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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3파) 16세 안경인(安敬仁,1564~1632)의 행장(行狀), 묘지(墓誌)와 묘표(墓表)
1819년 간행된 송규렴(宋奎濂,1630~1709)의『제월당집(霽月堂集)』6권에 송규렴(宋奎濂)이 지은 외조부 순흥안씨(3파, 충의공파) 16세 안경인(安敬仁,1564~1632)의 행장(行狀)과 묘지(墓誌)가 남아있다.
安氏系出順興。始祖子美。高麗上將軍。四傳而至諱碩。登第不仕。隱居于竹溪。子孫仍以爲籍。竹溪卽順興之別號也
순흥안씨(順興安氏)로 고려에서 상장군을 지낸 자미(子美)가 시조이다. 4전하여 석(碩)은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죽계(竹溪)에서 은거하였다. 자손들은 이로 인하여 죽계를 본적(本籍)으로 삼았다. 죽계는 순흥의 별호(別號)다.
姓安氏。始祖子美。高麗上將軍。其後有諱碩。始居順興。遂爲順興人。
성은 안씨(安氏)로 고려 상장군을 지낸 자미(子美)가 시조이다. 그 후손 석(碩)이 순흥(順興)에서 살기 시작하여 순흥인(順興人)이 되었다.
安氏上祖子美。高麗上將軍。其後碩。始居順興。遂爲順興人。
안씨(安氏)의 상조(上祖)는 고려 상장군 자미(子美)이다. 그 후손 석(碩)이 순흥(順興)에서 살기 시작하여 순흥인(順興人)이 되었다.
가계도 : 子美 -(四傳) - 碩 - 軸 - 宗源 - 景恭 - 純 - 문숙공 崇善 - 誼 - 충의공 友益 - 謙 - 世寬 - 祉 - 敬仁
안경인(安敬仁,1564~1632)은 안지(安祉)의 다섯째 유복자 아들로 태어나, 9살에 어머니까지 여의고, 부인 밀양손씨와 사이에서 4남 5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 1남 2녀 만 살아 남았고, 동갑의 부인도 24년 먼저 세상을 뜨고, 약관의 나이에 진사에 합격했던 기대 많던 외아들마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일찍 졸하게 되어 외손봉사를 받게되는 분인 것 같다.
外王考順興安府君行狀 a_137_426a
府君諱敬仁。字謹元。安氏系出順興。始祖子美。高麗上將軍。四傳而至諱碩。登第不仕。隱居于竹溪。子孫仍以爲籍。竹溪卽順興之別號也。是生諱軸。與弟輔俱登元朝制科。文學德望。重於一世。世稱謹齋先生。稼亭諸賢皆師事之。官至贊成事右文閣大提學興寧府院君。諡文貞。生諱宗源。官至領三司事集賢殿大提學興寧府院君。諡文簡。生諱景恭。佐我太祖。以開國元勳。封興寧府院君。兼集賢殿大提學。諡良度。生諱純。官至寶文閣大提學。諡靖肅。生諱崇善。受知於英廟。官至兵曹判書藝文館大提學。諡文肅。安氏自文貞。奕世貴顯。三首勳封。五典文衡。一時比諸袁氏。而其勳德文雅。則過袁遠甚云。文肅生諱誼。生員壯元。官至延安府使。生諱友益。早卒。於府君爲高祖。曾祖諱謙。典牲奉事。祖諱世寬。己卯之禍。與諸生伏閤抗疏。訟靜庵先生。責大司憲柳雲不能極諫。淚隨言下。見者聳動。以此有名。官至珍原縣監。世惜其嗇庸。考諱祉。文科兵曹正郞知製敎。妣令人淳昌薛氏。節度使光遠之女。生五男。府君其季也。府君在娠。正郞公奉使北關。卒於中道。府君遺腹而生。而九歲。又喪母夫人。伶俜孤苦。無所依賴。養于舅氏家。內無嚴君之敎。外乏師友之輔。而能自力學攻文。不少懈。旣長。文辭兼人。聲譽藹蔚。湖右知名士以才稱者。無能先府君焉。前後赴功令。輒在上選。坐數奇。不成一名。雅性不喜利祿。世之夤緣蝨附者。視之如糠莝。儕流之當路者。或有汲引之意。則輒曰。男兒生不成名則亦已矣。藉人之餘澤。以丐蔭仕。不亦苟焉己乎。終不肯焉。戊申春。府君適入城。時當宣廟國恤。府君之內姊壻朴弘耇職管殯殿。欲辟爲齋郞。謂曰君才可惜。家且貧。吾方爲君地。君且待之。府君恥之。若不聞也者而徑歸鄕廬。弘耇知其志不強焉。聞者莫不稱之。以爲勇於辭爵固難。而不附弘耇尤可貴云。天資高潔。取舍之間。一毫不苟。人有一善。無問上下。奬勵褒揚。唯恐不及。苟不善也。雖權貴人。視之無有也。性溫厚愷悌。待人接物。不設畦畛。大小貴賤。咸得其歡心。未有以訾謷加之者。哀窮恤貧。出於至誠。親舊有喪。匍匐而救之。至於鷄絮之奠。亦未嘗一廢而不使人代。以此人皆感德懷義。稱道之不置。見識明透。懸斷如神。一鄕之人。凡有一切事爲。必就咨而後行焉。隣邑守宰。亦多聞其風誼而從遊者。門外之轍。殆相錯也。家雖貧甚。不設慼慼容。怡然自處。奉祭祀。必務豐潔。接賓客。曲盡禮意。人見之。不知其屢空也。孝友之篤。出於天性。兄弟之間。和氣藹然。人無間言。自以幼失怙恃。不及忠養。爲平生至痛。每當忌日。必前期一月齋素。以寓追服之意。年老之後。猶不廢七日戒之禮。而哀痛之懷。若初奉諱時。終身如一日。敎子女。必遵義方。御僕僮。恩威幷行。閨門之內肅如也。生於嘉靖甲子(1564)十月二十五日。沒於崇禎壬申(1632)八月二十一日。享年六十九。其年十月十四日。葬于恩津縣東銅峴巳向之原。配孺人密陽孫氏。亦望族。父扶餘縣監汝諧。以孝行旌閭復戶。事載三綱行實。孺人早服庭訓。甚有婦道。事府君無違德。府君委禽未久。負笈山房。適値先忌。貽書于孺人。使備素膳以送。時諱日隔月。而孺人方病病。思食川魚。家人作羹以進。孺人適見府君書。却不食。父母以諱日尙遠勸使食。卒不肯。自此每年行素如府君。終始不替。與府君同年(1564)生於正月初三日。先府君二十四年萬曆戊申(1608)五月十二日沒。享年四十五。與府君同竁。生四男五女。只育男一女二。男日扢。有儁才。十四占解額。弱冠成進士。人皆期以遠大。不幸早歿。葬在府君塋下。娶縣令愼守武女。有一女。適士人尹敏益。女長適宋公諱國銓。卽奎濂先君子。有三男。長奎淵護軍。次奎洛監役。奎濂其季也。司諫。今奪職。次適士人蘇昌門。有一女。適士人朴東信。尹敏益生三男。衡甲,致甲,世甲。奎淵生三男一女。男相抃,相曾生員,相迪。女適李世箕。奎洛生一男三女。男相哲。女適李萬堂,朴禧慶。季未行。奎濂生二男一女。男相琦。女適李益命。餘幼。朴東信有三男一女。男世成,世衡,世挺武科。女未行。側室一男三女。男怵承嫡主祀。娶李哲男女。有二男一女。男春邦,海邦。女適李湜。女長適李得晩。有一男一女。男泰海。女適孫始泰。次適宋國彬。有一男四女。男奎五。女適李尙輿,趙是煥,李秀命,鄭潤河。次適宋奎彥。有三女。長適禹洛瑞。餘幼。春邦生一女。海邦生一男。泰海生一男一女。皆幼。子孫摠五十餘人。嗚呼。府君生於閥閱。畜才砥行。宜其嚮用於世。以食其報。而終乃歿身蓬蒿。詘而不伸。豈非天哉。而又其子姓零替。後事之託。惟一稚庶。平日言行之可法可傳者。必不止此。而並湮沒不稱。悲夫。今者慈氏病中。垂涕而敎不肖等曰。先人之葬今四紀。而墓碑之刻尙闕。此實汝輩責也。及吾未死之前。亟圖不朽之事。俾先人潛德幽光。發揮萬一。則吾死可瞑目。而汝等亦有辭於他日矣。遂擧吾先生爲託。其言甚悲切。不肖等懼不克成其志。亟思所以奉承者。而生也後。於外家先故。十昧八九。略摭其一二所聞於慈氏者。撰次如右。倘先生哀憐而賜以一言之重。則庶可慰老母之心。而不肖等之責。亦可少塞矣。不勝區區祈懇之至。
公諱敬仁。字謹元。姓安氏。始祖子美。高麗上將軍。其後有諱碩。始居順興。遂爲順興人。生諱軸。登元朝制科。官贊成事大提學。自是益大以昌。諱宗源。領三司事。諱景恭。興寧府院君。諱純。寶文閣大提學。諱崇善。兵曹判書。自贊成連五世秉文衡。諱誼。官府使。諱友益不仕。於公爲高祖。曾祖諱謙。奉事。祖諱世寬。己卯之禍。伏閤訟靜庵先生。責憲臣不極諫。淚隨言下。以此有名。官止縣監。考諱祉。兵曹正郞知製敎。妣淳昌薛氏。節度使光遠女。公在娠。正郞公奉使北關。卒於中道。公遺腹而生。而九歲。又喪母夫人。零丁無依。養于舅氏家。稍長。自力攻文。聲譽屈曹偶。而終不成一名。雅性不喜利祿。儕流或有汲引意。則曰。男兒不能自致身名。而藉人要榮苟也。廢朝時。有一倖相與公連袂者。知公才欲辟之。公恥之。若不聞而徑歸鄕廬。其介可見也。辭受取舍。一毫不苟。稱人之善。無間疏賤。苟不善也。雖權貴人。視之若無。性又溫厚愷悌。待人接物。不設畦畛。哀窮恤患。出於至誠。以此人皆感其德而懷其義。家雖貧。處之怡然。惟篤於奉先。祭祀務極豐潔。自以不及事父母爲至痛。每當忌日。必前期齋素。而哭之如初奉諱時。兄弟之間。和氣藹然。人無間言。蓋其孝友之篤。天性然也。生于嘉靖甲子。歿于崇禎壬申。享年六十九。葬于恩津縣銅峴亥坐之原。配密陽孫氏。縣監汝諧女。婦德甚備。克稱賢配。與公同年生。先公二十四年歿。祔于公左。有尤齋宋先生所撰墓表。一男忔有儁才。十八登上庠。不幸早歿。娶縣令愼守武女。生一女。適士人尹敏益。二女。長適贈參判宋公諱國銓。卽奎濂先君子。生三男。長奎淵府使。次奎洛監役。奎濂其季也。今爲觀察使。次適士人蘇昌門。生一女。爲士人朴東信妻。側室男怵承嫡主祀。娶李哲男女。男春邦,海邦。女李湜。女長適李得晩。男泰海。女孫始泰。次適宋國彬。男奎五。女李尙輿,趙始煥,李秀命,鄭潤河。次適宋奎彥。男頤弼。女禹洛瑞。嗚呼。公之德之才。奚遽後人。而終乃詘而不伸。沈鬱終身。豈非天哉。而又其後事旁落。行跡䵝昧。今玆所述。僅僅十之一焉。曷足以發揮闡明也耶。雖然有尤齋筆而銘公墓。則是亦足以不朽公矣。
1787년 간행된 송시열(宋時烈,1607~1689)선생의『송자대전(宋子大全)』198권에 안경인(安敬仁,1564~1632)의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안경인(安敬仁,1564~1632)은 밀양손씨(密陽孫氏,1564~1608)와 1남 2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안흘(安忔, 1587~1614)은 아들 없이 딸 하나만을 두고 일찍 졸했고, 장녀가 송시열과 같은 은진송씨 문중의 송국전(宋國銓,1595~1649)과 혼인했고, 둘째 딸은 소창문(蘇昌門)과 혼인했으며, 측실에서 서자 안출(安怵)을 두어 안춘방(安春邦), 안해방(安海邦)을 낳았다고 한다. 안경인의 외아들 안흘이 후사 없이 일찍 죽어, 맏사위 송국전(宋國銓)과 외손자들이 외손봉사하게 되는데, 송국전은 부인 순흥안씨와 사이에서 송규연(宋奎淵), 송규락(宋奎洛), 송규렴(宋奎濂)을 둔다. 이 묘표의 서두에 은진송씨 대종부이던 순흥안씨 부인과 그의 아들 송규연(宋奎淵)과 송규렴(宋奎濂)이 묘표를 청해 송시열 선생이 짓게 되는 듯하다.
學生安君墓表 a_114_430a
吾大宗婦安夫人。謂其子縣監奎淵,司諫奎濂等曰。吾先考以遺腹子。又九歲喪所恃。猶能績文勤藝。前後功令。輒居上游。其才如此。廢朝時倖相朴弘耇。其連袂也。有汲引意。先考笑謝曰。男兒不自成名則亦已矣。其介如此。自以不及事父母。每忌日。必前一月不肉。而哭之如袒括日。凡祭先時必七日齋禁。其孝 又如此。其他所行。多有異於人者。吾先妣之行。亦克媲焉。雖病時。其齊素惟先考是視。吾嘗哀吾考生不成一名。歿又堙滅於後也。聞汝宗人有其文不尙浮華者。盍求銘墓之文。於是司諫爲記其語。其仲子監役奎洛子相哲以謁於余。余曰。夫人之意可悲也。其誠孝如此。則其先行。已可知也。且其言質愨而無飾。是爲銘矣。何必復贅。因考其譜係。安氏上祖子美。高麗上將軍。其後碩。始居順興。遂爲順興人。其二子軸,輔。俱登元朝科。有大名。軸官贊成事,大提學。爵興寧君。諡文貞。自是益大以昌。諱景恭。佐我太祖啓封 號。繼兩世典文衡。而繼之於後者又兩世矣。至諱世寬。己卯之禍。以諸生伏閤。訟靜庵先生。面斥大司憲柳雲不能極諫。是於君爲祖。官止縣監。考諱祉。兵曹正郞。妣薛氏。節度使光遠女。君諱敬仁。字謹元。娶縣監孫汝諧女。汝諧以孝旌閭。君一男忔。進士。早沒無子。女長歸我宋。爲學生諱國銓配。次適蘇昌門。今主君祀者。側出男怵。而春邦,海邦。又其出也。進士與蘇各有一女。皆爲士人妻。墓在恩津縣東銅峴里巳向之原。孫氏祔左。嗚呼。君之行誼如此。而其身之鬱塞如此。子姓之零替又如此。宜乎宗夫人甚哀而思所 以闡明也。歐陽子曰。善無不報而遲速有時。豈怵之世。將綿歷於無窮耶。又安知君之不佑成之也耶。
송규렴(宋奎濂,1630∼170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도원(道源), 호는 제월당(霽月堂). 이조판서 국전(國詮)의 아들이고,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1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지평·정언·사예(司藝)·응교·서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때에는 수찬·부교리·정언·헌납·이조좌랑·사간 등을 거쳐 1667년(현종 8)에 집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다시 교리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 1674년에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복상문제에 대하여 남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고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였던 송시열(宋時烈)·송준길 등이 귀양가게 되자 이들의 신원(伸寃)을 주장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다시 기용되어 사간·수찬·대사간·승지·이조참의·부제학·대사성 등을 거쳐 대사간이 되어 시폐(時弊)4조를 올렸다. 그뒤 안변부사·강양도관찰사(江襄道觀察使)·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았다. 1694년 갑술옥사로 정국이 다시 바뀌게 되자 다시 부제학·대사간·대사헌·우참찬·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을 지내고 169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지중추부사·우참찬·예조판서·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80세 때 지돈령부사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학문이 뛰어나 송시열·송준길 등과 동종(同宗)·동향(同鄕)으로 함께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졌고, 전서(篆書)·주서(籒書)에 능하였다. 회덕의 미호서원(美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제월당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송규연(宋奎淵, 생몰년 미상)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정(子靜). 증조부는 호조정랑(戶曹正郞) 송남수(宋柟壽)이고, 조부는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송희원(宋希遠)이며, 부친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제월당(霽月堂) 송국전(宋國銓)이다. 동생은 예조판서(禮曹判書) 송규렴(宋奎濂)과 감역(監役) 송규락(宋奎洛)이다. 어려서부터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향당(鄕黨)에서 모두 그의 어진 행실을 칭송하였다. 집에서는 효행을 제사에 임해서는 정성을 다하고, 직책에 임하여는 청렴(淸廉)을 지키다가 66세에 졸(卒)하였다. 벼슬은 처음 선공감역(繕工監役)·연안부사(延安府使)를 거쳐 청주·남원진관병마절제도위(淸州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하였다. 민견(閔{木+幵})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은 유학(幼學) 송상변(宋相忭)·송상증(宋相曾)·송상적(宋相迪)과 송상언(宋相彦)·송상현(宋相賢)·송상우(宋相愚)를 두었다.
1819년 간행된 송규렴(宋奎濂,1630~1709)의『제월당집(霽月堂集)』6권에 송규렴(宋奎濂)이 지은 외숙 순흥안씨(3파) 17세 안흘(安忔,1587~1614)의 묘지(墓誌)가 있다.
송규렴의 외숙되는 안흘(安忔,1587~1614)은 안경인(安敬仁,1564~1632)의 외아들로 20세 되던 선조 병오년(1606)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28세 젊은 나이에 죽게 되며, 거창신씨(居昌愼氏) 부인과 사이에서 외동딸을 두었는데, 윤민익(尹敏益)과 혼인하여 윤형갑(尹衡甲),윤치갑(尹致甲),윤세갑(尹世甲) 3형제를 두었다고 한다.
舅氏成均進士安公墓誌 a_137_429b
舅氏安公諱忔。字和老。順興人。考諱敬仁。妣密陽孫氏。縣監汝諧女。以萬曆丁亥七月初三日生公。幼有儁才。不煩程督。而文詞日就。十四魁解額。一時傳誦其文。二十捷進士。聲名大振。人皆謂一第朝夕可取。而甲寅(1614)五月初三日。感疾不起。得年種二十八。葬于恩津縣銅峴先兆下巳向之原。嗚呼。以公之才夭假其年則其所成就。何可量哉。而中途奄忽。秀而不實。悲夫。且其身後靑氈。亦無所托。平日行迹。十不得一。而惟嘗聞慈氏言。公孝於親。友於兄弟。實有人所不及者。然則公之所可稱者。豈獨文詞而已哉。安氏遠有代序。自高麗入我朝。名臣碩士。前後相望。其世德先系。詳載外王考墓表。此不復見。配宜人居昌愼氏。縣令守武女。生後公六年。歿後公四十年。其葬在平山愼家先隴。有一女。適士人尹敏益。生三男。衡甲,致甲,世甲。致甲承宜人命。今方主祀。余竊悲公之早世。而又愍其泯泯無傳也。略掇數語。納諸幽隧。俾後人庶幾於此而考信焉。
1819년 간행된 송규렴(宋奎濂,1630~1709)의『제월당집(霽月堂集)』6권에 송규렴(宋奎濂)이 지은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1596~1678) 부인의 행장(行狀)이 있다. 송규렴의 아버지는 송국전(宋國銓,1595~1649)이다.
先妣贈貞夫人順興安氏行狀 a_137_424c
先妣姓安氏。系出順興。高麗上將軍諱子美爲始祖。四傳而至諱碩。登第不仕。隱居于竹溪。卽順興別號也。是生諱軸。號謹齋。與弟輔俱登元朝制科。文學德望重一世。稼亭諸賢皆師事之。官至贊成事右文館大提學興寧府院君。諡文貞。生諱宗源。官領三司事集賢殿大提學興寧府院君。諡文簡。生諱景恭。佐我太祖。以開國元勳。封興寧府院君。兼集賢殿大提學。諡良度。生諱純。官寶文閣大提學。諡靖肅。生諱崇善。受知於英廟。官兵曹判書藝文館大提學。諡文肅。安氏自文貞。奕世貴顯。三首勳封。五典文衡。門閥之盛。一時比之袁氏。而其勳德文雅。則過袁遠甚云。文肅生諱誼。生員壯元。官延安府使。生諱友益。早卒。生諱謙。典牲奉事。於先妣爲高祖。曾祖諱世寬。己卯之禍。與諸生伏閤抗疏。訟靜庵先生。責大司憲柳雲不能極諫。淚隨言下。見者聳動。以此有名。官止珍原縣監。世惜其嗇庸。祖諱祉。文科兵曹正郞知製敎。有文行。未究厥用。考諱敬仁。有卓識高行。不偶沒世。妣密陽孫氏。亦有淑範。考縣監汝諧。卽宣廟朝文士。府使汝誠之弟。孝行卓異。旌閭復戶。事載三綱行實。先妣生於萬曆丙申(1596)四月初五日。沒於崇禎戊午(1678)十二月二十四日。享年八十三。明年己未二月二十六日。祔于府君墓左。公州沙寒里負乾之原。後七年乙丑。因不肖除江襄觀察使。推恩贈貞夫人。先妣性度貞莊。識智夙就。年十三。孫夫人沒。奉奠主餽。家事克辦。綽綽有裕焉。及歸于先考。婦德甚備。宗黨無不悅服。家雖貧窶。經理有方。奉祭接賓。無少有憾。諸子學語。輒親授千字等文。俾知文字。然後資遣師塾而請業。訓婦女尤嚴。使不得出中門。或値客來外舍。恐或依戶窺觀。痛加禁斷曰。以女子而窺外間。甚非美行。御婢僕有法。撫愛雖至。有過則痛繩不饒。恩義兼盡。家政肅然。安府君卒。先妣赴葬。過卒哭將歸。從兄安進士惕。以家藏諸文券出而授之曰。此係緊重。而家無年長子姓。不可付諸稚庶。任其遺失。妹當袖去。以待他日柝著。先妣却而泣曰。吾以此罔極之懷。何忍帶此而去。有若係念貲產者然哉。決不可爲。安感動曰。此誠丈夫所難。隨諸子之縣邑。或値崇奉之具。蹙然不安。至如聲樂紛華。尤所不樂。以此諸子不敢拂意而強進焉。屛去私謁。絶不干預外事曰。豈可以吾故。而累吾兒政治耶。雙淸堂前有巨田。自祖先每傳宗派。而堪輿家稱合舍基。人多請以厚土償易。而終不聽。諸子移居他所。而亦不許作舍曰。祖先成法。豈可以私愛而隳毀耶。安府君子姓零替。只有一庶。携來婚娶。接置傍側。厚給貲產。俾主祀事。而其未成家之前。凡祠墓諸祀。獨當設行。稍成之後。猶與分設。不以專委。墓在遠地。又別給近墓土田。以助祭需之費。又給臧獲。以備祭時使用。以府君墓道久無表誌。每以爲痛。敎諸子拮据豎石。而事力不逮。碣石未克並擧。則常涕泣曰。吾考妣事蹟。將堙沒不傳。豈不痛哉。大袠之年。病方危篤。而歷記言行。口授子弟。使之錄出實跡。乞銘于尤齋先生。文旣成。酬工無資。未卽入刻。則營辦紡績之需。分授婦女與婢僕。使之合作。又自親執課督。至屬纊前二日。氣息奄奄。而招婦女命出箱篋所藏。指授甚詳曰。此未及卒業。吾死初喪後。卽治此事。刻石豎墓。然後營吾葬事可也。吾欲以此自效吾誠。而今不及矣。因泫然淚下。諸子一遵其敎。先其石事。以成遺志焉。天性仁恕慈惠。聞人有患難。誠心惻念。無間已遭。有窮乏。樂施無靳。不問親疏。此猶爲閨門瑣行。而至其平生奉君子事舅姑待宗族接隣里淑行嘉範。實多卓異者。不能一一盡述。內外子孫。已具於府君家狀。此不復錄焉。嗚呼。先妣行蹟不可泯沒者非一。而倉卒撰摭。十漏七八。姑錄其大槩如右。以俟立言君子之採擇云。
1819년 간행된 송규렴(宋奎濂,1630~1709)의『제월당집(霽月堂集)』6권에 1685년에 송규렴(宋奎濂)이 지은 아버지 송국전(宋國銓,1595~1649)의 행장(行狀)이 있다.
先考贈吏曹參判府君行狀 乙丑(1685) a_137_421d
府君諱國銓。字邦衡。姓宋氏。我宋籍恩津。高麗判院事諱大原爲鼻祖。三傳至諱明誼。淸裁直操。與鄭圃隱齋名。聘懷德黃氏判書粹之女。子孫仍家焉。入我朝有諱愉。當太宗世。隱德不仕。號雙淸堂。世仰高風。至今稱道。寔生諱繼祀。尙州判官。贈司憲府持平。寔生諱遙年。軍資監正。兼校書館判校。寔生諱汝霖。楊根郡守。贈通禮院左通禮。乃府君高祖也。曾祖諱也勛。安岳郡守。贈承政院左承旨。祖諱枏壽。嘉義夫大行龍驤衛副護軍。考諱希遠。權知成均館學諭。贈承政院都承旨。妣贈淑夫人延安金氏。司宰監正諱纘先之女。萬曆乙未(1595)。夫人隨舅護軍公。在通川郡衙。以六月二十八日。生府君。幼有美質。不類凡兒。甫齔。卽知事親之節。父母有命。必怡聲應對。奔走奉承。見者奇之。稍長。能自奮勵爲學。尤致力於經書。講誦不輟。以其暇治博士家言。屢占解額。而坐數奇。未成一名。丙丁以後。絶意進取。遂廢擧子業。以爲終焉之計。其志可見也。崇禎己丑(1649)十二月初三日。以疾終于懷德莊舍。享年五十五。明年庚寅三月初七日。葬于公州沙寒里通禮府君兆後乾坐巽向之原。後三十六年崇禎乙丑。因不肖奎濂除江襄方伯。推恩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府君性至孝。自少事兩親。克盡誠禮。愛敬俱至。凡居處之具。旨甘之奉。無不竭力供辦。以此家雖貧窶。而親極滋味與芋寧。天啓癸亥。承旨府君寢疾。府君衣不解睫不交者彌月。及病谻。悲泣奔走。籲天請代。家人知欲割指。屛去刃物。乃潛入廏舍。以莝刀斫旨。流血淋漓。擧家倉皇。而府君神色不亂。手器受血。和粥以進。時病幾屬纊。勺水不下咽。而遽取血痛飮。氣覺頓醒。遂得更延四日。人皆謂至誠所感。及遭創。擗踴呼天。絶而僅甦。見者莫不下淚。居喪毀甚。幾不全。服闋未幾。又居護軍公憂。前後襄葬祭奠。一遵禮制。府君素多病。荐罹重慼。而得保無他。人謂神明所相。每遇忌辰。必前期致齊。哀痛終日。如初奉諱時。祖妣性嚴。府君愉色婉容。曲承無違。凡所以悅其心順其志者。靡極不用。時節必有酒食。每當壽辰。治供具集宗黨。奉巵上壽以娛樂之。如親舊贈遺。雖至微瑣。不少自私。必皆親納親前。聽其區處。每親癠。爨烹煎藥等事。必自躬執。未嘗一委他人。至如所臥裀褥爲便液所汚。亦自瀚濯。不任婢僕。家人言其太劬。則曰。吾欲自盡吾誠。非謂婢僕不能任也云。其爲親服勞。不憚鄙事。多類此。祖妣素嗜野鴨。嘗於病中。思食尤切。府君出野求之。適見一鴨在橋下水渚。伏而不飛。遂取以進。人皆驚歎。比之躍鯉抽筍。己丑冬。祖妣遘疾。府君晝執湯劑。夜處冷軒。寢食俱廢者殆數旬。以致積傷感疾。素患痰症遂劇。謂家人曰。吾有老親而不克終孝。奄至此境思之。天地茫茫。汝等須體余意。善爲奉養。使吾瞑目於地下。病中諄諄如夢中語。惟在老親。至絶乃已。時祖妣病稍間。哭之慟曰。失此孝子。吾將疇依。親戚隣里亦莫不哀悼。咸曰善人亡矣。同春先生常加敬重。及葬。親詣墓道。操文以祭。贊其誠孝。有撥貧養志等語。盧牧使文漢。府君妹壻也。早贅府君家。備知懿行。以詩挽之曰。淸貧原憲必常泰。純孝王祥世共賢。以文祭之曰。北門貧窶。人不堪忍。南陔奉養。禮無不盡。又常語不肖等曰。汝嚴君至行。實出天性。不可殫記云。承旨府君沒後。二妹在室。府君撫愛愈篤。擇壻婚嫁。悉力營需。無少有憾。見二壻有一善。輒忻悅奬許。對人傳誇。二婿感其誠意。咸愛重之。凡處同氣。恩義備至。每以式好無猶爲戒。推以至於宗族。克盡敦睦之誼。見人有患難。亦至誠憂念。必思所以拯救。多有人所不及者。天資夷曠。襟懷坦率。待人接物。傾倒無隱。不少有畦畛。鄙俚之談。不出於口。傲慢之容。不設於身。不與物忤。不與人較。或有非理相加。傍人爲之扼腕。而恬然若不聞也者。徐而後乃曰。我無失而彼如此。曲在彼矣。於我何有。人有過惡。貼耳若無聞。有善則必樂聞而亟稱之。恥世人奔走營求。每曰。男兒自不成名則已矣。從人丐利。不亦愧乎。前後親知秉銓者相望。而終不一求恩澤。平生無嗜好無營爲。於一切紛華勢利。泊如也。唯嗜酒而亦不過飮。一酌之後。絶不把杯。未嘗有醉亂之時。嘗於社會。有一執友擧杯而言曰。某之守戒甚確。不敢強勸。同春先生忻然曰。此甚好事。非人所及云。以此每赴酒席。雖滿座酗聒。而超然獨醒。穆然自將。人皆服其雅操。不敢以相狎焉。敎子弟。必以義方。常曰。德行本也。文藝末也。苟無其本。何足觀焉。與吾先生及同春先生同里閈。慕其道德行誼。諸子纔學語。輒皆遣使就學。冀其觀感成就。以不肖稍有講誦才。勸讀經書。親自課督。至累年不怠。不肖之早忝科第。專賴是焉。府君於倫序居次。長公學生府君未室而夭。府君代承先重。實爲我宋直幹。恪守雙淸世業。不墜堂構。雖一花一石。無損舊觀。安貧守約。廉白自律。先業之外。不長尺寸。簞瓢屢空。而處之晏如。惟祭祀必致豐潔。儀文悉用古制。必誠必愼。勿之有歉焉。配順興安氏。士人諱敬仁女。有三男。長奎淵府使。次奎洛監役。次卽不肖奎濂大司諫。奎淵娶社稷令閔枅女。生三男一女。男相抃參奉。相曾生員。相迪。女適李世箕。側室四男一女。相彥,相賢,相愚,相仁。女幼。奎洛娶士人金聲振女。生一男三女。男相哲參奉。女適李東根,朴禧慶,李志寬。奎濂娶同知金光燦女。生二男一女。男相琦正字。相維。女適李益命。相抃生二男三女。李世箕生一男二女。相哲生二男。李東根生一女。朴禧慶生二男。內外子孫男女共四十餘人。嗚呼。府君之至性純行。雖求之古人。亦所罕有。宜其顯聞於世食報于天。而身旣沒於窮約。年又不克遐永。此固理之不可知者。而緣不肖等稚昧無狀。不能闡揚先烈。得蒙褒旌之典。每念及此。不覺鉥心而泚顙。抑又思之。不肖等實籍府君積善餘澤。獲霑朝祿。屢叨專城。而不能逮其養。此固平生至痛。而又使其卓絶之行。終至泯沒而無傳。則是不肖等不孝之罪。將極天難貰。而死亦不得瞑目矣。夫樂道人之善而垂諸不朽者。君子事也。況我先生之於我先府君。其從遊之久。相知之深。而又重以宗懿之分者乎。又況我王考墓道。旣得先生筆以賁之。今於府君之墓。獨可無先生筆哉。儻蒙哀憐而賜以一言之重。闡發幽光。昭示來許。則幽明之感。何可量哉。不勝區區祈懇之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