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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순례를 다녀와서...
월성중학교 2학년 6반 김민욱
제 1장. 경북의 북쪽, 그곳의 아름다움.
아침의 서천둔치는 매우 덥다. 수학여행 이후 여기 또다시 온다. 곧이어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번에 동행하시는 선생님은 권종훈 선생님, 류우현 선생님, 최경주 선생님, 권세라 선생님이시다. 옆에는 여수에 가는 과학부도 있었다. 이번에 가는 곳은 경북 북부 일대와 강원도, 충청도 지역. 예로부터 태백산맥이 감싸고 있어서 뛰어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한참을 달려서 나온 첫 번째 목적지는 김천 직지사. 직지사라는 이름은 아도화상이 자기가 가리키는 곳에 절을 지어라라는 말에서 직지(直指)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직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승리를 기원했던 사찰이며 왕건, 혜종, 정종, 광종 모두 이 사찰에서 불공을 드린 걸로 보아 직지사는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사명대사가 출가한 절이기도 하다.
제일 처음 동국제일가람 황악산문이라는 큰 문을 지나서 버스에 내린 후, 경내로 들어갔다. 올라갈 때 문만 3개 정도 통과한 것 같다. 그 중 만세루는 크고 웅장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직지사는 딱 들어서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양옆에 쌍탑이 놓여 있다. 이 탑은 직지사 것이 아니라 문경의 어느 폐사지에서 갖다 놓은 것이다.
(김천 직지사. 쌍탑과 대웅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웅전 옆을 지나서 범종각에서 설명을 들었다. 범종각에는 총 4개의 악기가 있는데 북, 범종, 목어, 운판이다. 목어는 어류들을 구제, 운판은 새를, 북은 축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친다. 마지막으로 범종은 중생들을 위해 치는 것이다. 이것들을 사물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유래한게 사물놀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구제하려 부천미의 자비로움이 새삼 놀라울 뿐이었다.
옆으로 이동하면 나한전이 보인다. 나한전 앞에도 탑이 하나 있다. 나한전에는 수백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 중 한 분만 서 계신다고 한다. 이 분을 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사진 상 보이니 이거 보신 분들은 다 아들을 낳는 걸까?)
(나한전을 자세히 보면 서 계신 분이 한 분 보인다. 빨간 동그라미 안에 확실히 서 계신다. )
나한전을 보고 청풍료(박물관)에 들르려고 했으나 문이 잠겨져 있어서 가지 못했다.
직지사를 지나서 문경으로 간다. 오늘 일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문경은 옛날부터 과거시험 볼 때 이용하던 문경새재가 있고,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 시절 성행했던 석탄 광산업이 발달했던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석탄 채굴이 한창 성행했을 때는 동네가 워낙에 잘 살아서 문경집 똥개는 천원짜리 지폐를 떨어뜨려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현재는 폐광된 석탄 광산을 이용해 여러 가지 관광 사업을 진행 중이다. 문경에서 처음 도착한 곳은 진남 레일 바이크. 여기서 점심을 먹으면서 강가에도 가보고 하며 조금 쉬었다. 이 레일바이크 주변은 경치도 꽤 좋았는데, 저 멀리 고모산성도 보이고 강도 경치가 좋았다. 애들은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뜨고 있었다.
한 한 시간 쯤 쉬고 나서 드디어 레일 바이크를 타러 갔다. 족히 20대는 훨씬 넘어 보이는 많은 자전거가 줄줄이 서 있었다. 우리 조는 레일바이크에 탑승 후, 페달을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옆으로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다.
(레일바이크 탑승. 동효와 나, 창근이, 그리고 문화재 훼손의 전과(?)가 있는 임태훈이 탑승했다.)
반환점은 철로가 끊긴 지점. 하얀 천막은 더위를 피하는데 그리 도움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레일 바이크를 거꾸로 돌려서 다시 시작점으로 달린다. 자꾸 앞뒤 간격이 안 맞아서 여러 마찰이 있었다. 그래도 꽤 재미있었다.
(중간마다 터널도 두 개 정도 지났다. 버려진 철로를 꽤 잘 이용한 것 같다.)
레일바이크를 신 나게 탄 후, 이번에는 문경 석탄박물관으로 갔다. 폐광을 이용한 또 다른
볼거리다. 박물관은 꼭 연탄처럼 생긴 둥근 원기둥 모양이었다. 내부는 꽤 커서 각종 석탄 산업과 관련된 물건들과 여러 광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문경 석탄박물관. 원통 모양이다.)
(옛날에 썼던 물건들. 중간의 심벌마크는 꽤 낯이 익다.)
석탄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315년경 이탈리아에서 처음 나타나며 기원후 3세기경, 중국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석탄을 채굴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몇몇 실학자들의 석탄의 이용가치를 모르는 사회를 비판하는 글이 보이기도 한다. 그 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삼척, 문경 등 강원도 일대와 경북 북부지방에서 석탄 채굴이 성행했으나, 현재는 사양산업이 돼서 광산 대부분이 폐광되었다.
박물관 뒤쪽에는 실제 광산이 남아 있다. 광산 내부는 습하고 시원했다. 안에는 광산 내부에서 쓰던 기구와 광부 밀랍인형을 전시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면 광부촌을 재현한 곳이 나온다. 이발소와 집들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은성갱. 박물관 뒤쪽에 있는 실제 탄광이다.)
(탄광 내부. 꽤 넓다. 시원하지만 물이 떨어질 만큼 습하다.)
(광산촌 재현장. 이발관 목욕탕, 집들이 생생히 재현되어 있다.)
드디어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간다. 숙소는 문경유스호스텔인데 앞에는 시원한 계곡이 있었다. 조금 얕았다. 거기서 물장난을 하며 재미있게 놀았다. 다만 내 슬리퍼는 완전히 떨어져서 버렸다. 그리고 물은 엄청나게 차가웠다. 물속은 물고기들도 보일 만큼 깨끗했다. 또 상류 쪽은 깊어서 선배들은 다이빙(물론 위험)도 했다.
(계곡물 속.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험쳐 다닌다.)
(권종훈 선생님의 물세례. 애들이 도망치고 있다.)
즐거운 물놀이 후,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저녁을 먹었다. 유독 2학년 조만 물을 붇는 불판을 가져와서 그런지 연기가 심하게 났다. 그래도 맛있게 잘 구워먹었다.
(저녁에 다 같이 삼겹살 을 구워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권종훈 선생님 사진제공)
우리 방은 처음에는 좁은 방으로 갔다가 다시 넓은 방으로 이동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비로소 잘 수 있었다. 내일은 일정이 많아 기대된다.
아
-여정-(2012. 7. 23. 月)
황실 서천둔치→ 경산 휴게소→ 선산 휴게소→ 김천 직지사→ 진남 레일바이크→ 문경 석탄박물관→ 문경새재유스호스텔
제 2장. 삼 도(道)의 유산들.
아침 6시. 해는 떠도 몸은 일어나지 않는 시각. 이런 시각에 일어나서 문경새재 산책에 나선다. 조금 늦게 나와서 그런지 반 정도는 벌써 가버린 후였다. 그래서 권종훈 선생님과 몇몇 학생들이 뒤따라 갔다. 아침 일찍 간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추풍령, 죽령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는 주요 관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문경새재는 선비만 지나갈 수 있는 관문이었다. 특히 과거시험을 볼 때는 반드시 이 관문을 지나갔다고 한다. 추풍령과 죽령을 지나가지 않은 이유는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해서 피했고, 죽령은 쭉 미끄러진다 해서 지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문경새재는 굉장히 중요한 관문임에도 임진왜란 때 어이없이 뚫려버린 곳이다. 그 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숙종 때 여러 관문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제1관문은 주흘관, 제2관문은 조곡관, 제3관문은 조령관이다. 우리는 주흘관만 가기로 했다. 계곡을 따라 가다 보면 생태공원이 나오고 거기서 더 가면 드디어 주흘관이 나온다.
(문경새재 주흘관. 선생님께서 조곡관은 이보다 더 짧다고 하신다.)
주흘관 옆에는 물이 흐르도록 한 굴다리가 있는데 아마도 최근에 만든 것 같다. 주흘관을 지나면 비석군이 보인다.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건 철로 만든 비석이다. 으레 비석 하면 돌로 만든 것을 떠올리지만, 철로 만든 비석도 있다. 다만 일제강점기 공출의 대상이 되거나 고물장수들에 의해 그 수가 많이 줄었을 뿐이다. 아무튼, 처음 보는 철비가 신기하기만 하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촬영 세트장이 나온다. 대왕세종, 태조 왕건, 천추태후 등, 여러 사극 드라마들을 촬영한 장소이다. 촬영장 내에는 광화문과 육조거리들이 있다. 특히 광화문을 보니 진짜 서울에 온 기분까지 들었다. 육조거리에는 일곱 개의 관아가 있는데, 이조, 공조, 병조, 형조, 예조, 호조의 6조와 의정부가 그것이다.
(광화문. 누각이 조금 아쉽지만, 광화문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한양 육조거리. 마치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한것 같다.)
조선시대로 갔더니 이번에는 신라인가. 운 좋게도 이번에 새롭게 방영되는 드라마 '대왕의 꿈' 촬영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갑옷으로 무장하고 제작진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갈문왕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대왕의 꿈 촬영차 뒤에서 배우들이 분장하고 있다. 분장을 해서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대왕의 꿈 방영하면 꼭 봐야겠다.
(대왕의 꿈 촬영 현장. 많이 더울 것 같다.)
(대왕의 꿈 배우들. 분장을 해서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곧바로 문경을 벗어나 영주로 간다. 영주는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유명하다. 첫 번째 목적지는 바로 이 부석사다. 부석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화엄종을 전파하기 위해 세운 화엄종찰이다. 그중에서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부석사는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야 한다. 은행나무가 쭉 이어진 가로수 길이 멋있었다. 가을에 오면 절정일 듯싶다. 은행나무 길을 따라 걸으면 쌍탑이 두 개 보이고 몇 개의 문과 계단을 지나면 무량수전이 나온다. 무량수전은 세월의 무게에도 멋있고 늠름했다. 무량수전은 주심포양식으로 기둥 위에 포가 하나만 얹어져 있는 양식이다. 주로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나타나는 양식이다. 그리고 배흘림 양식으로 기둥 중간이 굵어서 안정감을 준다. 무량수전 내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불상이 광채를 내며 자리하고 있다. 아쉽게도 건물 내부는 촬영 금지라서 찍지는 못했다. 그리고 좌측에는 부석이라는 돌이 있다. 여기에는 의상대사를 사랑한 한 당나라 처녀가 의상이 신라로 가자 물에 빠져 죽어 용이 되어 신라로 안전하게 가도록 도왔으며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훼방을 놓았던 도적들을 쫓아내기 위해 돌로 변신해 의상이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부석 밑에 명주실을 넣으면 그대로 통과한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경주 남산의 부석과 흡사하다. 전설이 서로서로 비슷한 걸 보니 신기하다.
(은행나무 길. 입구에 보면 봉황산이라는 비석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입구. 뒤로 무량수전 누각이 보인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의 양식으로 풍만함이 느껴진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본 전경. 경치가 빼어나다.)
(부석. 권종훈 선생님께서 설명하시고 계신다. - 김민재 사진제공)
무량수전 관람 후, 위로 올라간다. 위에는 여기 부석사 무량수전만큼이나 오래된 조사당이 있다. 무량수전과 더불어 국보로 지정된 조사당 역시 주심포 양식을 가지고 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가 죽을 때까지 공부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 여기에는 선비화가 한그루 자라고 있는데 이 나무는 의상이 지팡이를 꽂으니 그대로 나무가 되어 자랐다고 한다. 흙도 별로 없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조사당. 작지만 오래된 건물이다. 그 옆 철조망 안에는 전설의 선비화가 있다.)
조사당 관람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보면 한 문이 보인다. 여기에는 태백산 부석사라고 적혀있는데, 대부분 사람은 여기 산을 소백산으로 한다. 하지만 소백산이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태백산을 나누어서 정기를 끊기 위해 만든 잘못된 이름이다. 원래는 소백산 역시 태백산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함백산 역시 태백산에 속하는 봉우리이다. 즉, 태백산 부석사는 맞는 표현이다.
(부석사 앞에서 단체사진. 태백산 부석사라는 글자가 선명히 보인다. - 권종훈 선생님 사진제공)
부석사 관람을 마치고 이번에는 영주의 또 다른 상징, 소수서원과 선비촌으로 간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원래 명칭은 백운동서원이지만 왕께서 현판을 내려준 사액서원이 되면서 명칭이 변동되었다. 소수서원은 주세붕이 창건하였고 이황 때 사액서원으로 바뀌는 등 크게 발전한다. 그리고 여기 이 소수서원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바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어른들의 장난이다. 당시 소수서원에는 공부를 안 하고 놀기만 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다가 데려온 몸종이나 동네 아가씨와 바람이 나 아기를 가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수서원 옆의 청다리에 아기를 데려다 놓고는 부모님께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뻥을 치고 키워달라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성인이 되면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현재 이 청다리는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어서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소수서원 근처에는 선비촌도 있다. 여기에는 각종 고택이 밀집해 있다. 그리고 소수서원박물관에서는 여러 유물도 전시하고 있다.
(형들 사진. 선비촌 속 선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고택. 이 외에도 많은 고택이 있다.)
(소수서원박물관 내의 회헌 안향 초상화. 국보로, 진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선비촌 관람 후, 이제 소수서원으로 향한다. 선비촌 바로 옆의 소수서원은 원래 숙수사라는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폐사가 되었고, 그 자리에 소수서원이 들어서게 된 것이 지금이라고 한다.
소수서원은 계곡 옆에 자리해서 그런지 조금 시원했다. 공부 하다가 여름이면 잠시 물에서 멱을 감기에는 좋은 것 같다. 그리고 규모는 옥산서원과 비슷한 것 같다. 은행나무가 많아서 그런지 가을에 오면 멋있을 것 같다.
(소수서원 전경. 왼쪽 건물에는 옛날 이름인 백운동이 적혀있다.)
(계곡의 경자바위. 흰색으로 백운동, 붉은색으로 경자를 새겨서 공경을 강조하였다.)
소수서원과 부석사의 영주를 벗어나 충북 단양으로 간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가는 것이다. 단양은 절경이 빼어난 곳으로, 많은 석회동굴을 보유하고 있는 도시다. 석회동굴이 많아서 그런지 시멘트 공업이 발달했다. 그래서 가다 보니 큰 시멘트 공장들이 눈에 띈다.
단양의 첫 번째 목적지는 고수동굴. 단양의 대표적인 동굴이다. 입구 근처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고수동굴로 들어간다. 입구는 꼭 동네 입구 같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면 큼지막한 동굴 입구가 나온다.
동굴 내부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작은 종유석부터 몇m가 넘는 석주까지! 자연이 만든 거대한 궁전이었다. 동굴 내부를 관람하는 내내 말없이 사진만 찍었다. 역시 자연은 인간보다 훨씬 큰 힘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꼭 가족끼리 함께 오고 싶다.
(밑의 사진들을 나 때문에 성류굴에서 플래시 못 터트린 친구에게 바친다. 미안.)
(동굴 입구. 동굴 입구치고는 별로 안 어울린다.)
(도담 삼봉. 다음 목적지가 벌써 나왔다. 정말 닮았다.)
(동굴 중간에서. 뛰어난 절경에 사람들은 넋이 나간 것 같다.)
(동굴 출구 직전. 이것이 정말 물과 석회암으로만 이루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동굴 구경을 마치고 단양의 두 번째 코스인 도담삼봉으로 가려고 했으나, 시간 관계상, 그냥 차 타고 지나가면서 보기로 한다. 도담삼봉은 단양 8경 중 하나로 남한강이 흐르는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세 봉우리가 기이하게 서 있다. 이 단양은 정도전의 출생지로도 유명한데 바로 정도전의 호가 삼봉이다. 선생님께서는 아마도 정도전이 이 도담삼봉의 이름에서 호를 따왔다고 하신다. 정도전은 고려말의 신진 사대부로서 조선 건국에 가장 주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 후, 많은 법전을 펴내고 조선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신하 중심인 내각책임제를 원하던 정도전과 왕 중심의 정치를 원하던 이방원과 부딪혔고, 결국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 정도전을 생각하며 도담삼봉은 창밖으로 지나가 버린다.
(도담삼봉. 중간 봉우리의 정자는 올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갈 수 있으면 올라가 보고 싶다.)
단양도 지나서 이번에는 강원도 영월로 간다. 경상, 충청, 강원 삼도를 지나가며 답사를 하는 셈이다. 영월에서 처음으로 간 곳은 청령포. 단종의 유배지이다. 단종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가 삼촌인 수양대군에 의해 계유정난으로 상왕이 된다. 그러나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들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여기 청령포로 유배된다. 그 후, 금성대군이 복위운동을 하다가 실패했고 또다시 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되어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다. 단종은 그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한다. 사인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단종의 시체는 엄홍도가 묻었고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된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이고, 뒤에는 육육봉이라는 절벽 같은 산이 막고 있어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창살 없는 감옥이다. 현재도 배가 없으면 건너갈 수 없다. 그래서 청령호와 관풍호가 수시로 관광객을 나른다.
(청령포 전경. 현재도 다리가 없어서 유일한 교통수단인 배로 이동한다.)
배를 타고 내려서 보니 온통 자갈밭이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가면 울창한 소나무숲이 나온다. 이 소나무 숲 가운데 단종이 유배 시절 머무르던 집이 나온다. 안에는 단종의 밀랍인형이 있다. 그리고 옆에는 단종이 올라가 시간을 보냈다는 관음송. 나무의 갈라진 틈에 단종이 앉았다고 한다. 관음송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봤다는 것에서 관(觀),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는 데에서 음(音), 그렇게 관음송이다. 이 관음송은 나라의 변고가 있을 때 마다 껍질이 검게 변한다 하여 마을에서는 신성시되는 나무라고 한다. 아마 이 관음송만이 외로운 단종의 유일한 친구였던 것 같다. 더 위로 올라가면 망향탑이 있는데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다.
(단종 어소. 최근에 복원된 곳이다. 집은 크지만, 사람은 한 명. 왠지 더 쓸쓸해 보인다.)
(단종과 관음송에 대해 설명하시는 권종훈 선생님. 뒤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여러 유적이 나온다.)
청령포를 지나 또 다른 단종 유적지, 장릉으로 간다. 장릉은 단종의 능으로 엄홍도가 단종의 시체를 묻을 때 여기만 한겨울에 눈이 쌓이지 않았다고 한다. 후대에 왕으로 복위되면서 왕릉도 정비되었고, 현재는 조선왕릉으로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시대 왕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수도권에 있지 않은 능이다.
유물전시관에서 위로 올라가면 단종의 능인 장릉이 보인다. 비교적 규모는 작다. 단종은 두 번의 복위 운동을 거쳤다. 그 중, 첫 번째는 사육신으로 유명한 사건이다. 당시 성삼문, 박팽년 등, 신하들은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김질의 배신으로 일이 틀어졌다. 원래 역모를 꾸미면 바로 사형이지만 세조는 성삼문, 박팽년만은 워낙 뛰어난 신하라 여러 번 자기에게 오기를 원했다. 그러자 성삼문은 왕을 전하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 부르며 세조를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세조에게 받은 녹봉도 하나도 쓰지 않고 집안 창고에 그대로 보관했다. 박팽년 역시 평소 세조에게 글을 올릴 때, 신하 신(臣)을 쓰지 않고 클 거(巨)를 씀으로써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증명했다. 결국, 세조는 끝내 사육신을 처형했고, 가족은 모두 멸족당한다. 그러나 박팽년만은 다행히 노비와 아이를 바꿔치기 해서 대를 이을 수 있었다. 나중에 버려진 사육신의 시신은 김시습이 거둬들여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사육신 중, 한 명인 유성원은 자살하였고, 후대에 김문기가 사육신을 추대되었다.). 참고로 김시습은 살아서 충절을 지킨 생육신으로 추대되었다.
(단종의 능. 비교적 규모가 작다.)
(단종의 제사를 지내는 곳. 멀리 보이는 우물은 영천으로 항상 수위가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한다.)
드디어 오늘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갔다. 오늘은 일정이 조금 빡빡했다. 숙소에서는 8명이어서 가장 좁은 방을 쓰는 등 약간의 소동이 일어났다. 솔직히 그 방은 너무 아니었다.
저녁은 삼계탕을 먹고 밤에 밤참으로 수박도 먹었다. 옆방의 3학년 형들은 베개 싸움을 했는데, 같이 한 몇몇 2학년 친구들은 만신창이가 돼서 창문으로 들어왔다. 진짜 전쟁인가 보다.
내일은 래프팅을 한다는데 기대된다. 하지만 노를 젓는 방법을 까먹어서 살짝 걱정되기도 한다.
-여정-(2012. 7. 24. 火)
문경새재유스호스텔→ 문경새재 생태공원→ 문경새재 주흘관→ 드라마 촬영 세트장→ 영주 부석사→ 영주 선비촌→ 소수서원→ 단양 고수동굴→ 도담삼봉→ 영월 청령포→ 장릉(단종릉)→ 아리랑 펜션
제 3장. 동강의 멋에 빠지다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없이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한쪽은 옷을 가져간다, 한쪽은 아니다, 결국 시간을 지체했고 선생님께 혼났다. 그리고 또 류우현 선생님한테 물벼락도 맞았다. 그리고 난 저번에 슬리퍼가 망가져서 쓸 수 없었는데 다행히 최경주 선생님께서 슬리퍼를 빌려 주셨다.
아침밥을 먹고 원래 타던 버스가 아닌 아리랑 펜션 버스를 타고 래프팅장으로 간다. 래프팅장소는 문산.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동강 근방의 마을 이름인 것 같다.
버스에서 내리니 우리 말고도 다른 단체에서 온 사람들이 앞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구명조끼 착용방법과 간단한 보트 다루는 법을 배우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멀어서 잘 안 들렸다. 그래서 더더욱 불안했다. 보트의 조 편성은 10명씩 하기로 했는데 난 3학년 형들 팀에 배치되었다. 왠지 형들은 무서워 보였다. 난 보트 앞자리에 앉았는데 노를 잘 못 젓는 나에게서 그 자리에 앉은 것은 실수였다.
(래프팅 전 안전장비 착용 중. 래프팅 중 헬멧을 쓰는 건 처음이다.)
래프팅 중 노 젓는 게 자꾸 서툴러서 형들하고 박자가 안 맞아 많이 혼났다. 그리고 사진 찍는다고 노를 잘 안 저어서 형들한테 더 많이 혼났다. 그래서 중요한 거 아니면 되도록 사진을 안 찍으려고 노력했다. 또 형들은 사진에 찍히는 게 영 싫은 것 같다.
동강은 뜻밖에도 수심이 낮아서 놀랐다. 교관 선생님도 요즘 가물어서 수위가 낮다고 하셨다. 수위가 낮으면 물이 많지 않기 때문에 배가 잘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만큼 노를 젓는 데 힘이 더 많이 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배 형들은 의욕이 넘치는지 다른조하고 최소 30m 이상 앞서 있었다. 그리고 만날 때는 노로 물장구도 치면서 재밌게 놀았다.
래프팅에서 무서웠던 건 권종훈 선생님과 류우현 선생님이다. 노의 손잡이 부분으로 형들을 물에 빠트리더니 계속 물에 담금질하셨다. 형들 말로는 진짜 죽을 뻔 했다고 하고 어떻게 선생님 둘이 학생 한 명을 잡을 수 있냐며 복수를 준비하기도 했다.
(권종훈 선생님의 공격!)
중간에 잠깐 쉬면서도 물방울을 튀겨가며 놀았다. 특히 교관 선생님들이 앞장서서 다른 사람들을 물에 빠트렸다. 물은 멀리서 보면 초록색이지만 그나마 가까이에서 보면 맑았다. 우리 말고도 빨간 조끼를 입은 팀도 옆에 있었다.
(가는 길에 본 두꺼비 바위. 물이 많이 있을 때는 저 바위의 반 정도가 잠긴다고 한다.)
(누군가의 입수 장면.)
잠시 쉬고 난 후, 이번엔 문산을 벗어나 어라현으로 간다. 교관 선생님께서 어라현은 동강에서도 거장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강 중간 중간에 나타나 있는 바위들과 특이한 모양의 절벽들은 신선의 땅 같았다.
(어라현에서 본 바위. 돌 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게 운치 있다.)
(어라현 절벽의 부처님 손바닥 바위. 어떻게 이런 모양이 완성되었는지 대단하다.)
어라현 기암괴석을 보자 교관 선생님은 조금 있으면 큰 급류가 나온다고 하셨다. 실제로 조금만 더 가자 한눈에 봐도 거칠어 보이는 급류가 나왔다. 우리는 노를 배 안으로 넣고, 발을 교차시켜 발 고정대에 고정했다. 여기서부터는 죽어도 책임 못 진다고 하셨다.
급류는 위험했지만 그만큼 스릴도 넘쳤다. 배가 기우뚱기우뚱 거릴 때마다 꼭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았다. 나중에 물 많을 때 꼭 와야겠다. 급류를 해치고 다른 조가 오는 걸 보니 진짜 교관 선생님께서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조 배는 정말 위태위태하게 급류를 해쳐 나가고 있었다. 교관 선생님은 만약 물에 빠지면 나오려 하지 말고 그냥 물살에 몸을 맡겨 떠내려가는 게 좋다고 하셨다. 그러면 밑에서 구해준다고 하셨다. 그리고 대부분 수심이 얕으니 당황하지 말고 그냥 서면 된다고 하셨다. 실제로 발이 닿을 정도로 수심은 얕은 편이었다.
(급류 타기 직전. 진짜 물살이 세다.)
(다른 조가 오는 모습. 배가 뒤집힐랑말랑 한다.)
급류 후, 또다시 중간 기착지에 도착했는데 여기에는 작은 휴게소가 있었다. 거기서 음료수를 마시며 목을 축였다. 휴게소가 있는 데는 물살이 조금 강해서 자칫하면 떠내려갈 수 있다. 그래서 교관 선생님들도 될 수 있으면 깊은 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
(중간 휴게소. 제일 좌측 분이 우리 교관 선생님이시다.)
이제 래프팅 구간도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 다들 사력을 다해(?) 놀고 있었다.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형들 잡아가는 게 꼭 상어 같았다. 그리고 형들이 밟아서 그런지 카메라가 망가졌다. 그리고 놀기 위해 물에 빠지면 다시 보트로 올라올 때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올라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이어서 더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형들 잡아가는 선생님. 물속으로 끌려가는 게 무슨 공포영화 같다.)
(강력한 물벼락.)
드디어 래프팅이 모두 끝났다. 원래 3시간이지만 4시간 정도 했다. 신기한 건 어디서 돈 기억은 없는데 다시 문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떤 경로로 돌아온 지 잘 모르겠다.
펜션에서 점심을 먹고 원래는 선암마을에 갈 예정이었으나 시간상 생략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피곤해서 잤다. 이번 국토순례는 확실히 저번보다 더 재밌고 볼거리 많은 여행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빡빡한 일정 때문에 조금 피곤했다. 이번에 갔던 곳이 오랫동안 보존되어서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태백산맥의 기운이 내린 신령스러운 우리 땅! 그 아름다운 천년만년 후손들에게 보전되었으면 좋겠다.
-여정-(2012. 7. 25. 水)
아리랑 펜션→ 동강 래프팅장(문산→ 어라현→ 문산)→ 아리랑 펜션→→ 안동 휴게소→ 황실 서천둔치
<2012 하계 국토순레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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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용이 좀 길어서 많이 진부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썼으니 잘 봐주세요.
민욱아!
장문의 기행문 쓰느라 수고했다.
설명도 열심히 듣고 하더니 충실한 여행기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구나.
중간 중간 오타가 약간씩 있지만 그래도 훌륭힌 국토순례 기행문이네.
앞으로 민욱이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문화 유적들을 접해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 같구나.
개학해서 보고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