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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넉넉했지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늘 부족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두 가지 경우로 행동을 합니다. 예를 들면 돈이 부족할 때 어떤 사람은 열심히 나가 돈을 버는 일에 힘을 쏟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돈을 훔쳐서 그 돈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서 보면 자신의 부족한 결핍을 노력하고 애쓰고 성실하게 살아 성공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그 부족함이 오히려 자신을 그 자리에까지 오게 했다고 당시 상황을 오히려 감사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결핍을 남의 것을 훔치는 방법을 택한 사람은 훗날 시간이 지나 교도소에서 그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다 누구 탓이라고 말입니다. 나라 탓이고, 친구 탓이고, 부모 탓이며, 탓 탓 탓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결핍을 사용하십니다. 결핍이 가진 긍정적인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그 결핍을 사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모든 면에서 당시의 사람들보다 우월한 뛰어남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가 비록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지만 배움이나 신분등은 충분히 자만할 수 있는 자산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울에게 몸의 질병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는 모든 일이 성공하도록 이끌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고, 심지어 배가 파선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독사가 물어 위험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겪고 넘어가도록 바울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바울 자신에게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결핍을 통해 유익한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핍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결핍으로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하십니다.
개는 훌륭하다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 개통령이라고 하는 김형욱 조련사가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다가 눈을 떼지 못하고 본 적이 있습니다. 개가 얼마나 사나운지, 주인도 물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어느 때는 주인을 귀찮아합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짖어댑니다. 김형욱 조련사가 그 개를 고쳐보려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손에 보호장갑을 끼고 훈련을 하는 중에 그 개가 물어서 피가 났습니다. 김형욱 조련사가 이런 개는 집에서 안 되고 훈련장에 가서 해야 한다고 장소를 옮겼습니다.
놀라운 것은 개가 주인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보통 개는 주인을 보면 꼬리를 흔들고 어떻게 해서든지 주인에 마음에 들려고 합니다. 주인의 눈치를 보고 애교를 부리고 주인과 교감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개는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때 이 개가 이렇게 된 이유가 다름 아닌 결핍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알아서 다 해주고 개의 눈치를 보고, 먹을 것과 그 외에 모든 것을 풍족하게 해 주는데 굳이 주인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개의 해결책은 결핍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심을 주지 말고, 먹을 것이나 모든 것들이 주인이 꼭 필요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어려서 사랑스럽다고 개를 자식처럼 대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가 주인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가 개인 줄 알게 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병을 치료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고,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그가 독사에 물렸음에도 죽지 않았을 때에 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숭배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몸에 지닌 병은 그가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알게 해 줍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교만하여지려고 해도 교만할 수 없습니다. 그 자신의 병도 해결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임을 그의 몸이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핍은 자기를 정확하게 보게 합니다.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그를 치시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확하게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약할 때에 자기를 정확하게 알기 때문에 강한 존재가 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성가 중에 “똑바로 보고 싶어요”가있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눈짓으로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곁눈질 하긴 싫어요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이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주님 이 낮은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당신께 드릴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속에 참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이 작사가는 자신을 정확하게 본 것 같습니다.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이 고백은 정확하게 결핍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된 것입니다. 때로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정확하게 자기 자신을 보게 하는 은혜입니다. 비로소 바른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삶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결핍을 무기로 사용하셔서 영적으로 회복을 얻게 하십니다.
요즘 우리 교회 베스트 복음성가를 뽑으라면 은혜라는 곡이 일등일 것입니다. 그 가사를 읽어보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결핍을 갖게 되면 그 순간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소중하게 여기시며 여기까지 이끌며 수많은 것을 허락하셨는지 말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풀려 나와 10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너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그들에게 세상에는 없는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만나를 당연하게, 반석에서 물이 나오면 당연하게, 모든 것이 당연하게 입니다. 그들은 은혜를 상실했습니다.
남편이 직장생활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부부 사이에 사랑과 감사와 은혜는 소멸합니다. 자녀들이 부모가 당연히 자신들을 가르치고 먹이고 살아갈 힘을 제공해야 한다고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부모를 존경하고 귀하고 사랑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장난감이 넘침에도 기뻐하지 않으면 감사를 잃습니다.
우리가 서로 섬길 수 있는 교회를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감사로 바뀌는 순간이 바로 은혜이며 회복이며 축복입니다.
미국 댈러스에서 세미한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최병락 목사님의 대한 이야기를 봤습니다. 목사님은 ‘스타벅스 목양실’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새벽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마치면 그가 먼저 달려가는 곳은 스타벅스입니다. 커피 한 잔 값으로 그곳에서 성경을 읽고 독서를 하고 설교 준비를 합니다. 매일 7시간 이상 이어지는 반복되는 습관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가 스타벅스를 매일 찾게 된 이유는 엉뚱한 데 있습니다. 목회를 시작할 때 목양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할 목양실이 없다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목양실이 없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라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커피숍에서 보낸 10년이 넘는 시간은 소중한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목양실이 없어서 스타벅스로 내몰린 나는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 스타벅스로 향할 때마다 마음에 기대감을 안고 갑니다. ‘오늘은 어떤 말씀을 주실까?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하실까?’ 부족함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오히려 결핍이 은혜로 만난 경우를 소개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다고 핑계합니다. 그렇습니다. 핑계라고 하기보다는 충분히 설득할 수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핍을 통해 긍정의 효과를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픔을 통해 오히려 더 큰 은혜를 누립니다. 생각한 것과 다른 결과를 맛보고 오히려 긍정의 효과를 만납니다. 그것은 결핍이 주는 긍정의 효과입니다.
결핍은 은혜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결핍으로 어떤 것이 강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자기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충분한 이유가 곤두박질치며 실망하게 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신분이나 학력이나 말을 잘하는 언변 정도면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할 때에 어느 곳에든지 설득력 있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대부분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님의 품을 잠시 떠나는 이유는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권세가 그렇게 쉽게 지거나 자기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실패를 하고 사방이 막혀 있을 때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인생일 것입니다. 충분히 얼마든지, 자신의 힘으로 삶을 개척하며 인생의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다 결국은 무너지고 넘어지게 되어 있는 게 또 인생입니다.
그때 결핍을 느낍니다. 부족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인간은 강한 존재는 아닙니다. 달리기 100미터 세계신기록은 2009년 베를린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우사인 볼트가 기록한 세계신기록은 9초 58로 10년이 넘게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동물들과 비교하면 어떨까요. 코끼리가 9초2입니다. 낙타가 9초입니다. 하마가 8초입니다. 기린이 7초1입니다. 사자가 6초2입니다. 곰이 6초4입니다. 타조가 5초2입니다. 말이 5초입니다. 가장 빠른 동물은 치타가 3초2입니다. 인간은 명함도 못 내밉니다.
하지만 인간이 스포츠카를 타고 치타와 시합을 했습니다. 근소한 차이로 스포츠카가 이겼습니다. 그것은 사실 치타 입장에서는 반칙입니다. 도구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냐면 인간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가지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함께 할 때 그 힘을 얻습니다. 비행기를 타야 하늘에 새보다 더 멀리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차를 타야 멀리 빠르게 갈 수 있습니다. 배를 타야 바다를 자유롭게 다닙니다. 그 외에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하기 힘듭니다. 결핍은 바로 그것을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을 붙들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그 어떤 것에 지지 않습니다. 결핍은 그것을 확인시켜 준다는 뜻에서 긍정의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로 여러분의 가정에 결핍을 던져주십니다. 자녀들이 아프기도 합니다. 실패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때로 절망의 깊이가 커서 오랜 시간 동안 헤매고 거기서 나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결핍을 통해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도록 하시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정은 그 시간이 길고, 어느 가정은 그 시간의 짧을 뿐이지, 하나님의 계획은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모래 늪에 자동차가 빠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은 엑셀을 힘차게 밟거나 지렛대로 차를 들어 빠져나가려고 하겠지만, 그럴수록 차는 더 깊이 모래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늪에서 차를 빼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는 것입니다. 타이어 바람을 빼는 순간 바닥과 마찰력이 생기면서 자동차가 힘을 받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타이어에 공기를 더 넣어 팽팽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지만 이럴 경우 오히려 그 팽팽한 공기가 더 깊이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공기가 조금만 더 있어 준다면 문제없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공기 한 움큼이 없어 인생이 모래사막에 멈춰 있는 것 같은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희망이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남아 있는 공기마저 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모래 늪을 빠져나온 후에 공기를 다시 주입하면 힘차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결핍 때문에 속상하거나 우울해하거나 끝난 것처럼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은 치밀하고 섬세하시며 완벽하십니다.
평생 부족함 속에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히려 그 부족함을 통해 나 자신을 분명하게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붙들고 나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오늘도 부족함에 속상하고 마음 아파하기보다는 바울처럼 내가 약할 그때가 강할 때임을 알고 감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