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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땅의 한국 교회 사적지
한국 천주교회와 관련된 만주의 사적지로는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부제품을 받은 소팔가자를 비롯하여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가 머물렀고 밀사들이 왕래했던 요녕성의 서만자(西灣子),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하고 묻혔던 마가자(馬架子) 교우촌 등이 있다. 이외에도 만주 지방의 여러 사적지로는 주로 조선 교회의 밀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드나들었으며, 1794년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모방 신부 등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거쳤던 압록강 너머의 변문을 비롯하여,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던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과 선교사들의 고난의 여정이었던 요동반도 남단의 태장하(太莊河), 백가점(白家店), 양관(陽關), 차쿠(차溝), 구련성(九連城), 봉황성(鳳凰城), 팔가자(八家子), 훈춘(琿春) 등이 기록에 남아있는 대표적 지방들이다.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의 만주 진입 경위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이수하고, 신학 과정 입문한 김대건과 최양업 신학생은 1842년 2월 15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마카오를 출발하여 상해를 거쳐 난징조약 체결 현장까지 참관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842년 10월 22일 요동(遼東) 반도의 남단인 태장하(太莊河) 해안에 도착. 10월 25일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의 두 요셉 회장 집에서 유숙하였다. 백가점은 태장하 인근, 즉 훗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거점이 된 차쿠 이웃에 있던 교우촌이다.
최양업은 11월 3일 매스트르 신부, 김대건 등과 이별, 만주 선교사 브뤼니에르(de Bruniere) 신부와 함께 요동 반도 북단에 있는 개주(蓋州) 부근의 양관(陽關) 교우촌으로 갔다가 페레올 주교가 있는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소팔가자는 길림성(吉林省)의 장춘(長春) 서북쪽 사평(四平) 인근에 있던 교우촌이다. 반면 김대건은 이 때 곧바로 북상하지 않고 1842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백가점에 거처하면서 봉황성 책문으로 나가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귀국로를 탐색하기도 했다. 김대건은 매스트르 신부의 조선 입국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는 이튿날 자신이 직접 조선에 입국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의주 변문은 기지를 발휘해서 통과하는 데 성공했으나 서울까지 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백가점으로 돌아왔다. 1843년 1월 6일이었다.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던 김대건은 1843년 3월 백가점에서 소팔가자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그 당시 1843년 초 페레올 주교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칙서를 받고 비로소 제3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된 사실을 알게 되고 그해 12월 31일 개주의 양관에서 만주 대목구장 베롤(Verrolles) 주교 집전으로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이 거행되었다. 여기에 참석한 후 다음해인 1844년 1월 14일 최양업은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 공부를 계속하고 1월 말 페레올 주교도 소팔가자로 귀환하였다. 4월에는 조선의 동북쪽 입국로 탐색에 실패한 김대건도 훈춘에서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4월∼12월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삭발례로부터 제 1∼5품까지 받고, 12월 10일경 김대건과 최양업은 이곳에서 함께 부제로 서품되었다.
1845년 상해로 건너가 8월 17일 상해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10월 12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충청도 황산포(黃山浦) 나바위[羅岩]를 거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반면 최양업 부제는 1846년 1월 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한 두번째 탐색 여행을 위해 훈춘(琿春)으로 갔다.
태장하(太莊河), 백가점(白家店)
1841년 11월 김대건과 최양업 신학생은 1842년 2월 15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마카오를 출발하여 상해를 거쳐 1842년 10월 22일 요동(遼東) 반도의 남단인 태장하(太莊河) 해안에 도착. 10월 25일 백가점(白家店)(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 교우촌으로 갔다. 백가점은 태장하 인근, 즉 훗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거점이 된 차쿠 이웃에 있던 교우촌이다.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은 다시 거처를 개주(蓋州) 양관(陽關) 교우촌으로 옮겨갔으나 김대건은 백가점에 머물면서 매스트르 신부에게 신학을 계속 배우며 조선으로 입국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곳 백가점에서 김대건은 다시 조선교회 소식을 전해 들었다. 기해박해로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매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조선 입국을 시도하려고 했다. 결행 날짜는 1842년 12월 20일로 잡았다. 그러나 연락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만주대목구장이었던 베롤 주교조차도 무모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계획을 수정했다. 먼저 김대건이 조선 변문으로 가서 사정을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1842년 12월 23일 김대건은 중국 쪽 국경인 봉황성 변문을 출발, 4일 후 의주 변문 부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대건은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에 끼어 있던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교회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을 신학교에 보낸 모방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 3명이 모두 순교했고, 동료 최양업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도 순교했으며 어머니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매스트르 신부의 입국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는 이튿날 자신이 직접 조선에 입국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의주 변문은 기지를 발휘해서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서울까지 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백가점으로 돌아왔다. 1843년 1월 6일이었다.
그리고 그해 2월 하순 김대건은 제3대 조선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거처하던 만주 소팔가자(小八家자) 교우촌으로 옮겨 먼저 그곳에 와 있던 최양업과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면서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매스트르 신부의 명을 따라 변문으로 가서 조선에서 온 소식을 전해 받았다.
차쿠(차溝)
한국 천주교회의 중국 요동 지역 사적지이다. 차쿠는 마을 이름으로 지금은 용화산이라 부르고 있다. 두번째 사제이신 최양업 신부님의 첫 사목지 중 한 곳이며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차쿠 성당은 1867년 이래 조선에 파견 된 선교사들이 박해로 입국하지 못한 채 이 성당에 거주 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1870년엔 리델 주교가 차쿠에 신학교를 설립 하였다고 한다. 현재 자리는 그 옛날 차쿠성당 자리는 아니다. 지금은 한달에 한번 미사가 올려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 요동 남부의 장하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60-70리 지점에 있는 차쿠는 인근에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용화산(蓉花山)으로 불리는데, 행정 구역상 장하 시에 속한다.
1840년대 베롤 주교는 양관 성당을 건립한 뒤, 차쿠에도 아름답고 높은 첨탑을 가진 성당을 건립하고 그 주보를 로마에 있는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과 같은 이름으로 정하였다. 왜냐하면 차쿠 주변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눈이 오면 사방이 눈으로 덮여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곳에 가기 위해서는 천산산맥의 끝 부분에 속해 있는 높은 산들을 넘어야 한다. 또 차쿠 남쪽 가까이에는 아름다운 계관산(鷄冠山)이 솟아 있는데, 이러한 차쿠의 위치에 대해 조선 선교사들은 "성모설지전 성당은 북쪽으로 영광의 산, 남쪽으로 작은 시내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계관산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차쿠 성당은 이후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목 거점이 되었으며, 베르뇌 신부와 최양업 신부도 이 곳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차쿠 성당(지금의 용화산 성당)은 1860년대에 와서 다시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왜냐하면 요동 지역 안에서도 차쿠 성당이 조선과 가장 가까웠고, 이로써 1867년 이래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이 곳에 거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건너온 파리 외방 전교회의 리샤르, 마르티노, 그리고 훗날 제7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는 블랑 신부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문에 조선으로 가지 못하고 이 곳 차쿠에서 생활하였다. 이어 조선을 탈출한 칼래 신부와 리델 신부도 차쿠로 와서 조선 입국을 모색하게 되었다.
1869년 베롤 주교에게 요동 사목의 재치권을 부여받은 리델 신부는 조선 교회의 장상으로서, 또 1870년 이후에는 교구장으로서 모든 활동을 이끌어 나갔다. 당시 조선 선교사들이 사목 중심지로 삼은 곳은 '차쿠'(차溝)라는 교우촌이었다. 우선 그는 조선교구의 대표부를 차쿠에 두고 그 안에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리샤르 신부를 차쿠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하여 대표부 일과 경리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1876년부터 하나 둘씩 선교사들을 조선에 입국시키기 시작하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에 접근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렸는데도 리샤르 신부는 차쿠의 사목을 맡고 있었으므로 조선으로 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80년 9월 장티푸스로 사망하여 차쿠 성당 앞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동시에 리델 주교는 차쿠의 대표부를 일본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1881년에 일본을 방문하였다가 나가사키에서 발병하여 상해, 홍콩을 거쳐 다음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이후 조선교구의 대표부가 나가사키로 이전되면서 조선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요동에서의 재치권도 자연히 소멸되었다.
양관(陽關)
양관(현 요녕성 개주시 나가점)은 현재 요녕성의 개주시 남동쪽 40-50리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나가점'(羅家店)이라고 불리는 가구 수 약 50여 호쯤 되는 한적한 농촌이다.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만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E.J.F.Verolles, 方) 주교는 1840년 양관에 부임하여 아름다운 주교좌 성당(성당 주보는 '성 후베르토')을 건립하였는데, 당시 이 지역의 신자 수는 180명이었다. 이 때부터 양관 성당은 만주 남쪽의 전교 중심지가 되었다.
1842년 10월 김대건과 최양업, 매스트르 신부와 만주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이 요동 땅에 상륙한 뒤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에 머물다가 하나둘씩 '양관'(陽關)을 거쳐 만주 북쪽의 소팔가자로 올라갔다. 김대건은 이 때 곧바로 북상하지 않고 1842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백가점에 거처하면서 봉황성 책문으로 나가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귀국로를 탐색하기도 했다.
양관 성당은 이후 한국 천주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1843년 12월 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이 이 곳에서 있었으며, 최양업, 김대건 신학생이나 조선 선교사들은 만주를 여행할 때 자주 이 곳에 들렀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신부도 만주 선교사로 있을 당시 이 성당에 거처하면서 사목하였고, 최양업 신부는 1849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 요동으로 건너와 7개월 동안 베르뇌 신부의 보좌 신부로 양관에서 첫 사목을 시작하였다.
"저는 5월에 함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 다시 요동으로 왔습니다. 이 곳(요동의 양관)에서 7개월 동안 머물면서 만주 대목구장 직무 대행을 맡고 있는 베르뇌 신부님의 명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에는 신자들에게 짧은 강론을 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큰 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주며 성체를 배령해 주는 일에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최양업 신부의 1850년 10월 1일자 서한).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1869년 조선 선교사들이 베롤 주교에게 요동 일부의 사목 재치권을 이관받게 되면서 양관 지역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당시 조선 선교사들이 사목 중심지로 삼은 곳은 '차쿠'(차溝)라는 교우촌이었다. 현재 요동 남부의 장하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60-70리 지점에 있는 차쿠는 인근에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용화산(蓉花山)으로 불리는데, 행정 구역상 장하 시에 속한다.
지금 이 곳의 상황을 그려 보면, 양관 성당의 옛 터는 남향으로 마을 뒤편에 있으며,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6칸)과 옛 성당의 주황색 벽돌담만이 남아 있다. 또 마을 앞 남쪽은 낮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으로 난 마을 입구에는 제법 큰 냇물이 흐른다. 베롤 주교가 지은 처음의 성당은 문화 혁명(1966-1976년) 때 홍위병들에게 파괴되었다고 한다.
구련성(九連城), 봉황성(鳳凰城),
단동 시내를 빠져나와 압록강을 따라 약 15km 북상하면 구련성(九連城)이 있다. 명, 청 때에는 국경을 건널 때 양국사절이 꼭 거쳐야 하는 조선과의 통상 요지였다. 길이 꼬불꼬불해 30분 이상 걸리는 그곳에 남은 흔적이라고는 마을 한 가운데 어떤 식당 앞 모퉁이에 세워진 <구련성터>라는 표지석 하나 뿐이었다. 그저 버스 두 대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옆의 식당 집에 간신히 붙어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놓치기 십상이다. 본래 구련성이 고구려의 옛 성이기 때문에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까지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노력해온 중국은 구련성 대신 뒤쪽의 산에 있던 박작성을 대타로 활용했다. 15세기 정도에 지어진 조그만 이 성을 개축해 ‘호산장성’이란 어마어마한 이름을 붙여놓았다. 그 장성(長城)이란 말은 바로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으로 주장하기 위한 정략적 명칭. 그래서 구련성은 역사 왜곡의 대표적 희생물이 되고 있다.
구련성이 우리 천주교회사에 중요한 이유는 이 지역이 바로 조선을 빠져나온 밀사들, 그리고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도 바로 여길 통해 중국으로 빠져나온 주요 루트이기 때문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모방 신부에 의해 선발된 세 신학생,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는 1836년 12월 3일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를로), 이광렬(요한) 등 교우 안내원들을 따라 의주 변문으로 향했다. 그해 12월 28일 중국쪽 국경인 봉황성 변문에 도착한 세 신학생은 조선 안내원들과 작별한 후 이제는 중국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남하하기 시작, 6개월이 넘는 대장정을 거쳐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난 지 7개월 4일 만이었다. 오늘날 발달된 육로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5000㎞가 훨씬 넘는 길이었다. 지금은 그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구련성은 이들이 중국으로 빠져나온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책문을 벗어나 우측으로 봉황산을 끼고 20km가량 북상하면, 봉성시가 나온다. '봉성후시'로 알려진 변경 무역도시이다.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국가에서 일정부분 인정해주는 관무역이었지만, 압록강을 건너는 사신행렬에 포함되어 따라나선 상인들에게는 매우 큰 이문을 남기는 무역활동의 현장이었다. 단동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봉성(펑청)시에 위치하는 봉황산은 역사적으로 고구려 산성인 오골산성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그 산성을 봉황산성으로 불리고 있고 바로 옆에는 조선시대에 청나라로 들어가던 입구라는 책문후시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변문으로 예전의 지명을 대신하고 있는 곳으로 한국의 역사와는 상당히 관련있는 지역이다. 산위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암벽산이다. 책문후시란 책문지역에서 국가에서 지정하지 않은 비공식적인 무역거래를 말하는 것이다.
책문후시(柵門後市)
조선 시대 청(淸) 나라와의 사이에 성행했던 밀무역 시장이다. 인조 24년(1646)부터 해마다 봄ㆍ가을에 걸쳐 의주(義州)ㆍ중강(中江)에서 관(官) 무역이 행해졌는데, 이때 사행(使行) 중에 섞여 압록강을 넘어 책문 밖에서 행하던 사무역(私貿易)을 말한다. 중강후시가 혁파되고 청과 우리나라 사신들의 왕래에 편승, 요동의 차호(車戶)와 개성 상인간의 통상이 시작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엄히 금하다 못하여 징세까지 하였으나 수출량이 막대하여 정조 11년(1787)에 혁파하였다. 거래 물건은 조선 측에서 금, 인삼, 종이, 피모류(皮毛類), 청국 측은 비단, 광목, 약재 기타 보석류가 주류를 이루었다.
경원개시 [慶源開市]
조선 중기 청나라와 물물교역을 하기 위해 경원(慶源)에서 열린 시장이다. 당시 청나라와의 무역은 조공무역(朝貢貿易) 이외에 정기적으로 개설하는 국경지대의 호시장(互市場)이 있었다. 두만강 방면에는 1646년(인조 24) 이래 매년 또는 격년으로 회령개시(會寧開市)와 경원개시가 열렸으며, 두 나라 관헌의 입회하에 물물교역이 성행하였다.
경원에서는 조선의 소·보습·솥 등과 청나라의 소록피(小鹿皮) 등의 피물(皮物)이 교환되었다. 회령·경원개시를 쌍시(雙市) 또는 북관개시(北關開市)라고 하였으며, 교환비율은 솥 1개에 소록비 1장, 보습 1개에는 소록비 2장이었다.
개시무역(開市貿易)과 후시무역(後市貿易)
개시무역(開市貿易)은 국경지역에 공식 개설되는 국가에서 인정한 공적인 무역이며, 후시무역(後市貿易)은 개시를 기회로 조선 상인과 청국 상인들 사이에 사사로이 이루어지는 국가에서 인정치 않은 사적인 무역을 말합니다.
훈춘(琿春) 육도포ㆍ훈춘ㆍ도문본당
1883년 2월 하순 김대건은 제3대 조선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거처하던 만주 소팔가자(小八家자) 교우촌으로 옮겨 먼저 그곳에 와 있던 최양업과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면서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매스트르 신부의 명을 따라 변문으로 가서 조선에서 온 소식을 전해 받았다. 그해 12월 31일 양관에서 거행된 페레올 주교의 주교 성성식에 참석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새로운 입국로 탐사를 준비한다. 이번에는 동북 지역을 통한 입국로 개척이었다. 당시 조선은 두만강변 국경 도시 경원에 2년 한 번씩 장을 열어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교역을 허락했다. 이를 경원개시(慶源開市)라고 했는데, 장이 서는 혼잡한 틈을 이용해 입국한다는 계획이었다.
1844년 2월 5일 김대건은 중국인 신자 안내원 한 명을 데리고 눈덮인 소팔가자를 나무썰매를 타고 달려 장춘에 도착한 후 길림과 영고탑 부근을 거쳐 약 한 달 만인 3월 초 중국쪽 국경 도시 훈춘에 도착했다. 3월 9일 경원개시가 열리는 틈을 이용해 국경을 넘어간 김대건은 미리 와 있던 조선 신자들을 만나 동북 지역을 통한 선교사 영입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쉽지 않다는 대답만 들어야 했다. 다시 한 달간의 여행을 통해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공부를 계속한 후 그해 11월 최양업과 함께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에게서 부제품을 받았다.
복잡한 지정학적 위치 만큼 혼란스런 교회 역사를 지녀온 곳이다. 1930년대 폐쇄된 육도포 성당은 흔적없이 벌판만 남아있고, 화려했던 과거 훈춘 성당은 현재 500여 명 공동체이며, 도문 성당 터도 개발에 사라져 갔으며공소가 명맥 이어가고 있다.
조ㆍ중ㆍ러 3국 국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방천(防川, 팡촨)에 선다. 도문(圖們, 투먼)ㆍ혼춘(琿春, 훈춘)시와 경신(敬信, 징신)진을 육도포(六道泡, 류또포우) 마을을 거쳐온 참이다. 해질녘 두만강가에 서니 비안개 사이로 함북 선봉군 조산리와 녹둔도가 아스라하다. 1587년 당시 이순신(1545~98) 장군이 여진족 손에서 지켜낸 녹둔도는 현재 러시아령으로 밟을 수 없는 땅이 됐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답사기
#육도포 본당의 터전은 풀밭으로 바뀌고
엄태준(혼춘본당 주임) 신부의 안내에도 육도포성당 터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물어물어 혼춘시 경신진 육도포 마을로 향했다. 그나마 '육도포'라는 땅이름이 남아있어 다행히 성당 터를 찾을 수 있었다. 1934년 성당과 사제관이 중국 공산당 침탈로 전소됐고 교우촌도 쇠락을 거듭했지만, 1972년 용산호변에서 평지로 옮아간 육도포는 그대로 잔존해 있었던 것.
수소문 끝에 만난 함북 경원 출신의 도상협(70)씨는 "1945년초 소련군이 탱크를 몰고 지나가며 불에 탄 성당 잔해마저 다 무너졌고, 성당 석재는 육도포촌을 새로 건설하는데 썼다"며 일행을 원래 성당 터로 안내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도 석재만 남아있었다고 말한 그는 육도포 공소는 1942년에 폐쇄됐고 "지금은 천주교회 공동체가 남아있지 않다"고 전했다.
육도포 본당의 옛 터전은 용산호변 서쪽이었다. 야트막한 산등성이만 넘으면 러시아땅 용산호변에는 "경신 바람이 소 머리를 깬다"는 말 그대로 거센 바람만 불어올 뿐 어디에서도 성당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육도포는 1905년께 복음이 들어와 1907년 원산본당에서 13명이 브레(A. Bret)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오랜 공동체였다. 이후 1909년에는 100여 명의 세례자를 내고 공소 또한 7곳이나 됐다. 1923년에는 원산대목구장 사우어(B. Sauer) 주교가 초대 주임에 퀴겔겐(C. Kugelgen) 신부를 임명, 본당으로 설정됐고 바인거(M. Bainger)ㆍ되르플러(E. Doerfler)ㆍ트라버(H. Traber) 신부 등이 전교와 해성학교를 통한 교육사업을 병행, 교세가 크게 신장된다. 그러나 마적과 공산군 침탈로 1932년 트라버 신부가 함북 경흥으로 숙소를 옮기며 혼춘본당 관할이 됐다가 1934년에는 본당이 폐쇄된다.
#옛 혼춘성당 터에는 빌딩이 지어지고
훈춘성당과 그 관할 해성학교 터에는 상성(上城)국제빌딩 신축이 한창이다. 1946년 본당이 폐쇄된 뒤 그 터전에 중국중앙은행인 런민(人民)은행과 사원주택으로 쓰여지다 지금은 재개발 바람이 불어 성당은 흔적도 없다. 그 자리가 현재의 혼춘시 제1소학 맞은편으로, 성당 및 부속건축물 부지가 3만3058㎡(1만 평)에 이르던 혼춘성당은 교회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웃한 연변 덕성법률사무소 건물에 올라가 5층 복도에서 내려다보니 옛 영화를 가늠할 수 있다. 1933년 구 일본 영사관 북쪽 부지에 독일과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만주국 화폐로 10만 원을 빌려 이듬해 완공한 혼춘성당은 당시 이 일대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혔으며,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병원, 학교, 기타 부속건물 등 교회건축물이 총 7채나 됐다.
옛 혼춘본당의 활력은 교회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1924년 퀴겔겐 신부가 혼춘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을 때 신자가 929명, 공소 또한 16곳에 이르렀다. 이어 2대 주임 되르플러 신부가 1934년 학교와 사제관, 수녀원을 신축하고 연길 성 십자가 수녀회(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수도자들을 초빙해 진료소와 여성 대상 야학을 개설하면서 혼춘본당은 1936년 신자 수 1244명, 공소 수 22곳으로 비약적 신장세를 보인다. 이에 연길교구 첫 조선인 사제인 김충무 신부가 혼춘본당에 보좌로 파견돼 되르플러 신부와 함께 활동했다. 그러나 1946년 5월 사제와 수도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면서 혼춘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만다.
그 명맥은 1979년 개혁ㆍ개방 이후 혼춘본당이 잇고 있다. 혼춘시 춘성로 우의골목 28호에 자리한 현 성당은 1988년 6월에 당시 중국 인민폐로 14만 원을 들여 992㎡(300평) 규모로 신축됐다. 혼춘본당의 현 교세는 500여 명으로, 조선이주민이 이 중 절반인 250여 명이다.
#옛 도문본당 터전 역시 층집으로 재개발되고
옛 도문본당 터를 찾다가 류충렬(74)씨를 만났다. 도문시 제2소학교 앞 빈터를 도문성당 자리로 알고 찾아갔다가 낭패를 겪은 뒤였다. 그 자리는 1980년대 도문공소가 있던 자리라는 게 현지인들의 전언이었다. 해방 전 도문성당에 놀러가곤 했다는 류씨의 안내로 찾아간 옛 도문성당은 현재 시내 서남쪽 남산 언덕 신화가 12위 6조 1호였다. 현지에선 회막동으로 불리는 조선이주민 마을로, 1947년 도문본당이 폐쇄되면서 중국인민해방군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가 주둔하다 도문위생검역소 및 직원 주택으로 쓰여졌고 이제는 층집(아파트) 재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부지가 207㎡(63평)이던 옛 성당 터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황량했고, 폐가는 오갈 데 없는 빈민들이 차지했다.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도문본당의 역사는 아주 짧다. 1941년에 설정돼 7년만에 폐쇄됐기에 기록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초대 주임 벤츠(A. Benz) 신부는 1942년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했고, 연길 성 십자가 수녀회도 도문에 수도자 2명을 파견해 전교와 교육, 의료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1946년 4월 부활시기 때 벤츠 신부가 중국 공산당에 체포 투옥됨으로써 어려움을 겪었고, 보좌로 사목하던 김봉식 신부가 2대 주임으로 활동했지만 1947년 8월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본당 또한 폐쇄된다.
현재 도문 복음화 소명은 도문공소가 이어간다. 배석현(프란치스코, 82), 리순금(도로테아, 62)씨 등은 1979년 공동체를 재건, 1984년 국경로 72의 20에 65.7㎡(20평) 규모 경당을 지었고, 1996년 8월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연합회 후원으로 부지 4397㎡(1330평)에 건축면적 1056㎡(319평) 규모 현 도문성당을 준공한다.
하지만 이 성당은 방음ㆍ방한 설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아직 전례공간으로 쓰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전호승(베네딕토, 70) 회장을 중심으로 80여 명은 성모신심단체를 결성하는 등 열심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경신 공소
신부님께서 이 길을 지나실 때 이 교우촌에서 머무셨을 것이라고 하셨다. 김대건 성인을 주보로 모시고 기도했던 곳인데 버려졌다가 훈춘성당의 노력으로 경신공소가 재건축 되어 성당으로 승격시켰으며 신자들이 직접 건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