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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기에는 펄펄 날았던 고든 ⓒ gettyimages/멀티비츠 |
지미 롤린스(453도루 현역 4위)와 체이스 어틀리(성공률 88.5% 현역 1위)를 길러낸 데이비 롭스(Davey Lopes)의 새로운 제자가 된 디 고든(26)은, 첫 52경기(팀 56경기)에서 34개의 도루를 성공시킴으로써 98개 페이스를 이어갔다. 롭스의 제자답게 성공률 역시 최상급이었다(34도루/3실패).
*이름을 '로페스'라 잘못 읽기 쉬운 롭스는 통산 557도루를 기록한 최고의 대도 중 한 명. 2루수였던 그는 1루수 스티브 가비, 3루수 론 세이, 유격수 빌 러셀과 함께 1970년대 다저스의 '황금 내야진' 멤버로 활약했다. 필라델피아의 주루 코치를 맡아 도루 성공률 5년 연속 메이저리그 1위라는 신기록을 만들어냈으며, 다저스 이적 후에는 고든에게 자신의 도루 비법을 전수했다.
100도루는 어렵더라도 26년 만의 80도루는 해낼 것 같았던 고든은, 그러나 이후 급격한 체력 저하가 일어나며 90경기(팀 96경기)에서 30도루/16실패에 그쳤다. 64도루/19실패(성공률 77.1%). 고든은 1975-1976년 롭스 이후 다저스의 첫 번째 도루왕이 됐지만, 다저스는 그를 마이애미로 보냈다.
빌리 해밀턴(24·신시내티)의 등장은 센세이션이었다.
2012년 132경기에서 155도루/37실패(80.7%)를 기록함으로써 빈스 콜맨이 가지고 있던 마이너리그 최고 기록(113경기 145도루/31실패)을 갈아치운 해밀턴은, 이듬해 9월 메이저리그에 나타나 야디에르 몰리나(세인트루이스) 러셀 마틴(피츠버그) 등과 대결을 벌여 13경기 13도루/1실패라는 아카데미급 예고편을 찍었다. 특히 해밀턴은 스타트를 끊고 2루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2.98초에서 3.03초 사이로 측정됨으로써 리키 헨더슨의 전성기 기록(3.04~3.10초)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상영된 본편은 예고편과는 영 딴판이었다. 메이저리그 데뷔 후 3년 연속 100도루에 성공한 콜맨과 달리 152경기에서 56도루/23실패에 그친 것. 성공률 70.9%는 더 실망스러웠는데, 도루 성공에 +1점, 도루 실패에 -2점을 주는 <빌제임스 핸드북>식 계산에 따르면, 지난해 해밀턴이 도루를 통해 얻어낸 베이스런닝 지수는 +10에 불과했다(1위는 +35를 기록한 호세 알투베).
지금까지 시즌 100도루에 성공한 선수는 네 명. 1962년 다저스의 모리 윌스(104개)가 20세기 첫 100도루를 만들어냈고, 1974년에는 루 브록(118개)이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홈런을 때려내기 어려운 미식축구 겸용 구장의 등장으로 모두가 발벗고 도루에 나섰던 1980년대. 오클랜드 리키 헨더슨(1980년 100개, 1981년 130개, 1983년 108개)과 세인트루이스 빈스 콜맨(1985년 110개, 1986년 107개, 1987년 109개)은 발로 양 리그를 대표했다. 그러나 헨더슨이 1988년 93개를 기록한 후로는 80도루조차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100도루는 테드 윌리엄스의 마지막 4할(1941) 만큼이나 신성 불가침한 영역이 된 것일까.
흔히 '3S'(스타트 스피드 슬라이딩)를 도루의 3요소라고 한다. 하지만 100도루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체력과 출루가 더해져야 한다.
헨더슨이 해밀턴보다 느린 발(?)로 통산 1406도루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은 최고의 스타트 능력이었다. 지난해 고든이 폭풍 도루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롭스와의 훈련을 통해 스타트가 크게 좋아진 덕분이었다(한편 헨더슨이 때려낸 통산 297개의 홈런 중 장내홈런은 한 개. 반면 프린스 필더는 현재 통산 288개 중 두 개가 장내홈런이다).
헨더슨은 투수의 투구폼을 기가 막히게 읽어냈으며, 변화구 타이밍을 예측하는 능력 역시 뛰어났다. 무엇보다도 투수와의 눈빛 교환에서부터 늘 승리했다. 1루에서 리드를 잡고 있는 주자는 투수가 견제하는 시늉을 하면 베이스로 돌아간다. 그러나 헨더슨은 투수의 거짓 견제 동작이 어설프다 싶으면 돌아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또한 묘한 비웃음을 담긴 눈빛으로 투수를 쳐다봤는데 이것이 투수를 심리적으로 흔들리게 했다. 헨더슨과 더 많은 눈빛 교환을 해야 하는 좌투수들은 더 곤욕이었다.
야구장에서는 최고의 천재 ⓒ gettyimages/멀티비츠 |
투수들이 헨더슨 스트레스에 시달리자 아예 2루는 그냥 내주고 3루 도루만 막아보자는 팀들도 있었다. 반대로 헨더슨이 2루 도루에 성공하면, 그 때부터는 타자하고의 승부에 집중하라고 지시하는 팀도 있었다. 헨더슨을 지나치게 의식하다가는 더 큰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볼티모어의 감독이었던 프랭크 로빈슨은 포수에게 아니다 싶으면 2루로 아예 공을 던지지 말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 공이 뒤로 빠져 3루까지 허용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도루를 극도로 싫어했던 오클랜드 빌리 빈 단장이 한때 도루를 통해 활로를 찾으려 한 적이 있었다. 이에 헨더슨을 스프링캠프에 초청해 특강을 열도록 했다. 타자들보다도 특강을 더 열심히 들은 선수들은 도루를 막고 싶은 포수 커트 스즈키와 투수들이었다.
도루를 많이 하는 선수들은 좀 더 빠른 헤드-퍼스트(head-first) 슬라이딩을 선호한다. 하지만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많은 체력 소모와 함께 부상 위험성이 높다는 것.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자주 하게 되면 가슴 타박상은 물론 2루수 또는 유격수의 스파이크에 밟혀 손을 다치는 일이 빈번하다. 역대 도루 2위(938)에 올라 있는 루 브록이 피트-퍼스트(feet-first) 슬라이딩을 고집했던 이유다. 하지만 헨더슨은 메이저리그 25년 내내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고수하고도 시즌 마지막 날까지 폭풍 도루를 할 수 있는 강철 체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한 부상도 거의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100도루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바로 출루다. 도루를 많이 하려면 기회 자체가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출루율이 .292에 그쳤던 해밀턴(.250 .292 .355)은 안타(141) 볼넷(34) 몸맞는공(1)을 통한 출루가 176번에 그쳤다. 고든(.289 .326 .378)도 자력으로 출루한 것이 211번(176안타 31볼넷 4몸맞는공)에 불과했다. 반면 첫 100도루에 성공한 1980년, 헨더슨은 무려 301번을 출루했다(179안타 117볼넷 5몸맞는공). 44살까지 뛰고도 통산 출루율이 4할을 넘는 헨더슨(.279 .401 .419)은 21세부터 39세 시즌까지 3할9푼 출루율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두 번뿐이었다. 지난해 1번타자 중 1위에 오른 맷 카펜터의 출루율은 .375였다.
보통 발이 빠른 타자들의 대부분은 공을 일단 맞혀놓고 발로 안타를 만들어 내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타석에 들어서면 망부석이 됐던 헨더슨의 목표는 안타보다 볼넷이었다. 투수에게 주는 타격이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헨더슨은 스윙을 충분히 하기도 전에 뛰는 '슬랩 히팅'을 하지 않았다. 지난해 고든이 62개의 내야안타를 기록한 반면, 헨더슨의 최고 기록은 24개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100볼넷-100도루 시즌을 만들어낸 선수는 단 한 명, 바로 헨더슨뿐이다(1980 1982 1983). 기준을 100볼넷-50도루로 낮춰야 헨더슨(6회) 외에도 조 모건(5회) 타이 콥(1회) 에디 콜린스(1회)가 등장하는데, 그 중 1번타자는 헨더슨뿐이다. 100볼넷과 100도루는 사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록이다. 지난해 메이저리그에서 100볼넷에 성공한 타자는 카를로스 산타나(113)와 호세 바티스타(104) 두 명뿐으로, 이들의 도루 숫자는 5개와 6개였다.
헨더슨과 관련해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헨더슨이 스트라이크와 볼을 워낙 완벽하게 구분해낸 탓에 그를 상대하면 커피 캔을 세워다 놓고 공을 던지는 것 같았다고 했던 전 볼티모어 투수 마이크 플래나간은, 헨더슨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헨더슨과의 승부라는 최대 고비를 넘기면 다음 타자부터는 한결 수월하게 느껴졌다는 것. 특히 헨더슨의 출루를 막아내게 되면 더 자신감 있는 피칭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헨더슨과 콜맨 이후 70도루에 성공한 선수는 단 8명(오티스 닉슨, 마키스 그리섬 2회, 케니 롭튼 2회, 브라이언 헌터, 토니 워맥, 스캇 포세드닉, 호세 레이에스, 자코비 엘스버리). 현역 선수는 레이에스(2007년 78개)와 엘스버리(2009년 70개)뿐이다. 하지만 레이에스(31)와 엘스버리(31)는 이미 서른 줄에 접어들었으며 마음껏 도루를 할 수 없는 1억 달러 선수가 됐다.
이에 현 시점에서 100도루에 가장 근접한 선수는 고든도 해밀턴도 아닌 호세 알투베(24)인 것으로 보인다. 알투베는 볼넷을 사랑했던 헨더슨과는 정반대의 접근법을 가지고 있지만, 빠른 발과 함께 가장 많은 출루를 만들어낼 수 있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알투베는 메이저리그 최다인 225안타(36볼넷 5몸맞는공)를 바탕으로 266차례 출루에 성공했고 56도루/9실패를 기록했다.
100도루가 더 어려워진 이유는 세이버메트릭스의 발달 덕분이다. 이제 메이저리그 팀들은 도루 실패가 얼마나 큰 손해인지를 잘 알고 있다. 1982년 헨더슨은 130번의 도루를 하면서 42차례 실패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만큼의 실패를 용납해줄 팀은 없다.
고든이 지난해 다저스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꽉 막혔던 경기를 그의 발로 풀어낸 경기가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음에도 뛰는 '잡아볼테면 잡아봐' 식의 도루는 홈런 못지 않은 짜릿함을 선사한다. 고든과 해밀턴이 더 뛰어난 스틸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통산 도루 순위(1900년 이후)
1. 리키 헨더슨 : 1406
2. 루 브록 : 938
3. 타이 콥 : 897
4. 팀 레인스 : 808
5. 빈스 콜맨 : 752
통산 볼넷 순위(1900년 이후)
1. 배리 본즈 : 2558
2. 리키 헨더슨 : 2190
3. 베이브 루스 : 2062
4. 테드 윌리엄스 : 2021
5. 조 모건 : 1865
통산 득점 순위(1900년 이후)
1. 리키 헨더슨 : 2295
2. 타이 콥 : 2244
3. 배리 본즈 : 2227
4. 베이브 루스 : 2174
4. 행크 애런 : 2174
500도루 이상자 홈런 순위
1. 배리 본즈 : 762 (514도루)
2. 리키 헨더슨 : 297 (1406도루)
3. 조 모건 : 268 (689도루)
4. 폴 몰리터 : 234 (504도루)
5. 세자르 시데뇨 : 199 (550도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