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가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1947년 고(故) 구인회 창업회장이 “ 남이 손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대서 달려가자”며 부산 서대신동에서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한 지 꼭 60년이 지난 것. LG는 화학·전자 분야에서 숱한 ‘최초’ 기록을 세우면서 임직원 14만여 명이 매출 80조원대를 올리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중심에 구본무 회장이 있다. ‘ 일등 LG’를 새로운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고 기업문화 혁신을 주도하는 ‘구본무 리더십 ’을 조명한다. 이와 함께 LG 60년 도전사와 그 역사를 가능케 한 기업 문화를 취재했다.
대구 계명대의 정기영 교수(회계학)는 LG에 대해 ‘된 회사’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2005년부터 LG상사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정 교수는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깨끗하고 속도감 있는 기업문화에 놀랐다”고 말한다.
‘기업이 이렇게 바뀌고 있구나’ 하는 것을 LG를 통해 실감한다고. 회계 전문가인 그는 언제라도 필요한 재무자료를 열람할 수 있고 이를 검토하면 흠잡을 곳이 거의 없다는 데 놀란다. 요새 그는 LG상사가 오는 3월 내놓을 결산보고서에 기대가 크다.
“주주총회 때 내놓는 연간 영업보고서가 형식적이다 보니 주주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기에는 미흡해요. 이해 관계자는 물론 미래 고객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알찬 보고서를 내자고 제안했습니다.”
회사 측으로부터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들은 상태.‘바깥 사람’인 정 교수가 이런 혁신안을 제안하는 것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당부도 한몫 했다. 정 교수가 구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LG인화원(그룹 연수원)에서 열린 사외이사 간담회 자리에서다.
국내 3위 재벌 총수지만 거리감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마치 ‘30년지기’를 대하는 듯했다면 과장일까요? 짤막하지만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시는데 분위기가 좋았어요. 결론은 회사 문화를 바꾸는데 ‘구조적으로’ 기여해 달라는 당부였습니다.”
사외이사에게 ‘구조적 혁신’ 당부
LG전자 사외이사인 김일섭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회장도 비슷한 견해다. 김 회장은 “사외이사 4명을 포함해 7명이 앉아서 회의를 하면 강유식 부회장 같은 사내 등기이사들은 주로 듣는 쪽이다”고 전한다. 김 회장은 “LG가 새로운 제언, 냉정한 평가를 듣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고 말했다.
LG텔레콤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강명헌 단국대 교수(경영학)는 “통신사업 후발주자로서 LG텔레콤은 700만 고객을 확보하는 등 보기 드문 파이팅을 보여주고 있다”며 “과거의 LG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고 말했다.
세 사람의 사외이사는 “요즘 LG가 제2의 도약을 위한 재정비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이런 변화의 움직임은 구본무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일등 LG’ 전략과 닿아 있다.
지금까지 LG를 대변하는 기업문화는 인화(人和)였다. 그래서일까? “고객을 사로잡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김일섭 회장)라는 표현은 어느 재벌 총수보다 구 회장에게 어울린다.
그런데 구 회장은 ‘ 따뜻한 마음’에서 한 발 더 나가고 싶어한다. 그는 60여 년을 쌓아온 인화의 토대 위에 혁신, 일등 문화를 심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고(故) 연암 구인회 회장이 부산 서대신동에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세워 ‘럭키크림’을 생산한 것이 1947년 1월 5일이다(그룹의 공식 창립기념일은 3월 27일이다).
이보다 조금 앞서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의 만석꾼이었던 허만정씨가 연암의 사업에 투자하면서 3남인 남촌 허준구(허창수 GS그룹 회장 부친)씨가 합류한다. 유명한 구(具)·허(許)씨 가문의 동업 경영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LG=인화’가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인화는 단순히 두 가문의 동업 문화를 넘어서 LG만의 고유한 기업 언어를 만들었다. 소비자라는 말보다 ‘고객’이라는 표현을 가장 먼저 쓴 회사가 LG다. 노사(勞使) 대신 ‘노경(勞經)’이라는 조어(造語)를 창조한 회사도 LG다.
창업 이후 LG의 60년 경영철학은 ‘고객’이라는 화두로 일관하고 있다. 연암은 고객이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 크림, 치약, 플라스틱을 만들었다.
57년 공채 1기로 LG화학에 입사한 ‘LG의 산 역사’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은 “LG의 초심(初心)은 단연 고객”이라고 회고한다. 이 전 회장은 “47년 창업할 때부터 기업의 목적을 고객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 창출에 두었다”고 말했다.
노경 문화도 다른 기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말이다. 노동자와 경영자는 역할이 다를 뿐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동반자라는 의미다. 90년대 초반 LG전자 창원공장은 대규모 노사 분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노조원들은 신제품 TV 브라운관으로 바리케이드를 쌓아 놓고 시위를 하기 일쑤였다.
당시 CEO였던 이헌조 전 회장은 “노조원들과 대등한 인간으로서 진심을 다해 대화한 것이 인화를 바탕으로 한 오늘날 LG 노경 문화의 초석이 됐다”고 회고했다.
LG의 고유한 인화 문화는 인간 존중 경영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연암이 제시했던 ‘인화단결·연구개발·개척정신’의 창업 이념이 2대 선장인 구자경 회장(현 명예회장)에 의해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 ‘인간 존중의 경영’으로 진일보한 것.
종전의 개척정신과 연구개발이라는 이념은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로, 인화단결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인간 존중의 경영’으로 새로이 정립했다는 설명이다.
그런 기본 철학 위에 구본무 회장과 LG가 새롭게 내놓은 슬로건이 ‘일등 LG’다. ‘일등 LG’라는 표현은 97년 창립 50주년 기념사에서 처음 나온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세계 고객들로부터 사랑받는 일등 LG’ ‘세계 초우량 LG’를 선언했다.
지난 2005년엔 LG 브랜드 출범 10주년을 맞아 그룹의 경영이념과 비전인 ‘일등 LG’로 구성된 ‘LG 웨이(Way)’를 선언한다.
조영호 아주대 교수(경영대학원장)는 2002~2003년부터 LG의 기업문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요체는 성과주의를 강조하는 문화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조 교수에 따르면 LG의 ‘일등주의’는 삼성의 그것과 구별된다.
삼성이 ‘성과’를 강조한다면, LG는 ‘전문성’을 중시하면서 개인과 조직의 역량, 스킬을 강화하는 쪽이라는 것. 조 교수는 이를 “GE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의 LG식 버전”이라고 설명한다.
‘바운더리리스 오거니제이션(Boundaryless Organization·벽 없는 조직)’을 만들어 경험을 공유하고 자율적인 학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베스트 프랙티스의 요체다.
‘바운더리리스 오거니제이션’은 GE의 잭 웰치 전 회장이 가장 강조했던 말 가운데 하나다. LG는 전사적으로 ‘스킬 빌딩’ ‘스킬 콘퍼런스’를 정례화해 프로세스 혁신을 공유하고 있다. 경영 이슈가 생기면 임원들이 컨센서스 미팅을 가지는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60년 일관된 화두는 ‘고객’
오너 회장의 행보도 달라지고 있다. 혁신을 강조하는 구 회장이 빼먹지 않고 찾는 행사가 있다. 대학생들의 해외 연수 공모 프로그램인 ‘LG 글로벌 챌린지’ 발대식이다. LG는 ‘도전하라 새로운 생각으로’라는 슬로건으로 해마다 100명이 넘는 글로벌 챌린저를 선발하고 있다.
2004년엔 학생들로부터 뜻깊은 선물을 받기도 했다고. 해외 연수를 다녀온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감사패를 제작해 구 회장에게 전달한 것. “미래를 보는 듯하다”며 이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는데, 이날은 선물까지 받게 돼 더 기뻐했다고 전한다.
스타일도 과감해졌다. 대표적인 것이 성과주의 인사다. 구 회장은 지난해 12월 18일 단행된 그룹 임원 인사에서 LG전자·LG필립스LCD·LG상사 등 주요 계열사 사령탑을 교체했다. LG전자에는 전략통인 남용 부회장이, LG필립스LCD에는 재무 전문가인 권영수 사장이, LG상사에는 구본준 부회장이 기용됐다.
주요 계열사의 실적이 만족할만하지 않은데 대해 조직의 긴장감을 높이겠다는 포석으로 분석된다. 환율 하락, 경기 부진 등 외부변수가 있었지만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가 반영됐다는 평이다.
인사 컨설턴트인 한국타워스페린의 박광서 사장은 이런 LG의 인사에 대해 “긍정적이다”고 말한다. 박 사장은 “변화와 혁신은 속도와 방법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빠르고 강하고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열쇠인데 이번 LG그룹의 CEO 바통 교체는 시기가 적절했다”고 말했다.
전문성 중시하는 일등주의
조직의 변화도 분명해 보인다. 오는 2월 정년 퇴직하는 LG화학 울산공장의 김보겸 반장은 “혁신 활동을 계속 실행하다 보니 계속해서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방법을 찾게 됐다”며 “이제 LG화학도 세계 일등 한 번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어느 기업보다 ‘화려한 환갑’을 맞았지만 구 회장은 다시 고삐를 죄고 있다. 그의 신년사에는 새로운 결단이 묻어 있다. 지난 2일 시무식은 창립 60주년 기념식을 겸한 행사였다. 3월 27일이 창립 기념일이지만 별도의 행사를 계획하고 있지 않아서다.
신년사를 통해 구 회장은 “올해는 LG의 역사를 써나가기 시작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라며 “고객에 대한 열정과 미래를 향한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100년을 넘어서는 위대한 기업이 되자”고 말했다.
구 회장은 이어 “5년 전, 10년 전 관행을 고집하며 실수만 하지 않으려는 타성에 젖은 습관이 있다면 과감히 벗어던져야 한다”며 “도전과 혁신을 권장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문화를 정착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새로운 기업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재계가 LG의 대변신을 주목하고 있다.
달라진 ‘ 구본무 키워드 ’ “고객·성장·창조 문화 기반으로 100년 넘는 위대한 기업 만들자”
■ 고객이 인정하는 가치 창출 - 경쟁사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제품과 서비스로 LG를 새로운 가치 창출의 상징으로 - LG의 제품·서비스 다시 찾고 추천하고 싶은 마음 들게 해야
■ 지속적인 성장 위한 준비 - 미래 위해 어떤 계획 있는가 지속 성장 위한 전략 무엇인가 역량 확보 방안은 무엇인가 - 경영진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미래를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것
■ 창의성 발휘되는 조직문화 - 업무를 시장과 고객 중심으로 구성원마다 권한·책임 분명히 하고 스스로 가치 창출의 원천 돼야 - 5년 전, 10년 전 관행 고집하며 실수 않으려는 타성에서 벗어나야 미래를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것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