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외국어 조기교육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호들갑에 가까운 영어 광풍은 코흘리게 아이들까지 장악하고 있다. 서울의 한 영어유치원에서 어린이가 알파벳을 익히고 있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오늘도 또 ‘영어유치원’이다. 도대체 우리말도 익숙하지 않은 이 아이에게 엄마는 무엇을 기대하였을까?
처음에는 유치원 가는 것을 싫어하던 아이는 이내 여러 놀이에서 공격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지난 주 엄마를 밀치며 떼를 쓰다가 엄마가 말리니 벽에 머리를 심하게 들이받았다.
소아정신과 의사들이 흔히 하는 농담이 있다. 영어유치원이 열 개 생기면 소아정신과 하나가 생긴다. 영어유치원은 소아정신과의 젖줄이다. 물론 영어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에게 모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소아정신과 의사 중에서도 자기 자식을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사람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 열 명 중 여덟 명은 환경이 어떤 조건이든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다. 문제는 적응을 힘들어하는 두 명이다. 이 두 명의 아이들이 잘못된 환경에 놓이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소아정신과를 찾거나 상담소를 찾거나 아니면 엄마의 가슴에 멍을 들인다.
그렇다면 왜 영어유치원이 문제란 말인가? 부모들은 자신에게 한과 설움을 안긴 영어가 자식에게만은 멍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 아닌가?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 영어를 배워야 훨씬 효과가 좋다고. 또 영어몰입교육을 하는 사립학교를 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냐며 자기 확신을 갖는다. 그래서 월급쟁이 처지로선 무리해서 아이를 위해 ‘지른’ 죄밖에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여섯 살, 일곱 살은 아이들에게 어떠한 시간일까? 인생의 이 대목에 아이들은 어떤 시간을 통과하여 무엇을 이뤄내야 하는가? 부모들은 이런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고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냈을까?
분명 부모는 자신이 계획하는 아이의 미래와 현재의 과제에 대한 생각하느라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건너뛰었을 것이다. 아이를 바라보지만 부모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아이에게 투사된 자기 자신의 마음만 보았다.
조금 친절하게 설명해보자. 유치원에 다닐 나이의 아이들은 무엇을 이뤄야 하나?
아이들은 활발한 언어활동을 통해 주변을 파악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무렵의 아이들은 처음으로 말을 제대로 가지고 놀게 된다. 구체적 사물로 이뤄진 세계는 아이의 머리 속에서 언어로 재구성된다. 아이들은 말과 말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면서 추상단계로 나아간다. 이 무렵의 아이들에게 말을 빼앗는 것은 마치 어린 새의 날개를 부러뜨리는 것과도 같다.
앞에서 꺼낸 아이 이야기를 더 이어서 해보자. 유치원 가기를 거부하는 아이에 대해 유치원에서는 별다른 이유를 대지 못했다. 그 유치원은 비싼 수업료만큼이나 충분히 아이들을 존중하는 곳이었다. 엄마는 유치원에 대해 거의 불만이 없었다. 몇 차례의 면담을 통해서야 아이는 자신이 가장 괴로웠던 순간을 털어 놓았다. 아이는 친구와 놀다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 자신이 믿는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다. 선생님은 아이가 우리말로 이야기하려 하자 “No Korean”이라고 하였다. 수업 시간이고 선생님은 한국어를 모르니 당연한 일이다. 선생님은 나쁜 뜻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다르게 느꼈다. 아이는 자신이 무시 받고 있으며, 이제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적지 않은 부모들이 지금 우리 아이는 영어를 빨리 배워야 한다고 조급해 한다. 서양 속담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있다. 영어유치원을 가면 아마도 영어유치원을 다니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 영어 교육에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점심식사의 대가는 무엇일까? 그저 비싼 수업료가 전부일까? 이 시간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아이가 배우지 못하는 다른 것은 없을까? 그것이 영어에 비해 값어치 없는 것일까? 부모가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내기 전에 먼저 고민해야 할 부분은 바로 그것이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한글을 충분히 사용하면서 언어 세계를 확장한다. 한글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언어로 표현되는 만큼 존재한다’는 언어학자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언어 확장이 이뤄지지 않으면 아이의 인지수준은 그만큼 정체될 수 있다. 물론 필요한 말 정도 할 수준은 될 것이다. 그 정도야 네 살이면 할 수 있으니. 하지만 감정을 표현하고 조절하는 것, 사회적 관계를 맺고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는 것, 구체적 사물을 연역하고 조직화하여 추상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것은 어렵다.
다행스러운 점은 역설적으로 아이들이 영어유치원에 머물면서도 끊임없이 한글로 사고하고, 한글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다. 만약 부모들이 바라듯 유치원에서 정말로 한글을 못 쓰게 한다면 어떨까? 아이들의 문제는 분명 좀 더 극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나마 아이들이 부모를 도와주고 있는 셈이다. 유치원에 다닐 나이의 아이들은 유치원을 다녀야 한다. ‘영어유치원’이라고 불리지만 결코 유치원이 될 수는 없는 ‘영어학원’은 그 학원들이 아이에게 주는 만큼, 아니 그 이상만큼 아이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