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수도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제를 다룰 자격이 없는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되어 죄송합니다. 오늘 제 발표에는 여러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수도 생활을 하루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가 수도회 문제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문제를 알지도 못하는데, 해결 방안을 말할 수 있을까요? 제 개인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다른 학문도 그럴지 모르지만, 신학에서는 신학하는 사람 개인의 죄와 영성이 신학 연구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죄도 많고 흠도 많고 지혜도 용기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제가 겸손하게 말할까요? 정직하게 말할까요? 정직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수도회의 문제를 찾는 것보다 수도자를 격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도회가 닥친 문제가 많다 하여도, 수도자로 사는 의미와 매력보다 훨씬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도회에는 걱정이나 문제는 적고 감동할 것은 많습니다.
수도회마다 역사도 사정도 다르기에, 수도자 모두에게 중요하고 공통인 주제를 다루고 싶습니다. 그래서 “수도자 영성은 예수 영성”이라는 작은 주제를 걸었습니다. 왜 이 주제를 택했을까요?
오늘처럼 교회 안팎에서 변화가 심하고 위기가 많은 시대에서 교리만으로는 수도자들이 세상에 적절하게 대응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민주화 활동에 참여한 수도자들의 아픔과 한계를 치유할 것은 결국 영성입니다. 영성이 충실한 사람이 결국 끝까지 잘 버틸 것입니다.
남미에서는 이러한 영성에 대한 그리움이 진즉 있었습니다. ‘해방의 영성’(레오나르도 보프), ‘정의를 위한 행동 영성’(에야쿠리아), ‘정치 영성’(소브리노)등 말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영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피정도 자주 하고 영성 강좌도 많은 우리나라에 지금 어떤 영성이 있나요? 아무나 영성을 즐겨 언급하지만, 한국교회에 영성이 있기는 있는지, 있다면 어떤 영성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예수의 영성 아닐까요? 영성의 시작도 끝도 예수 아닐까요? 우리가 바라는 영성은 예수의 영성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고 해서 영성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영성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을까요? 영성이 형편없는 사람도 영성이란 단어를 즐겨 씁니다.
여기서 고백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영성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게 영성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성이란 단어를 쓰는 것도, 듣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성이란 단어는 현실과 관계없는, 오직 하느님과 나 자신의 관계를 뜻하는,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성당이나 수도원 등 특별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실천과 관계없는 묵상 차원의 것으로 오해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성이란 단어가 마치 만병 통치약처럼 오해되기도 하고, 신앙을 평가하는 제1 기준으로 과장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영성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죽음 이후 문제나 죽음 자체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죽음 이전의 삶을 주로 다룹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다루는 종교가 아니라 삶을 다루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이미 죽음으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은 죽음 이전에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입니다. 순교가 갑작스런 죽음이라면 가난은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이요, 천천히 진행되는 순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인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신학이나 종교를 어디다 쓴단 말입니까.
예수의 상대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예수의 말씀과 행동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당되었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오직 가난한 사람에게만 전해졌다고 독일 성서학자 예레미아스는 말할 정도입니다.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공헌은 가난, 가난한 사람을 그리스도교의 핵심 주제로 복권시킨데 있습니다. 가난 문제는 신학에서 여러 문제중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성서에 영성이란 단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을 평가하는 제1 기준은 영성이 아니라 예수 따르기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처음 하신 말씀, 그리고 마지막에 하신 말씀은 ‘나를 따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성이란 단어보다 예수 따르기란 단어를 더 좋아합니다. ‘누가 영성이 있네 없네’ 라는 표현보다 ‘누구는 예수를 제대로 따르네 엉터리로 따르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오늘 어쩔 수 없이 영성이란 단어를 쓰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