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서울 성가소비녀회
창설과 영성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1943년 창립된 서울성가소비녀회는 작은 여종 '소비녀(小婢女)'들이 가난한 인간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수도공동체다.
성가소비녀회가 설립될 당시 한국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전사자, 부상자, 고아와 무의탁 노인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을 돌볼 수 있는 활동수도회는 거의 없었고 외국으로부터 파견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때 선교사제로 한국에 파견돼 서울 혜화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성재덕(1920∼1992)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할 성교회의 일꾼이 필요하다고 결심했다. 성신부는 그와 뜻을 같이한 두명의 지원자를 모아 성가소비녀회를 창립하고, 당시 사목하고 있던 서울 혜화동본당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도록 했다.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주었던 성신부는 논산본당에서 14년간 사목하면서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세웠고 나환자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성광원을 설립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했던 성신부의 의지는 오늘날까지 소비녀들에게 이어져 실현되고 있다.
성신부가 말한 '종의 영성'이자 성가소비녀회의 영성은 예수그리스도의 강생에서 비롯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낮추어 이 세상에 내려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참다운 섬김의 모범을 보여왔던 것처럼,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에게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수도회가 12월 25일 성탄절에 시작된 데에는 가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소비녀들도 이웃을 섬겨야 한다는 창설자의 정신이 담겨있다.
두명의 지원자로 시작된 성가소비녀회는 지극히 가난한 처지였지만 인류구원에 협력한 예수님, 성모마리아, 요셉의 삶을 본받아 나자렛 성가정처럼 화복하고 행복한 공동체생활을 일궈나갔다. 45년 서울대교구의 승인을 받은 성가소비녀회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들을 초빙해 정식 수도생활 양성에 들어가 47년 첫 서원자를 배출했다. "소비녀들은 저희들이 벌어서 불쌍한 사람을 먹이고 생활하라"는 성신부의 가르침에 따라 수녀들이 직접 삯바느질이나 궂은 일을 해 생활비를 벌었다. 노동과 본당일,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함께 병행해온 성가소비녀회는 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대구, 부산, 제주도 등지에서 고아를 돌보고 부상병을 치료하면서 고유 카리스마를 실천해나갔다. 49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규칙서를 정식 인가받은 수도회는 성신부가 논산본당으로 부임하고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수녀들이 떠나자 52년 자립기를 맞이했다. 자립기 동안 수녀회는 신설본당으로 수녀를 파견하고 성가양로원과 성가보육원을 운영, 성가의료원을 설립하면서 수도회의 정체성을 보다 명확하게 실현해나갈 수 있었다. 이후 본당과 병원 등 분원을 신설하면서 수녀회는 고유 사도직활동을 넓혀나갔고 한국교회 안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1969년 창립 25주년을 맞이한 수도회는 창립자인 성신부를 지도신부로 맞이하면서 보다 깊은 영성생활을 할 수 있었고,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공동체를 이끌어갔다. 수도회 창설 40주년이 되던 83년에는 성신부의 '내림의 정신'을 시대의 징표에 맞게 새로운 사명으로 적응하기 위해 내적쇄신의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86년 수도회 명칭을 '성가수녀원'에서 '서울성가소비녀회'로 바꿨고 새 교회법에 재조명해 회칙을 개정했다. 교회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쇄신하고 사도직식별을 해온 성가소비녀회는 해외, 북한선교 또한 수도회의 고유한 사회복지 사도직 실천으로 이어갔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 하느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며 식별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동영성을 키워나가기 위해 전 회원이 강의와 피정, 연수, 고리기도 등을 지속으로 펼쳐나가고 있는 수도회는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주님의 안배를 믿고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어 보시오"라고 말한 창설자 신부의 뜻을 회원들 삶 안에서 실천해나가고 있다.
창립 후 58년이 지난 오늘, 500여명의 회원과 천 여명이 넘는 여러 신비체 가족들과 한가족을 이루며 살아온 성가소비녀회는 작은 겨자씨 한알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생명을 품어주는 큰 나무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26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서울 성가소비녀회 (하)
사도직 활동
성가소비녀회의 사도직은 광복 전후 여러 가지 어려운 사회상황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수께서 하늘에서 세상에 내리셨다. 오늘 천주께서는 신자를 통해, 특히 수도자를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내리신다. 우리 성가소비녀들이 할 일은 바로 예수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려야 하는 것이다"라는 창설자 성신부의 가르침 아래 소비녀들의 사도직은 실천돼 왔다. 즉 가장 가난하고 미소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 소비녀들의 사도직인 것이다. 이에 따라 수녀들은 의료사도직을 비롯해 장애인·아동·노인복지 등 사회복지사도직과 본당선교사도직을 실시해오고 있다.
첫 공동체의 활동은 1947년 구합덕 보육원을 맡아 고아들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됐고 이후 병원, 양로원, 본당, 학교, 무료복지병원활동 등으로 번져 나갔다. 58년 동안 성가소비녀회의 사도직 변천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처음 시작한 사도직에서 고정적인 상태로 머물지 않고, 시대와 사회적인 요구에 따라 공동체가 이를 함께 식별해 계속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창립 정신을 실현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1951년 한국전쟁으로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시작된 의료사도직은 당진 소화의원, 부여 규암병원, 서울의 성요셉자선병원, 의정부 성모병원, 대전성모병원 등, 그 동안 14개의 의료기관 활동으로 이어졌다. 1958년에는 수도회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병원의 필요성에 따라 진료소로 문을 연 성가의원은 3년 후 가톨릭 의과대학 부속 성가병원으로 개설허가를 받았으며 규모가 커짐에 따라 월곡동 성가병원으로 이전한 후 다시 부천 성가병원으로 발전했다. 현재 수도회는 무료자선병원으로 전환한 성가복지병원과 일반종합병원인 부천 성가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밖에 국립의료원과 세브란스병원, 이시돌의원에서 치료와 간호, 원목활동을 하고 있다.
아동복지사도직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쟁고아들을 위해 당진 소화보육원과 성가보육원 등 네 군데의 보육원에서 비롯됐으나 원아들이 성장하면서 차츰 규모가 축소되고 82년에 이르러 모두 폐쇄했다. 전쟁 후 사회의 요구에 따라 나자렛여자 기술학원, 가톨릭구제회의 활동도 활발했으나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폐쇄됐다. 초창기부터 시작된 방문사도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한 형태로 본원 주변의 가난하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 강원도 양양의 현북가정간호, 서울 봉천동가정 간호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52년 양로원 인수로 시작된 노인복지사도직은 부천 성가요양원 운영, 현재까지 100여 명의 무의무탁한 노인들을 돌보면서 계속되고 있다. 또한 본원 내에 안나의 집을 설립, 1977년부터 수련자들과 수녀들이 노인들을 돌보며 국가의 보조 없이 수도회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 밖의 노인복지 시설로는 제주도의 성요셉 양로원과 성이시돌양로원,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석현리 안나의 집, 그리고 경북 안동의 안동 안나의 집이 있다.
성가소비녀회는 1991년부터 부천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장애인의 취업과 복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춘천의 밀알재활원과 제천의 살레시오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수도회는 정신지체장애인과 한 가족으로 생활하면서 생활과 교육, 재활을 돕고 있다. 또한 수녀들은 1987년부터 경기도 양평군의 상록촌 안에서 음성 나환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으며, 폐결핵 환자들을 위한 양평의 희망의 집에서는 치료와 재활을 돕고 있다.
재소자들의 사회적응을 위해 그룹홈을 운영하고 있는 수도회는 1970년 이후 한국교회 교세 증가에 따라 본당에도 많은 수녀들을 파견했다. 현재 전국의 본당과 공소 44곳에서 선교 사도직을 하고 있으며 북한선교를 위한 준비도 마련하고 있다. 본원의 성가유치원으로 시작된 교육사업은 유아교육과 더불어 중요한 선교수단의 계기가 됐다. 최근 공부방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 성가소비녀회는 1962년부터 30여년간 부천지역 여성교육에 이바지해 온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93년 수도회의 고유정신에 따른 사도직 식별 후 인천교구에 양도했다.
1990년 이후 카리스마에 따른 사도직 식별이 의식화돼 가면서 고유 사도직을 점차 해외로 확대한 수도회는 필라델피아,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중국 등지에서 사회복지사도직을 전개하고 있다.
성가소비녀회는 특별히 지난해부터 창립자의 정신을 공동영성으로 심화시키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현장을 체험하면서 직업과 생활방식으로 연계할 수 있는 사도직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 결과 올해 2월부터 가난한 지역에서 노동자들과 도시빈민, 농민들과 함께 일하고 삶을 나누면서 4개의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예수회 (1)
창설자 성 이냐시오와 영성
16세기 중엽 교회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커다란 위기를 맞았을 때,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을 통한 새로운 영성과 예수회 창설로 쇄신과 개혁을 요구하던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491년 스페인 로욜라에서 태어난 이냐시오는 스페인 왕실의 재상 후안 벨라스케스의 시중을 들면서 품위있는 기사로 성장했다. 영웅적인 기사가 될 것을 꿈꾼 이냐시오는 프랑스와 격돌한 팜플로나 전쟁 때 심한 부상을 당한 그는 로욜라로 환송돼 병상에서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회복기를 보냈다. 이때 '그리스도의 생애' '성인들의 꽃'과 같은 몇 권의 종교서적을 읽으면서 큰 위안을 얻고, 성인들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세속의 야심과 욕망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건강이 회복된 그는 몬세라트 성모성지와 만레사로 순례를 떠나 탁발과 고행, 극기와 기도의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삼위일체, 창조, 그리스도의 인성 등 깊은 신앙의 신비를 체험했다.
1523년 로마와 베니스를 거쳐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귀국하면서 정규교육을 받을 것을 결심하고 파리대학에서 철학, 신학, 자연과학을 비롯해 라틴어, 논리학 등을 배웠다. 이 시기에 이냐시오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비롯해 6명의 동료를 알게됐고, 이들은 예수회의 첫 회원이 됐다. 이들은 1539년 4월 수도회를 창설할 것을 합의했고 같은 해 6월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구두로 회헌을 인준받았으며 1550년 7월에서야 교황 율리오 3세에 의해 최종 인가를 받았다.
이냐시오가 1556년 65세의 나이로 선종했을 때 수도회원들은 1000명에 이르렀고 13개 관구로 나뉘어 110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609년 이냐시오는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복자가 됐고 1622년 3월 12일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됐다.
중세교회에 쇄신의 방향을 제시했던 성 이냐시오는 수도자의 제복, 공동으로 바치는 성무일도, 수도원의 공동전례 및 수도관례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도형태를 제시했다. 그러나 전례가 영성생활의 가장 중요한 원천임을 깨닫고 회원들은 정해진 방법에 따라 매일의 묵상기도와 일반적 및 특수 성찰을 실천했고 영적지도를 의무적으로 받고 있다.
이냐시오 성인이 겪은 신비체험에 대해 기록한 '영신수련'은 교회 역사 안에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생활을 개선하게 하는 등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신수련은 "사람이 아무런 사욕 편정에도 좌우됨이 없이 자기를 이기고 자기의 생활을 정리하기 위함이다('영신수련'21)"라고 말한 이냐시오의 영성은 크게 네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기도와 활동을 하나의 차원으로 통합하려는 삶으로서 활동 중의 관상을 주장했고, 오관과 지성, 감성, 의지 등 영혼의 기능을 활용을 중요시했다. 이와 함께 이냐시오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순명하는 자세와 영의 식별을 회원들에게 주지시켰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예수회 (2)
창설자 성 이냐시오와 영성
'활동 중의 관상' '오관과 영혼의 기능들의 활용을 중시한 영성' '순명' '영의 식별'로 요약되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은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교회 안에 중요한 영성으로, 예수회의 영성으로 자리매김 했다.
이냐시오 성인은 당시 고유한 카리스마로 기존의 수도회와는 다른 수도생활을 제시했다. 예수회원들은 세상을 떠나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적극 투신하며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활동을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시대의 문제와 요청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생활 양식으로 새로운 영성을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새 영성의 형성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본질적인 차원의 기도와 활동을 이상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전망 중에 사도직을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수도적 봉헌생활과 세상에 대한 봉사를 분리하고자 했던 당시의 일반적 견해와 달리 기도와 일은 하느님에 대한 보다 큰 봉사를 위한 상호보완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와 함께 이냐시오 성인은 지성, 감성, 기억 등 영혼의 기능과 오관을 사용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신비를 묵상토록 했다. 이것은 특히 영성수련 과정에서 예수님의 공생활과 사건을 위해 묵상하도록 했으며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감성적 경험을 위해 인간이 지닌 기능들을 사용하길 권장했다. 또 오관은 성서말씀을 묵상하는데 활용토록 했으며 이로써 기도를 생동감있게 하길 권했다. 외적인 감각이 영적 감각으로 전이되면서 그리스도와 친밀성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섬김은 교회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지며 교회에 대한 충성은 교황에 대한 순명과 예수회 장상에 대한 순명으로 구체화된다고 말했다. 그는 성서 안에서 나타나는 신앙인들의 근본자세가 순명임을 강조하고 세 종류의 순명에 대해 가르쳤다. 첫 단계인 '시행적' 순명은 명령받은 것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실천되는 것이고 둘째 '의지적' 순명은 순명하는 이가 명령하는 이와 똑같은 의도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완전한' 순명은 순명하는 이와 판단하는 장상의 이해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명에서 중요한 것은 순명하는 이의 편에서 장상의 명령에 대한 올바른 태도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을 식별의 영성이라 할만큼 그의 영성은 '영의 식별'로 강조된다. 이 영성은 영혼의 내부에 일어나는 마음을 감지하고 이해하면서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움직임을 식별하고 거기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실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강조했다.
영의 식별은 악의 영향을 떨쳐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따라 올바른 생활 양식을 찾아내고 주님의 요구에 따라 그것을 실천에 옮겨가는 과정이다. 식별의 기준은 무엇보다 성서를 바탕으로 이뤄질 것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냐시오는 교회의 가르침과 좋은 영적 지도자의 조언이 영의 식별에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냐시오 성인의 이 모든 영성은 예수회 수도자들의 삶과 영성수련이라는 방법을 통해 실천되며 교회 안으로 확산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10월 14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예수회 (3)
역사와 한국진출
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수도회로 인준된 예수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항하며 가톨릭의 근대화 세력을 주도해왔다. 이냐시오 성인을 비롯한 수많은 예수회원들은 450여 년의 역사동안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러시아까지 전세계로 활동범위를 넓혀가며 오늘의 예수회 역사를 만들어오고 있다.오늘의 예수회가 있기까지 그들의 발자취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과 격론을 벌이고 가톨릭 교리를 옹호하며 교회를 지켜온 예수회는 교황청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해 급속도로 성장했다. 수도회 창립 당시 7명이었던 회원들은 18세기 중반 2만 3천여명의 회원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냐시오 성인 당시부터 존재하던 가톨릭 교회내 반대세력 때문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1773년 예수회 활동의 중단을 지시했다. 이로써 예수회는 정부에 의해서 보호됐던 러시아에만 200여명의 회원이 남았을 뿐 모두 해산됐다. 하지만 끈질긴 노력 끝에 1814년 예수회는 다시 활동이 허용됐고 인도, 이집트, 극동 등 전 세계를 찾아다니며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아시아지역으로 선교범위를 넓혀간 예수회와 한국교회와의 인연은 초대교회 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소서행장을 따라 부산에 상륙, 종군했던 예수회 세스페데스 신부가 한국 땅에서 최초로 미사를 집전했던 것이다. 또 서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천주교리를 받아들였던 남인학자들이 가톨릭을 연구하고 공부했던 책도 다름 아닌 예수회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였다. 이뿐 아니라 당시 수도회가 해산됐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기 위해 북경을 찾았던 이승훈에게 세례를 준 것도 예수회 그라몽 신부였다.
초기교회 때부터 한국교회와 인연을 맺어온 예수회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부터다. 한국 주교단의 요청에 이어 교황 비오 12세의 명을 받은 예수회는 1954년 10월 일본에 있던 독일인 예수회원 테오도로 게펠트 신부를 입국하게 했다.
6?5 전쟁 후인 55년 한국의 예수회는 설립됐으며, 60년 서강대학교 건립, 64년 예수회 수련원 등을 마련하면서 예수회 한국지구가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비교적 한국진출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130여명의 회원들이 함께하는 큰 규모의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다.
예수회는 서강대학교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청소년 야간학교, 노인복지시설, 선교본당, 도시빈민사목, 피정센터 등의 사도직을 실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10월 21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예수회 (4)
사도직 활동
예수회는 믿음을 지키고 전파하며 특히 영혼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충실하고 교리에 정진하도록 가르치며 인도해왔다. 이같은 목적을 위해 예수회는 수도회 기본법에서 강론과 강연회, 기타 사도직, 영성수련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고 어린이들을 비롯한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교육을 실시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회는 서강대학교를 비롯한 교육사도직과 사회복지 관련사도직, 도시빈민, 농촌, 노동 등의 특수사도직, 해외선교, 영성사도직을 통해 카리스마를 실현하고 있다.
예수회는 1960년 가톨릭세계관과 예수회의 교육이념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서강대학교를 설립했다. 수도회는 영성적, 지성적 교육을 통해 전인교육을 실시해왔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왔다. 또한 그리스도교 정신과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줘 차별화된 대학교육을 실시했다. 수도회는 대학교육과 아울러 수도자들의 고등교육을 위해 수도자대학원을 설립, 수도자들이 필요로 하는 학문을 수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예수회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한 공동체인 이냐시오의 집을 서울 신림동과 경기도 양평에서 꾸려가고 있다. 또 약물중독 청소년들의 중간 거주시설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 수도회는 공공임대주택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특히 비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인권,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선교본당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 독립문에 있는 선교본당에서는 기본적인 성사집전 및 교리 가르침을 비롯해 주거권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협동조합을 지원하며 공부방같은 복지시설을 제공하고 있다. 수도회는 유기농법을 원하는 농민들을 위해 농촌 공동체를 운영, 농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체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해외선교 사도직으로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실시하고 있는 예수회는 동티모르, 캄보디아에도 수도자를 파견해 현지사목과 선교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교육사도직과 아울러 예수회의 대표적인 사도직은 영성사도직이다. 이냐시오 영성연구 및 보급, 영성지도자 양성을 위해 이냐시오 영성 연구소를 설립한 수도회는 피정지도 및 영성강의를 통해 교회를 정화시킨 이냐시오 영성을 전하고 있다. 말씀의 집은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중심으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 각종 피정 프로그램을 마련, 제공하고 있다.
예수회는 해외선교 활성화, 청소년 사목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영상매체를 활용한 사도직 활동 강화 등을 통해 현대 문화 안에서 복음화를 꾀하고 있다. 아울러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강화시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공동체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예수회 한국지구 130여명의 회원들은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다양한 사도직으로 응답하며 이냐시오 영성을 실천해나가고 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하느님께서 내 손을 잡아 이끄시니 나는 눈을 감고 따랐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성체를 중심으로 한 기도의 삶, 즉 세상에서의 관상생활을 추구하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그들의 창설 역사를 이렇게 말한다.
1939년 사하라의 루그르트에 창립된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도회 창설자 마들렌 수녀는 188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군의관으로 일하면서 아랍 소년의 생명을 구했던 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에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아프리카와 아랍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가졌다. 유목민들의 삶을 동경했던 마들렌 수녀는 1921년 사하라 사막의 성자로 불렸던 샤를르 드 푸코의 전기를 읽고 그 안에서 자신이 키워온 삶의 이상을 발견했다.
그러나 전쟁이 몰고 온 가정의 시련과 건강의 악화로 꿈을 실현할 수 없었던 그녀는 1939년 그가 앓고 있던 변형성 관절염에 대해 "불구자가 되지 않으려면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으로 가서 사시오"라는 기적과 같은 처방을 받고, 사하라의 알제리, 이슬람 땅으로 떠나게 됐다. 무료급식, 진료, 교육 등의 일에 투신했던 마들렌 수녀는 1938년 성소식별을 위해 찾았던 푸코 신부의 무덤에서 사하라 교구장인 누에 주교를 만났고, 그를 통해 수도회 창설이라는 하느님 뜻을 받게됐다. 그녀는 백의회 수녀회에서 수련을 받으면서 수도회 창설을 준비하고 1939년 첫 서원을 하게됐다. 이로써 '우애의 집'이라는 공동체가 사하라 사막 투구르트에서 태어나면서 수도회가 시작된 것이다.
노동자들과 장애인, 결핵, 나병 환자들 그리고 목동, 집시, 노점상인들 사이 곳곳에 우애의 집을 창설한 마들렌 수녀는 56년 로마에 총본부를 두었고, 64년 교황청 직속 수도회로 인가를 받았다. 보편교회 안에서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실현했던 그녀는 1989년 수도회 창설 50주년이 되던 해에 이 세상에서의 생을 마감했다.
소외된 이들과 더불어 살았던 마들렌 수녀는 회원들에게 '반죽 속의 누룩'처럼 대중 속에 섞여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 것을 당부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그들을 지도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친구나 형제로서 그들을 사랑하며 살도록 했다. 따라서 작은 자매들은 서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그들이 하는 공장 노동이나 파출부, 농사일을 함께 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기쁨과 아픔,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며 살고 있다. 수도자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과 아울러 매일의 성체 조배를 통해 인류의 희망과 이웃들의 삶, 특히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전달하는 기도인으로서 전세계 각지에서 살아가고 있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의 한국진출은 1954년 마들렌 수녀의 한국방문으로 시작됐다. 나환자들 사이에 우애의 집을 짓고자 했던 수도회는 1955년 대구대교구 최덕홍 주교 초청으로 한국에 진출, 2명의 수녀가 경북 왜관 삼청동 나환자촌에 공동체를 마련했다. 이후 수도자들은 나환우들에게 효과적인 의료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연결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초창기 대구와 서울 명동성당 앞 마당 낡은 응급차 안에서 삶을 이어간 이들은 현재 서울과 대구, 광주, 대전 및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부산지역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한국교회에서 공동체를 꾸려가는 38명의 수도자들을 비롯해 전세계 1300여명의 회원들이 세상 모든 이들의 형제와 친구로서,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심수녀회 (1)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사회가 큰 혼란에 빠졌던 18세기말, 교회는 박해와 수난의 큰 위기를 겪어 전례가 금지됐으며 수도회들도 해산되는 등 종교적으로 대혼란을 겪었다. 이 같은 혼란의 시기를 살았던 성녀 마들렌 소피이(1779∼1865)는 혁명의 여파로 갈라지고 상처난 프랑스 사회 한 가운데서 상처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성녀 마들렌 소피이의 이같은 개인적인 체험은 쇄신이 요구되던 당시 성심수녀회 창설로 이어졌고 진보적인 자세로 변화의 물결을 이끌어갔다.
어린 시절 오빠로부터 받은 예수성심 성화를 바라보며 하느님의 또다른 신비를 체험했던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수도회 창립 후 인류의 한복판에서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성심을 알아보도록, 그분 심장의 뛰는 박동을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도록 세상에 눈길을 고정시키라고 회원들에게 자주 권고했다. 이 정신은 지난 2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가며 항구히 자리매김해 온 성심수녀회 영성의 큰 줄기가 됐다.
관상생활을 열망했던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어느날 기도하는 가운데, 상처받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공경하며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여성교육에 투신할 것을 다짐하고 여성수도회 창립을 생각하게 됐다.가르멜수녀회에 대한 소명을 포기하고 성심교육이라는 새로운 사도직을 전개한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시대상황과 지역사회의 필요에 신속히 응답하고자 젊은 여성들을 위한 기숙학교, 각종 기술학교, 장애인학교, 고아원 등을 세웠고 나아가 교사배출을 위해 교육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관상생활을 추구했던 그녀는 수녀회를 이끌고 학교를 운영하면서도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깊이 끌렸지만 '세상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해야할 많은 일들을 고민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육 사도직에 전념해왔음에도 여전히 관상에 대해 매력을 느꼈던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세상 사람들과 가질 수밖에 없는 관계들이나 꼭 해야할 일들이 있더라도 내적 생활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며 균형없는 활동생활을 내적생활로 바로잡도록 회원들에게 당부했다.
이는 성녀 마들렌 소피이가 활동하는 가운데 직접 경험을 통해 내적생활의 중요성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며, '관상생활에 대한 매력이 일종의 유혹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알았기 때문이다.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일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리스도의 마음에 드는 도구가 되기 위해 자주 성체 조배를 했고,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해 기도생활에 철저했다.
그리고 예수 성심 안에서 한없이 너그러움을 발견한 그녀는 그 너그러움을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또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순발력 있게 적응하는 것 또한 너그러울 때 가능하다고 말한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명한 예수 그리스도를 공동체의 모범으로 삼았다.
세상 안에서의 예수성심의 발견, 내적인 기도생활과 아울러 성녀 마들렌 소피이의 또다른 영성은 바로 마음을 교육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마음이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중심지, 즉 자신과 성심수녀회가 근본적으로 뿌리내야하는 내적 정신의 중심지다. 그녀는 마음을 교육하는 일에 일생을 투신해왔으며 이는 참된 인간성장과 사회변혁을 이루는 근원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하는 마음을 교육하는 일은 먼저 교육받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예수 성심의 한없는 사랑을 발견해, 그가 사랑을 인격 전체로 깨닫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마음의 교육자는 교육받는 대상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이것은 아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표현돼야한다고 강조했다.
교육받는 개개인의 마음에 변혁이 일어날 때 비로소 사회변혁이 가능하다고 말한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진정한 변혁을 위해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 특히 젊은 여성을 교육하는 것이 사회변혁을 위한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했다.
성녀 마들렌 소피이의 이같은 정신은 비단 18세기뿐 아니라 전쟁과 폭력, 환경파괴, 인권탄압 등이 만발하는 작금의 21세기에도 여전히 세상 한가운데서 구현돼야하며, 이를 위해 성심수녀회 회원들은 그 영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수도회 전 회원이 '예수 성심 안에서 한마음 한 뜻'이라는 모토 아래 마음의 자유를 누리면서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며 응답하기를 원한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심수녀회 (2)
역사와 사도직 활동
성심수녀회는 1800년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가 청소년 교육을 통해 예수 성심의 사랑을 전파하고자 프랑스 아미앵에서 창립됐다.
어릴 때부터 예수 성심에 대한 독특한 신심을 길러 왔던 마들렌 소피이는 어느날 기도 가운데, 죄로 상처받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바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위한 신앙교육'에 투신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성소임을 깨닫게 됐고 이것은 바랭 신부를 만나면서 구체화됐다. 그런 후 1800년 11월 21일 파리 아미앵 투렌느 가의 작은 성당에서 세 명의 수녀와 첫 서원을 함으로써 성심회 창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성심'이라는 말은 반혁명의 표지로 인식돼 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었으므로 초창기 성심회 이름은 '예수의 사랑받는 자매회'로 했다. 이후 성심회는 1815년 총본부를 로마로 옮겼고, 1826년 교황 레오 12세로부터 수녀회 인가를 받았다.
성심회는 창립 이듬해인 1801년 10월 아미앵에 미래의 사회 지도층을 형성할 귀족 자녀들을 위한 기숙학교인 '성심학교'를 열었는데 이로 인해 일반인들에게 '크리스천 교육 수녀회'로 많이 알려졌다.
1802년에는 학교 내에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무상학교를 열어 더 많은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 같은 학교교육은 점차적으로 확대돼 1806년 그르노블에서부터 1850년 파리지역까지 이어졌다. 아울러 성심회는 직업학교, 청각 장애 청소년 교육기관, 지체 부자유 청소년들을 위한 의료기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또 1836년에는 교육대학을 설립하고 1854년에는 사범대학을 세웠는데 이것은 성녀의 사후에 성심회가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성심회는 이탈리아, 스위스, 벨기에를 비롯해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 네덜란드 및 독일 등 유럽 각국에 성심교육을 전파했다.
한편 이에 앞서 성심회는 1815년 첫 선교사인 로즈 필립핀 뒤센 수녀를 미국 미주리에 파견해 미대륙에서 교육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세계 각지에 성심교육을 전해온 성심회는 성녀 마들렌 소피이 생존시 이미 16개국 122개 분원 3천 5백여명의 회원 증가를 낳았으며, 프랑스에서만 84개의 기숙학교와 74개의 무상학교에서 1만 여명의 학생들에게 성심교육을 전했다.
성심회의 활동은 예수 성심께 대한 봉헌과 청소년 교육에 대한 봉헌으로 요약된다. 성심회는 19세기의 '예수성심' 영성과 '성체'에 대한 신심에서 교육 사도직 활동의 힘을 얻었고 이를 창립정신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교육은 성심회의 사명을 실현시키는 수단이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고유한 방법이기도 했다.
회원들은 기숙학생의 교육, 가난한 청소년들에 대한 무상교육, 사회인들을 위한 피정, 일과 관계된 세상 사람들과의 접촉 등으로 예수 성심의 영광을 드러냈다.
성심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 동안 획일적인 교육방식에서 벗어나 각국의 문화와 전통 및 특수성을 고려해 '다양성 안의 일치'를 강조하게 됐고, 점차 유럽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해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대륙에도 관심을 돌리게 됐다. 그리고 성심회가 실시해온 신앙교육 및 학문교육은 신앙에 바탕을 둔 정의교육이 강조되면서 보다 통합적인 교육으로 변모했다.
또한 회원들은 세상과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수도복을 사도직 활동에 편리한 평상복으로 바꿨고, 사회의 긴급한 필요와 지역사회의 부름에 응답했다.
세상의 긴급한 필요와 지역교회의 부름에 창의적으로 응답할 것을 촉구할 것'이라고 82년 회헌에서 언급한 성심회는 앞으로의 사도직을 교육과 양성, 인간발달과 정의구현, 신앙생활지도 등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전세계로 활동을 넓혀갔던 성심수녀회의 한국진출은 1956년 당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일본 극동관구에서 7명의 회원이 파견돼 옛 성심신학교 자리에 첫 성심공동체를 이루면서 시작됐다.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16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심수녀회 (3)
한국진출과 사도직 활동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위치한 성심수녀회. 예전 용산 예수 성심학교 자리인 이곳에서 1956년 일본에서 파견된 7명의 회원과 1명의 한국인 회원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성심공동체의 싹을 키워나갔다.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감을 갖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성심회는 교육사도직을 비롯해 노동, 영성교육, 청소년 사도직에 주력하며, 서울과 역곡, 경기도 파주 등 9개 공동체에서 사회와 교회의 필요에 따라 응답하며 수도생활을 해나가고 있다.교육사업을 중심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한국공동체는 57년 성심여자중학교를 시작으로 같은 해 8월 성심국제학교, 성심국제유치원 등을 개교했다. 또 60년에는 성심여자 고등학교, 62년에는 성심국민학교의 문을 열었으며, 64년에는 강원도 춘천에 성심여자 대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성심학교에서는 성심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소수의 학생들만 선발해 교육해왔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이 전통은 점차 바뀌게 됐다. 아울러 69년 중학교 평준화 교육이 실시되면서 더 많은 청소년들에게 성심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게됐다. 그리고 정규 학교 교육 외에도 65년부터 3년간 봉천동에서 천막학교를 열었으며, 67년부터는 성심여자고등학교 안에 수도자를 위한 야간 중·고등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던 가운데 70년대 초 성심여중과 수도자 야간 고등학교를 폐교시켰고, 지방 편재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성심여자대학을 서울로 이전하자는 의견이 대두돼 75년부터 부천에 교사를 짓고 성심여자대학교 일부를 이전했으며 80년에 완전히 학교를 옮겼다.
한편 78년 탄광지대인 강원도 고한에 4명의 회원을 파견해 지역사회 복지활동과 본당사도직을 시작한 성심회는 83년 두문동 보건소를 개원했고 93년부터는 지역 불우 청소년들을 위해 '흑빛 공부방'을 운영해왔다. 82년에는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철거민촌이었던 상계동에서 본당사도직과 도시 빈민활동을 전개했으며, 88년 3월에는 경기도 부천과 인천 부평에서 노동사도직을 시작했다. 또 92년에는 상계동본당에서 운영하는 '마음터 공부방'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처럼 성심회의 비제도 교육사도직인 '두레사목'은 본당, 노동, 청소년, 의료사도직을 두루 포함하였으며 이것은 70, 80년대에 걸쳐 더욱 성장하게 됐다.
성심회는 91년 교육법 개정령에 의해 '성심여자대학교'로 교명을 바꿨고 94년에는 가톨릭대학교와 통합, '가톨릭대학교'로 교육부의 인가를 받게되면서 이듬해부터 남학생들의 입학이 가능해졌다. 통합 이후 학교의 운영권을 서울대교구에 양도한 성심회는 이때부터 교육사도직을 점차 비제도 교육으로 전환, 확대시켜 나감으로써 사회의 긴급한 필요에 원활히 응답하는 '교육사도직의 다양화' 방법을 실천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교육활동으로는 성심여고 운영과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 교수지원 및 학생 사목활동에 주력하고 있으며, 소외된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사회사도직으로는 상계동과 강원도 고한에서 본당과 공부방 및 보건소 진료활동, 그리고 경기도 부천에서 노동사도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적인 변화로 인해 강원도 고한에서 활동의 필요성이 줄어들자 지난해 공부방과 진료소를 모두 철거하고 부천에서 새롭게 공부방을 운영하게 됐다.
이외에도 경기도 부천에서 노동사도직을 계속하고 있으며 경기도 파주에서 피정지도 및 인간발달 상담 및 애니어그램 연구활동을 하고 있고, 부천시 괴안동에서는 99년부터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세계교회의 요청에 따라 아프리카 챠드, 인도네시아, 호주에 3명의 회원들을 선교사로 파견, 해외선교의 부름에도 응답하고 있다. 아울러 성심회는 지난 95년부터 성심자매회를 구성, 평신도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성심의 영성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올해로 창립 201주년, 한국진출 46주년을 맞는 성심회는 현재 60여명의 수도회원들의 성심의 영성을 교회와 사회 곳곳에 전파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