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토해와 수로왕의 대결.
대릉하에서 출범한 대규모 범선단 帆船團은 봄철이라 일기가 순조로워, 10여 일을 항해하여 황해를 남하 南下하여, 아름다운 섬들이 점점이 수를 놓고 있는 한려수도 閑麗水道를 거쳐, 진해 앞바다 부근에 도착하였다.
십칠 선생은 선상에서 토해에게
“김수로가 처음으로 입항 入港한 지역이고 또, 김씨들이 관할한다고 하여 지명 地名도 ‘김씨의 바다’라는 뜻으로 김해 金海로 불리어지고 있다며, 지명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는 김해의 금관가야까지는 이제 한 시진이면 도착한다”라고 설명한다.
그러자 토해는 십칠선생에게,
“사로국으로 입국 入國하기 전에 김수로의 제철 기술을 한번 견학하고 싶소” 하고는 배 한 척만 가지고 김해 가야로 입항 入港하였다.
배에서 내린 토해는 바로 수로왕을 찾아가 말하기를,
“내가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왔소” 하니,
수로왕은 대답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명해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양보할 수 없으며, 또 감히 내 나라와 내 백성들을 너에게 맡길 수 없다.”라고 하였다.
토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 術法으로 싸워보겠는가?” 하니,
왕은 “좋다”고 했다.
잠시 후, 토해는 대장간에서 선철 銑鐵로 아주 멋진 매를 한 마리 만들었다.
아직은 청동 제품이 주류를 이루는 청동기 말엽이라 철은 단순한 연장이나 병장기 정도를 겨우 만드는 수준인데, 단단한 철로 세밀하게 아기자기하게 주조하여 멋진 새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에는 고도로 뛰어난 엄청난 첨단기술이다.
색 토해는 자신의 작품에 자신만만하였다.
그러자 왕은 선철 銑鐵에 연철 鉛鐵을 적절히 배합하는 야금술 冶金術을 발휘하여 매보다 더욱 크고, 힘차게 날개를 활짝 편 커다란 독수리를 만들었다.
왕이 만든 거대한 독수리의 크기에 압도당한, 토해의 매는 마치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것처럼 애처로워 보인다.
작품의 크기로는 상대가 되지 않음을 자인 自認한 토해는 이번에는 규모보다는 예술적인 작품을 구상하였다.
다시,
토해는 온갖 정성을 들여 아주 치밀하고 세세하게 귀여운 참새를 만들었다.
동그란 이쁜 눈과 세밀한 솜털 하나하나까지 내비치는 아주 귀여운 참새였다.
보고 있으면 만지고 싶어져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가는 이쁜 참새다.
그걸 본 수로왕은 씽긋이 미소를 띠며, 여유를 보이며 멋진 새매를 만들었다.
처음 토해가 만들었던 매보다 훨씬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의 새매는 곧바로 날아가 토해가 힘들게 만든 어여쁜 참새를 낚아챌 것처럼 위맹스러워 보인다.
가슴 깃털과 안쪽 솜털은 연철로 부드럽게 표현하였고, 꼬리와 날개의 굵은 깃털은 선철과 연철의 적절한 배합으로 힘이 넘쳐 기동성이 뛰어나 보였으며, 부리와 발톱은 강철로 다듬어 아주 날카롭고 힘찬 모습을 보인다.
그것도 토해보다 더 짧은 시간에, 단단한 선철 銑鐵과 부드러운 연철 鉛鐵을 조화시킨 야금술 冶金術로 멋들어진 작품을 만든 것이었다.
이를 지켜본 토해는 절망 絶望한다.
자신의 기술이 왕보다 한참 뒤진다고 자책하며, 왕에게 엎드려 항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수로왕은 색 토해가 자신을 찾아 김해로 올 것이라는 소식을 허보옥으로부터 이미 듣고 있었다.
허보옥은 도통 道通한 인물이라, 색토해의 관상 觀相을 보고는 장래에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고, 수로왕에게 미리 부탁하여 두었다.
“토해는 우리 부족의 동족 同族이기도 하며, 앞으로 한 나라를 이끌어 갈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왕에게 결례 缺禮를 범하더라도 대범하게 눈감아 주시면, 삼생 三生의 큰 복덕 福德이 올 것입니다.”
허보옥의 선견지명 先見之明을 몇 차례 겪어, 그 신빙성을 확인하였던 수로왕이다.
그러니 미래의 손위 처남으로부터 이미 별도의 청탁 請託을 받은 바, 수로왕은 토해와의 술법 대결에서 승리하였으나, 별 문책 없이 토해를 용서해 주었다.
토해는 포구에 정박해놓은 배로 돌아가 십칠선생과 합류하여, 동쪽의 사로국으로 갔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사로국으로 갈 때까지 선실 안에서 술만 퍼마시며 괴로워했다.
굴아화촌 屈阿火村 (울산) 태화강을 통하여 뭍으로 이동하여, 마동과 외동을 거쳐 사로국에 도착하여,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이는 산 山 위에 올라가 돌로 지은 움막집에서 일주야를 홀로 지냈었다.
토해의 일방적인 짝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옆에서 지켜보는 십칠선생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상태다.
그저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때,
이제나 저제나, 십칠선생이 기다리는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다.
허황옥의 오라버니 허보옥 許寶玉 즉, 장유화상 長遊和尙이다.
장유 화상이 사로국에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수로왕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토해의 모습을 본 십칠선생은 심상찮은 느낌을 받았다.
즉시,
평소에 교류가 있던 허황옥의 오라버니 허보옥에게 색토해와 수로왕과의 관계에 대하여 간략하게 밝힌 후, 도움의 서신 書信을 보냈다.
실은,
십칠선생은 대릉하 금주에 도착하였을 때, 허보옥으로부터 ‘색토해가 허황옥의 주변을 돌고 있다’는 연락을 먼저 받았었다.
장유화상은 십칠선생으로부터 술 단지를 받아들고 토해가 있는 석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룻밤을 지내고 장유화상은 웃으며 허우적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또, 사흘이 지났다.
그날은 유달리 일출 日出이 검푸른 바다 위로 밝게 솟구쳐 떠올랐다.
동해의 해 맑은 일출이 산속 석굴 石窟 입구를 비추자,
갑자기 석굴 안에서 큰 외침 소리가 터져 나온다.
뒤를 이어 커다란 웃음소리가 산속을 울린다.
“으 하하하”
큰 소리에 놀란 십칠선생은 석굴 입구로 다가간다.
잠시 후,
산속의 돌집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인물이 있었다.
토해다.
열흘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얼굴이 무표정하다.
아니, 오히려 눈빛은 살아있다.
예상외로 생기 生氣가 도는 토해의 모습을 본 십칠선생은 어리둥절하다.
괴롭고 심란한 토해의 쓰라린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십칠선생 호공은 먼저 말을 걸기도 뭣해서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
잠시 후,
토해가 먼저 입을 뗐다.
“이제 제 이름은 ‘탈해’ 脫解로 불러주세요”
“그게 뭔 소리요?”
“이제 모든 번민에서 해탈 解脫했다는 뜻입니다”
“...”
“...”
“허~~”
“지난 밤, 꿈에서 부처님을 뵙고, 나름대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호공은 처음 들어 보는 생소 生疏한 단어들이다.
“해탈?... 부처님?...”
“....”
“그게 무슨 말이오?”
“...”
“...”
“이제 저의 개인적인 부질 없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 이주민들이 안주 安住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데 저의 모든 힘을 쏟겠습니다”
십칠선생 호공은 깊이 허리를 숙여 국궁으로 답한다.
“도련님의 영명하심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토해가 도를 닦아 크게 소리를 지르며 해탈하였다 하여,
후일, 이 산을 ‘토함산 吐含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불국사 佛國寺 뒤편의 석굴암이 있는 경주의 토함산이다.
이틀 후,
사로국의 월성 저잣거리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상한 사람은 생김새부터가 토착민들과는 아주 달랐다.
신장은 일반 성인들보다 한 뼘이나 더 크게 보였고, 머리카락은 갈색이고, 푸른색을 띤 두 눈은 왕방울만 하고 매부리코에다 광대뼈는 돌출되어있고, 두툼한 입술 아래턱은 사각 四角 형 모양이었다.
이 벽안 碧眼의 이채 異彩로운 청년은 찻집이나 주막에 앉아서 손님들이 오갈 때
마다, 늘 내뱉는 소리가 있었다.
“옛날에 우리 집이 여기 있었는데….”라고 하였다.
다른 말은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다만 저잣거리에서의 은화 銀貨 씀씀이는 헤펐다.
보이는 사람, 만나는 사람마다 오전에는 동쪽 찻집에서 차를 대접하고, 오후에는 서편 주점에서 술을 권하였다.
자연스럽게, 동차서주 東茶西酒, 조차석주 朝茶夕酒란 새로운 유행어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첫 인사가 늘 “옛날에...”로 시작하였다.
벽안 청년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표범 가죽 주머니에는 항시 오수전 五銖錢과 화천 和泉으로 넉넉해 보였다.
표피 豹皮 주머니에는 아침에는 오수전과 화천을 가득 넣고 나와서는 밤늦게 돌아갈 때는 대부분이 비어 있었다.
찻집이나 주막에서 한 냥씩 계산할 때마다 “옛날에~~”란 접두사는 입버릇처럼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 사진 - 화천 꾸러미와 화천 앞면
며칠이 지나자 저잣거리에서 이 청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어 소통은 잘되지 않지만 ‘옛날’을 입버릇처럼 되뇌는 것을 보고 글을 아는 촌장이 그 청년을 ‘석’ 昔 씨라고 불렸다.
석씨 청년은 대륙에서부터 ‘색’ 索씨로 불리어 왔던 터라, 발음이 비슷한 새로운 “석”이란 성씨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아 자신도 자연스레 사용하였다.
‘옛날’을 문자 文字로는 ‘昔 석’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안 다음 날부터는 좀 유식하게 보이고자, 만나는 사람마다 “昔~ 有我家” 석유아가 (옛날에 우리집이 여기 있었는데)로 인사를 하기 시작 하였다.
그렇게 석씨를 아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어느 날, 찻집 주인이 자신의 가게에서는 가장 큰 고객인 석씨 청년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석씨 청년은 먼 산을 바라보며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탈해” 脫解라고 무심하게 답한다.
석탈해 昔脫解의 탄생 비화 祕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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