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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과 거짓에 가장 깨어 있는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의 외식을 탐욕과 방탕의 탈을 쓴 자로,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고 책망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복음과 다른 영에 대한 경계를 아주 많이 하였습니다.
다른 복음과 다른 영을 가진 거짓 사도와 속이는 사탄의 일꾼들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요, 또한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며 광명한 천사로 가장합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일꾼은 조직 폭력배나 민.형사상의 악질 범죄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양의 목자로 거룩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어느 사이트에 한국에서 설교 잘하는 목사 순위를 메겨 놓았는데
절반은 이단이고 또 절반은 이단 시비로 도마 위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혁주의 언약적 복음 신앙에서 볼 때
모두가 광명한 천사의 옷을 입은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자들이었습니다.
광명한 천사로 나타나는 사탄의 미혹은
참된 복음과 성령의 은혜로 가장하여 종말에 흔하게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경계하고 있습니다.
드러난 이단과 드러나지 않는 이단들......
모두 복음의 빛난 옷을 입었습니다.
복음의 거룩한 옷....성경의 진귀한 말씀을 인용하며
자칭 참된 선지자의 모습으로 거룩하게 나타납니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구제를 많이 하는 빛과 소금의 교회는
빛과 소금의 옷을 입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보다 빛과 소금의 옷이 더욱 빛나는 빛과 소금의 교회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전형으로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구제의 선한 옷은
광명한 천사의 가장일찌라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아름다운 뜻이기 때문입니다.
빛과 소금의 교회를 이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옷을 입은 방주교회는
목사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등 사회적 봉사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봉사 명령.....
경범자들의 순화 교육이지만 자발적인 사회적 봉사는 가장 좋은 위장술입니다.
선한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의를 뛰어 넘는 퍼포먼스는
선한 삶으로 복음을 담아내기보다는 의를 가장하는 쇼윈도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한 삶으로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라는 강조는인본주의 사상입니다.
복음을 표방하는 어느 목사는
구원받은 의보다 실천하는 선한 의가 더 중요하다고 설파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은혜는 그리스도의 의요,
선한 삶으로 빛이 되는 것은 자신의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보다 자신의 의, 믿음의 실적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의의 옷으로 가장한 사탄의 인본주의 전술입니다.
구제의 선한 옷으로 가장하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미혹을 참으로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더 더욱 십자가 복음의 옷을 입으면 ....
다른 복음과 다른 영으로 그리스도의 일꾼을 가장한 사탄의 미혹을 분별하기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반드시 "회개"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설교는 십자가 복음의 옷으로 위장한 것입니다.
회개를 강조하였던 이단들......
어쩌면 이단의 중요한 특징이 회개의 강조일 것입니다.
의의 옷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에 대한
일반 성도들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의의 옷으로 가장한 것이 무엇일까를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하였다면
이단 설교에 그렇게 은혜받고 감동받아 농락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회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성적 회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양심의 흐느낌....그 감성적 회개는 회개의 외식일뿐....
십자가 복음으로 은혜받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착각을 하게 하는 사탄의 옷입니다.
의의 옷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들이 사용하는 주무기는
바로 회개를 강조하며 양심을 압박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흐느낌이 있는 감성적 회개를 하게 하고는
십자가 복음으로 무속 신앙을 집어 넣어버립니다.
끝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한국 교회요, 이단이요, 사이비입니다.
회개는 감성적 눈물이 아닙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참된 제자의 길이요, 회개의 삶입니다.
감성적 회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지 않는 증거입니다.
동료들에게도 종종 말하지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한국 교회 현주소라면서
그 책임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바리새인의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특히 사도 바울은
감성적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것이
제자의 삶이요 시도의 길이었습니다.
감성적 회개를 강조하는 것은
무속적 인본주의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한 사탄의 고도 전술입니다.
낚시의 밑밥과 같은 감성적 회개는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기독교 유사 종교인들의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텃밭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복음, 다른 영에 감염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감성적 이해를 하고서
십자가 복음을 참되게 깨달았다고 말하면 십자가 복음의 무적신검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성공과 번영의 옷을 입혀 주면.....
불가항력적 은혜로 "아멘, 할렐루야"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헤와 은사로 가장된 의의 옷을 입으면
성령의 불바다가 됩니다.
오순절 성령운동, 빈야드 운동, 임파테이션, 은사주의, 관상기도 등
모두가 성령의 은혜와 은사로 가장된 옷을 입은 사탄의 도구들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소위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참칭한 것으로
더 좋은 언약을 위한 예수님의 메시야적 중보기도는 성령의 임파테이션을 접목하여
강신술의 무속신앙, 그 전략전술의 영매가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과 다른 영에 감염된 혼돈의 시대.....
참된 복음은 멀고...거짓된 복음은 주변에 널려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거울을 말세 교훈의 말씀으로 가진 자만이 느끼는 탄식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구제와 복음의 옷을 입은 광명한 사탄의 일꾼은
성령의 은혜를 기적의 역사로 가졌습니다.
끝났습니다.
여기에 유혹받고 미혹받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참된 십자가의 복음을 성령의 은혜로 가진 광명한 천사의 가장된 옷.....
바리새인의 완벽한 위장을 탐욕과 방탕의 탈을 쓴 것을 거짓으로 드러내고 분별하신 예수님의 지혜는
예수님 자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의 자기 증거였습니다.
진리의 복음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을 분별할 수 없어
한국 교회는 유사 기독교라는 절망의 늪에 뻐지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복음의 좁은 문, 그 협착한 길은
예레미야와 같은 참 선지자의 길이요, 바울과 같은 참 사도의 길입니다.
참된 십자가 복음으로 세워지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사탄의 불렉홀을 가졌습니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이 행하여졌던 역사는
참으로 희미한 흔적을 남긴 좁은 길이었습니다.
멸망의 넓은 길은 불순종의 늪이지만
종교적 욕심을 채우는 허상으로 가득한 길입니다.
생명의 좁고 협착한 길은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탄의 일꾼들은 불교의 절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형교회를 비롯하여 기독교의 옷을 입은 크고 작은 교회를 리더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가짜라고 해도 성립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찌 .....
예레미야이의 탄식과 눈물을 가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구제의 선한 옷으로 위장한 사탄의 역사는
소위 알파 영성과 임파테이션, 그 성령의 은혜로 이적을 행하며 유혹의 욕심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깜박 속을 수 밖에 없는 현실......
거짓을 참으로 믿고 사랑하여 따르는 무리들은
그대로 캐리비안 해적과 같은 거대한 세력의 집단을 형성하여
또 다른 선을 위장한 악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악순환....
이 모든 사실을 마냥 지켜만 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며 그 행한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여유만 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여유는 하나님의 인내지만
때가 되면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게 집행하였던 언약의 저주를 쏟아 부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면서 성령의 주권적인 은혜를 거스르고.....
선교와 구제의 선한 옷을 입고서 하나님의 주권을 대항하는 인본주의 종교의 탈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로 성령의 역사를 사칭하여
직통 계시로 거짓 예언을 하며 성령의 은혜를 모독하는 자들과 함께 연합하여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탄의 일꾼들은 공의와 정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다원주의적 이해는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는 사탄의 전형적인 위장술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만찬을 베풀었던 곳이며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가 나타났던 곳이요, 초대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은 성전을 능가하는 거룩한 처소로
하나님 임재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만찬의 장소로 예비하여 거룩한 역사를 이루었던 마가의 다락방은
오늘날도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도 은혜의 곳으로 남다르기만 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유사한 이름을 가진 교회와 기도원과 카페와 블러그는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였던 것만큼 비중있는 책임을져야 할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이름으로
바알 신당이나 무당의 굿당이 되게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만찬과 오순절 성령의 세례를 체험하였던 마가의 다락방은
그 이름 자체로도 영적인 명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마가의 다락방과 유사한 이름을 사용하는 거의 모든 교회와 기도원과 카페와 블러그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망라하여 광명한 천사의 옷을 입은 사탄의 온상인 바알 신당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성령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로 증거되고 가득하여야 할 바로 그 곳에
기복과 무속 신앙의 바알 신앙으로 자리잡은 것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체험을 직통계시의 영성으로 계발한 사탄의 일꾼들은
복음과 성령이라는 광명한 천사의 옷을 입고 미혹의 역사를 하나님의 은혜로 위장하여
유혹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처럼 단회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도적 성령의 체험으로 직통계시를 예언으로 받았다며 기독교 엑소시스터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졌는데
오늘날은 꺼꾸로 무속적 인본주의 기도하는 신앙의 열정으로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적 은사로 나타났던 다양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의 자기 증거인 기적과 함께 사도적인 증거였습니다.
사도적 은사로서의 계시는 종결 되었으며 오늘날은 복음을 받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신사도 운동은
사도적인 성령의 은사를 인본주의 신앙의 기도로 이루고자하는 거짓 영의 역사입니다.
계시 종결 사상은 단순히 성경 기록만 종결된 것이 아니라
사도적 은사로 나타났던 계시적 성령의 역사도 종결되었습니다.
사도적 은사로 나타났던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같은 사건입니다.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사도적 은사로 나타났던 성령의 충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하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진리 안에서 자유하라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던 사도들에게도
사도적 역활을 수행하는 가운데 거듭거듭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강림 사건은
베드로의 고넬료 가정과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회에 나타났을 뿐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에게 나타났던 사도적 은사로서 성령 충만한 역사는
오늘날 주 예수를 믿는 성도에게 무속적 신앙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는 성령 시대라는 구원 역사의 선포였습니다.
오늘날 오순절 은사주의와 신사도운동은
사도적 은사를 참칭한 무속적 인본주의 은사와 영성 계발일 뿐입니다.
하나님 창조의 원리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원리,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구속을 인치는 사역은
우주적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적인 사역이요, 역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빛과 은총의 복으로 누리는 것이지......
광신적 신앙의 무속기도로 소위 영성을 성취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은혜와 복에 대한 다원주의적 잘못된 이해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무시하고 신적인 능력을 은혜로 소유하기 위한 무속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간계요,
광명한 천사의 옷을 입은 사탄의 일꾼들이 가진 참된 기독 신앙의 일탈행위입니다.
오늘날 빈야드와 신사도 운동을 비롯한 오순절 성령 운동으로 인한 사도적 은사의 재현은
거짓 이적과 기사로 미혹하는 적그리스도의 거짓 일꾼이며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가장한 광명한 사탄의 옷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가장한 무속적 귀신 문화는
신적인 능력을 받아 신화할려는 인본주의 사탄의 비전입니다.
다른 복음과 다른 영의 역사는 드러난 이단과 사이비 소굴에 있는 것은 물론
드러나지 않는 광명한 천사의 옷을 입은 거룩한 모습으로 가만히 들어와 간교하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진실한 모습으로 역사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철저한 십일조 생활과 인식일, 그리고 금식과 기도는
당시 유대교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가 존경하고 따랐지만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외식을 탐욕과 방탕으로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지옥의 심판으로 책망하였습니다.
기독교 유사 종교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위선과 외식으로 가득한 광명한 천사의 옷과 날개를 가졌습니다.
다른 복음과 다른 영의 역사는
거짓 예언과 거짓 기사로 교회와 기도원을 통하여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거짓 예언과 거짓 역사는
방언과 방언 통역의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이단과 사이비의 전유물입니다.
직통계시로 거짓 예언을 사탄의 미혹으로 일삼는 거짓 종교인을 위대한 신앙의 표상으로 높이며 초청하여
거짓 복술에 놀아나는 십자가 복음의 옷을 입은 사탄의 일꾼들......
기독교 귀신문화를 만들어 가면서도
구제의 선한 옷을 입고 십자가 복음의 전사로 나타나는 것은
사탄의 계략이 얼마나 간사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탄의 미혹은......
지옥의 좀비나 드라큐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감성적 회개의 옷을 입고....
십자가 복음을 참칭하고 성령의 무속적인 은사로 오염시킵니다.
다른 복음과 다른 영으로
진리의 복음을 변질한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복음의 갑옷을 입고
성령의 거룩한 역사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거룩한 주권적인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믿어 마음에 새겨 구원의 은혜을 인치는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역사하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은
성령의 자유와 능력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상을 그 수효대로 이끌어내신 창조의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으로 우주 안에 생명체가 사는 지구와 같은 것을 얼마든 만들 수 있지만
질서의 하나님은 선하신 뜻을 따라 그 기쁘신 역사를 이 땅에서 이루십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도적 은혜와 은사를 모든 성도들에게 무한한 능력으로 주실 수 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선하신 뜻을 따라 주권적으로 역사하는 것은 성령의 성령 되심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풍성한 구원 역사를 온전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 이루지만
기독교 엑소시스터 문화를 주도하는 귀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기독교 엑소시터 문화를 성령의 역사로 거짓 이적을 만들어 가는 한국의 떠오르는 샛별들......
모두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탄의 일꾼들입니다.
설교를 듣고 아멘하며, 기도하는 열심으로 감염되는 다른 복음과 다른 영의 역사는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사탄의 본질을 이루는 뿌리입니다.
참된 복음의 선포에 아멘하며, 오직 예수님의 바른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기도에 깨어 있어
다른 복음과 다른 영의 감염을 예방하여야 할 것입니다.
먹구름이 태양을 가리듯.....
다른 복음과 다른 영의 역사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먹구름 뒤에서 태양은 빛나듯....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은 성령의 주권적인 구속의 역사로
선포된 복음으로 말미암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