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夏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자하가 말하기를, “배우기를 널리 하고(博學), 뜻을 독실히 하며(篤志]), 절실하게 묻고(切問]), 가까운 것을 생각한다면(近思),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 라고 하였다. 四者皆學問思辨之事耳, 未及乎力行而爲仁也. 然從事於此, 則心不外馳, 而所存自熟, 故曰仁在其中矣. 네 가지는 모두 博學(널리 배움), 審問(살펴 물음), 愼思(신중히 생각함), 明辨(밝게 변별함)의 일일 뿐이고, 힘써 행하여 仁을 실행함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종사한다면, 곧 마음은 밖으로 벗어나 치달리지 않고서 보존된 바가 저절로 익기 때문에, 仁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朱子曰 此全未是說仁處 方是尋討箇求仁門路 當從此去漸見效 在其中謂有此理耳 又曰 此四事只是爲學工夫 未是爲仁 必如夫子所以語顔冉者 乃正言爲仁耳 然人能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則心不放逸 天理可存 故曰 仁在其中 주자가 말하길, “이것은 온전히 아직 仁을 말한 부분이 아니라, 바야흐로 仁을 추구하는 대문과 길을 찾는 것으로서, 마땅히 이곳을 따라가서 점차 그 효과를 보아야 한다. 그 안에 있다는 것은 이러한 이치가 있을 뿐임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이 네 가지 일은 단지 학문을 위한 공부이지 아직 仁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공자께서 안회와 염옹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해야만, 마침내 바로 인을 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능히 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하게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깝게 생각할 수 있다면, 마음은 곧 방탕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천리는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하길, 仁이 그 안에 있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博學與近思 亦不相妨否 曰 博學是都要理會過 近思是注心著力處 博學是箇大規模 近思是漸進工夫 如明明德於天下是大規模 其中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等 便是次序 問篤志未說到行處否 曰 篤志只是至誠懇切以求之 不是理會不得又掉了 若只管汎汎底外面去博學 更無懇切之志 便成放不知求底 心便成頑麻不仁 惟篤志又切問近思 便有歸宿處 這心便不汎濫走作 仁便在其中 누군가 묻기를, “博學과 近思는 역시 서로 방해가 되지는 않겠지요?”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널리 배운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가야 하는 것이고, 가깝게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을 쏟고 힘을 써서 대처하는 것이다. 博學은 대규모이고, 近思는 점진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마치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대규모이고, 그 중에 있는 格物致知, 誠意, 正心, 수신, 齊家 등은 바로 그 순서인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篤志는 아직 실행하는 부분에까지 언급된 것은 아니겠지요?”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篤志는 그저 지극한 정성과 간절함으로써 구하는 것일 뿐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또 내버리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단지 범범하게(깊이 없이 넓게) 외면만 상관하여 博學한다면, 더이상 간절한 뜻이 없게 되어, 곧바로 방종하여 추구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될 것이고, 마음은 곧바로 완고하고 마비되어 不仁하게 될 것이다. 오직 뜻을 독실하게 하고 또한 간절하게 질문하며 가깝게 생각하는 것만이 곧바로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니, 이 마음은 곧 범람하여 다른 곳으로 도망하지 않기에, 仁이 바로 그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仁在其中矣 如何謂之仁 曰 非是便爲仁 大抵如聖人說在其中矣之辭 祿在其中直在其中 意曰 言行寡尤悔 非所以干祿 而祿在其中 父子相爲隱 非所以爲直 而直在其中 博學而篤志切問而近思 非所以爲仁 然學者用力於此 仁在其中矣 누군가 묻기를, “仁이 그 안에 있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것을 일컬어 仁이라 말하는 것입니까?” 나는 말하길, “이것이 바로 仁을 행한다는 것은 아니다. 대저 성인께서 ‘그 안에 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이다. 녹봉이 그 안에 있고, 정직이 그 안에 있다는 말의 뜻은 이렇다. 즉, ‘언행에 원망과 후회가 적은 것이 녹봉을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녹봉이 그 안에 있고, 부자가 서로 숨겨주는 것은 정직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정직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널리 배우면서 뜻을 독실하게 하고, 간절하게 물으면서 가깝게 생각하는 것은 仁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배우는 자가 여기에 힘을 쓴다면, 仁은 그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集註初本謂心不外馳而事皆有益 蓋以博篤切近爲心不外馳 學志問思爲事皆有益 夫以學志問思爲有益於事 乃是有所求而得之 不可以爲求此而得彼也 後乃以所存自熟易之 則專主於心之所存而言 人惟無所用其心 則其心放逸而不收 學之博則此心常有所繫著而不放逸矣 人惟所志苟簡而不堅也 則其心汎濫而不一 志之篤 則此心常有定向而不汎濫矣 問不切思不近 則其所用心皆在吾身之外矣 切問近思 則皆求其在己者 而無復外馳之患矣 人能盡此四者 則雖學問思辨之事而自有得夫操存涵養之效 所以謂仁在其中矣 면재황씨가 말하길, “집주 초본에서 마음이 밖으로 달려나가지 않고 일은 모두 유익하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넓고 독실하고 간절하고 가까운 것으로 인해 마음이 밖으로 달려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학문과 뜻, 그리고 묻고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 일마다 유익하다고 여긴 것이다. 무릇 학문, 뜻, 질문, 생각이 일에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은 오히려 구하는 바가 있어서 그것을 얻은 것이지, 이것을 구하였지만 저것을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나중에는 마침내 보전된 바가 저절로 익는다는 것으로써 그것을 바꾸었으니, 이는 곧 마음이 보전하고 있는 바에 오로지 주안점을 두고서 말한 것이다. 사람이 오직 그 마음을 쓰는 바가 없다면 곧 그 마음은 제멋대로 방종하여 거두어들이지 못하지만, 학문이 넓으면, 이 마음은 항상 매어져 붙어있는 바가 있어서 방일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오직 뜻을 세운 바가 구차하고 소략하여 굳세지 못하면, 그 마음은 범람하여 한결같지 않지만, 뜻이 독실하면 곧 이 마음은 항상 정해진 방향이 있어 범람하지 않는 것이다. 질문이 간절하지 못하고 생각이 가깝지 못하면, 그 마음 쓰는 바가 모두 내 몸 밖에 있게 되는 것이다. 간절하게 묻고 가깝게 생각하면, 모두 내 안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어서 더이상 밖으로 치달리는 걱정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이 4가지를 능히 다할 수 있다면, 비록 博學, 審問, 愼思, 明辨의 일일지라도 저 붙잡아 보전하고 함양하는 공효를 저절로 얻을 수 있으니, 이 때문에 仁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潛室陳氏曰 心存則仁便存 心便喚做仁固不可 但離了心外 更何處求仁 잠실진씨가 말하길, “마음이 보전되면 仁도 곧바로 보전되지만, 마음을 곧바로 仁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 안 되는 것이다. 다만 마음 밖으로 떠나간다면 다시 어디에서 인을 구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胡氏曰 力行固所以爲仁 然學問思辨 皆所以求爲仁之方 心存乎學問思辨 則雖未見於行而已不外馳矣 心不外馳 則所存自熟 是乃力行之本 故曰 仁在其中矣 호씨가 말하길, “힘써 행하는 것은 본래 仁을 행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博學, 審問, 愼思, 明辨은 모두 仁을 행하는 방법을 구하는 것들이다. 마음이 學問思辨에 보전되어 있다면, 비록 행실에 아직 드러나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미 밖으로 치달리지 않게 된 것이다. 마음이 밖으로 치달리지 않으면, 보전된 바가 스스로 무르익게 되니, 이것이 바로 힘써 행하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仁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西山眞氏曰 切問謂以切己之事問於人也 近思謂不馳心高遠就其切近者而思之也 外焉問於人 內焉思於心 皆先其切近者 則一語有一語之益 一事有一事之功 不比汎然馳騖於外而初無補於身心也 서산진씨가 말하길, “간절하게 질문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간절한 일을 가지고 남에게 묻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가깝게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을 고원한 곳으로 내달리게 하지 않고 그 절실하고 가까운 것에 나아가 생각함을 말하는 것이다. 밖으로는 남에게 묻고, 안으로는 마음에서 생각하는데, 이 모두 그 간절하고 가까운 것을 우선하는 것이니, 이는 곧 말 한 마디면 한 마디 말의 유익함이 있고, 일 하나면 일 하나의 공효가 있는 것이다. 이는 깊이 없이 넓게만 밖으로 치달려서 처음부터 몸과 마음에 도움이 전혀 없는 것에 견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中庸以學問思辨爲智之事 此章所謂學問思未及乎爲仁也 而曰仁在其中者 仁人之心也 心存於內 則爲仁 馳於外 則非仁矣 惟學之博而志之篤 問之切而思之近 則心不馳於外矣 不馳於外 則存於中者自熟矣 夫仁亦在乎熟之而已矣 熟之者 力行而爲仁也 自熟云者 未及乎力行而仁自在其中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중용은 博學, 審問, 愼思, 明辨을 지혜의 일로 여겼다. 이 장에서 이른바 博學, 審問, 愼思는 아직 仁을 행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지만 仁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이 안에 보전되어 있으면, 仁이 되나, 밖으로 내달리면 仁이 아닌 것이다. 오직 배움이 넓으면서 뜻이 독실하고 질문이 간절하고 생각이 가까우면, 곧 마음은 밖으로 내달리지 않는 것이다. 밖으로 내달리지 않으면, 곧 마음 가운데에 보존된 것이 스스로 무르익는다. 무릇 仁이란 역시 익히는 것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익힌다는 것은 힘써 행하여 인을 행하는 것이다. 스스로 무르익는다고 운운하는 것은 미처 힘써 행함에 이르지 않아도 仁이 저절로 그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程子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何以言仁在其中矣 學者要思得之 了此 便是徹上徹下之道 정자가 말하길,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간절히 묻고 가깝게 생각하면, 어째서 인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배우는 사람이 그것을 생각해 터득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바로 곧 위와 아래로 다 통하는 道이다.”라고 하였다. 問程子謂徹上徹下底道理 朱子曰 於是四者也 見得箇仁底道理 便是徹上徹下之道也 누군가 정자가 말한 위로 통하고 아래로 통하는 도리를 물었다. 주자가 말하길, “이 네 가지에 있어서, 仁의 도리를 알아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위와 아래로 다 통하는 道이다.”라고 하였다. 徹上徹下是這箇道理深說淺說都效此 위로 통하고 아래로도 통한다는 것은 이 도리를 깊이 말하거나 얕게 말하거나 모두 이를 본받아 따른다는 것이다. 雲峯胡氏曰 徹上徹下 集註兩述程子之言 樊遲問仁章曰 徹上徹下 初無二語 此則曰 了此便是徹上徹下之道 彼所言者 仁也 言仁是徹下 言粹面盎背 篤恭而天下平 是徹上 此章未及力行爲仁之事 學問思 是徹下 仁在其中 是徹上 운봉호씨가 말하길, “위로 통하고 아래로 통한다는 것에 대하여, 집주에서는 정자의 말을 두 번 전술했다. 번지가 인을 묻는 장에서 말하길, ‘철상철하이니 처음부터 두 말씀이 없는 것’이라 하였고, 여기에서는 말하길,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곧바로 철상철하의 道다’라고 하였다. 앞에서 말한 것은 仁인데, 仁을 말한 것은 곧 아래로 통하는 것이고, (몸에 채우면) 얼굴에 빛나고 등에 가득하며, (미루어 천하에 통달하게 하면) 독실하고 공손하여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것을 말한 것은 위로 통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힘써 행하여 仁을 행하는 일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博學(널리 배움), 審問(잘 살펴 물음), 愼思(신중하게 생각함)은 아래로 통하는 것이고, 仁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은 위로 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程子欲人思而得之 乃引而不發 朱子謂從事於此 則心不外馳 而所存自熟 盡發以示人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정자는 사람들이 그것을 생각하여 터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도리어 활을 당기기만 하였지 화살을 쏘지는 않았다. 주자가 여기에 종사하면 곧 마음은 밖으로 내달리지 않고 보전된 바가 저절로 익는다고 말한 것은 다 쏘아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又曰 學不博則不能守約 志不篤則不能力行 切問近思在己者 則仁在其中矣 다시 말했다. “배움이 넓지 않으면 지킴이 요약될 수 없고, 뜻이 독실하지 않으면, 힘써 행할 수 없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간절하게 묻고 가깝게 생각하면, 곧 仁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慶源輔氏曰 必先盡乎博然後 有以得其約而守之 不然則寡聞謏見 將何以識其約 必先立其志 則自然住不得 須著去力行 不然則若有若亡 何能見於行 所謂切與近 只是在己之事 경원보씨가 말하길, “반드시 먼저 널리 배움을 다한 연후에 그 핵심을 터득하여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곧 듣고 보는 것이 적을 것이니, 장차 무엇으로 그 핵심을 알겠는가? 반드시 먼저 그 뜻을 세워야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곧 자연히 멈추고자 해도 멈출 수가 없으므로, 모름지기 가서 붙들고 힘써 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뜻이 있는 듯 없는 듯할 것이니, 어찌 능히 행하는 바에 드러나 보이겠는가? 이른바 간절하고 가깝다는 것은 그저 내 안에 있는 일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又曰 近思者以類而推 다시 말했다. “가깝게 생각한다는 것은 비슷한 부류로써 미루는 것이다.” 朱子曰 以類而推 只是傍易曉底挨將去 如親親便推類去仁民 仁民便推類去愛物 如這一件事理會得透了 又因這件事推去理會那一件事 只管恁地挨將去 只管見易不見其難 前面遠處 只管近 如第一級便要跳到第三級 擧步濶了便費力 只見難只見遠 주자가 말하길, “비슷한 것으로 미루는 것, 즉 類推하는 것은 깨우치기 쉬운 것 옆에서 밀쳐나가는 것인데, 예컨대 친척을 친애하는 것에서 유추해가면 백성을 인애하게 되고, 백성을 인애하는 것에서 유추해가면, 외물을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다. 마치 이 일을 완벽하게 이해하고서, 또 이 일을 바탕으로 미루어가서 저 일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그저 이렇게 밀쳐나갈 뿐이고, 그저 쉬운 것을 볼 뿐 그 어려운 것은 보지 않으며, 앞에 먼 곳을 대면하고 있어도 그저 가까운 것만 상관하는 것이다. 만약 제1층에서 곧바로 제3층으로 튀어 올라가려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넓어져서 곧 힘이 많이 드는데, 이는 그저 어려운 것을 보고 그저 먼 것을 보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或問此章以爲心不外馳而事皆有益者 何也 曰 程伯子之言 心不外馳之謂也 叔子之言 事皆有益之謂也 心不外馳 則仁之體無不存 事皆有益 則仁之用無不得矣 曰 如子之言 凡言在其中者 皆爲求此而得彼之辭 則此四者 亦不爲求仁之事耶 曰 四者之效 雖卒歸於得仁 而其言則講學之事 初非有求仁之意也 聖賢之言 求仁必本於實踐 而非空言之所可與 然於講學之間 能如子夏之云 則於吾之心有所制而不放 於事之理有所當而不差矣 志於講學而可以爲仁 亦何害其爲求此而得彼哉 曰 然則 視聽言動之必以禮 居處執事之必以恭且敬 與人之必以忠 亦其理之所當爲 而非有求仁之意也 則亦可以爲求此而得彼乎 曰 吾固嘗言之矣 彼以踐履之實事告 此以講習爲言 而非本有求仁之心也 蓋亦不得而同矣 혹자가 묻기를, “이 장에서 마음이 밖으로 치달리지 않아 일마다 모두 유익하다고 여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정백자의 말은 마음이 밖으로 내달리지 않음을 일러 말한 것이고, 정숙자의 말은 일마다 모두 유익하다는 것을 일러 말한 것이다. 마음이 밖으로 내달리지 않으면, 仁의 體가 보전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고, 일마다 모두 유익하면, 仁의 用을 얻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마치 선생님의 말씀처럼 무릇 ‘그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은 모두 이것을 구하려다 저것을 얻는다는 말이라고 한다면, 이 4가지도 역시 仁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이 4가지의 공효는 비록 결국에는 仁을 얻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그 말은 곧 講學의 일로서, 처음부터 仁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현의 말씀은 仁을 추구함에 있어 반드시 실천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라서 빈말이 관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강학을 하는 사이에 능히 자하가 말한 바와 같이 할 수 있다면, 내 마음 속에는 절제하는 바가 있어서 방종하지 않고, 일의 이치에 있어서는 마땅한 바가 있어서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강학에 뜻을 두면서도 仁을 행할 수 있다면, 또한 그것이 ‘이것을 구하려다 저것을 얻는 것’이 되는 것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다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반드시 禮로써 해야 하고, 거처하고 일을 하는 것을 반드시 공경으로 해야 하며, 남과 더불어 같이 하는 것을 반드시 忠으로써 해야 한다는 것은 역시 그 이치에 비추어 마땅히 해야 할 바지만, 그러나 仁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면, 역시 이것을 구하려다 저것을 얻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나는 진실로 일찍이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저것은 실천과 이행의 실제적 일로써 알려준 것이고, 이것은 강습으로써 말한 것일 뿐, 본래부터 仁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니, 대체로 역시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蘇氏曰 博學而志不篤 則大而無成 泛問遠思 則勞而無功 소씨가 말하길, “널리 배우되 뜻이 돈독하지 않으면, 크기만 할 뿐 이루는 바가 없고, 널리 얕게 묻고 멀리 생각하면 곧 수고롭기만 할 뿐 공이 없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志字要粘上面學字說 切問亦須從近處思量起 則可見端的方不流於虛遠 以序求之 則博學在先 自是一類 篤志切問近思在後 自是一類 學博矣而志不篤問不切思不近 則泛濫而不著己 如何可至於仁 쌍보요씨가 말하길, “志자는 위의 學자와 붙여서 말해야 하고, 切問 역시 모름지기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각하고 헤아려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면 정확한 것을 알아볼 수 있으니, 바야흐로 공허하고 먼 곳으로 빠져 흐르지 않는 것이다. 순서대로 구한다면, 널리 배우는 것이 먼저이니, 저절로 한 부류이고, 篤志, 切問, 近思는 나중이니 저절로 한 부류다. 널리 배웠지만, 뜻이 독실하지 못하고 질문이 간절하지 못하며 생각이 가깝지 못하다면, 범람하여 나에게 붙어있지 못하니, 어떻게 仁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博學先提其綱 篤志切問近思是分其目 蓋就所博學者而志之篤問之切思之近也 學不博固失之狹隘 志不篤問不切思不近 則又失之泛濫 亦徒博耳 신안진씨가 말하길, “널리 배우는 것은 먼저 그 벼리를 들어 올리는 것이고, 뜻을 독실하게 하고 간절하게 물으며 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 세목을 나눈 것이다. 대체로 널리 배우는 바에 나아가야 뜻이 독실하고 질문이 간절하며 생각이 가깝게 되기 때문이다. 배우는 것이 넓지 못하면 본래 협소함에서 잘못되는 것이지만, 뜻이 독실하지 못하고 질문이 간절하지 못하며 생각이 가깝지 못하면 또한 범람함에서 잘못되는 것이니, 이 역시 헛되이 넓기만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