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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논산기행① 예학(禮學)의 종장(宗丈)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고택
이장희 추천 0 조회 68 14.04.01 17: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논산기행①                                예학(禮學)의 종장(宗丈)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고택

 

 

1987년 7월

6월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끌어낸 축제의 분위기로 온 나라가 들떠 있을 때 태풍셀마가 한국에

상륙했다. 막대한 피해를 입힌 셀마가 몰고온 빗물이 채 마르기도 전 며칠 후, 충남 서산지방을

중심으로 엄청난 폭우가 중부지방에 퍼부어졌다.

하루에 내린 비의 양으로는 당시의 기상관측상 초유의 500mm가 넘는 양이었다.

 

그때 나는 "신도안"이라는 각종 사이비종교의 근거지를 밀어버리고, 1,000만평의 부지위에

대한민국 국방의 총지휘부를 건설하는 충남 논산의 두마면 계룡대현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양동이로 퍼붓듯 내리는 비로 철제 맨홀 두껑은 날라가 버렸고, 맨홀 구멍마다 물기둥이

분수처럼 치솟아 오르며 조성해놓은 단지의 사면은 물묻은 종이마냥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주요시설물의 지하층은 모두 물에 잠겼고, 도로는 갈귀를 세운 표효하는 사자처럼 모든 것을

삼킬듯한 엄청난 빗물이 밀려들어 물바다가 된지 오래였다.

 

토목공종을 담당하고 있던 나는 중장비를 동원하여 도랑을 내어 물길을 트고, 둑을 쌓아 건물로

들이치는 물길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여기저기서 들리는 다급한 소리들이 귓전을

울렸다.근로자들은 이미 철수를 시킨 상태였으나 110명의 회사직원들은 끝까지 고군분투 중이

었다. 얼마 후 현장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이제부터는 각자 알아서 제 목숨을 근사해야 될 형편이다.

어디가 길이고 논이며 개울인지 구분이 안되는 길을 더듬거리며, 살갗이 따갑도록 내리붓는 빗길

을 뚫고 몇 시간이 걸려 천신만고끝에 현장을 빠져나온 곳이 두마면 두계리였다.

이틀 후, 현장에2km정도 떨어진 논에서 무엇을 잡으려는 듯, 양손을 하늘로 향한 채 흙에

파묻힌 동료직원의 시신이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22년 후인 새해 1월...

그동안 별로 찾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이곳을 다시 찾았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고택으로 발걸음을 하기 때문이다.....

논밭만 있던 작은 마을은 계룡시란 신도시로 변해 있었고, 기억을 되살릴만한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낯선 모습의 풍경들 뿐이다.

 

 

 

충남 논산시 두마면 두계리 96번지에 위치한 사계고택(沙溪古宅)은 사계 김장생 선생이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인하여 이곳에 낙향하여 남은 여생을 우암 송시열, 송준길 등 많은 후진을

양성하며 말년보낸 곳으로 조선 중기(1602)에 건립된 건물이다.

 

조금만 행세꽤나 했다면 하늘이 낮다하고 높게 올린 솟을대문을 한 고택이 부지기수건만, 

한 성씨(性氏)가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한 사람 배출도 어려워, 삼정승 육판서 전부를 배출한 것

보다도 더 영광스럽게 여겼다는 문형(文衡:대제학)을 무려 7명이나 최다 배출한,조선조 일등명

광산(光山) 김씨 사계가(沙溪家)의 대문은 소박한 평대문이다.

 

 

  

 

고택은 사랑채인 은농재(隱農齋)만 원형이 보존되고 다른 건물들은 중간에 개·보수를 하였다. 

사랑채도 본래는 초가였다가 후에 기와를 얹은 것이라 한다.

이 집은 사계선생이 만년에 머물면서 저술과 제자양성을 하던 곳이다.

그러므로  "은농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집의 이름을 "사계고택"이라 함이 적절할 것이다.

이 곳은 사계 선생의 8째 아들인 두계(豆溪)공 김규(1606~1677)의 자손이 장자(長子)물림으로

대대로 살아온 집이며, 현재 사계 선생의 16대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은농(隱農)"은 사계 선생 7世손의 호(號)이며, 문화재 지정과정에서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

 

 

 

 

대문 왼쪽의 광채는 사계 선생의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시관 내부

 

사계 선생 영정 아래에는 그를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泰斗)로서 자리매김을 하게한, 그의 저서

"상례비요(喪禮備要)" "가례집람(禮輯覽)" "의례문해(儀禮問解)" "전례문답(典禮問答)"등의 책이

놓여져 있다.

 

                        -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경학사상(經學思想) -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정통을 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학문은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이 그 중심을 룬다.

 

                     사계(沙溪)가 생존하였던 당시는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정묘호란(1627),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이괄(李适)의 (亂: 1624) 등의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궁핍이 극심하였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사계(沙溪)는 이욕(利慾)추구로 치닫는 가치관의 동요와 국가

                     사회의 질서와 기강의 해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예학(禮學)에 관심을 기울였다.

                   『상례비요(喪禮備要)』가례집람(家禮輯覽)』『의례문해(儀禮問解)』

                   『전례문답(典禮問答)』의 저술도 사계(沙溪)의 이러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와 고금(古今)의 의례(儀禮)를 참고하여 정밀한 분석과 고증을

                     통하여 예(禮)의 본질규명하고, 당시 상황의 시속(時俗)을 참고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실용적이고 주체적인 예(禮)를 모색하여 올바른 규범과 정통성의 확립으로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오석원(성균관대학교 유학과 조교수)  

 

 

 

 사계고택의 축소모형판

 

 

 

 사계가(沙溪家)를 있게 한 양천 허씨(陽川 許氏) 일화를 그린 그림

 

양천 허씨 부인은 조선조 대사헌 허응(許應)의 딸로 재덕을 겸비했다.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약채의 

큰아들 김문(金問)과 혼인하였으나, 김문이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의 벼슬을 지내다가, 조선 태조

2년에 사망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니, 그 당시 허씨부인의 나이는 불과 17세였다.


김문이 사망하자 친가의 부모는 청상과부가 된 딸의 가엾은 생활을 안타깝게 여겨 다른 집으로

개가시키려 했다. 이를 눈치 챈 부인은 그 길로 개성의 친가를 떠나 시댁인 연산 고정리까지 500리

를 걸어 내려왔다. 허씨부인이 산길을 걸어올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지켜주었는데, 시댁에

무사히 도착하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허씨부인이 시부모를 모시며 유복자를 키우는 그 정성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허씨부인이 잉태하여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은 김철산(金鐵山)으로 후에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아들을 훌륭히 길렀고 종신토록 수절하니 세종대왕이 장한 행실을 듣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허씨부인 43세때 였다. 명정(命旌)은 사후에 내리는 것이 통상례이나 이는 특수한 사례였다.


김철산은 좌의정(左議政)에 이르고 광산부원군이 된 김국광(金國光)과 청백리 우참찬(右參贊)

김겸광(金謙光) ,김정광(金廷光),김경광(金景光)등 아들 4형제를 낳아 이 곳에서 광산 김씨가

번영하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양천 허씨 부인의 정절과 열행은 세조1년 7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사실을 안 세조(世祖)는 정경부인의 시호를 내렸다. 


김국광의 5대손이 김장생이며 그의 아들이 신독재 김집이다. 부자가 예학의 태두로 문묘에 배향

되었으니 유일무이하다. 이들 부자의 문하에 있던 송준길, 송시열 등이 다시 문묘에 배향되니

동국18현 중 4명이나 해당되는 인연이 닿게 만든 것이다.


 

 

                

               대문 오른쪽의 광채는 예절교육관으로 학생과 일반인들이 예절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외부기관에 용역을 주어 내부에 예절교육도안을 하였으나,내용이 맞지

                않은 부분이 있어 수정을 해야한다고 한다.

                그 예로, 제삿상 차림의 진설에서 제물이 놓이는 방향이 틀린 것이다.

 

 

 

  

대문을 들어선 뒤부터  떠날 때까지 쌀쌀한 날씨임에도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동안 시종일관

친절한 안내와 상세한 설명을 해주신 분이다. 이 곳에 상주하시며 관리와 해설을 맡고 계신다.

나와는 3世 후손(曾孫)이 되는데, 나이 어린 내게 집안의 어른이라시며 깍듯한 예의와 우러나는 

성심성의를 보여셨다.

 

 

                                 

                 

 

                   사당의 구조는 독특하다.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으로 구성된 자그마한

                   사당으로서 일반 사당과는 달리 바닥이 지상에서 떠있는 마루구조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당은 바닥이 흙이거나 전으로 깔려 있고 마루구조라고 해도 대부분

                   벽체가 땅까지 내려와 있어 일반 집과 같은 구조이지만 이 사당은 마루하부가 들어

                   올려져 있어 마치 누각처럼 느껴진다.

 

                   또한 기둥을 받치는 초석도 기둥과 같이 원형으로 되어 있고 화려한 단청을 올려 규모

                   는 작지만 매우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지어진 시기는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어서 관심을 끄는 사당이다.(한국의 재발견 중에서)

 

 

 

 배향공간과 생활공간의 경계

 

 

 

 사당,장독대,아파트 그리고 아쉬움.....

 

 

 

안채와 안사랑채에도 기둥마다 주련이 걸려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의 "정부인 순천김씨(貞夫人 順天金氏)"란 주련이 이채롭다.

 

고택은 사계 선생이 55세되던 1602년(선조35)에 건립하여 사계 선생과 정부인 순천 김씨가 거주

하던 곳이다. 사계 선생은 19세에 창녕 조씨와 혼인하였으나 39세에 사별하고,41세에 6진을 개척

한 조선의 명장 김종서(金宗瑞)의 7세(世)후손녀인 순천 김씨부인을 맞이하였다.

순천 김씨는 사계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애통해하며 지내다가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에 1906년(광무10)에 열녀 명정을 받았다.

 

 

 

                   

                 은농재의 처마

 

                 용마루에는 임인(壬寅) 9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개.보수를 한 시기를 표시한 것이란 짐작이다.

 

 

 

                                             안 사랑채 

 

 

 

                    

                 손님이 방문했을 때 안채의 대문을 여는 일은 여성이 할 경우가 많다.

                 열린 대문의 반대편에 곁문을 달아 대문을 열었을 때 몸을 가릴 수 있게

                 고려 하였다.

 

 

    

                                      담장 밖 구화정(九花亭)앞의 철쭉.

 

 3,000여 평의 대지중 담장 밖에는 연못과 누각을 비롯한 나무들로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놓았다.

 봄이면 이곳은 철쭉의 붉은 빛으로 물든다고 한다.

 

 

 

 

                      

                                                            별채의 봄...(문화재청자료)

 

                         사계고택의 또 다른 특징은 별채다. 담 밖에 별도로 지은 별채는 신접

                    살림을 위한 집으로, 갓 시집온 새 며느리가 얼마간 생활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별채의 활용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으로 시집에 적응하는 기간

                    동안 반독립생활을 했다는 것은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매우 파격적이면서 진보적인 생활 방식이다. 서로 다른 생활 환경

                    속에 살아온 새 식구에게 가문에 적응하면서도 신접살림의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배려한 광산 김씨가문의 지혜가 엿보이는 공간이다.

                                                                                                             (한국의 재발견 발췌)

 

 

 

 

 누각인 구화정(九花亭)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연못과 함께 여러종류의 꽃을 보며 감흥에 젖을 

 있는 곳이다.

 

 

 

                  

                   구화정에 올라 고택을 바라보니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이 답답하다.

               고택을 둘러싼 고층아파트 때문이다. 아파트입주민들은 이곳을 바라보는

               느낌이 좋을 것이다. 베란다 앞에 넓은 정원을 둔 차경(借景)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아파트부지를 종중에서 매도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 좀 더 깊은 고려가 못내 아쉬운 광경이다.

 

 

 

 

                  

 

               집안 곳곳을 둘러보고 떠나려는 우리를 문간채에 있는 고택 관리사무실로

               데리고 가시더니, 도면보관함(내가 도면을 저런 곳에 넣어 다니기 때문에

               명칭을 이렇게 붙였다)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펼쳐 보이신다.

               

 

               사계 선생을 문묘에 제사하도록 숙종43년(1717)에 내린 교지라 한다.

               충남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영인본으로 보관중이다.

               사계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국가사회에 크게 기여하였고, 특히 예학의 대가

               로서 인간생활의 도덕성 확립에 이바지한 공이 크므로 문묘에 배향하라는

               내용이다. 크기가 가로 6.3m 세로88cm로 총624자를 48줄로 수록하였는데

               너무 커서 걸어 놓을 곳이 마땅치 않다며 장소를 물색중이라 한다. 

 

 

 

 이별...

 

문원공(文元公: 사계 선생의 시호)종중에서 발간한 "사계 김장생"이란 책과 종중에서 관리하는

사계 선생을 배향하는 "돈암서원"의 응도당이 보물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타올,그리고

꼭 읽어보라며 아들에게 "소학(小學)"을 건네신다.

 

사계 선생은 학문을 배움에 있어, 먼저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는 먼저 나 자신을 수양하고 자기의 집을 평안히 하도록 다스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개인의 마음 공부와 몸 다스리는 공부가

중요하다고 여긴 때문이다.

 

책값이라도 두고 가야겠다며 드리는 금일봉을 한사코 마다하시며 집안 사람들이 이렇게 찾아

주는 것이 고맙다고 하신다. 떠나는 우리를 차있는 곳 까지 배웅해 주시고 깍듯한 예를 갖추신다.

 

명문가(名門家)는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어제의 명문이 영원한 명문이 될 수는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각자의 행동거지가 바람직한 사회가치관에 부합되고 바른 생각을 가질 때

비로소 명문으로서의 명맥이 이어져 갈 것이다.

 

멀리 사라지는 우리를 대문 앞에서 바라보는 그 분의 모습이 백미러에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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