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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2011년 3월 31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예레7,23-28루카11,14-23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싸우면 쓰러지게 마련이고
한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이다.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는데
만일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 되겠느냐?”(루가 11,14-23)
영으로 강한 사람 /김찬선신부님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악령 들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들은 악령을 두려워하면서도 노상 악령 얘기만 합니다.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보통 악한 것의 특징 중에 하나가 사로잡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존재들이 있어도 악한 존재만 보게 하고
다른 좋은 생각 할 수도 있는데 나쁜 생각만 하게 합니다.
다른 아름다운 것을 보라고 해도 보지 못하고
긍정적인 생각에로 돌리라고 해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의 안이 이미 악한 존재와 생각으로 점령당하였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 내부적 악이 외부적 악과 내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악을 몰아내야
밖의 아름다움도 보고 긍정적인 생각도 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악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내부적 악을 스스로 물리치고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악들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미리 막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적으로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악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스스로 할 수 없는 악령 퇴치를
주님께서 해주셨듯이 다른 사람이 해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은 빠져나오려고 할수록 더 빠지고
밖에 건져내주어야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누가 구원자입니까?
어떤 악한 것보다도 더 강한 존재이겠지요.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심리 정신적으로 강한 존재들입니까?
나쁜 것이 없는 존재,
더 정확히 얘기하면 싫고 좋은 것이 없어 나쁜 것이 없는 존재,
그래서 싫은 것의 경험인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은 싫은 것이 많아 악을 수없이 경험해도
건강한 사람은 선을 더 많이 보고 경험합니다.
건강하면 할수록 더 많은 선을 보고 더 큰 선을 봅니다.
건강하면 할수록 선만 보고 어떤 악에서도 선을 봅니다.
그런데 정말 강한 사람은 영적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성령을 경험하고
성령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안에 모신 이런 사람만이
나쁜 생각이나 감정 정도가 아니라
악한 존재까지 퇴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엘제불의 힘으로
더러운 영을 퇴치한다고 모함을 합니다.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힘센 깡패가 피라미 깡패를 몰아내주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더 강한 악령에 사로잡힌 것이지
악령이 퇴치된 것이 아니지요.
악과 악한 존재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실 분은
성령이시고 성령을 모셔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즘같이 심리, 정신적으로 악에 시달리고
영적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은 때에
우리도 성령을 모신 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모셔다주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설의 하느님 /김상용 수사님
‘베엘제불’은 ‘바알’(셈 족이 섬기던 신의 이름)과 ‘즈붑’(파리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의 셈 족들은 바알의 신을 비와 구름 그리고 물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모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막기후의 건조한 땅에 물을 댈 유일한 수단은 비가 내리는 것뿐이었으므로
자신들의 이러한 바람을 신앙으로 고양시켜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를 적대하는 자들은 바로 예수의 표징들을 일컬어 바알 신의 힘을 빌어
했노라고 매우 불손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들의 불신앙의 근저에는 그들 고유한 메시아
신앙의 기대와는 달리 나자렛 시골 출신이라는 전혀 딴 판의 사내가 일으키는 감당할 수 없는
이적 행위들을 두고 급급하게 해석하는 유다 지도자들의 지독한 편견이 자리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어렵지 않게 ‘역설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를 좌절시키셨다가도
지나고 보면 그것이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었음을 스스로 깨닫는 경험들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사건에서 극명하게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
우리는 역설의 하느님을 알아뵙기 위해 일상의 고난으로부터 도망가지 말고
그 고난 한복판에 계시는 예수님의 동행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베엘제불 /김훈일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엘제불과 한편으로 모함을 받고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내쫓아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베엘제불은 사탄과 동일시되었습니다.
베엘제불은 ‘바알 즈붑’ (높은 거처의 주)이라는 뜻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신(2열왕 1, 2절 이하)인데, 이를 유다교에서는
베엘제불로 고쳐서 우두머리 마귀를 가리키는 말로 썼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모략입니다.
우리 사회도 한때 이런 방식으로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가두거나 죽였던 역사가 있습니다. 소위 ‘빨갱이’, ‘간첩’이라는 누명만 씌우면
정당한 절차도 제대로 된 변호도 없이 재판할 수 있었습니다. 슬픈 우리 사회의 광기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당신을 변호하셨지만 결국 같은 죄목, 즉
하느님을 모독했고, 하느님의 적대자라는 누명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서 그들의 사악함을 드러내고 진정 하느님의 적이
누구인지를 밝혀 주셨습니다. 요즘 어두웠던 시절에 감옥에 갇히거나 죽어야 했고,
잘못된 판결을 받았던 이들이 복권되고 진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러한 어둠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음모와 모함으로 희생당하는 이들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오해받는 예수님 /황철수 신부님
여러분과 더불어 오늘은 ‘오해받는 예수님’에 대해서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먼저 ‘오해받은 한 사람의 일화’를 통해
본질과 진리를 간파하는 인간의 한계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평신도로서 가톨릭 사상가의 반열에까지 오르신 분, 한 분을 들라면 아마도
고 김홍섭(바오로) 판사님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미
그분의 유명한 책 “무상을 넘어서”(1960)를 읽어보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그분을 소개하면 최남선(崔南善) 선생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습니다. 법관으로서의 그분은 실정법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비판에서 출발한 자연법 사상에 충실하여, 법보다는 인간의 기본적 인권과
양심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것에 기초한 재판 철학을 옹호하신 분이었습니다.
특히 가톨릭 신자로서 그분은 실천신앙을 중시하여 청빈과 검소,
근신과 수계를 생활화하려 애썼습니다. 그분의 일화 한 토막으로 오늘의
강론주제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언젠가 그분은 검소한 옷차림으로 지방에 갔다
오는 길이었습니다. 고무신을 신고 물들인 군복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았는데, 신분증을 보자고 하여
신분증을 제시하였는데, 마침 법관 신분증이었다고 합니다.
검문경찰이 그 신분증과 행색을 보고는 위조신분증을
소지한 사람으로 오해하여 무척 애를 먹었다는 일화입니다.
특별한 예이긴 합니다만 인간은 이처럼 내면의 진실과 본질을 보는 데 있어
편견에 얽매이고 고정관념을 넘지 못하는 부족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모습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에게서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한 의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하는 예수님의 행적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여
예수님과 그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학자들은 예수님이 ‘마귀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는 신들린 사람’ 정도로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나자렛의 시골에서 그런 인물이 나올 수 없다는 편견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서는 많은 군중으로부터 환영을 받고 지지를 받는 예수님에 대해서
‘저 예수라는 사람은 우리가 다 아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나자렛에서 무슨
특별한 것이 나올 리가 있겠는가’ 하는 인간의 판단수준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하느님의 힘」은 목수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편견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성향과 자세를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적용한다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고, 그런 강생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생각의 근저에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면 특별하고
비범한 양상이나 모습을 지녀야한다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 특별한 양상이나 모습이 범인들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제국의 군주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아 기대를 ‘정치적 메시아 기대’ 라고 합니다.
또는 인간은 너무나 하찮은 존재이니 인간과는 다른 비범한 차원의
차별화된 존재로 세상에 나타나야 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 ‘반은 인간이고
반은 신인 반신반인의 마법사’가 될 소지가 많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성령을 거스르지 말도록 경고 받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다름이 아니라, 가난한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온갖 지식과 편견과 관념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은 진정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심오한 지혜를 구하며 사는 모든이들에게 하느님으로서 인간의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생의 진리를 간파하는 참된 지혜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 모독의 시초 /구경국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의 필요성이나 스스로의 경험에 의거하여 자기욕구의 만족에
유익하게 보이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불리한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이 자기네들보다 예수님을
더 따른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평화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들이
설 자리가 좁아들고 있다는 현실의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 우두머리의
편에 서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까지 펼칩니다. 하느님의 업적을 고의로
폄하시키면서 하느님께 대항하는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태도를 예수님께서는
성령모독이라는 말로 경고를 하십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모함하는
바리사이들을 한편으로 비판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우리들 역시 자주 그들과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뿐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희생과
봉사, 그리고 선행까지도 나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은총에
감사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하느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 특히 그렇습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고 그것에 감사드릴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리사이들과 다르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 /강영구신부님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다 놓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다."(마르 3,22-24)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속담이 있다.
배 고픈 개 눈에는 모든 것이 똥으로 보인다는 말인데,
머리 속에 가득 찬 생각대로 눈에 보이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돈만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온갖 것들이 돈으로만 보이게 마련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대로 빨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붉은 색으로 보이고
푸른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모두 파랗게 보인다.
율법학자들의 눈에 예수의 행적이 모두 마귀의 행실로 보였다.
마귀 두목 베엘제불과 협잡하여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마저도 율법학자들의 눈에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졸개로 보이니 어떻게 된 곡절인가?
필시 율법학자들의 가슴 속에 마귀가 가득하고 마귀 두목의 안경을 끼고
예수를 바라보니 예수 마저도 마귀로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가슴에서 마귀를 쫓아내기 전에는 자기 부모나 처자 마저도
마귀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용서받지 못할 불행한 일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결국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오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마음에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겠느냐."(마태12,34-35)
우리들의 가슴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 대답은 분명해졌다.
맑고 밝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세상을 맑고 밝고 아름답고 향기롭게 보고 또 그렇게 만든다.
침울하고 어둡고 추하고 구린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세상과 이웃도 그렇게 바라보고 또 그렇게 만든다.
예수를 가슴에 가득 담고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
굽비오의 늑대 /황인수 신부님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은 밀라노 대교구의 교구장을 지냈습니다.
성서학자로도 유명한 분인데 우리말로 번역된 저서도 여러 권 있지요.
교구장직을 은퇴한 후에 마르티니 추기경은 파킨슨씨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십니다. 예루살렘에 평화가 올 때
세상에 평화가 올 것이라는 게 그분이 거기 머물러 계시는 이유입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대개 미움 한복판에 있게 되고
평화를 말하는 사람은 싸움 한복판에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분이 사랑의 사람이고 평화의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랑이 필요한 곳, 평화가 요긴한 곳에 그를 파견하시는 거겠지요.
그는 미움 한복판에서 내면의 사랑을 드러내야 하고
싸움 한복판에서 내면의 평화를 증거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제
내적 차원과 외적 차원에서 사랑과 평화를 살아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활동한 이탈리아의 굽비오 지방에 간 적이 있습니다.
바닷가에 해수욕을 하러 갔는데 그곳 사람들이 서로 ‘평화와 선!’?이라고
인사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신조였던 이 말로
서로 인사를 하는구나, 정말 신앙의 뿌리라는 것은 놀랍다!’ 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어쨌든 늑대를 길들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야기에서 어떤 이들은
좀 더 깊은 뜻을 읽어내기도 합니다. 굽비오의 늑대를 길들일 때 성인은
자신의 어두운 면, 폭력적인 그림자 자아를 대했던 것이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폭력을 용기 있게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구원하시도록 맡겨 드린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사랑과 평화를 살게 됩니다.
그것을 막는 내 안의 미움과 불화를 이겨내는 것,
이것이 평화의 첫걸음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모두 그분과 평화롭게 지내면서
그 힘으로 우리 이웃과도 평화를 이루며 살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양승국신부님
몇몇 아이로부터 가끔씩 연락이 옵니다.
편지로, 전화로, 메일로.
이제 좀 정신 차릴 나이도 되었는데,
잘 지내야 될 텐데, 걱정하고 있으면
아니나 다를까 어김없이 ‘겸열필’
도장이 찍힌 편지가
구치소나 교도소, 소년원으로부터 날아옵니다.
편지 내용을 읽어보면 ‘눈물로 쓴 편지’ 저리가라입니다.
편지 내용만 보면 이제 사람 다 된 것 같습니다.
완전히 개과천선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나오면 그 금강석 같던
다짐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즉시 또 다른 비행의 연속입니다.
악습과 결별하지 못하는 아이들, 그로 인해
너무도 오랜 세월 방황하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하느님께서 바라보실 때 저 역시 별반
다를 바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앞섭니다.
발목을 붙드는 갖은 종류의 속박에
꼼짝 못하고 있는
부자연스런 제 영혼을 자주 확인합니다.
그토록 자주 다짐을 하고 또 다짐하지만
어느새 똑같은 악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악령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은 악령과 맞서 싸우시는 존재라기보다는
언제나 악령 위에 머무시는 존재,
악령들을 지배하시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분 앞에 악령들은 순식간에 힘을 잃고 맙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그 아무리 ‘센’ 악령들이라 할지라도 겁나지 않습니다.
오늘 제게 있어 악령을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나를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여러 형태의 속박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잡념들,
내 영적생활을 파괴시키는 악습들...
아직은 많이 부족하기에, 언제나 나약하기에
악령의 간계에 혼란을 거듭하는 우리지만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시공으로 훨훨 날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 다양한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악령들의
세력이 아무리 활개를 친다할지라도,
그로 인해 세상살이가 너무 힘겹다할지라도,
그래도 하느님의 능력은 그 모든 것들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나라가 ‘현재진행형’이기에
갖은 악이 판을 치고, 이해하지 못할 현상들이
우리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뒤흔든다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나라가
반드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을 굳게 믿기 바랍니다.
그날 우리는 그 오랜 악의 억압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가 갈구해왔던 자유를 구가하게 될 것입니다.
꿈처럼 요원했던 참 행복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손가락 /김성웅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도 오히려 적대자들의
반감과 의심에 부딪히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투신이 반대와 갈등을
수반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더 데레사 역시 예수님이 처했던 그런 비슷한
상황에서 ‘어쨌거나’ 하느님께 항구히 충실하도록 권고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주 완고함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이 친절히 대하면 그들은 의심에 사로잡혀 불순한 동기를
캐물을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친절히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성공을 거두면
거기에는 반드시 불신하는 동료나 적대자들이 따릅니다. 어쨌거나 가야 할 길을
가십시오. 여러분이 진실하고 성실한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이 여러분을 속일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진실하고 성실하십시오. 여러분이 몇 년 동안 공들여 뭔가를
세웠건만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그것을 허물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다시
세우십시오. 여러분이 평안함과 행복을 발견하면 누군가가 질투할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기뻐하십시오. 오늘 행한 선은 이내 잊히고 말 것입니다. 어쨌거나 선을
행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최선의 것을 내어주어도 별 소용이 없을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최선의 것을 내어주십시오. 결국은 여러분과 하느님 사이의 문제이지
여러분과 사람들 사이의 문제가 아닌 까닭입니다.”
하느님의 손가락 /최성기 신부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부분에는
하느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이 하느님에게 숨결을 받는 순간을 두 손가락의 만남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그 당시 유명했던 기도문
‘창조주여, 오소서(Veni Creator)’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기도문에서 하느님 창조의 숨결을 하느님의 오른손가락으로(Tu, digitus Paternae dexterae)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유명한 작품이 그렇듯이 미켈란젤로의
하느님 손가락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생명을 시작하는 데 하느님의 어루만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 세상 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어루만짐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러러 당신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4-5)
하느님께서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루만져 주신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함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까닭은 우리한테도 이 세상을 어루만지고,
이웃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손가락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과 우리는 ‘손가락이 닮은’ 사이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만지고 보듬어 줄 능력이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을 포옹할 힘이 있다는 것이 하느님과 우리의 가장 닮은 점이 아닐까?
밖에서 다쳐 돌아온 아이를 쓰다듬고 안아주는 엄마의 모습에서,
실의에 빠진 동료의 등을 두드려 주는 모습에서,
아픔에 지친 환자에게 다가가 지그시 손 잡아주는 모습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긴 이웃을 안아주면서
우리는 가장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된다.
사람을 살리고 우리를 살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살리는 창조의 숨결이 짧은 어루만짐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세상의 악을 몰아냈다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어루만지신 그 손가락이 우리 편이라고 선포하신다.
오늘 하루, 어루만짐이 많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상처로 어두워진 마음, 분노와 미움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상처를
보듬어 주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지막이 기도하자.
“주 우리 하느님, 우리 손이 하는 일 잘 되게 하소서”(공동번역 시편 90,17).
하느님의 손가락과 우리의 손가락 /김정대 신부님
어렸을 때 배앓이를 하면 어머니는 나를 뉘어놓고 가락에 맞춰
‘엄마 손은 약손’을 반복하며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러면 배앓이가
없어지곤 했다. 지금도 가끔 배가 아플 때 배를 쓰다듬곤 한다.
언젠가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 타지에서 약 한 달을 지냈는데,
어느날 샤워를 마치고 나오다 갑자기 허리 근육이 잘못되어 그 자리에서 폭 쓰러졌다.
간신히 침대로 기어가 한참 쉰 다음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물리치료사는 정성을 다해 허리 마사지를 해주었다.
다음날 허리는 한결 나아졌다. 사람의 손은 이렇게 대단하다.
나는 집이나 상점 축복식을 할 때 주로 오늘 복음을 읽는다.
특별히 손으로 무엇을 하는 가게를 축복할 때 이 말씀은 주인에게 큰 위로를 준다.
그런데 사람 손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상점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이는 손으로 사람을 안내도 하고, 어떤 이는 손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기도 한다.
음식 맛은 손맛이라고들 한다. 또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말도 있는데,
음식을 만드는 손은 분명 하느님의 축복이다.
모든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상도덕을 지킨다면 이는 분명히
하느님이 당신의 손으로 마귀를 쫓아내듯 우리도 손으로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된다.
모든 사람이 다 손으로 올바른 일을 하게 된다면 이것 역시 하느님의 위대함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가 맞닿아 있다는 이야기다.
순명과 용서로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 /김희준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당신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때문에 이 세상은 그분의 뜻대로 움직여졌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세상을 보시고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불순종은 그 좋은 세상에 죄를 가져왔고,
악의 세력을 불러옴으로써 하느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을
감추고 덮어 버렸습니다.죄로 감춰지고 악으로 덮인 세상,
하지만 그러한 죄와 악을 걷어낼 때 자연히 하느님의 나라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죄와 악의 세력을 이 세상에서 걷어냄으로써
감춰지고 덮여 있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를 다시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인간의 불순종과 죄로 덮이게 되었다면,
우리는 순명과 용서로 그 나라가 드러나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열어, 마음의 문을! /안성철 신부님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신다. 이미 그들 마음의 문이 닫혀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께서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를 통해 오이를 먹지 못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소녀는 오이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오이를 먹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그런데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오이에 대한 선입견을 버릴 수 있었다. 오이에서 나는 향기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며 오이를 먹어도 아무런 해가 없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드디어
오이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중요하며
마음먹기에 따라 행동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단 이런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선입견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 자신을 그만큼 한계 짓고
다른 것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우리가 선입견으로 인해
스스로를 가두고 한계 지음으로써 잃어버리는 은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행하신다 하더라도 내 마음의 문이
닫혀 있다면 곁에서 나에게 속삭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 마음의 문을 열고 나를 가두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지평을 한층 넓혀 주시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해야겠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쫒아내고 있다 /이재혁 신부님
삼구(三仇)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영혼의 세 가지 원수가 되는 육신, 세속, 마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육신과 세속은 그 자체가 아니라 육신의 속성으로 일어나는 욕망을 말하고,
세속은 세속의 허망함이 우리의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본래 육신과 세속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영혼과 인간에 필요한 아름다운 피조물이지만,
그 속성으로 인해 악에 물들거나 그릇됨에 빠지기 때문에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반면 마귀, 즉 악마는 성서의 가르침대로 육신과 세속을
그릇됨으로 인도하는 사탄이며 영혼 구원의 원수가 됩니다.
이 삼구는 17세기에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설명하는 세 가지 원수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마테오리치가 저술한 “기인십편(畸人十篇)”에서는
‘이 세 가지 원수가 동맹하여 인간을 해한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지금하고 있는 일만 끝나면’,
‘나중에 좀 여유로워지면’. 많이들 들어보셨지요.
바로 지금 쉬고 있는 분들, 하느님께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육신과 세속에 발목이 잡혀 있는 분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내용들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게 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마귀를 쫒아내시는 것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
이라고 하시며, 우리들에게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더러운 악령이 어떤 사람 안에 들어 있다가
거기서 나오며 물 없는 광야에서 쉼터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전에 있던 집으로 되돌아가야지.’ 하면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 잡고 살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
마귀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
다시금 열심히 신앙생활 한 번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깨끗해진 영혼으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빨리 이해가 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듭니다.
자! 이제 답을 한 번 찾아봅시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쫒아내고 있다.”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를 쫒아낼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나의 힘이나, 나의 노력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능력만이
마귀를 쫒아내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깨끗해진 나의 영혼, 주님께로 나아가려고 다시금 결심한 나의 마음.
이제 그 마음 안에는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용서의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가득 찬 곳에는 결코 마귀가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위기가 지나갔다고 안심하거나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삼구와의 싸움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매 순간 세상을 포기하고, 육신의 욕망을 다스리며, 마귀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설령 넘어진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다시금 일어서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쫒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천국에 사는 아이 /양승국 신부님
세례를 준비하고 있는 한 친구가 슬며시 제게 다가와 묻습니다.
"사회에서 살 때 저질렀던 건수가 엄청 많은데...세례 받으면 다 용서해주시나요?
"어떤 사고를 쳤는데?"라는 제 물음에 아이는
그간 저질렀던 건수에 대해서 줄줄이 늘어놓았습니다.
미안해하면서도 아이는 자신이 친 사고들이
절대로 일부러 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생계유지형", "목숨부지형" 건수들이었음을 밝혔습니다.
자신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전혀 죄의식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도 많은데,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서 걱정하는 아이의 마음이 참으로 기특해 보였습니다.
새출발을 준비하는 아이에게 참으로 큰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그 아이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하는 짓이 너무도 제 마음에 들었던 아이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렇게 나한테 솔직히 고백한 이상 이미 네 죄를 하느님께서 다
용서해주셨을 것으로 확신한단다. 이제 더 이상의 방황은 없는거다."
환해진 아이의 표정에 제 마음이 너무나 흐뭇해졌습니다.
뉘우침과 화해, 용서와 사랑이 있는 한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과연 어떤 곳이겠는가? 자주 생각해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 그런 곳이 결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우리 사는 모습의 연장선상에 천국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 영혼이 지난 삶의 아픔을 접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그 출발선상이 바로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시(常時)로 용서가 이루어지는 곳,
언제나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지는 공동체야말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비록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이 계시기에
부단히 희망하고 기쁘게 견뎌내는 한 소박한
영혼이 머무는 장소가 바로 천국이리라 믿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하느님 상을 떨쳐버리고
진정한 하느님, 참 하느님을 우리의 하느님으로 모시는 곳이야말로 천국입니다.
삼라만상을 지배하시는 우주의 하느님이시자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조심조심 경건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무엇보다도 끝없는 사랑으로 매일 우리를 살리시고
자비로 감싸주시는 연민의 하느님 앞에 감사를 드리며
그 극진한 하느님 사랑을 이웃에게 보여주는
그 삶의 현장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일치 /허찬란 신부님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며
마귀의 두목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닌지 의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마귀가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겠느냐고 반박하십니다.
사탄은 항상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불신을 조장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십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욕심과 불목을 쳐 이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가요?
아니면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가요?
대중 가요 노랫말에 “당신 없인 못 살아”란 가사가 있습니다.
결혼한 부부가 처음에는 당신 없이는 못 산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다 조금 지나면 서로 지쳐서 당신 때문에 못 산다고 합니다.
직장에 처음 입사하면 신선하지만 점차
직장의 상사, 동료가 원수가 되어갑니다.
가정과 직장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조직이나
단체 안에서도 이런 모습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만큼 세상에 마귀들의 활동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세례의 은총에 힘입어
성가정, 성인이 되겠다고 따라 나섰으며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가
하느님 현존을 잊고 세상살이에만 몰두한다면 마귀는
어느새 나와 이웃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고 공동체 안에서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맙시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 오상선신부-
지방출장이 잦아서 여행중에 라디오를 많이 듣는 편이다
미리 채널을 고정시켜 놓았는데
나는 교통방송과 평화방송 두 채널을 주로 이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천안을 벗어나 남쪽으로 더 내려가게 되면
방송이 잘 잡히지 않아서 지지직 소리가 갈수록 많이 난다.
그래서 지역방송을 잡기 위해
주파수를 움직여가며 잘 잡히는 방송에 채널을 고정시키지만
때론 별로 마음에 안들어 꺼버리기가 일수다.
도움이 되기보다는 정신이 시끄럽고
그 지지직 하는 소리가 영 거슬리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예레미아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우리는 사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름대로는 노력하고 있는데
그게 잘 안 듣기니 문제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일까?
왜 잘 안 듣기는 걸까?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주님이 방송하시는 하느님 나라 방송국 채널을 못찾아서는 아닐까?
나는 내가 생각하는 주파수를 고집하고 있으니
하느님 나라 방송국 주파수를 못찾고 있는 것일 게다.
말하자면
하느님과 나 사이에는 다른 주파수 대역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 방송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 다른 주파수 대역을 찾아 정확한 채널을 잡아야 한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늘 지지직 소리만 나지 다른 방송 채널이 잡힐 뿐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 나라 방송 채널은 아주 민감하다.
아니 미세한 주파수 차이로도 그 방송이 잘 잡히지 않는다.
아마도 방해 방송이 많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마치 옛적에 이북방송을 들을라치면
방해공작을 많이해서 들을 수 없도록 만든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리라.
그래서 그 정확한 주파수를 찾아 헤메다가
소리가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 포기하고 꺼버리기가 쉽다.
자,
그럼 어떻게 하느님 나라 방송을 쉽게 찾을 것인가?
나는 지금도 교통방송 주파수와 평화방송 주파수를 잘 모른다.
몇 키로헤르츠인지도 모른다.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입력시켜 놓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 방송을 잘 아는 형제자매들에게서
물어서 입력시키기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정확한 주파수를 알아서 입력을 해 놓으면 깨끗한 음질로
그 방송을 들을 수가 있다.
문제는 이렇게 입력을 안 해 놓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정성을 다해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며 정확한 주파수를 찾아내는 길 밖에...
그 길은 바로
기도의 길이고, 봉사의 길이고
묵상의 길이요, 미사성제의 길이다.
나눔의 길이고 겸손의 길이다.
워낙 방해공작이 많아서 그 길을 찾기가 늘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꾸준히 그 정확한 주파수를 찾아 노력하면 찾아낼 수 있다.
우리가 신앙실천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성인은 무엇보다도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거룩할 <성>(聖)자는
귀 이(耳)변에 입 구(口)
그리고 하변에 임금 왕(王)자로 구성되어 있다.
동양의 현인들이 생각한 거룩한 사람이란
귀와 입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란 뜻이리라.
그 중에서도 입보다는 귀가 먼저임에 유의해야 하리라.
말하는 것보다 듣을 줄 아는 사람,
정확하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요, 성인이다.
자,
오늘
우리의 주파수를 한번 제대로 맞춰서 들어보자.
하느님 나라 방송국 채널과
이웃 사랑 방송국 채널을 찾아라.
사실 하느님의 음성은 고사하고
이웃 형제자매들의 음성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가 아닌가?
내 방송 채널을 고집하지 말고
채널을 돌려라.
그제서야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고
형제자매들의 음성이 제대로 들리게 되리라.
그래야만
비로소 하느님과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다시한번 주님께서
예레미아를 통해 하시는 말씀이 귓전에 맴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사랑의 결실, 일치 /양승국 신부님
오래 전 한 특별한 임종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 어르신 자식농사를 참 잘 지으셨더군요.
당신의 친 아들 딸들만 해도 거의 축구팀 한 팀이었습니다. 5남 5녀.
다들 보기만 해도 흐뭇할 정도로 잘 장성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잘 기반을 잡았고, 이젠
시집장가들을 가서 각 집에 딸린 자녀들까지 모두 합하니
4-50명이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수를 누리셨고, 자식들도 다 잘 자랐고,
그래서 아무런 아쉬움 없이 홀가분하게 떠나셔도 될 만한데,
그래도 뭔가 하실 말씀이 남아있었습니다. 임종 직전
힘겹게 내뱉으셨던 마지막 유언의 한 마디는 이랬습니다.
“형제간에 화목하게...”
형제간에 일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자식들을 두고 떠나가는 부모의 심정,
대체로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지니신 여러 품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 하나는 일치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치란 이런 것이다, 하며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는데, 그것은 바로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일치는
이 세상 모든 일치의 전형(典型)이자 모범입니다.
이런 일치의 모범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도 일치할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시기 전에
유언처럼 남겨주신 말씀이 일치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세상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좁디좁은 나라인데도
이 지역, 저 지역 서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 학교 출신, 저 학교 출신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당(黨), 저 당 갈라져
피터지게 싸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늘 우리에게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합니다.
이런 세상 앞에 우리 교회 공동체가
지니는 사명은 막중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제대로 한번 일치된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일치할 때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먼저 체험해야겠습니다.
분열과 반목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 신앙공동체의 일치된 모습을 보고, 무릎을 ‘탁’ 치면서
‘아 바로 저것이로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하고 외칠 수 있도록
삶을 통한 증거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결실은 일치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면, 간절히 그와의 일치를
갈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출신지역이나
출신학교를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나이니, 직급이니, 서열이니,
경제적 능력 같은 것을 따질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간 높은 장벽으로 남아있었던
높낮이가 사라집니다. 나와 다름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한 존재 자체만 남게 됩니다. 한 존재 자체만 소중하게 됩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서로 주고받으며, 아무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일치가 가져다주는 선물입니다.
집안에 베엘제불이 있다면? /김현숙 수녀님
모든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 모든 자녀는 부모를 사랑한다.
그러나 모든 가정은 행복하지 않다. 왜일까? 누군가는 눈치가 없어서라고 했다.
학생들을 만나면서 동감하는 부분이다. 때때로 잘살던 집이 갑자기 몰락해서
학기 초와 학기 말의 사정이 전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어떤 가정은
사랑으로 뭉치는가 하면 어떤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자녀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뿐 아니라 이제 꽃피기 시작한 인생을 절망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대로 성적이 괜찮았던 민선이의 성적이 갑자기 떨어졌다.
원인은 엄마의 중년기 우울증이다. 엄마는 아빠가 퇴근하는 밤 늦은 시간에 맞추어
심야극장이나 찜질방에 가자고 강요했다. 남편에 대한 일종의 시위인데,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을 방패 삼아 데리고 가는 것이다. 어떨 땐 일주일에 세 번이나
간다고 했다. “엄마가 아프니까요.”라고 말하는 민선이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림을 그리는 다정이는 엄마가 돈을 벌어다 주지만 엄마가 밉다고 한다.
옆집에 사는 친구와 늘 성적을 비교해서 결국 그 친구와 헤어졌다고 한다.
“너는 공부를 못하니까 그림을 배워 대학을 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미술학원에
다닌다는 것이다. “우리 집 안에는 또 한 채의 집이 있어요. 바로 엄마 방이에요.
아빠는 거실에서, 엄마는 안방에서 그렇게 별거 중이거든요.”
누구를 탓하랴! 냉혹한 현실에서 안간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을.
그러나 집안의 힘겨루기는 서로에게 큰 상처와 분열만 가져다준다.
차라리 나는 힘이 없으니 도와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만이
우리 집안의 베엘제불을 물리치는 최선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자유를 간직한 우리는 성령의 궁전 /이요한 신부님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첫 번째 죄는 바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였습니다. 인간의 이 교만이 죽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런 교만을 부추긴 것이 악마입니다.
악마에 대해 수호천사 기념일에 잠시 살펴보았지요.
악마는 인간에게 부여된 그 큰 은총에 대해,
특히 성모님의 특별한 은총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악마의 목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 명확합니다.
악마조차도 하느님 앞에서는 흠숭을 드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악마가 하느님께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인 죽음입니다. 그래서 악마는 교활하게 작전을 세웁니다.
바로 인간에게 악마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요즘 악마에 대해 이야기하면 구식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런 교활한 작전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교만은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고,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자연 재앙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는 만 년에 걸쳐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지만
최근 백 년 동안 자연이 자기 것인 양 행동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교만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고칠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악마가 ‘성공이다!’ 라고 외칠 때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이 세상 곳곳에서 활동하시면서
인간을 도와주고 보호하고 계십니다.
악마가 쉼 없이 활동하듯이 성모님과 천사와 성인들도 끊임없이
우리를 도와주고 보호하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우리 영혼 안에 주님의 성령께서 자리 잡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큰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보존하는 가장 완전한 길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우리의 완전한 자유를 보증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유에 의한 선, 또는 악의 선택 /박상대 신부님
선(善)과 악(惡)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두고 매번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장)고 하셨는데, 왜 악이 존재하는 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악에 대한 의문과 질문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어린아이나
의인(義人)이 당하는 불행을 직면할 때 더욱 고조(高潮)된다.
유사 이래 사람들은 세상의 선과 악의 문제를 두고 골머리를 앓아왔다.
우리가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신앙의 결론은
세상은 선하신 하느님에 의해 선(善)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악이 존재하는가?
가톨릭신앙은 사실상 악의 독자적인 존재를 부인한다.
잘라 말하면 악은 선의 결핍(缺乏)이다.(토마스 아퀴나스)
그러므로 악의 존재를 인정하려들기보다는
선의 결핍을 안타까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천사론(天使論)에 관한 가톨릭신학은 세상과 인간보다 먼저
천사들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창조된 천사들 중에서
순전히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동등한 존재가
되기 위해 교만과 허세를 부리던 천사들이나,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 천사들이 타락하여 마귀의 무리가 되었다.
천사들이 하느님의 사자(使者)로 창조되어
하늘에서는 하느님을 보필하고, 땅에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임무를 가졌다면,
마귀들이 그 반대의 행세를 할 것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세상을 사는 인간도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물리적(物理的)으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영적(靈的)으로
천사와 마귀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마귀의 세력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자유의지가
약해지거나 심한 경우에는 전부를 약탈당해
사람의 구실을 못하고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거나,
나쁜 악행을 반복해서 습관적으로 저지른다면
‘마귀 들림’을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복음서들이 왜
예수님의 구마기적활동에 그토록 비중을 두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은 바로 마귀 들린 그 사람에게
다시금 자유를 회복시켜주는 것이며, 회복된 자유는 또다시
선(善)과 악(惡)을 두고 선택의 기개(氣槪)를 과시하게 된다.
특히 마귀가 들려 귀머거리가 되거나 반벙어리가 된 사람들을
구마하여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은 단순히 마귀를 쫓아낸 일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치유된 사람에게 ‘말을 들음’과 ‘말을 함’의 기능,
즉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발설의 기능(대화)을 되돌려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벙어리 마귀 하나를 쫓아내신
예수님의 구마기적행적을 두고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려 든다.
반대자들은 예수께서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세력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마귀와 그 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은
마귀자신들에게도 있고, 하느님에게도 있다.
마귀들이 다른 마귀들을 쫓아낼 수는 있지만 그것은 마귀 들렸던
사람을 이전보다 더 비참하게 만들기 위함이다.(24-26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구마(驅魔)하심은 사람에게 인간본연의 품위와 자유,
그리고 말씀의 경청(傾聽)과 발설(發說)을 돌려주시기 위함이다.
이 일을 예수께서 하신다면 그는 하느님이시며, 그로 인해
이 땅에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20절)
이에 인간은 언제든지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선(善)의 편에 설 수도, 악(惡)의 편에 설 수도 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으로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교회 /양승국 신부님
강을 건너가다가 죽은 물고기 떼를 보았습니다.
생명이 다한 물고기들, 크기는 엄청 컸지만, 죽고 나니 재미가 없었습니다.
색깔도 희멀거니, 냄새도 비릿하니, 정말 보기조차 싫었습니다.
그저 둥둥 물살에 실려 떠내려갈 뿐입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물고기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 마리 낚아 올리면 파닥거리는 그 모습에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멋지게 뻗은 지느러미며, 고운 빛깔이며, 잘 빠진 몸통이며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임을 새삼 느낍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그 녀석들은 물결을 거슬러 다닐 줄 압니다.
꽤 높은 수중보 앞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점프를 해서, 위로 솟구칩니다.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그저 시류에, 대세에,
사회풍조의 물결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는 본질상 살아있는 물고기의 속성을 지녀야 합니다.
세상을 거슬러 올라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현세에 대한 건전한 비판기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 각자는 살아 숨 쉬는 공동체의
핵심세포로써 꾸준한 자기 성찰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부조리한 현실에 당당히 맞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살아있는 교회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요소는 ‘성령의 현존’입니다.
생명의 지속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숨’ ‘호흡’이듯,
교회가 살아있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계시지 않으면 우리 교회 공동체는
그저 하나의 단체일 뿐입니다. 돈 모아서 놀고 먹고 헤어지는
계모임과도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아무리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는다할지라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결국 머지않아 소멸될 것이 확실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우리 교회는 낡은 건물일 따름입니다.
음산하고 흉흉한 폐가로 전락할 것입니다. 죽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께서 우리 교회 안에서
활발히 움직이실 때,
우리 교회의 주인이 되실 때,
교회 안에는 하느님 나라가 서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복음말씀들은 건전한 영성으로 발전하고,
그 영성은 신자들의 삶을 활짝 꽃피우는 강력한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사탄’,
‘더러운 영’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과 당당히
대적하시며, 모조리 섬멸하심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생각만 하기도 싫은 ‘마귀’, ‘사탄’, ‘악령’, ‘더러운 영’,
‘베엘제불’... 오늘날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성령의 부재 상태가 마귀의 지배 상태가 아닐까요?
성령의 결핍 상태가 악령의 공간이 아닐까요?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실 때,
성령께서 머무실 공간이 더 이상 없게 될 때,
그 자리는 더 이상 생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비릿한 냄새만 진동합니다.
성령께서 떠나간 그 자리는 순식간에
마귀나 사탄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일치나 형제애,
나눔이나 기쁨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사탄이나 악령의 활동의 표시인 미움,
증오, 분열, 전쟁이 찾아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기도는
성령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기도입니다.
성령께 우리 삶을 의탁하는 기도입니다.
“성령님, 나를 비춰주십시오. 나를 지켜주십시오.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를 일으켜주십시오.
나를 진정 살아있게 하십시오!”
하늘나라의 시스템 /이수철 신부님
하늘나라 시스템이든 사탄의 시스템이든
시스템을 벗어나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옛 수도자들은
하늘나라 시스템 안에서 살기 위해
사막을 찾았습니다.
이 수도자들은 사막에서 하느님을
찾아 만났고
사탄과도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에덴동산에도 사탄을 상징하는 뱀이 있었듯이
하늘나라의 시스템 역시 선과 악이,
하느님과 사탄이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악마와의 영적전쟁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기도한 수도자들이였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고
기도로 악마와의 싸움에 이겼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수도승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빛에 그림자 따르듯
하느님에 뒤따르는 악마입니다.
우리 안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악마들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하십시오.”
이런 믿음 있어야 악마를 대적할 수 있고,
사탄의 시스템 세상 안에서도
하늘나라의 시스템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순간
‘아, 이게 예수님의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악의 세력에, 시스템에
포위된 형국입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 낸다.”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
성령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 낸
예수님에 대한
율법학자의 무지와 악의에 찬
성령을 모독하는 비판입니다.
예수님을 평생 공격한 사탄이었습니다.
하와를 유혹한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고,
베드로를 통해, 또 십자가의 죽음 현장에서는 군중들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사탄과의 영적전쟁에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것은
조무래기 사탄들이 아니라 견고한 연대를
과시하는 사탄의 시스템입니다.
율법학자, 사제들, 원로들, 집권 세력의
철옹성 같은 연대의 악의 시스템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탄의 시스템에 의해
희생되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지만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시스템을 붕괴시켰고
하늘나라 시스템의 교회공동체를 탄생시켰습니다.
이어 이 하늘나라 시스템의 교회공동체가
악의 시스템과도 같은 로마제국을
붕괴시켰고 그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깨어 주님의 뜻에 따라 살 때
하늘나라 시스템의 교회공동체입니다.
유혹에 빠져 세속화로
권력집단이 되어 버릴 때
사탄의 시스템으로 변할 수 있는 교회요,
중세교회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탄의 시스템 공동체를
하늘나라 시스템 공동체로 변모시키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며 하여,
미사 은총이 그리도 귀합니다.
용산참사의 현장 중심에는 늘 미사가 있었고
세상 악의 시스템과 대결
할 때도 그 안에 늘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미사은총이 사탄의 시스템 세상 안에서도
하늘나라의 시스템을 살게 합니다.
바로 히브리서 말씀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사탄의 시스템이 붕괴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재자이십니다....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게 하시려고 바로 하늘로 들어가신 것입니다....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쳤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덕분에
죄와 율법, 죽음의
사탄의 시스템에서 해방된 우리들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미사은총으로
확장되는 하늘나라 시스템입니다.
오늘날 정치계의 화두는 ‘복지’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복지국가를 이야기합니다.
무상급식에 이어,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이야기하고
주택 문제, 일자리 문제의 해결을 거론합니다.
이런 복지의 모델은 하늘나라 시스템
공동체를 추구하는 수도원입니다.
수도원 안에 살고 있는 수도자들은
공동체의 배려 하에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의료,
주택문제(방)의 해결, 일자리(소임) 보장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복지가 사회 전반에 걸쳐
서서히 실현되면서
확장되는 하늘나라 시스템이요
약화되는 사탄의 시스템입니다.
어쨌든 세상은 모두가 이런
공존 공생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희망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사탄의 시스템 세상 안에서도
하늘나라 시스템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갈라져서 싸우면 /강영구신부님
예수님, 저희들은 당신을 스승이요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저희가 당신을 스승이요 주님으로 고백하는 까닭은,
당신이 힘이 세거나 싸움에 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 땅에 투사鬪士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악마와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싸워서 이긴 승리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낫게 하고 품어주고 감싸 안음으로서 이긴 승리자입니다.
당신은 높은 곳에서 군림함으로서 승리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봉사하고 내어줌으로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당신이 사탄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졸개 사탄을 몰아내신 것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인 사탄이 빛이신 당신을 감당할 수 없어서 스스로 물러간 것입니다.
빛이 머무는 자리에 어둠이 있을 수 없고,
聖靈이 머무는 자리에 惡靈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 善用人者爲下之.
是謂不爭之德, 是謂用人之力, 是謂配天, 古之極.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훌륭한 무사武士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훌륭한 전사戰士는 노하지 않는다.
훌륭한 승리자는 적과 더불어 싸우지 않는다.
사람들을 잘 부리는 자는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차지한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음의 덕’이라 하고, ‘사람 부리는 힘’이라고 하고, 이를 일러
‘하늘과 짝함’이라 하니, 예부터 내려오는 도道의 지극함이다.”
예수님, 당신은 싸우지 않고 이긴 하늘의 짝(配天)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 어리석은 인간들은 편 가르기를 좋아합니다.
편을 가르면 적敵이 생깁니다. 적은 힘으로 제압해야 합니다.
힘겨루기로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의 약점과 흠집을 들추어내고,
상대의 아픈 곳을 들쑤셔야 합니다.
이렇게 편 갈라 싸우는 것을 악마惡魔가 제일 좋아합니다.
악마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악마의 졸개요 하수인입니다.
예수님,
저희가 오늘 하루를 당신의 제자로서 살도록 이끌어 주십시오.(一明)
♪ Spiritual Energy - 성령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