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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연적(戀敵)의 딸
이원우('76 <지우문예> 수필 천료/ '77 김승우 발행 <수필 문학> 초회 추천/ '83년 <한국 수필> 2회 천료/ '97년 <한글 문학> 소설 신인상/ 지은 책 총 19권/ 초등학교장 ‧ 전 덕성 토요 노인대학장 ‧ 부산북구문협회장 ‧ 문화예술인연합회장 ‧ 전 천주교 부산교구은빛사목지원단장 및 오순절 평화의 마을 자문위원/ 대한가수협회 회원 ‧ 26기계화사단 안보강사-용인동백성요셉성당 신자/ KNN 부산 방송 문화대상 ‧ 허균 문학상 본상 ‧ 한국수필 제정 청향문학상 본상 ‧ 부산수필 대상 ‧ <문예시대> 문학대상 ‧ 자랑스러운 부산 시민상 봉사 본상 ‧ 부산교육상 ‧ 황조근정훈장, 쿠알라룸푸르 한인회장 감사패)
오순절이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날이다. 성령이 사도들에게 강림한 것을 기념하는 이동 축일이고, 이로써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선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라 한다. <민수기>에 의하면 오순절은 추수감사절이었다.
그 오순절 평화의 마을이 삼랑진에 생긴 것은 지금부터 20년 전이다. 비록 중심가에서는 좀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설립 당시 여러 가지로 시끄러웠다는 소문을 심상수 자신도 들어서 알고 있다. 삼랑진 사람들이 좀 별난가? 삼랑진 사람과 혼인하지 말라는 얘기도 옛날엔 떠돌았다.
심상수가 삼랑진에 거주하며 밀양 시내 중 고등학교에서 음악 선생 노릇을 한 것은 총 7년쯤이다. 그는 집에서 도보로 25분 거리에 있는 대신 부락, 그러니까 지금 오순절 평화의 마을이 있는 그 근처까지 부지런히 다녔다. 아니 그의 손에는 색소폰이며 악보가 쥐어져 있었다. 대신을 통해 거족이라는 마을로 가는 길목, 야트막한 산허리에 그가 항상 찾는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색소폰으로 전주(前奏)를 하곤 다시 노래를 불렀다. 한 시간 쯤 그래야만 그는 직성이 풀리곤 하여 귀가하였다. 그의 음악에는 한(恨)이 스며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한을 안고 삼랑진을 떠났었다.
그가 평화의 마을을 다시 찾게 된 것은 거의 극적이었다는 게 좋겠다. 그보다 두 살 연장인 어느 선배가 그를 어느 날 근사한 식당으로 부른 것이다. 입이 무겁기로 이름난 선배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고 나서 서두(序頭)를 꺼냈다.
“이것 보오. 오늘 부탁이 하나 있어서 왔어요.”
“말씀하시지요.”
“지금 심 선생이 천주교로 개종한 지 몇 년 됐더라?”
“이제 겨우 2년 조금 넘었습니다.”
“삼랑진이 고향이지요?”
“아니 안태(安胎) 고향은 거기가 아니고…….다만 거기서 잔뼈가 굵었으니 제 2의 고향이라 할 수 있지요.”
“오순절 평화의 마을을 압니까?”
“가 보진 않았습니다만, 경부선 열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멀리 보이는 게 그 마을이라는 걸 아는 정도입니다.”
선배는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얘기를 이어나갔다.
“이번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어요. 말이 거창해서 자문위원회지 별 다른 일을 하자는 게 아니고 그저 두 달에 한 번씩 모여 얼굴이나 마주대하자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가족들의 어렵고 아쉬운 점을 파악하여 원장 신부를 그야말로 자문만 하면 됩니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적이 망설여졌다. 30년 전에 떠난 심상수가 단 한번도 발걸음하지 않았던 곳인데 싶어서였다.
그러나 심상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2년 전에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여 성당에 나가긴 하는데, 기도도 제대로 안 된다. 항상 분심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게 말만 이웃 사랑을 앞세웠지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자괴심 탓이려니 싶은 생각이 온통 머리를 지배하던 무렵이었다. 그래 이 참에 몸을 던지자! 그가 선배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지만 제 같은 부족한 사람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오. 거기 1년에 세 번씩 만드는 회보(會報)가 있어요. 그 편집도 돕고 고정 칼럼도 집필하고…….다른 이들의 옥고(玉稿)들을 모아 주기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심상수는 그로부터 한 달부터 ‘평화의 마을’ 자문위원으로서 업무를 보게 되었다. 회의기 있는 첫날, 그는 미사에 참례하면서 놀랐다.
오래 전 그가 몇 번 방문한 바 있었던 산청의 어느 한센병 나환자 가족들과 대비가 되었다.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외관(外觀)이야 평화의 가족들이 낫다. 한센 병 가족들은 떨어져 나간 손가락들이 많은 데 비해 여기는 제대로 열 개를 다 갖추고 있다. 나환자 가족들은 소위 토안(兎眼)이라 해서 아래 눈꺼풀이 쳐져 토끼 눈처럼, 흰 눈자위에 핏발이 서 있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여기 가족들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지적 장애인들이 더러 있다 보니, 몇몇은 미사 중에도 가만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뛰어 다니고, 봉사하러 온 사람들을 공연스레 껴안는가 하면 고함까지 지른다. 무조건 손을 잡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의 등을 두드리기도 한다.
미사를 마치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얌전스레 줄을 서서 기다리는 기족이 있는가 하면, 공연스레 쏘다니는 친구도 눈에 뜨인다. 좀 전에 신부님이 강론 중에 하시던 말씀이 기억에 났다.
“자신이 기도를 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고요. 제발 밥만은 흘리지 않고, 제대로 자기 손으로 떠먹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요. 일미칠근(一米七斤)란 말이 있습니다. 농부가 쌀 한 톨을 만들어내려면 일곱 근의 땀을 쏟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린 항상 앞들에 있는 논에서 농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요? 잘 안 되지만 노력하여 남의 손을 덜어 주는 것도 사랑이요 자비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식탁으로 옮겨 와서는, 식사 전 기도를 끝내자 말자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던 어느 자매가 모로 넘어지더니 큰 대(大) 자로 누워버리는 것이다. 이내 입에서 거품을 품고 의식불명, 종사자들이 달려왔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자문위원들 중 의사가 셋이나 되어도 그들조차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이윽고 자매는 부스스 털고 일어났지만, 신부님이 밥 한 톨도 흘리지 말라는 당부는 적어도 그 날 점심시간엔 허사가 되고 말았다.
심상수에게 부여된 임무는 앞서 말한 대로 <평화의 마을‘이라는 28페이지짜리 소책자, 회보 발행을 돕는 거였다. 권두시를 원로 문인에게서 받고, 초교(初校)와 재교(再校), 오케이 교정을 보는 정도지만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발행부수가 자그마치 3만 부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많고, 독자들 중에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도 있어서이다. 꼿꼿장수를 아는가? 김정일에게 유일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김장수 국방장관 말이다. 그도 그 속에 포함된다면 특별 신분 운운은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니다. 권두시(卷頭詩)에 모실 필자는 아주 중량(重量) 있는 인사를 삼고초려 하듯 해야 했다. 그런대로 일은 비교적 잘 풀려 나갔다.
거기서 끝내야 했다. 더 욕심을 낸다든지 업무의 외연을 넓히면, 뭔가 부수적인 부작용 같은 게 도사리게 마련이랄까? 그런데 안분지족과 담 쌓고 살던 심상수 선생의 엉뚱한 버릇이 또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여섯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신부님을 만나 말씀을 건넸다.
“제 노래를 한번 부르고 싶습니다. 악단은 급조를 해도 350명 가족에게 잠시나마 행복의 시간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무슨 노래를 부를 생각입니까?”
“대중가요가 중심이 되고 마지막은 성가 ‘살아 계신 주’지요.”
“좋습니다. 여기 가족들은 무슨 음악이든지 좋아하니까요.”
이래서 심상수 선생이 지역 사회에서 같이 봉사 활동을 계속해 오던 플루트(2)와 비올라 ․ 색소폰 ․키보드 ․ 드럼 등 주자(奏者)들로 급조한 게. ‘달빛 고움 악단’이다. 그의 말을 빌면 일생을 통해 한번 있을까 말까한 ‘화려한 무대’에도 그로 인해 서게 된다. 지나간 얘기지만 전직 교사인 그가 콘서트를 연 것도 열 번 넘었다. 청중이 500명 남짓한 조그마한 규모지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부르는 한(恨)과 이별의 노래다.
그러나 이번에는 곡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방향이 달라야 했다. 말 그대로 가족들은 아무래도 정서가 쳐져 있으니 업그레이드를 시킬 만한, 신나는 노래들이라야 제격일 것 같아서였다. 한 시간 반을 잡았는데 스무 다섯 곡, 모두가 2/4박자 춤곡인 폴카와 폭스 트로트가 주종을 이룬다.
그렇지, 여기에다 미리 그 곡 제목들을 적어 보는 것도 의의가 있겠다. 참, 가족 중 상당수가 50대를 넘어섰으니 그들에겐 흘러간 옛 노래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의 교향시’․ ‘청춘의 꿈’ ․, ‘꽃마차’. ‘럭키 서울’. ‘신라의 달밤’ ․ ‘왕 서방 연서’ ․, ‘딸 칠 형제’ ․ ‘닐리리 맘보’ ․,‘만리포 사랑’․ ‘봄바람 님바람’ ․ ‘신라의 북소리’ ․ ‘아리랑 목동’․ ‘애리조나 카우보이’․ ‘오부자의 노래’ ․ ‘오동동타령’․ ‘즐거운 목장’ ․ ‘청춘 부라보(브라보)’ ․ ‘청포도 사랑’․ ‘하이킹의 노래’ ․ ‘ 향기 품은 군사 우편’ ․ ‘휘파람 불며’ 등등이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신바람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는 엄선(?)된 곡들이었다. 심상수 선생은 B병원의 환우들을 앞에 두고 그런 체험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평화의 마을에서는 그게 한갓 희망일 따름이라는 조짐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증상이 심한 측은 각기 자기 방에서 모니터로 시청을 하고 여든 명 정도의 가족들이 성전에 모였다. 그들의 얼굴에서 기쁨이나 즐거움 기대 등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걱정했던 대로 처음엔 그들에게서 기대했었던 만큼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어떤 단체에서든지 노래 하나로써 구성원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자타가 공인해오던 그가 아니었던가? 어느 바이올리니스트는 하늘이 준 목소리라 했고 장사익을 닮았다는 평도 해 주었는데…….
그 뜻밖의 결과에 심상수 선생은 일순 당황하였다, 비상수단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란한 솜씨로 탭 댄스를 추어 보였다. 그의 두 발이 공중에 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타다닥 타다닥! 바닥에 불꽃이 튀었다. 그제야 가족들에게서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그는 ‘바다의 교향시’를 뱃속 깊숙한 데서 뽑아 올렸다.
어서 가자가자 바다로 가자 출렁출렁 물결치는/ 푸른 바다 저 멀리 안타까운 젊은 날의/ 로맨스를 찾아서(헤이!) 어서 가자 어서 가자 어서가/ 젊은 피가 출렁대는 저 바다는 부른다 저 바다는 부른다.
헤이! 마치 국악의 추임새처럼 내는 목청 터지는 소리에 코끼리가 낮잠에서 깨어나듯 거대한 덩어리가 움찔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달빛 고움 악단도 바야흐로 신명이 났다. 색소폰이며 플루트 등 관악기가 춤을 춘다. 키보드의 건반이 물결처럼 빠르게 흐른다. 비올라는 특유의 음색을 뽑아 올린다. 드럼이 폭풍처럼, 잠자는 가족들의 가슴을 흔들어댄다. 노래는 계속되었다. ‘청춘의 꿈’이다
청춘은 꿈이요 봄은 꿈나라/언제나 명랑한 노래를 부릅시다/진달래가 쌩긋 웃는 봄봄/ 청춘은 싱글벙글 윙크하는 봄봄봄 봄봄봄봄/노래를 부릅시다 젊은이의 노래를/산들산들 봄바람이 춤을 추는 봄봄/시냇가의 버들피리는 비리비리비/ 라라랄라……
그렇게 한 시간 넘게 흐르자 상황은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일어나 춤을 추고 허리며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음악의 성녀라는 체칠리아라는 세례명을 가진 자매의 춤 솜씨가 만만찮다. 그제야 심상수 선생의 얼굴에서 그늘이 완전히 사라지고, 웃음꽃이 피었다. 5월 말이라 바깥기온도 그렇지만 성전 안은 열기와 땀 냄새로 넘쳐흘렀다.
심상수 선생이 마지막 노래 두 곡을 선정해 두고 있었다. 흘러간 옛 노래 ‘목포의 눈물’과 복음성가‘살아 계신 주’. ‘목포의 눈물’은 지역감정 타파와 일제 강점기의 민족 노래임을 되새기자는 뜻에서 그가 어디에나 포함시키는 레퍼토리 중 하나다. 개인적인 정서로도 잊을 수 없고…….목포의 눈물’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옛날 목포에 목화가 참 많이 났답니다. 일제 시대였지요. 그런데 그 목화를 전부 빼앗아 간 사람들 이 있었어요. 바로 일본인들이었지요. 곡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린 빈 털털이였지요. 사람들 어디로든지 돈 벌러 떠나야 했습니다. 목포 부두는 항상 그 시절 눈물바다였습니다. 지역감정이라니요? 이걸 부르면 지역감정도 눈 녹 듯 사라집니다. 애국가만큼 중요한 노래입니다.”
노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부두의 새 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이별의 눈물이야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情操)/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이걸 어쩌겠나? 방금 전 열광의 도가니였던 성전 안의 분위기가, 침울하다 못해 그만 착 가라앉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심상수 선생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흐느끼는 듯한 멜로디가 그 자신의 가슴까지 헤집을 만큼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지 때문이다. 그렇게 2절도 중간을 막 넘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가운데 앉아 있던 키가 다섯 척이 될까 말까 한, 서른 살을 넘긴 듯 보이는 자매 하나가 스르르 넘어져 버리는 게 아닌가! 무척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웅성거리고 야단이 났다. 의무실 의사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리고 악단을 향해 말했다.
“수옥이잖아? 여러분 걱정 하지 마세요. 간질 아니 뇌전증입니다. 이 자매는 말문도 닫은 지 오랩니다. 슬픈 음악은 절대 금물인데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고요? 하나 걱정 마세요. 10분만 기다리면 진정될 겁니다.”
간질(당사자들을 너무 비하하기 때문에, 뇌전증으로 바뀌었다.)에 대한 별다른 아픈 기억을 안고 있는 심상수 선생에게는 그렇게 무서운 광경이 있을 수 없었다. 6년 전이었다. 그는 야외 학습 인솔을 나갔는데 여학생 하나가 오늘 같은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당황한 나머지 119에 연락하였다가 된통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구급대가 달려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당사자가 깨어나자 말자 할아버지가, 자기 손녀에게 창피를 안겼다며 험악한 표정으로 심상수 선생에게 삿대질을 하였다. 지금 또 그 때의 무서운 기억이 되살아난다. 아니나다르랴.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이 막힐 지경이다. 황망 중에 10분이 흘러갔다.
인간은 누구나가 특정 위기에 대처하는 무기를 갖추고 있다? 만약 그런 가정이 성립된다면 심상수 선생에게는 아마 ‘살아 계신 주’일 것이다. 복음 성가 말이다. 자매가 바야흐로 침을 닦고 그런 대로 본래 대로 자세를 어느 정도 잡기 시작한 걸 확인하고 심상수 선생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주 하느님 외아들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걱정 근심 전혀 없네/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주 안에서 새로 난 생명 도우시는 주의 사랑/ 참 기쁨과 확신 가지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살리(후렴)
거기서 심상수 선생은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 다시 눈앞에서 연출되는 것을 보고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방금 깨어난 수연이라는 자매가 후렴 부분에서 입을 벌리고는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아래 위 입술 사이로 번져 나오는 게 있었으니 아, 핏물! 그렇다. 분명 피가 섞인 침을 그가 흘리면서 ‘살아 계신 주’를 부르는 것이다. 물론 서투르지만 그는 분명히 세상을 향해 절규를 내뱉고 있다. 아니 주님을 향해 그 절규마저 봉헌하고 있는지 모른다. 손수건을 건네기까지, 그 순간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포착하지 못했다는 건 아쉬움도 아니다. 주님의 현존은 그렇게라도 증거하게 된다. 무엇이 두려워 말 못하랴. 다시 3절을 불렀다.
그 언젠가 주 뵐 때까지 주를 위해 싸우리라/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 주님께서 나의 앞길 지켜 주시리(후렴)
그러나 수옥이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아주 평온한,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심상수 선생이며 악단의 면면을 조용히 바라다 볼 따름이었다. 그 적요(寂寥)가 조금은 무섭지만, 그런대로 피날레는 그렇게 감동으로 장식할 수 있었다.
걱정이 아니 될 수가 없었다. 악단을 먼저 하부하게 한 뒤 심상수 선생은 기획부장의 양해를 얻어 수옥이를 면담하기로 했다. 그렇게 예쁘게 생긴 규수가 뇌전증(간질)은 몰라도 말까지 못하다니…….그리고 찰나에 지나지 않지만, 좀 전의 기적과 같은 그 현상의 언저리에라도 다가가 추정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고나 할까? 심상수 선생은 203호실로 찾아들어갔다. 자매들 몇몇이 휠체어를 타고 복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수옥이는 좀 전의 일은 까마득히 잊은 듯 다소곳한 표정으로 창가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었다. 심상수 선생은 종이 한 장을 내 밀었다. 부장이 하는 말이 필담은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종이 위에 이렇게 사인펜으로 적었다.
-잠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가능할까?
-긴 시간은 안 됩니다.
-좋아요. 약속하지요.
그래서 심상수 선생과 수옥이는 살롬의 집(가족들을 위해서 과자 따위를 원가로 파는 가게) 옆의 벤치에 앉았다. 가족들 여남은 명이 노천(露天) 노래방에서 동전을 넣고 ‘홍도야 울지 마라’ 따위를 부르고 있었다. 필담은 다시 그렇게 시작되었다.
-수옥이라고 했지?
-예.
-아주 예쁜 이름인 걸? 얼굴도 아주 예쁘고 말야.
-감사합니다.
-어디 아픈 데가 있어?
사실 이 말을 꺼내 놓고 후회를 했다. 당사자가 화라도 내면 그야말로 둘 다 수렁에 빠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옥이는 거침없이 적어 나가고 있었다.
-간질을 앓고 있어요. 그리고 듣기는 듣는데 말은 못합니다. 간질로 쓰러진 후유증이지요. 그걸 히스테리성 실성증이라 했습니다.
-그래? 우리 용기를 내도록 해요. 간질이라 하지 말아요. 뇌전증이라 바뀌었으니까. < 성경>을 고쳐야지. 한데 아까 말이야, ‘살아 계신 주’를 부를 때 기억해요?
-예, 저는 그 성가(聖歌)가 너무 좋습니다. 고백하지만 기적 같이 몇 소절을 따라 부르는 흉내를 낸 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부모님이 좋아하시던 성가입니다. 그로부터 심상수 선생은 말로 하고, 수옥은 필답을 하기 시작했다.
"피가 났어요. 기억하나요?"
-예, 지난 달 성전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성체 조배를 마치고 그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애를 썼는데, 역시 몇 초 동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노래도 되던가?"
-예, 약간은요.
노천 노래방에서 노래잔치는 계속되고 있었다. 심상수 선생은 어쩐지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에 질려 있었다. 잠시 여유를 찾을 겸 수옥이의 양해를 얻고 그들 속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노래 한 곡을 청하고선 숨고르기를 한 뒤 목청을 돋우었다. ‘만리포 사랑’이었다.
똑딱선 기적 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 사랑/그립고 안타까운 젊은
다시 수옥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수옥이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가 질문을 했다.
-선생님의 노래는 보통 노래가 아니에요. 한이 맺혀 있습니다. 제가 바로 봤지요?
"고맙네. 그런데 고향이 어디야?"
-이 곳 삼랑진(三浪津)이요.
"아니 그게 무슨…….나도 삼랑진일 걸? 정말이야?"
-송지리 386번지, 거기가 제 본적입니다. 초등학교는 이겨 출신이구요. 중 고등하교는 목포…….
심상수 선생은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아, 그랬었구나. 목포가 그리운 간질 환자에게 ‘목포의 눈물’을 그야말로 눈물로 불러댔으니, 내친 김에 이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누구이셔?"
-문, 성 자(字) 식 자를 쓰시는 분입니다.
아, 문성식? 그는 이게 진짜가 아니길 바랐다. 사뭇 가슴이 떨리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억눌러 참고 다음 질문을 써 내려갔다.
"그래 아버진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
-작고하셨어요.
그 이상 필답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우연의 일치라는 개념의 선은 그렇게 허물어져 갔다. 수옥이 지목한 그의 아버지 문성식은 30년 전 헤어졌던 연적(戀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답을 써내려가는 오른 손이 뭔가 부자유스럽다. 혹만큼 작은 손가락이 엄지에 붙어 있었다.
그랬었지! 문성식도 다지증(多指症)으로 손가락 하나가 더 있었다. 나중 수술을 해서 감쪽같이 없애긴 했지만 분명히 그는 평소 거기에 대해 스트레스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옥은 손은 뭐래도 지금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어머니도 혹시 변성혜? 심상수 선생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이번에는 대신 대화로 풀기로 했다.
“어머니 성함이 혹시 변, 성 자(字), 혜 자 쓰는 분이셔? 살아 계셔? 부모님은 둘 다 내가 아는 분이셨어.”
수옥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수옥이 양쪽 손바닥을 겹쳐 오른쪽 뺨에 대고 자는 시늉을 해 보인다. 아, 역시 이승 사람이 아니란 말이로구나.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가 막혀 어떤 수단으로써도 그 기분을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옛 연적의 딸을 그것도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평화의 마을에서 만나다니……. 마을에서 내 준 봉고에 편승해 오면서 30년 전을 되돌아보았다. 그래 주마등을 스친다는 말이 있었지. 그 표현을 빌려 쓰기로 하자.
심상수 선생은 1975년에 S중학교 교사로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이 서른이었고 몇 군데 혼담이 오갔지만 어쩐지 성사가 되지 않았다. 그는 연애도 한번 못해 보고 서른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비교적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있었으니 문성식, 그는 철도 공무원이었고. 역에서 근무했으며, 역시 총각 신세를 못 면하고 있었다. 좁은 바닥에서 둘은 동갑 특유의 우정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읍민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하기야 예를 들어 낚시를 같이 갔다는 둥 낙동강 시장(沙場)에서 엉켜 붙어 세 시간 동안 레슬링 시합을 했는데 결판이 나지 않았다는 둥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무렵 우체국에 아리따운 규수가 부임해 왔다.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우편물 취급이 그의 업무였다. 항상 창구에 단정한 옷차림으로 앉아서 고객들을 친절하게 맞고 있어서 그의 인기는 날로 더해갔다. 반듯한 궁체로 직접 썼다는 변성혜라는 명패가 얹혀 있었다.
어느 날 심상수 선생이 등기 편지를 하나 부치려고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문성식이 변성혜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참 아름다웠다. 둘 다 볼일을 보고 나서 돌아 나오는 길 심상수가 물었다.
“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정답게 하노?”
“왜, 질투 나더나?”
“무슨 소리 하노?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응, 목포가 고향이라 하더라. 우체국장님이 먼 친척이라 일도 배울 겸 도와 드리려고 와 있다 카 대.”
그로부터 둘 사이엔 변성혜라는 우체국 임시 직원을 앞에 두고 라이벌 의식이 움트고 있었다.
그런데 인물이며 재력으로 따지자면 문성식 쪽이 훨씬 나았다. 그는 180센티미터의 장신에 인물이 출중하였다. 1천 평이 넘는 포도밭을 그의 부친이 가꾸고 있어서 알부자로 이름나 있었다. 결혼을 한다면 그 전 재산이 고스란히 아들 앞으로 넘겨준다는 걸 공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삼랑진 천주교 성당에 나가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에 비해 심상수는 다섯 척 다섯 푼밖에 완 되는 작달막한 키에 인물조차 문성식에 비해 형편없었다. 다만 그 특유의 성실한 생활 태도를 주위에서 높이 사고 있을 따름이었다. 당시만 해도 종교는 불교였고. 그런데 변성혜는 결혼 이야기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어느 누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도 그는 서둘러 전혀 대답을 않았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변성혜가 가진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심상수 쪽에 기울어 있었다. 둘이서 가끔 데이트도 하다 보니 문성식도 그 눈치를 채게 되었다. 두어 번 심상수가 변성혜를 태우고 대신 부락 ‘음악 아지트’에 간 적도 있었다. 변성혜의 청에 따라 둘은 ‘목포의 눈물’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불렀다.
그러다 .변성혜가 1주일 동안 우체국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 사건이 생겼다. 대신 창구에는 우체국장이 앉아 있었다. 엄한 얼굴인 우체국장에게 변성혜의 안부를 물을 수도 없어 총각 둘은 애만 태우고 있었다.
여드레 째 되는 날 변성혜가 얼굴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이마에 큰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게 아닌가? 1주일을 하루 넘겼는데 모습이 너무 초췌해 있었다. 그 날도 오후 수업을 일찍 마친 심상수가 짬을 내어 우체국에 들었다. 마침 손님이 아무도 없어 한산하였다.
“어디가 아팠어요?”
“조금 다쳤어요. 목포에 갔다가 집 냉장고에 부딪쳤어요. 내일 오후쯤 실밥을 뺍니다.”
“그랬었군요. 보시다시피. 제가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지켜 드리겠습니다.”
변성혜는 오른손을 살며시 입가에 갖다 대고는 미소를 훔쳤다.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변성혜가 모로 기우는가 싶더니 그만 꽈당 하고 썩은 나무 등걸처럼 온몸이 우체국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사지를 쭉 뻗더니 입에 거품을 품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아, 간질! 그 때의 충격을 심상수 선생은 표현할 길이 없었다. 결국 심상수는 변성혜를 ‘짝사랑’하고 만 꼴이었다. 변성혜는 자기 몸이 그런 걸 알고 있으니, 정말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심상수와의 결혼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는 항상 종말이야 어떻든 순간순간의 행복한 마음만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언감생심, 어찌 결혼을 꿈에도 그릴 수 있었을까?
후문에 의하면 변성혜가 다친 뒤로 1주일 동안 약을 복용하지 못했던 게 화근이었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어서 항생제 투여를 강하게 해야 했기 때문에 그 1주일은 한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심상수의 충격은 실로 컸다. 그에게는 변성혜가 첫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못 먹는 술로 시간을 보내다가 대신 부락을 혼자 찾아가 ‘목포의 눈물’을 색소폰으로 연주하고, 목에서 피가 나도록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오곤 하였다. 넋 나간 사람처럼 일상을 보내고 있는 자식을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심상수 선생이 참한 규수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슴 가득히 안고 있던 어머니였다.
“야야, 무슨 걱정거리가 있나? 그 처자(아가씨) 인자 우체국에 나오나?”
심상수는 대답 대신 어머니이 손만 잡아 드렸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어머니도 눈치 채신 모양이었다. 심상수는 우체국에 발길을 끊었다.
마침 새 학기를 앞두고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부산 시 교육청 관내로 전입을 허락한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일생을 통해 그렇게 아름다운 규수를 보지 못했었던 심상수 선생은 변성혜로부터 받은 충격에서의 도피처로 부산을 택했다. 이튿날 서둘러 서류를 접수시키고 다시 한 달 뒤 그는 부산 시내의 중학교에서 다시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30년, 그는 예순 한 살이지만, 노총각 신분 그대로 평화의 마을에 걸음을 하게 되었는데, 오늘 뜻밖의 상황을 겪고 혼자 사는 아파트로 귀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0년, 삼랑진을 보고 오줌도 안 눌 정도로 깊은 생체기를 안고 있었는데 그 결말이 이렇게 나는구나. 물론 그 기나긴 세월 한번 발걸음도 안 했었다. 어머니도 여의었다. 주님 아니 계셨더라면 평화의 마을인들 어떻게 찾아들었을까? 그렇다! 여태 수백 번도 넘게 ‘살아 계신 주’를 불렀지만 오늘 낮과 같은 감동은 없었다.
저녁에 다시 기획 부장과 30분 넘게 통화를 했다. 수옥이 말이 맞다 한다. 수용자 카드에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게 수옥이란다. 들은 이야기라며 전해 준다. 아버지는 자원하여 목포 근처 역에 근무를 하다가 열차 사고로 순직하였고, 어머니는 간질 병세가 악화되어 바다에서 실족사를 하였다고 했다. 아, 목포, 그 ‘목포의 눈물’을 어디에서나 그랬듯 심상수 선생은 감정 타파 차원에서 불렀는데 수옥이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구나. 연적이라니, 얼토당토않다. 원수도 사랑한다는데, 하물며 30년 전 연적의 딸이랴. 그래 쓰다듬어 주자
심상수 선생은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수옥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니 문성식과 변성혜가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된 것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 추억도 이제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30년 동안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어 내려놓은 것 같아 참으로 오랜만에 숙면에 빠져들 수 있었다.
첫댓글 졸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가슴이 찡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