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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6월이 되면 프랑스의 작은 도시 르망은 경주차의 찢어지는 배기음과 관중들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모나코 F1 그랑프리, 인디애나폴리스 500과 더불어 세계 3대 모터 스포츠 이벤트로 꼽히는 르망 24시간(24 Heures du Mans)이 열리기 때문. 하루종일 경주차와 드라이버의 한계상황을 시험하는 르망 24시간은 내구레이스의 대명사로 손꼽히며 어느덧 80주년을 맞았다.
4번의 르망 우승(58, 60~62년) 경험이 있는 올리비에 장드비앙이 표현하는 르망의 극한상황은 이렇다. “시속 270km로 질주하는 직선코스 끝의 뮬산느 코너는 시속 약 65km, 1단 기어가 아니면 통과할 수 없다. 가능한 한 브레이크를 아끼면서 톱 기어에서 1단까지 순식간에 연속적으로 시프트다운 해야만 한다. 이것은 단 2초간, 90m 거리를 달리면서 끝내야 하는 동작이다.” 하루 꼬박 이런 까다로운 작업을 해내야 하는 것은 드라이버에게나, 경주차에게나 극도로 가혹한 조건이다. 그의 활약은 이미 40년 전 옛날 이야기가 되었고 그동안 기술도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24시간 동안 경주차에 요구되는 성능과 신뢰성, 드라이버에게 요구되는 테크닉과 인내력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다. 양산차의 신뢰성 경쟁을 위해 1923년 시작된 르망 24시간 레이스는 초창기의 단순한 경쟁 수준을 넘어 자동차의 공력 성능과 메커니즘의 신뢰성을 겨루는 시험장으로서 80년을 한달음으로 달려왔다. 그 기록은 메이커의 기술개발 역사이며 모터 스포츠 발전사인 동시에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끝없는 도전정신 그 자체다. 1923년, 역사의 시작 르망 24시간 레이스의 역사는 현재 이를 주최하고 있는 ACO(L`Automobile Club de l’Ouest, 서부자동차클럽)의 결성에서 시작되었다. 휘발유 자동차가 르망 지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83년. 새로운 운송수단이 곧 이 지방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1895년 설립된 ACF(프랑스자동차클럽)가 새로운 자동차 경주 규정을 선보이자 르망의 몇몇 자동차 애호가들이 뜻을 모아 그랑프리 개최를 준비하고 나섰다. 주변 도시간 도로를 연결하는 1주 103km의 거대한 삼각형 코스를 구성했고 흙길에 타르를 발라 원시적인 서키트를 완성했다. ACO의 전신인 사르트 자동차클럽이 탄생한 것은 1906년. 그 해 6월 르망 지역에서 첫 그랑프리가 개최되었고, 이것이 이후 르망 24시간 레이스의 시발점이 된다. 1912~13년 프랑스 그랑프리가 열렸지만 1차대전의 영향으로 1914년부터 1920년까지는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다시 활동을 시작한 ACO는 소형차와 모터사이클 레이스를 개최했다. ACO의 사무국장이었던 조르주 듀란과 규스타브 시니에, 저널리스트였던 샤를르 파르 등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레이스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그랑프리는 경주차와 시판 모델의 차이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흥미가 떨어진다고 판단한 ACO는 일반 시판차로 24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는 내구레이스를 기획했다. 이것이 바로 르망 24시간이다. 르망 24시간 첫 경기가 열린 것은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23년이었다. 총 35대의 경주차 중 33대가 결승에 출전했고 대부분 프랑스 차였다. 당시 서키트의 1주 거리는 17.262km. 시작 직후 비가 퍼부어 어렵게 진행된 경주에서 쉐나르 에 벨케르가 평균시속 92km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영국차인 클레멘트가 우승하기는 했지만 초창기 르망 24시간은 지방 레이스일 뿐 국제적인 이벤트는 아니었다. 하지만 1927년부터 벤틀리가 4연승을 거두고 알파로메오가 4연승(1931~34년 우승)으로 뒤를 이으며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얻어갔다. 벤틀리 3X나 수퍼차저를 단 알파로메오 8C-2300, 부가티 타입57C 등이 2차대전 전까지 르망을 주름잡았다. 프로토타입의 시대로
르망은 80년 역사 중에 두 번의 공백이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의 전국적인 파업 때문에 열리지 못했고 두 번째는 2차대전의 포화가 빗발치던 1940~48년의 9년 간이다. 1949년 다시 르망이 열렸을 때는 흘러버린 시간만큼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프로토타입 규정’의 신설. 당시 상황에서 양산 스포츠카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극히 적은 대수만 제작하면 되는 프로토타입은 훌륭한 대안이었다. 프로토타입 규정은 르망을 크게 변화시켰다. 성능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기술발전 속도도 한층 빨라졌다. 그와 반대로 양산차 성능과 내구성의 경쟁이라는 본래 취지는 퇴색되기 시작했지만 ACO는 몰려드는 관중에게 좀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빠른 스피드의 프로토타입 경주차를 필요로 했다. 1955년 이후에는 프로토타입이 상위권을 휩쓸기 시작해 결국 국제스포츠카위원회(CSI)에서 의미 없는 프로토타입 규정 대신 2인승 레이싱카를 위한 포뮬러인 부칙 ‘C항’을 더했다. 배기량 무제한의 프로토타입들은 르망 최장의 직선로를 시속 300km로 내달리며 관객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르망의 주인공은 재규어와 페라리. 재규어는 아름다운 보디의 C와 D타입으로 1950년대에만 5승을 올렸다. 49년 첫 승리를 거둔 페라리는 F1과 르망 양쪽에서 큰 활약을 했다. 54년 375 플러스가 우승한 뒤 1960년부터는 6연승의 대기록을 세웠다. 한편 페라리를 인수하려다가 실패한 포드가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르망 도전에 나섰고 GT40 시리즈로 4승(66~69년)을 챙겼다. 1965년 CSI는 부칙 C항을 없애는 대신 J항을 손봐 모든 차를 경주에 포함시켰다. 이 시기의 르망 경주차는 일반도로와는 무관한 완전 레이싱 프로토타입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1966년 경기에서는 순수 미국 경주차와 미국 드라이버가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직선에서 시속 320km를 돌파했다. 1970년과 71년에는 포르쉐가 새 규정에 따라 개발한 917을 선보여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51년부터 꾸준히 참가해온 포르쉐는 80년대 그룹C 규정이 생기면서부터 무적 행진을 시작했다. FIA는 1982년 경주차를 그룹A부터 E까지 새롭게 나누었고, 그 중 C그룹은 지붕을 가진 2인승 레이싱카로 차체 크기와 무게를 규제했지만 엔진은 무제한이었다. 이에 맞춰 개발된 포르쉐 956/962는 최강의 성능과 내구성을 자랑하며 80년대 르망에서 라이벌 없는 질주를 이어갔다. 80년대에만 무려 7승을 올린 포르쉐의 막강 파워 때문에 ACO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승자가 뻔한 레이스는 관객의 흥미를 떨어뜨리기 마련. 유럽의 내구레이스 시리즈였던 WSPC(World Sports Prototype car Championship) 역시 같은 고민을 하다가 레이스 성격 자체를 단거리 스프린트로 바꾸었지만 90년대 들어 인기가 점차 떨어지면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90년대 암흑기 지나 새 출발 80년대 말 세미 워크스로 활동을 시작해 45년 만에 르망에 복귀한 벤츠(90년 워크스 참가)와 TWR을 내세운 재규어, 새로운 도전자 푸조가 90년대 르망에서 경쟁을 벌였다. 도요타, 닛산 등의 일본 메이커는 계속 2위권에 맴돌았지만 유일하게 로터리 엔진의 마쓰다가 91년 일본차 최초로 우승을 차지해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에는 그룹C로 대표되는 레이싱 프로토타입 경주의 인기가 수그러들면서 암흑기를 맞는다. 결국 SWC로 이름을 바꾼 내구레이스 시리즈와 미국의 IMSA가 문을 닫았고 르망은 경주차 공백을 GT 클래스로 메웠다. 르망의 새로운 GT 규정은 당시 유럽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BPR 시리즈에 바탕을 두었다. 거품처럼 부풀었던 수퍼카 붐 이후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수퍼카를 서키트로 끌어들이기 위해 시작된 BPR 시리즈는 예상 이상의 인기를 모으며 메이커 참여가 줄을 이었다. 94년 우승한 다우어 포르쉐는 그룹C 시절의 962C를 튜너 다우어가 도로용으로 개조한 모델로 GT보다는 그룹C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듬해에는 BMW 엔진을 얹은 맥라렌 수퍼카 F1이 우승을 차지했다. 프로토타입이 사라진 르망은 예전 같은 속도경쟁을 벌이기 위해 도로용 인증만 받으면 GT1 출전이 가능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포르쉐 911 GT1, 벤츠 CLK-GTR, 닛산 R390 GT1, 도요다 GT1 등이 여기에 맞춰 등장했다. BPR은 FIA의 지나친 관여로 이름을 FIA-GT로 바꾸고 메이커들도 떠나버려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상태. 그러는 사이 ACO에서는 GT 대신 르망 프로토타입에 유리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최근의 르망은 LMP(르망 프로토타입) 900과 675, LM GTP 3가지 클래스가 주축을 이루고 양산 스포츠카인 GT 클래스가 함께 달린다. 벤츠가 99년 다시 퇴진했고 오랜 세월 2위권에 머물렀던 도요타와 닛산마저 F1과 인디로 각각 떠난 후 아우디가 본격적인 르망 진출을 선언하고 나섰다. 99년 사르트 서키트에 첫발을 디딘 아우디 워크스 팀은 2000년부터 3년 연속 우승컵을 차지하며 르망 역사를 새롭게 바꿔가고 있다. 80년대의 포르쉐 같은 황금기를 꽃피울 수 있을지 점치기는 아직 이르지만 이미 확실한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경주방식 시간이 긴 것을 제외하면 경주방식에 특별히 다른 것은 없다. 하지만 1년에 한번 열리는 만큼 예선에 많은 시간이 투자된다. 클래스별로 엔트리를 받은 뒤 경주차가 지나치게 많을 경우 예비예선에서 주최측이 제시한 일정기록(랩 타임)을 넘어야 예선에 참가할 수 있다. 예선에서의 랩 타임 기록에 따라 출발 위치(스타팅 그리드)가 정해지고 출발은 F1과 같은 스탠딩 스타트를 이용한다. 2줄로 지그재그 서 있다가 신호와 함께 출발하는 방식. 24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야 하기 때문에 드라이버는 최소 2명이 필요하고 최대 3명까지 구성할 수 있다. 한 드라이버가 6시간 안에 총 4시간 이상 운전할 수 없고, 전체 경기구간 중 14시간 이상 운전대를 잡아서도 안 된다. 1925년부터 쓰인 이른바 ‘르망식 스타트’ 방식은 지금 사라졌다. 피트 앞에 경주차를 비스듬히 세워두고 드라이버들은 길 건너 지정 위치에 서 있다가 출발신호와 함께 달려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방법이었다(사진). 조금이라도 시간을 덜기 위해 왼손으로 시동을 걸면서 동시에 오른손으로 기어를 1단에 넣게 했고 포르쉐는 지금도 그 전통에 따라 키박스가 왼쪽에 달려 있다. 지난 5월 4일 열린 올해 르망 예비예선에는 72대가 참가해 랩 타임을 쟀다. 이기록에 따라 50대의 엔트리 리스트를 확정한 뒤 경기(올해는 6월 14~15일) 시작 3일 전부터 이틀에 걸친 예선 결과에 따라 스타팅 그리드를 결정한다. 경기 시작 은 오후 4시. 올해의 참가 클래스는 LMP900과 LMP675, LM GTP 등 3가지 프로토타입과 양산차를 사용하는 LM GTS와 GT까지 모두 5가지로 나뉘어 있다. 사르트 서키트 현재 르망 24시간 레이스가 열리는 서키트의 공식 이름은 사르트 서키트(Sarte circuit). 몬테카를로 같은 시가지 서키트와 이몰라, 호켄하임 같은 일반 클로즈드 서키트(외부와 독립된 패쇄 형태)의 중간 성격을 띠고 있다. 평소에는 ‘부가티’(Bugatti)라는 클로즈드 서키트에서 경기가 열리지만 르망의 계절이 되면 부가티 코스 일부에 주변 국도를 연결해 1주 13.650km의 사르트 서키트로 변신한다. 서키트가 자리잡고 있는 르망시는 파리 서남서 약 200km 부근에 있는 도시로 유명한 로아르강의 지류 사르트 호수가 인접해 있다. 이곳 르망의 도로를 활용한 레이스가 시작된 것은 1906년 6월 열린 제1회 그랑프리. 당시 경주는 지금의 르망 코스와 다르게 부근 도시인 브로아르, 상카레, 라페르테, 베르나르를 연결하는 1주 103.18km의 거대한 삼각형 코스에서 치러졌다. 하지만 1923년 제1회 르망 24시간 레이스가 개최된 코스는 지금과 비슷한 사이즈로 줄어들었다. 1928년까지 쓰인 코스는 1주 17.262km로 한쪽에 급격한 헤어핀 코너가 있는 직각삼각형 꼴이었다. 29년 사고가 많던 헤어핀 코너를 잘라 부드럽게 다듬었지만 위험은 여전했다. 1932년 ACO는 완전히 새로운 코스 형태를 완성했고 길이도 13.492km로 줄였다. 이 레이아웃이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르망 공식 코스로 쓰이고 있다. 경주차들이 메인 스탠드 앞에서 출발하면 곧바로 오른쪽으로 휜 큰 커브를 만나게 된다. 1932년 헤어핀을 개량한 S커브의 관통코스는 1956년 다시 개량을 거쳐 코너 곡률을 다듬었다. 완만한 오르막을 지나 언덕의 끝 부분에서 유명한 ‘던롭 커브’―던롭 광고판이 설치되어 있다―가 나타난다. 다음으로 내리막이 이어지면서 S커브(The Esses). 출발부터 여기까지가 부가티 서키트에 포함된 구간이다. 이곳을 지나면 제2의 던롭 커브라 불리는 오른쪽 커브 테르트르 루즈가 이어지고 곧바로 르망 최장 직선코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 르망과 투르를 연결하는 국도의 일부분으로 전 세계 서키트 중 가장 긴 이 직선로는 경주차의 엔진과 공력 성능을 시험하기에 좋은 장소다. 긴 직선로 끝 부분에서는 최고시속 400km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90년부터 중간에 S자 형태의 시케인 2개를 설치해 지나친 과속을 막고 있다. 기나긴 직선로 끝에는 오른쪽으로 급하게 휜 뮬산느 코너가 기다리고 있다. 시속 300km대의 속도에서 갑자기 50~70km로 감속해야 하기 때문에 타이밍을 놓친 경주차는 코스아웃을 피할 수 없다. 뮬산느를 지나면 인디애나폴리스와 아르나지로 이어지는 크랭크 코너가 있다. 이어 포르쉐 커브와 포드 시케인을 지나면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최고의 드라이버 르망은 1년에 단 한번 열리지만 경주차 당 2~3명의 드라이버가 한 조를 이루기 때문에 한번에 최소 2명 이상의 우승자를 배출한다. 르망 80년 역사 속에서 시상대 중앙에 가장 많이 섰던 영예의 주인공은 재키 아이크스(Jacky Ickx, 사진 왼쪽)다. 아이크스만큼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한 드라이버도 드물다. F1은 물론 르망과 랠리에서 활동하며 화려한 전적을 남겼지만 역시 첫손에 꼽히는 것은 6승의 전적을 자랑하는 르망 24시간. 이 때문에 ‘미스터 르망’이라는 영예로운 닉네임을 얻었다. 1966년 포드 GT40으로 처음 도전해 리타이어했지만 1969년 J. 올리버와 함께 포드 GT40으로 재도전. 당시 성능에서 앞섰던 포르쉐 908과 치열한 접전 끝에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75년에는 새로운 파트너 D. 벨과 함께 미라주 GR8로 다시 우승. 76~77년 포르쉐 936으로 우승하고 81~82년에도 D. 벨과 함께 사르트 서키트를 제압했다. 재키 아이크스 다음으로는 그와 함께 포르쉐 전성기를 일구어낸 데릭 벨(Derek Bell, 사진 오른쪽)이 꼽힌다. 1975년 아이크스와 함께 미라주를 타고 첫승을 차지한 벨은 르망 5승의 전적을 갖고 있다. 1981년 936/81 경주차를 시작으로 82년과 86, 87년 모두 포르쉐와 함께 우승컵을 안았다. 80년대 포르쉐 전성기를 연 주인공이다. 최강 팀/드라이버 궁합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요스트-아우디 R8의 3연승 위업은 같은 드라이버진이 이룩한 성과였다. 프랑크 비엘라(독일)와 톰 크리스텐센(덴마크), 엠마누엘 피로(이태리) 3인조는 동일 경주차로 호흡을 맞춰 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한편 이들이 소속된 팀은 아우디 스포츠팀 요스트. 르망 우승을 목표로 프로젝트를 시작한 아우디는 경험이 풍부한 요스트 팀을 파트너로 선택했다. 가장 유명한 포르쉐 프라이비터로서 3번의 르망 우승 경험을 갖고 있는 요스트는 최적의 선택. 드라이버 라인홀트 요스트에 의해 1979년 결성된 팀 요스트는 이듬해 창단주가 직접 운전대를 잡아 르망 2위에 올랐고 84~85년 포르쉐 956으로 2연승을 기록했다. 내구레이스와 DTM, IMSA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던 요스트는 97년, 포르쉐 엔진을 얹은 르망 프로토타입으로 다시 한번 우승컵을 안는다. 최강 드라이버/팀 조직에 직분사 기술을 사용한 경주차 R8의 성능이 더해지면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 연속 우승을 싹쓸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4연승 기록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비엘라와 피로는 올해 서로 다른 팀원과 짝을 이뤄 아우디 R8을 몰게 되었고 T. 크리스텐센은 벤틀리 스피드8의 스티어링 휠을 잡는다. 최대의 참사
메르체데스 벤츠는 수많은 레이스에 참가해 화려한 전적을 남겼지만 르망 24시간과는 악연으로 얽혀 있다. 르망 역사상 최대 참사로 손꼽히는 1955년의 사고 때문이다. 그 해 벤츠는 유럽 F1 그랑프리에서 무적의 성능을 자랑하던 W196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곡선 보디를 얹고, 무엇보다 운전석 뒤에 달린 에어 브레이크로 눈길을 끄는 300SLR 경주차를 선보였다. 55년의 르망은 재규어 D타입과 애스턴마틴 DB3S, 페라리, 포르쉐 등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선두를 달리던 재규어의 호돈이 피트인하기 위해 우회전하자 바싹 뒤따르던 힐리가 이를 피하려다 루베가 몰던 300SLR과 충돌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벤츠 경주차는 산산이 부서지며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관객석을 덮쳐 82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 사고로 벤츠는 긴급중역회의를 열어 레이스 활동을 중지하기에 이른다. 벤츠는 자우버-현재 F1에서 활동중이다 -와 함께 르망에 재도전해 89년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이고, 예전의 악몽이 되살아나 벤츠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1999년 르망에 참가한 CLR이 공력설계 문제로 예선주행 때 인디애나폴리스 코너에서 갑자기 앞머리가 들리며 떠올라 공중제비를 해버린 것. 결국 벤츠는 어렵게 돌아온 르망에서 다시 퇴진하기로 결정했다. 넘버 원 컨스트럭터 페라리가 F1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면 르망에는 포르쉐가 있다. 포르쉐가 르망에 첫발을 내딛은 것은 1951년. 356으로 클래스 우승을 차지한 뒤 550 스파이더와 RSK, 904, 911 등으로 꾸준하게 도전했다. 첫 종합우승을 거머쥔 것은 917로 참가한 1970년. 포르쉐는 60년대 중순부터 907, 908, 910 같은 본격적인 프로토타입을 선보여 69년 917을 완성했고 이를 통해 70년과 71년에 2연승을 올렸다. 이후 지금까지 16번(프라이비터 포함)이나 우승. 양산차인 911로도 꾸준히 르망에 참가한 포르쉐는 77년 그룹5 규정에 따른 935를 선보였다. 911을 극한까지 개조한 935는 그룹6의 순수 경주차들을 누르고 79년 1~3위를 독식하기도 했다. 가혹한 경기 조건을 통해 체득한 기술과 노하우로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 메이커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포르쉐에는 유명 경주차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룬 것은 1982년 그룹C 규정과 함께 등장한 956과 962다. 956과 962는 기본적으로 같은 차지만 규정에 따라 약간 다르게 개조되었다. 82년을 시작으로 87년까지 7년 연속 르망을 제패했을 만큼 무적의 존재. 84, 85년의 경우 10위권에 8대, 86년에는 7대가 956/962였다. 하지만 지나친 독주 때문에 유무형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1988년을 마지막으로 워크스 활동을 중지했고 이후 요스트, 크레머, 다우어 같은 프라이비트 팀을 측면 지원했다. 96년과 97년 프라이비터 요스트가 포르쉐 엔진을 얹은 프로토타입으로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98년에는 워크스 팀의 911 GT1로 다시 왕좌에 올랐다. 하지만 규정이 GT 대신 르망 프로토타입에 유리하게 바뀌면서 다시 워크스 활동을 중지했다. 사진은 2001년 미국 라임록파크 서키트에 모인 956과 962. 중앙의 인물은 이 걸작 경주차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노르베르트 징거다. 르망을 빛낸 경주차들 Bentley Speed 6 W.O. 벤틀리가 제1회 르망 24시간 레이스 개최소식을 들었을 때 “불가능한 일이다. 한 대도 완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부정적 시각과는 반대로 런던에서 벤틀리 딜러를 하고 있던 존 더프는 3X 벤틀리로 르망에 출전했고, 벤틀리 자신도 피트에서 팀을 지휘하게 되었다. 결국 아이러니컬하게도 1927~30년 4연승을 차지하며 르망 역사의 초창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주인공이 바로 벤틀리다. 벤틀리는 4가지 경주차를 르망에 보냈다. 1923~27년 3X를 시작으로 27~28년 4½X, 29~30년에는 6½X를 보냈고 1930년에는 4½X에 수퍼차저를 얹은 개량형을 선보였다. 이 중 1925년 런던 모터쇼에서 데뷔한 스피드식스 6½X는 기본적으로는 4½X용 4기통 엔진에 2기통을 잘라 붙인 6기통 블록 구조이지만 크랭크와 캠축 사이에 새로운 편심 디스크 기구를 단 것이 특이했다. 르망용 경주차는 운동 부품의 밸런싱과 헤드 절삭에 의한 고압축비, 가변 벤추리 방식의 트윈 카뷰레터 등을 통해 성능을 한 차원 높였다. 육중한 차체에 기능미를 지닌 스피드식스는 롤스로이스에 인수되기 전 벤틀리의 순수 혈통을 간직한 최후의 종마라고 할 수 있다. Alfa Romeo 8C 2300
1931년부터 34년까지 4연승을 차지한 알파로메오 8C 2300은 전설적인 엔지니어 비토리오 야노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직렬 8기통 DOHC 엔진은 원래 그랑프리 경주차를 위해 개발된 ‘몬자 알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직렬 4기통 2개를 직렬로 배치한 2천336cc로 기어 구동되는 밸브 기구와 반구형 연소실을 갖추었고 루츠형 수퍼차저와 6.2의 압축비(기본형은 5.7)로 알코올 혼합연료를 썼다. 레이싱 버전의 출력은 180마력에서 220마력까지 올라갔다. 1931년 발표된 그랑프리 머신 몬자 알파에 처음으로 얹힌 이 엔진은 블록 중앙에 DOHC 구동용 기어 트레인을 갖추었고 크랭크샤프트 역시 2개를 중간에서 결합한 구조. 채널 프레임 스타일의 두 가지 섀시 중에서 르망 버전은 롱 휠베이스(2천600mm)를 쓰고, 반원형 리프 스프링과 마찰식 댐퍼를 달았다. 르망용 8C 2300의 보디는 자가토로 알려져 있지만 1932년형만은 드라이버 솜머가 친구인 피고니에게 주문해 특별제작한 것이었다. 자가토는 나중에 알파로메오 줄리에타를 르망 경주차 스타일로 꾸며 한정생산하기도 했다. Bugatti Type 57 Tank 부가티 타입57은 르망 역대 우승차 중 가장 먼저 유선형의 풀 카울을 씌운 차로 기록되어 있다. 이미 유선형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았을 때지만 바퀴까지 완전히 덮은(all envelop) 보디는 부가티 타입57이 처음이었다. 1930년대는 1차대전 중에 얻은 항공기술 바탕의 유선형 디자인 연구가 활발해 크라이슬러 에어플로나 피어스애로의 실버 애로 등이 탄생했다. 유럽에서 독일의 룸플러와 프랑스의 브와쟁 등 항공 관련 엔지니어가 선구자로 기록될 때 부가티 역시 1922년 유선형 그랑프리 경주차를 만들었고, 이듬해에는 바퀴까지 덮은 새로운 보디를 선보였다. 그 디자인을 많이 닮은 타입57S와 57C는 독특한 디자인 때문에 ‘탱크’라는 이름을 얻었다. 1935년 발표된 57S는 영국 만섬 TT 레이스와 몽렐리-마르느, 랭스 등의 코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뒤 르망으로 자리를 옮겨 1937년 우승했다. 37년형 타입57S의 엔진은 부가티가 자랑하던 직렬 8기통 3천257cc, 드라이섬프 윤활계통을 가졌고 최고출력 160마력을 냈다. 2년 후 다시 우승을 차지한 타입57C는 57S에 기계식 수퍼차저를 더해 최고출력을 200마력으로 높였다. X당 4km의 뛰어난 연비에 최고시속도 270km에 달했다. Cadillac Spyder 르망 24시간의 캐딜락이라고 하면 대부분 라일리&스콧 섀시에 노스스타 엔진을 얹은 지금의 LMP 경주차를 떠올리겠지만 1950년에 이미 캐딜락의 이름이 르망 엔트리에 올라 있었다. 당시 출전한 경주차는 양산 세단 드빌의 개량형과 캐딜락 스파이더 두 대. 그 중 샘과 마일즈 콜리어가 몬 캐딜락 스파이더는 르망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디자인으로 꼽히고, 드빌 세단에 이어 종합 11위를 차지했다. 캐딜락 스파이더는 양산차 디자인 그대로 출전한 세단 드빌과 달리 넙치처럼 납작한 2인승 오픈 보디에 바퀴까지 커버를 씌워 공기저항을 최소화했다. 옆에서 보면 마름모꼴을 이루는 기괴한 디자인에 대형 엔진에서 뿜어내는 매연과 백파이어가 더해져 ‘괴물’(Le Monstr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차를 만든 이는 1950년 캐딜락 세단 드빌을 몰았던 브릭스 커닝햄. 드라이버이며 스포츠카 제작자로 이름을 날린 커닝햄은 이후 C4R과 C5R, C6R 등 오리지널 스포츠카를 차례로 선보이며 르망에 도전했지만 재규어의 위세에 밀려 우승컵에 다가서지는 못했다. MG-BRM Turbine Racer 2차대전이 끝난 뒤 각종 관련기술이 다양한 형태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제트 엔진은 가스터빈이라는 형태로 자동차에 내려앉았다. 전후 세계 최초의 가스터빈 차 T1을 선보인 로버는 1963년 뉴욕 오토쇼에 전위적인 보디의 앞바퀴굴림 터빈카 T4를 선보였다. 이와 동시에 터보 엔진을 얹은 미드십 경주차도 개발중이었다. T4용 터빈을 바탕으로 열교환기를 없애 출력을 높였고 섀시는 BRM의 2.5X 포뮬러 경주차를 개량해 알루미늄 보디를 얹었다. 정식 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번외로 출전한 1963년에는 연비가 2.5km/X에 불과해 2시간 반마다 연료를 보충해야 했다. 하지만 정식 엔트리에 든 65년에는 미국 코닝사의 최신 열교환기 덕분에 연비가 2배 가까이 좋아져 종합 10위, 클래스 2위(1300~1600cc)의 성적을 남겼다. 신형 터빈은 1차축 6만5천rpm, 출력축 3만9천rpm의 최고회전수로 145마력을 냈고 큰 감속비와 높은 회전수를 견뎌야 하는 변속기는 F1 경주차 BRM 타입57의 것을 개량해 썼다. 터빈의 특성상 전진 1단과 뉴트럴밖에 없고 액셀과 브레이크 조작만으로 속도를 조절했다. Jaguar XK120 D
195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재규어 D타입(XK120 D)은 르망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경주차 중 하나로 꼽힌다. 1950년 XK120으로 르망에 도전하기 시작한 재규어는 51~53년 C타입, 54~57년 D타입을 투입했고 51년 첫승을 시작으로 통산 7번의 우승컵을 안았다. 그 중에서도 55~57년 3연승을 차지한 주인공이 바로 D타입. 아름다운 곡선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보디 디자인 속에 스포츠 레이싱카 최초의 모코코크 섀시와 디스크 브레이크를 감추고 있었다. 직렬 6기통 3천442cc DOHC 엔진은 XK 시리즈용을 기본으로 3개의 트윈 초크 카뷰레터와 함께 특수제작된 헤드로 압축비를 9.0으로 높여 250마력의 최고출력을 얻었다. 당시 레이스 전용 머신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과 달리 D타입은 치프 엔지니어 윌리엄 헤인즈의 지론에 따라 양산 스포츠카를 바탕으로 했다. 중요부품은 양산 XK에서 가져왔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드라이섬프 윤활계통과 엔진 위치 변경 정도다. 생산성까지 고려된 D타입은 양산차의 내구성과 성능을 겨룬다는 르망의 기본 취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머신 중 하나였다. 양산형은 XKSS라는 이름으로 시판될 예정이었지만 코벤트리 공장의 화재사고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고, 결국 그 혈통이 XKE(E타입)로 이어졌다. Ferrari 250 Testa Rossa 르망의 페라리라면 페라리 최초의 미드십 머신으로 불리는 250LM이 유명하지만 FR의 250TR과 아름다운 보디라인의 250GTO 그리고 비운의 330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르망 최초의 페라리 우승차는 2차대전 직후 재개된 1949년 경기에 출전했던 166. 그랑프리와 스포츠카 레이스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페라리는 이후 다양한 경주차를 선보였고 1951년 유명한 V12 3.0X 엔진의 250 시리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싱 스포츠카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250TR이 등장한 것은 1956년. ‘붉은 머릿결’을 뜻하는 테스타로사(Testa Rossa, 약자로 TR)라는 명칭은 이탈리안 레드의 헤드커버에서 유래되었다. 강관 스페이스 프레임에 얹힌 아름다운 피닌파리나 보디는 브레이크 냉각용인 별도 흡기구가 눈길을 끌고, V12 3.0X SOHC 엔진이 300마력을 내며 스파이더 보디를 최소시속 300km까지 끌어올렸다. 1958년 우승차(TR58)는 2위 애스턴마틴을 160km 이상 따돌리며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에는 21시간째 리드를 지키다 아쉽게 리타이어했지만 1960년(TR59/60)에 원투 피니시를 하고, 61년에는 1~3위(TR61)를 독점하며 페라리 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페라리는 330P, 275P 등의 경주차를 선보이며 65년까지 6연승의 대기록을 세웠다. Ford GT40 페라리 인수 작업이 무산된 뒤 포드는 르망에서 페라리를 꺾기 위한 경주차 개발에 들어갔다. 완전 백지상태에서 설계작업을 시작해 영국의 레이싱 컨스트럭터 롤라로부터 에릭 브로들리 설계의 경주차를 인수(1964년)하는 한편, 롤라 근처에 포드 어드벤스드 비클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한편 디어본의 포드 본사에서는 최첨단 컴퓨터 필코 212가 해석작업에 활용되고 있었다. 포드 산하의 항공우주사업부 에어로뉴트로닉스의 협력을 얻어 항공기 테스트용 장비까지 이용, GT40의 에어로 다이내믹 보디가 탄생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GT40이라는 이름은 40인치(1천16mm)의 차 높이에서 유래되었다. 세계 제2의 기업 포드가 보여준 엄청난 자본력과 물량은 유럽인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투자를 했음에도 푸시로드식 V8 4.7X 386마력 엔진을 얹은 초기 마크Ⅰ의 성적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인디용 4.2X와 스몰블록 4.7X, 4.9X, 5.8X 등 다양한 엔진을 테스트했지만 신뢰성 부족으로 리타이어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1966년 강력한 7.0X OHV 엔진의 마크Ⅱ를 투입하면서 르망과 페라리의 높은 벽을 넘는 데 성공했다. 68년 규정 변경에 따라 5.0X 이상 엔진을 쓸 수 없게 되면서 포드 대신 걸프-JW 팀이 워크스 활동을 이어받았지만 68년과 69년에도 GT40의 독주가 계속되었다. Porsche 917K
‘위험할 정도로 빨랐다’고 표현되는 포르쉐의 걸작 917은 1967년 10월 CSI가 발표한 새로운 프로토타입 규정에 따라 태어났다. 변경된 규정은 당시 사르트 서키트를 주름잡던 7X 엔진의 포드나 채퍼랠, V12 엔진의 페라리가 날로 스피드를 올리는 데 대한 대응책이었다. 포르쉐는 이에 따라 신형 경주차 917을 69년 제네바 오토살롱에서 14만 마르크라는 가격표와 함께 전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912’라는 이름의 신형 엔진은 당시 치프 엔지니어였던 페르디난트 피에히(전 폴크스바겐/아우디 회장)가 개발을 이끌었다. 그 결과 수형대향 8기통 3.9X와 12기통 4.5X 두 가지 DOHC 엔진이 태어났다. 12기통 엔진은 542마력이라는 강력한 출력을 자랑했지만 910, 907, 908에서 이어받은 하체는 그만한 힘을 견디기에 무리가 있었다. 69년 르망 연습주행에서는 시속 380km라는 경이적인 속도를 기록하고도 프라이비터 존 울프가 사고로 죽는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빠르게 문제를 해결한 후 다양한 보디를 얹으며 69~70년 24번의 세계선수권에서 15번의 우승을 챙겼고 르망에서는 70년과 71년 2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미국 포르쉐/아우디 딜러의 요청에 따라 미국 캔암용으로 개량된 917/10은 수평대향 12기통 4.5X 에 터보를 더해 850~1천100마력의 괴력으로 맹위를 떨쳤다. Chaparral 2F 1967년 등장한 채퍼랠은 유럽에서 보기 드문 순수 미국 경주차라는 희소성 외에도 독특한 스타일링과 메커니즘, 성능으로 화제를 모았다. 텍사스에서 정유업으로 성공한 짐 홀은 드라이버로도 활약하며 1960년 트라우트먼과 번즈에게 경주차 제작을 의뢰해 채퍼랠1이라고 불렀다. 63년 채퍼랠2부터는 자신이 직접 설계, 제작하기 시작했고 이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게 독창적인 형태와 참신한 메커니즘으로 눈길을 끌었다. ‘올 플라스틱 카’라고 불린 강화 플라스틱 섀시는 물론 자동 변속기를 쓰기도 했고, 뒤에 대형 팬 2개를 달아 바닥의 공기를 뽑아내 접지력을 만드는 2J(일명 진공청소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67년에 선보인 2F는 2D에 이어 채퍼랠이 두 번째로 유럽 도전을 위해 선보인 머신.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높게 배치된 거대한 리어윙이다. 차체와 멀리 떨어진, 높은 곳의 공기 흐름을 이용해 더욱 큰 다운포스 효과를 얻었다. 더구나 각도조절이 가능한 윙은 코너에서 다운포스를 늘리거나 에어 브레이크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F2의 혁신적인 윙 디자인은 F1 경주차 디자인에까지 영향을 미쳐 60년대 말 ‘하이윙’ 열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PVC와 에폭시 수지로 만든 모노코크 미드십에는 4개의 트윈 초크 카뷰레터를 갖춰 540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는 시보레 V8 7.0X 엔진과 자동변속기를 얹었다. Matra MS670 1970년대 초반 르망을 휘어잡은 것은 프랑스의 마트라였다. 르노 미니밴 에스파스 개발로 잘 알려진 마트라는 전신전화는 물론 항공우주와 무기산업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프랑스 거대기업. 자동차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온 마트라는 80년대 들어 르망 프로토타입을 선보이는 한편 F1에 V12 엔진을 공급하고 있었다. 1972년 내구레이스 엔진 규정이 3X로 바뀌자 마트라는 이 V12 엔진을 바탕으로 신형 경주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72년 선보인 1대의 660과 3대의 670은 오픈 보디에 앞 타이어 사이즈를 줄여 공기저항을 덜었다. 원래 F1을 겨냥해 개발된 구형 MS12와 신형 MS72 엔진은 내구성 중심으로 개량되었고 출력은 460/500마력을 자랑했다. 마트라는 MS670으로 72년부터 74년까지 3연승을 차지했다. 페스카롤로와 라루스가 몰고 73, 74년을 휩쓸었던 670B는 길고 아름다운 꼬리 부분에 수직 꼬리날개를 가졌고 최고시속은 325km. 74년 르망에서는 450마력(1만500rpm)을 냈고 4~6시간의 단거리 경주에서는 숏 테일 보디와 함께 650마력으로 세팅되었다. 이 해 르망뿐 아니라 내구레이스 시리즈에서도 챔피언에 올랐지만 마트라는 곧바로 레이스 활동을 중지하고 말았다. Porsche 956/962
1980년대 르망 24시간은 ‘포르쉐’라는 이름 하나로 요약된다. 1982년 FIA(국제자동차경기연맹)가 발표한 새로운 경주차 규정은 기존의 그룹1~6을 새롭게 정비하는 한편 그룹5와 6을 한데 묶은 그룹C를 신설했다. 엔진에 대한 최저 생산대수와 배기량, 과급에 대한 규제를 줄이면서 연료탱크 용량을 100X로, 24시간 레이스에서 피트스톱 회수를 25번으로 제한한 새로운 규정은 포르쉐 시대를 여는 발판이 되었다. 이에 따라 82년 첫선을 보인 956은 그 해 1~3위를 휩쓸었고 이듬해에는 상위 9개 포지션(1~8, 10위)을 석권하는 등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드라이버 재키 아이크스는 같은 해 내구레이스 세계 챔피언에까지 올랐다. 엔진은 포르쉐가 자랑하는 수평대향 6기통 2.65X에 수랭식 DOHC 헤드를 얹고 KKK 터보 2개를 갖춰 2.2바의 과급압으로 620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다.84년부터는 IMSA 규정을 의식해 휠베이스를 늘인 962가 등장했다. 포르쉐의 명성은 하늘을 찔러 요스트, 크레머, 다우어 등의 프라이비트 팀은 물론 미국 IMSA 시리즈에서도 주문이 쏟아졌다. 956/962 시리즈는 이들과 함께 화려한 전적을 남겼다. 84~87년 4연승은 물론 경주차로서 이미 환갑을 넘긴 94년에도 다우어가 신생 GT 클래스에 도전, 우승함으로써 통산 7승을 차지했다. Mazda 787B 르망 역사상 가장 독특한 심장을 꼽으라면 91년 우승차인 마쓰다 787B를 떠올릴 수 있다. 수많은 레시프로(왕복형) 엔진들 틈에서 빛나는 유일한 로터리 우승차이기 때문이다. 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르망에 도전장을 던진 일본 메이커들 중 우승컵을 차지한 것 역시 마쓰다가 유일하다. 787B의 4로터 로터리(654cc×4) 엔진은 로터 당 3개씩의 스파크플러그를 갖추고 최고출력 700마력을 냈다. 영국에서 제작된 카본 섀시를 일본으로 가져와 엔진을 얹고 포르쉐 싱크로매시 타입 5단 변속기를 연결했다. 당시 최강의 성능을 자랑하던 벤츠와 재규어를 누르고 우승했을 뿐 아니라 일본 경주차 최초, 자연흡기 이외 엔진 최초 우승이라는 기록도 함께 남겼다. 이후 규정변경 때문에 로터리 엔진의 르망 참가가 금지되었고 마쓰다는 새로운 V8 엔진을 선보였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Audi R8 99년부터 르망에 도전하기 시작한 아우디는 첫해 오픈 스타일의 R8R과 클로즈드 루프의 R8C 각 두 대를 투입해 R8R이 3, 4위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아우디가 르망 우승을 위해 손잡은 파트너는 포르쉐 프라이비트 팀으로 이름을 날리며 3회의 우승 경력을 자랑한 요스트. 이듬해 LMP900의 신형 R8을 선보여 1~3위를 차지, 르망 포디움을 장악해 버렸다. 이후 2001년 1~2위, 2002년 1~3위 등 아우디의 독주가 계속되고 있어 재미가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R8의 V8 3.6X 트윈터보 엔진은 르망 차 최초로 직분사 기술(FSI)을 써 더욱 유명해졌다. 자연흡기 엔진과 비슷한 출력특성 덕분에 다루기 쉽고 뛰어난 연비로 피트스톱 회수를 줄인 것이 3회 우승의 비결이 되었다.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GTP 클래스의 벤틀리 스피드8 역시 안정된 전적을 기록함으로써 뛰어난 연비와 신뢰성을 증명하고 있다. 르망은 물론 현재 미국에서 열리고 있는 ALMS(아메리칸 르망 시리즈)에서도 상위권을 독점하고 있다. < 카비전, 2003년 06월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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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6월이 되면 프랑스의 작은 도시 르망은 경주차의 찢어지는 배기음과 관중들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모나코 F1 그랑프리, 인디애나폴리스 500과 더불어 세계 3대 모터 스포츠 이벤트로 꼽히는 르망 24시간(24 Heures du Mans)이 열리기 때문. 하루종일 경주차와 드라이버의 한계상황을 시험하는 르망 24시간은 내구레이스의 대명사로 손꼽히며 어느덧 80주년을 맞았다.
4번의 르망 우승(58, 60~62년) 경험이 있는 올리비에 장드비앙이 표현하는 르망의 극한상황은 이렇다. “시속 270km로 질주하는 직선코스 끝의 뮬산느 코너는 시속 약 65km, 1단 기어가 아니면 통과할 수 없다. 가능한 한 브레이크를 아끼면서 톱 기어에서 1단까지 순식간에 연속적으로 시프트다운 해야만 한다. 이것은 단 2초간, 90m 거리를 달리면서 끝내야 하는 동작이다.” 하루 꼬박 이런 까다로운 작업을 해내야 하는 것은 드라이버에게나, 경주차에게나 극도로 가혹한 조건이다. 그의 활약은 이미 40년 전 옛날 이야기가 되었고 그동안 기술도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24시간 동안 경주차에 요구되는 성능과 신뢰성, 드라이버에게 요구되는 테크닉과 인내력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다. 양산차의 신뢰성 경쟁을 위해 1923년 시작된 르망 24시간 레이스는 초창기의 단순한 경쟁 수준을 넘어 자동차의 공력 성능과 메커니즘의 신뢰성을 겨루는 시험장으로서 80년을 한달음으로 달려왔다. 그 기록은 메이커의 기술개발 역사이며 모터 스포츠 발전사인 동시에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끝없는 도전정신 그 자체다. 1923년, 역사의 시작 르망 24시간 레이스의 역사는 현재 이를 주최하고 있는 ACO(L`Automobile Club de l’Ouest, 서부자동차클럽)의 결성에서 시작되었다. 휘발유 자동차가 르망 지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83년. 새로운 운송수단이 곧 이 지방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1895년 설립된 ACF(프랑스자동차클럽)가 새로운 자동차 경주 규정을 선보이자 르망의 몇몇 자동차 애호가들이 뜻을 모아 그랑프리 개최를 준비하고 나섰다. 주변 도시간 도로를 연결하는 1주 103km의 거대한 삼각형 코스를 구성했고 흙길에 타르를 발라 원시적인 서키트를 완성했다. ACO의 전신인 사르트 자동차클럽이 탄생한 것은 1906년. 그 해 6월 르망 지역에서 첫 그랑프리가 개최되었고, 이것이 이후 르망 24시간 레이스의 시발점이 된다. 1912~13년 프랑스 그랑프리가 열렸지만 1차대전의 영향으로 1914년부터 1920년까지는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다시 활동을 시작한 ACO는 소형차와 모터사이클 레이스를 개최했다. ACO의 사무국장이었던 조르주 듀란과 규스타브 시니에, 저널리스트였던 샤를르 파르 등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레이스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그랑프리는 경주차와 시판 모델의 차이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흥미가 떨어진다고 판단한 ACO는 일반 시판차로 24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는 내구레이스를 기획했다. 이것이 바로 르망 24시간이다. 르망 24시간 첫 경기가 열린 것은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23년이었다. 총 35대의 경주차 중 33대가 결승에 출전했고 대부분 프랑스 차였다. 당시 서키트의 1주 거리는 17.262km. 시작 직후 비가 퍼부어 어렵게 진행된 경주에서 쉐나르 에 벨케르가 평균시속 92km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영국차인 클레멘트가 우승하기는 했지만 초창기 르망 24시간은 지방 레이스일 뿐 국제적인 이벤트는 아니었다. 하지만 1927년부터 벤틀리가 4연승을 거두고 알파로메오가 4연승(1931~34년 우승)으로 뒤를 이으며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얻어갔다. 벤틀리 3X나 수퍼차저를 단 알파로메오 8C-2300, 부가티 타입57C 등이 2차대전 전까지 르망을 주름잡았다. 프로토타입의 시대로
르망은 80년 역사 중에 두 번의 공백이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의 전국적인 파업 때문에 열리지 못했고 두 번째는 2차대전의 포화가 빗발치던 1940~48년의 9년 간이다. 1949년 다시 르망이 열렸을 때는 흘러버린 시간만큼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프로토타입 규정’의 신설. 당시 상황에서 양산 스포츠카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극히 적은 대수만 제작하면 되는 프로토타입은 훌륭한 대안이었다. 프로토타입 규정은 르망을 크게 변화시켰다. 성능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기술발전 속도도 한층 빨라졌다. 그와 반대로 양산차 성능과 내구성의 경쟁이라는 본래 취지는 퇴색되기 시작했지만 ACO는 몰려드는 관중에게 좀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빠른 스피드의 프로토타입 경주차를 필요로 했다. 1955년 이후에는 프로토타입이 상위권을 휩쓸기 시작해 결국 국제스포츠카위원회(CSI)에서 의미 없는 프로토타입 규정 대신 2인승 레이싱카를 위한 포뮬러인 부칙 ‘C항’을 더했다. 배기량 무제한의 프로토타입들은 르망 최장의 직선로를 시속 300km로 내달리며 관객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르망의 주인공은 재규어와 페라리. 재규어는 아름다운 보디의 C와 D타입으로 1950년대에만 5승을 올렸다. 49년 첫 승리를 거둔 페라리는 F1과 르망 양쪽에서 큰 활약을 했다. 54년 375 플러스가 우승한 뒤 1960년부터는 6연승의 대기록을 세웠다. 한편 페라리를 인수하려다가 실패한 포드가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르망 도전에 나섰고 GT40 시리즈로 4승(66~69년)을 챙겼다. 1965년 CSI는 부칙 C항을 없애는 대신 J항을 손봐 모든 차를 경주에 포함시켰다. 이 시기의 르망 경주차는 일반도로와는 무관한 완전 레이싱 프로토타입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1966년 경기에서는 순수 미국 경주차와 미국 드라이버가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직선에서 시속 320km를 돌파했다. 1970년과 71년에는 포르쉐가 새 규정에 따라 개발한 917을 선보여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51년부터 꾸준히 참가해온 포르쉐는 80년대 그룹C 규정이 생기면서부터 무적 행진을 시작했다. FIA는 1982년 경주차를 그룹A부터 E까지 새롭게 나누었고, 그 중 C그룹은 지붕을 가진 2인승 레이싱카로 차체 크기와 무게를 규제했지만 엔진은 무제한이었다. 이에 맞춰 개발된 포르쉐 956/962는 최강의 성능과 내구성을 자랑하며 80년대 르망에서 라이벌 없는 질주를 이어갔다. 80년대에만 무려 7승을 올린 포르쉐의 막강 파워 때문에 ACO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승자가 뻔한 레이스는 관객의 흥미를 떨어뜨리기 마련. 유럽의 내구레이스 시리즈였던 WSPC(World Sports Prototype car Championship) 역시 같은 고민을 하다가 레이스 성격 자체를 단거리 스프린트로 바꾸었지만 90년대 들어 인기가 점차 떨어지면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90년대 암흑기 지나 새 출발 80년대 말 세미 워크스로 활동을 시작해 45년 만에 르망에 복귀한 벤츠(90년 워크스 참가)와 TWR을 내세운 재규어, 새로운 도전자 푸조가 90년대 르망에서 경쟁을 벌였다. 도요타, 닛산 등의 일본 메이커는 계속 2위권에 맴돌았지만 유일하게 로터리 엔진의 마쓰다가 91년 일본차 최초로 우승을 차지해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에는 그룹C로 대표되는 레이싱 프로토타입 경주의 인기가 수그러들면서 암흑기를 맞는다. 결국 SWC로 이름을 바꾼 내구레이스 시리즈와 미국의 IMSA가 문을 닫았고 르망은 경주차 공백을 GT 클래스로 메웠다. 르망의 새로운 GT 규정은 당시 유럽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BPR 시리즈에 바탕을 두었다. 거품처럼 부풀었던 수퍼카 붐 이후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수퍼카를 서키트로 끌어들이기 위해 시작된 BPR 시리즈는 예상 이상의 인기를 모으며 메이커 참여가 줄을 이었다. 94년 우승한 다우어 포르쉐는 그룹C 시절의 962C를 튜너 다우어가 도로용으로 개조한 모델로 GT보다는 그룹C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듬해에는 BMW 엔진을 얹은 맥라렌 수퍼카 F1이 우승을 차지했다. 프로토타입이 사라진 르망은 예전 같은 속도경쟁을 벌이기 위해 도로용 인증만 받으면 GT1 출전이 가능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포르쉐 911 GT1, 벤츠 CLK-GTR, 닛산 R390 GT1, 도요다 GT1 등이 여기에 맞춰 등장했다. BPR은 FIA의 지나친 관여로 이름을 FIA-GT로 바꾸고 메이커들도 떠나버려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상태. 그러는 사이 ACO에서는 GT 대신 르망 프로토타입에 유리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최근의 르망은 LMP(르망 프로토타입) 900과 675, LM GTP 3가지 클래스가 주축을 이루고 양산 스포츠카인 GT 클래스가 함께 달린다. 벤츠가 99년 다시 퇴진했고 오랜 세월 2위권에 머물렀던 도요타와 닛산마저 F1과 인디로 각각 떠난 후 아우디가 본격적인 르망 진출을 선언하고 나섰다. 99년 사르트 서키트에 첫발을 디딘 아우디 워크스 팀은 2000년부터 3년 연속 우승컵을 차지하며 르망 역사를 새롭게 바꿔가고 있다. 80년대의 포르쉐 같은 황금기를 꽃피울 수 있을지 점치기는 아직 이르지만 이미 확실한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경주방식 시간이 긴 것을 제외하면 경주방식에 특별히 다른 것은 없다. 하지만 1년에 한번 열리는 만큼 예선에 많은 시간이 투자된다. 클래스별로 엔트리를 받은 뒤 경주차가 지나치게 많을 경우 예비예선에서 주최측이 제시한 일정기록(랩 타임)을 넘어야 예선에 참가할 수 있다. 예선에서의 랩 타임 기록에 따라 출발 위치(스타팅 그리드)가 정해지고 출발은 F1과 같은 스탠딩 스타트를 이용한다. 2줄로 지그재그 서 있다가 신호와 함께 출발하는 방식. 24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야 하기 때문에 드라이버는 최소 2명이 필요하고 최대 3명까지 구성할 수 있다. 한 드라이버가 6시간 안에 총 4시간 이상 운전할 수 없고, 전체 경기구간 중 14시간 이상 운전대를 잡아서도 안 된다. 1925년부터 쓰인 이른바 ‘르망식 스타트’ 방식은 지금 사라졌다. 피트 앞에 경주차를 비스듬히 세워두고 드라이버들은 길 건너 지정 위치에 서 있다가 출발신호와 함께 달려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방법이었다(사진). 조금이라도 시간을 덜기 위해 왼손으로 시동을 걸면서 동시에 오른손으로 기어를 1단에 넣게 했고 포르쉐는 지금도 그 전통에 따라 키박스가 왼쪽에 달려 있다. 지난 5월 4일 열린 올해 르망 예비예선에는 72대가 참가해 랩 타임을 쟀다. 이기록에 따라 50대의 엔트리 리스트를 확정한 뒤 경기(올해는 6월 14~15일) 시작 3일 전부터 이틀에 걸친 예선 결과에 따라 스타팅 그리드를 결정한다. 경기 시작 은 오후 4시. 올해의 참가 클래스는 LMP900과 LMP675, LM GTP 등 3가지 프로토타입과 양산차를 사용하는 LM GTS와 GT까지 모두 5가지로 나뉘어 있다. 사르트 서키트 현재 르망 24시간 레이스가 열리는 서키트의 공식 이름은 사르트 서키트(Sarte circuit). 몬테카를로 같은 시가지 서키트와 이몰라, 호켄하임 같은 일반 클로즈드 서키트(외부와 독립된 패쇄 형태)의 중간 성격을 띠고 있다. 평소에는 ‘부가티’(Bugatti)라는 클로즈드 서키트에서 경기가 열리지만 르망의 계절이 되면 부가티 코스 일부에 주변 국도를 연결해 1주 13.650km의 사르트 서키트로 변신한다. 서키트가 자리잡고 있는 르망시는 파리 서남서 약 200km 부근에 있는 도시로 유명한 로아르강의 지류 사르트 호수가 인접해 있다. 이곳 르망의 도로를 활용한 레이스가 시작된 것은 1906년 6월 열린 제1회 그랑프리. 당시 경주는 지금의 르망 코스와 다르게 부근 도시인 브로아르, 상카레, 라페르테, 베르나르를 연결하는 1주 103.18km의 거대한 삼각형 코스에서 치러졌다. 하지만 1923년 제1회 르망 24시간 레이스가 개최된 코스는 지금과 비슷한 사이즈로 줄어들었다. 1928년까지 쓰인 코스는 1주 17.262km로 한쪽에 급격한 헤어핀 코너가 있는 직각삼각형 꼴이었다. 29년 사고가 많던 헤어핀 코너를 잘라 부드럽게 다듬었지만 위험은 여전했다. 1932년 ACO는 완전히 새로운 코스 형태를 완성했고 길이도 13.492km로 줄였다. 이 레이아웃이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르망 공식 코스로 쓰이고 있다. 경주차들이 메인 스탠드 앞에서 출발하면 곧바로 오른쪽으로 휜 큰 커브를 만나게 된다. 1932년 헤어핀을 개량한 S커브의 관통코스는 1956년 다시 개량을 거쳐 코너 곡률을 다듬었다. 완만한 오르막을 지나 언덕의 끝 부분에서 유명한 ‘던롭 커브’―던롭 광고판이 설치되어 있다―가 나타난다. 다음으로 내리막이 이어지면서 S커브(The Esses). 출발부터 여기까지가 부가티 서키트에 포함된 구간이다. 이곳을 지나면 제2의 던롭 커브라 불리는 오른쪽 커브 테르트르 루즈가 이어지고 곧바로 르망 최장 직선코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 르망과 투르를 연결하는 국도의 일부분으로 전 세계 서키트 중 가장 긴 이 직선로는 경주차의 엔진과 공력 성능을 시험하기에 좋은 장소다. 긴 직선로 끝 부분에서는 최고시속 400km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90년부터 중간에 S자 형태의 시케인 2개를 설치해 지나친 과속을 막고 있다. 기나긴 직선로 끝에는 오른쪽으로 급하게 휜 뮬산느 코너가 기다리고 있다. 시속 300km대의 속도에서 갑자기 50~70km로 감속해야 하기 때문에 타이밍을 놓친 경주차는 코스아웃을 피할 수 없다. 뮬산느를 지나면 인디애나폴리스와 아르나지로 이어지는 크랭크 코너가 있다. 이어 포르쉐 커브와 포드 시케인을 지나면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최고의 드라이버 르망은 1년에 단 한번 열리지만 경주차 당 2~3명의 드라이버가 한 조를 이루기 때문에 한번에 최소 2명 이상의 우승자를 배출한다. 르망 80년 역사 속에서 시상대 중앙에 가장 많이 섰던 영예의 주인공은 재키 아이크스(Jacky Ickx, 사진 왼쪽)다. 아이크스만큼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한 드라이버도 드물다. F1은 물론 르망과 랠리에서 활동하며 화려한 전적을 남겼지만 역시 첫손에 꼽히는 것은 6승의 전적을 자랑하는 르망 24시간. 이 때문에 ‘미스터 르망’이라는 영예로운 닉네임을 얻었다. 1966년 포드 GT40으로 처음 도전해 리타이어했지만 1969년 J. 올리버와 함께 포드 GT40으로 재도전. 당시 성능에서 앞섰던 포르쉐 908과 치열한 접전 끝에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75년에는 새로운 파트너 D. 벨과 함께 미라주 GR8로 다시 우승. 76~77년 포르쉐 936으로 우승하고 81~82년에도 D. 벨과 함께 사르트 서키트를 제압했다. 재키 아이크스 다음으로는 그와 함께 포르쉐 전성기를 일구어낸 데릭 벨(Derek Bell, 사진 오른쪽)이 꼽힌다. 1975년 아이크스와 함께 미라주를 타고 첫승을 차지한 벨은 르망 5승의 전적을 갖고 있다. 1981년 936/81 경주차를 시작으로 82년과 86, 87년 모두 포르쉐와 함께 우승컵을 안았다. 80년대 포르쉐 전성기를 연 주인공이다. 최강 팀/드라이버 궁합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요스트-아우디 R8의 3연승 위업은 같은 드라이버진이 이룩한 성과였다. 프랑크 비엘라(독일)와 톰 크리스텐센(덴마크), 엠마누엘 피로(이태리) 3인조는 동일 경주차로 호흡을 맞춰 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한편 이들이 소속된 팀은 아우디 스포츠팀 요스트. 르망 우승을 목표로 프로젝트를 시작한 아우디는 경험이 풍부한 요스트 팀을 파트너로 선택했다. 가장 유명한 포르쉐 프라이비터로서 3번의 르망 우승 경험을 갖고 있는 요스트는 최적의 선택. 드라이버 라인홀트 요스트에 의해 1979년 결성된 팀 요스트는 이듬해 창단주가 직접 운전대를 잡아 르망 2위에 올랐고 84~85년 포르쉐 956으로 2연승을 기록했다. 내구레이스와 DTM, IMSA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던 요스트는 97년, 포르쉐 엔진을 얹은 르망 프로토타입으로 다시 한번 우승컵을 안는다. 최강 드라이버/팀 조직에 직분사 기술을 사용한 경주차 R8의 성능이 더해지면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 연속 우승을 싹쓸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4연승 기록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비엘라와 피로는 올해 서로 다른 팀원과 짝을 이뤄 아우디 R8을 몰게 되었고 T. 크리스텐센은 벤틀리 스피드8의 스티어링 휠을 잡는다. 최대의 참사
메르체데스 벤츠는 수많은 레이스에 참가해 화려한 전적을 남겼지만 르망 24시간과는 악연으로 얽혀 있다. 르망 역사상 최대 참사로 손꼽히는 1955년의 사고 때문이다. 그 해 벤츠는 유럽 F1 그랑프리에서 무적의 성능을 자랑하던 W196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곡선 보디를 얹고, 무엇보다 운전석 뒤에 달린 에어 브레이크로 눈길을 끄는 300SLR 경주차를 선보였다. 55년의 르망은 재규어 D타입과 애스턴마틴 DB3S, 페라리, 포르쉐 등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선두를 달리던 재규어의 호돈이 피트인하기 위해 우회전하자 바싹 뒤따르던 힐리가 이를 피하려다 루베가 몰던 300SLR과 충돌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벤츠 경주차는 산산이 부서지며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관객석을 덮쳐 82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 사고로 벤츠는 긴급중역회의를 열어 레이스 활동을 중지하기에 이른다. 벤츠는 자우버-현재 F1에서 활동중이다 -와 함께 르망에 재도전해 89년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이고, 예전의 악몽이 되살아나 벤츠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1999년 르망에 참가한 CLR이 공력설계 문제로 예선주행 때 인디애나폴리스 코너에서 갑자기 앞머리가 들리며 떠올라 공중제비를 해버린 것. 결국 벤츠는 어렵게 돌아온 르망에서 다시 퇴진하기로 결정했다. 넘버 원 컨스트럭터 페라리가 F1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면 르망에는 포르쉐가 있다. 포르쉐가 르망에 첫발을 내딛은 것은 1951년. 356으로 클래스 우승을 차지한 뒤 550 스파이더와 RSK, 904, 911 등으로 꾸준하게 도전했다. 첫 종합우승을 거머쥔 것은 917로 참가한 1970년. 포르쉐는 60년대 중순부터 907, 908, 910 같은 본격적인 프로토타입을 선보여 69년 917을 완성했고 이를 통해 70년과 71년에 2연승을 올렸다. 이후 지금까지 16번(프라이비터 포함)이나 우승. 양산차인 911로도 꾸준히 르망에 참가한 포르쉐는 77년 그룹5 규정에 따른 935를 선보였다. 911을 극한까지 개조한 935는 그룹6의 순수 경주차들을 누르고 79년 1~3위를 독식하기도 했다. 가혹한 경기 조건을 통해 체득한 기술과 노하우로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 메이커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포르쉐에는 유명 경주차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룬 것은 1982년 그룹C 규정과 함께 등장한 956과 962다. 956과 962는 기본적으로 같은 차지만 규정에 따라 약간 다르게 개조되었다. 82년을 시작으로 87년까지 7년 연속 르망을 제패했을 만큼 무적의 존재. 84, 85년의 경우 10위권에 8대, 86년에는 7대가 956/962였다. 하지만 지나친 독주 때문에 유무형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1988년을 마지막으로 워크스 활동을 중지했고 이후 요스트, 크레머, 다우어 같은 프라이비트 팀을 측면 지원했다. 96년과 97년 프라이비터 요스트가 포르쉐 엔진을 얹은 프로토타입으로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98년에는 워크스 팀의 911 GT1로 다시 왕좌에 올랐다. 하지만 규정이 GT 대신 르망 프로토타입에 유리하게 바뀌면서 다시 워크스 활동을 중지했다. 사진은 2001년 미국 라임록파크 서키트에 모인 956과 962. 중앙의 인물은 이 걸작 경주차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노르베르트 징거다. 르망을 빛낸 경주차들 Bentley Speed 6 W.O. 벤틀리가 제1회 르망 24시간 레이스 개최소식을 들었을 때 “불가능한 일이다. 한 대도 완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부정적 시각과는 반대로 런던에서 벤틀리 딜러를 하고 있던 존 더프는 3X 벤틀리로 르망에 출전했고, 벤틀리 자신도 피트에서 팀을 지휘하게 되었다. 결국 아이러니컬하게도 1927~30년 4연승을 차지하며 르망 역사의 초창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주인공이 바로 벤틀리다. 벤틀리는 4가지 경주차를 르망에 보냈다. 1923~27년 3X를 시작으로 27~28년 4½X, 29~30년에는 6½X를 보냈고 1930년에는 4½X에 수퍼차저를 얹은 개량형을 선보였다. 이 중 1925년 런던 모터쇼에서 데뷔한 스피드식스 6½X는 기본적으로는 4½X용 4기통 엔진에 2기통을 잘라 붙인 6기통 블록 구조이지만 크랭크와 캠축 사이에 새로운 편심 디스크 기구를 단 것이 특이했다. 르망용 경주차는 운동 부품의 밸런싱과 헤드 절삭에 의한 고압축비, 가변 벤추리 방식의 트윈 카뷰레터 등을 통해 성능을 한 차원 높였다. 육중한 차체에 기능미를 지닌 스피드식스는 롤스로이스에 인수되기 전 벤틀리의 순수 혈통을 간직한 최후의 종마라고 할 수 있다. Alfa Romeo 8C 2300
1931년부터 34년까지 4연승을 차지한 알파로메오 8C 2300은 전설적인 엔지니어 비토리오 야노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직렬 8기통 DOHC 엔진은 원래 그랑프리 경주차를 위해 개발된 ‘몬자 알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직렬 4기통 2개를 직렬로 배치한 2천336cc로 기어 구동되는 밸브 기구와 반구형 연소실을 갖추었고 루츠형 수퍼차저와 6.2의 압축비(기본형은 5.7)로 알코올 혼합연료를 썼다. 레이싱 버전의 출력은 180마력에서 220마력까지 올라갔다. 1931년 발표된 그랑프리 머신 몬자 알파에 처음으로 얹힌 이 엔진은 블록 중앙에 DOHC 구동용 기어 트레인을 갖추었고 크랭크샤프트 역시 2개를 중간에서 결합한 구조. 채널 프레임 스타일의 두 가지 섀시 중에서 르망 버전은 롱 휠베이스(2천600mm)를 쓰고, 반원형 리프 스프링과 마찰식 댐퍼를 달았다. 르망용 8C 2300의 보디는 자가토로 알려져 있지만 1932년형만은 드라이버 솜머가 친구인 피고니에게 주문해 특별제작한 것이었다. 자가토는 나중에 알파로메오 줄리에타를 르망 경주차 스타일로 꾸며 한정생산하기도 했다. Bugatti Type 57 Tank 부가티 타입57은 르망 역대 우승차 중 가장 먼저 유선형의 풀 카울을 씌운 차로 기록되어 있다. 이미 유선형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았을 때지만 바퀴까지 완전히 덮은(all envelop) 보디는 부가티 타입57이 처음이었다. 1930년대는 1차대전 중에 얻은 항공기술 바탕의 유선형 디자인 연구가 활발해 크라이슬러 에어플로나 피어스애로의 실버 애로 등이 탄생했다. 유럽에서 독일의 룸플러와 프랑스의 브와쟁 등 항공 관련 엔지니어가 선구자로 기록될 때 부가티 역시 1922년 유선형 그랑프리 경주차를 만들었고, 이듬해에는 바퀴까지 덮은 새로운 보디를 선보였다. 그 디자인을 많이 닮은 타입57S와 57C는 독특한 디자인 때문에 ‘탱크’라는 이름을 얻었다. 1935년 발표된 57S는 영국 만섬 TT 레이스와 몽렐리-마르느, 랭스 등의 코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뒤 르망으로 자리를 옮겨 1937년 우승했다. 37년형 타입57S의 엔진은 부가티가 자랑하던 직렬 8기통 3천257cc, 드라이섬프 윤활계통을 가졌고 최고출력 160마력을 냈다. 2년 후 다시 우승을 차지한 타입57C는 57S에 기계식 수퍼차저를 더해 최고출력을 200마력으로 높였다. X당 4km의 뛰어난 연비에 최고시속도 270km에 달했다. Cadillac Spyder 르망 24시간의 캐딜락이라고 하면 대부분 라일리&스콧 섀시에 노스스타 엔진을 얹은 지금의 LMP 경주차를 떠올리겠지만 1950년에 이미 캐딜락의 이름이 르망 엔트리에 올라 있었다. 당시 출전한 경주차는 양산 세단 드빌의 개량형과 캐딜락 스파이더 두 대. 그 중 샘과 마일즈 콜리어가 몬 캐딜락 스파이더는 르망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디자인으로 꼽히고, 드빌 세단에 이어 종합 11위를 차지했다. 캐딜락 스파이더는 양산차 디자인 그대로 출전한 세단 드빌과 달리 넙치처럼 납작한 2인승 오픈 보디에 바퀴까지 커버를 씌워 공기저항을 최소화했다. 옆에서 보면 마름모꼴을 이루는 기괴한 디자인에 대형 엔진에서 뿜어내는 매연과 백파이어가 더해져 ‘괴물’(Le Monstr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차를 만든 이는 1950년 캐딜락 세단 드빌을 몰았던 브릭스 커닝햄. 드라이버이며 스포츠카 제작자로 이름을 날린 커닝햄은 이후 C4R과 C5R, C6R 등 오리지널 스포츠카를 차례로 선보이며 르망에 도전했지만 재규어의 위세에 밀려 우승컵에 다가서지는 못했다. MG-BRM Turbine Racer 2차대전이 끝난 뒤 각종 관련기술이 다양한 형태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제트 엔진은 가스터빈이라는 형태로 자동차에 내려앉았다. 전후 세계 최초의 가스터빈 차 T1을 선보인 로버는 1963년 뉴욕 오토쇼에 전위적인 보디의 앞바퀴굴림 터빈카 T4를 선보였다. 이와 동시에 터보 엔진을 얹은 미드십 경주차도 개발중이었다. T4용 터빈을 바탕으로 열교환기를 없애 출력을 높였고 섀시는 BRM의 2.5X 포뮬러 경주차를 개량해 알루미늄 보디를 얹었다. 정식 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번외로 출전한 1963년에는 연비가 2.5km/X에 불과해 2시간 반마다 연료를 보충해야 했다. 하지만 정식 엔트리에 든 65년에는 미국 코닝사의 최신 열교환기 덕분에 연비가 2배 가까이 좋아져 종합 10위, 클래스 2위(1300~1600cc)의 성적을 남겼다. 신형 터빈은 1차축 6만5천rpm, 출력축 3만9천rpm의 최고회전수로 145마력을 냈고 큰 감속비와 높은 회전수를 견뎌야 하는 변속기는 F1 경주차 BRM 타입57의 것을 개량해 썼다. 터빈의 특성상 전진 1단과 뉴트럴밖에 없고 액셀과 브레이크 조작만으로 속도를 조절했다. Jaguar XK120 D
195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재규어 D타입(XK120 D)은 르망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경주차 중 하나로 꼽힌다. 1950년 XK120으로 르망에 도전하기 시작한 재규어는 51~53년 C타입, 54~57년 D타입을 투입했고 51년 첫승을 시작으로 통산 7번의 우승컵을 안았다. 그 중에서도 55~57년 3연승을 차지한 주인공이 바로 D타입. 아름다운 곡선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보디 디자인 속에 스포츠 레이싱카 최초의 모코코크 섀시와 디스크 브레이크를 감추고 있었다. 직렬 6기통 3천442cc DOHC 엔진은 XK 시리즈용을 기본으로 3개의 트윈 초크 카뷰레터와 함께 특수제작된 헤드로 압축비를 9.0으로 높여 250마력의 최고출력을 얻었다. 당시 레이스 전용 머신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과 달리 D타입은 치프 엔지니어 윌리엄 헤인즈의 지론에 따라 양산 스포츠카를 바탕으로 했다. 중요부품은 양산 XK에서 가져왔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드라이섬프 윤활계통과 엔진 위치 변경 정도다. 생산성까지 고려된 D타입은 양산차의 내구성과 성능을 겨룬다는 르망의 기본 취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머신 중 하나였다. 양산형은 XKSS라는 이름으로 시판될 예정이었지만 코벤트리 공장의 화재사고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고, 결국 그 혈통이 XKE(E타입)로 이어졌다. Ferrari 250 Testa Rossa 르망의 페라리라면 페라리 최초의 미드십 머신으로 불리는 250LM이 유명하지만 FR의 250TR과 아름다운 보디라인의 250GTO 그리고 비운의 330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르망 최초의 페라리 우승차는 2차대전 직후 재개된 1949년 경기에 출전했던 166. 그랑프리와 스포츠카 레이스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페라리는 이후 다양한 경주차를 선보였고 1951년 유명한 V12 3.0X 엔진의 250 시리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싱 스포츠카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250TR이 등장한 것은 1956년. ‘붉은 머릿결’을 뜻하는 테스타로사(Testa Rossa, 약자로 TR)라는 명칭은 이탈리안 레드의 헤드커버에서 유래되었다. 강관 스페이스 프레임에 얹힌 아름다운 피닌파리나 보디는 브레이크 냉각용인 별도 흡기구가 눈길을 끌고, V12 3.0X SOHC 엔진이 300마력을 내며 스파이더 보디를 최소시속 300km까지 끌어올렸다. 1958년 우승차(TR58)는 2위 애스턴마틴을 160km 이상 따돌리며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에는 21시간째 리드를 지키다 아쉽게 리타이어했지만 1960년(TR59/60)에 원투 피니시를 하고, 61년에는 1~3위(TR61)를 독점하며 페라리 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페라리는 330P, 275P 등의 경주차를 선보이며 65년까지 6연승의 대기록을 세웠다. Ford GT40 페라리 인수 작업이 무산된 뒤 포드는 르망에서 페라리를 꺾기 위한 경주차 개발에 들어갔다. 완전 백지상태에서 설계작업을 시작해 영국의 레이싱 컨스트럭터 롤라로부터 에릭 브로들리 설계의 경주차를 인수(1964년)하는 한편, 롤라 근처에 포드 어드벤스드 비클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한편 디어본의 포드 본사에서는 최첨단 컴퓨터 필코 212가 해석작업에 활용되고 있었다. 포드 산하의 항공우주사업부 에어로뉴트로닉스의 협력을 얻어 항공기 테스트용 장비까지 이용, GT40의 에어로 다이내믹 보디가 탄생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GT40이라는 이름은 40인치(1천16mm)의 차 높이에서 유래되었다. 세계 제2의 기업 포드가 보여준 엄청난 자본력과 물량은 유럽인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투자를 했음에도 푸시로드식 V8 4.7X 386마력 엔진을 얹은 초기 마크Ⅰ의 성적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인디용 4.2X와 스몰블록 4.7X, 4.9X, 5.8X 등 다양한 엔진을 테스트했지만 신뢰성 부족으로 리타이어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1966년 강력한 7.0X OHV 엔진의 마크Ⅱ를 투입하면서 르망과 페라리의 높은 벽을 넘는 데 성공했다. 68년 규정 변경에 따라 5.0X 이상 엔진을 쓸 수 없게 되면서 포드 대신 걸프-JW 팀이 워크스 활동을 이어받았지만 68년과 69년에도 GT40의 독주가 계속되었다. Porsche 917K
‘위험할 정도로 빨랐다’고 표현되는 포르쉐의 걸작 917은 1967년 10월 CSI가 발표한 새로운 프로토타입 규정에 따라 태어났다. 변경된 규정은 당시 사르트 서키트를 주름잡던 7X 엔진의 포드나 채퍼랠, V12 엔진의 페라리가 날로 스피드를 올리는 데 대한 대응책이었다. 포르쉐는 이에 따라 신형 경주차 917을 69년 제네바 오토살롱에서 14만 마르크라는 가격표와 함께 전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912’라는 이름의 신형 엔진은 당시 치프 엔지니어였던 페르디난트 피에히(전 폴크스바겐/아우디 회장)가 개발을 이끌었다. 그 결과 수형대향 8기통 3.9X와 12기통 4.5X 두 가지 DOHC 엔진이 태어났다. 12기통 엔진은 542마력이라는 강력한 출력을 자랑했지만 910, 907, 908에서 이어받은 하체는 그만한 힘을 견디기에 무리가 있었다. 69년 르망 연습주행에서는 시속 380km라는 경이적인 속도를 기록하고도 프라이비터 존 울프가 사고로 죽는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빠르게 문제를 해결한 후 다양한 보디를 얹으며 69~70년 24번의 세계선수권에서 15번의 우승을 챙겼고 르망에서는 70년과 71년 2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미국 포르쉐/아우디 딜러의 요청에 따라 미국 캔암용으로 개량된 917/10은 수평대향 12기통 4.5X 에 터보를 더해 850~1천100마력의 괴력으로 맹위를 떨쳤다. Chaparral 2F 1967년 등장한 채퍼랠은 유럽에서 보기 드문 순수 미국 경주차라는 희소성 외에도 독특한 스타일링과 메커니즘, 성능으로 화제를 모았다. 텍사스에서 정유업으로 성공한 짐 홀은 드라이버로도 활약하며 1960년 트라우트먼과 번즈에게 경주차 제작을 의뢰해 채퍼랠1이라고 불렀다. 63년 채퍼랠2부터는 자신이 직접 설계, 제작하기 시작했고 이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게 독창적인 형태와 참신한 메커니즘으로 눈길을 끌었다. ‘올 플라스틱 카’라고 불린 강화 플라스틱 섀시는 물론 자동 변속기를 쓰기도 했고, 뒤에 대형 팬 2개를 달아 바닥의 공기를 뽑아내 접지력을 만드는 2J(일명 진공청소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67년에 선보인 2F는 2D에 이어 채퍼랠이 두 번째로 유럽 도전을 위해 선보인 머신.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높게 배치된 거대한 리어윙이다. 차체와 멀리 떨어진, 높은 곳의 공기 흐름을 이용해 더욱 큰 다운포스 효과를 얻었다. 더구나 각도조절이 가능한 윙은 코너에서 다운포스를 늘리거나 에어 브레이크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F2의 혁신적인 윙 디자인은 F1 경주차 디자인에까지 영향을 미쳐 60년대 말 ‘하이윙’ 열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PVC와 에폭시 수지로 만든 모노코크 미드십에는 4개의 트윈 초크 카뷰레터를 갖춰 540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는 시보레 V8 7.0X 엔진과 자동변속기를 얹었다. Matra MS670 1970년대 초반 르망을 휘어잡은 것은 프랑스의 마트라였다. 르노 미니밴 에스파스 개발로 잘 알려진 마트라는 전신전화는 물론 항공우주와 무기산업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프랑스 거대기업. 자동차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온 마트라는 80년대 들어 르망 프로토타입을 선보이는 한편 F1에 V12 엔진을 공급하고 있었다. 1972년 내구레이스 엔진 규정이 3X로 바뀌자 마트라는 이 V12 엔진을 바탕으로 신형 경주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72년 선보인 1대의 660과 3대의 670은 오픈 보디에 앞 타이어 사이즈를 줄여 공기저항을 덜었다. 원래 F1을 겨냥해 개발된 구형 MS12와 신형 MS72 엔진은 내구성 중심으로 개량되었고 출력은 460/500마력을 자랑했다. 마트라는 MS670으로 72년부터 74년까지 3연승을 차지했다. 페스카롤로와 라루스가 몰고 73, 74년을 휩쓸었던 670B는 길고 아름다운 꼬리 부분에 수직 꼬리날개를 가졌고 최고시속은 325km. 74년 르망에서는 450마력(1만500rpm)을 냈고 4~6시간의 단거리 경주에서는 숏 테일 보디와 함께 650마력으로 세팅되었다. 이 해 르망뿐 아니라 내구레이스 시리즈에서도 챔피언에 올랐지만 마트라는 곧바로 레이스 활동을 중지하고 말았다. Porsche 956/962
1980년대 르망 24시간은 ‘포르쉐’라는 이름 하나로 요약된다. 1982년 FIA(국제자동차경기연맹)가 발표한 새로운 경주차 규정은 기존의 그룹1~6을 새롭게 정비하는 한편 그룹5와 6을 한데 묶은 그룹C를 신설했다. 엔진에 대한 최저 생산대수와 배기량, 과급에 대한 규제를 줄이면서 연료탱크 용량을 100X로, 24시간 레이스에서 피트스톱 회수를 25번으로 제한한 새로운 규정은 포르쉐 시대를 여는 발판이 되었다. 이에 따라 82년 첫선을 보인 956은 그 해 1~3위를 휩쓸었고 이듬해에는 상위 9개 포지션(1~8, 10위)을 석권하는 등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드라이버 재키 아이크스는 같은 해 내구레이스 세계 챔피언에까지 올랐다. 엔진은 포르쉐가 자랑하는 수평대향 6기통 2.65X에 수랭식 DOHC 헤드를 얹고 KKK 터보 2개를 갖춰 2.2바의 과급압으로 620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다.84년부터는 IMSA 규정을 의식해 휠베이스를 늘인 962가 등장했다. 포르쉐의 명성은 하늘을 찔러 요스트, 크레머, 다우어 등의 프라이비트 팀은 물론 미국 IMSA 시리즈에서도 주문이 쏟아졌다. 956/962 시리즈는 이들과 함께 화려한 전적을 남겼다. 84~87년 4연승은 물론 경주차로서 이미 환갑을 넘긴 94년에도 다우어가 신생 GT 클래스에 도전, 우승함으로써 통산 7승을 차지했다. Mazda 787B 르망 역사상 가장 독특한 심장을 꼽으라면 91년 우승차인 마쓰다 787B를 떠올릴 수 있다. 수많은 레시프로(왕복형) 엔진들 틈에서 빛나는 유일한 로터리 우승차이기 때문이다. 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르망에 도전장을 던진 일본 메이커들 중 우승컵을 차지한 것 역시 마쓰다가 유일하다. 787B의 4로터 로터리(654cc×4) 엔진은 로터 당 3개씩의 스파크플러그를 갖추고 최고출력 700마력을 냈다. 영국에서 제작된 카본 섀시를 일본으로 가져와 엔진을 얹고 포르쉐 싱크로매시 타입 5단 변속기를 연결했다. 당시 최강의 성능을 자랑하던 벤츠와 재규어를 누르고 우승했을 뿐 아니라 일본 경주차 최초, 자연흡기 이외 엔진 최초 우승이라는 기록도 함께 남겼다. 이후 규정변경 때문에 로터리 엔진의 르망 참가가 금지되었고 마쓰다는 새로운 V8 엔진을 선보였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Audi R8 99년부터 르망에 도전하기 시작한 아우디는 첫해 오픈 스타일의 R8R과 클로즈드 루프의 R8C 각 두 대를 투입해 R8R이 3, 4위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아우디가 르망 우승을 위해 손잡은 파트너는 포르쉐 프라이비트 팀으로 이름을 날리며 3회의 우승 경력을 자랑한 요스트. 이듬해 LMP900의 신형 R8을 선보여 1~3위를 차지, 르망 포디움을 장악해 버렸다. 이후 2001년 1~2위, 2002년 1~3위 등 아우디의 독주가 계속되고 있어 재미가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R8의 V8 3.6X 트윈터보 엔진은 르망 차 최초로 직분사 기술(FSI)을 써 더욱 유명해졌다. 자연흡기 엔진과 비슷한 출력특성 덕분에 다루기 쉽고 뛰어난 연비로 피트스톱 회수를 줄인 것이 3회 우승의 비결이 되었다.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GTP 클래스의 벤틀리 스피드8 역시 안정된 전적을 기록함으로써 뛰어난 연비와 신뢰성을 증명하고 있다. 르망은 물론 현재 미국에서 열리고 있는 ALMS(아메리칸 르망 시리즈)에서도 상위권을 독점하고 있다. < 카비전, 2003년 06월호 > |
첫댓글 오오 레이싱의 로망인 르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