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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자비
화엄전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말씀드리자 용학스님이 반가워하셨다.
“어른스님 많이 좋아지셨죠?”
“도수치료를 하고 계셔서 저는 뵙지 못하고 정오스님만 방에 들어가서 인사하셨어요.”
“문 잠겨도 봐야지.”
하고 용학스님이 말씀하실 때, 잠깐 열려진 문틈으로 뵈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도수치료를 받으시느라 침대에 엎드려 계셨는데 감히 소리내어 인사도 할 수 없었다.
지혜의 무기와 자비의 갑옷을 입으신 불보살님들이 늘 함께 그 방에 계시리라, 큰스님 심부름으로 꺼내왔던 화엄경 이세간품을 호흡하듯 떠올렸을 뿐이다.
*
“참회합니다.” 하고 지난달에 빠진 정오스님이 용학스님께 인사를 올리셨다.
혼자서 사중의 많은 밭고랑을 매는 일이 너무 고되어서 어머니 생각을 하셨다는 정오스님에게 용학스님이 대승보살 이야기를 하셨다.
“대승보살이 엄마와 같은 마음을 가지면 붉은 피가 흰 피로 저절로 변한다고 경전에 나오죠.”
이차돈이 순교하며 목에서 흰 피가 나온 것을 언급하셨다.
‘엄마들의 피가 변해서 젖이 된 것’이라고 표현하셨다.
*
여러 스님들이 용학스님께 인사를 오셨다.
스님들은 큰스님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한결같이 “잡수는 게 견디는 것인데.” 하시면서 음식을 약으로 생각하시고 원래보다 더 많이 드셨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
용학스님은 큰스님께서 문수강당에서 법회를 진행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고심하셨다고 했다. 오랫동안 앉아 계시는 것이 힘드실 것 같다고 생각해서, 모니터를 놓고 화엄전과 문수강당을 이원화해서 강의하시는 방법도 생각해 봤는데, 집중해서 강의하셔야 하고 1시간은 넘겨야 하니 아직은 조심스럽다고 하셨다.
“지금 방에 오신 것도 일찍 오신 거예요.”
하고 정오스님이 말씀하셨다.
“의지의 한국인입니다.”
용학스님도 말씀하셨다.
“네. 의지력이 대단하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병에 동화돼버리는데.”
큰스님의 자리를 누구든 대신할 수가 없다고, 큰스님 덕분에 화엄경이 현재 많이 알려지고 붐이 일었다고 두 분 스님이 똑같이 말씀하셨다.
마침 6월 6일에 큰스님께서 유튜브로 화엄법문을 하시면서, 화엄전에 방문하신 총무원장 스님께 공식적으로 ‘화엄경을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정해주실 것을 요청했다’라는 내용의 법문을 하셨다.
처음으로 ‘총무원장님께 공식적으로 요청’하신 사항이라 하셔서, 여기 그 부분의 녹취를 기록해 두기로 한다.
총무원장스님께, 화엄경을 조계종 소의경전으로 제정하자고 공식적으로 요청합니다
-無比스님-
“오늘이 마침 지장재일입니다. 지장재일인데 범어사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을 지장재일 법사로 모셨어요. 그래서 총무원장 스님이 마침 내 방에 다녀갔습니다. 공무에 바쁜데 여기 부산 범어사까지 와서 법문을 하시니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그다음에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에 좋은 공적을 한 가지 쌓을 수 있는데, 그런 말은 안했지만, 공적을 하나 남기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뜻으로 우리 종헌 종법, 우리 조계종 하면 조계종은 종헌이 있고 종법이 있습니다. 거기에 ‘금강경과 조사어록으로써 소의경전을 삼는다’ 이런 말을 해놓았어요.
그 한마디 때문에 금강경을 그저 ‘소의경전이다, 우리 한국불교의 의지할 바 경전이다’해서 모든 사람들이 ‘금강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이렇게 힘을 주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금강경 가지고는, 제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너무 부족해요. 그래서 총무원장님의 시간이 많지도 않은데 대강 역사를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 된 지 한 300년쯤 지난 뒤에 그동안 중국에서 경전이 많이 들어와서 훌륭한 스님들이 많이 배출되고, 또 어떤 경전이 훌륭한 경전이고, 그렇지 못한 경전이다, 하는 것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그 당시 300년이 경과 된 이후에, 의상스님, 원효스님이 탄생하셨거든요. 그분들이 그 뛰어난 머리로 훌륭한 지성으로써 팔만대장경을 다 섭렵하고 나니까, 결국은 ‘화엄경 만한 것이 없더라’ 해서 천성산에서 원효스님은 천 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가르쳤고, 또 의상스님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해서 화엄10찰을 건립해서 제자들을 파견해서, 화엄10찰을 건립해서 여기 해인사다 범어사다 화엄사다 불국사다 등등 유명한 사찰을 전부 화엄경을 가르치는 사찰로 했습니다. 그런 역사가 있거든요.
그게 뜻하는 바가 ‘부처님의 경전이 많고 많지만 그래도 가장 뛰어난 경전이 화엄경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모를 땐 몰랐지만, 알았을 때는 앞으로 우리가 화엄경을 가지고 소의경전으로 삼자,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것은 너무 좁은 안목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화엄경으로 소의경전을 삼자’하는 뜻이거든요.
종헌 종법에 ‘화엄경과 내지 조사어록으로써 소의경전을 삼는다’는 그 말 한마디만 넣어도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불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그래도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한마디 때문에 화엄경을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이 되고, 인연이 될 것이다, 그런 말씀을 총무원장 스님에게 드렸어요.
한 4년간 총무원장 소임이 지나가는데 그런 것 한 가지 제대로 세워놓고 나면 큰 공덕이 될 것 같아서, 총무원장스님은 진우스님이라고 그 스님은 거슬러 올라가면 백운스님의 상좌인데 백운스님은 동산스님의 상좌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백운스님 이야기도 조금 나누고 했는데, ‘소의경전을 화엄경으로 삼는다’ 그 말 한마디만 넣는 운동을 전개하면 좋겠다, 그러면 그런 과정은 세미나도 열어야 되고 이런 저런 과정이 있다, 하는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시간이 없어서, 기차표 끊어놓은 것이 시간이 딱 정해져 있어서, 진우스님은 지금 막 떠났습니다.”(2023.06.06. 유튜브 <염화실TV> 화엄법문 중에서)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수업 들어가기 전에 책 소개를 하겠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교재 80 화엄경 네 권짜리 <華嚴經>을 출판한 민족사 사장님인 윤창화 거사님의 저서 <불교 사자성어>다.
윤창화 거사님은 그동안 불교에 유익한 책들을 상당히 많이 내 오셨는데, 여러분들께서 책날개를 보면 아시겠지만, 당신께서는 일찍이 소년에 출가를 하셔서 13년 정도 스님 생활을 하시다가 탄허스님의 손자 시봉으로 탄허스님 시봉을 하시면서 공부를 야물게 하셨다.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시고 인연 따라서 1978년도에 환속을 하시고 민족사를 설립해서 42년째에 민족사에서 불교에 큰 공헌을 하고 계신다.
그래서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 가는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도 졸업하시고, 밑에 보면 당신께서 그동안 저술활동을 하신 것들이 쭉 나와 있다.
그리고 이번에 주옥같은 <불교 사자성어>를 내셔서 이 말법 시대에 큰 불사를 하신 것을 보니까 찬탄을 금치 못하겠다.
어른스님께서 환희 발심하셔서 대중공양을 여러분들과 문수강당에서 공부하시는 신도분 여러분들께 수백 권 보시하셨다.
*
그리고 옆에 조그만 책이 한 권 있다. 이 책은 흔히 우리가 아는 <보왕삼매론>이라고 하지만 제목에 보면 <보왕삼매염불직지寶王三昧念佛直指>라는 책의 열일곱 번째 대목인가를 보면 ‘열 가지의 큰 수행하는 데 장애 되는 걸림돌’이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는 수행방법’이 스님들이나 저나 익히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이다.
그런데 그 보왕삼매론이 우리 수행자 입장에서 보면 조금 부족하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께 유인물을 한 장 나눠드렸다. 유인물은 기존에 나와 있는 보왕삼매론이다.
A4용지로 여기 한 장 나눠드렸지 않은가?
이것이 다포로도 많이 찍혀졌고, 종이로도 많이 인쇄가 되어져서 대한민국 불교계에, 발심하는 데, 또 불자의 세상 사는 데 있어서, 뜻을 알든지 모르든지 특히 실천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한 번 읽음으로써 격언과도 같은 명언으로, 수행지침서로서 큰 역할을 해왔다.
제가 볼 때 번역을 얼마나 잘하셨는지 원문보다도 번역이 더 아름답게 된 것 같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문에는 네 구절씩 되어있는 열 가지 챕터 중에 각각 세 번째 구절들이 빠져 있다.
여기 책하고 비교해 보시면 된다.
제가 일부러 제목을 달고 그 밑에 원문에 입각해서 번역을 했다. 각각 나오는 세 번째 구절들이 우리 수행자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구절인데 그것이 빠졌다.
세 번째 구절이 있어야 보고 듣고 그것을 사유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점을 다시 되짚어서 고쳐나갈 수가 있다. 그 구절들이 문으로 치면 출입을 할 때의 시건장치와 같은 것이다. 각 챕터마다 세 번째 구절이 상당히 중요하다.
기존에 나와 있는 보왕삼매론은 글은 좋은데 격언으로서는 너무 번역도 잘 됐고 훌륭한 것은 틀림이 없지만, 수행자가 곱씹어서 나의 행을 바로 잡고, 삼업을 바로 잡으려고 할 때는 조금 더 본래대로 돌아가야 될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원문을 옆에 싣고 번역을 했다.
거기 보면
“내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나니라.”
일반적으로 보왕삼매론은 그렇게만 나와 있다.
그런데 제가 정리한 책에는 몸이라고도 하지 않고 원문에 있는 그대로 ‘육신’이라고 딱 찝었다. 왜 육신을 찝느냐 하면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배워봤지만 초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 할 때 초선에만 들더라도 초선에 들면 비식(鼻識)과 설식(舌識), 맛과 향에 대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끝나버린다.
초선정에만 들어가더라도 코로 냄새 맡는 것이라든지 입으로 맛보는 것에 대해서 탐착해서 홀딱 빠지거나, 말초 신경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도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과 몸으로 촉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이것은 초선에도 여전히 남아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선에 들어가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 다 사라져 버리고 오감이 다 사라져 버리고, 육감만, 명료의식만, 제 6의식만 남아서 분별사식(分別事識)으로써 밀고 들어간다.
그때는 방귀를 뀌던지 구린내가 나든지 달콤한 냄새가 나든지 선정 삼매에서 못 느끼는 것이다. 오직 희수(喜受)와 낙수(樂受)만이 남는다고 한다.
그리고 삼선정에 가서는 또렷한 의식이 다시 사수(捨受)와 낙수(樂受)로 겸비되는 것이다.
사선정에 갔을 때는 비로소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고 해서 저번 시간에 배운 대목이 그 대목이다. 지난 시간에 자세하게 공부하는 도중에 시간에 쫓기다 보니 ‘다음시간에 하겠습니다’하고 넘어가 버렸다.
이런 대목 때문에 그렇다. 이런 것도 이렇게 보면 그냥 우리가 몸이라고 하지만 반야심경에도 첫 구절에 오온개공(五蘊皆空)했을 때 오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원효스님은 ‘식온(識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색온(色蘊)을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관찰해야 되는가’ 하는 내용을 기신론 같은 데서 자세하게 제시를 해 놓았다.
보왕삼매론이 일반적으로 격언으로 볼 때는 번역이 너무 잘되어서 아름답지만 수행의 입장에서 우리가 각관사유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육신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사념처하듯이 염신(念身)에 불구(不求), 구하지 말라, 바라지 말라, 무병(無病) 병이 없기를, 무병을 바라지 말라, 신(身)에 육신에 무병즉(無病則) 탐욕(貪欲)이 내생(乃生)이라. 탐욕이 곧바로 생기게 된다.
여기까지는 같은데 그다음에 세 번째 구절, 아주 중요한 구절이 기존에 나온 보왕삼매론에는 빠져 있다.
‘그러면 탐욕이 생기면 어떻게 되느냐?’ 그 뒤에 2차적으로 부가적인 문제가 생겨질 때 어떻게 되느냐?
‘탐욕이 생기게 되면 반드시 준법정신이 해이해져 계율을 어기고 불도에서, 정도에서 물러나게 된다.’
‘탐욕생(貪欲生)하면 필(必) 반드시 파계퇴도(破戒退道)라’ 글 그대로 해석을 해 놓았다.
제 해석은 좀 거칠다. 그러나 그것을 참고해 보시고 나중에 요청이 나오고 난 뒤에 다시 그 뒤에 두 페이지 정도 해서 열 가지의 각 챕터에 해설을 화엄경과 불교 경문을 겸수해서 보실 수 있도록, 겸비해서 보실 수 있도록 해석해 놓도록 하겠다.
제1번의 네 번째 구절은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이병고위양약이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있는 글자로 해석을 했다.
열 챕터 중에 제 6번 같은 경우는 여러분이 한 번 보시면 기존의 보왕삼매경론은 이렇게 되어 있다.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의리를 상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 하셨느니라.”
해놓았는데 보왕삼매염불직지 원문에는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 이런 말씀이 없다. 그러면 원문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이폐교(以弊交)로 위자량(爲資糧)이라’
폐교라고 하는 건 나한테 민폐끼치는 친구, 나한테 패악을 끼치는 사람으로써 위자량이라, 내 밑천을 삼아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이런 말도 있다.
그러니까 원문을 볼 것 같으면 번역은 그럴싸하게 잘 해 놓으셨는데 ‘순결로’ 이런 말은 전혀 없다.
거기도 보면 ‘친구를 사귀면서 나에게 이익이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이 구절하고 마지막에 “‘손해를 당하는 사귐으로 밑천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깨달은 사람, 아만이 많이 줄어든 사람이 그걸 실천할 수가 있다.
아만이 줄어들지 못하고 분별망상으로써 전도몽상이 많은 사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친구를 사귀면 내가 이롭고자 하고 도의를 잃어버리게 되고 도의가 이지러져서 반드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춘다.
그러니까 남들이, 예를들어서 도반들이 와서 ‘누가 어떻고 누가 어떻고’ 남 허물을 많이 보는 사람이 왔다면 ‘아 이 사람은 의리가 없겠구나’ 이렇게 보면 된다.
이 작은 책 하나 가지고 사람을 판단할 수가 있다.
남 허물을 잡는 사람은 ‘아이고 싸가지 없구나’ 싸가지, 의리와 체면과 양심과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은 이 네 가지가 없으면 싸가지가 없다고 한다.
딱 보고 ‘남 허물을 많이 잡는 사람들은 의리가 없겠구나’ 그러니까 ‘이익만 있으면 말 잘 듣겠구나’ 그런 사람들은 돈 몇 푼 주면 말 잘 듣는다. 그런 것들도 이 작은 책을 보면서 알 수가 있다.
제2번도 보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의 어려움으로써 해탈을 삼아라.’” 이것은 깨달은 사람의 어느 정도 정신 수행자로서의 얘기고, 그 수행자의 길에서 탈선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세상살이의 어려움이 없다 보니, 등 따시고 배부르니까 교만과 사치가 생겨진다.
조금 안쪽으로 안에서 뽐내는 마음, 안에서 사치스러운 것이 교만이다. 그것이 바깥으로 뻗어져 나오면, 바깥의 교만을 사치라고 한다.
안쪽의 교만을 교만이라고 하고, 그 이전에는 아만이 있을 것이다.
아만과 교만은 조금 더 차이가 있다.
교만이 구체적으로 떡잎부터 자라난 그 식물이라 한다면 아만은 그 떡잎을 키워 올리는 싹이다.
잡초나 독초는 그 싹부터 알면 뽑아버려야 한다. 싹을 싹 뽑아버려야 뒤에 그 독초같은 가지가 더 이상 안 번진다.
누군가에게 교만과 사치가 생기면 반드시 일체를 속이고 억압하게 된다.
지금 <어렵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는 책 6페이지를 보고 있다.
잠깐만 보고 바로 본문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책을 소개한다고 이렇게 하고 있다.
교사(驕奢)면 교만과 사치가 생기게 되면 기(起)하면 필(必) 반드시 교만하다.
사치스러운 사람들을 딱 보니까, 우쭐대는 사람들,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딱 보니까 어떻냐 하면, 대부분 자기의 족보를 속인다든지 학력을 속인다든지 재력을 속인다든지 한다. 또 스님들은 해당이 안 되겠지만 분칠을 하다가 안돼서, 화장을 하다가 분장을 하다가 변장까지 막 해가지고 성형수술까지 해서 남과 일체를 속이고 머리에다가 제초제를 뿌리고 막 그렇게 한다.
일체를 속이고 남에게 갑질을 한다.
자세히 보라. 우리가 일상에서도 삐까뻔쩍하고 이런 사람들이 있잖은가. 인간이 좀 덜 된 사람들이다.
관익대자(官益大者)는 심익소(心益小)라고 벼슬자리가 높을수록 마음을 낮춰야 되는데 그게 우리는 잘 안 된다.
절간에 왔든지 바깥에 있든지 상관이 없다.
교만과 사치가 많은 사람을 보면 ‘아 이 사람은 풀어 놓으면 완장 채워주는 순간부터 우쭐되는 마음이 많으니까 그때부터 남을 속이고 남에게 갑질하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세상의 어려움으로써 해탈을 삼으라’하고 마무리가 된다.
‘교만과 사치가 생기게 되면 반드시 일체를 속이고 억압하게 되나니’ 이 세 번째 구절이 우리가 수행하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아쉬워서 이 책에 넣어놓았다. 없는 얘기를 끼워넣은 것이 아니고 있는 원문을 뺄 수가 없어서 제가 이 책을 만들면서 고스란히 붙인 것이다.
이번에 한 4천 권 정도 찍었는데 책이 상당히 부족하다. 다시 더 찍어서 배포하도록 하겠다.
뒤에는 그렇게 해 놨다. 이 책은 스님들께서 각자 계신 절이름으로 찍으셔서 배포하셔도 상관없다.
‘임의대로 복제 가능합니다. 널리 배포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해놓았다.
이 앞의 제 이름을 싹 다 지워도 된다.
번역을 어른스님께 감수 받아서 지금 서너 군데를 약간 고칠까 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어른스님께서 좋은 날 감수를 철저하게 하실 것이고, 스님들께서도 계속 두고두고 보시면서 ‘요렇게 고쳤으면 좋겠다 저렇게 고쳤으면 좋겠다’ 이렇게 질정을 해 주시면 참고해서 바로 잡겠다.
우리 윗대 세대는 이렇게 아름답게 번역을 해 놓고 다 돌아가셨고, 우리 세대는 또 이렇게 번역을 해서 우리가 죽고 나면 또 후대들은 이것을 가지고 지내고, 또 그 밑에 후대들은 이것을 다시 더 아름답게 만들어서 이 법이 계속해서 전해 내려갔으면 좋겠다.
<보왕삼매염불직지(寶王三昧念佛直指)>라고 하는 이 책은 명나라 삼대 선승이라 불려지는 지욱(智旭)스님께서 서문을 쓰실 정도로 굉장히 아름다운 책이고, 우리 윗대 어른 스님들은 상당히 의지했던 책인 것 같다.
그래서 제가 <보왕삼매염불직지> 라는 그 출처를 밝히고 <어렵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고 일부러 부제를 달았다.
여기 나온 대로 살 수가 없지 않은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살겠나? 이대로는 하나도 실천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울며 불며 가야 될 길이기 때문에 제목을 그렇게 해놓았다. <어렵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고 해놓았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一
如來出現品 第三十七之二
三. 普賢菩薩의 說法
3. 如來의 語業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한 대목이 구업(口業)부분이다.
여래출현 중에 부처님의 신업(身業)은 무엇이고, 부처님의 말씀의 업은 무엇이냐, 이런 와중에 있고 262페이지까지 했었다. 그런데 제가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지난 시간에 공부한 분량의 7분 정도가 방송 핀이 나갔다고 한다. 포커스가 나갔기 때문에 처음부터 도돌이표로 돌아가서 다시 하겠다.
그래서 오늘은 261페이지(민족사刊 제3권)부터 공부를 하는데, 부처님의 신업 그다음에 말씀하는 구업, 의업의 차례대로 나온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다시피 신업이 가장 거칠고 그다음으로 구업이 조금 거칠고 의업이 굉장히 미세하다.
안쪽에서 탐진치가 제일 먼저 일어나고, 탐진치가 제일 먼저 일어나 탐심이 일어나면 말부터 한다. 말로 하다가 ‘말로 할 때 말 들어라’ 하면서 말을 안 들으면 그다음에는 주먹질을 한다. ‘좋은 말 할 때 들어라’하면서 콱 쥐어 박는다. 그런식으로 신업이 제일 뒤에 오게 된다.
불교는 항상 거친 것부터 ‘거칠고, 작게 거칠고, 미세한’ 순서대로 나온다. 지수화풍도 그랬다.
지(地)가 고체니까 가장 거칠고, 수(水)는 액체니까 그다음으로 거칠고 부드럽고, 불[火]은 모양은 있는데 만질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풍(風)은 어떤가? 모양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만 있다. 이렇듯이 지수화풍도 순서대로 되어 있다.
능엄경에는 풍(風)다음에 공(空)이라고 한다.
바람보다는 더 부드러운 것이 공이고 공보다는 더 부드러운게 견(見)이고 견보다 더 부드러운 것이 식(識)이라고 나와있다.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 식보다 더 부드러운 진공상태를 우리는 심(心)이라고 한다.
자성청정(自性淸淨)이 견성성불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지수화풍 사대(四大)에 매여 있고, 오온이 공하지도 않고, 식도 공하지 않은데, 공견식(空見識) 유식이라고 하는 식도 허망하고 공하지 않은데, 진짜로 공한 심(心)을 볼 수는 없다.
심(心)은 불견심(不見心)이라고 했다. 견자심성(見自心性)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몸을 나투든지, 말씀을 나투시든지, 생각을 펼치든지 상관없이 모든 부처님의 본래 업은 허공과 같다. 부처님의 신업이나 구업이나 의업은 허공과 같다.
그런데 허공이 허공으로서 자리하지 않고 거기에 펼쳐지는 세계는, 허공 속에 바람이 지나가든지, 구름이 지나가든지, 별이 돋아나든지, 해가 돋아나든지, 만상이 천강유수천강월처럼 다양하게 나타난다.
총체적으로는 법신이다 라고 하고, 별개적으로는 의생신(意生身)이다 지신이다 색신이다 화신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여래의 십상으로 이야기한다.
어쨌든지 그 수행하는 순서대로 보면 신업이 먼저 나와야 되고 다음으로 구업이 나와야 되고 그다음에 의업이 마지막으로 나와야 된다.
(1) 如來의 語業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音聲고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知如來音聲이 徧至니 普徧無量諸音聲故며 應知如來音聲이 隨其心樂하야 皆令歡喜니說法明了故며 應知如來音聲이隨其信解하야 皆令歡喜니心得淸凉故며 應知如來音聲이化不失時니 所應聞者가無不聞故며 應知如來音聲이無生滅이니 如呼響故며 應知如來音聲이無主니 修習一切業所起故며 應知如來音聲이 甚深이니 難可度量故며 應知如來音聲이 無邪曲이니 法界所生故며 應知如來音聲이 無斷絶이니 普入法界故며 應知如來音聲이 無變易이니 至於究竟故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의 음성을 알아야 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여래의 음성이 두루 이르는 줄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한량없는 모든 음성에 두루 하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그들의 좋아하는 마음을 따라 다 환희케 함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법문 연설하기를 분명히 하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그들의 믿고 이해함을 따라 다 환희케 함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마음이 서늘하여지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교화하는 때를 놓치지 않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들을 만한 이는 듣지 못함이 없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나고 없어짐이 없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메아리와 같은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주체가 없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일체 업(業)을 닦아서 일어나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매우 깊은 줄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헤아리기 어려운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삿되고 굽음이 없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법계로부터 나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끊어짐이 없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법계에 두루 들어가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음성이 변함이 없음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끝까지 이르는 연고이니라.”
*
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운하지여래응정등각음성(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音聲)고: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의 음성을 알아야 하느냐.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여래의 음성은 무성(無性)이다. 여래의 음성은 무성이지만 중생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각양각색으로 들린다. 일음연창(一音演暢)이나 각양각색으로 알아듣는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은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이
변지(徧至)니 : 충만하다. 불자야 여래음성은 두루 이르는 줄 알아야 하나니
보변무량제음성고(普徧無量諸音聲故)며 : 한량없는 음성에 두루 하는 연고이니라.
부처님의 음성은 본래 없으나,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다. 왜 그러냐?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라.
여기서 우리가 무조건 물고 들어가야 하는 기초는 그것이다.
*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응지하라. 여래의 음성이
수기심락(隨其心樂)하야 : 그들이 좋아하는 마음을 따라서
개령환희(皆令歡喜)니 : 모두 환희하게 함을 알아야 하나니
설법명료고(說法明了故)며 : 법문 연설하기를, 설법하기를 분명히 하는 연고이니라.
*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응지하라, 여래의 음성이
수기신해(隨其信解)하야 : 그들의 믿고 이해한 그 신해를 따라서
개령환희(皆令歡喜)니 : 모두 다 환희하게 하니
심득청량고(心得淸凉故)며 : 마음이 청량해지는 까닭이니라
*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이
화불실시(化不失時)니 : 교화하는 때를 놓치지 않음을 알아야 하나니
소응문자(所應聞者)가 : 들을만한 사람들이
무불문고(無不聞故)며 : 듣지 못함이 없는 연고이니라. 소응문자가 무불문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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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이
무생멸(無生滅)이니 : 나고 없어짐이 없음을 알아야 하나니, 여래의 음성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무생멸(無生滅), 생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멸이 아닌 것을 진공(眞空)이라고 하고 인연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묘유(妙有)라고 한다. 그것을 알아야 하나니
여호향고(如呼響故)며 : 메아리와 같은 연고이니라.
*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이
무주(無主)니 : 주재가 없음을 알아야 하나니. 딱 깨놓고 이야기 해서 여래의 음성은 무성(無性)이다. 무상(無相)이다.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나 보변시방(普徧十方)이다. 꽉 찼다, 이 말이다. 왜 그런가? 모든 중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렇다, 이런 뜻이다. 여래의 음성이 주재가 없음을, 주관하는 것이 없는 것을 알아야 하니
수습일체업소기고(修習一切業所起故)며 : 일체업을 닦아서 일어나는 연고이니라.
*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이
심심(甚深)이니 :매우 깊은 줄 알아야 하나니
난가탁량고(難可度量故)며 : 헤아리기 어려운 연고이니라.
탁량 헤아릴 수가 없다. 난가탁량이니라.
이것을 의상스님께서는 뭐라고 해 놓았는가?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간다, 불수자성수연성은 묘유(妙有)가 된다.
진성심심극미묘는 진공(眞空)이다.
*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이
무사곡(無邪曲)이니 : 삿되고 왜곡된 것이 없음, 사곡이 없음을 알아야 하나니
법계소생고(法界所生故)며 : 법계로부터 나는 연고이니라, 진리라는 말씀, 정도라는 말씀이다.
첨곡심(諂曲心)은 부실(不實)이라, 사곡(邪曲)은 실다움, 진실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법계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서, 일법계는 일심법계라서 전부 여래의 본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정도의 길이라고 봐야 된다.
*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마땅히 알아라, 여래의 음성이
무단절(無斷絶)이니 : 무단절이니라.
이런 대목을 기신론 같은 데는 이렇게 풀어놓았다.
‘이 마음이라고 하는 진심은 끊어질 날이 없고, 무명은 끊어질 날이 있다. 번뇌의 근본은 끊어지겠지만 본래 마음은 영원히 상속되어서 끊어지지 않는다. 왜 상속되는가? 허공이 본래 없기 때문에 영원하다. 허공이 본래 없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다. 있는 것들은 전부 생멸을 따라간다.’
여기 무단절이라고 하는 것, 여래의 음성이 무단절이라고 하는 이 대목들을 저 뒤에 가서 또 자세하게 해석을 한다.
보입법계고(普入法界故)며 : 끊어짐이 없음을 알아야 하나니 법계에 두루 들어가는 연고이니라.
*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이
무변역(無變易)이니 : 변함이 없음을 알아야 하나니
지어구경고(至於究竟故)니라 : 완벽함에 이르는 까닭이니라. 구경에 이르는 연고이니라.
그리고 나서, 여래어업의 10종 비유,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십종 비유로서 하나하나 설명을 해나간다.
(2) 如來語業의 十種譬喩
가. 世界의 壞滅時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知如來音聲이 非量非無量이며 非主非無主며 非示非無示니 何以故오 佛子야 譬如世界가 將欲壞時에 無主無作호대 法爾而出四種音聲하나니 其四者는 何오 一曰汝等은 當知하라 初禪安樂이 離諸欲惡하야 超過欲界라하면 衆生이 聞已에 自然而得成就初禪하야 捨欲界身하고 生於梵天하며 二曰汝等은 當知하라 二禪安樂이 無覺無觀하야 超於梵天이라하면 衆生이 聞已에 自然而得成就二禪하야 捨梵天身하고 生光音天하며 三曰汝等은 當知하라 三禪安樂이 無有過失하야 超光音天이라하면 衆生이 聞已에 自然而得成就三禪하야 捨光音身하고 生徧淨天하며 四曰汝等은 當知하라 四禪寂靜이 超徧淨天이라하면 衆生이 聞已에 自然而得成就四禪하야 捨徧淨身하고 生廣果天이니 是爲四니라
佛子야 此諸音聲이 無主無作이로대 但從衆生의 諸善業力之所出生인달하야 佛子야 如來音聲도 亦復如是하야 無主無作하며 無有分別하며 非入非出이로대 但從如來功德法力하야 出於四種廣大音聲하나니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여래의 음성이 한량이 있지도 않고 한량이 없지도 않으며, 주재가 있지도 않고 주재가 없지도 않으며,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보여 줌이 없음도 아님을 응당 알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불자여, 비유컨대 세계가 무너지려 할 적에 주재함도 없고 지음도 없지마는 법이 으레 네 가지 음성을 내느니라.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초선(初禪)은 안락하여 모든 나쁜 욕심을 여의고 욕심세계를 초월하였다.’라고 하거든, 중생들이 듣고는 자연히 초선을 성취하여 욕심세계의 몸을 버리고 범천(梵天)에 나는 것이니라.
둘은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이선(二禪)은 안락하여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어서 범천을 초월하였다.’라고 하거든, 중생들이 듣고는 자연히 2선을 성취하여 범천의 몸을 버리고 광음천(光音天)에 나는 것이니라.
셋은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삼선(三禪)은 안락하여 허물이 없어 광음천을 초월하였다.’라고 하거든, 중생들이 듣고는 자연히 삼선을 성취하여 광음천의 몸을 버리고 변정천(徧淨天)에 나는 것이니라.
넷은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사선(四禪)은 고요하여 변정천을 초월하였다.’라고 하거든, 중생들이 듣고는 자연히 사선을 성취하여 변정천의 몸을 버리고 광과천(廣果天)에 나는 것이니, 이것이 넷이니라.
불자여, 이 모든 음성들은 주재함도 없고 짓는 이도 없건마는 다만 중생들의 모든 착한 업의 힘으로 나는 것이니라.
불자여, 여래의 음성도 그와 같아서 주재함도 없고 짓는 이도 없고 분별도 없고 들어감도 아니고 나옴도 아니지마는 다만 여래의 공덕과 법의 힘으로부터 네 가지 광대한 음성을 내느니라.”
*
여래어업(如來語業)의 십종비유(十種譬喩)
*
십종비유로써 하나하나 설명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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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世界)의 괴멸시(壞滅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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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지여래음성(應知如來音聲)이 : 응당히 알아야 한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여래의 음성은
비량비무량(非量非無量)이며 : 양이 한정된 것도 아니며 한량이 없는 것도 아니며 여래의 음성은
비주비무주(非主非無主)며 : 주재가 있지도 않고 주재가 없지도 않나니
비시비무시(非示非無示)니 : 여래 음성은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보여짐이 없음도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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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 무슨 까닭인가?
불자(佛子)야 :불자야
비여세계(譬如世界)가 :비유컨대 세계가
장욕괴시(將欲壞時)에 : 무너지려 할 적에
무주무작(無主無作)호대 : 주재함도 없고 지음도 없지만,
무주무작은 줄을 쭉쭉 그어놓는 것이 좋다.
이것이 사실은 핵심이다.
무주무작(無主無作)이라.
주재하는 것도 없고 짓는 것도 없으니까 무생이라고 하고 그것을 무주라고 하고 응무소주라고 하고 무본이라고 한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무본이라.
유마경 관중생품에 보면 ‘무주즉무본(無住則無本)’이라고 나온다.
응무소주(應無所住)의 무주(無住)이기 때문에 무본(無本)이다, 근본이 없다 무생은 무본이다.
무생이 무엇인가?
진공을 불생이다 무생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열반경에는 그렇게 해놓았다.
무생이니까 무멸이다. 멸하는 것이 없으니까 무진(無盡)이다. 다함이 없으니까 무량(無量)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설명을 해 놓았다.
그래서 무주무작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본래 없다’ 이런 말씀이다.
비여세계(譬如世界)가 장욕괴시(將欲壞時)에 무너지는 바도 없고 이루어지는 바도 없고 업을 따라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뜬구름이 하나 일어났다가 그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똑같다, 이런 말씀이다.
뜬구름이 아무리 모양을 지어봤자 그것은 모양도 아니다, 라는 말이다.
꿈속에서 빨간 거를 봤든지 파란 거를 봤든지 꿈을 꾼 놈도 없고, 꿈을 꾼 놈도 허망하고, 꿈에 꾸어진 대상도 허망하더라, 무주무작이라 지음도 없지만
법이이출사종음성(法爾而出四種音聲)하나니 : 으레 네 가지 음성을 낸다. 네 가지 음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생멸해서 각양각색의 근기가 있다, 이런 말씀이다.
*
기사자(其四者)는 : 무엇이
하(何)오 : 넷인가.
일왈여등(一曰汝等)은 : 하나는
당지(當知)하라 : 마땅히 알아라
초선안락(初禪安樂)이 : 초선은 안락해서
이제욕악(離諸欲惡)하야 : 나쁜 욕심을 여의고 욕심세계를
초과욕계(超過欲界)라하면 : 초월하였다. 이제욕악 같은 대목을 가지고 구사론 같은 데서는 사선정으로써 잘 정리해 놓았다.
초선정은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이생(離生) 생을 떠난 희락지(喜樂地)라 생이라고 하는 것 욕계의 세계를 청산했다. 탐진치의 세계를 청산하는 것을 이생희락지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사선정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인도 수행에 있어서, 종교 자체에서 아주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매김 해 놓았다.
특히 부처님께서는 번뇌를 끊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선이다,라고 하셨다.
그 뒤로 각 처소와 시대에 따라서 참선의 방법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간화선도 있고 묵조선도 있고 비파사나도 있고 사마타 수행도 있고 다양하게 변해 오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오온이 개공한 것으로부터 계속 들어가면 기신론 같은 데서는 오정심관(五停心觀)마저도 부정해 버린다. 부정관(不淨觀) 자비관(慈悲觀) 인연관(因緣觀) 이런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수식관(數息觀) 이런 것들도 기신론 같은 데서는 아예 ‘다 필요없다’고 할 정도로 바로 무심(無心)으로 찔러 들어가는 것을 가르쳐 준다.
또 다른 데는 또 다른 데 대로 하고, 각자 자기 맞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초선은 안락하여 나쁜 욕심을 여읜다, 이 말은 욕계를 여의고 색계로 넘어왔다는 말씀이다.
색계로 넘어왔는데 욕심을 여의고 나면 첫째로 오는 현상이 비식과 설식 냄새와 맛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끄달리고 찡그리지 않는다, 무심해지는 것 같다.
그 다음에
중생(衆生)이 : 중생들이
문이(聞已)에 : 그런 것을 듣고는
자연이득성취초선(自然而得成就初禪)하야 : 자연히 초선을 성취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중생이 듣고 따라가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성취하는데, 대부분은 악독해서 안 따라간다.
사욕계신(捨欲界身)하고 : 욕계의 몸을 버리고
생어범천(生於梵天)하며 : 생어범천이라 드디어 색계에 태어난다
*
이왈여등(二曰汝等)은 : 두 번째는 무엇이냐 여등은
당지(當知)하라 : 마땅히 알아라.
이선안락(二禪安樂)이 : 두 번째는 2선에 오면
무각무관(無覺無觀)하야 :무각무관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흔히 뭐라고 하는가?
초어범천(超於梵天)이라하면 :초선에는 각관을 유식의 각관분별이라고 하지 않는가.
초선에는 각관(覺觀)이 있지만 여기서는 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은, 2선에 오면 무안이비설신(無眼耳鼻舌身)이 되어버리고 오직 의식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각관이다.
각관을 하려면 이렇게 각을 하고 보고, 관찰을 하려고 하면 눈을 따라가든지, 듣고 큰소리다 작은 소리다 판단하는 귀를 따라가야 될 것이 아닌가? 맛을 보고 짜다 싱겁다 달다 쓰다를 알려고 하면 각관을 의지해야 되잖은가? 그것은 초선의 얘기다.
2선에 오면 삼매가 깊어져서 내가 짠지 단지, 밤인지 낮인지를 모른다. 선요에 보면 고봉스님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해서 해가 떴는지 빠졌는지도 모르고 몰입해서 삼매 그 일귀하처(一歸何處)로 들어가지 않는가.
그런 식으로 여기도 무각무관이라고 하는 것이 명료의식으로 살피는 단계는 이미 다 지난 단계를 말한다.
자동차 운전면허장에 가서 코스대로 꺾는 것은 다 끝났고 눈 감고도 자동차를 몰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말이다. 2선쯤 오면 무각무관이라.
이때는 오직 제 6구멍 중에 다섯 구멍은 다 막혔다. 눈코입귀 안이비설신은 다 막혔고 의식 하나만 딱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게 구사론에 나온다.
오직 의식 활동만 딱 남아서 기쁘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 요런 것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안락이다.
여기 책에 이정도로 써놨으면 ‘참선을 했으니까 전부 다 알아들을 정도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그런 깊은 수행을 안 한다. 그러니까 입에 거품을 물고 설명을 해도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아시는 분은 들으면 같잖고 그렇다.
어떤 선방스님이 남의 집에 객으로 가셨다. 마침 눈이 많이 와서 다른 데는 가지도 못하고, 옛날에는 산길이 막히면 아무데도 못가니까, 주지스님이 열반경 강의를 하신다고 하니 ‘강사스님 법문하니까 강의나 들어볼까’ 하고 뒤에 주욱 앉아있었다는 것이다.
열반경에는 불성에 대해서 많이 나오지 않는가. 주지스님이 한참 설명하는 것을 수좌가 들어보니 기도 안차서 웃어버렸다.
주지스님도 눈치가 빨라서 강의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수좌스님에게 가서 물었다.
“스님 제 강의 중에 뭐 좀 잘못된 게 있습니까?”
옛날 분들은 점잖으니까 수좌스님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제가 뭐 압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니 내가 며칠 동안 지켜봤는데 스님같이 점잖은 분이 그렇게 헛웃음 하실 분도 아니고, 스님이 일러 주시면 제가 따라 하겠습니다. 스님 말씀해 주십시오.”
주지스님이 연세도 많은데 너무 진지하게 그렇게 물으니 수좌스님이 대답했다.
“아이고 제가 좀 외람됩니다만 그러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불성을 모르고 불성을 강의를 하시는 거 같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들으면서 뜨끔했다. 무엇에 푹 찔리는 것 같다. 불성을 모르면서 화엄경이라고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좀 든다.
그래 주지스님이 당장에 모인 대중을 흩어버리고 당신은 그 뒤로 잠적을 하셨다. 열심히 수행을 하셨다.
*
중생(衆生)이 :중생이
문이(聞已)에 :그런 말을 듣고는
자연이득성취이선(自然而得成就二禪)하야 : 자연히 2선정을 성취하여
사범천신(捨梵天身)하고 : 사범천신하고
생광음천(生光音天)하며 : 생광음천하며 초선을 버리고 2선 광음천, 음성이 빛나는 쪽으로 태어난다. 광음천 다음에는 변정천이다.
*
삼왈여등(三曰汝等)은 : 셋은
당지(當知)하라 :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삼선안락(三禪安樂)이 : 3선에는 편안한 것이 아무런
무유과실(無有過失)하야 : 허물이 없어
초광음천(超光音天)이라하면 : 제2선의 광음천을 초월한다.
여기 오면 오직 의식이 명료해서 조금 기쁘지만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라, 색계의 기쁜 묘락, 아주 즐거운 묘락마저도 놓아버린다.
3선정에 오면 그 정도다, 라고 이야기한다. 의식만 남아 있으니 불고락수(不苦樂受)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 사수(捨受)는 끝까지 따라다닌다.
2선부터 2선 3선 4선까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 무심한 것은 4선까지 따라온다.
3선은 뭐라고 하는가?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라.
2선은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초선은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옛날에는 그와 같은 법도를 경전에 자세히 써 놓았다.
흔히 욕계는 정신이 산란하다고 한다. 욕계는 정신이 산란하다고 해서 흩어질 산(散)자를 쓰고, 산란독두의식(散亂獨頭意識)이 많다고 한다.
색계는 정중독두의식(定中獨頭意識)이 또렷하다. 정중의식(定中意識)이 치밀하다.
욕계에서는 삼매를 닦아봤자 욕심이 드글드글해서 정신이 산란스럽고, 색계로 초선 2선 3선 4선으로 들어왔을 때는 반반이다. 정(定) 사마타도 반이고, 비파사나도 반이다, 정혜균등(定慧均等)이다.
무색계와 색계를 나눴을 때, 색계는 정혜가 균등하다 하고 무색계는 뭐라 하는가? 정이 많고 혜가 적다 이렇게 말한다. 정다혜소(定多慧少)다.
이런 것은 제가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옛부터 내려오는,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경전에 있는 말씀들이다. 치밀하게 적어놓으셨다.
사선(四禪) 팔정(八定)을 다 넘어가야, 부차적으로 그것도 다 넘어가야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구경열반한다고 하니까 굉장히 어려운 길이다.
그래서 반드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염불도, 바라밀행도 다 좋지만, 참선을 하지 않으면 업장소멸은 결코 마지막까지 소진되지 않는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여실히 보여줬다.
중생(衆生)이 :중생들이
문이(聞已)에 : 듣고는
자연이득성취삼선(自然而得成就三禪)하야 : 자연히 3선정을 성취하여
사광음신(捨光音身)하고 :광음천의 몸을 버리고
생변정천(生徧淨天)하며 : 변정천(徧淨天)에 나는 것이다.
*
사왈여등(四曰汝等)은 : 다음으로 4선정은
당지(當知)하라 :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라.
사선적정(四禪寂靜)이 : 네 번째 선정이 아주 적정해서 네 번째 선정에 가면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 하지 않는가.
괴롭고 즐겁고 이런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거기서는 사수(捨受)만이 오로지 남아서 의식하고 더불어서 상응한다 이렇게 나온다.
그래서 호흡도 끊어지고 앞에 삼재팔난도 끊어지고 여기서 호흡도 끊어질 정도가 된다고 한다. 사선은 고요해서
초변정천(超徧淨天)이라하면 : 변정천을 초월하였다 하거늘
중생(衆生)이 :중생들이
문이(聞已)에 : 듣고는
자연이득성취사선(自然而得成就四禪)하야 :자연히 사선정을 성취하여
사변정신(捨徧淨身)하고 : 변정천의 몸을 버리고
생광과천(生廣果天)이니 : 광과천에 나는 것이니
시위사(是爲四)니라 : 이것이 네 가지이니라.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차제음성(此諸音聲)이 : 이 모든 음성들은
무주무작(無主無作)이로대 : 무주무작이로되, 음성은 본래 주인도 없고 짓는 바도 없지만
단종중생(但從衆生)의 : 다만 중생의,
무슨 꿈을 꿔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어서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 사달이 항상 벌어진다. 그런 것도 경전에 자세히 나온다.
이런 꿈을 꿔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꿔서 그 꿈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결국은 사달이 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그러니까
제선업력지소출생(諸善業力之所出生)인달하야 : 모든 중생의 모든 선업력으로부터 생긴다. 다만 중생들의 착한 업으로부터 나는 것이다.
부처님의 음성은 주재함도 없고 본래 없지만, 부처님의 음성이 본래 없다고 처음에 말씀을 드렸다.
부처님의 음성은 무성이나 무본이다.
그러나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라, 중생을 따라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중생이 네모나게 부르면 네모난 대로 나타나고, 아미타불이 오는 것도 아니고 아미타불이 가시는 것도 아닌데 아미타불을 열심히 염불해서 백 분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사람은 백 분 정도의 삼매, 천불이 출현하신다면 천불 정도의 힘이 있다고 화엄경 같은 데서는 이야기하고 소초(疏鈔)에도 구체적으로 그렇게 써 놓았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래음성(如來音聲)도 : 여래의 음성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또 이와 같아서
무주무작(無主無作)하며 : 무주무작하며
부처님의 음성도 주재하는 사람도 없고 무작이라. 짓는 사람도 없다. 자연이출이다.
무유분별(無有分別)하며 : 무유분별이라. 분별도 없고
비입비출(非入非出)이로대 : 들어감도 없고 나감도 없지만
단종여래공덕법력(但從如來功德法力)하야 : 다만 여래의 공덕 법력을 따라서 부처님의 공덕과 법의 힘으로부터
출어사종광대음성(出於四種廣大音聲)하나니 : 나온다. 음성을 낸다. 네 가지의 광대한 음성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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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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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_()()()_
慧明華보살님고맙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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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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