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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 일심이란 무엇인가 ?
일시 : 2024년 7월 28일 10시 50분
장소 : 불광법회 (보광당)
법사 : 한자경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불광법회 2312회 그 날 / 무더운 여름날의 하루를 법회 참석하신 법우형제 분들과 함께 했습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불광법회에서 저를 강연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그 인연으로 여러분들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근데 제가 이렇게 큰 법당에서 이렇게 많은 분들 앞에서 강연을 해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 지금 몹시 떨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일심이란 무엇인가? 우리 대승불교에서 일심을 많이 강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심이라는 게 무엇인가 붓다가 설화신 무아와 연관해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릴 거는 50분 내에 말씀드리도록 노력할 텐데요.
무아 석가모니 께서는 또 무아를 설하셨는데 어떻게 일심일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제기하고
먼저 그래서 이제 민심을 성찰 시대의
마음이라고 강조를 하시고, 지눌 같으면 공적영지다. (보이는 것 없고 들리는 것 없는 공적인 마음 상태가 스스로를 신령하게 아는 것 “영지”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의 본래 마음은 일심이다. 그걸 강조를 하고 있죠.
앞에서 무아를 말씀하실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실 때 모든 것이 무상하다 무아다 말씀하셨는데
일심은 그렇게 일체는 다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인데
일심은 그 인연에 따라 변화하는 전체를 만들어내는 마음이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인연따라 만들어진 것의 바탕인데 그 자체는 인연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인연따라 만들어진다고 연기설을 말씀 하셨는데 대승에서는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
일심을 이야기하고 불성 만들어졌다 없어졌다 하는 게 아니잖아요.
중생의 본래 면목으로서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두 개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제 심지어 대승을 비판하면서 특히 이제 요즘에 와서 남방불교 산자복 불교가 들어오고 나서는 니까이 경전에 입각해서 초기 산자복 불교를 강조해야 하면서 대승 불교에 대한 비판이 굉장히 심하게 대두가 되죠.
일본의 비판불교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그런 거가 굉장히 이제 주장이 되고 있는데 그래서 일심을 설하는 대승은 이게 부처님의 본래 말씀이 아니다. (이거 힌두화한 불교다 이런 말씀 여러분 많이 다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 책 제목 인지 논문 제목 인지 이런 식으로 이제 주장이 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 전통적인 사상의 대승 불교인데 이런 식으로의 대승 불교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입장에 있을 수가 있는데 그렇게 보지 않고 일심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설하신 무화서를 완성하는 것이다.
대승의 초기 불교 사상하고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무아를 말씀하셨는데 그 무아를 깨달은 마음이 바로 일심이다. 라고 볼 수 있다. 라는 거죠.
그래서 무아의 숨은 뜻이 무아로 설법을 하시면은 그 무아를 깨닫는 그 마음을 되찾으라는 뜻이기 때문에 숨은 뜻 (밀의)에는 바로 일심이다.
무아 사상은 바로 일심으로 완성된다. 대승은 초기 불교의 완성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는데 저는 이제 대승불교 쪽의 관점에서 전자가 아니라 후자를 이번 강연에서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이제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를 깨달으셨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게 뭐냐 연기법을 깨달으셨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일체는 연기법에 따라서 생겨나서 무상하고 고이고 공이고 무화다.
이 연기법을 간략하게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 그러면 이것과 저것의 모든 게 다 막 들어갈 수가 있겠죠.
근데 부처님이 설법하신 중에는 그 이것과 저것의 특정한 것들을 집어넣어서 쭉 설명하신 것이 바로 십이지 연기설이 되겠죠.
그러니까 12지 연기는 이제 업보의 원리를 따르는 연기다.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업보라는 거는 인화에 해당하는 거죠.
현생을 중심으로 보면은 현생의 식으로 시작해서 온 명색이 되고 6입처 촉수 까지가 전생의 업의 보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어떤 느낌을 갖게 되면은 좋은 느낌은 내가 좋아하고 애가 일어나는 거죠.
싫은 느낌은 싫어하고 애증 그다음에 내가 좋아하는 거는 취하려고 하고 싫어하는 거는 피하려고 하고 취사의 선택이 일어나기 때문에 분별적 선택 이게 이제 "업"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래서 현생에서 "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업을 지으면서 그 업력이 쌓여서 현생이 끝나면 그게 이제 현생이 되고 그 업력이 다시 결과로써 내생을 이끌어온다.
그래서 12지 연기를 전생의 업에 의해서 현생에 보가 생기고 그 보 안에서 다시 업을 짓기 때문에 내생에 보가 생긴다.
그래서 전생 현생 내생 3세 업보는 두 번 나오잖아요.
그래서 3세 양중인과(업보의 원리)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이제 붓다께서 말씀하신 12지 연기를 이제 업감 염기다 나중에 이제 유식에서 뢰야 염기다 이렇게 대비시켜서 업감 염기라고 이야기하는데 아까 말씀드렸던 거죠.
업을 현생 애초에 업을 지으면 업력이 쌓여서 죽으면은 그게 이제 중음신이 되고 이 중음신이 다시 식으로 수정란에 들어가면 이제 생명체가 되는 거죠. 그래서 수정란에 들어간 식에 의해서 오온이 형성되고 심신이 만들어지고 근 유기처 명색 다음에 유기처가 근과 경이 갖춰지게 되는 거죠. 아니비설신의 근 색성향미촉법 경이 갖춰져서 이 세상에 나오면은 이제 근과 경의 부딪침이 있고 어떤 느낌이 있고 그걸 보라고 할 수 있는 전생의 보라고 할 수 있고 애를 취해 업을 지으면 이게 업력이 쌓이는 게 저 유는 유에 해당 업력이 있음 업유에 해당하는 거죠.
그것이 중음신을 이루어서 다시 또 시골에서 태어나게 되고 그러니까 오온이 지은 업인 애와 취의 업력이 남아서 보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고 그 보로서 이렇게 빙 돌아와서 이게 이제 현생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내 생으로 돌아오는 걸 이렇게 이제 순환이 된다라는 의미에서 연결을 시켜봤고요.
업의 보로서 근이 내 몸이 되는 거죠. 심신의 몸이 되고 세계 경이 세계를 이루기 때문에 그거를 업에 따른 보를 초기불교에서는 정보 의보 이렇게 구분하지 업의 정확한 보가 정보일때 유근신에 해당하고 그 몸들이 중생의 몸들이 의거해 사는 세계 그래서 의거할 의자 써서 의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나와 세계가 업에 의해서 형성된다. 라는 그래서 이제 윤회를 계속하게 되는 거다. 이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제 12지 연기를 업감 염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이것이 그대로 대승으로 가면은 대승이 뢰야 연기라고 12지 연기를 이해하는데 그게 업감 연기하고 다른 게 아니라 그냥 똑같은 구도인 거예요.
업을 지어서 업력이 쌓이면 업을 짓는 것이 우리의 표충식이기 때문에 의식 말라식 이런 식들이기 때문에 그 식에 의해서 업을 지으면 그 업력이 남겨지는데 뭔가 남아 있어야지 그게 나중에 보를 낳게 되니깐요.
그 업력이 어디에 남겨지냐 그 업력을 유식에서는 종자라고 이야기하고 마치 나무에서 씨앗이 떨어지는 걸 씨앗의 종자라고 하듯이 업을 지으면은 그 업력 종자가 어디에 남겨지냐면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지 않는 심층 아뢰야식에 남겨둔다라는 거죠.
그래서 그 과정을 현행 훈 종자 훈습한다라고 얘기하고 현행 훈 종자가 되면 그 종자들이 아뢰야식 안에 머물러 있다가 또 시절인연이 갖추어지면은 그 종자들이 현행한다라는 거죠.
그래서 그 보를 맞는다라는 거죠. 그럼 그거를 "종자생현행"이라고 유식에서는 이야기하는데 이제 현행화되는 거죠.
구체화된다라고 말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돼서 5온이 형성되고 근과 경이 형성되고 앞에 “업감염기”하고 마찬가지 구도인 거죠.
유근신과 기세간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어이 아뢰야식의 종자를 훈습하고 그 종자가 현행화하여서 결국 나와 세계를 형성한다.
그게 이제 종자생 현행이다. 그러니까 대승불교가 이 윤회의 과정을 설명하는 뢰야연기로서 설명하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업감 연기로 설명하신 것하고 똑같은 구도라는 거죠.
그래서 이제 앞에 두 개를 정리해본 겁니다.
과거 업이 남긴 업력 업력을 유식에서는 종자라고 얘기하고 우리가 요즘 개념으로 말하자면 세상을 보면서 어떤 경험을 하면은 그 경험의 정보가 남겨지지 않습니까?
그게 나를 이루게 되는 거죠.
정보라고도 할 수 있고 어떤 개념이 심겨진다라고도 말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그것이 축적되면은 그것이 결국 현생의 나 이제 업감 연기에서는 정보라고 얘기하고 유식에서 유근신이라고 이야기하죠.
나와 세계 의보 기세간이 만들어진다라는 것이고요.
유식의 통찰은 그러니까 붓다의 통찰은 과거 생의 업이 현생의 보를 만든다. 라고 설명해서 업감 연기라고 이야기하고 유식의 통찰은 저 업감 염기를 조금 더 식과 종자로서 설명을 하는 거죠.
아뢰야식 종자가 심겨져서 그것이 결국 발현돼서 구체화돼서 아뢰야식의 식소변인 류근신과 기세간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걸 이제 뢰야연기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12지 연기에 따라서 설명하는 것을 보면은 모든 것은 결국 인연 따라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무상한 것이고 그래서 허무한 것이다 허망한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죠.
여기까지는 불교를 아시는 분들은 모두 다 당연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저 당연한 것들에 대해서 이런 물음이 생길 수 있다라는 거죠.
일체가 인연소생이다 라는 것을 깨닫는 그 부처의 마음도 인연소생인가 인연에 의해서 그냥 생겨난 마음인가 그 말씀은 재행 무상하다라고 설법하셨죠?
그럼 재행이 무상하다라는 거를 깨달으시고 말씀하신 거고 깨달으라고 말씀을 해 주시는 거죠.
그러면 그 깨달음도 결국 무상한가 라는 물음을 물을 수 있겠죠.
그러니까 일체가 무상하다라는 것을 깨닫는 마음도 그 일체에 포함되냐 일체에 포함되면 무상한거가 되겠죠. 일체에 포함되지 않으면은 일체가 무성하다고 그랬는데 그럼 그 일체에 포함되지 않으면은 일체가 아니니까 저 명제는 틀렸다 이렇게 되겠죠. 만약에 일체에 포함되면은 일체가 무성하다 깨달음이다 이거 진짜 진리다 이러고 얘기했는데 그 깨달음 자체 그 진리지 다 무상한 거야 이렇게 되면은 자기 부정이 되는 거죠.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라는 거죠.
이런 문제는 이제 철학에서 거짓말쟁이 역설이라고 논의되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다 이렇게 내가 말을 하면은 이게 이제 자기 지시적인 명제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문장이 갖는 역설이 있다라는 거죠.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다. 만약에 이 말이 참이면 이 말이 참이면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을 하는 게 참이잖아요. 내가 한 말이잖아요. 저 명제가 그럼 그게 거짓이 되는 거죠.
근데 참으면 거짓이 되는 거고 그러면 그거 안 되니까 그러면 저 문장이 거짓인가 그러면 거짓이면 내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라는 거가 거짓이니까 참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문장이 참이라고 하면 절대적 진리 부처님의 말할 가치가 없는것이 되고 그게 안들어 간다면 그러면 모든것에 그게 빠졌는데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거죠 저런 역설을 어떻게 해결하해야 되는가 ?
저런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명제 안에 포함된 언표된 내용하고 그 내용을 깨닫는 마음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라고 둘로 구분해야 함으로써만 저 문제가 해결이 된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저거를 둘로 구분한다라는 것은 그러니까 모든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먼저 꼭 불교에서 불교 수업 시간에 뿐 아니라 일반 철학 시간에도 모든 것은 변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이제 서양 철학자 이야기했었던 것인데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면 학생들이 어떤 질문을 하냐면은 선생님 그 말도 변하는 거 아닐까요?
그말 들어니까 진리 아니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이 금방 나오게 되는 거죠.
그랬을때 이제 저 역설을 건드리는 건데 그거를 해결하는 방법은 뭐냐면은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그 내용하고 그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그것을 깨닫는 마음 그것의 엄표 그 내용 그 마음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 둘을 구분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저렇게 둘을 구분한다는 거는 다시 말하면은 제 눈을 위해서 보여진 세계하고 이 세계를 보는 눈하고를 같은 차원으로 놓을 수 없다라는 거죠. 물론 눈이 딴 사람이 보니까 보여진 것이다라고 볼 수 있겠지만 보여진 눈이랑 보는 눈은 구분이 되는 거죠. 왜냐하면 보여진 눈은 전체 중에 요 자리에만 있잖아요.
근데 보는 눈은 전체를 다 보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지정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어디에 있는 것이다라고 그러니까 보여진 세계하고 보는 눈을 두 차원으로 구분해야 되는데 저걸 구분한다라는 얘기는 보는 눈은 보여진 세계 속에 다시 보여지지 않는다라는 거죠. 그죠? 보는 눈이 보여준 세계 속에 있지 않잖아요. 안 보이는 거죠. 보는 눈은 그래서 이제 진울이 한 말이죠.
눈이 보이지 않는데 딴 건 다 보는데 보는 눈이 정작 보이지 않는다고 보자.
그러고 눈을 빼서 보는 그런 바보가 있겠냐 그러니까 눈은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보여지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그게 바로 그 눈이 뭔지를 아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는 결국 두 개의 차원을 구분해야 된다라는 거죠.
보는 눈을 보여진 세계 속에서 찾을 수는 없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구분은 분별이 있는 상대의 세계하고 이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다 분별이 성립하는데 그 분별을 분별로 알아차리는 마음은 분별을 넘어선 것이고 상대를 넘어선 절대의 눈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거죠.
그런 식으로 두 차원을 구분 함으로써만 앞에서 말씀드렸던 역설이 해결될 수 있다라는 거죠.
그 구분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과 그것을 아는 마음, 인연 따라 일체가 인연 따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아는 마음은 둘로 구분된다라는 거죠 그 마음도 인연 따라 만들어진 거다. 이렇게 되면은 그 명제가 상대화되니까 두 차원을 구분해야 된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은 반연심이라는 거는 여러분 다 아시는 개념이죠. 그 대상 연을 반연해서 붙잡아서 일어나는 마음 우리 일상의 의식이 반연심인 거죠. 대상이 있으면 되고 아는 마음이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인연에 따라서 만든 마이크를 아는 의식은 마이크가 있어야지 마이크를 보는 의식이 생기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대상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 이건 이제 상대적인 마음이다. 의식은 상대적인 마음이다. 대상이 다 없다 그러면은 대상 다 없애고 보지도 듣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고 사유 대상도 다 없애고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이거 이제 수행이라고 할 텐데 그러면 제일 우리가 쉽게 하게 되는 게 죽는거죠.
의식이 이렇게 가라앉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대상에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에 대상이 없으면 같이 수그러드는 그런 걸 이제 표층의식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거는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볼 수 있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일심 열회장 이런 것들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라고 볼 수 있겠죠.
일심은 그럼 어떤 것이냐에서 앞에서 이제 말씀드린 것이지만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는 말은 절대 이 시점에서만 성립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상대적인 것을 넘어서는 눈을 가져야만 일체가 상대적이다라는 걸 볼 수 있다라는 거죠. 저 말은 모든 게 꿈이다. 일장춘몽이다. 이걸 깨달으려면은 꿈이 아닌 깨어남이 있어야지 이게 꿈이었구나를 알게 되죠. 우리가 꿈속에서는 꿈인 줄 모르잖아요. 꿈에서 깨어나니까 각이 있으니까는 깨어남을 알겠죠. 인생 전체가 꿈이다. 그러면 꿈에서 깨어나야지 이게 꿈이었구나를 알게 되는 거겠죠. 그러니까 꿈의 차원하고 깨어남의 차원은 구분이 된다라는 거죠.
강물의 흐름을 알려면 그 흐름 바깥을 알아야 되는 거죠. 흐름 속에 들어가서 같이 흘러가고 있다.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흘러가는지도 모르겠죠. 그게 바로 우리가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데 지구는 돈다고 그러잖아요. 천문학적으로 그러면은 근데 도는 거 아는 사람이 있냐 지금 그럼 이거 맨날 의식하고 있으면 어지러워지겠죠. 지구 위에서 같이 돌고 있기 때문에 그걸 알 수가 없는 거가 되는 거죠. 함께 돌면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도는 것을 알려면 돌아가지 않는 지점에 눈이 있어야지 이것이 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일체가 인연 소생이라는 연기법을 알아차리는 그 마음 자체는 인연소생, 인연 화합의 산물이 아니다라는 것 인연 소생이 아닌 것 인연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이 있어야 된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모든 것이 인연소생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이미 저 지점에서 서서 말씀을 하신 거다. 그럼 부처님께서 진짜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겠죠.
이게 초기 경전이죠. 우다나 초기 경전에서 수행자들이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죠. 모든 것이 다 형성됐다. 인연 따라 형성됐다. 그런데 저러지 않은 것이 있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죠.
만일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것으로부터의 벗어남(해탈)이 없을 것이다.
만들어진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있어야지 그쪽으로 벗어남이 있게 되겠죠.
없다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난 것으로부터의 벗어남 해탈이 알려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들이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것으로부터 인연 세계 윤회하는 세계로부터의 벗어남 또 알려진다라고 말씀을 분명하게 하시고 계십니다.
루다나 경전에서
그럼 우리 안에 저런 마음이 생겨나지 않은 마음, 불상 불멸의 마음 이런 마음이 진짜 있나 이런 이제 우리 안에서 잘 안 발견되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을 의식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음이 뭐지 그럼 지금 여러분이 제 말씀을 듣고 계시잖아요. 그럼 어쨌든 뭔가 생각을 하시든지 제 말씀을 듣든지 그렇죠 그게 바로 내 마음이다 이렇게만 생각을 하시는 거죠.
근데 그렇기 때문에 그거 너머에 어떤 마음이 있을 거다라고는 잘 생각을 안 하게 되죠.
대상이 있으면 의식이 있다. 그 의식이 바로 내 마음이다 이렇게만 생각하죠.
그래서 능엄경에 보면은 부처님께서 라훌라한테 종을 치라고 그래요.
그래서 종을 땅 치니까 아난한테 듣느냐 그랬더니 듣는다.
멈췄어요. 소리가 없어지면 듣냐 그랬더니 안 듣는다.
그다음에 다시 또 라훌라한테 종 치라고 그랬더니 듣는다 그랬더니 듣는다 그래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은 종소리가 없다고 안 들으면 저 종소리가 없다고 안 듣는다는 건 우리 일상 의식은 뭐냐면은 대상이 있어야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반연심이기 때문에 대상이 있어야지 활동을 한다라고 생각하죠.
우리가 뭘 먹는다 그러면 뭐 먹는데 그러면 사과를 먹든 밥을 먹든 빵을 먹든 대상이 있어야 되잖아요. 대상이 없으면 안 먹는다가 되는 거죠. 그런 것처럼 의식은 대상이 없으면 의식이 없다라고가 된다라는 거죠.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난은 종소리가 있으면 듣고 종소리가 없으면 안 듣는다 그렇게 생각하죠. 깜깜한데 여러분이 있으면은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안 본다고 생각해 눈 감으면 우리 안 보잖아요. 근데 눈을 떠도 깜깜하니까 감은 거랑 똑같아 그러니까 안 본다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대상이 없으면 안 본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종소리가 없다고 안 들으면 들리는 소리가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 들어야지 들리는 소리가 없다는 걸 알잖아. 깜깜해서 안 본다고 그러는데 보이는 게 없으니까 안 본다고 그러잖아요. 근데 봐야지 보이는 게 없음을 알죠. 말씀 듣고 보면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대상이 없어도 보이는 게 없어도 그거를 아는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보이는 게 없음을 아는 마음은 보고 있다라는 거 봐야지 보이는 게 없음을 아니깐요. 그러니까 종소리가 없다고 안 들으면 들리는 소리가 없으면 어떻게 아냐 또 그래서 진짜 소리가 없을 때 안 듣고 있었으면 소리 나도 안 들려야 되잖아요. 이렇게 마치 눈을 감아서 안 보였으면 앞에 뭐 있어도 눈 감고 있으면 안 보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안 듣고 있었다. 그럼 소리가 나도 안 들어야 되는데 그러므로 소리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듣는 마음의 활동은 있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들리는 소리가 있을 때는 소리를 듣고 들리는 소리가 없을 때는 소리 없음을 듣는다라는 거죠.
그래야지 들리는 소리가 없음을 우리가 알게 되겠죠.
그러니까 소리가 없을 때 깨어 있는 마음 의식의 대상이 다 없어도 감각 대상이 다 없어도 깨어 있는 마음이 있다라는 거죠. 근데 그거를 내가 잘 유지를 못하기 때문에 금방 잠들어버리니까 마치 이런 게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런 마음이 있다. 그러니까 대상에 따라서 일어나는 상대적인 마음은 제육 의식이고 그걸 이제 반연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상의 유무와 상관없이 항상 깨어 있는 그런 절대의 마음이 있다. 그러니까 대상에서 일어나는 마음은 상대적인 거죠. 근데 그게 아닌 절대의 마음이 있다.
그걸 바로 일심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라는 거죠.
왜 저 절대의 마음은 상대적인 마음은 대상에 따라서 생겨났다. 없어지면 같이 멸하고 이렇게 생멸하는 거죠. 그러니까 움직이는 거죠. 움직이는 동하는 것인데 이제 부처님께서 저것도 또 능엄경에 나오는 거죠. 부처님께서 아난한테 주먹을 폈다 쥐었다 이렇게 합니다. 그 손은 움직이는데 뭐가 움직이냐 그랬더니 보여진 손이 움직이지 보는 마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 이거 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막 움직이지 않잖아요. 딱 마음은 정해져 있고 이거 손만 움직이는 거죠. 움직이는 것은 객관 대상이지 주관이 아니다. 근데 그다음에 부처님께서 아난이 이렇게 마주 앉아 있으면 요 손끝에서 레이저가 나오시나 봐요. 부처님 신통력이 아까 있으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까 여기 이제 레이저로 탁 이쪽을 탁 쏴요. 그랬더니 불이 이쪽으로 날아가니까 아난이 이쪽을 딱 보고 이쪽으로 탁 하니까 고개를 여기서 이쪽으로 탁 봅니다. 이쪽 이쪽 이렇게 고개를 돌리는 거죠. 그러니까 보는 마음이 정지해 있는 게 아니라 몸이 정지해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잖아요. 그러니까 빛을 좌우로 날리니까 아난이 머리를 좌우로 돌려서 이제 빛을 보는데 부처님께서 그럼 뭐가 움직이냐 그랬더니 대상을 따라서 머리가 움직이는 거죠. 근데 머리가 움직인다라는 건 그 안에 신경세포도 같이 움직이는 거죠. 그죠? 신경세포의 활동에 의해서 생겨나는 의식 제육 의식 상대적인 마음인 거죠. 그것도 같이 움직이는 거라고 볼 수 있죠. 그거는 움직이지만 보는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머리는 움직이지만 머리는 움직이지만 그 보는 마음이야 움직이겠습니까? 아난은 이렇게 대답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움직이는 것은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부동의 것이 주관이 되지만 주관 중에서도 반연심은 움직이는 것에 해당하고 보는 마음은 부동의 것이다. 그래서 이제 능엄경에서는 그 마음이 절대의 마음이다. 움직이지 않는다. 상멸하지 않는다. 이제 이런 마음의 본질을 쭉 10가지로 설명하는데 이제 저런 예가 나오는 거죠.
그럼 우리 안에 그렇게 절대의 마음이 있는데 그렇게 부동의 마음이 있는데 자신 안에 부동의 마음 잘 못 느끼잖아요.
매일 마음이 흔들리고 움직이고 그러니까 괴롭고 뭐 이렇잖아요. 왜 그런가 이제 능엄경에 그것도 나오는 겁니다. 왜 그러냐 그랬더니 달은 움직이지 않지만 달을 가리는 구름이 그 앞에서 움직이고 있으면 우리 어떻게 보여요?
구름이 움직이는 걸로 보이지 않고 달이 움직이는 걸로 보이죠. 그죠? 달이 움직인다고 여기게 되는 거죠. 그건 왜 그러냐면은 시선은 구름에 딱 놓고 구름이 고정돼 있고 달이 움직인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지만 실제로는 달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고 구름이 움직이는 거죠. 저건 마치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그죠? 달은 가만히 있고 구름이 움직이면 구름에 달가듯이 이렇게 간다라는 거. 그런데 실제 달은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거죠.
본심인 일심도 불생불멸이고 거래가 없는 움직임이 없는 건데 일심의 가리는 번뇌가 앞에서 생멸을 하면 막 움직이면 구름처럼 움직이고 있으면 근데 우리 마음이 일심의 자리에 위치하지 않고 번뇌인 여기에 자기 마음을 딱 두고 있으면 이게 움직이니까 뒤에 달이 움직이듯이 일심이 움직인다고 여기는 거죠. 이걸 그러니까 불변의 마음이라고 알아차리기 어렵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일심이 생멸한다고 여기게 되는 거죠. 그 까닭은 이 시선이 번뇌에 머무르기 때문에 우리 반연심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지만 그래도 일심은 불생불멸로 항상 거기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죠.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럼 상대적인 마음하고 인연에 따라서 생겨나는 현상하고 상대적인 마음이 붙잡는 이런 상대적인 것들, 생멸하는 것들, 인연법에 따라 생겨나는 것들 이런 것들하고 그럼 아까 둘로 차원을 구분한다고 그러니까 그럼 일심이랑 너무 두 차원으로 탁 나눠놓는 거 아니냐 별개의 것으로 그것도 이상하다 이렇게 현상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인 거 이렇게 딱 설정하는 것 같아 갖고 그걸 또 이제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을 텐데 저 절대를 주장하면서도 대승불교에서는 저 절대가 상대하고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상대가 절대를 떠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불이 그래서 이제 불이사상 그러니까 진과 속 진이 속과 구분되지만 속이 진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이 진이 속을 포괄하기 때문에 둘이 서로 진속불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서 이제 대승에서는 불이를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현상 세계는 보여지는 세계인데 그 그거는 이제 상대적인 세계죠.
근데 이런 현상 세계 상대적인 세계 전체를 보는 눈은 절대 눈이잖아요.
근데 이 보는 눈을 떠나서 세계가 있는 게 아니죠. 눈에 보여진 세계이기 때문에 이 절대는 상대를 다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무한이고 저쪽이 유한이라면은 무한이 유한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만약에 무한이 유한 바깥에 있다면 무한이 또 한계가 있는 거잖아요. 그 바깥에 뭐가 있으니까 이건 진짜 무한이 아닌 거죠. 서양 철학에서 이건 이제 악무한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진짜 무한이면은 유한을 다 포괄해야 된다. 그래서 세계 전체를 보는 눈 절대의 눈이 상대를 넘어선 상대 바깥이 아니라 상대를 다 포괄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보는 눈은 세계 안에 주어지지 않으므로 세계와 다르지만 그러니까 하나가 아니다 둘 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셨죠. 근데 보여진 세계는 그 눈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 않게 때문에 다르지 않다. 불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근데 저런 예들이 엄청 불교 경전 대승경전에 많이 나오죠. 절대는 분별적인 상대 세계와 구분되지만 그러니까 불이익이죠.
이제 차원을 구분해야 된다라고 말씀드렸기 때문에 그렇지만 상대적인 전체 세계가 존재하게 되는 바탕이기 때문에 그 위에서 상대적인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두 개 별개가 아니다. 그래서 불이다 나와 세계로 전변하는 식은 전변 결과와 아뢰야식 자체는 그 아뢰야식 안에 숨겨진 종자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세계하고 구분되지만, 그러니까 아뢰야식 자체는 절대 것으로서 이것으로써 구분되지만 그러니까 하나가 아니지만 근데 아뢰야식의 전병 결과로서의 대상 세계는 식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이다라는 거죠. 둘이 서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제 유식이 유식, 무경의 줄임말인데 경이 식을 떠나서 따로 있지 않다. 일체가 다 식이다라는 거죠. 식 안에 대상이 존재한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저거는 이제 기신론에 나오는 비유죠.
그러니까 불일 불이를 이야기하면서 나온 이야기죠. 바닷물은 파도와 다르죠.
파도는 동쪽에서 바람 불면 동파, 서파 이렇게 막 구분되고 막 변화하지만 뭐가 됐든 바닷물이잖아요.
그러니까 파도는 파도가 그쳐도 바닷물은 남는 파도가 없어졌다.
그럼 파도에 물까지 싹 다 없어지는 게 아니라 물은 남잖아요.
그러니까 바닷물은 파도와 다르지만 파도가 결국 바닷물인 것과 같다.
파도가 결국 바닷물이 움직이는 거죠. 물은 얼음과 다르지만 얼음이 결국 물인 것과 같다.
얼음이 결국 물이라고 여러분이 커피 판매하는 데 가서 저 얼음 좀 많이 넣어주세요.
그랬는데 물 쫙 부어주고서는 아니 얼음 달랬잖아요.
얼음이 결국 물이잖아요. 이럴 순 없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얼음은 분명히 물이 아니지만 얼음이 결국 물이죠. 이게 다 말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불일 불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저 관계는 허공과 허공 속 뿐 허공 속의 꽃이다 그러면은 그게 허공인 거죠.
실제 하는 거가 아니고 허공 속 꽃이면 거울과 거울 속 영상, 거울 속에서 영상 보도 결국은 거울이잖아요.
그죠 종이와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 이러면은 그 그림이 결국 종이인 거죠.
근데 종이는 그림하고 구분이 되죠. 왜냐하면 종이 위에 빨간 꽃, 노란 꽃, 파란 꽃 막 그렸지만 그림으로는 서로 다르지만 종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같으니까 현상 세계는 상이라고 할 수 있고, 세계를 보는 눈은 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저 둘의 관계를 저렇게 구분지었지만 성에 의해서 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성은 상과 다르지만 그 다름을 강조하기 위해서 현상을 보되 상을 보지 말라.
상을 보지 말고 성을 봐라. 상은 인연 따라서 막 바뀌는 거니까 거기에 메여 있지 마라. 누구를 볼 때 좋은 일 한다고 저 좋은 사람이다. 그냥 상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거죠. 성을 봐야 된다. 불성 본래 면목을 봐야 된다라는 거고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죠.
상을 보지 않는 것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 아닌 뭔가가 있다라는 거죠. 그게 이제 성에 해당하는 거고 그래서 두 개가 서로 구분이 되지만 근데 또 모든 중생이 다 이 성에 상이 다 성에 드러남이기 때문에 불이다라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걸 능엄경에서는 보여지기는 현상 세계가 상이고 세계 전체를 보는 눈이 성이라면은 성이 상을 떠났다라는 의미에서 상을 이렇게 떠나서 성을 봐야 된다 이렇게 얘기할 때는 불일인 거죠.
그래서 그 성에 해당하는 여래장성 불성 이거는 아닌 다 상을 다 떠났다 그러니까 비어 있다라는 거지 그래서 공여래장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여래장 이러면 이제 분리만 강조되는 거죠.
근데 그 여래장이 비어 있는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현상이 다 나오기 때문에 성이 결국 상을 포괄하니까 그 여래장을 불공여래장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비어 있는 거가 아니다. 저 상에서 성으로 가는 게 반야심경 이죠.
색 즉 시 공 색이 결국 공이다 공으로 돌아가는 거고 근데 공 즉 시 색 공이 결국은 색으로 돌아간다 그죠 그래서 진공묘유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이제 이렇게 제가 일심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저 일심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12지 연기 다시 또 생각을 해보면은 사성제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 중에서 연기법으로 보면은 고성제 집성제가 연기 유전문이고 그죠 계속 무명이 있으니까 뭐가 있고 저 밑에 있는 것 행이 있으니까 식이 있고 식이 있으니까 맹색이 있고 계속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쭉 이어져서 있는 거가 유전문이고 멸성제 도성제는 수행자가 이제 저거를 다 없애 나가기 때문에 환멸문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유전문은 이제 현생으로 보면은 식에서 이렇게 쭉 해갖고 업이 쌓여서 업유가되서 다시 식으로 태어나서 명색 육입처부터 촉수가 있고 또 업을 쌓아서 또 이러고 이제 계속 태어나게 되겠죠.
이게 유전문입니다.
환멸문은 촉수까지 보는 전생에서 세계 업이 있으니까 보는 있는데 현생에서 업을 짓지 않는 거죠.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으면은 애취 업을 짓지 않으면 업유 유가 쌓이지 않고 그러니까 종자가 쌓이지 않고 그러면 그다음에 식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지 않겠죠 업이다 업력이 다 없어지면은 결국 5온으로 명색으로 태어나지 않고 6근 6경도 없고 부딪침 에 의한 식도 없고 모두가 다 없게 된다.
5온 6근 6경 6식 이게 다 없게 된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환멸문의 결과는
그래서 환멸문의 끝이 뭐가 되냐면은 아까 외우셨던 반야심경에 나오는 거죠.
무색 무수상행식 온이 다 없다는 거죠. 무안이비설신의 6근이 다 없다는 거죠.
무색성향미촉법 6경도 다 없고 무 안 계 내 지 무 의 식 계 이거 다 식이 없다는 거죠.
6식 5온 12초 18계가 다 환멸문이 완성되면 다 없기 때문에 이제 유해하지 않는다라는 얘기가 되는 거고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난다 해탈한다.
이 말씀이 되는데 이제 우리가 다시 여기서 던질 수 있는 물음은 그럼 환멸문의 끝은 일체가 무한 공과 정멸일 뿐인가?
이제 저 질문이 부처님 당시에도 질문을 하죠.
수행을 해갖고 열반에든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거냐
법신 아까 이렇게 여기서 법신 나오잖아요.
그렇게 존재하시는 거냐의 질문이 될 텐데 어떤 환멸문의 끝인 일치가 무한 공과 정멸일 뿐인가 이 질문을 던질 수 있겠죠.
수행의 지향점이 일체가 무료화한 공과 정멸일 뿐이라면 그러니까 다 없어요. 다 없어요. 번뇌가 없게 되겠죠. 그런 식으로 그냥 다 없어지는 걸로 끝이라면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단견이다라는 거니까 중생은 죽으면 윤회하니까 단견을 극복했다 했지만 수행을 다 해갖고 환멸문을 완성해갖고선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면 결국 죽으면 끝이다 라는 얘기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이면은 그거는 잘못 추착된 공이다. 악취공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대승에서 이제 저 측면을 강조를 하는 거죠. 수행의 지향점은 일체 번뇌가 사라진 그냥 열반 번뇌가 다 사라진 열반 그 자체가 아니라 열반의 마음의 경지로 갖는 그 마음이 열반의 상태가 되는 그런 마음의 경지를 갖는 부처가 되는 것이 바로 불교 수행의 목표가 아니냐 그냥 다 중생이 싹 없어지는 그래서 그냥 정멸의 세계 우리가 이걸 꼭 완성하자.
그냥 다 수행하고 다시 안 태어나고 세상에 인류 중생이 모두 없는 이 세계를 만들자 이게 아니고 정멸의 경지를 그 열반을 마음의 경지로 갖는 부처가 되자라는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환멸문을 따라서 일체가 멸할 때 그 정멸을 정멸로 아는 마음 열반의 마음 해탈한 마음 부처의 마음이 있어야 된다라는 거죠.
그 환멸문을 따라 12지가 다 멸해도 멸하지 않는 마음은 있어야 된다.
환멸문 이후에 그런 마음이 남겨져야 되지 않냐라고
근데 유전문을 따라서 생겨난 거는 연기 환멸문을 따라서 멸하겠죠.
그건 이제 생멸하는 마음이 되는 거죠. 유전문을 따라서 생겨난 것이 아닌 것만이 환멸문을 따라서 멸하지 않겠죠.
환멸문을 다 됐을 때 멸하지 않는 마음이 남아야 된다면 그 마음은 유전문에 따라서 생겨난 거는 인연이 닿으면 멸하잖아요.
그러지 않는 마음이어야 되겠죠. 그러니까 생멸을 넘어선 마음이어야 된다.
불생 불멸의 마음이다.
해탈한 마음이다.
부처의 마음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거가 유가사지론 유식 논서인 거죠. 일체가 허망한 가이고 모두 없다면 어떻게 일체가 오직 가일 뿐이다. 이게 진실이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유식이 진실이다라는 게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냐 그거를 알아차리는 그 눈이 있어야 된다라는 거죠.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세존은 저 밀의에 의거해서 차라리 악연을 일으키는 무리가 악연, 그러니까 아견을 모르고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악연을 일으키는 무리가 악취공의 무리보다 낫다고 말할 때 아까 말씀드렸던 악취공 그 무리보다는 차라리 악연이 낫다 그러니까 악연보다 더 무섭다라는 거죠. 모든 게 다 끝이다라고 얘기하니까 범부가 악연에 빠졌기 때문에 무아를 설했는데 그 무아까지만 알고 무아를 깨닫는 마음이 그거를 넘어선 마음이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악취공에 빠진다라는 거죠.
그거보다는 차라리 악연이 낫겠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말씀은 무아를 설한 근본 의 밀의는 바로 저 무아를 깨닫는 마음을 깨달으라 했는 거고 그걸 이제 대승에서는 적극 강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일심을 설하는 거가 료의다. 저쪽은 이제 불교의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사성제 저 네 가지 중에서 유전문 환멸문도 있지만 유전문과 환멸문은 유전문은 생하는 거고 환멸문은 멸하는 거기 때문에 저 둘을 합해서 생멸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저건 연기의 세계인 거죠.
연기의 세계는 다 인연 따라 만들어진다. 인연 따라 멸하니깐요.
그거에 반해서 기신론에서 이야기하는 거죠. 진여문이라는 것은 연기 너머의 불생 분열의 마음 부처의 마음 진여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게 결국 일심인 거고 이제 그거가 바로 대승의 지향점이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대승의 통찰은 환멸문 뒤에 남겨지는 부처의 마음은 중생 누구나 한테 있는 본래 마음이다. 이게 수행을 해갖고 만들어지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중생이 이미 타고난 마음이다 라는 거고, 그러니까 부처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이미 부처다. 그래서 중생도 부처 이거를 이제 대승에서는 강조를 하는 거죠.
이거를 이런 비유로 생각을 해봤어요.
그러니까 유전문는 이렇게 종이 위에 우리가 막 그림을 그리면은 우리가 작품을 볼 때 종이 보지 않잖아요.
그림을 보죠 그죠?
업에 의해 갖고서 막 그림을 그려내면 업력으로 그림이 생겨나는 거예요. 존재가 생성되는 거고 그러니까 번뇌적인 세계가 이제 막 만들어지는 거고 환멸문은 뭐냐면 업력을 덜어서 그걸 없애 나가는 거니까 이제 그림을 막 지우는 거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마음을 텅 비우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은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고 그리면 유전문이고 이제 내 생에 태어나서 또 그리고 또 그리고 이게 이제 유전문이라면 환멸문은 이렇게 생멸한 이 세계를 윤회하는 게 아니라 지우자 그러고 그림을 지우는 것에 해당할 텐데 그래갖고 결국은 부처가 된다. 그랬을 때 저 생멸문 안에서 부처의 마음을 찾을 수는 없다라는 거죠.
뭐냐 하면은 그 빈종이 그게 바로 부처의 마음일 텐데 부처의 마음은 그림을 지운다고 종이가 나타나는 종이가 보여지는 거지 종이가 지운다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거죠.
그죠 그림을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종이 위에서 지우면 그림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 그림이 지워서 만들어졌다.
수행해서 부처가 됐다. 이건 아니다라는 거죠. 빈 종이를 그림이 있어도 빈 종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림을 보지 않고 상을 보지 않고 그것이 결국 종이구나라는 걸 아는 게 상을 보지 않고 열애를 보는 거다.
이 말이 되는 거지. 그러니까 그 종이는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던 악한 그림이 그려져 있던 선한 그림이 그려져 있던 종이는 그 바닥에 있다.
그럼 불생불멸의 그 마음 일심 불성은 다 있다니까 생멸 너머의 것이고 본래 바탕에 빈종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이제 똑같은 상태인데 이제 유전문을 중생이 살다가 병이 들면 이게 번뇌로 고통스러운 삶이 되는 걸 이제 병을 얻는 거다라고 치면은 수행은 병을 다 없애자 이 번뇌 은뇌를 다 없애자. 그래서 이제 약을 먹는 거에 해당하겠죠. 그러면 병이 약을 먹으면 병이 낫겠죠. 근데 그래서 건강한 몸을 회복한다. 그랬을 때 약이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게 아닌 거죠.
약이 건강한 몸을 만드는 건 병 나도 계속 약 먹어야 되잖아요.
건강한 몸을 계속 만들기 위해서. 근데 약은 병을 없애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병을 지우는 것이지 병을 치료하는 것이고 그렇게 돼서 병이 없어지면 본래의 건강한 몸이 나타난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병 들었을 때도 본래 건강한 몸이 아래에 있으니까 약으로 이걸 치우면 건강한 몸이 드러나는 거가 되겠죠. 이제 그런 의미에서 중생적 부처다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저 이승의 지향점이 저 수행해서 결국 부처가 되려는 거다. 이러면은 대승이 강조하는 건 뭐냐면은 수행은 본래 부처다라는 거를 깨닫는 거 본래의 바탕 불성 그러니까 견성하는 거 계속 견성성불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본래의 건강한 몸을 깨닫는 거 그게 이제 대승의 지향점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이 건강한 몸은 약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중생이 본래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 거다.
이게 중생의 본래 마음이다.
일심이다.
이거는 생멸하는 게 아니다라는 거를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부처는 수행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본래 부처인 거다. 제가 수업할 때 이런 말을 잘합니다. 우리가 수행해서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이 본래 우리가 부처니까 부처가 되려고 하지 예를 들어서 제가 제가 되려고 노력도 하고 뭐 이렇게 공부도 하고 그러지 제가 옆집 영희가 되려고 하진 않잖아요.
그렇죠 제가 되려고 하죠.
그러니까 부처가 우리가 본래 부처니까 부처가 되려고 하는 거지 본래 부처 아니면 부처가 굳이 되려고 할 이유가 없게 된다라는 거죠. 그런 것처럼 그러니까 본래 부처다라는 거를 깨닫는 게 중요한 거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등록에 나오는 거죠.
여러분 다 들어보셨을 일 것 같습니다.
이제 도일이 전법원에서 매일 좌선을 하고 있으니까 남악회양이 이제 근데 이제 도일이 법기다 이제 큰 그릇이다.
이걸 알고서는 뭐 하러 좌선에서 뭐 하려고 그래요?
그랬더니 도일이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나가갖고 이제 돌멩이 갖고 와서 막 갈았다는 거죠.
그래서 도일이 와서 스님 뭐 하세요? 그랬더니 거울 만들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니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그럼 좌선한다고 어찌 부처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수레를 몰고 가는데 수레가 가지 않으면 바퀴를 때려야 되겠소.
소를 때려야 되겠소
그러니까 벽돌이라면 간다고 거울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본래 거울이 먼지가 묻으면 닦으면 거울이 드러나는 거지 그러니까 본래 불성이 없다면 수행한다고 부처가 되지 않는다라는 거죠. 하여튼 불성이 있어야지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거죠.
수레를 가게 하려면 바퀴를 때리는 게 아니라 소를 때려야 된다.
부처는 좌선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게 아니라 본래 부처라는 것을 깨달아야 된다.
그림 그리고 그림 지우면서 부처가 됐다고 하는 거는 그려졌다 없어지는 그 자리를 보고 얘기하는 거지
본래 바탕에 있는 이 빈 종이를 본 거가 아니다라는 거죠.
그림은 지운다고 부처가 되는 게 아니고 자기 본성을 깨달아야 된다.
부처는 수행을 해서 비로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래 부처이며 수행을 통해서 그 부처됨을 깨닫는 거다.
그러니까 견성이다
본 불성을 깨닫는 거다. 그리고 그거를 실현하는 거다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일체는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연기의 산물이고 따라서 무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일심은 그렇게 일체로 만들되 그 자체는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테고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그 무아의 내용은 일체는 인연 따라 만들어진다라는 거 그러니까 인연 따라 만들어진 5온을 나인 것처럼 집착하지 마라 라는 의미에서 무아를 말씀하신 거고 일심은 그렇게 인연 따라서 일체를 만드는 그거가 바로 일심이다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일심은 무아의 부정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 사상을 완성하는 것이다 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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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광 거사님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