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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 함을 받고
사도행전 2장 1절-4절
중국에 북경에 있을 때 경험했던 현상인데 이번 겨울에는 한국에서도 며칠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것은 안개가 한번 끼면 몇날 며칠 동안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한국에서 안개에 관한 일들을 떠 올려 보았습니다. 새벽 시골길을 걸으면 밤안개를 만납니다. 마치 구름이 몰려오듯이 안개가 몰려 왔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또 안개가 몰려오고 하는 모습 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환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혼란스런 모습입니다. 가까운 곳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리무중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보면 밤안개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때는 신앙적인 것 같다가 어떤 때는 불신앙이 되고, 어떤 때는 하나님 안에 사는 것 같다가도 어느 때 갑자기 인간적이 되는 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갈등도 많고 방황도 많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혼란은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는데, 굳건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청교도들에 의해 세원진 나라인 미국에서는 각 급 학교에서 채플(chapel)이 사라졌고, 이제 초등학교에서는 “whole Educational System”이라고 하는 이름하에 기독교 교육은 금하면서, 인도의 요가 같은 것은 명상이라고 가르치는 모순을 범하고 있고 동성애를 합법화 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한 교회에서는 티벳의 승려인 달라이 라마를 데려다가 주일 아침 설교를 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본받아서 한국의 어느 목사는 불교 승려를 데려다가 교회에서 세미나를 가졌는데, 그 후에 그 목사가 말하기를 ‘엄청난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설교는 더 이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 중의 하나가 앞장서서 WCC 세계 대회를 주최하더니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주교와 직제를 일치한다고 심상치 않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계 제일의 대형 교회라고 자부하는 교회의 그 유명한 목사는 얼마 전에 작고했는데 한국의 불교 대학의 창립 축하 행사에 초대 받아간 자리에서 "불교도 나름대로 구원이 있다"고 말 했습니다. 어떤 대형교회의 목사는 초등학교의 학력 이외는 모두가 가짜 학력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는 재단의 돈을 66억이나 빼돌려 카지노에 가서 탕진하여 기소되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주최하는 교회 성장에 관한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강사의 이력을 살펴보니 세일즈 전문가였습니다. 이제 교회 성장조차도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보다 세일즈의 기법을 중시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들 스스로 정체성을 상실한 암담한 면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들이 외형으로 화려해지고, 방법론들은 다양해지다 못해 본질을 떠나는 것조차 모르고 밤안개처럼 우왕좌왕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마다 무슨 프로그램을 도입하고자 굉장히 바쁩니다. 마치 그것을 적용하지 않으면 교회가 금방 어떻게 될 것처럼 난리 법석을 부립니다. 그런데도 영적으로는 자꾸만 공허해지는 느낌을 금할 수 없으니 또 다른 프로그램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계시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나 가정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사람들은 영적으로 방황하는 것일까요?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도무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공허함을 안고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 같다가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일까요? 왜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것입니까?
만일 여러분들 자신의 신앙도 이렇게 갈팡질팡 할 때가 있으시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단 일 초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공백 상태가 된 적이 있었습니까?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영적 공백 상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직접 인간 역사를 다스리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며, 우리들의 작은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시기에 우리는 찬양을 통해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사람들을 세상에 남겨 두시고 떠나시면서 두 가지 준비에 분주하셨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성령 하나님께 당신의 이 세상에서의 임무를 이양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주님 자신이 보혜사로서 지금까지 제자들을 돌봐 주셨는데, 이제는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영원토록 돌봐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금은 바로 우리들을 돕는 보혜사 성령의 시대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요, 교회의 설립자도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으로 살고, 무엇으로 성장하며, 무엇으로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먼저 교회는 주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성장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이 없으면 교회의 생명은 없어지고 맙니다. 주님의 말씀이 없으면 교회는 주님의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활동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교회의 장래를 성령님에게 위임하고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도 글로벌 찬양의 교회의 주인이시오, 창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께 모든 일들, 온갖 일들을 온전히 위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이 성령이 오순절에 처음으로 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미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내뿜으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순절이 성령의 첫 강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령이 임할 때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0명의 교인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교인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그곳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때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강한 바람처럼, 뜨거운 불처럼 임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강하다는 말은 힘이 있고, 속도가 빠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강하다는 표현은 강풍(强風)이나 태풍(颱風)으로 보면 좋을 것입니다. 태풍 같은 바람이 그들이 모인 곳에 불어 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람이 불어 온 것은 아니고 태풍이 불어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뜨거운 불처럼 임했습니다.
불의 혀 같은 것들이 천장으로부터 갈라지는 모습으로 나타나서, 각 사람의 위에 즉 머리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뜨거움을 느낀 것은 아니고, 불의 혀 같은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하는 모습을 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강풍이 불어 닥치거나, 불의 뜨거움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현상으로 보였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의 어떤 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이것을 '성령 충만'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이라 하면 우리들은 가장 먼저 방언, 치유기도, 예언, 전도, 그리고 사역 등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아말감이 금이빨로 변하는 현상을 강조하고, 성령을 받으면 쓰러진다면서 마치 자기들 교회에서만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하면서 성령의 역사와 역할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이라는 말씀에서 이런 단어들 보다는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충만'이란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성령이 강한 바람처럼, 뜨거운 불처럼 임하셨다는 표현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다. 성령이 강한 태풍처럼, 그리고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처럼 임하셨다는 말씀은 성령이 바람같이 강하게, 불같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배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불처럼, 강한 바람처럼 성령이 교회를 가득 메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성령 충만이 임했다는 말씀은 성령께서 교회를 완전히 지배했다는 뜻이고, 인간 입장에서 말하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성령님께 완전히 지배당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요한복음 20장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 제자들 개인에게 주신 것이라면,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의 임재는 교회 위에 내리신 성령의 역사의 시작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성령 충만 다음에는 반드시 ‘담대’란 말이 따라 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 말씀, 5장 29절 말씀, 7장 51절 말씀, 9장 27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이처럼 성령 충만이 사람들에게 임했을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담대’입니다.
“파레시아(παρρησἰα)” ‘담대’ 란 말이 안고있는 내면의 의미는 하늘의 것으로 가득 채워졌다는 뜻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 마음과 영혼이 하늘의 것으로, 성령으로 가득 채웠으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이 땅에 무엇이 겁나겠습니까?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아이티에 있을 때 한국에 왔다가 선배 목사님 교회에서 머물 때 화장실 문에 붙여 있던 로마서 8장 26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아시고,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를 우리보다 먼저 아시고,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데,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다 아시고,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실 것도 아시고 도우시는 데, 두려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의 능력 안에 사는 자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한 자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두려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 온 후, 초대 교회는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고, 담대하게 기도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때마다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 충만이 다시 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또 다시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들의 먼 미래를 우리는 모릅니다. 아니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담대할 뿐입니다. 그리하면 그 다음 단계를 성령께서 알아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으로도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무 두려움도 없기 때문에 전도할 수 있습니다. 담대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통당하는 분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병상이나 담 안이나 하나님을 애절히 부르는 곳에 찾아갈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담대’란 간이 부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외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간이 부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이 모든 일을 해 왔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고속도로를 질주하듯이 성령의 전진의 사인(sign)만을 보면서 담대한 질주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는 여러 가지 성령의 신호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방향성 문제입니다. 재정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온 교회가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사인(sign)을 바르게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온 세계에 성령의 늦은 비의 역사 즉 성령 충만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에도, 한국에도 남미와 제 삼 세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늦은 비의 역사는 좀 특색이 있습니다.
교회사에는 세 개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첫째 흐름은 성경 중심의 흐름이고,
두 번째 흐름은 예배와 성례 중심이고,
세 번째 흐름은 성령 충만을 강조하는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교회들이 이 세 가지 요소를 결합하여 미래를 이끌어 갈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영적 제 삼의 물결, 혹은 늦은 비의 역사라고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줄기가 하나로 흐르기만 하면 우왕좌왕 하지 않으며 이 땅에 교회들은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날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교회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토레이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 세례는 중생과는 구별되며, 그 이후에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로써 주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능력을 부여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체험은 단지 초대교회 사도들에게만 부여된 것이 아니요, 그 당시에 살았던 성도들에게만 부여된 것도 물론 아니다. 그것은 ‘먼데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자들’에게 부여되는 것이며, 교회 역사상 모든 시대의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 교회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성례가 좀 더 강조되어야 합니다만 찬양을 활성화 하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강력하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능력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이런 성령의 물결만이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 개인들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30분만의 치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데이빗 월커슨 목사는 펜실베이니아주 필립스버그의 중산층을 상대로 한 안정된 목회 지를 버리고, 뉴욕 시로 가서 그곳에서 방황하는 젊은 마약 중독자들을 상대로 전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전 미국의 성도들이 그의 사역을 향해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30초만의 치유”, 즉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마약 중독을 퇴치하는 방식은 미국 연방 정부가 실시하는 마약 중독자의 치료율과 비교할 수없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바로 “Times Square Church”입니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 하십니까?
강한 바람같이 우리를 지배하시고, 뜨거운 불같이 지배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를 강풍처럼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이루도록 불같은 능력을 부여해 주셔서 해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람과 불의 조화 속에서 성령의 역사는 우리 개인에게나 교회 안에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성령의 시대인 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다.
그러므로 성령이 함께 계신 것을 믿고, 성령께 모든 것을 위임하며 사십시다.
그리하면 반드시 성령 충만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성령을 의지하고 살아가십시다.
성령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볼 때, 인간의 눈이나 판단이 아닌, 성령의 눈으로 보고, 성령의 지혜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행동으로 옮길 때 성령님께 도와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