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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 11 강 ‘지혜대결’
야고보서 3:13-18절
13-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14-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16-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17-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13-Who is wise and understanding among you? Let him show it by his good life, by deeds done in the humility that comes from wisdom.
14-But if you harbor bitter envy and selfish ambition in your hearts, do not boast about it or deny the truth.
15-Such "wisdom" does not come down from heaven but is earthly, unspiritual, of the devil.
16-For where you have envy and selfish ambition, there you find disorder and every evil practice.
17-But the wisdom that comes from heaven is first of all pure; then peace-loving, considerate, submissive, full of mercy and good fruit, impartial and sincere.
18-Peacemakers who sow in peace raise a harvest of righteousness.
Point: 믿음의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가지고 세상에서 믿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Introduction: 이번에 참석한 전문인선교사국제전략회의에서 많이 들었던 얘기가 ‘strategic Daniel’이라는 말입니다. 번역하면 ‘전략적인 다니엘’도 되고, 다니엘이 가졌던 전략을 선교현장에서 많이 끌어내야 한다는 말도 됩니다.
자, 다니엘의 특징이 뭡니까? 세상에서 잘 나갔다는 것입니다. 전문인(tentmaker)로서 탁월함을 보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는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었고, 또 탁월한 하나님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지혜, 그의 전략은 전문인선교사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두 왕조를 경험했고, 세 왕을 섬겼습니다. 그것도 고위공직자로서 자기 책무를 잘 감당했습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 왕이 바뀌면 밑에 있는 사람도 다 바뀝니다. 그게 권력의 속성입니다. 또 왕국이 바뀐다는 것은 전 왕국의 많은 사람은 숙청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 가운데서 살아남았습니다. 그것도 탁월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이 말은 그가 그야말로 천재적인 책략으로 난세를 살아남은 지략가이거나, 아니면 그야말로 엄청난 하늘의 지혜를 가졌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전문인선교사들에게 큰 관심거리입니다. 왜냐하면 전문인선교라는 것은 타문화상황이라는 세상에서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그 직업의 현장(market place)에서 하나님 말씀의 역사,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략적인 다니엘(strategic Daniel)의 전략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이 믿음의 삶은 오늘 본문 말씀과도 많은 연결점이 있습니다.
Point 1: 지혜대결
본문에서 야고보사도는 ‘지혜’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의 대결을 얘기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지혜를 사도가 얘기하게 된 것일까요? 사도야고보의 편지는 대단히 목회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의 편지는 늘 목회현장 한 가운데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주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시공간으로서의 교회가 너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공간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그가 너무도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 13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여기 보면 ‘지혜와 총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초대교회에 일어나는 문제의 배경이 됩니다.
이 ‘지혜’라는 것은 좀은 관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또 ‘총명’이라는 것은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좌우간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랑할 만한 어떤 지식과 그것의 열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와 총명’을 야고보사도의 상황에서 보면 ‘헬라의 철학과 지식’으로 보는 게 적당합니다.
우리가 초대교회사를 보면 결국 초대교회에 헬라철학이 깊숙이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 것을 보게 됩니다. 소위 ‘영지주의’가 그 대표가 될 수 있겠지요. 사도야고보의 시기는 그 초기이지만 사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런 헬라철학이 교회 안에서 일으킬 문제들을 예감하고, 암시적으로 이 말씀을 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헬라철학이 뭔가? 크게 두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가 ‘우주론’이고, 다른 하나가 ‘존재론’입니다.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사람이나 물체의 본질은 뭔가?’ 그런 질문이지요.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 정교한 논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논리가 또한 크게 세 분야에서 나타납니다. 첫째가 진리 발견의 과정을 다루는 논리학입니다. 둘째가 존재의 본질에 대한 기본적 진리를 다루는 물리학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논리학과 물리학의 적용 결과로 인해, 인간이 행복과 복지를 획득하게 되는 윤리학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철학들은 우리가 많이 듣게 되는 에피쿠르스학파와 스토아학파라는 철학 유파 안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이 흐름이 로마시대에도 여전히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지요. 이것이 헬레니즘이 형성한 철학입니다. 사실 로마도 그 내용을 보면 헬레니즘입니다. 로마라는 형식(껍데기)이 헬레니즘이라는 내용(알맹이)을 담았던 것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창시자인 에피쿠로스가 자기 집의 초록 정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해서 ‘정원학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의 추구점은 ‘쾌락’입니다. 그러나 이 쾌락은 일반적인 의미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쾌락’이 뭔가? 그것은 단순한 엔조이가 아니고 고통이나 혼란, 인간의 열정과 욕망에서 완전히 떠난 ‘혼란함의 없는 상태’가 쾌락이라고 말합니다. 차원 높은 쾌락이지요. 불교적인 냄새도 납니다. 사실 헬라문화는 그 기원이 고대 힌두교라고 여겨집니다. 신화의 발달이 그 한 증거가 되지요. 좌우간 세속사의 근심걱정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진지하게 살아가는 생활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쾌락’의 핵심입니다.
이 과정에서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부터의 자유를 에피쿠로스학파는 주장합니다. ‘모든 물질은 미세한 원자로 이루어졌기에 죽음은 신체의 원자들이 고통 없이 흩어지는 것이다.’라는 것이 이들의 죽음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관은 신은 완전한 평온 속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산다는 것입니다. 창조는 했을지 모르지만, 인간사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인간사에 개입할 필요가 신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도 살아있든지 죽든지 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스토아학파’입니다. 이들은 미덕의 추구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미덕이란 보편적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 자연이라 함은 운명이라는 형태로 모든 존재를 관장하는 신성하면서도 어떤 합리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이 자연과의 조화를 위해서 인간은 경험과 이성을 적절히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양식, 정의, 용기, 절제와 같은 ‘완벽한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이지요. 그래서 스토아철학자는 고통과 슬픔을 조용하게 참으면서 욕망과 분노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고 그 과정에서 평온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stoical'이란 영어단어가 ’냉정한, 태연한‘ 그런 뜻으로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에피쿠르스와 스토아로 구분은 하지만, 이 사람은 에피쿠르스, 저 사람은 스토아, 둘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상대를 비난하고,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정확한 구분은 아닙니다. 정확한 구분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성취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는 스토아분위기가 강합니다. 양식과 정의, 용기와 절제 같은 미덕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취의 단계에 도달하면 그 사람이 스토아에서 에피쿠르스쪽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정상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지요. 다 노예가 해주니까. 그래서 쾌락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막가는 쾌락은 보기에 그러니까, 좀 차원 높은 쾌락, 소위 혼동이 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학파들의 지혜들의 왕성하게 퍼져나가고, 거기다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지혜들도 나름의 학파를 이루며 그 정신을 이어간 것, 이것이 로마시대를 관통했고, 로마시대에는 철인황제라고 불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러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 이러니까 로마시대에 형성된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은 당연히 헬레니즘의 강한 영향권 안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 철학이 교회 안에도 들어왔습니다. 사람은 문화적 존재이고, 복음은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복음이 강력하지 못하면, 교회는 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런 문화적 내용이 지금 사도가 말하는 ‘지혜와 총명’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지혜와 총명’이 교회에서 문제가 되나? 이게 자기 자랑으로 나타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힘든 과정을 통해 얻는 지식과 지혜, 그리고 총명하고 비상한 머리에서 나온 뛰어난 것들, 다시 말해 세상의 탁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처세의 지혜도 있습니다. 생존의 지식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예민하고 명민하게 파악해서 살 길을 찾을 뿐 아니라, 큰 유익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것을 부러워하고 이런 것들을 자랑하며, 이런 것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공간의 모습입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이 환경에서 크게 자유롭지 않습니다. 분명 세상에는 쳐다볼 가치가 있는 탁월한 것들이 있습니다. 가지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지혜와 총명’이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가진 이들도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그것을 목격하고 있고, 그것이 오고 오는 교회 속에서 더욱 더 그러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지혜와 총명을 자랑하는 이가 분명있고, 많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또 우리는 세상의 그런 탁월한 것들이 협력해서 더 큰 유익을 세상에 가져다주기를 원합니다. 물론 그런 시도도 많습니다. 또 실제로 synergy라는 용어까지 등장해서 그런 것을 시도합니다. 그래서 얻는 놀라운 결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탁월한 것들은 서로 경쟁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세요.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런 탁월한 것들이 경쟁하면 이것이 때로 악화되어 충돌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오히려 ‘독한 시기와 다툼’을 열매로 가져다주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시기’의 영어 번역은 envy이고, ‘다툼’은 ‘selfish ambition'이 영어 번역입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 야망’을 ‘다툼’이라고 번역한 우리 말 번역도 꽤 그럴 듯합니다.
보세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탁월한 것들을 공동체 안에 가지고 와서, 자기 자랑거리로 삼아보세요. ‘Look at me, I did this, I did that, I did it!’ 이래 보세요. 처음에는 ‘우 우’ 영웅대접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을 자꾸 자기 자랑으로 삼으면 눈꼴 사나와 집니다. 시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점점 독~해집니다. 시기의 특성이 그렇지요. 그러다가 이 시기가 출구를 찾게 됩니다. ‘너만 잘 났냐, 나도 자랑할 거 있다.’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면, 자연스레 ‘자기중심적인 야망, selfish ambition’을 추구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게 계속되면, 잘나고 탁월한 것끼리 충돌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툼’이 생기게 되지요. 그런 면에서 우리 번역이 ‘이기적 야망’을 ‘다툼’이라고 번역한 것은 굉장히 그럴 듯 하고, 목회적인 번역으로 보입니다.
자, 세상을 둘러보세요. 잘난 것은 또 다른 잘난 것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 사이는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생겨나고, 이것이 다툼으로 악화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국가 간에도 이런 일은 빈번합니다. 요즘 보면 영국과 러시아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작년 말에 영국으로 망명한 전직 러시아 비밀요원 한 사람이 죽었는데, 거의 살해당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방사능중독으로! 이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한 러시아인을 러시아에다대고 보내라고 하니까 러시아가 보냅니까, 못 보내겠다고 했더니 영국이 발끈해서 외교관 네 사람을 추방시키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최근에! 그러니 러시아도 가만히 있습니까, 우리도 하겠다, 이런 식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영국은 사자입니다. lion! 비록 늙기는 했지만 사자입니다. 탁월한 게 많았고, 또 여전히 대영제국의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풀이 죽어있던 북극곰이 요즘 살판났습니다. 오일시장이 상종가니까 그냥 달러가 주체할 수 없이 러시아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KGB 출신의 카리스마 넘치는 강골 지도자가 포커페이스를 하고서 세계를 휘젓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당연히 시기와 질투의 독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툼은 뻔한 게 되지요.
‘지혜와 총명’의 탁월한 것이 또 다른 탁월한 것을 만나 아주 탁월한 것을 많이 생산해내서, 세상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하면 좋은 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이 또한 세상의 현실입니다. 탁월한 것이 오히려 시기를 일으키고 야망을 일으켜서, 갈등과 분쟁을 만드는 이런 현실이 우리 앞에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지금 사도가 강조하고 싶은 게 뭡니까? 그가 목회현장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자랑거리를 교회 가지고 오지 말라. 좋은 것, 그럴 듯한 것, 탁월한 것들 가지고 교회를 뭔가 거창하게 개선시키면, 교회가 하나님 앞에 더 영광스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게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교회를 죽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경고를 지금 사도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공동체를 생각할 때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공동체는 주님의 뜻대로 가야, 그것이 나에게 참 복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어떠해야 교회되는지, 이것을 말씀에 근거해야 밝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주시는 복에서 떠나지 않게 되고, 또 지쳐서 나가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야고보서는 대단히 교회 중심적이고, 목회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가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은 뭔가? 뭐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인가? 뭐가 주님의 축복을 끌어오는 주님의 공동체인가? 사도는 이것을 13절에 나오는 대로 ‘지혜의 온유함’이란 말로 설명을 합니다. ‘지혜와 총명’의 반대말로 ‘온유함이 있는 지혜’를 얘기합니다. 교회를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는 온유라는 것입니다. 온유가 뭔가? 자기가 없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자기가 없나? 자랑할 게 없으면 자기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깊은 욕망과 반대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랑할 것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니까요. 그래서 온유는 어려운 것입니다.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끊임없이 말씀함에도 그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적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확실히 존재하는 자리를 찾아 맹렬하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자기가 없음’을 강조하는가? 자기가 없어야 하나님이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그게 온유의 핵심입니다. 온유함의 강조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고 역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 ‘지혜와 총명’이 왕성하면 그것은 사람의 기관이 되고, 그래서 어느 틈엔가 사람 마음속에 시기를 일으키고, 야망을 일으키고, 그리고 그것은 다툼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지혜의 온유함’이 있으면 어느 틈엔가 선행의 열매가 생기고, 진리가 역사하고, 그래서 공동체는 더욱 더 주님의 교회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온유’로 갈 수 있나? 간단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고, 많이 듣고, 더 듣고, 풍성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자리 잡기 힘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도 기도하고, 저것도 기도하고, 기도한 것 또 기도하고, 별 거 아닌 것도 다 기도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자꾸 나타나시고 내가 자꾸 없어집니다. 이게 온유의 현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일을 자꾸 줄여가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다가 하다가,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일하고, 시간이 없으면 일하지 말고! 일이 많으면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기 어렵고, 시간도 자꾸 줄어듭니다. 사람 몸은 하나니까요. ‘일 많이 해서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리자’는 것은 성경에는 없는 거의 거짓말에 가까운 구호입니다. 그러다가 교회사 가운데 수많은 교회가 망조로 접어들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대로 초대교회가 구제 사업에 너무 바빠 말씀과 기도할 시간이 없어지자, 곧 바로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떤 프로젝트에는 반드시 사람의 야망(selfish ambition)이 개입되게 됩니다. 그 야망은 어느 틈엔가 자랑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주위의 시기를 불러일으킵니다. 또 이 시기는 분리와 분열의 씨앗이 됩니다. 분열에는 갈등과 충돌과 다툼의 현상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솔로몬왕 시대의 후기를 잘 살펴보면, 이런 상황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솔로몬 당대에 남북의 분열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실제 원인을 따져보면 결국 솔로몬이 분열의 씨앗을 제공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말씀과 기도를 떠나 ‘지혜와 총명’을 의지해서 큰 프로젝트들을 계속적으로 추진한 것이 그 원인입니다. 여기서 생긴 부작용들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아, 결국 그 다음 대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여기서 초짜 선교사로 생활하며, 또 여러 선교사들을 많이 만나면서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선교사에게 큰 유혹이 있는 데 그게 뭐냐 하면, ‘뭔가를 하는 것, 뭔가를 해 내는 것’ 이게 큰 유혹임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한국 선교사들이 더 합니다. 결과와 성과 중심적인 한국인의 특성에서, 선교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선교지에서 ‘뭔가 한 건’을 하려고 분주합니다. 또 본국 교회에서 주는 압박(?)에서 자유롭기가 힘듭니다. ‘그 선교사, 거기서 뭐 하냐, 별 하는 일도 없네.’ 이런 얘기라도 듣는 날에는, 그날부터 큰 스트레스 가운데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것이 ‘뭔가’를 향해 선교사들이 더욱 분주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와 성과 중심의 행동이 선교현장의 분위기, 문화, 전통, 특히 현장의 멘탈리티와 맞지 않을 때는 오히려 재앙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자기뿐 아니라 선교현장 전체의 선교의 기초를 허무는 계기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인용해서 말하면 ‘지혜와 총명’의 역사가 요란하게 선교현장에서 뒤흔드는 모습이 되지요.
그런 면에서 초짜선교사가 ‘온유함의 지혜’로 선교하는 베테랑들을 여럿 만나, 그들의 삶을 듣고 보게 된 것은 너무도 큰 감사의 제목입니다. 그들은 2대, 3대 선교사집안으로 사역을 하는 분들인데도, 보면 하는 게 별로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별로 없지만, 얘기를 듣다보면 선교가 ‘그들의 피’에 녹아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선교현장에서 ‘자기가 없는 것’이 뭔지를 알게 합니다. 선교를 선교되게 하는 ‘온유’가 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서 나옴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서 ‘주님의 지혜와 주님의 능력’이 나와, 복음이 필요한 곳에 복음이 있게 하는 ‘주님의 일하심’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자, 이제 사도는 도대체 뭐가 ‘세상적 지혜’이며, 또 뭐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뭐가 세상적 지혜인가? 15-16절을 보세요.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세상적이며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가 뭔가? 원래 지혜란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지혜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혜가 마귀적일 수가 있는가? 지혜의 기원은 창세기 일장에 나타나는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에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명령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충만과 정복과 다스림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주실 때 하나님의 지혜도 같이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충만하며 정복하며 다스리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다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 보이도록 살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창세기 2장에 나타나듯이 아담이 각종 생물의 이름을 지을 때 잘 나타납니다. 19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명명(naming)’이란 것은 풍부한 지혜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혜를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죄가 문제가 됩니다. 죄(sin)는 그 나타나는 모습보다, 그 경향(sinfulness)이 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경향은 자기 중심적이고, 나아가 자기 우월적입니다. 그래서 ‘내가 최고가 되고, 내 위에 아무도 없게 되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 되고자하는 그 마음’이 죄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죄가 하나님의 지혜를 이용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지혜가 나타납니다. 그 뒤에 악한 마귀가 죄의 경향을 더욱 부추겨,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함은 명백합니다. 그래서 이 지혜가 마귀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된 지혜가 악용되어 오히려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인간의 탁월한 관찰력이 오히려 ‘하나님은 관찰해 보니 없다’고 주장하게 만듭니다. 사람의 비상한 추리력과 논리가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축적되는 놀라운 인간의 지식은 인간자신을 거인화시키고 바벨화시켜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교만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의 뛰어나고 비상한 머리와 이를 더욱 탁월하게 만드는 교육이, 오히려 인간을 파멸시키는 정교한 범죄의 바탕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돈을 믿게 만듭니다. 그래서 돈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조종하려고 합니다. 이 지혜는 또한 권력을 믿게 만들어, 자기를 절대화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파멸을 목전에 두고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 방향으로 달려가게 만듭니다. 이것이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또 다른 세상지혜를 자극합니다. 그들을 불러냅니다. 그래서 다툼과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을 자꾸만 일으킵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최근 이곳 말레이시아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다음 총리로 유망한 부총리의 최측근이 연관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압둘 라작 바긴다라는 정치분석가는 현 실세총리의 정치자문을 하는 측근입니다. 그야말로 실세지요. 그런데 그가 몽골출신의 모델 겸 통역사인 샤리부란 여인과 연애를 했습니다. 이 여인은 영어, 일어, 러시아어, 중국어에 능통한 아주 똑똑한 여인이었습니다. 연애하는 것이야 누가 말릴 순 없지요. 그러나 집을 놔두고 집밖에서 이 40대 후반의 총망 받는 실세가 연애를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슬며시 헤어지려한 모양입니다. 똑똑한 여자는 쉽게 물러나지 않고! 그러자 부총리의 경호원들을 동원해서 납치해서 차에 실은 채로 어디에 가서 차째 폭파를 시켜버렸습니다. 유전자감식까지 하게 되어서 신분이 밝혀졌고 경호원들과 압둘도 다 기소되어 지금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이 재판을 ‘세기의 재판’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정욕적인 지혜가 ‘꽤 시끄러운 요란’을 일으킨 것이지요.
사도가 지금 얘기하는 게 뭡니까? 교회공동체에 ‘자기 자랑의 방향’이 생기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필연코 시기를 일으키고, 또 다른 야망과 자기 자랑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기필코 요란과 모든 악한 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특별히 자랑할 게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 큰 좌절감을 겪게 되고, 마음에 깊은 분노를 가지게 만듭니다. 그러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은 교회를 두려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교회를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아프칸에서 일어난 납치사건에 나타난 인터넷 상의 반응을 보면 이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선교든 봉사든 남들이 하기 힘든 희생의 자리에 나간 사람들에 대한 반응이 이러하다면, 교회가 잘난 척하고, 아귀다툼하다가 그것이 알려질 때, 교회를 얼마나 조롱할 지는 불 보듯 뻔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겪고 나면 교회는 그 본연의 목적을 실행하는 데 엄청난 제약을 같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오고 오는 주님의 공동체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의 방향으로 절대 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에 걸려드는 것이며, 교회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절대로 자기 우월의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라고 사도는 간절히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위로부터 난 지혜, 하늘의 지혜’인가? 17절을 보세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첫째 되는 하늘의 지혜를 사도는 뭐라고 말합니까? ‘성결’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결’을 첫째라고 하는 것은 순서상으로 첫째라는 말도 되지만, 가장 우선시되는 priority 지혜의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결’이 지혜이며 가장 우선시되는 하늘의 지혜인가? 여기에 굉장히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결’이 뭔가? 원어로는 ‘하그노스’라고 하는데, 그 자체의 뜻은 ‘moral, spiritual integrity, 윤리적, 영적 고결성,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깨끗한 상태’ 이런 뜻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의 맥락에서 보면 ‘성결’이란 ‘하나님 앞에 자꾸 서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이 별로 없지요. 그렇게 주위에서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죄인이라고 그러고, 죄인 중의 죄인이라 그러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자꾸 서는 사람,’ 그 사람이 ‘성결’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꾸 가서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 모습을 밝히 보아서 은혜 외에는 사모할 게 없음을 깨닫는 사람, 그래서 그 분의 은혜를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그 용서와 자비와 인자를 풍성하게 경험하는 사람, 그 사람이 ‘성결’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지혜의 원천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결의 지혜’에서 뭐가 나옵니까? ‘화평’이 나옵니다. ‘다음에 화평하고, then peace-loving' 하나님과 싸울 게 없고, 하나님께 대들 이유가 없고, 하나님께 섭섭할 이유가 없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심을 아는 사람이, 바득 바득 누구와 싸울 게 없지요. 또 핏대 세울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싸우려는 사람이 불쌍히 보일 뿐입니다. 그 사람은 ‘화평’과 더불어 ‘관용의 지혜’까지 가진 사람입니다. ‘관용하고, considerate'
그리고 그 ‘성결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양순’합니다. submissive! 하나님 앞에 늘 서는 사람은 그 분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가장 쉬운 길이며, 가장 마음 편한 길임을 압니다. 목자가 가자는 데로 가는 것이 복임을 압니다. 이래 가나 저래 가나 다 목자가 양을 위해 이끄는 길임을 믿습니다. 그 사람은 순종이 축복임을 합니다. ‘양순의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늘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분의 ‘긍휼’을 알게 됩니다. 헤세드, 책임지시는 사랑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잘못을 꾸짖으시고 책망하시지만, 그 안에 알알이 배인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 사랑에 반응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어갑니다. 이렇게 성결의 지혜가 우리에게 ‘긍휼의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를 살피는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공평하고 신실하심을 배워갑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관심을 붙들어 두기 위해, 사람에게서 얻는 유익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하는 편벽과 거짓이 오히려 미련한 것임을 압니다.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을 붙잡기 위해서 외모를 취합니다. 유익을 따져 사람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빠른 길, 좋은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그런 길을 경계합니다. ‘편벽과 거짓이 없는’ 느린 길, 거친 길이 오히려 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18절을 보세요.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하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화평케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Peacemaker! 그런데 화평케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화평으로 심는 자’가 화평케하는 자라고 사도는 얘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심는다’는 말입니다. 스페이레타이, sow! 화평을 심는 사람이 하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란 말이 됩니다.
그러면 누가 화평을 심는 사람인가? 이것을 너무 크게 생각하면 오히려 혼돈이 옵니다. 세상을 다니며 평화의 사절이 되는 것, 이렇게 너무 광대하게 생각하면 오히려 어지럽습니다. 화평을 심는 자를 간단하게 말하면 자기를 부정하는 자입니다.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자입니다. 자기 우월에 빠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지혜와 총명의 탁월함에 취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틈엔가 자기를 자랑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조금만한 거라도 괜찮은 게 있으면 우리의 지혜와 총명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면 어느 틈엔가 시기가 나타나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또 요란한 일들이 생기고, 악한 일들이 역사합니다. 그래서 화평을 심는 대신 미움을 심고, 질투를 심고, 증오를 심게 됩니다.
우리가 화평을 심는 길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보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성령의 깨우치심으로 내가 나를 정확하게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떠했으며,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어떠한지를 아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없어지고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바로 이것이 화평을 심는 것이고, 이것이 하늘의 지혜로 사는 모습입니다.
히스기야왕을 살펴보면 하늘의 지혜와 땅의 지혜가 다 보입니다. 그가 당한 큰 위기가 두 가지이지요. 하나는 앗수르대군이 물밀듯 쳐들어왔을 때이고, 하나는 그가 죽을 병(terminal disease)에 걸렸을 때입니다. 이 두 경우를 히스기야는 다 하늘의 지혜로 극복합니다. 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상대함으로 이겨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철저히 세웁니다. 그래서 하늘의 능력과 하늘의 권세를 끌어옵니다. 그 하늘의 지혜가 그와 그의 나라에 화평을 가져다 줍니다. 성결한 지혜로 그는 위기를 이겨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바벨론 사신들이 병나음을 듣고 문안인사를 왔을 때 사단이 생깁니다. 사실 사신들이 온 이유는 유다가 앗수르를 이긴 승전의 비결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그가 앗수르가 남기고 간 전리품을 주로 모아둔 창고를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줍니다. ‘이게 우리 재산이다. 이게 우리 보물이다.’ 이런 자랑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책망을 듣게 됩니다. ‘자랑할 게 없어서 그것을 자랑했느냐’하는 것이지요.
히스기야가 자랑할 게 뭐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앗수르 18만 5천명을 한꺼번에 드러눕게 한 장소, 또 히스기야가 통곡하며 기도하던 벽,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며 예배드리고 기도하던 피비린내 나는 성전, 그게 유다의 능력이고 유다의 보물이고 유다의 자랑거리였는데, 그것을 놔두고 전리품 쌓아둔 궁중의 보물 창고만 보여준 것입니다. 이 땅의 지혜,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지혜를 선지자가 책망한 것입니다.
Conclusion: 성도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발을 떼고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형통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잘 살고 형통하기 위해 우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총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잘 아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지혜가 필요한가? 분명한 것은 그 지혜는 우리에게 중단 없는 형통을 주는 지혜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의 지혜,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이라 부르는 이 지혜의 특징이 뭐냐하면, 이것이 우리를 정상에 가게 하기는 합니다. 에스겔 31장에서 이런 모델로 앗수르와 애굽을 제시하며 그것을 구름을 뚫고서 올라가는 나무라고 얘기합니다. 분명 이런 지혜는 인생으로 하여금 정상에 우뚝 서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분주하게 이 지혜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뭐와 같느냐하면 브레이크가 고장난 최상급엔진의 차와 같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갑니다. 뭐든지 다 제치고 앞서 버립니다. 그러나 브레이크가 고장나 버렸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정상에서 공허해집니다. 정상에서 와서 방향을 찾질 못합니다. 그래서 그 정상에서 죄로 깊이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 얘기했던 ‘다니엘의 모델’이 중요합니다. 그는 그야말로 ‘중단 없는 형통’을 누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두 왕조의 세 왕을 고위 공직자로서 탁월하게 그는 섬겼습니다. 한 정권을 풍미하면 다음 정권에서 살생부 제일 첫 자리에 오르는 것이 오늘날에도 분명한 현실인데, 어떻게 다니엘은 그런 ‘중단 없는 형통’을 누렸는데, 어떻게 그는 그렇게 세상에서도 오래도록 잘 나갔는가?
다니엘의 지혜는 간단합니다. 그는 ‘성결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지혜로 그는 화평하고, 그 지혜로 관용하며 양순했습니다. 그 지혜로 그는 긍휼과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지혜로 편벽과 거짓이 없이 승리하는 법을 알아갔습니다. 바로 이 지혜가 그의 유일한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지혜에 평생 매달렸습니다. 목에 죽음의 칼이 들어와도 그는 이 지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을 사랑했습니다. 그 분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 자리를 사랑했습니다. 어느 것으로도 그것과 바꾸려 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로 시기를 이기고, 다툼을 이겼습니다. 요란을 이기고, 모든 악한 일을 이겨내었습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받은 위로부터 난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이 지혜가 그의 중단 없는 형통의 바탕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위로부터 난 지혜가 풍성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Prayer: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미련함을 용서하시옵소서. 너무 분주해서 아버지 앞에 있을 시간이 없었던 미련한 분주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당신의 지혜를 밀쳐 내어버린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다시 말씀을 붙잡고 주님 앞에 서오니 하늘의 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성결한 지혜를 끝까지 붙들어서 우리 가운데도 당신의 의의 열매가 풍성하도록 믿음으로 우리를 지켜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