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본다. 아침에도 거울을 보고 저녁에도 거울을 본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거울을 보고, 이발소에서도 목욕탕에서도 거울을 본다. 봄·여름·가을·겨울 언제나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는 내가 있다. 거울 속의 나는 과거의 나도 아니고 미래의 나 또한 아니다. 오로지 현재의 나일 뿐이다. 화색이 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얼굴이 푸석푸석하거나 수염을 깎지 않아서 꺼칠한 날도 있다. 어찌 되었건 현재의 내 얼굴임에는 틀림이 없다.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는데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여 줄 리는 없다. 거울의 정직성 때문이다. 거울은 언제나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되돌려준다. 추한 모습을 아름답게 변질시켜 보여주지도 않고, 주름살이 그어진 얼굴을 젊고 싱싱하게 그려주지도 않는다.
거울은 조용하다. 거울은 언제나 소리를 거부한 채 침묵으로 일관한다. 천하의 명창名唱도 세기적인 웅변가도 거울 앞에서는 발성發聲의 의미를 캐낼 수가 없다.
앨범 속의 사진을 본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사진을 본다. 흑백 사진도 있고, 천연색 사진도 있다. 유년 시절의 사진이 있는가 하면, 청년 시절의 사진도 있고, 최근의 사진도 있다. 앨범 속에는 나의 지나온 과거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근엄한 표정의 사진이 있는가 하면, 즐거운 표정의 사진도 있다. 사진을 찬찬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사진을 찍던 그 순간의 상황과 생각까지도 되새겨지게 된다. 그때의 추억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떠오른다.
거울과 사진은 그 기능이 사뭇 다르다. 거울은 현재의 나를 보여주지만 사진은 과거의 나를 보여준다. 거울은 현재요, 사진은 과거라는 이야기다. 하기야 1초 전도 과거라 하지 않던가. 과거의 나를 보고 싶거든 사진첩을 펼쳐 볼 일이요, 현재의 나를 보려거든 거울을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미래의 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미래의 나를 헤아려보려면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될 듯싶다. 얼굴의 윤곽이 닮은꼴이 아니어도 상관할 바 없다. 부모님이 불행스럽게도 일찍 타계他界하셨다면, 이웃집 노인의 얼굴을 살펴보아도 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인생역정이란 대동소이한 과정을 밟게 마련이니까.
나는 요즘 노인들의 모습을 허투로 보지 않는다. 노인들의 외모에서 미래의 나를 탐색해 보려는 뜻에서다. 노인들의 얼굴에는 그 나름대로 꾸려온 인생역정이 아로새겨져 있다. 관상쟁이가 아니더라도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지나온 족적足迹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어느 날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보았던 호호백발 할머니의 모습이 영 지워지지 않는다. 딸을 따라 미국까지 갔다가 딸의 버림을 받아 국제미아가 되었던 할머니였다. 효도관광이란 미명 아래 늙은 부모를 이름난 관광지에 모시고 가서 버리고 온다는 현대판 고려장 이야기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구나 싶다.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언어마저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딸의 버림을 받은 그 할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어머니를 이국땅에서 버린 그 여인은 먼 훗날 자기도 그처럼 자기 자녀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을까.
희생적 삶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 세상이라고들 한다. 어두운 구석에 눈길을 주다 보면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둘레에는 아직도 꺼지지 않는 등불들이 켜 있어 그래도 살맛이 난다.
무료양로원 ‘성 요셉의 집’ 원장 이석순 씨의 삶이 그렇다. 불우한 할머니들을 돌보기 위해 결혼도 포기한 50대의 이석순 씨는 맨손으로 양로원을 세워 스무 명의 할머니를 돌보고 있단다. 중풍으로 몸져누운 할머니의 대소변도 받아내야 하는 노처녀의 삶……. 이석순 씨의 조건 없는 사랑이 내 가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노모를 버린 딸과 이석순 씨는 나를 비춰볼 수 있는 인생의 거울이다. 대조적인 그들의 삶의 자세에서 나는 오늘도 새로운 인생 철학을 배운다.
<월간문학>으로 등단(80년). 펜문학상 등 수상. 전북 문인협회 회장, 전북 펜클럽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역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현). 작품 『아름다운 도전』, 『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 등 수필집 9권. |
첫댓글 김학 이양반이 새벽 4~5시면 어김없이 첫 글을
올렸었는디 일찍 타계 했습니다. 참 아까운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