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는 없다>
한동안<있다, 없다>하고 딱딱 부러지게 단정적인 책 제목이 유행하던데요, 나도 이런 투
로 한번 단언해 보자면, 백마 탄 왕자 같은 것은 ‘없다’입니다. 텔레비전에 반반한 처녀들
이 나와, 아직까지도‘백마 탄 왕자’운운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내가 보이는 반응은 정확하
게, ‘좋아하시네, 네가 공주냐’입니다. 백마 탄 왕자는 처녀의 신분이 공주일 것을 요구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타고나기를 공주로 타고나지 않았다면 그에 걸맞는 품격이나
하다못해 아버지만이라도 큰 부자일것을 요구당한다는 거, 그거 잊으면 안 됩니다.
짐짓 한번 그래보는 것이라면 모르겠거니와 그런 생각 오래 하고 있으면 병 됩니다.
백마 탄 왕자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방영된 자가 10년쯤 되어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만, 방송 작가 김준일의 단
막극에 「왕자의 발」아라는 언듯 보기에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
에 나오는 왕자는 진짜 왕자가 아니라, 친구들은 물론이고 아내로부터도 알뜰살뜰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한 초라한 가전제품 외판입니다. 그의 아내도 처녀 시절에는 백마탄 왕자를
꿈꾸었을 테지요. 공주도 아닌 주제에 말이지요. 그러니 아내에게 외판원 남편은 별로
자랑스러운 존재가 못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아내에게 어느날 문득 한 깨달음이 옵니다.
그것은, 왕자는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참으로 평범한 깨달음입니다.
이로써 아내는 공주의 품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단막극은, 전자제품을 외판
하느라고 도시 빈민가로 쳐들어가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온 남편의 발을 씻기면서 아내가
하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대사와 함께 끝납니다.
「어머나, 우리 왕자님 발에 물집이 잡혔네.」
「미녀와 야수」라는 만화 영화는 한 자루의 섬뜩한 칼을 숨기고 있습니다. 디즈니가 요즈
음의 감각에 맞게 제작해서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만화영화가 된
것일뿐, 원래 이 이야기는 정신분석의 시금석으로 종종 이용되기도 하는 꽤 족보가 있는 서
양의 민담입니다. 1940년대에는 프랑스의 저 유명한 예술가 장 콕도도 같은 제목의 흑백
영화를 제작한 바 있습니다.
내용은, 요약하자면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 미녀가 때 아니게 아버지에게 자기의 아
름다움에 어울리는 장미 한 송이 꺾어다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미녀가 원하는 장미는
야수의 성에만 있습니다. 아버지는 장미를 꺾으러 갔다가 야수에게 잡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딸을 야수의 아내로 바쳐야 하게 되지요. 미녀는 추악한 야수의 아내가 되어 악몽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이야기는 미녀가 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대목에서 확 뒤집
히지요.
'내가 대관절 무엇인데, 내가 도대체 무엇인데 야수를 이렇게 미워하는가…… 나에게 과연
그런 자격이 있는 것인가……'
결국 이 이야기는 미녀가 이런 깨달음을 얻고 병든 야수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 바로 그
한순간에 야수가 왕자로 바뀌면서,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고백을 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나는, 사실은 왕자인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마법에 걸려 야수로 변신하고 말았소. 그대의
연민과 사랑이 그 마법을 풀었으니 이제 그대를 아내로 맞아들이겠소……"
하찮은 여자가 백마 탄 왕자 좋아하다가 왕자 행세하는 사기꾼에게 걸려 신세를 쫄딱 망치
는 지극히 눅눅하고 꿉꿉하고 축축한 이야기가 우리 주위에 많지 않아요? 「미녀와 야수」
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왔던 이런 종류의, 듣고 있으면 속이 답답해지는 이야기를 확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왕자는 고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야차 눈에는 야차만 보인다는 어려운 경전말씀까지 갈 것도 없
습니다.
미국에 유학와 있던 한 젊은 외교관이 공석에서 자기 아내를 소개하면서 이런 말을 합디다.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보고 '미녀와 야수‘라고 한답니다."
내가 보기에 머리가 대단히 좋을 터인 그 외교관은 야수에 견주어질 정도의 추남도 아니고,
당사자가 들으면 매우 섭섭할 테지만 그의 아내도 미녀에 견주어질 정도로 눈이 번쩍 뜨이
게 환한 것도 아닙디다. 그러나 그 외교관의 인식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까르르 웃었습니다만, 웃음 뒤끝이 그렇게 개운할 수 없었지요. 나는 만화영
화 「미녀와 야수」를 그렇게 정확하게 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행복해
보이는 부부를 보면서 감탄하고 말았지요.
오로지 ‘야수’만이 ‘미녀’를 만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면서요.
달라져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눈, 나의 인식’인 것이지요. 결국 '나’인 것이지요.
- 이윤기氏 어른의 학교 中에서 -
첫댓글 저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저의 남편편은 시각장애1급입니다.
성질도 타협이 안되는
외골수에 보지못해 오는
오해도 많습니다.
제가 살다 몸을다쳐 장애인처럼 되니 설움이
많았습니다.
어쩔수없이 사는삶이
생각하나 바뀌면서
야수인 남편이 사람으로
바뀌고 다소 불편해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게 됩디다. 펼쳐보면 좋은
이야기들이 많을 겁니다.
어떤 문학적 장르로 접하는 것과 실제의 내 삶과 하나로 만들기는 쉽지 않은데, 님은 보살님이신가 봅니다. 존경스럽습니다. ^^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진실로 '신과 함께' 하는 삶으로 이번삶의 큰 보람과 공덕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예 .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님께서 읽어 주시고 마음의 작은 양식이라도 되었다면 그것으로 감사드립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셨다면 제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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