새벽만 되면 어머니는 아내의 모자와 장갑을 끼고 땅을 파 해치곤 한다. 가끔 나를 아버지로 착각하고 내게 아내로서의 역할을 하려한다. 이른 퇴근을 한 날이다. 소파에 앉아 아침에 읽다만 신문을 본다. 집안의 공기는 어머니의 가벼워지는 몸피와 달리 무겁다. "더운데 등목이나 하지 그래유. 내 등도 닦아 주구유." 아내의 비음 섞인 목소리를 흉내낸 어머니는 속적삼 차림이다. 모시 적삼과 고쟁이의 투명한 결에 어머니의 마른 젓가슴과 깊숙한 곳의 숱 없는 음모가 훤히 내비친다. 억척스러움 뒤에 가려졌던 아버지를 향한 마음 같다. 과거와 현실 속을 오가고 계신 어머니의 몸을 정성껏 닦는다. 아내의 차가운 눈초리가 등에 머문다. 이것은 어머니에 대한 나의 의례다. 집안의 대소사와 자식의 양육을 젊은 아내에게 떠넘기고 밖으로 돌았던 아버지를 대신한 속죄이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어머니의 기억 속으로 아내는 아내의 마음으로 제각각 자리를 잡고 서로 나오지 않는다. 가금 정신이 돌아온 어머니는 자신의 그런 모습이 부끄럽고 용납이 되지 않아 더욱 침묵으로 일관한다. 아내는 식탁에 식사준비만을 해놓을 뿐 누구와도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어머니의 상태를 의사는 노인성 치매라고 한다. 조금씩 상태가 진전되지만 요즘은 약물로도 충분히 호전시킬 수 잇다고 한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면 치매가 천천히 진행된다고 한다. 의사의 진단 때문일까. 아내는 은근히 어머니의 귀향을 내비친다. 비어있는 고향집 가까이 사는 육촌형에게 이것저것을 알아본 눈치다.
해남으로 내려가는 길은 봄빛이 무르익어 여름으로 치닫는다. 현호는 창밖을 내다보며 환성을 지른다. 서해안 고속도로는 한가하다. 세상이 온통 연두빛이다. 휴게소에 잠시 차를 멈춘다. 어머니를 화장실 앞으로 데려다 주고 현호와 편의점에 잠시 들른다. 노인이 좋아할 만한 양갱과 과자를 몇 봉지 산다. 이쯤이면 충분히 용변을 보았을 것이다. 여자 화장실 앞에 어머니가 없다. 현호를 시켜 화장실 안을 찾게 했으나 노인은 그곳에 없다. 어디로 가셨을까. 황망하고 불안하다. 여기저기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어머니를 부른다. 노인은 눈에 띄지 않는다. 119에 신고를 하고 휴게소 안이 떠들썩하도록 어머니와 할머니를 부른다. 한참의 소요를 끝내고도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였다. 그 해는 더위가 유난히도 빨라 봄소풍을 두륜산의 계곡으로 갔다. 어머니와 함께 소풍을 간다하지 마음이 들뜨고 신이 났었다. 평상시에도 물안개가 자욱했던 계곡에는 그날따라 안개까지 자욱하여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멀리가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을 뒤로하고 점심을 먹은 후 몇몇의 친구들과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지독한 안개 속은 촌에서 자란 꼬마들에게는 마냥 신기한 모험의 대상이었다. 시린 물에 발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선생님과 친구들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갈피가 잡혀지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어머니와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래도록 그렇게 서있었던 것 같다. 겁에 질린 내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어머니는 나를 품에 꼭 껴안았다. 살풋한 살내가 나는 따뜻하고 뭉클한 젓가슴이었다. 한기로 떨고 있는 나를 어머니는 동네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점의 뜨겁고 매운 국밥이었다. 어머니는 지금 그때 내가 겪었던 안개속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망연자실 언덕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언덕으로 오르는 입구에 쪼그리고 앉은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뛰어가보니 어머니는 열심히 발바닥을 긁고 있다. 전신에 힘이 빠지며 화가 머리?으로 오른다. 어머니의 팔을 거세게 잡아끄니 어머니는 저항을 하신다. 낯선 타인을 보듯 생경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어머니다. 긴장이 풀리며 화가 치민다. "가시자니까요."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의 등을 후려치고 만다. 어머니는 깜짝놀란 듯, 아픔을 참지 못하고 다소곳이 나의 말을 따른다. 고속도로를 내려서 국도를 타고 가는 길에는 초여름이 성큼 다가온다. 패이기 시작하는 푸른 보리와 밀이 가는 곳마다 넘실댄다. 바람이 밀밭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밀은 바람의 손길에 우수수 누웠다 일어났다. 누운 밀들이 햇볕을 받아 은빛으로 빛난다. 바람과 햇빛과 밀밭이 하나가 되어 자연을 연주하고 있다. 시골집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따뜻한 봄볕을 집안 곳곳에 풀어 놓는다. 마당을 들어서니 어서 와야, 하는 어머니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오랫동안 비어 있어 바람이 지나간 듯 휑하리라는 생각과 다르게 사람의 운기가 느껴진다. 깨끗이 정돈된 것이 어머니가 잠시 외출을 다녀온 듯하다. 아랫목이 따뜻하다. 아내의 치밀함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흔적이다. 집 앞의 논에는 연자색의 자운영이 무리를 지어 ?게 피어있다. 어머니의 손이 가지 않은 동안 덩굴로 번식하여 논 가득하다. 오밀조밀 꽃을 심어놓은 아내의 정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생의 아름다움이 빛을 낸다. 어머니? ㅓㅇ원이다. "사램이건 괴기건 지 살던 물에서 노는 것이 하늘이 정한 이치여."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뭐시가 혼자더냐. 옆에 조카도 있고 조카 메느리도 있구만. 그라고 니가 섭섭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저 땅이 내 남편이고 내 자석이구만. 저것들만 내 곁에 있으면 하나도 외롭지 않구만."
어머니는 아내가 사준 단화를 벗고 양말을 벗는다. 맨발로 땅을 밟는다. 가려움을 호소하던 발이다.
"참말로 이상타. 발바닥이 왜 이리 가려운지 모르겠구먼. 한번 긁기 시작하면 그것들이 숨어있다 한꺼번에 덤벼드는 것 같어." 어머니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발바닥을 긁는다. 바싹 오그라든 그녀의 젖가슴처럼 굳은살과 각질로 딱딱한 갑옷을 입은 발바닥이다. 아이가 저런다면 가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병원을 다녀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라는 것은 모든 일에 대범할 수 잇어 좋다. 통증이라는 직접적인 고통이 없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옆에서 가려워야 하며 연신 발바닥을 긁는 이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내심 불쾌했을 터였다. "식사준비 다 됐어요. 현호야, 손 씻고 와라." 아이에게 손 씻고 오라는 것을 강조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온다. 식사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아내의 선명한 입술선은 뾰족하다. 정작 손을 씻어야 할 어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식탁으로 느릿느릿한 걸음을 옮긴다. 껄꺼름한 표정의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주방의 개수대로 향한다. 주방의 개수대는 음식을 조리하는 아내의 성역이다. 깔끔한 아내는 어머니가 그릇에 물방울을 튀며 대충 손을 씻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리오세요." 어머니의 팔을 끌고 욕실로 향한다. 수도꼭지에 어머니와 손을 나란히 대고 씻는다. 어머니의 손마디는 심하게 휘어진 활모양이다. 관절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조그만 단추는 끼지 못해 큰 단추가 달린 옷만 입어야 한다. 거칠고 투박한 손은 나무껍질 같다. 빗물을 받아 나의 손이며 목을 씻겨주던 매운 손길이 생각난다. 어머니의 몸은 구멍이 숭숭 뚫린 낡은 런닝셔츠를 닮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은 방 한구석에 던져놓고 들로 산으로 내달았었다. 하루 종일 마을 친구들과 뛰어다니다 해가 떨어져 어둑해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장독대 옆에 물 한대야를 떠놓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하얀 수건을 목에 두른 어머니의 손길이 얼굴과 목을 지날 때면 하루가 끝이 나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 오는 구나. 긴 밤을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야하는구나. 생각하면 콧날이 찡해지곤 했다. 그 때 어김없이 어머니의 손은 코로 왔고 나는 하루 동안 콧속에 쌓였던 이 물질과 마음의 허전함을 팽 소리가 나도록 밖으로 끄집어내야 했다. 소년기에 조금은 내성적이고 우울했던 나를 지켜주었던 것은 야물고 결기 있던 어머니의 손이었는지 몰랐다. 저녁 메뉴는 된장찌개와 햇나물, 갈치지짐이다. 반찬의 가짓수는 많지 않아도 입맛이 돈다. 식탁의 한 옆의 노란색 후리지아가 작은 크리스탈 꽃병에서 향기를 ?는다. 향기 좋은데. 하니 아내의 얼굴에 웃음이 돈다. 꽃 기르기와 정원 가꾸기가 취미인 아내는 이런 유의 말을 좋아한다. 아내의 취미에 관심을 가져주는 남편. 더구나 얼마 전에 시골에서 어머니를 모셔온 나로서는 가정의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해 특히 신경을 써야하는 부분이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본다. 책이나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어머니가 내 곁에서 잠시라도 편안한 마음을 갖길 바라며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연속극을 본다. 아내는 과일 접시를 들고 와 거실 한구석에 저리를 잡는다. 지구 한 쪽에서 전쟁이 나도, 환율이 계속 오르고 있다는 신문의 굵은 활자도 걱정이 되지 않는 잠시 동안의 평화로운 시간이다. 연속극이 끝나고 9시 뉴스시간이다. 평상시에 뉴스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어머니가 오늘따라 유심히 텔레비전을 본다. 아나운서는 미국의 소고기가 한국에 상륙했다는 말과 함께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여 설명을 한다. "들어가시게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을 느낀 아내가 인사성 바르게 말한다. "그랴, 자네들도 잘 자고 내일 봄세." 어머니는 화장실 옆의 방으로 걸음을 뗀다. 마른 등의 휜 활꼴이다. 어머니가 저렇게 작고 왜소했나, 늘 당당하고 의연하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어머니의 뒷모습은 처음 보는 듯 생경하다. "현호도 자고 어머니도 들어가셨으니 이제 자유네. 우리도 자자." 퇴근하여 처음 듣는 아내의 쾌활한 목소리다. 침대에 눕자 아내의 머리에 팔베개를 해주며 나머지 한 손으로 가슴을 더듬는다. 잘 익은 홍도를 만질 때의 부드러운 촉감과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손에 힘을 주어 꽉 쥐어본다. 복숭아를 베어 물었을 때 입안 가득히 차는 달착지근한 과즙이 나올 것 같다. 아야. 하는 아내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하체에 힘을 돋군다. 아내의 몸속에 들어가는 일은 일종의 의식 같다. 화초에 물을 주듯 일정한 날짜에 내 안의 정기가 자신을 적시기를 원한다. 흙에 물기가 있어 물을 줄 때가 아니면 아내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의 방문을 허락지 않는다. 그러다 물을 주는 날짜를 놓쳐 땅이 푸석하고 메마르면 아내는 밤새 나를 보챈다. 그런 때면 꼭 가라앉은 색의 정장과 단색의 넥타이를 매고 어느 기업의 신년회에 참석한 느낌이랄까. 아내는 자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날에는 어디선가 온 야한 농담들을 침대 위에 풀어놓는다. 그것이 나의 긴장을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정상을 향하여 돌진하다가 산중턱에서 점잖게 산을 내려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김부장. 이 달 컨셉은 사라져 가는 것들 어때?" "사라져 가는 것들도 많잖아요." "새로 생긴 신종어 중, 신모계 사회란 말도 생겼다던데. 부권의 상실은 어떨까. 너무 딱딱할까?" "한 가지로 가는 것보다는 몇 가지로 초안을 잡아가지요?" 신모계 사회라. 그동안 사회통념 중 가장 많이 바뀐 부분은 여성의 지위다. 로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집을 나왔지만 요즘은 그것을 뛰어넘었다. 가정을 자신이 접수하여 편의대로 운영하듯이 사회조차도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려는 모양이다. 그녀들의 당당함이 아름답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소유의식을 보면 진땀이 나고 무서워진다. 이런 시대에 부권이라는 단어가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지난달 모처럼 경쟁사와 판매 부수가 조금 차이가 났다. 이번에 현저하게 굳히기를 해야 한다. 독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취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남성의 권위, 아버지의 뒷모습, 규범, 예의... 생각나는 대로 메모지에 끄적인다. 어머니의 굽은 등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이 시간 무엇을 할까. 또 아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내는 뜰에서 자신의 정원을 가꾸고 있을 것이다. 넓지 않는 뜰 한쪽으로 등나무를 심어놓고 수선과 마가렛과 영산홍을 심었다. 그 꽃들은 계절이 바뀌어 햇빛의 양이 늘어날 때마다 바톤을 이어가듯 꽃망울을 터뜨렸다. 아내는 갓난아이를 돌보듯이 세심한 관심을 쏟았다. 아침마다 새로 피어난 꽃들을 보며 경이로운 탄성을 질렀다. 빈터에는 잔디를 깔고 돌확과 조그만 탁자를 내어놓았다. 아내는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있을 터였다. 자신의 정원에서 하얀 면장갑을 끼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아내는 해맑은 소녀와 같았다. 동네 산에서 캐온 민들레와 제비꽃을 꽃삽으로 옮겨 심는 모습은 성직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언제까지나 아내가 여백이 많은 수묵화와 같은 여성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내의 이런 순수하고 평화로운 모습도 어머니를 모셔온 후부터 변해갔다. 엷고 투명한 수채화가 아닌, 색깔과 농도가 진한 유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한 그루의 라일락 같았다.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서서 화려하지도 고결하지도 않은 수수한 모습으로 소박한 향기를 뿌어냈다. 어머니는 외근 공무원인 아버지가 밖으로 돌 때 의연히 집을 지켰다. 깡촌에서는 드물게 나를 서울의 작은 아버지 집에 유학을 보냈다. 방학이 되어 내가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늘 같은 자리에서 서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때 어머니의 손에는 낫과 호미가 들려 있었다. 머쓱한 내가 어머니의 손에서 그것들을 빼앗고 쓰고 간 모자를 씌어드리면 어머니는 모자를 벗어 쉽게 깨지는 유리그릇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손으로 가져가곤 했다. 개학 때가 되어 서울로 향하는 나를 배우할 때도 꼭 그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가물가물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장승처럼 서 계셨으리라. 어머니는 냐게 절대로 외로움이나 고됨을 내보이지 않았다. 평생을 논밭에서 보내신 어머니는 직장을 퇴직한 정정한 노인들이 갑자기 늙어가듯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 얼마 남지 않ㅇ은 전답을 마을의 육촌형에게 처분하고 내 집으로 온 것도 어머니에게는 허망하고 내키지 않는 일일 터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이가 들으면 자식에게 몸을 의지하는 것이 아들의 얼굴을 세워주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색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가까운 산에도 가고 노인정에도 갔지만 노인정에게 하루를 소일하는 것을 어머니는 답답하다고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 가을 어느 날부터 집 앞의 공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동네의 쓰레기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서 오가며 눈살을 찌푸렸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쓰레기 더미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뒹굴던 깨진 벽돌과 돌들도 가지런한 모습으로 도로와의 경계구역을 알리는 돌담이 되었다. 두 세달만에 어머니의 노력으로 쓸모없이 버려졌던 공터가 텃밭의 모양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제야 정붙일 데를 찾았다며 아침저녁으로 텃밭에 신경을 쓰셨다. 정원에서 사용하는 호미와 꽃삽으로 아내가 사다놓은 퇴비와 비료를 내다 뿌기리도 하며 어머니는 텃밭을 일구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세요." 오전에 새 화보 목록을 결정하고 사진작가와 작품촬영 방향에 대한 면담을 하려고 나선 길이다. 전철의 단조로운 울림에 잠깐 졸은 듯싶다.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로 60세가 넘었을 할머니가 말을 하고 있다. "여러분, 이제 곧 세상의 종말이 옵니다. 노아의 방주를 기억하세요."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눈을 뜨고 불쾌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좀 조용이 못 하슈." 옆에 있던 젊은 청년이 그에 못지않은 목소리로 면박을 준다. "여러분, 천당가고 싶지요, 그러면 예수를 믿으세요."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소리로 말을 한다. "믿으려면 당신이나 믿지 왜 여기서 난리야 난리가." 할머니는 젊은이의 면박에 굴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믿음을 이어나간다. 열에 받친 젊은이는 할머니를 칠 듯이 덤빈다. 주위의 중재로 전철안은 평온을 되찾았지만 기분이 영 개운치가 않다. 인륜의부재현장이랄까. 노인의 행동이 주변의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 그렇다고 젊은이가 노인을 칠 듯한 행동도 좋은 모습이 아니다. 충무로 역에서 내려 대한극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제과점이 보인다. 문을 열자 종모양의 풍경이 청아한 소리로 반긴다. 김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사라져 가는 것들요?" "예. 주변에 흔히 보이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없어진 것도 있을 테고...." "취지가 그렇다면 꼭 실물체에 국한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렇지요. 우리의 전통 문화도 좋고, 들어올 때 울리던 풍경소리 같은 것도 괜찮구요." "가까운 곳에 있는 한옥마을은 어떨까요?" "남산의 한옥마을 말입니까?" "예, 마침 점심시간도 되고 하니 식사 후 간책 겸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한데요." 김 작가는 장사동 골목길에 즐비한 백반집으로 나를 안내한다.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놓고 꽁치를 구워 상에 올려 놓는 집이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연탄불에 밥을 지어먹고 난방을 하고 했었는데요. 이제는 이런 것들이 별식이 되어 버렸어요." "우리가 제대로 오긴 왔네요. 이런 모습도 사라져가는 이 시대의 한 모습이니 말이죠. 하하." 나의 말에 김 작가도 흔쾌한 웃음으로 동의를 한다. 한옥마을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한가로운 산책을 하는 직장인들과 관광객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솟을대문을 통과해 들어가니 자그마한 야생초들로 이어진 둔덕과 냇물이 흐르는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좌측으로는 장중한 기와집들의 한옥촌이다. 주위의 고층빌딩사잉에서 한옥의 부드러운 곡선은 밀집된 직선의 도시에 길들여지지 않은 우람하고 장중한 모습이다. 믿음직스럽고 강직해 보인다. "도심에 이런 곳이 있으니, 참 좋군요." "예, 원래 이 곳은 수도경비 사령부 자리였지요. 이제는 이렇게 시민의 공원이 되었지만요. 이곳의 한옥들은 이조시대 대갓집 한옥들을 그대로 옮겨나 재건한 것과 실물과 똑같이 복원시켜 놓은 것 두 종류에요. 우리나라 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지요. 목조건물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목조 집과는 큰 차이가 있거든요. 한옥은 구들과 마루의 구조로 되어있어요. 그런데 일본은 마루와 다다미를 깐 방은 있으나 구들 놓은 온돌방은 없어요. 또, 중국은 구들도 없고 마루도 없지요. 구들은 추운 지방에서 나타나는 폐쇄적인 구조인데 반해 마루는 고온다습한 고장에서 생긴 개방성이 강한 구조이죠. 이질적이면서도 이율배반적이라고 할까요. 서로 다른 것을 오랜 세월동안 조금씩 절충하고 접합하면서 마침내는 공존시키는 것이 한옥이죠. 세계 여러 곳을 가보았지만 폐쇄적 구조와 개방성 구조를 적절히 사용한 집은 못 봤어요." "개방성 구조라는 말이 와 닿는데요." 김작가의 말을 들으며 높은 현대식 빌딩과 함께 있는 한옥을 보니 멀리는 산이 보이고 앞으로는 넓은 논이 있어 어느 곳 하나 막힘이 없었던 고향집이 생각났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진정한 한옥은 없어졌다고 봐야할 지도 몰라요. 자연을 끌어들여 나와 하나가 되게 하는 한옥과 나를 보호하는 개념의 요즘 집들과는 그 느낌부터가 다르니까요. 더구나 집 몇 채 옮겨다 놓고 한옥마을이라 칭하는 것조차도 우리의 진정한 문화를 이해 못하는 일이지요." "그렇군요. 참. 물건이든 사람이든 놓여야 할 자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빛이 나는데 말이지요." 김작가와 기사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회사로 돌아왔다. 이사가 찾는다는 전달이다. 이사는 특집기사거리와 연재소설에 대해 간단하게 묻는다. 한옥마들의 이야기를 해주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김부장,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우리 주변에 사라지고 잊혀져 가는 것이 없고 항시 똑같은 환경이 되풀이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기존의 것 위에 새로운 것을 절충시키면서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나가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오래 이어지지 않았을 거야. 매일의 반복된 일상이 숨막혀 질식했을 지도 모르겠구 말이야." "그렇지요.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지는 것이없다면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르구요." 자리로 돌아오며 이제는 그만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가 버렸으면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출장이 잦던 아버지는 결국 새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아버지의 외도는 어머니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다. 조용하던 성품은 아버지에게 저항하듯 거세고 그악스러워졌다. 자신에게 모든 것이 걸려있다는 듯한 어머니의 눈길, 어머니가 밭에서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혼자 맞아야 했던 어둑한 저녁의 모습. 이제는 그만 잊고 싶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 기억만큼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한 기억들이 가슴속으로 깊숙이 낮게 똬리를 틀며 더 선명해지곤 했다.
기획부에서 올라온 자료들을 검토한다. 광고액과 할당 페이지를 정하며 고정광고와 새로운 광고의 페이지의 지면을 정해 논 결재안이다. 광고와 기사가 들어갈 지면을 일일이 체크하는 이삼 일의 작업량이다. 오늘은 얼개만 잡았는데도 벌써 퇴근시간을 한참 넘겼다.속옷, 여행사, 계절에 맞는 명품숍, 아이들 학습지는 앞부분에 새로 들어온 퓨전 레스토랑과 전원주택 광고 기사 중간에 배열을 한다. 전원주택의 사진이 누구나 한 번쯤은 그곳에서 살고싶어질 만큼 산뜻하면서 격조있다. 한동안 일던 전원주택의 붐이 펜션산업으로 불길을 옮긴 요즘이다. 남양주에 있는 작은 전원마을이 소개가 되고 새로운 방식의 주택개념을 알리는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양지바른 곳에 뜰이 넓고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듯한 목조주택은 아내가 좋아하는 집이다. 하얀 페인크로 나무를 칠한 사진 속의 집은 낮에 보고 왔던 묵직하고 장중한 느낌의 한옥과 대비를 이루며 경쾌한 느낌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기에 가장 아쉬운 것은 무엇일까. 독자의 기억 속에는 어떤 것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있을까. 퇴근하는 내내 생각을 해본다. 집 어귀에 들어서자 익숙한 공기가 느껴진다. 집에는 평상시와 다른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른다. "아빠." 달려드는 아이를 품에 나자 아이는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다. 어머니께 퇴근을 알리는 인상를 하고 아들을 안고 방으로 들어간다. 조그만 침대와 책상 그리고 옷장이 자잘한 장난감과 함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재미있었나. 우리 아들." "응, 근데 할머니가 어떤 할아버지랑 막 싸?다. 그래서 엄마가 할머니한테 창피하다고 화냈다." 자신에게는 엄격해도 남에게는 후한 어머니였다. 이웃이나 친지들과도 말다툼 한 번 없이 살아온 어머니가 무슨 일로 이웃과 싸움을 하셨을까.아내는 왜 그런 어머니에게 화를 냈을까. 씻고 저녁을 먹으라는 아내의 말에 옷을 갈아입는다. 식탁에는 어머니의 긴장감과 아내의 냉정함헤 현호의 불안한 장난끼가 뒤섞여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낮에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냥 그랬지, 뭐 별다른 일이 있었냐?" "동네집 할아버지와 싸우셨잖아요. 그 얘기 좀 하세요." 아내는 쇳소리가 섞인 차가운 목소리로 낮게 말한다. "갱우없는 사램 야그는 해서 뭐한다냐. 정신만 사납지." 어머니는 사투리가 섞인 말을 무심코 내뱉는다. 얼떨결에 튀어나온 사투리이다. 어머니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나보다. 입을 다문 어머니 곁에서 아내는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낮의 일을 이야기한다. 메마르고 황폐한 땅도 어머니를 알아보는 듯했다. 아침저녁으로 서로 조우를 해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친구를 새로 사귄 어머니는 다시 강단 있고 결기 있는 모습으로 돌아가신 듯했다. 어머니는 겨울이 지나고 봄에 싹을 틔우는 채소의 씨앗을 구해 늦은 가을날 파종을 했다. "저실은 이러코롬 추버야 혀는 것이여. 그랴야 저것들도 단맛이 밸 것이구만." 서울와서는 안쓰려고 노력하는 사투리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었다. 날이 추울수록 어머니의 관심은 집 앞의 공터에 가 있었다. 추위가 가고 여기저기서 개나리와 철쭉들의 꽃망울이 터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올 제가 됐구먼. 저것들이 저실 내내 얼매나 밖으로 나오잡고 싶었을 껴.” 하루하루를 떡잎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어머니였다. 그런데 어제 저녁 무렵 동네의 어떤 노?이 어머니의 텃밭을 갈아 엎어놓은 모양이었다. 아내가 마음 편히 있으라고 하루의 빈 시간을 노인정에서 보내고 오던 어머니는 시금치의 자그마한 떡잎들이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로 갈아놓은 땅위에서 말라버린 모습을 보았다. 해산달을 맞은 며느리의 배를 보듯 애면글면하던 ?든이었다. 자식든은 정수기 물을 먹으니 니든이라도 좋은 물 배부르게 먹으라고 새벽에 산에 ?라 길어? 약수를 뿌려주던 ?들이었다. 내 니들이 없었으면 어디다 마음 붙였을고, 하며 자식에게 말하듯 마음을 털어놓던 것들이었다. 다리에 맥이 풀린 어머니는 간신히 집으로 들어와 텃밭을 망친 범인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출근하는 내게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지만 내심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그동안 공들였던 텃밭을 망친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아침부터 목에 힘을 주고 기다리던 어머니의 어깨가 조금은 뻐근해질 무렵인 점심때쯤 한 노인이 나타났다. 텃밭에 심을 씨앗을 가지고 였다. 어머니는 신발도 신지 안은 채로 뛰어나갔다. “뭣이여, 임자. 지금 내 밭을 어떠케 한거여.” “이것이 누구 밭이라고라?” “히야, 가실내내 갈어서 씨 뿌려논 내 밭이구만.” “여기는 나라가 인정한 내 땅이여. 봄도 됐으니께 야채나 심으려고 하는디 뭐가 잘못이여?” “누구 맘대로 여그에 뭐실 심는다고?” “내 땅에 내가 농사를 짓을 거구만.” 어머니와 텃밭 주인의 말다툼은 동네가 들썩할 정도로 요란하였다. 하지만 그 싸움은 어머니의 완패로 끝났다. 할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와 땅의 소유주임을 내내 들먹이는 합법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땅을 사용하려면 최소한 주인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에 어머니는 할 말을 잃었다. 힘없이 집으로 들어오는 어머니는 뽑혀진 물기없이 시들은 시금치 떡잎이었다. 그 뒤 어머니는 바깥출입을 삼갔다. 말없이 칩거하는 어머니는 고향집 부뚜막에 놓여있던 무쇠솥 같았다. 한동안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한없이 달구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효용성을 인정해 주지 않는, 이제는 쓸모가 없지만 뜯어버릴 수도 없는 무쇠솥. 무거운 침묵 속에 안으로 안으로 자식을 밀어 넣는 어머니. 아내가 정원을 손질하고 짐안으로 들어오면 어머니는 아내의 그런 모습을 거실의 창을 통해 쭉 지켜보고 계셨던 듯 아내를 뚤어져라 쳐다보시곤 했다. 아내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부담스럽고 싫다고 했다.
제작회의 중이다. 기사의 방향을 최종 결정하는 시간이다. 요즘 주부들의 관심은 재테크과 자녀교육 문제에서 머무르고 있다. 현실문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은 자신의 취미나 관심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사회적인 현상을 지적하며 주제를 좀더 깊이 있는 문화 쪽으로 틀자는 결정을 한다. 우리의 전통 문화 중에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을 대조하는 테마로 컨셉을 결정하자 마음이 바쁘다. 김작가가 찍은 한옥과 장터의 사진, 전철의 경로석과 젊은이들,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잊혀져 가는 것과 문명이 발달하면서 잊혀져 가는 것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급. 집에 전화해 주세요. 빨리요.” 아내의 문자메세지다. 웬만해선 회사로 전화를 하지 않는 아내이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이상해요….” “왜? 차근차근 말해 봐.” “내 모자와 장갑을 끼고 밭으로 나간다며 나한테 인사를 하고 나가네요.” 어머니를 쫓아 밖으로 나간다며 아내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자그마한 체격으로 분주히 걸음을 옮기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슴이 뛴다. 퇴근 후 집으로 달려가니 어머니는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평온한 모습이다. 아내도 전화로 상황을 알리던 흥분된 음성은 가라?고 평상시의 모습으로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를 찬찬히 살펴본다. 어머니의 눈동자는 아직 맑고 투명하다. 굵게 패인 주름 속으로 세상에 대한 인내와 체념의 이치가 들어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조금씩 변하는 중이다. 생각과 행동이 유치했던 어린 내가 조금씩 세상에 적응하며 어른이 되었듯이 어머니 또한 선을 긋는 듯한 도시의 생활과 인간관계에 조금씩 익숙해진다. “악, 여보, 어떡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꿈결 속에 있을 때이다. 아내의 놀린 비명소리에 소스라쳐 몸을 일으킨다. 푸르스름한 밖은 아침을 준비한다. 뜰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요즘 도둑은 새벽에 드나. 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맨발인 채로 밖으로 뛰어나간다. 아내의 정원이 모두 파해쳐져 있다. 아내가 심어놓은 수선과 마가렛이 뿌리 채 뽑혀 있다. 민들레 제비꽃도 예와가 아니다. 잔디가 심어졌던 곳도 호미로 밭을 매듯 모두 뒤집히고 뒤섞여 있다. 인삼이나 장뇌삼을 밤새 훔쳐 달아나는 도둑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누가 가정집의 잘 가꾸어진 조그마한 뜰을 이렇게 갈아 엎어놓았을까.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무지몽매함에 피가 거꾸로 흐른다. 찾으면 그냥 놔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둘러볼 때이다. 아내의 모자와 흰 장갑을 낀 어머니가 뒤꼍에서 나온다. 어머니의 손에 맥없이 늘어져 있는 것은 아내가 줄을 맞추어 심어놓았던 기린초와 옥잠화이다. "오랜만에 집에 왔는디 푹 주무시지 벌써 나온데유. 바실 매느라고 아참이 늦었구만유. 쪼매 기달리래유." 어머니는 나를 아버지로 착각한 모양이다. 가끔 집에 와서 늘 위엄과 체면을 차리던 그 아버지로. 입꼬리 약간 올리고 웃는 어머니의 얼굴은 수줍음과 행복으로 환하게 물든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여자다운 미소이다. 어머니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 무표정한 모습으로 어머니의 행동을 지켜본다. 어머니는 한참을 부엌과 어머니의 밭이 되어버린 아내의 정원을 왔다갔다한 후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이후로 이른 새벽만 되면 어머니는 아내의 모자와 장갑을 끼고 땅을 파 해치곤 한다. 가끔 나를 아버지로 착각하고 내게 아내로서의 역할을 하려한다. 이른 퇴근을 한 날이다. 소파에 앉아 아침에 읽다만 신문을 본다. 집안의 공기는 어머니의 가벼워지는 몸피와 달리 무겁다. "더운데 등목이나 하지 그래유. 내 등도 닦아 주구유." 아내의 비음 섞인 목소리를 흉내낸 어머니는 속적삼 차림이다. 모시 적삼과 고쟁이의 투명한 결에 어머니의 마른 젓가슴과 깊숙한 곳의 숱 없는 음모가 훤히 내비친다. 억척스러움 뒤에 가려졌던 아버지를 향한 마음 같다. 과거와 현실 속을 오가고 계신 어머니의 몸을 정성껏 닦는다. 아내의 차가운 눈초리가 등에 머문다. 이것은 어머니에 대한 나의 의례다. 집안의 대소사와 자식의 양육을 젊은 아내에게 떠넘기고 밖으로 돌았던 아버지를 대신한 속죄이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어머니의 기억 속으로 아내는 아내의 마음으로 제각각 자리를 잡고 서로 나오지 않는다. 가금 정신이 돌아온 어머니는 자신의 그런 모습이 부끄럽고 용납이 되지 않아 더욱 침묵으로 일관한다. 아내는 식탁에 식사준비만을 해놓을 뿐 누구와도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어머니의 상태를 의사는 노인성 치매라고 한다. 조금씩 상태가 진전되지만 요즘은 약물로도 충분히 호전시킬 수 잇다고 한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면 치매가 천천히 진행된다고 한다. 의사의 진단 때문일까. 아내는 은근히 어머니의 귀향을 내비친다. 비어있는 고향집 가까이 사는 육촌형에게 이것저것을 알아본 눈치다.
해남으로 내려가는 길은 봄빛이 무르익어 여름으로 치닫는다. 현호는 창밖을 내다보며 환성을 지른다. 서해안 고속도로는 한가하다. 세상이 온통 연두빛이다. 휴게소에 잠시 차를 멈춘다. 어머니를 화장실 앞으로 데려다 주고 현호와 편의점에 잠시 들른다. 노인이 좋아할 만한 양갱과 과자를 몇 봉지 산다. 이쯤이면 충분히 용변을 보았을 것이다. 여자 화장실 앞에 어머니가 없다. 현호를 시켜 화장실 안을 찾게 했으나 노인은 그곳에 없다. 어디로 가셨을까. 황망하고 불안하다. 여기저기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어머니를 부른다. 노인은 눈에 띄지 않는다. 119에 신고를 하고 휴게소 안이 떠들썩하도록 어머니와 할머니를 부른다. 한참의 소요를 끝내고도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였다. 그 해는 더위가 유난히도 빨라 봄소풍을 두륜산의 계곡으로 갔다. 어머니와 함께 소풍을 간다하지 마음이 들뜨고 신이 났었다. 평상시에도 물안개가 자욱했던 계곡에는 그날따라 안개까지 자욱하여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멀리가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을 뒤로하고 점심을 먹은 후 몇몇의 친구들과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지독한 안개 속은 촌에서 자란 꼬마들에게는 마냥 신기한 모험의 대상이었다. 시린 물에 발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선생님과 친구들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갈피가 잡혀지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어머니와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래도록 그렇게 서있었던 것 같다. 겁에 질린 내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어머니는 나를 품에 꼭 껴안았다. 살풋한 살내가 나는 따뜻하고 뭉클한 젓가슴이었다. 한기로 떨고 있는 나를 어머니는 동네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점의 뜨겁고 매운 국밥이었다. 어머니는 지금 그때 내가 겪었던 안개속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망연자실 언덕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언덕으로 오르는 입구에 쪼그리고 앉은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뛰어가보니 어머니는 열심히 발바닥을 긁고 있다. 전신에 힘이 빠지며 화가 머리?으로 오른다. 어머니의 팔을 거세게 잡아끄니 어머니는 저항을 하신다. 낯선 타인을 보듯 생경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어머니다. 긴장이 풀리며 화가 치민다. "가시자니까요."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의 등을 후려치고 만다. 어머니는 깜짝놀란 듯, 아픔을 참지 못하고 다소곳이 나의 말을 따른다. 고속도로를 내려서 국도를 타고 가는 길에는 초여름이 성큼 다가온다. 패이기 시작하는 푸른 보리와 밀이 가는 곳마다 넘실댄다. 바람이 밀밭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밀은 바람의 손길에 우수수 누웠다 일어났다. 누운 밀들이 햇볕을 받아 은빛으로 빛난다. 바람과 햇빛과 밀밭이 하나가 되어 자연을 연주하고 있다. 시골집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따뜻한 봄볕을 집안 곳곳에 풀어 놓는다. 마당을 들어서니 어서 와야, 하는 어머니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오랫동안 비어 있어 바람이 지나간 듯 휑하리라는 생각과 다르게 사람의 운기가 느껴진다. 깨끗이 정돈된 것이 어머니가 잠시 외출을 다녀온 듯하다. 아랫목이 따뜻하다. 아내의 치밀함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흔적이다. 집 앞의 논에는 연자색의 자운영이 무리를 지어 ?게 피어있다. 어머니의 손이 가지 않은 동안 덩굴로 번식하여 논 가득하다. 오밀조밀 꽃을 심어놓은 아내의 정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생의 아름다움이 빛을 낸다. 어머니? ㅓㅇ원이다. "사램이건 괴기건 지 살던 물에서 노는 것이 하늘이 정한 이치여."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뭐시가 혼자더냐. 옆에 조카도 있고 조카 메느리도 있구만. 그라고 니가 섭섭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저 땅이 내 남편이고 내 자석이구만. 저것들만 내 곁에 있으면 하나도 외롭지 않구만."
어머니는 아내가 사준 단화를 벗고 양말을 벗는다. 맨발로 땅을 밟는다. 가려움을 호소하던 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