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아름다워(39) - ‘회상의 피란길 걷기’를 시작하며
벚꽃이 활짝 핀 좋은 계절에 2년 전 계획했던 우리 가문의 ‘6. 25 전쟁 60주년 회상의 피란길 걷기행사’를 이번 토요일(4월 10일)부터 보름동안 가질 예정이다. 이를 위하여 작년 11월에 피란 당시 걸었던 코스를 답사하였고 3월에는 가족들의 예비모임을 통하여 최종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장기간 걷기에 적응하기위하여 20여 일 간 하루 10여km 정도를 걸으며 체력단련과 걷기연습을 열심히 하였다. 걷기연습코스에서는 남산에서 철갑을 두른 푸른 소나무의 기상을 담고 남한산성에서 호국의 얼을 기렸으며 광주의 푸른 숲길과 포충사에서 정기(正氣)를 호흡하기도 하였다.
조카사위의 소개로 경향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것이 꽤 큰 기사로 다음과 같이 보도되기도 하였다.(기사가운데 한 두 곳 틀린 부분을 바로잡았다.)
가족과 떠나는 회상의 6. 25 피란길
아직도 60년 전 그 여름의 더위와 배고픔이 생생합니다. 6·25 전쟁이 났을 때 아버님이 끌던 손수레를 타고 피란길을 떠났던 세 살에서 열두 살의 우리 남매들도 어느덧 60, 70대 노년이 되었군요. 60년 동안 가난과 고난을 이겨내고 발전한 우리들의 가족사가 바로 우리 현대사인 것 같아 뜻 깊은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김태호 광주대 명예교수(67·행정학)는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해 가족들과 함께 오는 10일 ‘회상의 피란길’을 떠난다. 6·25 당시 서울 삼광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김 교수와 가족은 어수선한 시국을 살피다가 뒤늦게 서울을 떠났다. 김 교수의 아버지 김재순씨(1983년 작고)는 슬하에 10남매를 뒀다. 3남매를 먼저 고향인 전북 고창으로 보내고 8월 말에야 남은 가족과 제수·조카 등을 손수레에 태우고 고난의 피란길에 올랐다. 아기는 업고 큰아이는 걸리면서 18일 만인 9월16일 고향에 도착했다.
오는 10일 출발하는 피란길도 60년 전과 똑같은 일정이다. 서울 용산 후암동 삼광초등학교에서 출발, 한강을 배로 건넌 서빙고 나루터, 첫날 묵었던 과천을 지나 수원, 천안, 공주, 논산, 김제를 거쳐 부안군 변산면 격포와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에 이르는 300여㎞를 국도를 따라 걷는다. 당시엔 9월에 도착했지만 이번엔 오는 24일 도착 예정으로 한식 절기에 맞춰 고향에서 성묘행사도 열 계획이다.
2년 전 김 교수가 이 행사를 제안했고 의기투합한 가족들은 지난 11월 사전답사도 다녀왔다. 하루에 걷는 거리와 이동경로, 숙박예정지, 도로상황 등을 개략적으로 구상하고 확인한 후 소요경비와 담당자도 정했다. 이번 답사 길에는 김 교수와 아내, 동생 가족 등 10여명이 참여한다. 당시엔 굶거나 멀건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헛간 등지에서 잠을 청했지만 이번엔 지역의 별미를 맛보고 편안한 숙소에서 잔다. 무엇보다 보조 이동수단도 손수레가 아닌 9인승 승합차다.
당시에 일곱 살이던 김 교수와 네 살, 다섯 살이던 남동생들은 여과 없이 쪼여대는 자외선과 극심한 영양실조로 시력이 크게 나빠져 모두 고도근시가 됐다. 하지만 가난과 아픔을 극복하고 모두 열심히 공부해 한몫을 하는 사회인으로 자랐다. 공무원 출신인 김 교수는 1년 전 정년퇴직해 현재는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두 남동생도 고위공직자로 일했다. 2007년 5월에는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당시 의용군으로 나갔던 김 교수의 둘째형이 1996년 북쪽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게 됐고, 그 가족들과의 감격적인 만남도 이뤄졌다.
포탄이 오가는 삼복더위에 손수레를 끌고 가족을 무사히 고향에 데려온 아버님과 숙모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어린 애였던 동생들도 이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됐는데 아직도 통일이 안 된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제 평생소원인 통일이 이뤄지길 바라면서 60년 전의 피란길을 또박또박 걸어보렵니다.”(경향신문 2010. 4. 1)
이 기사를 보고 여러분이 격려와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왔고 교회에서도 성공적인 행사가 되도록 기도하며 금일봉을 전했다.
‘나에게도 있었던 60년 전 피난길!
어린 나에게는 그 어려웠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이불보따리 머리에 이고, 등에 진 많은 사람들과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지쳐 보이는 총 든 군인아저씨들과 부모님 틈에서 업혀가는 6살 된 여동생이 한없이 부러웠던 사실적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길을 다시 걸어볼 수 있다는 여건이 부럽습니다. 덥고, 지치고, 닥쳐올 미래가 불확실하였던 옛길이 아니라 밝고, 희망찬 미래와 이만큼 풍성한 가족사를 쓰게 하신 감동에 젖는 새 길이 되게 하셨습니다.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이 함께하는 그 길은 결코 피곤치 않을 것입니다.
성공적으로, 건강하게 순례의 길이 마감되시기를 두 주먹 불끈 쥐고 힘찬 응원을 보냅니다.
파이팅! 임태평‘(친구가 보낸 메일)
‘메일을 이제야 봐서 답이 늦었습니다.
먼 길이지만 과거의 아픔을 회상하면서 부모님의 고초를 되새겨보는 뜻 깊은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도 1.4 후퇴 때 피난 나온 처지라서 무언가 울컥하는 심정입니다.
사실 내가 피난 나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29세에 홀로된 어머님이 우리나이로 8,6,4,2살 된 핏덩어리4 남매를 데리고 강원도 원산에서 포항 외갓집까지 하나도 안 죽이고 데려왔으니 모든 게 하나님 은총이요, 기적이랄 수밖에 없지요.
저야 놀러가는 건지 무슨 여행인지도 모르고 졸졸 따라만 다니고 어머님이 금가락지하고 바꾼 쌀 한 되로 지은 하얀 쌀밥을 나 혼자 다 먹겠다고 아우성치고 ,찬물에 말아먹던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효원이 보다 좀 컸겠지만 정말 철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마음이 들고 고생만하시다가 10 여 년 전에 하늘 나라가신 어머니께 한없이 미안하고 여러 가지로 후회 막심합니다.
그때 6 살이던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글로 써서 자손들에게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틈틈이 적고 있는데 잘 진도가 안 나가네요.
두 분 다 아무쪼록 좋은 여행되시고 건강들 하세요.
황정달 배‘(사돈이 보낸 메일)
'사랑하는 오빠와 혜경씨,
훌륭하십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다른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하는 큰 행사를 생각해 내신 오빠의 탁월한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냅니다. 부디 가족과 떠나는 회상의 6.25 피란길’을 성공적으로 마치시기를 기도할께요. 건강하게 재미있게 보람 있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쬐끔 넣었어요. 지치고 힘들 때 까까라도 사 드세요. 그 당시는 너무나 먹을 것도 없어서 지쳤을 텐데 재연하는 지금은 먹을 것도 풍부해서 맘 놓입니다.
잘 다녀오세요. 강은수, 박영숙‘(천혜경로원장 내외가 쓴 쪽지 편지)
서울에 갔을 때 차 한 잔 나누며 행사계획을 들은 친지(전 그리스도대학교 총장)는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왔다.
‘김 교수님께;
바쁘신 중에도 틈을 내어 차 한 잔 나눌 시간을 할애해 주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老母任으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결례를 하여 미안스럽습니다. 저에게는 생명 바쳐서라도 모셔야만 될 어머니이기에 모든 시간과 성의를 다 바치고 있습니다.
그날도 뒤늦게 복지관에 가신다고 연락받아 할 수 없이 일찍이 자리를 뜨게 되었습니다. 함께 老母任을 모시고 있는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4월10일 걷기행사는 대단히 의미가 있는 귀한 행사입니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행사 출발점에 참석할 수 있다는 기회가 저에게는 축복이 됩니다만, 아마도 참석이 여의치 않을 것 같습니다. 같은 날 12시에 충청남도 당진군에 있는 전도그리스도의교회 신축 예배당 헌당 예배 및 장로 장립식이 있는데 순서를 맡아서 아침 일찍 출발할 것 같습니다. 함께 가는 형제들이 아직은 정확한 출발 시간을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거리가 있는 관계로 그 시간대 전후에는 출발할 것 같습니다. 만일 시간이 가능해진다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듯 깊은 행사에 안전사고 없이 잘 집행되기를 기원합니다.
언제나 삶의 활력소가 되는 유머가 많으신 사모님께 문안 전합니다.
환절기에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주안에서, 기준서 드림‘
걷기전문단체인 (사) 한국체육진흥회가 행사의 취지에 찬동하여 후원하고 가문의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참여, 지원하여 필요경비를 초과할 만큼 찬조해 주었다. 가문의 화목과 우애를 다지며 공동체에 기여하는 행사가 되도록 힘써야 하리라. 4월 8일 광주에서 합류하는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4월 10일부터 통일과 번영을 염원하며 또박또박 씩씩하게 걸으련다. 여러분의 성원과 격려 있으시기를.
추신, 김재순 아버님의 자서전 중 피란당시의 상황 회고록
‘1950년 불의의 6.25 사변이 발생하여 서울서는 거의 피난을 내려가고 무엇보다도 식량사정이 제일 곤란하였다. 그 당시 큰 아들 규진이는 서울 사대 4학년, 막내 동생 재일이는 외대 3학년, 큰 딸 인순이는 숙명여중 6학년, 둘째 아들 찬진이는 경복중 5학년 둘째딸 지순이는 숙명여중 3학년, 셋째 딸 윤자는 삼광국민학교 6학년 셋째아들 우성이는 3학년 넷째아들 태호는 1학년 재학 중이었다. 다섯째 아들 행진이 는 4살, 그해 2월생 6남이 있었다.
남자 세 숙질은 의용군으로 나가고 인순, 지순, 우성 삼 남매는 식량사정과 위험관계로 먼저 고향인 고창본가로 내려 보내고 나머지 식구는 나 혼자만 후암동 집 지키느라 남았고 충무로 2가에 있는 조카 한용 어머니의 식구들과 광나루 시골로 피난 생활을 시키고 나는 낮에는 가방 속에 쌀 한 되와 의복을 조금 넣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비행기가 어느 방향으로 와서 폭탄을 던지는 가 살피며 폭격 안 받을 방향으로 피해 다니다가 밤이 되면 집에 들어가서 홀로 잠을 잘 때에 밤중에 한강교 이남에서 멀리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에 잠이 깜짝 깨고 혹시 우리 집 근처에 폭격이나 하지 아니할까 매우 마음이 떨리는 때가 많았다.
6.25 사변 당시 서울서 견디다 못해 충무로 식구들과 함께 부득이 고창 고향으로 피난을 내려가기로 결정하여 후암동 집은 중요한 물건만 제외하고 잠가두고 동생 재철이만 서울에 남기고 8월 30일에 손수레 한 대에 태호 행진이와 한용, 명희 등 4인만 태우고 2월 생 유아는 제 어미가 등에 업고 윤자는 걸리고 나는 앞에서 손수레를 끌고 처와 제수는 뒤에서 밀었다.
한강 다리가 파괴되어 서빙고에서 나룻배로 건너 그날 밤은 겨우 과천 근처에서 헛간 한 켠을 빌려 방석을 깔고 노숙하여 가면서 하루에 50리 또는 70리도 가다가 공주를 지나 정안면에서는 그날 밤이 마침 음 7월 22일 아버님의 소상 날이다. 그 다음날은 밤새도록 비가 내려 남의 집 토방에서 가마니 한 장 깔고 덥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아이들과 가족들은 마을 집 한 칸 방을 얻어서 자게 되었다. 도중 공주의 임헌청 집에서 하룻밤, 이리 노영구 집에서 하루를 쉬고 흥덕, 고창을 경유하여 고향인 상하면 고산에는 9월 16일에 도착하였다. 먼저 내려간 3남매는 모두 다 무사히 선착하였다.
인민군이 물러간 후 서울 소식을 잠깐 들은 바에 의하면 남아있던 재철이는 사망하였다 하나 직접 상경하여 가 볼 수도 없고 매우 심정이 비참하였다. 의용군 나갔던 규진, 재일 숙질은 무사히 귀가하였으나 찬진이 만은 지금까지 전연 소식을 모르고 있다.‘
참고, 피난길을 이끌었던 40대의 김재순 아버님은 1983년에, 20대의 최말순 어머님은 2004년에 세상을 떠나셨고 30대의 강선옥 어머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피난길에 오르며 작별한 30대의 김재철 아버님은 지금까지 생사의 소식을 모르고 있으며 18세에 의용군으로 나갔던 김찬진형님은 1996년에 북쪽에서 돌아갔는데 그 자식들과 형수를 2007년 5월에 남북이산가족상봉행사로 금강산에서 만났다.
첫댓글 과연 훌륭하십니다. 60년전 피란길에 금강은 안 건너셨는지? 신탄진에서 몹쓸"주마담"에 투병하며 전란을 맞은 우리아버님과 5남매 어린자식을 위하여 갖은 고생을하신 어머님, 13세의 소년의 꿈과 희망을 무참하게 짓밟혔던 악몽과 같은 피란살이를 다시금 회상하면서 부러움과 응원의 술회를 드립니다. 출발시간을 알려 주시면 직접 장도를 위하여 큰 박수로 격려와 무사일정을 축원해 드리렵니다. 주님의 은총과 보호인도하심을 먼저 축원합니다.
늘 좋은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4월 10일 오전 8시 30분에 서울 용산구 후암동 구 수도여고(현재 서울시 교육얼 시설관리소) 앞에서 출발행사를 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