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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 장타원 김혜전 대호법 강연
( 前전국봉공회장, 前수위단원, 강남교당 교도 )
□ [ 나는 왜 원불교인이 되었는가? ]
저는 입교한 지 30년이 넘었죠.
최근에 대종사님이 뭘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회상을 열었는지 이제
겨우 눈이 떠지는 거 같아요.
‘네가 부처고 나도 부처고 모두가 부처다’
이걸 알려주기 위함인걸 이제야 알았어요.
대종사님 그 어려운 대각하신 것을 우리 교전 첫 페이지에 알려주셔서
너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어렵게 고행하면서 얻어야 할 도를 너무
손쉽게, 대수롭지 않게 접할 수 있도록 해주셨을까? 하는 서운한 생각도
가끔 해봤어요.
저에게는 사실 제 자신에 대해 저는 이렇게 살아왔다 얘기해 본적 없고
처음 이예요. 쑥쓰러워 자식에게도 말 한 일이 없어요.
교무님의 권유를 듣 고 산 경험, 산 경전, 살아오면서 얻은 경전을
이야기 하자니 자연히 제 삶을 한번 돌아볼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저는 아주 깊은 산골에서 태어났어요.
일제 시대 때 친정 큰아버지께서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오셔서 보성학교
다니시다 독립운동과 연관 되어 굉장히 고초를 많이 겪으셨어요.
그래서 동생들한테 절대 학교를 가지 마라 하셔서 사업 쪽으로 눈을
리셨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징용도 피할 겸 현장에서 일꾼들 거느리고
일을 하셨는데.
시댁에서 어머니보고 ‘깊은 산골이니 너는 가지 마라’ 했는데 아버지를
따라 가셨어요. 그래서 경북 일원산 아주 깊은 곳에서 제가 태어났어요.
그래서 저는 산골이 너무 좋아요. 가끔은 제가 산 속에서 중노릇 하다가
온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유년시절은 내성적이고 문학소녀적인 삶을 살았다
학교 다니면서도 경쟁하는 학교생활을 유치하다 생각하고, 어려운
소설들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다녔어요.
대학도 그런 취향 때문에 불어불문학과를 선택하였고, 알지도 못하는
사르트르, 까뮈 읽는 척하며 머리 싸매고…
그런 취향이 계속 저에게 의문이 들었고, 무엇이 가장 삶의 가치 있는
걸까? 그것의 답을 마음으로 찾아 헤맸어요.
너무 보수적인 아버지가 여자는 직장은 안되고 빨리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해서 졸업하던 그 해에 붙들려서 결혼하였습니다.
나만의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어머니가 미제 초콜릿 사주며 선을 보라고
해 그 꼬임에 넘어가 재미로 볼 겸 선을 보러 나갔더니,
첫인상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 같았어요. 제 취향은 아니지만…
분명히 저 사람하고 결혼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차피 할 건데
나중에 시댁에 찍힐 일 없이 흘러가는 대로 결혼하게 되었어요.
남편은 첫 눈에도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가득 차고, 형이상학적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기가 기업가로서 성공하겠다는 본능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 가정을 안정시키는 일에 열심인 것에
만족하였습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늘 삶의 가장 가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면서도 좀 사이비 철학에 젖어
있었는데…
이것이 다 제가 대종사님의 각본에 의한 인연 소치가 아닌가 싶어요.
결혼 하니 우리 시어머니 다른 건 다 좋은데 절에만 다녀라. 집안
대대로 절에 다니는 집안이니 그건 거역해서는 안 된다 하셨는데,
저도 기독교 학교 다니면서도 그 쪽 기독교 문학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릴 때도 멀리서 절만 보면서 거기가 극락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전혀 반대할 이유도 없었는데, 우연히도 저희 큰 시누가 원불교
교도이셨어요. 대구 교당에 다니시는데, 집안에서 잔치해서 음식만
생기면 선생님 드린다고 음식을 싸니까, 저희 시어머니가 볼 때
선생님이라고 하니 수상해서 뒤를 밟았는데 결국엔 대구교당의
향타원님을 뵙고 저희 시어머니가 감동을 받으셨다.
시어머님이 ‘너는 원불교를 다녀야겠다. 거기가 진짜 불교더라’
향타원님을 만나신 것이 제가 원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원불교애 갓 입교한 친한 친구가 어느 날 입교증을 들고 와 이걸 써야
한다면서 받아가더니, 그 친구가 입교증만 꼭 받아 가라고 해서
종암동에 사는데 학동까지 입교증 받으러 갔다. 그 뒤엔 너무 멀어서
못 가고 가만히 있었는데,
제기교당에 다니시는 강만선님의 권유로 제기교당에 나가게 되었다.
처음에 법당에 남자 6명이 앉으시면 꽉 차고, 교무님 계시는 방은
온돌이 안 들어왔어요. 아주 조그마한 집이었는데 맥 빠진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교도 형님들이 자존심이 좀 구겨지니까 설날 세배 가자며 저를
데리고 종로교당도 보여주고, 원남교당도 보여주었다. 그건 저한텐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요. 교무님의 설법이 너무 재미있고 좋았어요.
그래서 원불교 쉽게 젖어 들었고, 제가 타 종교와 비교 분석해서 원불교
딱 선택했다. 그게 아니기 때문에 강연 주제와 거리가 있지만…
그러나 처음 입교해서 확 뿌리를 내린 것은 스승님과의 인연 때문이다.
제가 31살에 입교해서 그때도 형님들이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껴주셨는데, 그 당시만해도 교구라는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연합활동이 별로 없을 때에, 중앙총부 훈련원을 건축하는
후원회를 만들려고 원불교에서 신심 장하신 분들이 자체적으로 결성한
삼삼회 모임이 있는데, 아무나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곳인데 넣어준다고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있으신 분이셨고, 그 분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그 훈련원이 지금 대학원 대학교 건물 이예요. 원불교에서 최고로 큰
훈련원. 그 훈련원 봉불하고 나서, 삼삼회 회원들을 훈련을 시켰어요.
일상 생활만 하다가 원불교 그 신선한 분위기에 처음 젖어봤는데 신비의
극치에 접한 것 이였어요. 마침 예비교역자 훈련이 같이 있었는데
절하는 태도며 신발 가지런한 모습이며 너무 황홀하고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강사진들 역시 수준 높았습니다.
제가 확고하게 원불교도가 되도록 뿌리를 내리게 해주신 것은
좌산상사님이 개교의 동기 강연을 해주셨는데, 그 개교의 동기에서
‘아! 이 종교야 말로 진리적인 종교다’ 라는 확신이 서고,
제 선택에 대해서 굉장한 희열을 느꼈고, 그때부터 원불교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습니다.
아이들 키우며 학부형으로 분주한 생활을 하면서 법회 출석으로
만족하고 있다가, 제가 조금씩 철이 들면서 굉장히 감사한 많은 은혜를
느끼다 보니 보은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친구 차원경이 봉공회에 오라고 해서 가을에 2회 바자회 할 때
제 발로 종로교당 2층에 찾아갔어요. 그때부터 봉공회 일을 했는데
경산님과 즐겁게 대화 나누며 일하며 바자회 행사를 하면서 일생의
희열을 느꼈다.
저는 단순 노동을 할 기회가 없었어요. 어릴 때도, 결혼해서 아이
키울 때도 도우미가 있었기에… 바자회 하면서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 가 없었다. 각 코너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의
열기에 저도 신바람이 나고 정신 없이 봉공회 일을 했다.
그때만해도 교구 살림이 너무나 어려웠다. 바자회 수입이 큰 재원이었다.
향타원님이 교구장으로 계실 때 우리 수입이 열이라면 여섯을
대산 종법사님께 갖다 드렸다. 두세 번은 따라 했지만, 이웃을 돕는다고
현수막을 걸었으면 이웃을 도와야지 교단 살림에 쓰는 것은 아니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어른들의 뜻은 시간이 지나봐야 안다. 후에 교당 내에서
봉사하는 것은 사설 단체의 봉사밖에 안되니 법인화 작업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재원 법인을 해야 하는데 재원 법인은 기본이 5억
원이었어요. 대산 상사님이 봉공회에서 올린 돈을 다 모아 두셨다가
중앙 봉공회 기금으로 내리신 돈 그리고 제가 모금한 2억 5천 더해서
결국 볍인화 했어요. 나중에 도로 상사님에게 더 크게 받은 거죠.
대산 상사님이 알았다며 돈을 받으실 때는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솔직히 했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잘했다. 그러나, 아쉬운 일 중 하나가 있습니다.
화곡 교당 교도님이 생협을 만드셨는데, 사업에 서툴러서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나온 책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1979년도에
미국의 한 상원위원이 음식에 대한 보고서를 전문위원을 위촉해서
만들었습니다. 그걸 압축해서 만든 번역판 책이었는데.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그 책의 출판을 금지 시킨 겁니다.
제가 그 책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이것을 원불교가 꼭 해야 되는
생명 살리는 운동, 상생의 운동이라고 생각을 하고, 봉공회에서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경산 종법사님이 서울 교구장으로
부임하셨을 때 인사 드리러 갔더니, 교구장님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에
가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리 생협을 없애는 것라고 얘기 하더라’고
하셨다. 교구장님 앉혀 놓으시고 30분 간 생협의 필요성을 이야기
했더니, 딱 들으시더니 ‘장타원, 그 얘기 나한테 한 얘기를 딴
사람한테도 가서 얘기해’라고 하면서 허가 해주셨어요. 그래서 봉공회
자산 4천 만원을 출자 해 생협을 살렸다.
그 책을 오늘 보여 드리려고 찾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책에는 오늘날 음식문제로 생기는 모든 문제점들을 지적해 놓은 것
입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어떤 식품학자가 쓴 글인데 미국에서
밀가루가 공장에서 기계 시설에 들어가서 포장에 나오기까지 들어간
첨가물이 68가지. 한국에 오는 것은 살충제 방부제 온갖 것 다
들어가고 마지막에 표백처리까지 해서 나온 것을 우리가 수제비,
라면으로 해 먹습니다. 밀가루뿐만 아니라 육식동물들의 엄청난 성장
호르몬, 항생제 등이 투약되어 나타나는 부작용이 나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산만한 교실의 아이들을 머리카락 검사를 하면 원인은
칼슘 부족 이었습니다. 패스트푸드 때문에 불량학생이 되고 정서적으로
불안한 문제아들이 나오는 것이라는 보고서 내용이 다 있었어요.
웃기는 일은 클린턴 때 식품 문제를 국가적인 정책으로 다시 재고해
보자고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고 어이 없었다. 자기 나라에서 그렇게
연구 결과가 나왔는데, 매년 식품회사에서 연구비를 보조 받은
식품학자들이 <커피가 몸에 좋다.>라는 등 보고서가 나오고, 식품회사의
로비 때문에 그 책이 출판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땅에 비료를 줘서 미생물이 자라지 못하는데 뿌리에 기생하는
박테리아균이 땅속을 기어다니면서 땅의 숨통을 터줘서 빗물이라든가
양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공생관계를 유지하는데 농약, 비료를 주니
땅이 굳어 비가 오면 하천으로만 흘러가고 땅 속은 항상 메말라
있으니까 유기농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런데 유기농 농사를 지을려면
판매처가 있어야 하는데 기업 입장에서는 이윤이 남지 않은 장사를
하지 않죠.
그래서 원불교처럼 전국적으로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으니 각 지방마다
유기농을 지을 수 있도록 해서 교당과 생협을 걸쳐 전국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해보자 했는데, 참 뭘 판다는 것은 원불교를 통해서는
성공하기가 힘들다. 조금 비싸다고. 유기농 이라고 하면 다 가짜라고
하는데, 저는 가까라도 사겠다.
왜, 누군가는 사줘야 그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것 아니겠는가.
생협 총회때 몇 분을 초청해 보았다. 그분의 뜻은 자기가 농약 치다
농약병에 걸려 유기농 농사를 짓는데, 이윤이 목적이 아닌 비영리단체인
생활협동조합 이거든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교당에 가면 물품 판다고 천대받고, 원불교에서 이윤 남긴다고 해서
난감하지. 그래서 생협에서 이윤이 원래 목적이 아니다고 임원진들에게
이야기 해도 아무도 이해 하고 협조해 주지도 않아 조금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이 저녁시간에 이렇게 시간 내서 공부 하시는데 손해 안나게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제가 최근 고급 정보 하나 알려드릴게요.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는 처음 들으셨을 겁니다. 한의학 박사이신
박사님이신데, 미국 최고의 의료진들이 이분을 찾아올 정도로 이 분
논문이 충격 이었던 거예요.
암센터 원장이신데 이 분 얘기가 미국 그 79년도 의회 보고서를
능가하는 것을 이 분이 하셨다. 암이라고 하는 것은 수은 덩어리라고
한다. 농약이 수은 덩어리고, 여자들 화장품도 수은 덩어리고.
우리 몸에서 언제 암세포가 발생 하는가 하면, 피 속에서...
우리가 생각할 때 피는 골수에서 만들어진다 생각하는데, 그것은 정상이
아닐 때, 비정상일 때다. 정상일 때는 장에서 만드는 데, 바로 음식물과
장 속의 요소로 피를 만든다. 그런데 이 피가 깨끗할 때는 절대 암이
안 생기는데. 피 속에 어혈이 생겨서 서로 뭉쳐서 1cm되면 암이 됩니다.
그 어혈을 녹이는 최고의 식품은 우리 한국의 발효식품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이 먹던 된장, 고추장, 김치. 그런데 시중에서 파는
발효식품 중에 항암 작용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만드는
것이라야 자녀들에게 칼슘 부족으로 정서가 산만한 아이들을 안 만들고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보은장날에 두 가지 목적으로 갑니다.
정말 고향 같은 봉공회 격려 차원으로 가지만 교도들이 직접 담근 된장,
간장을 사기 위해서 갑니다. 이것은 시중에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식품이다. 예쁘게 포장되어있는 것은 다 첨가물이 든 것이다.
유통과정이 워낙 길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첨가물이 든 것은 제대로
된 발효식품의 항암작용 역할을 못한다. 아직도 원불교에서는 유기농
인식이 성공을 못하고 있으나 언제가 빛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봉공회 다음에 제가 참 많은 은혜를 입었던 곳이 삼삼회 입니다.
원불교 입교 했던 초창기만 해도 연대 활동이 없어서 타 교당과의
네트워크가 없었습니다. 욕구 불만이나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아도
맹목적으로 그냥 다니거나, 양이 안찬다고 나갔을텐데 삼삼회를 통해
대단한 스승님들을 많이 뵈었습니다.
한번도 그 스승님을 뵌 이후로 한 번도 실망 해 본 적 없습니다.
스승님의 말씀이 도인다운 말씀이었고, 그 언행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 어른을 만나 뵌 것 만으로도 금생에 성공적인 삶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 큰 스승을 뵐 수 있었던 삼삼회가 맥이 빠졌을 때
제가 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외부 강사를 모시기도 하였지만,
우리 정전공부에 토가 떨어지면 얼마나 좋겠단 생각이 들어
교무님 모시고 정전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는데, 입소문이 나서 삼삼회
들어오란 소리도 안해도 막 늘어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불교 만나서 입은 큰 은혜 몇 가지만 공개합니다.
대종사님 탄신 100주년 때 총부에서 큰 행사가 열리는데,
제 마음에 그 곳에 빈손으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하루에 4시간
좌선 적공을 하고 갈 결심을 했습니다. 힘들어서 2시간 정도만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려 했습니다. 새벽에 강남교당에 좌선을 하러 가는데
앞 유리에 성에가 얼어서 운전석 앞에만 겨우 긁어 보이게 하고
갔습니다. 가는 길에 제 시야에 하얀 종이 두 개가 바람에 팔랑팔랑
나부끼는 것이 보여, 비록 종이지만 어떻게 자동차로 밟고 가겠는가
하는 생각에 빗겨 갔습니다. 그런데 지나치면서 옆을 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검정 점퍼를 입고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든 생각은 ‘아! 선심은 이런 영향이 있구나. 수도를 하면
마음에 종이 조각도 깔고 가지 않고 비켜가는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그냥 지나갔으면 큰일 났겠죠. 알고 보니 몸이 불편해서
운동하러 나오신 할아버지였습니다.
제가 처음 초보운전 딱지 떽고 강변 따라 운전하고 가는데 제가
운전하는 차선은 차가 없었어요. 늘 가던 동작대교로 진입하려고 차선을
바꿨는데, 뒤에서 빠른 속도로 오던 총알택시 기사가 차선을 바꾼
저한테 라이트 켜고서 큰소리를 쳤습니다. 제가 깜작 놀라 핸들을
반대로 급히 꺽었습니다.
다행히 정면충돌은 안하고 앞 트럭의 트렁크를 치고 방음벽에 부딪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 유리는 박살이 나고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에요. 트럭을 한번 받고 벽을 받아서 충격이 덜했다고 합니다.
생명마비로 즉사할 뻔 했는데 다행이었다.
생각해보니 꿈 속에서 어떤 아주 잘생기고 건장한 남자가 모델 하우스를
보라고 아파트가 아니고 아주 잘 지은 초가집인데 너무 궁궐 같은
집이었는데 여기 너무 좋다고 사라고 하였다. 그래서 제가 지금 아파트
있는데 뭐 하러 또 사냐고 했었다. 그 이야기를 하니 교무님이 마음에
욕심이 많았으면 그것을 샀을 거라고 그게 무덤 이라는 거예요.
법공부를 하다 보니 물욕에 담담해 졌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 고등학교부터 소화가 안 된다며 찡그리고 다녀 맘에 안
들었습니다. 성실하지만 단순하고 맹목적인 성격이라 일편단심 회사
일만 하는 것 이었습니다. 어느 해 저는 봉공회 일로 독일 연수
다녀오는 등 매우 바빴습니다. 어느 날 어떤 법사님이 남편 분 만날 수
있냐 해서 오셨는데 덕산님 무릎팍에 갓난 아이가 몇 명 왔다갔다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저 천도재 지내고 싶다고 했다.
법사님이 갓난 아기 이름을 대라고 하셨는데 모두 4명이라는데
2명은 알지만 나머지 2명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영가가
모두 7-80명이나 되는데 그 분들 이름을 다 대시고 재도 지냈습니다.
평소에 존경하던 스승님께 모든 보고를 드리는데, 남편보고 그 영가들
이름을 놓고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리라고 하셨다. 원불교 취미도 없는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역정을 냈다. 그러나 저는 큰 스승님의
명령이면 복종하던터라 기도를 했습니다.
100일 기도를 매일 일어나서 70명 영가 이름을 대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100일 기도 마치기 하루 전 날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니 너무
상쾌하다며 ‘이렇게 가볍게 일어나는 것이 얼마만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좀 있다 혈변을 보고 나서 치질인 것 같아서 그 이튿날 내과의사에 가서
검사를 했습니다. 한 번 더 조직검사를 하게 되어 장 내시경을 하는데
제 눈으로 봐도 암 덩어리가 장에 한 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암이 많으니 끝이구나 했습니다.
그때 제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없었을 때의 나의 인생.
이 사람이 있었을 때 가능했던 행복을 한 순간에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임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끝이다 하는 각오로 수술에 임했는데, 수술 하고 열흘까지
회복이 순조롭고 좋았다. 그러나 소장이 막혀서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때부터 2달 반 동안 금식을 했습니다. 만약 유착이면
배를 잘라 수술을 해야 하는데 접혀가지고 있어 저절로 펴지기를
2달 반을 기다렸습니다.
제가 병실에서 어느 날 원음방송을 들었다. 12시 5분전 되니 일원상
서원문이 나왔어요. 그때 덕산님이 그거 좋다고 계속 틀어놓으라고 했다.
방송이어서 끝났는데… 그때부터 서울회관가서 독경 테이프를
틀어놓았더니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때부터는 평생 들을 거 같이 차에도
놓아두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졌어요.
제가 말씀드리려한 포인트가 법사님의 천도재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100일 기도를 했기 때문에 혈변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운이 좋아서 암
부분을 건드려 혈변이 나와 장내시경을 하게 됐지 그 전에는 장내시경
할 생각도 못했는데 기도의 위력 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나중에 4명의 아기 중 2명을 알게 됐다. 아버지 금고 정리를
하다 보니 일제 시대 호적등본을 보니 유아 때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가 둘 있었던 것이다. 아기 영가들이지만 자기들이 살아있었으면
장남 대접받고 편안하게 살았을텐데 그래서 동생에게 와서 괴롭혔던
것이었어요. 그 몰랐던 아기 영가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냈고, 그 뒤에
너무 소화 잘되고 건강하게 지낸다. 천도재 아주 중요하다고 절실히
느꼈어요.
또 한가지 은혜는 제가 아이들 키우며 십년 동안 심고를 드릴 때 선연의
짝을 만나달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다 그런 인연을 만났다. 아들들에게는
조건으로 며느리가 원불교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걸었는데 큰며느리는
4대째 천주교 집안이었다. 남편이 좋아하니 따라 오게 되었다.
둘째 며느리는 어머니가 불교를 다녀서 원불교를 서슴없이 따라와
강남교당에 잘 다니고 있고, 제 친구도 데려왔습니다.
우리 딸도 아는 인연을 통해서 만난 남자와 같이 강남교당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십 년 동안 상생선연을 바래왔던 것이 성공하지 않았나
싶고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참 후회되는 것이 아이들을 키울 때 교육관이 제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도 남은 인생의 소망은 3가지 있습니다.
진정한 견성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나이가 드니깐 참 중요한 게 생사해탈. 아무 때 가도 웃으면서
그래 가지 뭐 하면서 갈 수 있는 생사해탈을 하고 싶고요.
그리고 저희들이 모든 여건이 안좋을 때 대산 종법사님을 뵈었는데,
저희 둘을 보시자 마자 옆의 시자들한테 두 사람 기도해 줘라. ‘앞으로
원불교에 큰 일 할 사람들이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큰 어른 말씀이 땅에 떨어질 일이 없을 거란 생각에, 그때부터 자신감이
막 생겼습니다.
그 뒤에 대산 종법사님에게 저희가 수십 년 새배를 가도, 덕산 이리와
이러면서 챙기시더니, 돌아가시기 직전에 보자고 해서 제가 찾아 뵈었을
때, 거기가 진짜지 그러셨어요. 덕산부터 추켜줘야 일이 돌아가니까
그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대산 종법사님이 우리를 대호법으로 만드신 것은 앞으로 잘하라고
만드셨지 하는 생각에 언젠가 진짜 대호법을 둘이서 해보고 싶습니다.
진짜 대호법이 될 때 그 때 여러분을 또 한 번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질문과 답변---------------------------------------------------
서도안 :
31세 때 원불교에 처음 입교하셨다고 하셨는데, 다시 31살 때로
들어가신다면 뭘 하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김혜전 :
그 때 셋째 백일 때였어요. 아이를 키우느라고 헤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지금 자식들을 보니 아이 키우느라고 못헤어나더라고요.
그 때가 또 된다고 해도 나아질 것 같지가 않다.
자식 키운다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내 나이가 되어보니까 자식이 있으니까 참 행복해요.
아들 딸은 속 썩이는 것만 보았는데, 손자 손녀들을 보면 행복해요.
자식이 없었으면 어떻게 이런 선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장타원님이 왜 우리 교당을 떠나서 강남교당을 가셨을까가 궁금합니다.
지금 더 생각나는 것이, 교무님이 우리 교당은 30년이 넘었는데도
대호법이 한 사람도 없다 출가위도 없다고 그런 말씀 하시니까 더
생각이 납니다. 사실은 저도 다른 교당에 가고 싶은 적도 있었어요.
또 하나는 보은장을 가보면, 보은장날이 좀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혹시 어떻게 하면 보은장날을 살릴 수 있는지 말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혜전 :
강남교당으로 간 배신자이기 때문에 이 동네에 별로 안왔어요.
머리가 뜯길까봐. 남편을 핑계로 대지만 이기도 했지만, 사실 법회가
일요일에 한 번 밖에 없는 것이 저한텐 참 고통스러웠어요. 대치동
집에서 거리가 먼 여기까지 오는 것을 남편이 싫어하기도 했지만,
내 내심으로는 두 번째 이유가 더 컸다. 너무 아줌마 할머니만
앉아계셨는데, 나는 꼭 아들 딸들을 원불교 교도로 만들고 싶었어요.
너무 충격적인 모습을 삼삼회 회원 49제에서 본 일이 있어서 나는 저런
불행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식은 꼭 원불교라야 했는데,
법회를 데리고 오려니 분위기 형성이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 친아들 딸이면 강제로 앉혀 놓지만 며느리 데리고 오면서 너 여기
앉으라고 강요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강남교당에 살짝 가보니
분위기를 보니까 꽤 젊은 분들이 많고.. 비슷한 또래가 많이 있어야
됩니다. 지금은 많이 후회해요. 여기 젊은 분들이 많아서 우리 아들들도
다니면 재미있어라 할 텐데.
큰 아들은 강남교당에 안 나오는 대신 전주 서신교당에 잘 다니고
있어요. 사실은 상당히 이기적인 판단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늘
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화요법회가 있기 때문에 너무나 행복해요. 그날은 온전히 비워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일년간 빠질 일이 없어요. 우리도 숫자가 적어도
법회를 다양하게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은장날에 대해서는 아까도 말했지만. 장류 발효식품은 유통되고 있는
브랜드 제품은 잘 만들어도 유통기간 때문에 도저히 그 양심을 지킬
수가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교도님들 교당에서 만드신 것은 저희
집에서 만든 것과 같으니까 그걸 장점으로 삼아서 광고를 하면 잘
되리라 생각합니다.
수익금은 두 번째 일 입니다. 원불교를 서울에서 파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만 해도 여의도에 있는 아파트에서 보은장날을 보고
많이 왔었다. 언제 그 사람들이 원불교에 오겠는가? 보은장날에 법을
팔고 분위기를 팔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너무 공산품 위주로
가는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쉽습니다.
어제
못한다고 합니다. 비타민에 의존하는데 합성비타민을 대량 공급한
마을에 암 환자가 많이 생겼답니다. 한국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발효식품을 보은장날로 활성화 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원공 :
저도 원불교를 늦게 만나서 아쉬운데 어떻게 하면 수양을 잘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김혜전 :
수양력은 자신이 없어요. 그러나 저는 전생부터 불연이 깊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젊은 시절에도 교리학교를 다 쫓아 다니면서
공부를 했었어요. 지금 강남교당에 교리교실을 열어서 제가 진행을
하는데 뜻밖에 교도님들이 저보다 연조가 오래 되어도 교리 체계가 안
잡혀 있었어요. 이해를 못하지만 분위기가 좋아서 법회 출석을 열심히
하셨더라고요.
듣는 공부도 공부이지만 내면적인 수양력을 쌓는 데에는 수행자로서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죠. 대종사님 법 특성이, 동정간 수양력을
기르는 데 있다. 저는 유무념 대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호법수위단도 교화에 대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제안 하기를, 왜 각
교당에서 유무념 일기 쓰는 것을 철저히 체크를 안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였다.
총부 교화부에서는 쭉 나눠주고 교당에서는 쌓아놓고 할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하고 교당에서 체크하지 않으니 확산되지 않는다. 법회 설교보다
본인이 상시일기를 통해서 자기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제 마음을 읽는
편입니다. 단원들은 상시일기 꺼리가 없답니다. 전 하루에도 수십 건
이에요. 제마음을 보면 다 일기거리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상시일기에 시간을 많이 들이면서 평소에 제 마음의 분별심을 관찰하는
것으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 2500일 아침 기도를 하고 있는데, 매일 아침 기도를 꾸준히
한다는 것이 저보다도 남편이 좋아하 합니다. 기도를 끝나고
일원상서원문 삼독하고, 반야심경 독송하고, 법어집을 읽으면서 남편이
모르면 “뭐꼬! 무슨 뜻인고?” 하고 묻는다.
그러면 제가 자세히 설명을 해줘요. 그것이 덕산님에게도 도움이 되고
저한테도 지혜 밝히는 도움이 됩니다.
박원허 :
제가 전에 교무님 천도품 강연을 듣고 교무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다 자기는 평생 장수할 줄 안다고
하셨거든요.
얼마 전에 제가 중국에 갔다 왔는데 비행기가 많이 흔들리고 비명
소리도 들려서 만약에 비행기 떨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공포심까지
들었고, 이럴 때 종교인으로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생각을 했는데.
사람이 살면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 같은데 현재
죽음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김혜전 :
나는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꼭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 죽음을 당해서
새로이 몸을 받을 때 지금보다는 진급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죽음을
생각해요. 갑자기 지금 죽는다고 생각하면 진급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이 없다. 그래서 늘 마음의 숙제가, 지금보다 진급된 사람이 되자는
것 입니다.
또 하나는 언제 죽어도 착 없이 떠나고자 하는 것이다. 무슨 검사
하고도 죽을 병 걸리면 어떻게 하나 벌벌 떠는데,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데 무슨 애착을 가질 것 인가. 주변 인연에 대한 애착을 아니 가질
것 같은데 당해 보아야 알 것 같습니다.
인연으로 모였다가 인연으로 흩어지는… 실체는 원래 빈 것 인데.
허상의 실체에 집착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늘 나 자신에게 되새기면서
생사 해탈로 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미 나이가 생사해탈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어요.
질문 :
아까 후회되시는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김혜전 :
저는 자녀교육에 허영심을 많이 가졌던 것 같아요.
우리 손녀딸이 초등학교 2학년인데 성적이 좋지 않으니까 며느리가
속상해 하자 사돈 어른이 딸을 보고 하는 말이
“너 옆집 아줌마에게 자랑하려고 아이 공부하라고 윽박지르는 거지?”
그 말씀이 정답이에요. 자연스럽게 크게 되어 있는데, 직접적으로
성적을 올려서 남에게 보여줄 만큼 성과가 있길 바랬던 욕속심이 제
자신이 부끄러워요.
그때는 법이고 뭐고 눈에 안 들어 오고 일단은 자식이 명문대학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 아들은 내버려 두고 사업가나 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늦공부가 터져가지고 캠브리지에 교환교수로 가
있습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엄마의 욕심으로 판단하는 것은 오판 할
가능성이 너무 많더라구요.
둘째는 어려서 너무 영리해서 적어도 연고대는 가겠지 하면서 과도하게
밀어부쳤더니 공부를 너무 안 하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은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잘 하고 있습니다.
딸은 기질이 강하고 원불교를 좋아해서 애들이 크면 무슨 일을 시킬
생각입니다.
이제선 :
30세 넘어서 원불교 만나셔서 대호법이 되시기까지 이 법을 만난
기쁨도 있으실 것이고, 보은생활을 하려는 마음도 있으셔서 많은 일들을
해 오셨을 것 같은데, 우리 청년들도 이 법 만난 기쁨이 있고,
보은생활을 해야 한다고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활 속에서 교당에
관련된 일을 많이 하고 있는데 그래도 혹 지칠 때가 있는데 그런 시기가
없으셨는지 궁금하고 그럴 때 어떻게 극복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김혜전 :
대호법은 조금 부끄럽다. 대호법 제가 되려고 한 게 아닌데 대산
상사님이 앞으로 잘 하라고 이렇게 키워 주셨고,
사업은 해도 해도 더 하고 싶어요. 내가 힘 닿는 데까지 끊임없이 우리
회상을 위해 물질적인 후원을 하고 싶고 그건 지치지 않는데,
봉공회 할 때 정말 지쳤어요. 일이 너무 많고 날마다 나가니 동네
사람들은 제가 직장 생활 하는 줄 알았어요.
너무 지칠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일을 해 보면, 설명이 안되는
희열이 있어요. 교법에 대한 재미는 점점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너무 대종사님 교법이 완벽하다는 생각이 갈수록 든다.
봉공회와 삼삼회를 이끌어가시면서 내부적으로 화합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하셨을 것 같아서, 그런 노력들 중에서 장타원님께서 실천하셨던
아이디어라든가 기억에 남는 경험이 궁금하다.
내부 사람들이 화합될 수 있는 것은?
김혜전 :
제가 삼삼회원들에게 매달 이 모임을 알리는 편지를 띄우는데,
그 내용을 회원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에요. 지난번 교무님 교리 설명을
다시 정리해서 보내고, 굉장히 다정한 편지를 띄워드려요. 그 편지 받고
감동을 받고, 이 분들이 그 편지를 통해서 정신적인 유대감이 굉장히
끈끈해 집니다.
봉공회를 통해서는 피부를 부딪혀야 한다. 스킨십, 같이 밥 해먹고,
같이 일하면서, 이 끈끈한 유대는 책상 앞에서 느끼는 유대와는 다르다.
굉장한 결속력이다. 일 하면서 생기는 동지들간의 유대는 강한 것이다.
특히나 내가 능률이 안 오를 때,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이 5개 할 때
나는 1개 밖에 안 하더라도 나는 꼭 일에서 빠지지 않았어요.
그러니 모두 힘을 합해서 순신간에 일을 마쳐습니다. 그 속에서 끈끈한
정이 들었습니다.
데가 보은장날,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체험에서 나온 겁니다.
노동을 통해서 얻어진 결속력은 엄청난 동지애가 생겨 납니다.
재미있었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서로를 보면서 존경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대견하게 서로를 이뻐해 주었습니다.
어떤 교무님의 지시에 의해서 봉공회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질문 :
언제나 제기교당 다닐 때부터 존경스러웠는데, 오늘 말씀도 감사합니다.
제기교당 다닐 때만 해도 늘 어려웠는데 늘 간격 없이 평범하게
대해주시고 해서 늘 지금도 마음도 감사하고,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에요. 언제나
부족해서, 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쩌다 보면 내 마음에 물러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 다짐하는 의미에서 좋은 말씀 부탁
드립니다.
장타원 :
연복 씨는 제가 안암교당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에요.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교화단 법회를 저희 집에서 하는데 교호단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이야기를 회화 시간에 했어요. 본인은 잊어버렸는지 몰라도
나는 기억합니다. 단원들과 자기 이야기를 터놓고 이야기하니 술술
이야기가 풀려나갔습니다. 자기 마음이 안 여는 것, 우리 원불교가
아쉬운 것이 그것 입니다.
교당에 와서 교무님에게 수동적으로 설법을 듣기만 하지만 자기 문제,
자기 고뇌, 자기 갈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은 교화단 밖에 없습니다.
공부가 잘 안 될 때는 교화단원끼리 마음을 열어야 되요. 제가
단장하면서 서로 마음을 열려고 유도합니다. 자기 삶과 신앙과의 문제를
스스로는 어려워도 단원들과 이야기하려고 하면 되는데, 마음을 안
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 연복씨가 마음을 열었고, 제가 무척 감복을 받았다.
그런 단회가 되어야 대종사님의 교법을 그대로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법회에 설교를 듣는 것이 원불교 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법이 설교 위주로 진행이 되어서, 저는 양에 안 차고,
결국은 교화단 위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을 보면 학교, 직장, 가정 일이 다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마치고
교당 일을 오게 된다. 그래서 교당 일을 마치 중요한 일을 다 마치고
남는 시간에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장타원님도 고민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런 분들이 공적인 일을 우선시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타원 :
나도 그랬다. 공적인 일이 있는데 사적인 일이 겹칠 때, 스승님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실 약속은 사적인 것이 선약이었고 공적인 것은
뒤의 것이었는데, 이 약속을 안 지키면 신용이 떨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여쭤보았더니 그 어른께서 선공후사라고 하셨어요.
그 이후부터는 동창회 일이든 남편 약속이든, 먼저 공적인 것을 먼저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봉공회 일을 하면서 저의 재능을 발휘하게 되어서, 동창회
일도 굉장히 효율적으로 하였습니다. 역시 봉공회 일 하면서 일머리가
터지니까 다른 일도 능란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소중한 시간을 같이 해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큰 빚 같습니다.
밝은 표정으로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이핑 : 순명부처, 아름다운 정원
편 집 : 아름다운 정원
첫댓글 참으로 아름답게 사신 분이네요. 부럽습니다. 생의 아픔은 설명이 없으셨지만, 반드시 있으셨을겁니다. 그러나 유연하게 힘차게 꾸려가신 모습은 여생을 이뿌게 승화된 아름다움으로 남게 보입니다. 가뵙지 못하고 교우의 글로써 접하는 지금, 옛친구를 만나듯 반가움으로 벅차오릅니다. 거듭 고맙고 감사합니다~!
저도 신심이 매우 깊고 항상 정열적으로 사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발바닥에 땀나게 쫓아가야 겠네요 ^^b
정원 교우님, 늘 챙겨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실력이 부족해서 일찍 올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제 실력이 늘 때까지 많은 분들이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실듯 합니다. 순명 교우님도 항상 고맙습니다.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