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사부모님께옵서 33세에 (개도 33년 1906년)에 득도하신 이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에서 계룡산 백암동으로 남천포덕하시어 도덕을 설파하시며 제자를 얻으시고 금강대도를 창도하시는 과정에서 교화하신 말씀을 수집 편집하여 성훈통고로 출간하여 인류중생 구제의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2-81. 월봉 이종택, 영곡 이세우
이세우(호 영곡)가 그 선친 월봉의 사실을 기술하니, 월봉(명 종택)이 평소에 조상을 받드는 일에 전력하여 다년간 산을 구한 나머지 성사님의 도덕이 휼륭하심을 듣고 정사년(개도44년 1917년)에 중척리로 나가서 뵈옵고 폐백의 예를 갖추고 인하여 제자가 된 지라.
일 년에 수집차례 왕래하다가 무오년(개도45년 1918년)에 경성에 올라갈 때 또한 몽조가 있어서 옥황보훈과 삼성제군의 서적 한 질을 사서 가져오니라. 그후 금천 사택을 건축할 때에 재물을 의롭게 내놓아 돕고 또한 신도 법당을 건설할 때에 총대로서 봉행하다가 갑자년(개도51년 1924년) 사택 건축 사업에 재정이 고갈되어서 거의 중지함에 이르렀는데, 월봉이 녹동리 토지를 팔아 올려서 준공을 계속하니라.
진종보감을 간행할 때에도 재정을 먼저 임대 해주어 업무를 보게 하였고, 정묘년(개도54년 1927년) 대성사모님 승하 시에 위토답을 사서 올려드리니라.
매양 산을 구하는 일로써 고하면 성사께서 원근 간에 유명한 혈과 대지에 있어서 보지 않으시고 앉아서 말씀하시니, 그 후로부터 오준수와 종종 답산 함에 가고 함께 물러와서 성사님의 교훈을 봉행하니라.
하루는 성사께옵서 옥천 닥티재로 하교하심에 ”금계포란金鷄抱卵“(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이 있다” 하시어 가보았으되 끝내 알아보지 못하니라.
하루는 성사께옵서 “금계포란형은 국 안에 들어갔어도 혈처를 보지 못하였으니 이 무슨 연고인고?
네가 본 곳 밭 위에 있느니라.” 이에 정신이 상쾌해져서 재차 가본즉 혈처가 분명하니, 성사님의 밝게 감찰하심을 가히 생각할 수 없음이라. 그 후에 성사님의 명령으로 조부와 어머니 산소를 면례하고 항상 청주 팔봉산의 비봉귀소飛鳳歸巢(봉황이 날아 집으로 돌아가는 형)에 뜻을 두고서 말씀을 드리니, 용절과 좌향을 상세히 하교하시어 동정과 함께 가서 본즉 조금도 의혹이 없더라.
갑술년(개도61년 1934년)에 성사께서 승하하시거늘,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을해년(개도62년 1935년)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나니, 자식이 되어 하늘을 잃은 아픔을 어느 곳에 가서 다 이야기하리오.
세우가 마음먹기에는 가업을 이어 갈 뜻으로써 정법사님께서 성통을 이으심에 종사하여 믿음을 착실히 세우고자 하였으나, 오직 자질이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또한 쓸데없는 업무가 좌우로 모순됨으로 인하여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