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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4년 7월 11일 토요정례법회 ○
청년강연
'원불교를 만나서'를 주제로 '8단 허석 교우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김제원 교무님 설법
허석 교우 강연 잘 들었죠?
이중에는 최근에 입교한 분들도 계시고
어려서부터 입교하셔서 원불교를 다니신 분들도 계시고
다니다가 안다닌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라 봅니다.
각자 다른데 허석 교우님 경우는 아버지가 교무님입니다.
아버지가 전무출신이신 분이 우리 교당에 꽤 많습니다.
홀홀단신 전무출신이신 경우도 있고, 가족이 전무 출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어떠한 마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신심이 있거나 또는 전무출신이면 좋습니다.
유미교우나 석 교우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군대 다녀와서 전무출신을 결정하고 좀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까 이지현교우 친구가 학교 선생님인데 와가지고 하는 이야기가 필요성을 느끼겠다고 하셨습니다.
원불교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느끼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심이 충천하는 사람도 있고, 충천했다가 가라앉은 사람도 있고, 충천하려고 대기 중인 사람도 있습니다.
석 교우는 아버지의 뜻에 불만이 적다는 것을 좋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고심하는 모습을 보고 효심 하나로 쭉 해왔다는 것이 효자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또는 어머니를 위해서 어떤 것을 쭉 한 것이 있습니까, 심부름이나 공부를 한 것이 있습니까.
석 교우는 그런 쭉 했던 것이 참으로 효심이 있는 것이다.
아까 본인도 말했지만 몸이 아프면 사람이 예민해지면서 소극적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소극적이고 아픈 사람이 건강해지고 어린이 훈련이라든가 지도자 훈련 등 경계를 만나면서 달라진다는 거죠.
여기에 계신 어떤 분도 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나무도 작은 새싹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원불교의 진리 중에 대의 진리를 신앙하면 나와 부처님이 둘이 아니구나, 부처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소의 진리를 알 것 같으면 나의 현재는 과거부터 내가 과거에 이렇게 길들여져 왔구나, 나는 개성이 있구나,
이렇게 마음이 있어지는구나, 능선능악하구나, 능대능소하구나 밝을 수도 있고 어두울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더욱이 유무자리를 알 것 같으면 얼마든지 변화될 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중에 보면 어떤 계기 하나로 강급 하기도 하고 진급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자력과 타력의 관계로 볼 수 있는데, 본인이 그것을 상처로 갖고 있느냐 아니면 진급의 기회로 삼고 있구나 하는 것으로
진강급의 기회를 삼을 수가 있습니다.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어릴 때의 상처가 지금도 힘들게 하고, 잠 못 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말 못할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의 본래는 원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마음공부를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변화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과를 통해서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 달게 받을 줄 알고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린이 훈련이 다음 주로 다가왔는데 변산으로 갑니다.
여러분들 주변 어린이들에게 소개해서 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에게 그러한 다양한 경험을 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자연 환경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고등학교까지 교당을 다녔는데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 강급을 했다는 거죠.
우리가 마음공부를 법에 바탕해서 하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한울안 신문을 보니 20년만에 교당에 찾아온 사람이 신입교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꿈밭 활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가 사라지고 나서 20년만에 와서 신입교도 훈련을 받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느낀점이 많다.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결혼식장만 가면 화가 납니다. 원불교 통해 인연 만나서 교당에서는 안모이고
뒤로 가서는 모임을 갖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주 괴롭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여기서 인연을 만나가지고 사라지지요.
갑자기 결혼식 되면 나타나가지고 사람 동원하는 몰상식한 모습들을 보면서 내 능력을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 사람이 의리가 있고 대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릴 때는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크고 나면 원불교가 뭐하는 집단이냐, 대종사님의 법을 배우는 집단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노래를 하고 춤을 춰도 대종사님이 깨달으신 진리와 그 법을 통해서
우리가 마음의 대자유, 영원한 행복, 안심입명의 길을 찾아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엉뚱한 짓을 하면 곤란합니다. 결혼식장에서나 나타나는 모습은 좋지 않습니다.
눈치 보면서 뒷구멍으로 빠지는 모습은 좋지 않습니다.
사람은 대의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직장에서는 열심히 하고 여기서는 모른체 하는 모습은 안좋습니다.
생명을 바치고 하는 집단에 와서 그렇게 배은을 하면 어디 가서 사은님의 호렴을 받고 도움이 되겠습니까.
원불교 뿐만이 아닙니다. 어디가서도 대의가 있고 뒤끝이 좋아야죠.
미꾸라지같이 단물만 빨아 먹는 모습은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지요. 자기에게 속아서입니다. 몰라서 그럽니다. 욕심에 놀아나고 마군이 장난에 놀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력적 신앙에서 자력적 신앙으로 돌아와 법으로 해야 합니다. 법이 생활 속에서 떠나면 곤란합니다.
아까 어떤 사람이 자기 동생이 교구 부회장까지 했었는데 지금은 천주교에 갔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 열심히 활동만 하고 법을 모르기 때문이죠. 거기가 더 재미있다고 합니다.
대종사님께서 예수님이 진짜로 깨치신 분이라 했습니다.
국한이 좁기를 한가, 일생을 공으로 사는 등 쭉 상황을 봤더니 그 사람이 확실히 성인이라는 것을 확신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교회를 다닐 때 저희 아버지께서 원불교 오라는 소리 안하셨습니다. 제대로 다녀라. 그러셨다.
무슨 이야기이냐, 여러분 원불교에 오면 원불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원불교가 말하는 진리와 법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껍데기입니다.
처음에는 석 교우도 여기서 몇 달간 헤맸다고 합니다.
제가 외국어로 말하는 것도 아닌데 어려웠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어를 공부해도 몇 년을 해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공부한다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과 신심이 있어야하고 공부심이 있어야 하고, 법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
래야 스스로 자기가 경계를 요리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법의 눈을 뜨지 않으면 항상 손님입니다.
어떻게 매 법회가 행복할 수가 있겠어요.
저도 교무하니까 계속 행복할 것 같아요? 때로는 이럴 때가 있고 저럴 때가 있는데 쭉 해나가는 것은 뭐지요,
그것이 바로 서원과 신심, 법의 힘입니다.
신심이라는 것은 딱 정해버렸다는 거죠, 서원이라는 것은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이 뭐냐는 말이지요.
대종사님 당대에 마령지부 지부장이 왔습니다.
대종사님이 ‘지부장 왔는가, 요새는 어쩐가’ 합니다. 옛날에 자기 마누라가 마령교당에 갈 때 해꼬지 한 장본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이 우려먹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대종사님을 닮았습니다.
사람이 역사를 통해서 보면 참회록을 쓴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도 아쇼카왕도 그렇게 신심이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역사 이래로 보면 아주 못된 사람도 그 에너지에 법이 들어가면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이 법이 들어가야지 상황 상황 속에서 성장하는 계기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짜부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중에 다음에 합니다. 그런데 관계형 사색형들 특히 그러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기회는 항상 오지 않습니다.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제가 완도에 발령 받아 갔는데 완도의 장점을 발휘해서 최대한 열심히 하자고 했습니다.
읍내에서 수련원까지 출근할 때 해변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 장소 장소에서 최선을 다해 배우자.
아버지가 선생님이었는데 저는 문과라서 모든 것을 잘 몰랐습니다.
60억짜리 건물과 20~30명 직원들을 다루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비가 오면 비가 새고 생전 안해본 일들을 해보았습니다.
실내화만 해도 600개를 삽니다. 돈 2억을 손에 쥐고 2달도 안되어 다 쓰게 됩니다. 그렇게 큰 건물입니다.
그렇게 안해본 일이니까 최대한 잘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덕에 지금 교당을 리모델링 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눈이 티여서 이렇게 은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장소 그 장소에서 최대한 연마를 해야 하고 그 일 그 일에 일심을 하는 공부를 해내야 합니다.
교전만 잘 보는 것이 공부가 아닙니다. 그 일 그 일에 까닭 있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산의 사장인데 공무원 하다가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평상시 공무원을 어떻게 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사장을 공무원 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미리 준비를 하고 연마를 한 사람은 엄청난 재산으로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미래학자가 말하기를 여러분들의 나이에는 평균 직업이 10번이 더 바뀐다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원업과 부업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서대원 선진님이 달마 문하에 혜가 대사가 팔을 끊은 것을 흉내 내어 손을 끊었습니다.
신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이 불러다가 너 일하기 싫어서 짤랐지?
달마대사는 혜가 대사를 보면서 신심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은 너 일하기 싫어서 짤랐지 하고 혼냈습니다.
한번은 대종사님이 양산법사님께 너 누가 제일 도인 같으냐 “서대원선진입니다.”
그날 저녁에 일하기 싫어서 손을 자른 사람을 도인이라고 했다고 혼냈습니다.
한번은 숭산님이 방언공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이 방언 공사가 큰 의의가 있다고 하십니다.
부처님 당대에는 칠가식을 했다는데 그것을 안했다면 불교는 세계로 퍼졌을 것이다.
그 말은 자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불교는 탁발을 통해서 일하지 않고 얻습니다. 원불교는 일해서 얻습니다.
태국은 신심이 장해서 탁발이 잘 됩니다. 미얀마는 가난해서 탁발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미얀마 스님이 태국에 가서 탁발했다고 합니다.
원불교 정신은 일하기 싫어서 손 잘랐다고 혼내는 문화입니다.
여러분들이 원불교 정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습니다.
어떤 것이 더 진짜고, 어떤 것이 더 미래사회에 환영을 받을 법인지,
대종사님께서 서대원선진님께 네가 손을 잘라서 너 같은 사람 많이 나오면 좋겠다,
한편으로는 장하시겠지만 미래를 바라보시고 혼내는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나의 후배가 나를 따라한다면 이 문화가 어떻게 되겠는가.
조직이 잘 되려면 선후배간에 흘러들어가는 문화가 중요합니다. 어떤 문화이냐 하는 것이 흥망을 좌우합니다.
아까는 예성교우님이 근무하는 복지원이 800명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몇 십년간 수녀님들이 일생을 받쳐 노력해서 일궈온 일입니다. 하지만 똑똑한 사람이 한 명도 안나타났습니다.
왜 그러냐, 처음 문화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문화나 행사 하나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안암교당은 어떤 문화입니까.
법회 일찍 오는 문화고 교우님 호칭에 유념하는 문화, 훈련 좋아하는 문화, 화요공부방 열심히 하는 문화,
심고하는 문화, 사경하는 문화, 헌배하는 문화입니다. 이것이 재미없을 것 같지만 이곳의 근간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제가 전농에서 첫 법회를 보면 4명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설교했습니다.
그때 회장에 하는 말이
오늘 제가 회장을 그만두려고 왔는데 교무님 말씀을 듣고 나니 회장을 해야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냥 설교를 대충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법회를 해도 숫자놀음 하지 않습니다. 내용 있게 하려고 합니다.
아까 교구 부회장을 한 사람이 천주교로 왜 갔느냐. 그분은 원불교 법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활동만 했습니다.
군대 가서도 챙기지 않았습니다. 객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여러분들이 속한 단체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단체에서 쏙쏙 빠져나가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다 나같이 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심입니다. 그
사람은 시집갈 때 장가갈 때 직장을 구할 때 걱정이 없습니다. 공심이 있는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공심이 있으니까 그 사람을 다들 구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정말 은혜라고 해야지요.
얄팍한 계산속으로는 큰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한국전쟁당시 인민재판에 올라갔습니다. 한사람이라도 죽이라고 하면 죽입니다.
그런데 한사람도 죽이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동네가 얼마나 큰 동네인지 모릅니다.
그 밑에 데리고 있는 하인도 많았습니다. 그 사람 중에서도 우리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죽이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인민군들은 부르주아니까 죽이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죽이라는 사람이 없어서 죽이고 싶었지만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평상시에 인덕을 쓴 덕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적당히 하면 안됩니다. 물은 100도가 되어야 끓습니다.
자기 스스로 천만 혼신을 다하다 보면 내가 나에게 감동이 옵니다. 그래도 주위 사람은 나를 시비합니다.
그런데 내가 적당히 해가지고 누가 나를 인정해주겠습니까.
오해가 풀려야 진정성이 드러나야 중생들은 인정을 해줍니다. 좋게 평가하는 경우를 보았습니까.
남한테 인정받기가 어렵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인정을 받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인정받는 마음은 곧 공심입니다. 공부삼아서라도 공심을 길러야 합니다.
공심이 박수 받는 집단에 와서 공심을 발휘하지 못하면 어디서 발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면 내 가슴이 영혼이 허전할 것입니다.
그것은 내 스스로가 공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나를 만족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남에게 인정을 받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나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욕심이 왜 없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공심 발휘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누구나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허석 교우가 아버지가 교무님이니까 알아서 공심내고 서원 세웠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개령이 따로 있고, 다 육신과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면에 알뜰한 공심과 법이 들어가서 가능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질문이 있으시면 하십시오.
질문과 답변
Q. 문혜은교우님 : 공심과 책임감의 차이는?
A. 교무님 :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흔히 쓰는 용어이고 공심은 많이 쓰이지 않지요.
국한의 차이다.
책임감은 맡은 책임만을 한다는 것이고. 공이라는 것은 전체를 말합니다.
공이라는 것은 빈 마음입니다. 비었기 때문에 전체를 수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빈 마음에는 모든 것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천지 이전에 생긴 것입니다.
공심이라는 것은 이치에 바탕한 것으로써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는 공심이라는 것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바로 빈 마음입니다. 즉 작은 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 것의 반대가 사(私)입니다. 사라는 것은 소아(小我)의 나를 사라고 합니다.
각각의 사람이 있지만 몸이 나뉘어져 있을 뿐이지 마음의 세계에서는 하나입니다.
사실이 뭐냐 사실이 공(公)인것입니다. 비었기 때문에(空) 하나입니다.
원래가 하나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공심이라는 것은 내가 좋은 마음으로 살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살자는 것입니다.
공익심이다 봉공이다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신앙과 수행이 만나면 공이 됩니다.
공즉도생(公卽道生)
공즉덕생(公卽德生)
빈 마음에는 거기서 도가 나옵니다.
그 도가 실행되면 덕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공변된즉 법이 나옵니다. 모두가 행하고 따를 법이 나옵니다.
대공심(大公心),대공심(大空心)이것이 일원상의 진리이자 신앙과 수행의 말입니다.
도라는 것은 텅 빈, 그것이 한 기운이 동해서 음양의 이치로 순환하는 것이 바로 도다.
그런데 그것을 전체 하나로 같이 하나가 돼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공변될 공, 공이다. 이것이 덕을 나투는 것이다.
나의 실체가 바로 빈 마음(空), 우주와 하나가 된 전체된 마음(公)이다.
Q. 박순명교우님 : 어떤 일을 선택을 하면 선택 전에 연마를 해서 진리에 맡겨도 보는데
선택을 하고 나면 불확실한 상황이 되어 괴로운데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A. 교무님 :
어떤 걸 하다보면 안풀리지요 그것이 이치입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공부로 삼느냐 하는 것에서 법력증진의 기회가 될 것인지 상처를 더욱 깊에게 만드는 일로 삼느냐 하는 것에서
마음공부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계가 우리를 긴 터널 속으로 빠뜨릴 수고 있고 크게 살릴 수도 있습니다.
Q. 김호겸교우님 : 공심과 책임감에 대해서 국한의 차이라 하셨는데 자기가 할 수 있는 책임감을 벗어나는 것을 맡아서
부담만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지.
A. 교무님 :
똑같은 일을 해도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하는 것은 다릅니다.
빈 마음이 안되면 계산적 마음이 됩니다.
또 하나는 정각정행인데. 나의 힘과 에너지 역량을 파악해야 합니다.
과도하게 하면 아파서 보따리 싸고 떠나죠.
공심에 바탕해서 삼학으로 수양 연구 취사를 들이대서 취사가 공심으로 같이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좀 다릅니다. 약간 무리가 되어야 좋습니다.
사색형의 경우는 무리를 하면 안합니다. 그러니까 진척이 느립니다. 배울 수 있는 기회에 안합니다.
교당에 온 사람에게 중앙을 시킵니다. 그런데 안해봤으니까 안한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발전이 없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운동에서도 조금 버겁게 해야 운동이 됩니다.
경계에 대해서 도망과 피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젊은 시기엔 좀 큰 경계도 해야 합니다. 큰 전쟁을 앞두고는 작은 전쟁에서 좀 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큰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떨어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교화를 생각했는데 완도를 가라합니다. 그러면 그런대로 배워야 하지요.
내가 만약 불만을 가지고 했다면 저는 못 배웠고 지금의 안암교당은 없습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리의 능력은 웬만하면 적응합니다.
어떤 사람이 담이 막혀 못 넘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누가 잡으로 쫒아오면 넘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능력입니다.
젊은 시기에는 고생을 사서도 한다는데 좀 버거운 일을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편하게 산 사람은 경계를 만나면 죽네 사네 합니다. 어렵게만 산 사람은 성공과 돈에 대한 욕심을 놓지 못합니다.
어려운 것도 해보고 쉬운 것도 해보고 다양한 경험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당에 있다가 보면 회장의 역할이 올 수도 있고 다양한 역할이 있게 됩니다.
멀리보고 크게 보세요.
어릴 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누가 나보고 뭐라고 해도 이겨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면 그것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어릴 때는, 자력이 약할 때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만 받으면 은혜를 하나도 모르고 자기 이익만 쫓아다니려고 합니다.
누가 나보고 충고를 하면 싫어하지 마시고 나의 선생으로 알아야합니다.
충고하는 사람을 피해 다니는 사람은 앞으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됩니다.
충고를 감수할 정도만 되어도 그 공부는 일취월장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충고해주세요라고 말할지언정 자기에게 좋은 말 해주는 사람만 쫓아다니지 마세요.
A. 박원허교우님 : 반대로 자기가 기뻐서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일을 벌였다가 나중에 이도저도 아닌 게 되면 어떻게 하나요.
하나에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Q. 교무님 :
그것은 정답을 말하기는 어렵고 그때 어떻게 공부 자료를 삼을 것인가 그것만 놓고 보고 실패냐 성공이냐를 바라볼 것인가
환경을 초월해서 바라보고 그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달라집니다.
그리고 수시변역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얼른 조절을 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바뀌었으면 얼른 맞춰야지요. 상황을 보아서 판단을 해줘야 합니다.
대자리에 근간하여 소자리에서는 상황 따라 변화가 됩니다.
그리고 원칙은 미리준비입니다.
여러분 충고를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는 존재가 비참해지는 것을 맛보고 그래서 내가 별것 아니구나 하는 것을 맛보기도 하고 그래야 합니다.
큰 경계를 겪어 보면 그만큼 큽니다.
조금 버겁다하는 정도로 해보는 것이 딱 좋습니다. 그러면 쭉쭉 커나갑니다.
같이 일하던 여자 간사가 양말도 안 빨고 밥도 안 해보고 곱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빨래를 울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 옆에 고생하고 자란 사람은 노래를 부르면서 빨래를 합니다.
왜 그래요, 그래서 훌륭한 교육은 자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안 길러줘도 내가 찾아갖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은혜로운 강연과 은혜로운 설법과 은혜로운 후기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