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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란 무엇인가> 프루동. 이카넷
프루동의 <소유란 무엇인가>은 웅장한 아나키즘의 사상을 응집하고 있다. 법적 소유권과 능력의 차별에 따른 소유론에 대한 반박으로 이어진다. 프루동의 주장은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자연권에 기반한 듯하다. 모든 인간은 존재함으로써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자유이며 평등이다. 사회는 오히려 이것을 보장하는 공동체의 연장이다. 바로 정의의 원리이다. 사회의 구서원인 각 개인이 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조건의 평등을 유지하고, 공동체(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평등을 지키려는 정의를 위협하는 개인들을 견제하는 제도를 마련한다. 하지만 점유의 보장이 소유로 넘어가고 힘의 관철에 의해 사회가 사회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프루동은 사회적 존재의 인간의 특성을 휴머니티(인간성)의 핵심으로 본다.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갇고 공정하려는 마음이야말로 정의의 뿌리라는 것이다.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다운 사상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입장을 지지했던 맑스 계열에 의해 추출된 푸루동 계열의 아나키스트들을 떠올리면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자율과 자치에 의한 연합이라는 거대한 이상이 항상 대중의 몰이해와 힘의 탄압에 의해 절망하였다는 것은 역사의 가장 큰 비극이다.
최소한의 통찰안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조차 희귀한 현실을 둘러보면 문득 할 말을 잃는다. 그래서 더욱 치열하게 들여 보고 잊고 있던 바로 그것을 상기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적 시각에서 프루동을 계승하자면 내 생각에 생태아나키즘적 시각을 정립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결국 자연에 기반한다는 것, 인간의 생명도 자연의 생명의 일부라는 생각을 대전제로 삼는다. 인간의 법은 자연법과 모순되지 않는다. 지나친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은 자연의 조화를 깨뜨린다는 점에서 절제되고 조정되어야 한다. 환경오염과 파괴로 인한 생명파괴의 현실 속에서 아나키즘을 위치시키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프루동의 시각에서 그가 인정하는 사회가 기본적으로 공동체임을 발견한 것은 참 신선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는 사회가 아닌 셈이다. 그냥 조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 차례 =
서문
제1장 이 책에서 사용하는 방법. 혁명의 이념
제2장 자연권으로 간주되는 소유에 대하여. 소유의 동인으로서의 선점과 민법에 대하여
제3장 소유권의 동인으로서의 노동에 대하여
제4장 소유는 불가능하다
제5장 정의와 불의의 관념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 그리고 통치와 권리의 원리에 대한 규정
해제: 프루동과 소유의 사상
프루동 연보
역자 후기
색인
= 발췌 =
제손으로 노동하지 않고 물건을 놀고 먹는 자는 도둑이다. - 에밀
부유는 항상 훔치는 데서 오는 소산이다. - 성 제로모
자연은 공동체를 세웠다. 강탈은 사유재산을 세웠다. - 성 안무로아스
온전히 그것이 정의일 때, 만물은 만인의 것이어야 한다. 부정 그것이야말로 사유재산을 만들었다. - 성 구레만
노예제는 살인이고, 소유는 도둑질이다.
재능과 직무가 위라는 구실 밑에 취득한 일체의 사회적 우위는, 부정이며 강탈이다.
물적 지적 또는 또는 사회적 사실에 있어서의 우리의 관념이, 우리들이 가진 관찰에 의해서 전혀 달라졌을 때, 나는 이 정신의 변동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만약에 관념의 확대 또는 변경이라고 하면, 그것은 진보일 것이다. 프톨레미의 설은 천문학의 진보이며, 코페르니쿠스의 설은 혁명이었다. 마찬가지로, 1789년에는 전투와 진보는 있었어도, 혁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자기의 권리를 향유하라, 이것이말로 자유의 본래 정의다.
일찍이 누가 자유와 평등과 안전의 기원을 조사했을 것인가? 그것들은 우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소유권은 법률에 의해서 소유자 없이 존재한다.
키케로는 토지를 거대한 극장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극장이 공동체와 함께 있는 것과 같이, 정확히 더욱 더 각 개인이 취득한 자신의 자리(지위)는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키케로에 의하면 어떤 사람도 자기에게 족한 것만의 것밖에 권리가 없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suum quidque cuju sque sit(각 개인의 자리는 자기 자신의 것)의 의미이다.
소유권을 구성하는 점유는, 우연의 일이기 때문에, 이 권리에 그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불변성을 전할 수는 없다.
생할을 할 권리는 그 수단을 취득할 권리를 포함시키고 있다.
타인의 노동을 방해하는 것은, 그에게 쇠사슬을 채우거나, 혹은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성질의 부정을 범하는 것이다.
만약에 생존의 권리가 평등이라고 하면, 노동의 권리는 평등이며, 더욱 선점하는 권리도 평등이다. 섬의 사람들이, 소유권을 이유로 해서, 그들 섬의 해안에 올라가려고 하는 난파선의 사람들을 갈고리로 쫓아버렸다고 하면 죄가 되지 않을까?
나의 것 너의 것은 더 많은 경우 관계를 표시하고 있다. 너의 것, 나의 것이란, 개인적인, 그러나 평등한 권리의 표시이고, 표현이다. 우리들의 외부 사물에 적용될 때, 그것들은 점유, 기능, 사용을 가리키고, 소유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모든 소유 속에는 기억, 상상, 힘, 미와 같은 생득의 것도 있으며, 밭, 물, 산림과 같은 획득된 것도 있다. 자연 또는 소격의 상태에서는, 가장 잘하고 가장 힘이 있는, 즉 생득의 사유의 점에 가장 유리한 사람들이, 획득적 소유를 배타적으로 취득할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것으로 생기는 침해와 싸움을 방지하기 위해서 더욱 사람들은 균형, 정의를 생각해 내어, 암묵 또는 정식의 계약을 작성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획득적 소유의 평등에 의해서 생득적 소유의 불평등을 가능한 한 수정하려고 한 것이다. 분할이 평등하지 않는 동안은, 공동분할자는 여전히 적이고, 계약은 다시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이쪽에는 소격과 불평등과 적대와 싸움과 약탈과 살육이 있고, 저쪽에는 사회와 평등과 우대와 평화와 사랑이 있다.
인간은 살기 위하여 일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인간은 생산의 욕구와 자재가 필요하다. 이 생산의 필요는 인간의 권리를 이루는 것이다.
농업은 토지점유의 근거이고, 소유의 우발적 원인이었다.
평등만이, 점유를 성화했고, 평등은 소유까지도 성화했던 것이다.
소유권을 내세우는 인류의 권위는 무효이다. 이 권리는 필연적으로 평등에 종속하고, 권위의 원리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선점은 평등을 인도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소유를 막아선다. 왜냐면, 사람은 모두 생존하는 것만으로 하여 선점할 권리가 있고, 살기 위해서는 경작하고 노동할 자재 없이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선점자의 수는 출생과 사망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각자 일손이 요구하는 자재의 할당도 선점자의 수와 같이 변하게 된다. 따라서 선점은 항상 인구에 종속한다. 최후에 점유는 법적으로 결코 불변일 수는 없지만, 사실상 소유로 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선점자는 필연적으로 점유자 또는 이용권자가 되나, 이 자격은 소유자란 자격을 배제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이 이용권자의 권리이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물건에 책임이 있다. 그는, 그 물건의 보전과 발전을 고려하면서, 일반의 효용에 응해서 그것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것을 자유로 개조하고, 축소하고, 변질케 할 수는 없다. 그는 스스로가 그 생산물을 취득하고 있는 동안은, 이용권을 불할해서 타인에게 그 물건을 이용케 할 수는 없다. 요컨대 이용권자는 사회의 감독하에 두어서 노동의 조건과 평등의 법칙에 따라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용하고 남용할 권리라고 하는 로마법의 소유권의 정의는 무효가 된다. 이것은, 폭력에서 생긴 배덕이며, 민법이 승인한 매우 기괴한 권리이다. 인간은, 그것만이 영구적으로 점유하는 사회이 손에서 이용권을 수취한다. 개인은 죽지마는 사회는 결코 죽는 일이 없다.
선점의 권리는 모든 자에 평등하다. 선점의 척도는 의사가 아니고, 공간과 수와의 변하기 쉬운 제 조건 속에 있는 까닭으로, 소유건은 성립할 수가 없다.
무산자인 우리 모두를 소유는 방출한다. 흙과 물, 공기와 불에서 우리는 멀게끔 되었다.
토지도 우리들의 생존에 필요불가결한 것이며, 따라서 공유물이며, 따라서 전유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토지의 넓이는 딴 제요소보다는 훨씬 적고, 따라서 그 이용은, 어떤 사람들만의 이익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이익과 안전을 위하여 규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권리의 평등은 욕구의 평등에 의해서 입증된다. 그런데 권리의 평등은, 만약 물이 유한한 것이라면, 점유의 평등에 의해서만이 실현될 수가 있다.
민중은 이용권의 자격으로 점유한다. 정부는 통치하고, 감독하고, 보호하고, 배분적 정의를 행사한다.
소유는 시인을 부자로도 만들고, 거지로도 만든다. 평등만이 그를 존경하고 칭찬할 줄도 알고 있다.
예술이나 과학의 종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인구가 많은 사회가 필요하다.
천재의 특질, 그의 영광의 표적은 거대한 민족의 내부에서만이 생기고, 발전할 수가 있다. 그의 출현이 늦어지는 것은, 경제적 시민적 질서에 있어서는, 최고의 지성도 부의 평등에, 그것에, 앞서서 그 대성을 다하는 평등에 종속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무언가 지성에 지불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성자체인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부분의 생산자가 감탄과 찬사와의 선물을 서로 교환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먼저, 의사를 다른 여러 가지 생산자보다 불리하게 다루지는 못하고, 평등 이하에 머물게 할 수도 없다고 말해 놓자. 그러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는 이 평등보다 위에 나설 수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의 재능은 하나의 공유재산이며, 그는 그것에 한푼도 지불하지 않았고, 영원히 그 채무자로서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생산용구의 창출이 집합력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재능과 지식도, 보편적인 지성과, 다수의 댓가들이 무수한 지능의 보다 낮은 근면한 사람들의 조력을 얻어 서서히 모은 일반적 지식과의 소산이다.
능력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의 속에서 유용한 도구를 생산해 내는데 기여했다. 따라서 그는 그 도구의 공동점유자이다. 그는 소유자는 아니다. 그의 속에는 동시에 자유로운 노동자와 축적된 사회자본과도 함께 존재한다.
예술가, 학자, 시인은, 사회가 그들에게 학문이나 예술에 전적으로 골몰할 것을 허용한 일만으로, 정당한 보수를 받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실제, 자기들을 위한 때문이 아니고, 그들을 만들어내고 다른 온갖 우발적인 일로부터 면제해 주는 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다. 사회는 필요하면 산문이나 시나 음악이나 회화나 달의 운행과 북극성의 자식 없이도 때울 수 있다. 하지만 사회는 식량과 주거없이는 단 하루도 지낼 수 없는 것이다.
사회는 분업의 원칙에 충실함에 따라, 구성원의 한 사람에게 예술과 과학의 임무를 맡기고, 그를 공동의 일에서 면제할 때, 그를 산업상의 생산에 종사시키지 않고 버려두는 일의 온갖 것에 대하여 보상하는 책임을 그에게 지우지만 다만 그것뿐이다. 전국민이 국민만이 그들의 저술가, 학자, 예술가, 관리에게, 어떠한 손에서 넘겨진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봉급을 지불하고 있다. 어떤 비율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가? 평등의 비율로서다.
노동자에게 그 생산물을 대신해서 인정되는 것은, 과연 노동의 보수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내야 할 노동에 대한 지급 및 선불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노동자는 하루의 일이 끝났을 때, 이렇게 말하면 좋으리라, 나는 어제의 비용을 지불했다. 오늘의 몫은 내일 지불할 것이다고. 그의 생활의 일순 일순에 사회는 현재계산으로 선불을 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갚지 못하고 죽어간다. 노동자는 사회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지불불능으로 죽어가는 채무자이다.
평등의 체제 아래서는, 장래의 재생산 또는 향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절약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 그럴까. 이 절약은 자본화되지 않기 때문에, 당장 목적이 없고, 이미 종국원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유란 소유자가 자기의 서명으로 표시를 붙인 물건에 대해 참취한 불로소득의 권리이다. 불로소득은 그것을 생기게 하는 물건에 따라 갖가지 명칭을 붙인다. 토지에 대해서는 소작료, 가옥 및 가구에 대해서는 임대료, 영대대부지에 대해선 지대, 금전에 대해선 이자, 교환에 대해선 이익, 벌이, 이윤 등이다.
당나귀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면 쓰러진다.
지주가 하고 있는 짓을 산업가도 하고 있다. 전자는 그 경작지를 늘리며, 근처 사람들의 토지를 박탈한다. 후자는 상품의 가격을 인하하며 제조와 판매를 독점하고, 경쟁자를 분쇄하려고 노력한다. 소유권을 만족시키려는 데는, 먼저 노동자는 자기의 필요 이상으로 생산하며, 잇달아 그의 힘 이상으로 생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유의 제도 밑에서는, 근로의 꽃은 장례식의 화환을 만드는데 만에 소용되고 있다. 일하는 노동자는 그의 묘를 파고 있다. 소작농은 불로소득권에 의해 서서히 먹혀 들어가는데 대해, 노동자는 단숨에 삼켜져 버린다.
사회의 데시마시온(고대로마에서 반란죄 등에 대해 추첨으로 10명에 1명을 처형하는 것, 일반적으로는 다수의 사람을 죽이는 것)은, 혹은 감지되지 않고 영속적 혹은 정기적 또한 돌연적인 것이다.
1세기 1천만명에 뉴턴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심리학자는 이렇게도 훌륭한 천재의 희유함을 감탄한다. 입법가는 직능의 희유밖에 안 본다. 그런데, 직능의 희유한 것은 그 직능자를 위해서의 특권을 만들지는 않는다.
희유한 천재는 각 직능이 만인의 최대의 이익이 될 수 있도록 달성되기 위한 섭리의 수단인 것이다. 재능은 자연의 선물 이상으로 사회의 창조이다. 그것은 축적된 자본이며, 그것을 받는 자는 수탁자임에 불과하다. 사회가 없고, 사회가 주는 교육과 그 강력한 원조가 없다면, 아주 뛰어난 천성도, 그것을 명예로 하는 사람들 속에서마저, 극히 범용한 능력 이하임에 그칠 것이다.
일체의 금리를 폐지하는 것은 사실상 조건의 평등과 소유의 폐지를 명령하는 것이다.
정의의 관념은 사회의 관념과 동일하며, 사회는 필연적으로 평등을 의미한다.
헤라클레스는 괴물을 쓰러뜨려, 도적을 벌하고 희랍을 구했고, 오르페우스는 천하고 거칠은 페라쥬인을 교화했지만, 둘이는 그 봉사의 대상으로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거기에 한층 숭고한 시적 창조가 있으며, 정의의 덕과의 최고 표현인 것이다. 헌신의 기쁨은 표현을 절한다.
감사는 숭배와 열광이 따른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평등이다. 선행은 압제로 퇴화하고 찬미는 노예근성으로 변질한다. 우정은 평등의 딸이다. 관대, 감사 및 우정은, 내가 공정 또는 사회적 균제라고 부르는 바의 비할 수 없는 감정의 세 가지의 다른 뉘앙스이다.
나는 공정에 의해 라틴인이 humanitas 즉 인간에게 고유한 종류의 사교성을 이해한다. 온화하고 애교있는 휴머니티는, 아무런 상처입히지 않고, 지위, 덕, 능력을 구별한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동정 및 보편적 사랑에 관해서의 분배적 정의인 것이다.
공정은 정의를 변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공정을 기초로 하는 데서, 정의에 존중을 덧붙여 그것에 의해 인간 속에 사교성의 제3단계를 형성한다. 공정인 까닭에, 우리들을 필요로 하는 약자를 돕고, 그를 우리들의 평등자임으로서 할 것, 강자에게 감사와 영예와의 정당한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의 노예로 되지않는 것, 우리들이 교환으로서마저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이웃, 우인, 대등자를 깊이 사랑할 것, 이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의무임과 동시에 기쁨인 것이다. 공정은, 이성과 정의에 의해 이상에까지 높여진 사교성이다.
사교성, 정의, 공정, 이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서로의 교섭을 추구케 하는 본능적인 능력의 3중 단계의 정확한 정의이며, 이 능력의 물질적인 발현양태는, 자연 및 노동의 생산물에 있어서의 평등이라는 정식에 의해 명백하게 된다.
정의란, 그것만으로 무게와 크기를 잴 수 있는 유형물에의 관여의 승인에 의해 나타나는 사교성인 것이다. 공정이란, 측정안되는 사항인 찬미와 존중을 곁들인 정의인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는 두 개의 가능한 상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사회속에 있거나, 그밖에 있거나이다. 사회 속에서는 각자가 달성할 수 있는 존중이라든가 존경의 형편은 별도로 치고 제반 조건은 필연적으로 평등인 것이다. 사회의 밖에서는 인간은 착취의 재료이며, 자본화된 용구이며, 누차 불편으로 무익한 동산이다.
만약에 신이 지상에 내려와 우리들과 같이 살게 되더라도, 우리들의 한 무리가 안 된다면, 우리들은 신을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다.
조건의 평등, 여기에 사회의 원리와 보편적 연대가 있다.
인간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일까? 큐비에에 의하면 그것은 반성, 혹은 자기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의해 우리들 자신의 변화를 지적으로 고찰하는 능력인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는 동물과 반대로, 본능적 행위는 반성적 행동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소유는 강자에 의한 약자의 착취이다. 공동체는 약자에 의한 강자의 착취인 것이다.
자유란 평등하다. 왜냐하면, 자유는 사회상태의 안에서만 존재하며, 평등을 빼고난 사회는 존쟇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란 아나루시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의지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다만 법칙의 권위 즉 필연성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있어서 사교성은, 반성에 의해 정의로 되고, 여러 능력의 얽힘으로써 공정하게 되고, 자유를 그 정식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거야말로 도덕의 기초로 되고, 우리들의 모든 행동의 원리이고 규준이다.
경쟁은 평등한 조건을 가지고 행해지는데 있으며, 그 보상은 모두 그 자신 안에 있다. 누구도 승리에서 손해를 입는 일은 없다.
소유는 사회의 자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