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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 22:39)
우리 상도중앙교회는 “교회다운 교회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실까요? 다섯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레이뚜르기아)
둘째,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디다케)
셋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케리그마)
넷째, 하나 되는 것입니다.(코이노이아)
다섯째,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디아코니아)
금년 2007년에는 이 다섯 번째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물론 이 다섯 가지가 다 활발하게 펼쳐져야 하겠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보다 주력하고자 하는 것이 이 다섯 번째 디아코니아입니다. 그래서 금년 표어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정했습니다.
본문 마 22:39로 삼았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경 전체 메시지를 두 가지로 요약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의 명령을 보다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왜?
먼저 주님께서 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 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레 19:18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명령하신 그 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위기 19장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우선 1-2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레 19:3 이하에 거룩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것들을 여러 가지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9절에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라고 말씀했습니다. 15절에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라고 말씀했습니다. 16절에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말씀들은 사실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말씀하시고 구체적이 내용을 말씀하실 때 우리는 이런 내용들을 기대하게 됩니다. “40일 금식 기도하여라, 성경을 1년에 10독 하여라, 하루에 5차례 기도하여라 등등 ... ”
그런데 거룩하라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내용을 말씀하신 것은 추수할 때 밭에 떨어진 이삭을 다 줍지 말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재판할 때 공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남을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그대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룩은 “이웃 사랑”과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은 이웃을 사랑함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거룩은 이웃 사랑 속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거룩을 오해해 온 경향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두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다”와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입니다. 더 나아가 거룩과 사랑을 구별할 뿐 아니라 분리하려고 해왔습니다. 이 두 가지 성품 중 어느 것이 우선적인가를 놓고 신학자들이 오래 논쟁해 오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서 일반 신자들도 거룩과 사랑을 구분하고자 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서는 것이고, 사랑은 이웃을 섬기는 것이라고 구분해서 생각했고, 우선 순위를 거룩에 두고자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거룩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란 세상과 담을 쌓고 종탑을 높이 세우고 모든 정성과 힘과 관심을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집중하는 교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룩한 성도란 기도 생활에 몰두하고 금식하고 성경 묵상하는 일에 모든 힘을 다 쏟는 신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키 모리히로라는 일본의 사직 작가가 [마더 테레사와 함께한 날들]이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마더 테레사의 생생한 사진들 또 그분과 나누었던 작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의 대부분은 버림 받은 아이들을 위한 “고아의 집”,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임종의 집”, 나병환자들의 자립을 돕는 “평화의 마을” 등에서 땀 흘려 사랑의 봉사를 하는 테레사 수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을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글로 적고 있습니다.
그녀의 금식 기도하는 모습, 그녀의 성경 연구 모습, 그녀의 설교하는 모습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그녀의 탁월한 신학적 식견, 남다른 깊이 있는 영적 통찰 이런 것들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녀를 “성녀” 거룩한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거룩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신 거룩의 본성입니다.
왜 주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신 그 말씀을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위해서입니다.
누구?
그러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눅 10장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을 방법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고 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내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께서 답하시면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제사장, 레위인이 차례로 못 본척하고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지나던 사마리아 사람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정성스럽게 도와주었습니다.
이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되 물으셨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답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것은 율법교사의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자기의 필요를 따라 이웃을 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이웃을 도왔다고 만족하고 위안을 얻기 위한 대상을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필요한 이웃을 찾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점을 바꿔서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를 필요로 한 이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초점을 이웃의 필요에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이웃을 찾을 때 우리의 입장, 우리의 관점, 그리고 우리의 필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입장, 그분들의 관점, 그리고 그분들의 필요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분들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선입관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의 충격파를 던지고자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만 이웃의 범위에 넣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더욱 사마리아 사람들은 경멸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셨습니다. 그 사람이 동족인 유대인들 특히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피해 도망쳤던 강도 만난 사람을 찾아가서 참된 이웃이 되어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이웃을 찾을 때 우리는 선입관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어떤 범위를 정해 놓고 그 안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8월 프랑스 브르타뉴의 생 말로 요새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 군이 미국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때 독일 군 지휘관이 미군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요새 아래를 통과하는 땅굴 안에 많은 독일 부상병들이 누워있는데 구급품이 동이 나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미군이 약품을 보내줄 수 있는가?”
미군이 이에 응해서 붕대와 부목 각종 약품을 실은 지프차를 땅굴 근처까지 보냈습니다. 땅굴 속에서 독일 의무관이 7명의 미군 포로를 데리고 나와서 풀어주고 경례로 감사 표시를 한 뒤 보내준 약품을 가지고 땅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몇 분 후 멎었던 총성이 다시 울리고 요새 부근은 다시 전투가 시작됐답니다.
무척 이해하기 힘든 실화 내용입니다. 비록 적군이라도 그 필요로 챙겨서 도와주는 이 박애정신은 바로 거룩의 구체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웃이 누구일까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몸처럼 사랑하라”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을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기중심주의(Egocentrism)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주의란 늘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기 입장에서 행동하려고 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창 3:12를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하나님께 변명한 말입니다. 하와가 나게 먹으라고 줘서 먹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와는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서 나와 함께 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변명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하와가 내게 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내게 보내시지 않았다면 결코 자기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담에게 말씀하셨고 아담은 그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주의는 이미 인간이 타락하면서 인간의 심성 안에 자리 잡고 있어왔습니다. 우리가 죄 중에 태어나면서 우리 안에도 깊이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타인중심주의(Allocentrism)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타인중심주의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서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300년 넘게 만석꾼 부자 자리를 지켜온 경주 최 부잣집 가훈은 이 타인중심주의적 이웃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1. 절대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휘말려 집안의 화를 당할 수 있다.
부자가 권력까지 가지면 자칫 부를 위해 그 권력이 사용되어 남에게 피해를 끼칠까 해서입니다.
2. 재산은 만석(5천 가마니) 이상을 모으지 말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필요 이상의 부를 어려운 이웃과 나누어 함께 했음입니다.
3.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내라.
어려운 이웃들 마음을 헤아리고 있음입니다.
4.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매입하지 말라. 흉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 값에 내 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케 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돌아봤음입니다.
5.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늘 어려운 이웃의 마음을 함께 나누고자 함입니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라.
이웃이 어려움에 오래 고통 겪음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없었음입니다.
이런 타인중심적 이웃사랑으로 이 경주 최부잣집은 인근 이웃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았고, 그래서 그 부가 300년을 넘게 이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중심적 사랑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웃의 입장을 배려하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금년 2007년에는 우리가 더욱 이웃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가고자 합니다. 이웃을 향해 마음을 쓰시기 바랍니다. 특히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조그만 것 하나라도 나누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