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동을 호령했던 옛 주인들의 사후 안식처
정선옹주(貞善翁主) 묘역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제일 앞쪽이 권세태묘) |
궁동생태공원 2구역 서쪽 언덕에는 궁동을 호령했던 정선옹주와 그의 시댁인 안동권씨 일가의
묘역이 넓게 자리를 닦았다. 분명 묘역은 권협(權悏, 1553~1618)을 중심으로 한 안동권씨 묘
역이지만 공주가 묻힌 탓에 세상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정선옹주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제왕의
딸인 옹주의 위엄 앞에 권협 일가의 이름이 묻힌 것으로 권협이나 공주의 남편인 권대임이 아
무리 잘나도 왕실 공주보다 감히 높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묘역에는 모두 6기의 묘(권근중 묘까지 합치면 8기)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권협과 전주최씨 부인의 묘가 1단을 이루고 있고, 그 밑에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
(權大任)과
정선옹주의 묘가 2단을 이룬다. 그 아래로 권대임의 부모인 권신중과 전주이씨 묘
(3단), 권대임의 아들 권진과 남양홍씨 숙부인(淑夫人)의 묘(4단), 권진의 장남 권이경의 묘(
5단),
권이경의 장남 권세태의 무덤(6단)이 차례대로 자리한다.
그리고 별도로 권협 묘역 북쪽에는
권대임의 삼촌이 되는 권근중(權謹中) 내외의 묘가 숨겨져
있으며, 이들 무덤은 기본적으로 묘비와 상석(床石), 문인석(文人石) 1쌍, 망주석(望柱石) 1
쌍을 갖추고 있다. (단 권대임/정선옹주묘는 호석에 장명등까지 지니고 있음)
묘역과 생태공원 사이 산자락에는 권대임의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생태공원 솟대 옆에는 권
협의 신도비가 자리해 있어 이곳을 비선거리 또는 비석거리라 불렸다. 권협을 기준으로 6대가
이어져 내려온 묘역으로 묘비와 문인석, 상석, 호석(護石), 장명등, 촛대석 등이 잘 남아있어
조선 중기(16~17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음)
그럼 묘역의 주인공이 되버린 정선옹주(貞善翁主, 1594~1614)는 누구일까?
정선옹주(이하 옹주)는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7녀로 정빈(靜嬪)민씨의 소생이다. 정
빈은 어질고 예를 갖춘 여인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옹주 또한 그런 생모를 닮아서 공손하고 부
녀자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전한다.
옹주가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에게 시집가자 선조는 궁동(궁골)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
하며 그곳에 살도록 했다. 그래서 공주의 위엄에 걸맞게 고래등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이 궁궐만큼이나 컸다고 하여 동네 이름도 궁골, 궁동(궁마을)이 되었다.
옹주의 집은 궁동생태공원 북쪽인 서서울생활과학고 자리에 있었는데. 학교 정문 안쪽에 궁골
유허비를 세워 옹주의 고래등 저택이 있던 곳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이 집은 6.25전쟁까지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며, 당시 집의 면적은 700여 평, 집 크기는 50칸이었다고 한다.
허나 6.25로 인해 집은 모두 불타버려 가루가 되었고, 그 자리는 경작지로 쓰였다가 서서울생
활과학고가 들어앉았다. 생각 외로 옹주의 집은 1950년대 초반까지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생
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림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허나 궁동 토박이들의 증언과
집터에서 쏟아져나온 기왓조각과 도자기, 옹기 파편을 통해 집
이 제법 대단했음을 가늠케 하며, 집의 모습과 구조가 어떠했는지는 아직 조사를 벌이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궁집(국가민속문화재 130호,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 내외의 집)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그것도 정답은 아니니 각자 취
향에 따라 조선 중기 옹주의 집을 머릿
속에 그려보기 바란다. |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와룡산 자락에 안긴 정선옹주 묘역은 명당(明堂)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질 정도로 아주 대단
한
명당 자리로 우리나라 100대 명당의 으뜸으로 꼽힌다. 궁동을 북쪽으로 감싸는 와룡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동쪽으로 뻗어간 줄기가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서쪽으로 흐르는 산
줄기가
우백호(右白虎)를 이룬다.
주산에서 좌우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정중앙에 고추처럼 생긴 짧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흐르니
그 산줄기 끝에 이들 묘역과 궁동저수지가 자리한다. 이
지형을 풍수지리적으로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형이라 부른다. 그냥
닭도 아닌 금닭이
알을 품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지형인가?
허나 한참 뒤에 일이지만 옹주의 집이 전쟁으로 박살이 나고, 그 후손도 딱히 두드러지는
인
물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10%가 부족했던 명당이었듯 싶다. 명당이나 묘자리에 관심이 있
다면 한번 가보기 바란다. 저수지로 인해 그런데로 배산임수를 취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전망도 확 트여있어 욕심이 확 날 정도로 자리도 괜찮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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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된 세월의 때가 입혀진 권대임(權大任) 신도비 |
정선옹주 묘역에는 2기의 신도비가 있는데, 그중 북쪽 산자락에 권대임 신도비가 서 있다. 궁
동생태공원과 묘역 중간에 자리해 있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신도비란 고위 관료와 왕족들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이곳도 그 원칙을 지키고 있으며, 네모난 비좌(碑座)에 권대임의 일대기를
담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권대임(1595~1645)은 권협의 손자이자 권신중(權信中)의 아들로 자는 홍보(
弘輔)이다. 서예를 매우 잘하여 선조 임금에게 자주 칭찬과 상을 받았으며, 1살 연상인 정선
옹주에게 장가들어 길성위(吉城尉)가 되었다. 허나 옹주는 1614년 20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
을 떠나 19살의 나이에 홀아비가 되고 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봉헌대부(奉憲大夫)가 되었으며, 1635년 선무공신(
宣武功臣)의 적손(嫡孫) 자격으로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터지자 못
난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간 공적으로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진되고 도총관(都摠管)이
되었으며, 1639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자신의 재화를 싹 털어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
혀간 사람들(특히 노인들)을 데리고 돌아와 칭송이 자자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선무원종공신으로 유록대부(綏祿大夫)를 더해 정1품에 추증되었으며, 신도
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기렸다. |
▲ 권협(權悏) 신도비 |
궁동생태공원 솟대 옆에는 묘역의 최고 어른인 권협의 신도비가 있다. 형태는 앞서 권대임 신
도비와 비슷하며, 비석의 피부가 꽤 꺼무잡잡하여 고색의 기운이 진하다.
권협(1553~1618)의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
낸 권상(權常)의 아들이다. 1577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
文院), 춘추관(春秋館) 등을 거쳐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1589년 전국에 괴
질이 유행하자 함경도로 파견되어 백성을 돌보고 제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염통이 쫄깃해져 좌불안석이 된 선조에게 서울을 끝까지 지킬 것을
강력히 건의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선조는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 자신이 차고 있던 패검(
佩劍)를 하사했다고 함>
1596년 시강관(侍講官)과 응교(應敎)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터지자 급히 명나라로 파견
되어 원병을 청했다. 이때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정(李楨)은 '당신네 나라 지세를 알
아야 우리가 도울 수 있소' 무리한 부탁을 하자 별수 없이
조선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가며 막힘 없이 설명을 했다.
솔직히 명나라군은 왜군 조총의 밥으로도 아까울 정도의 쓰레기 수준으로 조선에서 온갖 민폐
를 아끼지 않았는데, 선조를 비롯한 상당수의 조선 위정자들은 명나라에 쓸개까지 다 내주며
지나친 사대주의를 일삼아 명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그러다보니 국가의 기밀이나 다름없던
조선의 지도를 명나라에게 그려주는 우를 범하고 만다.
조선 지도를 얻은 명나라 신종(神宗)은 흡족해하며 군사와 군량을 보냈으며, 원군을 끌고 온
공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604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선무원종공신(宣撫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길창군
(吉昌君)에 봉해져 전라도감사가 되었다.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종묘(宗廟) 영건을
감수한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으나, 광해군(光海君) 시절에 홍문관(弘文館)의 탄
핵을 받으면서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다가 1618년 세상을 떴다. 그의 시호는 충정
(忠貞)이다. |
▲ 두툼하게 솟은 권진(權瑱)과
숙부인 남양홍씨묘 봉분
묘비를 세웠던 자리에 비석은 온데간데 없고 현란한 무늬의 비좌만 멀뚱히 남아있다.
▲ 권진 묘역의 뒷모습 (저 밑에 권이경, 권세태묘가 보임) |
묘역 가장 앞쪽에 자리한 권세태는 이 묘역의 막내로 권이경의 장남이다. 1659년에 태어났으
며, 1690년 식년시(式年試)에 을과로 붙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권세태의
아버지이자 권진의 아들인 권이경(權以經) 묘가 있는데, 그는 사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런
아들과 손자묘를 굽어보는 권진은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장
남으로 돈령부봉사(敦寧府奉事)를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 권신중(權信中)과 부인 전주이씨묘
▲ 권신중과 전주이씨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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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3단에 자리한 권신중(1575~1633)은 자가 군집(君執)으로 권협의 아들이자 권대임의 아버
지이다. 부인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 이정필(李廷弼)의 딸이다.
1605년 증광시(增廣試) 생원과(生員科) 3등 45위로 합격하여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
고, 이듬해 의정부도사(議政府都事)가 되었다. 이후 형조좌랑(刑曹佐郞)과 강서현령(江西縣令
),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김제군수(金堤郡守). 단양군수(丹陽郡守) 등 여러 내/외직을 거
쳤고, 말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병으로 사양했다. 장남 권대임이 길
성군(吉城君)에
봉해지면서 좌찬성(左贊成)과 우의정(右議政)에 차례로 증직되었고, 이후 길
흥군(吉興君)에 봉해졌다. 그는 총명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말수가 적고 위엄이 대단했다고 전
한다.
권신중은 원칙대로라면 권협묘 밑에 있어야 된다. 허나 며느리인 정선옹주가 일찍 세상을 등
지자 일찍 묘역을 조성했는데, 아무래도 신분이 높은 공주이고, 그런 공주를 맞아들인 아들
권대임이 왕의 사위이기 때문에 권신중이 자리를 양보했다. |
▲ 권대임과 정선옹주묘 |
묘역 2단을 이루고 있는 권대임과 정선옹주묘는 같은 묘역임에도 다른 묘와 좀 차별화를 두었
다.
봉분(封墳)만 봉긋 오른 나머지 묘와 달리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장명등(長
明燈)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족이다보니 그런 파격적인 옵션을 달게 된 모양이
다. 역시
사람은 돈 많고 신분이 높고 봐야 된다. |
▲ 권대임과 정선옹주묘 뒷모습과 묘역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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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옹주묘 서쪽 문인석 |
▲ 정선옹주묘 동쪽 문인석 |
▲ 묘역의 어른인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최씨묘
▲ 뒤에서 바라본 권협 내외 묘 |
묘역 1단에는 권협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자손들을 굽어본다. 묘 뒤쪽에는 권근중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있는데, 그곳까지는 알지 못해 살피지는 못했다.
구로구에서는 이곳과 궁동생태공원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역사/자연공원으로 삼고자 계획하고
있으며, 묘역을 지정문화재 등급인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고자 서울시와 협의를 했으나 아직
까지 비지정에 머물러 있다. 허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조선 중기 묘역
들이니 구로구와
후손들이 잘 나서준다면 지방기념물 자리를 딸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구로
구에는 이곳 외에도
많은 사대부 묘역이 궁동과 천왕동(天旺洞), 고척동(高尺洞), 오류동 일
대에 흩어져 있는데 그중
유순정(柳順汀). 유홍(柳泓) 묘역과 함양여씨 여계(呂稽) 묘역이 지
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궁동생태공원(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찾아가기 (2018년 10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온수역(8번 출구)에서 6613, 6616, 6716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서울생활과학
고(서울전파관리소)에서 내리면 바로 궁동생태공원이다.
(6613번은 양천차고지 방향 차를 타야 되며, 6616번은 원각사입구에서 하차, 6613번과 6616
번은 정진학교와 온수힐스테이트아파트로 크게 돌아가므로 6716번 버스를 타는 것이 빠름)
* 지하철 1호선 오류동역(3번 출구) 북쪽 오류1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6613, 6616번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정네거리역(1번 출구를 나가서 180도 뒷쪽)에서 6716번 시내버스 이용
* 정선옹주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54-2 |
첫댓글 정말 갈 곳 많은 서울.
아직 못 가 본 동네입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울에 숨겨진 명소들이 꽤 많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