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左議政) 이사철(李思哲)이 졸(卒)하였다. 이사철의 자(字)는 성지(誠之)인데,
과거에 올라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를 제수(除授)받고, 여러 번 옮기어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이르고, 발탁되어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제수받았고, 여러 번 승진하여 도승지(都承旨)ㆍ이조 판서(吏曹判書)ㆍ예조 판서(禮曹判書)ㆍ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 임신년에 세조(世祖)가 명나라에 가는 데 이사철이 수행했고, 정난공(靖難功)에 참여하여 의정부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였고, 또 좌익 공신(佐翼功臣)에 참여하였는데
,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52세였다.
이사철은 키가 크고 용모가 위이(偉異)하며 어눌(語訥)하여 말이 적고, 술을 두어 말을 마시어도 어지럽지 않았다. 소년 때에 글을 읽어 여러 제배(儕輩)들과 노는 데 방달(放達)하여 작은 예절에 구애되지 않았다.
세종(世宗)께 벼슬하게 되자 파계(派系)가 종적(宗籍)에 연함으로 하여 뛰어 발탁되어 드디어 달관(達官)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품이 결단성이 적어 일을 의논하매 양단(兩端)을 가지어, 남이 혹은 한마디면 다할 것을 이사철은 한참 만에도 결단하지 못하고 요좌(僚佐)에게 눈짓하여 아무 상신(相臣)이 가하다 하느냐 불가하다 하느냐를 물어서, 필경은 타론(他論)에 의하면서 말하기를, ‘내 뜻이 이러하다.’ 하여 두루뭉실하여 결단을 못하고, 거가(居家)하여 인색하니,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기었다. 아들이 없다
. 시호(諡號)를 문안(文安)이라 하였는데,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 문(文)이고, 너그럽고 넉넉하고 화평(和平)한 것이 안(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