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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와 어린이(막10:13-16)-2014.5.4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가 꽃과 같이 아름답고 예쁘다고해서 꽃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정말 어린이는 볼수록 기분 좋고 소중하고 예쁜 천사와 같습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모든 세상의 시름을 잊어버린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어린아이와 같다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어린아이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린아이들이 많아야 비전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어린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만져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존경스러운 사람들에게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만져주기를 바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은 그들을 제지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분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바쁘신 예수님이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어린아이들에게 투자해 본들 아무 유익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관심과 사랑을 어린아이들에게 빼앗긴 데 대한 일종의 질투심 같은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정말 바보같은 제자들입니다. 그동안 주님과 함께 하면서도 그렇게 주님을 모르다니요? 너무나 한심한 제자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린아이를 무척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제지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금하지 말라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로까지 비화시켜 천국을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통해서 천국을 소개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주 짧은 메시지지만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명쾌하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를 통해서 천국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상상속의 나라가 아니라 얼마든지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맛볼 수 있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어린아이는 볼 수 있듯이 어린아이같은 영혼을 가지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린아이와 천국은 속성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국의 수준이 어린아이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또는 무조건 어린이들은 천국 같다는 말도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어린이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우리 눈높이에서 설명할 수 있는 천국의 속성이 마치 어린아이들의 마음과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천국이 어른들처럼 더럽고 오염되고 간사한 곳은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어린아이들은 어른들보다는 훨씬 더 순수하고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천사들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성인들이 사는 곳도 아닙니다. 천국은 죄없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도 아닙니다. 천국은 완전하고 완벽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용서받는 죄인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천국이 어린아이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눈높이에서 설명할 수 있는 천국은 어린아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어린아이들은 순전하고 맑고 순수합니다. 때로는 죄의 유전성이 아니라면 과연 저런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되바라졌는지 모릅니다.
5살박이 어린이를 데리고 엄마가 서점을 갔대요. 그랬더니 아이가 책을 고집하며 고르는데 “어린이 교육법”이라는 책을 고르더라네요. 엄마가 어린애가 무슨 그런 책을 고르냐고 했더니 아이가 하는 말 “응, 엄마가 나를 올바로 교육하고 있는지 연구해 보려고”그러더랍니다. 어린아이같은 순수함이 없어 보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영악합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린아이를 통해 천국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천국을 보는 투사경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어린아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과 천국의 특징을 비교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크게 세 가지로만 비교하여 천국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1) 어린이는 순수합니다
어린이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순수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 것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에 오염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순백의 마음이랄까요? 참으로 어린아이는 순전합니다. 순진무구합니다. 맑고 청정합니다. 무슨 단어를 사용해도 부족합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눈동자를 바라보십시오. 얼마나 예쁜지요. 세상에 어떤 보석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런 외모적인 순수함보다는 어린아이들의 영혼의 상태가 훨씬 더 맑고 순수합니다. 한 치의 꾸밈도 없이 웃는 모습을 보십시오. 거기에 무슨 간사한 그림자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음흉한 계교가 있겠습니까? 그 자체만으로 순수합니다.
차를 타고 가던 남자가 물을 만났습니다. 물의 깊이를 몰라 망설이던 남자는 옆에 있던 한 자그마한 어린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저 도랑이 깊으냐?” 아이가 “아니요. 아주 얕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남자는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말을 믿고 그대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러나 차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겨우 물에서 나온 남자는 아이에게 화를 냈습니다. “야 이놈아! 깊지 않다더니 내 차가 통째로 가라앉아버렸잖아! 어른을 놀려?” 그러자 어린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습니다. “어, 이상하다! 아까는 오리 가슴밖에 안 차던데······”.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들의 동심이지요.
천국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순수한 영혼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간사하고 음흉하고 지저분한 마음을 가진 곳이 아닙니다. 정말 맑고 깨끗한 영혼들이 들어가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다만 무조건 모든 어린이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천국을 어린아이로 비유하는 것은 천국의 속성이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천국의 본질이 어린아이같이 간사한 마음이 없고 순수한 영혼이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사악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본질적으로 죄성과 악성과 독성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린아이들도 죄인입니다. 그렇게 순수하게 보이는 어린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라도 거짓말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합니다. 남을 헤치려는 행동도 배우지 않았는데도 본능적으로 하게 됩니다. 왜냐면 인간속에는 사악한 죄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 눈으로 보는 어린아이들은 사악한 모습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게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서서히 눈을 뜨면서 자기안에 있는 더러운 죄성이 수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선하게 태어났다는 성선설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악설이 있습니다만 성경적으로 보면 성악설이 맞습니다. 물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성선설같이 생각됩니다만 타락한 이후의 인간은 누구나 죄를 안고 태어납니다.
당연히 어린아이도 죄 중에 잉태하고 죄 중에 태어납니다. 타락한 어른들의 눈으로 보니까 순수할 뿐입니다. 영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분명히 죄인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죄인이라는 말이 너무 가혹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상관없습니다. 분명히 그런 순수하게 보이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죄성이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죄성이 점점 자라면서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죄인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죄성이 어른이 되면 당연한 것처럼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도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게 됩니다. 때로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시켜 버립니다. 아예 죄를 재미삼아 저지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죄중에 잉태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죄중에 살다가 죄를 부둥켜안고 죽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털고 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장소를 압니다.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 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죄를 해결하는 방법과 장소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쉬운 말로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는 그리스도의 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도는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버리는 방법과 장소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도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아니하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습니다. 지옥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믿으면 우리의 죄를 해결하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른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천국을 소유하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어린아이같이 맑고 순수한 영혼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 어린이는 겸손합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중에 하나는 겸손함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들보다는 겸손합니다. 천국은 겸손한 자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영접하십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겸손합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의 무력함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수준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자기의 무식함을 인정하며 자기의 무지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 곁에 있는 제자들은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 곁에서 스스로 잘났다고 경쟁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가 높은가를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제자들이 서로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교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솔직히 갈릴리 촌구석에서 피택받은 제자들은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문벌 좋은 사람도 없었고, 학벌 좋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도 없었고 능한 자도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고 주님 곁을 따라 다녔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별 볼일 없던 자들이 주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제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들끼리 인물 논쟁을 하다니요. 밥그릇 싸움과 자리싸움을 하다니요. 교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절대 겸손한 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는 것이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교만은 무엇입니까? 교만은 자기의 수준이나 정도를 벗어나서 고집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합니다. 자기만 잘난 체 합니다. 자기가 최고라는 우월감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의 주장만 앞세웁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교만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순간의 착각으로 교만한 생각이나 행동을 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그런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을 차후에라도 인정하고 잘못을 시인하면 교만은 물러납니다.
그런데 진짜 교만한 사람은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끝까지 오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교만한 사람입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을 했다면 즉시 깨닫고 돌이키십시오. 그래야 삽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전혀 모른 채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들속에 아주 간사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이 들어 있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통해서 그들속에 있는 교만함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은 천국을 소유한 자의 마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보다는 겸손합니다. 15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받들어야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받든다는 말은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받들기를 할 수 있습니까? 낮아지면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는 남을 남보다 존귀하게 여깁니다. 내가 스스로 낮아지면 얼마든지 받들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는 받드는 자라는 말입니다. 교만한 자는 받들어주기만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낮아지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어린이는 아예 자신이 낮은 것을 알므로 받듭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렇게 받들어야 합니다. 어린아의 눈으로 보는 아버지는 마치 슈퍼맨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최고로 여기고 받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렇게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받드는 나라요, 섬기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왜 들어가지 못합니까? 당연히 받들지 않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섬기지 아니하고 섬김만 받으려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받들지도 않으면서 들어가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만일 들어가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불편하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받들다”는 말은 ‘덱세타이’란 헬라어입니다. 이 말은 손 안에 넣다, 환영하다, 영접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환영하는 것이 받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는 것이 받드는 것입니다. 낮은 자가 받듭니다. 높은 자는 짓누릅니다. 빌립보서 2:8절에는 예수님을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4절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합니다. 어린이는 자신을 낮추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받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됩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된 시민의 성품입니다. 우리 주님도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자만이 천국을 받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처럼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영접하십니다. 천국은 그런 자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저 겸손할 것밖에는 없습니다. 모든 범사에 겸손함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어린이는 의존적입니다
어린이의 또 다른 특징 중에 하나는 의존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항상 무언가에 의지하려합니다. 특히 자기 부모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자기 부모를 절대적으로 의존합니다.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부모를 의지하는 마음이 강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들같이 의존성이 강해야함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이 건강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가 들어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의존하는 자가 소유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부모를 의지하는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때는 부모만 의지하다가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주관적으로 하려는 성격이 드러납니다. 이른바 자기만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런 부류의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오직 주님만 의지하려는 의존성이 강합니다. 그래도 교회서 시키는대로 하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서서히 믿음의 연륜이 쌓이면서 자기 것을 드러냅니다. 이른바 자기 정체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나름대로 신앙의 요령을 터득했다고나 할까요? 그만큼 신앙의 순수함이 사라지고 세속화되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은 이 과정에서 병이 드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적극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를 의지하듯이 말입니다.
요즘 어린아이들에게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영접케 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어린이를 예수님께 데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의 축복을 받게 해야 합니다. 정말 시대가 악합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오염되고 찌들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을 맞춤형으로 키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의 입맛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정말 어린 생명들이 소중한 영혼들입니다. 어린아이라고 무시하면 안됩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디엘 무디 선생이 두사람반을 전도했다고 전도부에 보고를 하더랍니다. 그 때 성도 중에 한 사람이 두사람반이라면 어른 두명에 어린이 한 사람을 말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무디 선생이 말하기를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저는 어린아이 두사람과 어른 한 사람을 전도했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어른은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반명이라고 말한 것이고, 아이들은 아직 살아야 할 시간이 창창하여 온전한 한명이라고 말하였다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 않을까요?
절대 교회가 어린이들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어린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큰 위기감이 없습니다. 어른들로 넘쳐나니까 좋아합니다. 이제 머잖아 어른 세대가 지나가면 한국교회 어떻게 할 것입니까? 심지어 어린아이들은 교회 성도수에 포함하지도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헌금하지 않으니까 없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듯 합니다. 안됩니다. 교회의 소망과 비전은 어린아이들에게 있습니다.
정말 예전에는 교회들마다 어린아이들이 북적거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교회가 비전있는 교회입니다. 아이들이 많은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정말 어린아이들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과감하게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십시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모든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영접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정성을 다하십시다. 교회의 소망은 어린아이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2014.5.4 어린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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