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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위 얼굴 예언 풀이 / 추배도 예언 풀이 / 천년왕국 풀이
112. 큰 바위 얼굴「어네스트를 찾아온 시인」편 풀이
나는 우리 병원 입원환자를 앰블런스에 태우고 우리 성요셉병원에는 MRI 촬영기계가 없기 때문에 메리놀 병원으로 모시고 갔었는데 MRI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중 잡지책 진열대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습관처럼 무심코 집어서 펼쳐 보았더니 책 중간쯤에「큰 바위 얼굴」이라는 큰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즉 책 한권에「행복한 왕자」와「큰 바위 얼굴」두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책 이였습니다.) 그러면서 ‘아하! 김강철(바오로) 신앙수기「성모님 도우심으로 이룩될 주의 나라 천년왕국」책에서도 보면(신앙수기 ‘101. 선생님(스승)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편 참조) 김강철(바오로) 형제님이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큰 바위 얼굴」책을 읽은 그대로 큰 바위 얼굴 그 뜻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다는 내용이 있던데 그리고 비가 온 후 길을 가다가 물이 고여 있는데서 실수로 한 발이 빠져서 신발이 물에 젖으면 세상은 공평해야 한다면서 다시 돌아가 나머지 한 발마저 빠뜨려 두발이 다 젖게 했다는 내용도 있던데 그 이야기의 출처가 바로 이 책 이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읽어보니 ‘작은 골짜기 마을’ 편 어머니와 어네스트와의 대화에서
「“어머니.”
하고 미소짓는 큰 바위 얼굴을 쳐다보며 어네스트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저 바위 얼굴이 이야기를 해 주면 좋겠어요. 저렇게 점잖게 생겼으니까 아마 그 목소리도 틀림없이 부드러울 거여요. 만일 내가 저 바위와 닮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굉장히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예언이 정말 맞는다면, 언젠가는 저 바위와 닮은 사람과 만나게 될 거야.” “무엇이어요, 그 예언이?” 어네스트는 어머니에게 열심히 물었습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셔요, 어머니.” 그래서 어머니는, 어머니가 어네스트보다 더 어렸을 때 어머니의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어네스트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생길 이야기 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 왔으며, 본디 이 골짜기에 살고 있던 인디언이 그 조상(祖上)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인디언의 조상들은 산에서 흐르는 시냇물의 속삭임이며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속삭임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것은 언젠가 이 근처에서 가장 위대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 될 운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 였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들까지도, 가슴에 꿈을 간직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 오래된 예언을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언은 거짓말이라고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일을 잘 알고 있으며 여기저기 찾아 보기도 하고 기다려 보기도 했으나, 그렇게 생긴 사람은 만난 일이 없었을 뿐더러 보통 사람들보다 위대하고 품위 있는 단 한 사람도 끝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여간 예언한 대로의 위대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내용적으로 보면 앞으로 생길 예언적인 전설적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충 읽어보니 어네스트는 ‘큰 부자, 개더고울드’씨나 ‘위대한 오울드 블러드 앤드 선더 장군’이나 ‘대정치가 스토니 페이스’ 같은 인물들 안에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하고 품위있는 그 예언의 인물을 찾았으나 그들의 생활을 보고 실망을 거듭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시간 남짓 MRI 촬영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 책을 놓아버릴 수가 없어서 일단은 그 책을 가지고 와서 계속 읽었는데 ‘어네스트를 찾아온 시인’ 편을 읽고 시인의 이야기에서 내 마음을 읽어가는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내가 이미 지금까지 김강철(바오로) 형제님(신앙수기 ‘101. 선생님(스승)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편 참조)의 신앙수기를 언급해 왔듯이 형제님의 신앙수기를 몇번이고 되풀이 해서 읽어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는「큰 바위 얼굴」책을 전체를 복사를 해 놓고 책을 메리놀 병원에 갔다 두고 돌아와서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기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네스트를 찾아온 시인’ 편 내용을 계속 되풀이해서 읽을 때마다 왠지 이시대에 대한 우리 모두의 사명감이기도 하겠지만 나의 사명감이 자꾸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교과서인지 중학교 교과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과서에도 오랫동안 나왔던 책이라고 하고 지금은 출판되지도 않는 책이고 해서 그 책을 구입할 수가 없으므로 여기에「큰 바위 얼굴」책 ‘어네스트를 찾아온 시인’ 편 내용을 그대로 소개해 드립니다.
특히 이 시대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즉 ‘언젠가 이 근처에서 가장 위대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 될 운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 될 것이라는’ 즉 ‘큰 부자, 개더고울드’씨나 ‘위대한 오울드 블러드 앤드 선더 장군’이나 ‘대정치가 스토니 페이스’ 같은 인물들이 아니라 즉 ‘꾸밈없는 농부’ 같은 ‘조금도 꾸밈이 없이 위대한 진리를 아주 친밀하게 말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즉【어네스트는 자기가 느낀 일과 생각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힘이 담겨 있었습니다.
왜냐 하면 어네스트의 말 속에는 어네스트의 사상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네스트의 사상에는 참다움과 깊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네스트의 사상이 매일의 생활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자가 한 말은 값싼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활에서 생겨난 말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올바른 행위와 깨끗한 사랑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즉 어네스트의 말 속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담겨져 있었습니다.】하였듯이 즉 ‘그의 말에는 힘이 담겨 있고, 그의 사상에는 참다움과 깊이가 있고, 그가 한 말은 값싼 이야기가 아니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생겨난 말이고, 그 속에는 올바른 행위와 깨끗한 사랑이 담겨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네스트를 찾아온 시인에 대한 즉 ‘어네스트가 점점 나이를 먹자, 자비로운 하느님은 한 사람의 새 시인을 땅 위로 내려보냈’다는 ‘시인(詩人)도 이 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는데, 오랫동안 이 꿈과 같은 골짜기에서 멀리 떨어져 떠들썩하고 분주한 도회지에서 살며, 거기서 아름다운 시를 짓고 있었’다는 ‘그래서 큰 바위 얼굴을 노래한 시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큰 바위 얼굴 자신이 읊은 것과 같은 장대한 시였’다는 ‘시인이 산을 노래하자, 전에는 보지 못하던 힘찬 기상이 그 산 중턱에서 산꼭대기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았’다는 ‘태고적부터 있었던 바다를 노래하면, 그 노래하는 마음에 감동되어, 두려움에 넘친 끝없이 깊은 바다가 마침내 출렁이는 것 같았’다는 ‘하느님은 이 세상을 만드심에 있어, 마지막 손질을 하기 위해 이 시인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무엇이나 이 시인의 노래가 없이는 이룩되었다고 할 수 없었’다는 ‘어쨌든 시인이 노래하는 꿈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훌륭한 진리(眞理)였’다는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 가며 지금까지 혼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일을 알게 되었’다는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가 되고 어디까지가 자기의 것이고, 어디까지가 상대방의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호흡이 딱 들어 맞는 즐거운 합창이 되어 흘러 나왔’다는 ‘시인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네스트의 인품(人品)에서, 자기가 지금까지 쓴 시보다도 더 고상함을 느꼈’다는 즉【그 때, 어네스트가 말하려던 생각이 그대로 표정에 나타나 어네스트는 더 없이 인자하고 숭고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자 시인은 느닷없이 두 손을 번쩍 쳐들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네스트야말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눈을 들자, 사물(事物)을 꿰뚫어볼 줄 아는 시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침내 예언은 사실이 된 것입니다.】라는 내용들도 한번 묵상해보면 내용상 어네스트가 시인을 만나야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써 큰 바위 얼굴의 사상과 시인의 사상이 같은 사상으로써 그 사상의 전당이란 결국에는 천년왕국의 신앙을 말하는 것으로써 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묵상거리가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어네스트를 찾아온 시인
또 세월이 물 흐르듯 흘러갔습니다.
어네스트의 머리는 희끗희끗 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마와 볼에는 품위있는 주름이 생겼습니다.
어네스트는 이제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네스트는 헛된 나이를 먹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흰 머리털의 수호 이상으로 훌륭한 생각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얼굴의 주름은 세월이 새긴 글씨이며, 그 속에 오랜 인생에서 얻은 훌륭한 지혜의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네스트를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누구나가 모두 바라고 있는 명성을 어네스트는 구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얻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그가 조용히 살고 있는 골짜기를 넘어 널리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대학 선생님이나 도시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어네스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일부러 먼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즉 이 꾸밈없는 농부를 만나면, 다른 사람과는 달리, 책을 읽어 얻은 것보다 더 훌륭한 생각을 얻게 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 속에는 날마다 천사(天使)와 벗삼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의 말처럼, 조용하고 친근감이 있는 위엄이 넘쳐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학자이든, 정치가이든, 자선가이든, 어네스트는 어렸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부드러운 참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과 상대방의 마음 속에 떠오르거나 숨어 있는 일을 마음 내키는 대로 말했습니다.
말을 나누다 보면, 어네스트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빛나고, 조용한 저녁 해처럼 찾아온 손님을 비쳐 주었습니다.
손님들은 어네스트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골짜기를 지나갈 때 그들이 멈춰 서서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그 얼굴과 똑같은 사람을 언젠가 만난것 같은데 어디서 만난 사람인지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네스트가 점점 나이를 먹자, 자비로운 하느님은 한 사람의 새 시인을 땅 위로 내려보냈습니다.
시인(詩人)도 이 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는데, 오랫동안 이 꿈과 같은 골짜기에서 멀리 떨어져 떠들썩하고 분주한 도회지에서 살며, 거기서 아름다운 시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 속에는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오던 산들이 머리에 흰 눈을 이고 가끔 나타났습니다.
또 이 시인은 큰 바위 얼굴의 일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 바위 얼굴을 노래한 시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큰 바위 얼굴 자신이 읊은 것과 같은 장대한 시였습니다.
이 시인의 재능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시인이 산을 노래하자, 전에는 보지 못하던 힘찬 기상이 그 산 중턱에서 산꼭대기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또 아름다운 호수(湖水)를 노래하면, 천국의 미소가 호수 위에 떠올라 언제까지나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태고적부터 있었던 바다를 노래하면, 그 노래하는 마음에 감동되어, 두려움에 넘친 끝없이 깊은 바다가 마침내 출렁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리하여 이 세계는 시인의 훌륭한 눈에 비쳐 칭송되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만드심에 있어, 마지막 손질을 하기 위해 이 시인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무엇이나 이 시인의 노래가 없이는 이룩되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노래할 때도 이 시인의 시는 고상한 품위와 아름다움이 넘쳐 있었습니다.
시인이 길에서 만나는 이 세상의 더러움에 물든 남녀나 길에서 노는 아이들이라도, 그의 시를 짓는 마음을 통해 보면 환히 빛나 보이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사람들도 천사의 친구다, 큰 금사슬이 그들을 서로 이어 놓은 것이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하늘이 내린, 숨은 아름다운 세계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자연계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숭고함이란, 시인이 머리 속에서 마음대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아주 그럴 듯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에게는 실컷 말하라고 내버려두면 됩니다.
왜냐 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연의 신이 경멸하면서 낳은 것이며, 돼지를 만들고 난 뒤의 찌꺼기 재료를 반죽하여 만든 것입니다.
어쨌든 시인이 노래하는 꿈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훌륭한 진리(眞理)였습니다.
이 시인의 시집은 어네스트의 손에도 들어왔습니다. 그는 하루 일이 끝나면 문 앞 의자에 걸터앉아 이 시를 읽었습니다. 이 장소는 지금까지 언제나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장소였습니다.
어네스트는 지금 넋을 뒤흔드는 듯한 시를 읽고 나자, 얼굴을 들어 부드럽게 미소짓는 큰 바위 얼굴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아아, 엄숙한 분.”
하고 그는 큰 바위 얼굴을 향해 중얼거렸습니다.
“이 시인이야말로 당신을 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큰 바위 얼굴은 웃는 것 같았지만 한마디도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인은 이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지만, 소문으로 어네스트의 이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숭고할 정도로 소박한 생활을 하고,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은 슬기로움을 가졌다는 어네스트의 사람됨을 생각할 때마다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여름날 아침, 시인은 기차를 타고 하루 종일 달리어 해가 질 무렵에야 어네스트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역에 닿았습니다.
옛날 개더고울드 씨의 궁전이었던 큰 호텔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시인은 여행 가방을 든 채 곧바로 어네스트의 집을 물어 손님으로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문 앞으로 다가서니, 손에 시집을 든 노인이 눈에 띄었습니다.
노인은 시를 읽다가는 손가락을 책장 사이에 끼고 친근하게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길가던 사람인데 하룻밤 자고 갈 수 없겠습니까?”
하고 시인은 말했습니다.
“그러십시오.”
어네스트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큰 바위 얼굴이 오늘처럼 여행하시는 분에게 웃는 얼굴을 보인 일은 없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노인과 나란히 의자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시인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지만, 어네스트와 같은 사람과 말을 나누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어네스트의 입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생각과 자기 감정이 흘러 나왔습니다. 또 조금도 꾸밈이 없이 위대한 진리를 아주 친밀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소문대로 천사들이 어네스트와 함께 밭에서 일하고, 화롯가에서 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천사와 친구처럼 지내고 천사들의 숭고한 생각을 자기 것으로 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하여 소박한 매력을 지닌 여느 때의 말로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인은 어네스트를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네스트 역시 밝고, 생기있는 시인의 마음에서 넘쳐 나오는 아름다운 말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 가며 지금까지 혼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가 되고 어디까지가 자기의 것이고, 어디까지가 상대방의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호흡이 딱 들어 맞는 즐거운 합창이 되어 흘러 나왔습니다.
마치 두 사람은 서로의 크나큰 사상의 전당으로 상대방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전당은 멀리 떨어져 있고 흐릿하게 보였으므로 지금까지 안에 들어간 일이 없었는데, 들어가 보니 너무 훌륭하여 두 사람이 다 언제까지나 그 곳에만 있고 싶었습니다.
어네스트는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산 중턱을 쳐다보니, 큰 바위 얼굴도 몸을 내밀어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네스트는 시인의 빛나는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참 이상한 분이시군요.”
시인은 어네스트가 읽고 있던 시집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 시집을 읽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저를 아시고 계실 텐데요. 왜냐 하면 제가 이것을 썼으니까요.”
어네스트는 다시 한 번 전보다도 열심히 시인의 얼굴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큰 바위 얼굴 쪽으로 눈을 돌리더니, 뭔가 불안(不安)한 듯한 얼굴로 또 이 손님을 돌아다 보았습니다.
어네스트는 낙심한 듯한 얼굴로 머리를 흔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십니까?”
하고 시인이 물었습니다.
“왜냐 하면, 나는 지금까지 줄곧 예언이 그대로 들어맞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집을 읽었을 때, 이 시인이야말로 예언한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하고 어네스트는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제가 큰 바위 얼굴과 닮았으리라고 생각하셨었군요.”
시인은 약간 웃음을 띠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개더고울드 씨나, 오울드 블러드 앤드 선더 장군이나, 오울드 스토니 페이스에게 실망한 것처럼, 저를 보고도 실망을 하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어네스트씨,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당신은 그 세 사람의 이름 뒤에 제 이름도 덧붙여, 또 당신의 꿈이 깨어졌다고 기록하셔야 합니다. 왜냐 하면 그 말을 하기에는 슬프고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저는 저 부드럽고 엄숙한 큰 바위 얼굴이 될 만큼 값어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고 어네스트는 물었습니다. 그리고 시집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기 쓰여 있는 생각은 하느님처럼 거룩하지 않습니까.” “
그 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나타낸 점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고 시인은 대답했습니다.
“그 속에서, 천국의 노래의 메아리를 조금은 들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네스트씨, 저의 생활은 저의 생각을 그대로 실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큰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저의 실제 생활은, 그것도 제가 좋아서 한 일이지만, 하찮고 천한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하자면, 저는 시 속에서 신성함이나 아름다움이나 선 같은 것은 자연과 인간의 생활 속에만 있다고 노래했지만, 그것을 붓끝만으로 써 버린 일도 있습니다. 당신처럼 열심히 진실과 선(善)을 찾고 계신 분이 아무리 바라신다 해도, 이런 일로 제가 큰 바위 얼굴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슬픈 듯이 그렇게 말하더니 눈물이 글썽해졌습니다. 어네스트의 눈에도 눈물이 괴었습니다.
해질 무렵이 되자, 어네스트는 언제나와 같이 이웃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 밖에서 이야기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네스트와 시인은 팔짱을 끼고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며 그 장소로 갔습니다.
그 곳은 언덕 사이에 있는 아늑한 장소로, 뒤쪽은 회색 절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위 모퉁이에서는 아름다운 덩굴을 이룬 잎이 탐스럽게 늘어져, 울퉁불퉁한 바위 표면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지면(地面)보다 조금 높은 곳에, 움푹 들어간 바위가 푸른 초목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곳은 꼭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였으며, 생각에 열중하거나 감동하거나 하여 손발을 움직일 수 있을 만한 넓이였습니다.
어네스트는 이 자연의 연단에 올라가 부드러운 얼굴을 사람쪽으로 돌렸습니다.
사람들은 서기도 하고 앉기도 했으며, 풀밭 위에 눕기도 하는 등, 저마다 편한 자세로 어네스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울어 가는 저녁 햇살이 사람들 위로 비스듬하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햇빛이 점점 약해져 가는 저녁 한때의 즐거움은, 해묵은 나무들이 들어선 숲 속의 엄숙한 느낌과 뒤섞이었고, 그 나무의 가지 사이나 밑으로 황금빛이 겨우 빠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다른 방향으로는 숲이며 저녁 해와 마찬가지로 엄숙하면서도 밝은 표정을 띤 인자한 큰 바위 얼굴이 보였습니다.
어네스트는 자기가 느낀 일과 생각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힘이 담겨 있었습니다.
왜냐 하면 어네스트의 말 속에는 어네스트의 사상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네스트의 사상에는 참다움과 깊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네스트의 사상이 매일의 생활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자가 한 말은 값싼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활에서 생겨난 말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올바른 행위와 깨끗한 사랑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즉 어네스트의 말 속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시인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네스트의 인품(人品)에서, 자기가 지금까지 쓴 시보다도 더 고상함을 느꼈습니다.
시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이 거룩한 노인을 정중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조용하고 아름답고 생각이 깊으며, 흰 머리가 흩어진 이 빛나는 얼굴이야말로 예언자나 성인(聖人)의 얼굴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저녁 햇살을 받아 뚜렷하게 돋보이는 큰 바위 얼굴이 보였습니다. 그 둘레를 흰 안개가 감싸고 있어, 그것이 마치 어네스트의 이마에 흩어진 흰 머리 같았습니다. 그리고 자비로운 그 표정은 온 세계를 부드럽게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 어네스트가 말하려던 생각이 그대로 표정에 나타나 어네스트는 더 없이 인자하고 숭고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자 시인은 느닷없이 두 손을 번쩍 쳐들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네스트야말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눈을 들자, 사물(事物)을 꿰뚫어볼 줄 아는 시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침내 예언은 사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어네스트는 하려던 말을 다 마치자, 시인의 팔을 잡고 천천히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언제고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은, 자기보다도 슬기롭고 훌륭한 인간이 나타나리라고 마음 속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 영성시집 ‘220. 카이스트 김명현 박사님의 창조론 강좌를 듣고....(전쟁 없는 평화통일)’ 편 700-701, 711-713, 777-781페이지를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700-701페이지 :《《《물론 중국 미래 예언「철판도(鐵板圖)」는 읽어 보았지만.... 2023. 5. 인터넷에서 중국 예언서「추배도(推背圖)」특히 제47상, 57상에서 자미 성인이 출현한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즉 옛 고서를 많이 읽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께 맞추어 옛 고서를 재해석하는 의로운 말이 아니라면 무슨 의로움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에 대한 예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묵시록이 왜 예언이 되었겠는가? 묵시록은 모든 예언서의 정점이며 다른 예언은 묵시록을 가리키는 예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묵시록의 예언을 쓰게 하신 분은 묵시록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무위법(無爲法)의 살아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듯이 즉 그러니까 묵시록의 천년왕국을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교회에서 인준을 하게끔 이끌어 가실지도.... 또 자미 성인의 예언은 그냥 평범한 촌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쓰시는 평범한 촌사람이라면 부도덕한 종교들 중에서 부분적인 계시에서가 아니라 가톨릭교회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듯이....(영성시집 ‘201. 천지 창조론과 참된 계약(현재)의 종교’ 편 278-279페이지, ‘207. 문득 구원(道)의 화두(경지)를 깨달았습니다’ 편 321-322페이지 참조) 내가 성경에서 “깨어라!” 하는 소리를 듣고 지혜를 체험한 것도....(신앙수기 ‘15. “깨어라!”’ 편 7-8페이지, ‘37. 지혜를 얻음’ 편 23페이지 참조) 또 큰 바위 얼굴「어네스트를 찾아온 시인」편을 깨달은 것도....(신앙수기 ‘112. 큰 바위 얼굴「어네스트를 찾아온 시인」편 풀이’ 편 167-181페이지 참조) 하느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것들이라고 이제는 깨달아지듯이.... 오직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묵시록에 예언된 천년왕국을 어떻게든 이루어 가실 뿐이듯이....》》》
711-713페이지 : 즉 그러니까 주님께서 깨우쳐주시지 않는 것이라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행스님이 공자님이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653-659, 673, 676-687페이지 참조) 즉 그러니까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때 즉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사람이 나오는 것이 입증되려면 큰 바위 얼굴이 될 사람과 시인이 만나야 하고 사상이 같아야 하는 것이라면 바로 천년왕국 사상이 같음을 확인해 볼 수가 있듯이 결국에는 김강철(바오로) 신앙수기「성모님 도우심으로 이룩될 주의 나라 천년왕국」책을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풀이하는 사상이 같은 길을 걷는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듯이 즉【「하느님은 이 세상을 만드심에 있어, 마지막 손질을 하기 위해 이 시인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무엇이나 이 시인의 노래가 없이는 이룩되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어쨌든 시인이 노래하는 꿈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훌륭한 진리(眞理)였습니다.」,「이 시인의 시집은 어네스트의 손에도 들어왔습니다.」,「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가 되고 어디까지가 자기의 것이고, 어디까지가 상대방의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호흡이 딱 들어 맞는 즐거운 합창이 되어 흘러 나왔습니다. 마치 두 사람은 서로의 크나큰 사상의 전당으로 상대방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왜냐 하면 어네스트의 말 속에는 어네스트의 사상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네스트의 사상에는 참다움과 깊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네스트의 사상이 매일의 생활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신앙수기 ‘112. 큰 바위 얼굴「어네스트를 찾아온 시인」편 풀이’ 편 167-181페이지 참조)】하였듯이 즉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런 천년왕국 사상이 같은 것을 연구하면 깨달을 수가 있듯이 그전의 천년왕국설은 해석도 틀리고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하느님을 말씀을 근거로 풀이하는 천년왕국은 해석도 맞고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근거로 풀이하는 천년왕국은 김강철(바오로) 신앙수기 책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가 있듯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즉 그 효과를 내기 위해서 ‘두 증인’인 두 예언자 주위의 영적 지도 성소(聖召) 받은 식구들이나 천년왕국 성소(聖召)를 받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영성시집 ‘187.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편 209-210페이지, ‘208.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①”’ 편 341페이지, ‘209.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휴거」②”’ 편 350, 353-354페이지, ‘210. 수도생활의 순명에 대해서 깨달음’ 편 363-364페이지, ‘219. 그 짐승의 숫자인 666②’ 편 591, 595-617, 617-622, 622-630, 630-639페이지 참조)】》》》
777-781페이지 : ※ 2023. 6. 27. 수원 말씀의 집에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6. 15-7. 16일까지) 1달 피정을 하는 중인데 오늘 아침 샤워 중에 큰 바위 얼굴과 시인이 만나야 하고 그 사상이 같음을 풀이해야 한다면 그것은 천년왕국 사상이 같음을 바로 해석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바로 시인으로 보냄을 받은 시인의 성소라는 것이 문득 깨달아졌습니다.(신앙수기 ‘112. 큰 바위 얼굴「어네스트를 찾아온 시인」편 풀이’ 편 167-181페이지 참조) 그리고 여기서 둘 다 촌사람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면서 중국 추배도 예언도 촌사람이고 세례자 요한도 지금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도 아니고 광야에서 외치는 것도 지금은 방법이 아니고 순교를 하는 것도 아니라면 또 마태 11장 3절「“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할 상황도 아니라면(영성시집 ‘15. 아! 소리이고 싶어라!’ 편 12-13페이지 참조) 바로 고서를 읽고 예수님께 맞추어서 고서를 재해석해내는 사람이 바로 자미성인의 성소이고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성소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리고 추배도 예언만으로는 예언이 홀로 풀릴 수가 없는 예언으로써 ‘큰 바위 얼굴’의 예언과 추배도 예언 두 가지를 다 같이 읽어야 예언이 확실하게 풀릴 수가 있는 예언으로써 아니면 땅을 바로 잡기도 어려울 것인데 무엇으로 하늘과 땅을 바로 잡는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영성시집 ‘220. 카이스트 김명현 박사님의 창조론 강좌를 듣고....(전쟁 없는 평화통일)’ 편 700-701, 711-713페이지 참조)
《《《※ 인터넷 다음 중국 추배도 예언 제47상
무기를 쓰지 않고 문학을 읽히니, 자미성이 밝게 빛난다. /
천하의 흥망은 모든 백성의 책임이니, 말 한마디에 임금이 된다. / 왕도 아니고 황제도 아닌 사람이 하늘과 땅을 바로 잡는다. / 밭 사이(田間)에서 한 사람이 나온다. / 많은 옛 고서를 읽었다. / 의로운 말 한마디에 영명함(뛰어나게 지혜롭고 총명하다)이 보인다.
추배도 예언 제57상
“극악한 사태에서 변화가 온다. 키가 3척인 아이가 모든 외국인들이 절을 하게 만든다. / 파란 서양과 빨간 동양이 싸울 때 신의 아들이 나타난다. / 이 신사는 평화를 가져와 전쟁을 멈춘다. / 이 믿을 수 없는 천재는 두 나라 사이에서 온 사람이며 서양화된 동양 사람으로 모든 전쟁을 끝낸다”
※ 2024. 3. 26. 인터넷 다음 ‘원음노인의 예언 시’
백년에 하나의 용, / 백년에 하나의 봉황이라. / 용이 소산에 누워 있고, / 봉황은 려수에 숨어있구나 / 성은 천하를 삼키고, / 이름은 군왕을 건넌다. / 학문에 뜻을 품었을 때, / 천조가 그 뜻을 담금질 하는구나 / 반드시 신주의 주인이 될 것이니 / 만세에 위세를 떨치리라.
※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선생님께서 자기 이름을 한문으로 알아오라고 숙제를 내주셔서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더니 아버지께서 내 이름 최혁주(崔赫柱)를 쓰시면서 높은 가문에 빛나는 기둥이 되어라 는 뜻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냥 그렇게 알아오다가 수도원에 들어와서 나의 해석은 높은 가문이란 하느님의 가문으로 빛나는 기둥은 갈라 2장 9절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이듯이 학문에 뜻을 품은 것은 영성적인 학문에 뜻을 품은 것으로써 천조가 그 뜻을 담금질 하고 성인은 구중 숲에서 하늘이 내린 고난으로 심성이 단련된다는 것은 수도원에서 단련된다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가 있듯이 교회에 빛나는 기둥이 되어라 는 뜻으로 그냥 해석이 되었습니다.》》》
즉 그러니까 그 시대를 구원 하시려고 때가 차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오셨듯이 지금도 세례자 요한의 성소를 받은 사람이 등장 한다면 이 시대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시듯이 예수님께서 공중에 재림 하실 때가 다 찬 줄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그러니까 그 시대에 “그들이 혼란(混亂)을 일으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오늘 날의 사람들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성서를 자신(自身)의 이해력(理解力)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그것과 다른 해석(解釋)을 피력(披瀝)하면 그들은 종종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혼란(混亂)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意味)하며 말씀의 참된 의미를 보여 줄 필요(必要)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하고 천주 성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또 세례자 요한도 “오늘 날에도 그 때와 마찬가지다.” 하고 말했듯이.... 즉 그러니까 천주 성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세례자 요한이 외치듯이 즉 그러니까 그때 그 시대를 말씀하시면서 지금 이 시대를 반복해서 똑같다고 말씀해주신 천주 성부님의 말씀은 우리가 부정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이 아니듯이 이 시대에도 세례자 요한의 성소를 받은 사람이 등장 한다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메시지 말씀과 그 사람의 성서 해석도 귀담아 듣고 예수님의 공중 재림을 깨달을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영성시집 ‘193. 천주 성부님’ 편 235-236페이지, ‘194. 세례자 요한’ 편 237페이지 참조)
즉 그러니까 이제는 중국 추배도 예언 제47상에서【의로운 말 한마디에 영명함(뛰어나게 지혜롭고 총명하다)이 보인다.】고 하였듯이 즉【집회서 1장 11절 주님을 두려워함은 행복이요 영예며 쾌락이요 환희의 극치이다. 12절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마음이 즐겁고 행복과 희열을 맛보며 수를 누린다. 14절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며, 신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태에서부터 지혜를 타고 난다. 15절 지혜는 사람들 사이에 보금자리를 틀어 영원한 터전을 삼고 그들의 후대에도 그 곳에서 안식한다. 16절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성숙이며 지혜는 그 열매로 사람들을 흡족케 한다. 17절 지혜는 그들의 집안을 재물로 그득 차게 하고 그들의 곳간을 곡물로 채워준다. 18절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완성이며 지혜는 삶의 번영과 건강의 꽃을 피운다.】고 하였듯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며, 성숙이며, 완성이라는 지혜를 깨닫는 것밖에 더 뛰어난 지혜가 과연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729-732페이지 참조)
107. 천년왕국
가톨릭 대사전에서 ‘재림’ ‘천년왕국설’ ‘공심판’ 등을 찾아보고 ‘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 상권 109 공심판은 무엇이뇨? 공심판은 육신이 부활하면 곧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천사들과 모든 사람 앞에서 각 사람의 사심판(私審判)의 판결을 공포하시는 것이니라. 의 해설을 연구해 보았는데 ‘상해천주교요리’를 읽어 오면서 다른 부분에서는 의심을 느껴본적이 별로 없었는데 유독 109 공심판 해설 ‘천년왕국’ 부분에서는 생각할 수록 의혹만 더 늘어갔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109 해설 344페이지 14째줄에 보면「천년왕국설은 아직 열교로 단죄되지는 않았지만」하고 기록된 점이였고 또 가톨릭 대사전 ‘천년왕국설’에 보면「유스티노, 이레네오 등의 교부들에 의해 지지를 받기도 했던 이 설은 교회에 의해서 배척되었다.」란 즉 단죄되지는 않고 배척만 되었다는 내용인지 믿음에 아직 결정적 판단이 서지는 않았는데 마태 24장 3-44절「재난의 시작」「가장 큰 재난」「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그 날과 그 시간」편들 과는 다르게 마태 25장 31-46절「최후의 심판」편은 내용의 성격이 서로 다름을 발견하였습니다.
나는 천년왕국설을 과거에 여러 열교의 교파들이 일관성 없게 부분적으로 주장했던 그런 설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묵시록의 천년왕국을 깨닫고 믿는 쪽으로 설명해가고 있는 것인데 마태 24장 3-44절「재난의 시작」「가장 큰 재난」「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그 날과 그 시간」편은 마태 25장 31-46절「최후의 심판」편과는 상당한 기간이 예측이 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재난의 시작」「가장 큰 재난」「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그 날과 그 시간」편은「최후의 심판」편과 무관하지는 않다는 말이지만 즉 예수께서는 당신이 천년왕국때 재림하실 것과 세상종말때 재림하실 것을 함축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시면서 또한 잘 살펴보면 구분하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때의 재림이 종말때의 재림으로 비쳐질 수도 있는 것이며 종말때의 재림이 천년왕국때의 재림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즉 요한 14장 24-26절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거니와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하셨는데 물론 이 말씀은 성자의 시대인 그 시대에도 이루어진 말씀이지만 성령의 시대인 이 재림시대에도 이루어질 말씀으로써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 주실뿐만 아니라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때인 것인데 마태 24장 25-28절의 내용을 보면 “이것은 내가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광야에 나타났다’ 해도 나가지 말고 ‘그리스도가 골방에 있다’ 해도 믿지 말아라.” 하셨는데 이 뜻은 마태 26장 29절 “잘 들어 두어라.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하신 말씀의 즉 미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뜻으로써 묵시 1장 7절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 땅 위에서는 모든 민족이 그분 때문에 / 가슴을 칠 것입니다. /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처럼 하늘에 나타나는 순간적인 그 날과 그 시간의 기적적인 재림이나 예수님 시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오시는 우리안에 또는 어떤 사람안에 협조자 성령으로 재림하시는 재림을 뜻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고 과거처럼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그런 재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마태 24장 29-31절 “그런 재난의 기간이 지나면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뽑은 사람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불러 모을 것이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묵시 1장 7절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 땅 위에서는 모든 민족이 그분 때문에 / 가슴을 칠 것입니다. /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과 또 즈가리야 12장 9-11절 ‘그 날이 오면, 내가 몸소 나서서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뭇 민족을 멸하리라. 내가 다윗 가문과 예루살렘 성민들에게 용서를 빌 마음을 품게 하리니 그들은 내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한 일을 외아들이나 맏아들이라도 잃은 듯이 슬퍼하며 곡하리라. 그 날이 오면, 므기또 골짜기 하닷림몬에서처럼 예루살렘에 곡성이 터질 것이다.’ 하신 말씀과 일치하는 말씀으로써
즈가리야 12장에서 14장까지를 보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하고 예수님께서 오실 날을 14번씩이나 말했듯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즈가리야서에서 말하는 그 날은 와버렸는데 또다시 이번에는 당신께서 직접 요한 14장 20절에서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요한 16장 23절에서 “그 날이 오면 너희가 나에게 물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또 마태 24장 36절에서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또 마태 25장 10-13절에서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잠겨졌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고 “그 날이 오면” “그 날과 그 시간”이라는 말씀을 다시 여러번 말씀하셨듯이 우리로 하여금 묵시 1장 7절처럼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는 결정적인 그 날과 그 시간이 와서 그 일이 일어날 때 믿게 하시려는 말씀이신 것인데 마태 24장 29-30절 “그런 재난의 기간이 지나면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셨는데 즉 이것이 바로 재림이고 묵시 1장 7절과 즈가리야 12장 9-11절이 예수님시대와 흡사하게 다시 실현되는 때가 아니겠습니까?
마태 24장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하신 이 말씀은 종말때도 그렇겠지만 종말때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종말 이전의 천년왕국 재림 때를 말하고 있는 것인데 마태 24장 37-39절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 갔다. 그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홍수를 만났는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하시면서 상기를 고조시키시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홍수가 난다는 말씀이 아니라 마태 24장 40-41절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 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 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는 말씀이신 것인데 그리고 이 말씀은 마태 25장 10절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잠겨졌다.”하신 말씀과 일치하는 말씀으로써 즉 살아서 데려가신다는 특별한 내용과
묵시 11장 7-12절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그 짐승이 올라 와서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그들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이며 상징적으로는 소돔【가톨릭 성서낱말사전 ‘소돔’ : 하느님께 대한 죄악으로 고모라와 함께 불과 유황으로 멸망한 도시. 사해 동남쪽 바다에 잠겨 있다 함.】이라고도 하고 에집트라고도 합니다.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시체를 구경할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할 것입니다. 이 두 예언자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괴로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사흘 반이 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셔서 그들은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 두 예언자는 자기들을 향해서 “이리로 올라 오너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예언자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갔습니다.’ 즉 죽고 사흘 반이 지나서 살려서 데려가는 내용과 즉 살아서 데려가는 내용과 죽어서 살려서 데려가는 내용이 다르면서도 일치하는 말씀으로써 즉 ‘그 도성은 그들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이며’ 하였듯이 즉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은 예루살렘 이듯이 죽어서 살려서 데려가는 두 예언자와 살아서 데려 갈 사람도 예루살렘인 새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일로써 즉 공심판 때 깨어있으면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말도 되지만 즉 천년왕국을 튼튼히 세우시려고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은 깨어있다고 굳이 살아서 데려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즉 하느님께서 모세의 시종인 별로 특별한 신분도 아닌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택하셨듯이 또 엘리야의 제자로 엘리사를 택하셨듯이 물론 누구든지 깨어있는 사람을 전제로 하시겠지만 천년왕국을 믿는 사람 중에서 누구든지를 택하셔서 천년왕국을 튼튼히 세우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듯이 결국에는 이미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겠지만 예수께서 천년왕국 재림 때 준비하고 깨어있는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고 즉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 휴거가 일어나고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기적이 끝나는 그 날과 그 시간이 지나서는 문이 잠겨지는 이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또 마태 24장 15-18절을 보면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대로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자는 알아 들으라.) 그 때에는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 지붕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있는 세간을 꺼내러 내려오지 말며 밭에 있는 사람은 겉옷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 가지 말아라.” 하셨듯이 지금은 시대적으로 우상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면 그렇다면 이것은 구약시대에 있었던 다니엘 12장 11절 ‘정기제사가 폐지되고 파괴자의 우상이 선 다음 일천 이백 구십 일이 지나야 끝이 온다.’ 하였듯이 마카베오상 1장 45절 ‘안식일과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47절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54절 ‘안티오쿠스왕은 번제 제단 위에 가증스러운 파멸의 우상을 세웠다.’ 하였듯이 이런 일을 비유로 이 시대에 맞게 영신적으로 알아 들어야 할 것인데 세간에 대한 과도한 애착, 겉옷에 대한 과도한 애착, 돈, 명예, 권력, 쾌락, 낙태 등 정신적으로 거룩한 곳에 우상이 서면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가 버리고(에제키엘 8장 4-6절. 또 에제키엘 10장, 11장, 43장, 44장 참조) 그러면 재앙이 내리는 것인데 그래서 우상은 흉측한 황폐의 상징인 것인데
마태 24장 15-20절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자는 알아 들으라.) 그 때에는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 “이런 때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겨울이나 안식일에 피난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여라.” 하셨듯이 즉 산으로 피난 간다는 것은 전쟁의 상황을 말하는 것인데 전쟁이 일어나면 그 시대에는 필연적으로 산으로 피난을 갔었지만 “그 때에는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 하셨는데 모든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왜 “그 때에는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셨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다니엘 예언시대에 마카베오서에서 일어났던 유다 나라에 있었던 재난을 비유하여 재림시대에 있을 재난시를 암시하신 말씀이신 것인데 마카베오상 2장 27-28절에 보면 ‘그리고 마따디아는 거리에 나서서, “율법에 대한 열성이 있고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나를 따라 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모든 재산을 그 도시에 버려 둔 채 자기 아들들을 데리고 산으로 피해 갔다.’ 하였듯이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 하고 비유하셨겠지만 또 전쟁이 아니더라도 전쟁의 상황과 흡사한 재난을 비유하여 영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인데 어떤 메시지 책에 보니까 “덕망의 산으로 올라가거라.”
〈곱비신부님 메시지 책「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에게」268번 ‘거룩한 산’ 편 5.) 그런즉 그분 ‘지혜’의 ‘거룩한 산’으로 올라가거라. 너희가 작고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으로 남아 있으면 이 지혜를 알게 되리라. 그분의 신적 지성이 너희의 지성을 끌어 당기실테니, 너희가 ‘성서’ 안에 계시된 ‘진리’의 현의를 꿰뚫어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복음’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이 시대인들에게 용감하게 전할 수 있으리라. 완전한 진리를 밝혀 주며, 그 진리로 (인류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말씀 뿐이다. 6.) 그분 ‘성심’의 ‘거룩한 산’으로 올라가거라. 불타는 나무 숲 같은 그분의 신적 사랑이 너희를 변모 시키리라. 7.) 그러면 그분의 성심을 본받아 너희 마음이 넓어져서, 너희가 바로 세상에서 고동치는 예수님의 마음이 될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분을 가장 멀리하는 이들을 찾아다니는 마음이요, 뜨겁게 타오르는 그분의 무한한 자비로 만민을 감싸고자 하는 마음이다.〉
하였듯이 하느님께서 내리신 재난은 인간이 회개하고, 죄를 짓지 않고, 우상을 멀리하고, 재물을 섬기기 보다는 하느님을 섬기고, 우리 자신의 삶을 덕망으로 바꿀때 멈추며 전쟁시처럼 재난에서 구원 받는다는 뜻인 것인데 마태 24장 19절 “이런 때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겨울이나 안식일에 피난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여라.” 하셨듯이 즉 이런 재난 때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기 마련이지만 묵시 15장 1절을 보면 ‘그 재난은 최후의 재난으로서 하느님의 분노의 마지막 표현’인 가뭄, 홍수, 기근, 지진, 전염병, 무게가 오십 근이나 되는 엄청난 우박 등 물론 많은 나라중에 전쟁을 겪는 나라들도 있겠지만 성서에서도 마태 24장 6절 “또 여러 번 난리가 일어나고 전쟁 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하셨지만 전쟁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자연 재난을 당하는 인도, 아프리카 또 북한 같은데를 보더라도 임신한 여자와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을 누가 불행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가장 큰 재난이 닥쳐오면 이런 재난의 기간에 마태 24장 22절 “하느님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뽑힌 사람들을 위하여 그 기간을 줄여 주실 것이다.” 또 마르 13장 20절 “주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주께서는 뽑으신 백성들을 위하여 그 기간을 줄여 주셨다.” 즉 “하느님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또 “그러나 주께서는 뽑으신 백성들을 위하여 그 기간을 줄여 주셨다.” 고 하신 점을 보더라도 이때 종말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만약 이때가 종말이라면 뽑힌 사람들을 위하여 그 기간을 줄여 주시고 말고 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린전 15장 23절 ‘우리의 부활’ 편에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24절 ‘그 다음에는 마지막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위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하였는데 고린전 15장 23절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지 믿지 않은 사람들까지 살아난다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24절 ‘그 다음에는 마지막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위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라고 한 이 말씀은 고린전 15장 23절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 다음에는 긴 세월이 흘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믿는 사람들이 살아나게 될 것처럼 24절 또 긴 세월이 흐른 그 다음에는 공심판인 마지막 날이 온다는 말인 것입니다. 아무튼 묵시 20장 5절처럼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이 끝나기까지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듯이 ‘첫째 부활’ 다음에는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이 끝나기까지 살아나지 못할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데살전 4장 15절 ‘주님의 재림’ 편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살아 남아 있다 해도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보다 결코 먼저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16절 ‘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17절 ‘다음으로는 그 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 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듯이 여기서도 즉 16절과 17절에서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즉 ‘그 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라고 하였으니까 첫째 부활을 말하는 것임을 또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묵시 20장 1-6절 ‘천년왕국’ 편에 ‘그는 늙은 뱀이며 악마이며 사탄인 그 용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끝없이 깊은 구렁에 던져 가둔 다음 그 위에다 봉인을 하여 천 년이 끝나기까지는 나라들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였듯이 묵시록의 일곱 봉인을 떼는 것은 묵시 20장 2-3절의 사탄이 갇히는 봉인을 반대로 하는 것이니까 사탄이 갇히는 천년왕국으로써 ‘나는 또 많은 높은 좌석과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심판할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예수께서 계시하신 진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해서 목을 잘리운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낙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끝나기까지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듯이 즉 천년왕국 때 살아날 순교자들의 영혼을 말하는 것인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목을 잘리웠으니 묵시 6장 10-11절에서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원수를 갚아’ 주시겠다는 약속 그대로 하느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리셔서 그 보상의 갚음을 하신다는 말씀의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묵시 2장 10-11절에서 “그러나 너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월계관을 너에게 씌워 주겠다.” “승리하는 자는 결코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듯이 즉 죽기까지 충성을 다한 순교자들이 살아나서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는다면 그들이 바로 휴거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또 묵시 6장 9-11절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떼셨을 때에 나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 말씀을 증언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대왕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또 우리가 흘린 피의 원수를 갚아 주시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또 그들은 흰 두루마기 한 벌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동료 종들과 형제들이 다 죽어서 그 수가 찰 때까지 잠시 쉬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하였듯이 즉 ‘순교자들의 영혼이 피갚음을 기다리고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동료 종들과 형제들이 다 죽어서 그 수가 찰때까지’ 라는 이 말씀은 순교의 시대가 끝날때까지 잠시 기다려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순교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면 동료 종들과 형제들이 죽는 순교자들은 계속 나올 것이고 순교자들을 계속 살려야 하는 계속 휴거한다는 계산이 나오니 말입니다. 그리고 묵시 20장 5절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이 끝나기까지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러면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천년왕국 재림 때에 이런 첫째 부활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즉 마태 27장 50-53절 ‘숨을 거두신 예수’ 편에서 ‘예수께서 다시 한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바로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거룩한 도시에 들어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하였듯이 모르긴 해도 그런 일과 흡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둘째부활은 공심판때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니까 묵시 20장 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거룩합니다. 그들에게는 둘째 죽음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라고 한 이 말씀은 공심판때는 물론이지만 첫째 부활을 하였으면 라자로 처럼 살아났다는 말인데 처자식도 다 죽었고 공심판 때까지 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러면 둘째 죽음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하는 경우라면 라자로는 또 죽었지만 이들은 라자로 처럼 또 죽지 않고 즉 라자로의 육신은 3일 전에 죽은 그 육신이지만 순교자들의 육신은 공심판 때 사기지은(四奇之恩)을 입을 육신으로써 공중으로 들려 올라간다는 뜻으로 둘째 죽음의 세력을 받지 않는다는 즉 휴거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묵시 19장 11-14절 ‘흰 말을 타신 분’ 즉 “신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심판하시는 묵시 19장 20절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산체로 유황이 타오르는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하였듯이 산 체로 받는 심판은 즉 한번도 죽지 않고 산체로 받으니 불못과 불바다는 맥락은 같이 하지만 공심판때와는 때가 좀 다른 부분적인 심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묵시 20장 7-15절 천년왕국이 끝나고 받는 ‘불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공심판때를 말하며 즉 공심판때는 모든이가 죽고 심판을 받는 것이지만 천년왕국 이전의 불못에 던져지는 불심판은 산 채로 받으니 아마도 하느님께서 창세기 19장 24절 ‘유황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퍼부으시어’ 사람들이 타죽었듯이 또 민수기 16장 30-35절 코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무리들을 그들의 집안 식구들과 함께 ‘산 채로 지옥에 떨어뜨리’셨듯이 그러한 부분적인 불심판을 뜻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묵시 19장 20절에서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산체로 유황이 타오르는 불못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은 후 ‘그리고 남은 자들’ 즉 묵시 19장 21절에서 ‘그리고 남은 자들은 그 흰 말을 타신 분의 입에서 나온 칼에 맞아 죽었고’ 하였는데 이 죽음은 실제로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칼은 죽이고 살리는 칼이라는 점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새들이 그들의 살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였는데 즉 이 말씀은 묵시 19장 17-18절 ‘그는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모든 새에게 큰 소리로 “자, 다같이 하느님의 큰 잔치에 오너라. 왕들과 장성들과 장사들과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과 모든 자유인과 노예와 낮은 자와 높은 자의 살코기를 먹어라.”’ 하였고 21절 ‘그리고 남은 자들은 그 흰 말을 타신 분의 입에서 나온 칼에 맞아 죽었고 모든 새들이 그들의 살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였듯이 즉 주검을 먹고 사는 높이 나는 모든 새들인 즉 영성적으로 높이 나는 모든 신앙인들이 배부른 기분이 자연히 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묵시 20장 11-15절 ‘나는 또 크고 흰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또 죽은 자들이 인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 옥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책들이 펼쳐져 있고 또 다른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은 그 많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적을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는 자기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냈고 죽음과 지옥도 자기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행적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죽음입니다. 이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하였듯이 즉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동시에 즉 같은 때 ‘죽은 자들이 인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 옥좌 앞에’ 라고 하였듯이 ‘크고 흰 옥좌에서의 심판’ 선고를 받기 때문에 바로 최후의 심판인 공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설명으로 마태 24장 3-44절「재난의 시작」「가장 큰 재난」「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그 날과 그 시간」편은 마태 25장 31-46절「최후의 심판」편과는 천년이라는 기간이 맞을 것이며 묵시 20장 2-3절 ‘그는 늙은 뱀이며 악마이며 사탄인 그 용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끝없이 깊은 구렁에 던져 가둔 다음 그 위에다 봉인을 하여 천 년이 끝나기까지는 나라들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였듯이 천년왕국 이전의 심판과 묵시 20장 7-10절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은 자기가 갇혔던 감옥에서 풀려 나와서 온 땅에 널려 있는 나라들 곧 곡과 마곡을 찾아 가 현혹시키고 그들을 불러 모아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 때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들을 현혹시키던 그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에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하였듯이 천년왕국 이후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천년왕국의 시대가 왔다는 믿음이 굳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루가 19장 11-27절 “‘한 귀족이 왕위를 받아 오려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 오자마자 돈을 맡겼던 종들을 불러서 그 동안에 돈을 얼마씩이나 벌었는지를 따져 보았다.…… 그리고 내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던 내 원수들은 여기 끌어 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하고 말했다.’ 즉 그래서 사도행전 1장 6절 ‘사도들은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묻기를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하고 물어 보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즉 토론의 결과적인 질문으로 보아지는데) 이어서 예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를 인정하신 답변은 7-8절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하셨듯이 사도들은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더 이상 지나치게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성령의 힘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충실했으며 현세적으로 기다렸던 영신적으로 기다렸던 하루가 천 년 같이(베드로후서 3장 8절 참조) 기다렸던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를 기다렸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인간의 머리로는 천년왕국설을 맞게든 틀리게든 추측하고 말해 오기도 하였다지만 맞아도 틀려도 인간의 추측들은 이제껏 그래왔듯이 힘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참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증거하실 때는 그 말씀들을 힘있게 이루실 것이며 천년왕국설도 예언자들이 성서에 기록된 내용 그대로를 증거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교회에서 머지 않아 온전하게 받아들일 때가 오리라는 믿음입니다. 그리하여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하였듯이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는’ 종말 재림인 이 세상의 종말은 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멘!
※ 후일 ‘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 상권 71 (문)(답), 95 (문)(답), 109 (문)(답) 해설은 성삼은혜가 풀리고 천년왕국이 인준 받을 때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 신앙수기 ‘107. 천년왕국’ 편 141-156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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