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및 90년대 부산의 사주 명리학 현장을 회고하면서,
청암철학관 선생님의 글을 보니 문득 1980년대와 90년대의 부산 바닥의 명리학 현장이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를 회고해보면 부산의 명리학 현장에는 현재의 명리학보다 훨씬 수준 높은 이론들이 많았었습니다. 가령 형제의 수를 아는 법, 부모의 띠를 아는 법, 태어난 시간을 찾는 법, 부부의 인연을 아는 법, 방문한 목적과 당면한 과제를 아는 법, 때로는 현재의 명리가들은 상상조차 못 하는 내용의 수많은 秘訣들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부산에는 역술의 대가들이 많이 있었고 수많은 이론들이 산재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흩어지고 사장되고 말았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젊은 층을 중심으로 논리적이라는 이름으로 자평진전 평주를 들고 나오면서 그간 부산에서 비술로 여기던 것들이 마치 미신 인양 취급받으면서 하나둘씩 사라진 것이 아닌가 싶고, 때로는 후학에게 전하지 못하고 작고한 경우도 많다고 저는 봅니다. 그러다 보니 부산의 명리학은 그 명맥이 끊어진 듯 하지만 분명 어디엔가 기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기억 속에 부산의 명리학은 지금의 이헌령비헌령식의 명리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상당히 구체적인 영역으로까지 살피는 학문이었고 그런 영역으로까지 구사하는 대가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산이 역학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이미 사계에 입문하여 그 시절을 체험했다는 것은 필자에게는 행운이지 아니할 수 없고, 그것이 여러분께 명리학을 나누는 밑거름이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당시 최호영, 허남원, 박재산 등 이런 분들이 이름이 높았는데, 최호영선생님은 제자들이 많았고, 학문으로는 허남원선생님이 높았고, 박재산(박도사)은 인연을 찾는 것으로 유명하여 손님이 많아서 예약을 해야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었습니다.
그 외 김중산선생님, 정암선생님, 황보탁선생님,차선생님 정도가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지금도 활동 중이라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이름 있는 이가 없거나 평범한 수준으로 알려졌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 당시는 요좀처럼 언론이나 대중매체가 자유롭지가 않아서 자기광고가 쉽지않아 오로지 손님들의 입소문이나 그의 제자에 의하여 알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당시에 이름이 났다하면 진정으로 실력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시절 30대의 이인섭선생님과 20대의 필자(설진관)도 부산진구 부전동 일원에서 많은 역술인들을 상대로 다년간 강의하면서 그 대열에 합류(?)했었는데 누가 기록으로 남겨주는 이가 없어서 오늘 이 글을 핑계 삼아 살짝 기웃거려(?)봅니다.
여기에 덧붙이면 당시 부산에서 허남원선생님이 학문적으로는 박도사보다는 높다고 알려지면서 당시 제가 가진 필사본 노트가 당연히 허남원선생님의 노트로 알고 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자세히 들여다 보니 그것이 재산 선생님의 필체로 된 노트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착각할 정도로 허남원 선생님의 학문적 명성은 높았던 분입니다. 그리고 당시 육효로는 이승철 선생님의 명성이 높았는데 지금도 활동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경험한 1980년대 및 1990년대 부산의 명리학 현장입니다. 더 깊은 이야기는 개인적인 만남에서 소회를 밝히겠습니다.
설진관...
첫댓글 감사합니다
그립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야속하네요
부산의 대가를 못만난것이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서울 오성학회 회장님이시면 관상학에 능통하셨던 분은 고.이중재선생님이십니다. 고대사 연구를 많이 하신 분이시죠
박진영 선생님이 성명학전서를 출간하신 것은 맞지만 그 내용은 지금의 성명학 이론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초량의 명세철학관을 운영하셨던 분은 김홍기선생님입니다. 한때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예단 한 것이 적중하여 상당히 많은 고객이 있었던 분으로 한국역술인협회 부산지지부장을 오랜 세월 지냈던 분이십니다.
봉선화 철학원은 육효를 하시는 것으로 들었는데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육효는 부전동에 이승철 선생님이 잘하셨지요.
말씀하신 것 처럼 형제간 숫자는 요즘에는 맞지않습니다.
저도 잊고 있었던 것을 선생님께서 상기시켜주시네요.
여수의 선생님은 일명,문둥이 사주로 유명하셨던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의 간명자료만 가지고 있지 실제 뵌적은 없습니다. 서울의 지창모가 아니라 지창룡선생님일 겁니다. 그 분은 한때 우리나라를 대표할 정도의 이기와 형기풍수의 대가로 알려져 있었는데, 1980년 후반에 손석우 선셩님의 유명세에 가려지기도 했던 분이십니다.
타 지역에는 일제시대 전백인선생님, 순창에서 일명 설사주라는 별칭의 역술인이 유명했었지요
@청암철학관.연산동 1980년대에는 부산 역리학회가 부전동 병무청 아래 농협건물위 3? 4?층에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아랫길로 시장골목으로 쭈욱 내려가면 캬바레(구.태평시네마)도 있었고요...
선생님 덕분에 옛 기억을 소환해봅니다.
@청암철학관.연산동 맞습니다. 김계산선생님도 계셨지요.
1980년대에 부산애서 역술을 배울 수 있는 전문학원이 있는 곳이 부전동 역리학회와 연산로타리에서 충렬사 방면의 육교 옆 동양진리선양회 이 두곳이었지요. 그외는 대부분 개인지도이었고, 90년대 초반들어서 서면 천불철학원선생님이 광고를 많이내셨지요.
@청암철학관.연산동 1988년 부전동 신신호텔 인근에 있는 신진여인숙 2층에 있는 철학원 선생님을 찾아가니 당시 박일우 선생님의 삼명통회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인근에 있는 영광도서 2층에 올라가니 삼명통회가 있었습니다. 그 삼명통회를 보니 음오행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외에는 납음오행을 활용하시는 분을 보지못한 것 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변만리선생님은 서울 방면에서 유명하셨던 분으로 만리사주 천명과 만리의학 천의를 함께 하셨던 분입니다. 그 분의 의 명리책은 당시 '만리사주'로 알려졌었는데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녹음테이프로 전국에 통신강좌로 보급하시던 분이지요.
그 후 추송학선생님도 녹음 테이프를 제작하기도 했었지만요.
1988년경에는 부산에 백석선사의 자연에서 찾은 진역경 육합론이 잠시 알려졌었는데, 당시 5,000원 입장료를 주고 부산일보사 건물 강당에 갔다가 갓쓴 할아버지들이 많아서 많이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8.90년대에는 저처럼 사주 보는 역술가 쌤들이 많았던 시절. 그런 분위기에서는 제 실력은 2인자라도 그런시절 또 오면 좋겠어요:) 2인자라도 현재 명리가들과는 다르고 시대와 때가 안맞으니 현재 저는 다른일 하면서 밥벌이 합니다!
저도 그때가 좋았답니다.
이 책은 당시 대가를 소개한 책이 아니고, 그 당시
한국역술인협회 내지 한국역리학회에 소속된 회원 명부와 같은 성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