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 人터뷰] 탁구 DNA의 힘, 유남규와 딸 유예린2017.09.12 오후 04:49
해외야구 이영미 헤럴드스포츠 대표기자, 네이버 '이영미의 스포츠 인 스토리' 칼럼 연재. 추신수&류현진 MLB일기 담당자
<유남규 감독의 외동딸 유예린. 초등학교 3학년 탁구선수이다. 아빠의 탁구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사진=이영미)> 스포츠에선 유독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2세’들의 활약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차범근-차두리(축구), 허재-허웅(농구), 이종범-이정후(야구) 등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같은 종목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아들의 활약은 세상의 관심과 함께 주목을 받는다. 때론 ‘금수저’라 폄훼되기도 하고 성적이 좋지 않을 땐 다른 선수들보다 두세 배 이상의 비난을 받기도 한다. 선수 생활 내내 따라다니는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이름은 그들에게 자부심과 자격지심을 동시에 안겨준다.
탁구에도 스포츠 유전자를 뽐내는 2세들이 많다. 그중 유남규(49) 삼성생명 여자탁구 감독의 외동딸 유예린(11·군포 화산초)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빠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유남규 감독이 누구인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남자 단식 금메달, 19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 외에 국제대회 때마다 메달권에 오르는 성적으로 한국 탁구 역사와 동고동락한 레전드 아니었나. 유남규 감독의 딸이라는 사실은 유예린에게 축복을 선물했고 숙제를 안겨줬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 자신이 처한 환경을 정확히 인식하기 어렵지만 탁구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순간 유예린의 인생은 ‘유남규의 딸’이란 타이틀을 안고 출발했다.
군포 화산초등학교 3학년 유예린과 먼저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영미 人터뷰]에서 만난 최연소 인터뷰이이다. 인터뷰하는 동안 아버지인 유 감독은 자리를 비켜줘야만 했다. 딸이 아빠가 있는 건 불편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첫 질문을 고민하다가 “탁구가 재미있느냐”는 재미없는 질문을 던졌다.
“탁구요? 음…, 탁구치는 건 좋아하는데 혼날 때는 재미없어요. 그리고 전 훈련보단 게임하는 게 더 좋아요. 훈련은 지루한데 경기할 때는 전혀 지루하지 않거든요.”
유예린은 지난 8월 7일 교보생명컵 꿈나무탁구 여자단식 3학년부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준결승, 결승전 모두 3-0 완승을 거뒀다. 유예린이 눈에 띄는 부분은 다른 선수들보다 탁구를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 본격적으로 라켓을 잡고 연습한 건 1학년 때부터였다. 그동안 공동 3위, 준우승 등의 성적을 올리다 꿈나무 탁구대회에서 드디어 우승에 이른 것이다. 보통 다섯 살이 되면 탁구를 시작하는 선수들과 달리 유예린은 세 살이나 늦은 여덟 살에 탁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유예린에게 아버지가 탁구의 레전드로 불리는 걸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빠가 유명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빠랑 식당에 밥 먹으러 가면 사인 요청해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어떤 식당은 맛있는 반찬도 그냥 갖다 주세요. 이전에는 잘 몰랐는데 탁구하고 나서부턴 아빠가 사람들에게 사인해주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어요. 저도 탁구 잘해서 아빠처럼 사인을 많이 해주고 싶어요.”
메뉴에 없던 맛있는 반찬이 나오고, 사인 요청해오는 사람들을 볼 때 아빠의 유명세를 느낀다는 유예린. 탁구가 하길 싫은 때는 언제일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 1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네 파트씩 훈련하거든요. 훈련을 많이 하면 할수록 힘들어요. 하기 싫어지고.”
앞서 “경기하는 건 재미있는데 훈련하는 건 재미없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탁구선수 유예린의 꿈은 '아빠처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라고.(사진=이영미)> 유예린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대한항공의 양하은. 아버지가 이끄는 삼성생명 선수들 중에는 좋아하는 선수가 없느냐고 묻자 그는 ‘only 양하은’이라고 말한다.
“하은 언니를 직접 만난 적이 있었어요. 언니가 저랑 탁구를 쳐줬거든요. 그때 엄청 긴장했어요. 언니 앞에서 실수할까 봐요.”
훈련이 재미없다고 해도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다고 어른스럽게 반응하는 유예린. 그는 자신의 꿈이 “아빠처럼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인터뷰를 마친 유예린이 나가고 유남규 감독이 방으로 들어왔다. 유 감독이 “인터뷰 잘했어?”라고 딸에게 묻자 대답 대신 웃음을 짓고 방에서 뛰어 나가는 유예린. 그런 딸을 바라보며 유 감독은 딸이 뒤늦게 탁구를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결혼을 서른아홉 살에 해서 마흔 살에 예린이가 세상에 태어났어요. 아내가 미대 출신이라 아빠를 닮기보단 아내를 닮아 미술을 전공하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예린이의 움직임이 평범하지 않더라고요. 한 번은 천장에 고무줄을 붙여 놓고 탁구공을 매달아 놓은 적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라켓으로 그 공을 맞추지 못해요. 공이 계속 움직이니까요. 그런데 예린이는 처음 잡아본 탁구채로 스텝을 밟으며 리듬에 맞춰 탁구공을 때려내더라고요. 탁구는 하체가 중요하거든요. 예린이의 스텝이 정말 좋았어요. 아주 깜짝 놀랄 정도로요.” 그래도 유 감독은 탁구를 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운동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선수로 성공할 수 있는지 잘 아는 그로선 딸에게 그 힘든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스키, 발레, 수영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줬어요. 당연히 미술도 가르쳐봤고요. 탁구 말고는 다 해본 것 같아요. 신기한 건 애써 피하려 했던 탁구를 찾더라고요. 탁구할 때는 더 집중했고, 더 재미있어 했어요. 아내랑 상의 후 1학년서부터 탁구를 배우기 시작한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시킬 걸 하는 후회도 했었죠.”
요즘 유소년 탁구 선수들이 탁구를 처음 시작하는 시기는 대부분 다섯 살 때부터. 유예린은 그보다 세 살이나 늦은 여덟 살에 시작했으니 모든 면에서 어려움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강한 유전자의 힘을 보여줬다고 한다.
“탁구 시작한지 3개월 만에 서비스하는 법도 모르고 쇼트 게임만 배워서 대회에 출전했었어요. 그런데 성적을 내더라고요. 2학년 때는 결승에서 역전패하는 바람에 준우승에 머물렀고요. 예린이 또래의 선수들 중 무려 8명이 탁구인 출신의 자녀들입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는 의미죠.”
탁구 레전드 유 감독이 보는 선수 유예린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걸까.
“유전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감은 타고 났어요. 조금 더 노력한다면 스스로 자리를 찾아갈 거라고 믿습니다. 예린이 또래의 선수 중 한 아이는 탁구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분에 학교에서 연습 마치고 곧장 아버지의 탁구장으로 가서 밤 9시까지 탁구를 쳐요. 전 도저히 그렇게까지 못 시키겠더라고요. 예린이는 남들보다 3년을 늦게 시작했고 연습량도 많이 적어요. 다른 선수들보다 더 많이 훈련해야 하는데도 말이죠. 너무 훈련을 강요하면 아이가 탁구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될까봐 걱정이고, 그렇다고 그냥 보고 있자니 답답하고. 연습량을 늘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지금처럼 아이를 지켜봐야 하는 건지 감독인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감독이 모르면 누가 알겠나. 아무리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는 감독이라고 해도 자식 일에는 해답을 찾기가 어려운가보다.
“그동안 한국 탁구가 김택수, 오상은, 유승민이 은퇴한 이후 중국은 물론 일본한테도 이기질 못했어요. 일본은 다섯 살 때부터 아이들을 일대일 지도로 집중 훈련을 시키거든요. 그런 환경 속에서 탁구를 배우다보니 현재 세계 랭킹 20위 안에 10명의 일본 선수들이 포함돼 있어요. 여자 탁구도 마찬가지고요. 한국은 현재 1명의 코치가 8명의 선수들을 상대하고 있어요. 일대일 훈련은 어려운 현실이죠. 경제적인 부담도 크고.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예린이를 어떻게 성장시켜야 할지 고민이 커요.”
유 감독은 딸이 키가 더 크길 바란다. 체력도 더 탄탄했으면 좋겠다. 그는 “전문가 입장에서 보니까 자꾸 욕심이 생긴다”면서 미소를 띠었다.
“나도 아이가 원하는 대로 일요일에는 라켓도 못 잡게 하고 마냥 놀게 해주고 싶어요. 그러나 선수로 크려면, 잘하는 선수로 성장하려면 그런 방법은 도움이 안 되거든요.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오기도 있어야 하고 승부를 즐기려는 마음도 필요한데 예린이가 아직 나이가 어려 그걸 잘 몰라요. 훈련을 통해 쌓아가야 하는데 말이죠.”
유 감독은 일요일, 팀 전체가 휴식을 취하는 날에는 딸과 함께 체육관으로 출근한다. 약 한 시간 정도 딸을 훈련시키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 하지만 딸은 일주일 중 딱 하루 쉬는 날, 아빠 손에 이끌려 훈련을 하는 게 즐겁지만은 않다.
유 감독에게 물었다.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스포츠 스타 2세들의 인생에 대해서. 잘하면 부모의 영향으로, 못하면 부모의 영향을 받고도 못하는 걸로 지적받는 현실에서 대를 이어 운동선수의 길을 걷는 자식의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물론 혜택을 받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린이가 날 아빠로 뒀기 때문에 이렇게 개인 훈련도 받는 거잖아요. 다른 부모들 눈에는 엄청난 혜택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가끔은 누구의 딸이라는 게 어려움을 안겨주기도 해요. 예린이가 또래의 선수들 보다 압도적인 실력을 보인다면 괜찮아요. 문제는 엇비슷한 실력을 보이는 선수들이 여럿이고, 추천을 받아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양보해야 한다는 거죠. 유남규 딸이기 때문에요. 만약 그 기회를 잡는다면 오해를 살 수밖에 없어요. 유남규 딸이니까 혜택을 준다면서. 탁구를 하면 할수록 유남규의 딸이라는 수식어가 예린이에게는 힘든 수식어가 될 지도 몰라요. 그걸 이겨내려면 실력을 키울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유 감독은 탁구를 하는 딸을 보며 자신이 가르치는 선수들을 좀 더 세심히 배려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요즘 선수들에게 호되게 몰아치면서 많은 훈련량을 강요하기 어려워요. 잘못하면 운동 그만두겠다고 포기하는 선수가 나올 테니까요. 그렇다고 선수들 입맛에 맞게 하고 싶을 때만, 즐거운 운동만 추구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성적을 얻을 수가 없어요. 그 경계선에서 생각이 많아져요. 앞으로 지도하는 게 더 어려워질 거란 걱정도 들고요. 지도자들이 심리학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선수의 심리를 읽고 이해해야 대화가 가능하니까요. 예린이를 보면서 그런 부분을 더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유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빠로, 지도자로 느끼는 문제들과 그 해결 방법을 찾아가면서 일어나는 내적 갈등이 절로 와 닿았다. 자신의 길을 따르는 딸을 보는 시선, 그가 왜 ‘경계선’의 어려움을 언급하는지 이해가 될 것 같다. 그래도 유예린은 좋겠다. 아빠가 탁구 레전드 유남규라서.
<좋은 선수가 되려면 지금보다 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걸 잘 알고 있는 유남규 감독. 이왕 시작한 탁구라면 한국 여자탁구에 도움이 되는 선수로 자라길 바라는 아빠의 마음이다.(사진=이영미)>
기사제공 이영미 칼럼
헤럴드스포츠 대표기자, 네이버 '이영미의 스포츠 인 스토리' 칼럼 연재. 추신수&류현진 MLB일기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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