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 현황>
언어 : 아랍어
면적 : 1억 14만 5천 헥타르(세계 28위)
인구 : 1억 116만 명 (세계 14위)
GDP : 2353억 달러
기후 : 대부분의 지역이 건조기후
종교 : 이슬람/수니파 90%, 기독교 10%
역사
지금부터 6,000년 전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과 정치, 종교, 문화의 정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처럼 나일 삼각주의 하이집트와 상류지방인 상이집트로 나누어졌다. 상이집트는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생산성도 떨어져 가는 나일 강변의 좁고 긴 지역이었다. 하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 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과의 교역과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서 활발이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그후 1,00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 하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무렵 상이집트의 나르메르(혹은 메네스)라는 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어 수도는 중간지점인 나일 델타 곡창지대가 시작되는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나르메르의 통일은 이집트 민족의 통합과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통일 후, 이집트는 강력한 사회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이 시대를 제1왕조, 제2왕조라 하는데 이집트는 정부 조직과 행정 체계, 건축과 토목 기술, 예술 등 모든 면에서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집트 인들의 문자 체계인 히에로글리프도 정비되었고, 1년을 365일로 하는 역법이 완성되었다. 기원전 약 2800년경의 제3왕조의 2대 군주 조세르는 이집트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군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4왕조에서 나타난다. 제4왕조의 초대 왕은 그의 후계자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대피라미드를 기자에 세우게 된다. 제4왕조는 고대 이집트 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으며, 사람인 동시에 신이기도 했던 파라오와 그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의 아들 우세르카프가 세운 제5왕조에서는 태양신 숭배가 절정에 이른다. 오시리스 신을 대신하여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고, 군주들은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제5왕조 군주들이 피라미드 벽화에는 이집트 인들이 시리아, 누비아 등지에서 벌인 원정 사업이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업적은 팔레르모 스톤(Palermo Stone) 같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제5왕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군주의 절대 권력은 제6왕조 때 완전히 약화되고, 이후 이집트인들은 폭력과 내전으로 점철되고, 비관과 혼란이 가득한 제7~10왕조의 제1중간기를 겪게 된다. 마네토의 제11왕조(기원전2133~1991년)와 제12왕조(기원전 1991~1785년)에 해당되는 중왕국시대는 테베의 왕자 멘투호텝 2세가 오랜 고난과 투쟁 끝에 이룩한 상, 하이집트의 재통일도 시작된다.
통일은 모든 계층이 이집트 인들에게 향상된 삶을 가져다 주었으며, 절대 다수의 이집트인들로부터 환영받았다. 멘투호텝 2세는 통일 후 바로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시나이 원정에 나서 성공을 거두었다. 상이집트 총독으로서 이러한 원정 사업의 책임자였던 재상 아메네메트가 제12왕조를 연다. 이 왕조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라고 하는 세소스트리스 3세와 아메네메트 3세의 재위 기간은 평화와 안정의 시기였으며,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파라오들이 인간 쪽에 더 가까워진 시기였다. 제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상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 문화와 사상이 밀려 오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제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여러 대 전부터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 쪽 외국인들이 제16왕조와 제17왕조 시기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힉소스(이민족 통치자들)라고 부른다.
아시아 인들의 지배는 이집트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전기가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 베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품종의 곡물과 곡식이 도입된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전차와 말이 등장하였다. 제13왕조 때부터 힉소스 지배가 끝날 때까지의 혼돈기를 제2중간기라 부른다. 제18왕조는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투쟁하던 테베의 왕가 출신 아흐모세가 열었다. 그는 힉소스의 세력을 델타 지역에서 소탕하고,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하였으며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후 투트모스 3세는 스스로 이끈 여러 차례의 원정전에서 승리하면서 이집트의 옛땅을 수복하고 아시아 지역을 편입하여 '나일 제4폭포'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치 세력은 아멘호텝 3세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황금의 호루스, 진리의 통치자, 상하이집트의 왕, 라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아멘호텝 4세는 이집트의 모든 파라오 중 가장 논쟁이 대상이 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테베의 수호신 아문을 버리고,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교의 신 개념을 확립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도를 중부 이집트의 알-아마르나로 옮기고 신도시 아케타텐(아텐의 지평선)을 건설하였다.
신왕국시대에 누렸던 영화는 1922년 발굴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왕가의 계곡'에서 출토된 화려한 부장품들, 그중에서도 파라오 시신의 얼굴 덮개인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 등으로 확인된다. 제19왕조는 람세스 1세부터 시작한다. 그의 뒤를 이은 세티 1세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히타이트 왕국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는 리비아 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3대 군주 람세스 2세는 66년간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왕이었다. 평화 조약과 혼인 동맹을 맺는 등 히타이트족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20왕조의 오랜 평화시대가 가고, 왕권이 몰락하고 사제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는 제21~25왕조가 이어진다. 제3중간기라고 불리는 이 혼돈과 좌절의 시기에는 리비아계 군주들이 통치하고 누비아인들이 상이집트 전역과 중이집트의 멤피스까지 약탈하며, 에티오피아 군주들과 앗시리아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기원전 663~332년의 후기왕조 시대는 이집트를 지배하던 아시리아인들을 무찌른 하이집트 델타 지역 사이스의 왕자 프삼티크 1세의 제26왕조로부터 시작된다. 2대 군주 네코의 시대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해군력이 증강되었으며,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운하가 건설되었고, 특히 이집트와 그리스 사이에 교역이 발달하며, 많은 그리스인들이 상인으로서, 왕가의 용병으로서 이집트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제27왕조 시대에 페르시아의 군주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총독을 두어 다스렸으나 이집트인들은 복종하지 않았다. 외세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건축과 조각과 문학이 흥성했다.
페르시아 군주들의 암살, 사망, 아테네와의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전 등을 계기로 델타 지역에서 끊임없이 반페르시아 봉기가 일어났고, 그때마다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제28왕조를 연 사이스 출신 아미르타에우스에 의해 반 페르시아 투쟁은 드디어 승리를 거두고, 제29왕조시대에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세력 균형에 힘입어 이집트가 다시 국제 무대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제30왕조에서는 줄곧 번영을 누릴 수 있었으나 제30왕조의 마지막 군주 넥타네보가 페르시아군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누비아로 도망함으로써 이집트인에 의한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페르시아 군주들의 제31왕조가 들어섰다.
기원전 332년 가을 알렉산더 대제의 마케도니아-그리스 군이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알렉산더는 나일 삼각주 서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지중해에 면한 이 항구 도시는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이집트 통치를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집트인 행정관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떠난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이집트는 우여곡절을 거쳐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프롤레마이오스 왕가에 권력 투쟁이 빈발하여, 전성기 때 영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어, 마지막 100년은 로마의 보호 없이는 독립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이었고,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세계 최고인 도시였다.
야심파이고 보기 드물 게 유능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살로 고대 이집트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였고, 이스스 숭배를 비롯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로마까지 파급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이집트로 전파된다. 기독교는 발생 초기 박해를 받았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보호 속에서 급격히 발전한다.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모든 우상 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바 있다.
이집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이집트에서의 토착종교는 거점을 점점 잃어 갔다. 기독교 수도자와 은둔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세계 최초로 이집트에 수도원이 등장하였다. 성서,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삶에 대한 번역물이 주를 이루는 풍부한 콥트문학이 이집트에서 발달했다.
이집트는 카이로 부근 룩소르 및 아스완 부근의 유적보호와 관광자원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유적 중 유명한 것은 피라미드이다. 이집트인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자의 분리는 죽음이지만, 사자(死者)는 영혼이 머무는 곳인 시체가 멸하지 않고 공물(供物)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은 자도 저승에서 계속 산다고 믿어 피라미드를 건조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라든가, 또는 사자의 영원한 집인 분묘를 정비한 이유가 모두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피라미드는 초기왕조시대의 마스타바에서 발전된 것이다.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 최고(最古)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조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또 오벨리스크(obelisk)는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로 방첨탑(方尖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며 태양신 신앙과 관계 있다. 문화의 꽃은 언어라 할 수 있는데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들 수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서기전 3,000년을 전후하여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기록되었는데 최근의 발견으로 이집트에서 먼저 상형문자가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내용은 다름 아닌 세금에 관계된 것이어서 최초의 문자는 역시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사용되기시작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고대문화의 발달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고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의 발달도 아랍 세계에서 가장 앞서며 문학·미술·무용·연극·영화 등의 분야에서도 전통적인 것과 현대작품이 공존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집트 음식>
따미야 - 빵 속에 콩과 채소를 넣어 튀긴 음식. 고로케와 비슷
코샤리 - 찐 쌀과 마카로니에 갈색 렌틸 콩과 병아리콩을 담은 후 그 위에 얇게 잘라 튀긴 마늘, 양파 등을 넣고 식초와 매운 토마토 소스로 간을 하여 먹은 음식
칸엘칼릴리 시장 - 카이로에 위치한 이집트 최대의 시장
문명 기행 내 안의 이집트 - 강인숙 지음
신들의 역사, 인간의 문화가 공존하는 이집트!
나일 강을 따라 아스완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이집트, 고대문명을 탐미한 기행문
<이집트의 신들>
네프티스 - 이시스의 여동생. 그녀가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 신전의 상형문자다. 오시리스의 부활의식 때 이시스를 도운 여신이다.
라 - 태양신. 머리 위에 태양을 인 매의 머리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마트 - 태양신 라의 딸. 우주의 조화와 우주 전체에 일관되는 황금률, 정의의 원리를 상징한다. 머리에 깃털 하나를 세운 모습으로 표현되는 이 여신은 사후의 심판도 관장한다. ‘마트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지혜를 추구한다는 뜻이고, ‘마트를 행한다’는 것은 올곧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통한다.
무트 - 아몬의 아내. 암사자의 몸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 여신은, 종종 독수리 유골 형태의 머리 모양에 흰색 관이나 이중 관을 쓴 여왕의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민 - 다산성과 생명력의 화신. 육신은 수의에 싸여 있으나 영원히 곧추서는 음경을 가진 신이다.
베스 - 수염 난 익살꾸러기 난쟁이 모습을 한 신. 춤, 음악, 마술을 하는 그는 의로운 준재들을 새로운 탄생으로 인도하는 선도자이기도 하다. 출산 때 수호신 역할도 한다.
소베크 - 악어의 머리를 가진 신. 약탈자이자 홍수의 신이다. 하지만 심층의 태양을 빛나게 하기 위해 물에서 솟아오른다. 세베크라고도 불린다.
세크메트 - 암사자의 머리를 가진 여신. 인류에게 질병과 재앙을 가져오는 사절을 보내는 ‘공포의 여신’이다. 하지만 의술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세트 - 폭풍과 폭우와 사막의 신. 불특정의 동물 머리를 갖고 있다. 형인 오시리스를 살해한 신으로 그려진다. 때로는 빛의 옹호자로도도 나타나지만 후대에는 악의 화신으로 간주된다.
아누비스 - 피부가 검은 사람의 몸에 표범으로 머리를 가진 신.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구분하고, 죽은 자를 미라로 만드는 장의를 주관한다. 또한 죽은 사람의 저승길을 안내한다.
아몬 - 태양의 신. 신왕국의 수도 테베의 수호신이다 .한 쌍의 높은 깃털을 세운 관을 썼으며, 생명을 주는 대기의 주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몸 색깔이 푸른색이다.
아텐 - 아크나톤이 숭배한 태양의 신. 태양의 원반에서 내려 쪼이는 광선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아텐에게는 인간의 몸이 없다.
오시리스 - 저승의 신. 그는 부활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다시 태아나려면 누구나 일단 오시리스가 되어야 한다. 장제전에 오시리스로 분장한 파라오의 상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왕홀과 편모를 들고 관을 쓴 미라의 형상으로 표현되며 푸른 피부를 가지고 있다.
이시스 - 호루스의 어머니기도 한 이시스는 파라오들을 창출하는 옥좌다. 이 여신은 머리에 옥좌를 이고 있다. 오시리스가 살해되자 이시스는 세트에 의해 흩어진 그의 시신 조각들을 찾아서 육신을 재구성하고 부활시킨다.
케프리 - 변형과 변화를 상징하는 신. 태양은 새벽에 풍뎅이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풍뎅이의 머리를 가진 것으로 표현된다.
크놈 - 숫양의 머리를 가진 도자기의 신. 녹로 위에서 인간을 빚어냈다. 엘레판티네 지역을 통치하며, 나일 강의 수량도 관장한다.
토트 - 따오기의 머리를 가진 신. ‘신들의 말씀’인 상형문자의 주인이요, 라 신의 조력자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헤르메스와 동일시했다.
프타 - 멤피스의 지배자이며 말씀의 신이다. 장인들의 신인 프타는 권력의 상징물을 들고 작은 모자를 쓴 미라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하토르 - 호루스의 아내. 머리에는 뿔이 있고 암소의 귀를 가진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두 뿔 사이에 태양이 있다. 기쁨, 사랑, 하늘의 여왕이기도 하다.
하피 - 나일 강의 수량을 관장하는 신. 배가 크고 젖가슴이 늘어진 남녀 양성의 모습을 한다. 파피루스관을 썻으며 봉헌물들을 신전으로 나르는 역할이다.
호루스 - 매의 머리를 가진 신. 호루스는 셋이다. 해와 달을 두 눈동자에 품는 古 호루스가 있고, 파라오로 화신하여 왕권을 보호하는 호루스가 있다. 그리고 이지스의 아들이자 오시리스를 계승해야 하는 유아 호루스가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아테네까지 - 임광빈 지음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터어키, 그리스 성지순례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 카타콤. 폼페이우스 기둥.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마가의 순교 기념탑. 성마가 교회
카이로 - 기자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모세 기념교회. 아기 예수 피난 교회. 이집트 박물관 세계 5대 박물관 중 하나
.
쿠푸와의 무덤 - 높이 145m, 밑변이 각기 230m, 경사면이 186m, 경사 각도는 51도 가량 되며, 네 능선은 나침반처럼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르키고 있다. 돌 한 개의 무게는 평균 2.5톤, 한 개의 피라미드에 이런 돌이 230만개. 10만 명의 노예가 돌을 운반하는데 10년이 걸렸고, 돌을 쌓아 피라미드를 만드는데 또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스핑크스 - 인간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지고 있는 인면수신의 괴물. 몸의 길이가 73m, 높이가 22m, 얼굴 폭이 4m에 귀의 길이 1.4m, 입의 길이 2.3m, 코의 길이 1.7m이다.
출애굽 여정 - 홍해. 광야를 지나. 시내산. 성 캐더린 수도원
<이스라엘>
시험산. 엘리사의 샘. 삭개오가 올라갔던 돌무화과 나무. 비극의 마사다. 사랑의 향기가 넘쳐나는 엔게디. 이스라엘의 보물 창고 사해. 사해 사본이 발견된 쿨란
예루살렘
스데반 문 - ‘사자문’, 양의 문‘이라고도 하는데,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가 바로 이 근처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는 전승에서 붙여진 이름
성 안나 교회 - ‘안나’는 예수님의 외할머니 이름. 이곳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태어난 곳
베데스다 못
십자가의 길 -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신 길. 라틴어로 ‘비아 돌로로사’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슬픔의 길’, ‘고통의 길’이다.
성묘 교회 - 예수 부활 기념교회. 이곳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세운 곳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곳이며,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 속에 장사지낸 곳. 동시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곳
통곡의 벽 - 주후 70년 로마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 유일하게 남아있던 성전 서쪽 축대의 일부. 이 축대는 폭이 60m이고, 높이가 18m이다.
승천교회 - 해발 810m 감람산 정상에 위치. 감람산은 베다니 마을이 있는 산이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내려오신 산이며,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통곡하신 산이기도 하다.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산이며, 마지막 날 밤 기도하신 산이며, 승천하신 산이기도 하다.
주기도문 교회
눈물교회 - 예수님의 눈물을 상징해서 지부의 모습을 눈물방울 형태로 건축
겟세마네 교회 - 만국 교회라고도 부른다. 이 교회를 건축할 때에 세계 16개국의 교회가 공동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밤에 기도하셨던 곳이다.
마가의 다락방 - 예루살렘 서남쪽 시온산에 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신 곳이다.
베드로 통곡교회 - 정식 이름은 ‘갈리칸투 교회’
유대인의 학살 추모관 ‘야드 바쉠’
세례요한의 고향 엔 케렘
메시야가 탄생하신 베들레헴
<요르단>
카락성(길하레셋 성) - 카락은 암반으로 이루어진 언덕위에 위치한 성읍이었는데 주변은 깊능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요새화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카락성의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군 성으로 천혜의 요새
모세의 샘(므리바 샘)
불가사의한 땅 페트라 -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유적 중 한 곳이고,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촬영지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페트라로 들어가는 길은 입구부터 천연 요새다운 위엄과 신비가 사려있다. 거기서부터 좁은 바위 계곡 길을 따라 페트라의 중심부까지 걸어 들어갔다. 이 계곡은 거대한 바위산이 갈라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 너비이다. 양쪽 벽은 수십 미터 높이의 깎아지른듯 한 바위 벼랑이고, 그 벼랑 사이에는 군데군데 야생무화과 등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이런 미로와 같은 신비의 길을 2km나 걸어 들어간다. 그렇게 계곡을 한참동안 걸어서 들어가면 갑자기 좁은 계곡 사이로 황금빛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사이 한 거대한 신전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신전과 계곡을 비추이는 햇살의 빛이 어우러져 너무나도 아름답고 장엄해서 모두다 넋이 나간 듯하다. 마침내 붉은 도성이라 불리는 페트라의 중심부에 도달한 것이다. 다시 미로와 같은 바위 계곡을 빠져나와 계곡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작은 평원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이 작은 평원을 둘러싸고 있는 벼랑에는 자연의 바위를 그대로 잘라 내거나 쪼아내어 만든 각종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 건축물들의 대부분은 무덤이라고 한다. 그 중에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은 계곡 사이에서 보았던 신전이었는데, 그것은 나바태안족의 왕의 무덤이라고 한다. 패트라에는 나바태안족의 왕의 무덤뿐만 아니라 수많은 무덤들이 바위 벼랑에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무덤 중에는 바위 절벽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만든 3중 무덤도 있다. 이런 무덤들은 대부분이 2천 년이나 되는 세월을 보낸 것들이지만 자연 암석을 그대로 조각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매혹적인 솜씨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던 것이다. 그들이 이처럼 정성을 다해 무덤을 만들었던 것은 영원한 삶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페트라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집이 함께 어우러져 있고, 산 자보다 죽은 자의 집이 더 크고 화려했다. 그러므로 페트라는 죽은 자의 도시라고 불리 울 만 했다. 3~4세기 경에는 극심한 박해를 피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페트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들의 무덤을 그들의 거처와 교회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페트라에는 여러 개의 신전과 궁전, 그리고 약 3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옥외 사암극장 등이 있었는데, 그 건축물은 애굽식과 그리스식, 나바태안식, 로마식 등의 다양한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잇는 걸작품들이다. 이처럼 페트라는 신비한 자연미와 뛰어난 앙상블을 이루는 환상적인 협곡이다.
아론의 무덤이 있는 호르산 - 모세의 형이었던 아론이 죽어 장사된 호르산.
베다니 세레터
느보산과 모세 기념교회 - 느보산은 모세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주후 394년에 모세의 무덤위에 세웠다는 모세 기념교회는 바실리카 양식의 아담한 교회다. 교회 바닥에는 4세기 때의 작품인 모자이크가 그대로 남아있다. 교회 앞마당에는 놋뱀을 장대 위에 매단 형상을 한 조형물이 새워져 있는데, 여러 개의 짧은 파이프를 겹겹이 붙여서 만든 작품이다.
메드바의 성지 지도 - 이곳에는 세계 최대이자, 세계 최고인 모자이크 성지 지도가 있는 성 죠지 성당이 있다.
아모리 족속의 수도였던 헤스본
이집트의 유혹 - 이태원의 고대문명 여행기
이집트는 모든 것이 기원이고 모든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생명의 열쇠인 앙크는 십자가를 닮았고, 아문신 부부와 아들로 표현되는 삼신상은 기독교의 성가족, 삼위일체를 연상시켰다. 현대의 ‘욕망의 삼각형’에 이르기까지 3이라는 숫자에 부여된 각별한 의미가 여기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미라와 무덤 꾸미기에서 보여주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재생, 부활, 영생의 염원이야말로 기독교의 기본이념과 그대로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 박정자 상명대 교수
ㅇ 거대한 스핑크스가 후대에 이르러 점점 작아지면서 동물 머리의 소규모 스핑크스로 바뀌었다고 한다.
ㅇ 신전의 출입구인 탑문은 우리나라 독립문이 본을 뜬 파리 개선문의 원형이었다.
ㅇ 계단식 피라미드는 경주의 분황사를 연상시킨다.
첫댓글 머리속에서 잘 정리가 안되는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새로운 소식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