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너와 나
김춘수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
서로 만나 사귀고 서로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10》
네가 가던 그 날은
김춘수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 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11》
노새를 타고
김춘수
기러기는 울지마,
기러기는 날면서 끼루룩 끼루룩 울지 마,
바람은 죽어서 마을을 하나 넘고 둘 넘어
가지 마, 멀리 멀리 가지 마,
왜 이미 옛날에 그런 말을 했을까.
도요새는 울지 마,
달맞이꽃은 여름밤에만 피지 마,
언뜻언뜻 살아나는 풀무의 불꽃,
풀무의 파란 불꽃.
《12》
능금
김춘수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13》
명일동 천사의 시
김춘수
앵초꽃 핀 봄날 아침 홀연
어디론가 가버렸다.
비쭈기나무가 그늘을 치는
돌벤치 위
그가 놓고 간 두 쪽의 희디흰 날개를 본다.
가고나서
더욱 가까이 다가 온다.
길을 가면 저만치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들리고
날개도 없이 얼굴 지운.
《14》
물망초
김춘수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도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날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15》
부재
김춘수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 없이 져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靑石(청석)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 일 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16》
분수
김춘수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17》
사모곡
김춘수
주신 사랑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주신 말씀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오밤중에 전기불 꺼지듯 나 삽니다.
하느님
나는 꼭 하나만 가질래요.
세상 것 모두 눈 감을래요.
하느님
나는 꼭 그 사람만 가질래요.
산엔 돌치는 징소리 내가슴에 너 부르는 징소리.
솔밭이 여긴데 솔향기에 젖는데
솔밭도 나도 다 두고 넌 어디쯤서 길 잃었니.
나도 바람이더면 아무대나 갈껄
그대 가는 곳 어디라도 갈껄
내가 물이라면 아무대나 스밀껄
그대 몸 속 마알간 피에라도 스밀껄
《18》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첫댓글 시... 참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