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황옥파 어머니
아래 이야기는 1992년에 나에게 들려주신 오북환 장로님의 회고담 일부다.
능곡에는 서울 Y총무 현 선생이 광주에서 유선생과 이현필 만나게 하고 교제 시작 한 후 목공기술 있다 하여 목공부에 별 일도 없는데 직원으로 와 있어 달라고 해서 호혜원 신진호 장로와 있게 되었다. 능곡 청년 수련 장소가 있으니 가서 살라고 했다. 선교사 오를 따서 오원(吳園)이라 했다. 6.25가 되어 피란길에 이대영씨 처남댁 까지 22식구가 평택까지 수레에 지게 싣고 따라가다가 6개월 떠돌다 다시 들어왔다. 이대영씨 소까지 온 사람 모두가 일 해주면서 얻어먹고 살았다. 인천 속새우치에서 살 때 바다 가에 가서 나물 뜯어다 삶아 먹었다. 초상집에 가서는 관 짜주고 얻어먹었다.
평택에 미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식구들이 반쯤 건너가고 마차와 수레기 어머니가 못 건너가서 이대영씨와 나도 못 갔다. 보호 처녀 4식구가 있었다. 그날 밤 눈이 많이 내렸다. 오두막에 피란민이 꽉 차 있었다. 밤을 꼬박 서서 보냈는데 죽은 사람은 없었다. 다음 날 강을 건너 식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미군들의 행패가 심했다. 그때가 대한(大寒)추위로 한창 추울 때인데 덕석을 처마 끝에 치고 사람들은 앉아있고 소는 집 안에 넣어 두었다. 저녁에 남자가 여반 바깓 쪽에 있자 하였으나 하나님께 맡기자고 했으며 정신 이상자가 들어 왔는데 일부는 내 쫒자고 했으나 그대로 받아 들였다. 보호는 하나님께 맡길 때 해결 잘 되더라.
그 후에 이선생이 올라와 보국대 모집이 있었다. 집마다 1사람씩 소집해서 내가 가겠다고 하여 가게 되었다. 먹는 것 때문에 다툼이 심했다. 아담이 먹는 것으로 타락 했기에 절제하기 위해서 내게 오는 것도 양보하고 아니 먹었다. 먹지 않으니 힘이 없어 곡괭이질은 하나 삽질은 던지지 못 했다. 단장이 3일 지나서 말하기를 ‘보기에 도인 같은데 시국이 어떻게 될 것 같소?’물어 보더라. 칠일 후에 단장이 노약자 고르라 할 때 ‘당신은 가라.’고 보내 주어서 증명 없이 밤이면 알 수 없어 자고 능곡을 찾아왔다.
능곡 가는 길을 사리재를 물으면 된다하여 물어 오다가 나무사이에 버섯이 오복이 있어 여름옷이라 샤쓰 벗어 버섯을 따 담았다. 그 순간 사리사욕 못 벗어 자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한 손님 주겠다고 가져 갔는데 이 선생이 올라와 계셨다. 내가 좀 일찍 왔으면 아니 갈 것인데 좀 더 깨달으라고 늦게 온 것이라고 했다. 버섯은 벗으라는 뜻이다. 두 번째 보국대 갔을 때는 수가 차서 가버렸다고 보내줘서 오게 되었다.
광주로 내려온 후 진도에 처가가 있는 방 안식씨(선교사 운전수)가 진도에 고아가 많은데 돌 볼 사람이 없다고 이 선생 보고 말 해 진도 책임자로 내가 3월 8일 내려가게 되었다. 도착은 9일 이었다. 3.8선은 내 마음에도 생긴다 했다. 9일 주일 날 방 안식씨 차로 고아 데리고 세등 동네로 왔다.
이 현필 선생은 하나님 말만 듣지 사람 말 안 들었다. 어느 닐 김 준호씨가 ‘이 선생이 오시래요.’해서 걸어갔다. CAC 운전수 방안식씨가 진도 처가에 가보니 그 곳에 고아가 많은데 돌볼 사람이 필요한데 동광원에 부탁하면 해결 될 것 같아 얘기 했다고 했다.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날자 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3월 8일이였기 때문이다. 3.8선은 우리들 마음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9일 주일 날 고아를 모집했는데 세등에서 맏딸이 5세인 5명의 고아를 차에 싣고 군청에 가서 5명분 식량을 타가지고 향교로 갔다. 그 후 방씨 오두막에 있다가 고향에서 면장도 한 춘일씨 아버지 목사 소개로 군청에도 말해주고 연산리 사토를 소개해 주어 이곳에 오게 되었다. 광주 누문동교회 시무하실 때 춘일양은 12세였고 그 때도 친절하게 지냈다. 이곳에는 주막집이 있었는데 사게 되었다. 돈지 어머니 집에 살다가 세등(친정집) 가까이 오게 되었다. 인원이 많아져 군청에서 고아들 데려가고 본 식구만 남게 되었다. 모두 3개월가량 살았다.
그 뒤에 이 선생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질문해 왔으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추운 겨울이였는데 칠금씨 노인과 같이 내려오다가 초상집 앞에 신용으로 만들어 놓은 신울 주서 신고 능주로 해서 오다가 장흥에 들렸다. 밤이 되어 삼일인지 저녁 교회에 들어가 설교 듣고 누더기 입고 강당에서 자려고 한다 하니 추워서 안 된다고 해서 난처했는데 집사 한 사람이 헌 칸 방에 자고 노인은 안방에 자라고 하여 고맙게 자고 나와 강진으로 갔다.
아래글은 <성자 이현필을 찾아서>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동광원과 서울YMCA
서울 YMCA 현동완 총무의 협조와 배려에 힘입어 1948년 8월 말 혹은 9월 초부터 동광원의 주축 세력은 서울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1948년 서울YMCA 현동완총무는 이현필 선생과 그의 제자 일부를 서울로 초청하여 삼각산과 능곡 등지에 머물게 하였다.
이현필선생과 오북환장로등 동광원 식구들을 평소 존경하던 현동완 총무는 YMCA 소속의 능곡 소재 건물과 토지에 '오원(吳圓)'을 창설하고 1948년 늦가을 부터 남녀 청년들이 수도생활을 시작하도록 배려하였다.
1948년 8월 말 혹은 9월 초에 이현필, 오북환, 강남순, 김금남, 신진호 등은 서울 YMCA 회관의 한쪽에 방을 마련하여 생활하면서 오북환 장로는 서울 YMCA 목공부 일애도 협력하였다. 이렇게 서울 YMCA 한쪽 방에 웅쿠리고 생활하는데 광주에서 정인세, 김정순, 신옥순, 방순녀, 조정은, 김순남, 김은남 등이 상경함으로써 이들은 정인세와 함께 삼각산 김용기 장로의 지하실과 그 옆집을 얻어서 생활하였다. 지하실 방에는 정인세와 김인수가 살고 그 옆집에 방 하나를 얻어서 8명의 여성이 살면서 낡은 집을 허는 노동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이 진행 중인데 가을에 광주에서 강원종, 김삼용, 최영희씨등 3인이 가세하였다.
서울로 몰려든 제자들을 남겨두고 이현필은 남원으로 오북환 장로를 대동하고 내려가서 1948년 늦 여름부터 초 가을까지 기도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이현필은 한국 사회의 앞날에 머지 않아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을 예견하였다. 이현필은 정인세 원장에게 1948년 년초 부터 "앞으로 많은 피 흘릴일이 생기겠는 데요"라고 말하였으며 "나와 함께 이곳 저곳 다녀 봅시다."라고 하였다.
이현필은 1948년 10월의 제 14연대 반란사건, 일명 여순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정인세 원장과 여러 제자등 총 9사람으로 이루어진 '남도 순회 전도단'을 구성하여 남원을 출발하여 순천, 여수, 고흥, 녹도, 소록도, 완도군 평일도, 완도읍, 강진, 해남 광주, 서울에 이르는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다. 이 여행이 갖는 의미는 첮째는 제자들로 하여금 여행의 중요성을 알게 하였으며, 둘째는 이현필과 동광원의 신앙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는 9사람의 참여자들이 남도의 절망적인 상황을 목격함으로써 차후에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될 동광원 고아사업의 이해도를 폭넓게 하였다.
이 여행을 어떻게 해석 할 수 있을가? 그것은 동광원 운동이 내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 찾기 혹은 본질에 충실하기라는 것과 동시에 외적으로는 신앙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점을 알게 해 주었다.
다시 말하여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제 14 연대 반란사건, 일명 여순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과 호남지방 일대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 좌익세력들의 준동, 그리고 이어진 인명 살상과 1950년 6월의 한국 전쟁은 다같이 동광원 운동의 사회적 존재 의미를 알게 해 주었다.
일행이 강진에 이르러 강진읍 교회 배영진 목사와 함께 있을 때에 제 14연대 반란사건 소식을 접하게 되자 이현필은 배영진 목사와 정인세 선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현필 선생은 함께 다니던 일행을 보고 "피난 다니다가 죽는 것 보다는 우리는 여기 있어서 일 좀 합시다"하면서 강진 배영진 목사에게는 교인들 집집에서 쌀을 모으게 부탁하고 (피난민이 생길 테니) 정인세 선생 보고는 '정총무는 학생들(수녀들)에게 간호법을 배워주시지요' 했다.
이현필이 1948년 연초에 예견하였던 일이 연말에 이르러 현실로 들어나기 시작하였으며, 동광원 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미리 제시해 주는 일이었다.
<성자 이현필을 찾아서> p186-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