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노래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사랑과 평화 '한동안 뜸했었지'(1978)
대중적 인기와 비평적 성취를 거머쥔 흑인음악적 파격의 절정
1975년 겨울, 대마초라는 핵미사일 한방으로 한국 대중음악계는 초토화되었다. 그 초토화된 생태계는 트로트 고고라 불리운 비상식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최헌의 ‘오동잎’과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낳았다. 생태계의 복원은 2년 후에 극적으로 찾아왔다. MBC 대학가요제의 대상 수상곡 ‘나 어떡해’와 곧이어 등장한 ‘아니 벌써’는 가요계에 새로운 공기를 주입하였다. 두 곡 모두 산울림의 골방 아지트에서 만들어졌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대마초 이전의 가요계와 아무런 인연도 없던 돌연변이 삼형제가 세상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마초 이전의 공룡 중 하나가 살아남아 산울림만큼 파란을 일으켰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는 ‘아니 벌써’만큼 파격이었다. 당대의 대중적 인기, 후대의 비평적 성취 모두를 완벽하게 거머쥔 1970년대 후반의 음악인은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 단 둘뿐이다.
대중에게 폭넓게 인지되지 못했을 뿐, 사랑과 평화의 멤버들은 1970년대 초부터 그 바닥을 주름잡아온 프로들이었다. 기타리스트 최이철은 1960년대 말부터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고 아이들, (조용필과 콤비 플레이를 펼쳤던) 김트리오, 영 에이스, 서울 나그네를 두루 걸치며 이미 실력자 인증을 받은 상태였다. 드러머 김태흥 역시 미8군 무대와 아이들에서 최이철과 호흡을 맞추며 일찌감치 프로 연주인이 된 인물이었다. 보컬 이철호도 마찬가지다. 최이철처럼 10대 때부터 미군 클럽을 두루 거친 그는 브라스 록 밴드인 파이오니아스에 재직하던 중 영 에이스의 연주를 듣고는 곧장 그들에게 투신했다. 그리고 영 에이스가 대구의 모 클럽에 출연하던 시절에 키보디스트 김명곤이 합류하였다. 베이시스트 이남이도 영 에이스 시절에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렇게 5명이 대마초 파동 직후 사랑과 평화의 전신인 서울나그네를 이루었다. 대마초 따위는 아랑곳 않는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사랑과 평화는 이남이의 작명이었다.
‘한동안 뜸했었지’는 흑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훵키(funky) 사운드로 사람들을 홀렸다. 물론 사랑과 평화 이전에 이런 음악을 도입했던 밴드가 있었다. 데블스가 있었고 사계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훵크가 아니라 소울에 가까웠다. 사랑과 평화처럼 싱코페이션으로 박자를 갖고 놀고, 째깍거리는 기타로 긴박한 리듬을 만들어 내는 밴드는 없었다. 정교한 드러밍과 세련된 신시사이저 연주까지 빈틈을 허락하지 않은 장인들의 사운드였다. 이들은 김명곤이 영 에이스에 합류한 1974년 무렵부터 훵크를 연마해왔다. 사이키델릭이 대세였던 시절에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허비 행콕(Herbie Hancock) 등을 접하고는 그쪽 방면의 음악을 꾸준히 섭렵해왔던 것이다. 그 결실은 마침내 대마초 파동 이후 3년 여의 인고를 견뎌내고서야 터져 나왔다.
- 앨범명
- 한동안 뜸했었지
- 아티스트 및 발매일
- 사랑과 평화 | 1988.01.01
- 타이틀곡
- 한동안 뜸했었지
- 앨범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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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서구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면서 대중가요도 서양 유행 음악의 영향을 받게 된다. 트로트라는 엔카풍의 노래들이 서민들에게 전쟁과 가난의 애환을 표현하면서 대표적인 유행가로 지금까지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서..
흥미롭게도 ‘한동안 뜸했었지’는 이장희가 쓴 곡이다. ‘그건 너’를 부른 포크 진영의 거물이 밤무대의 프로 연주자들에게 러브콜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기막힌 조합이었다. 이장희는 한창 잘나가던 시절부터 최이철의 밤무대 연주에 감복하여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그는 사랑과 평화를 데뷔시키기로 결심하고 곡을 써주었다. 만약 사랑과 평화가 이장희 없이 앨범을 냈다면 어땠을까? 림스키 코르사코프(Rimsky-Korsakov)의 ‘왕벌의 비행’을 재현해내는 초절정 기교에 여러 사람 뒤집어졌겠지만, 그것이 전국적 인기로까지 확대되진 못했을 것이다. “속절없이 화풀이를 달님에게 해대겠지”라는 능청스런 노랫말을 능청스런 멜로디 위에 얹어낸 건 이장희 고유의 능력이었다. 이렇게 후원자는 발랄한 곡을 주었고, 당사자들은 실력과 앞선 감각으로 그걸 포장해냈으니, 성공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사랑과 평화는 이듬해에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와 ‘장미’를 히트시키며 밤무대 뮤지션들의 오랜 역사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재차 입증했다. 그러나 아뿔싸! 핵폭탄이 한 번 더 떨어질 줄은 누구도 몰랐다. 1980년 8월, 2차 대마초 파동에 걸려든 사랑과 평화는 활동을 금지 당했다. 사랑과 평화에게 주었던 곡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지도 못했던 이장희는(대신 아내와 아들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미국으로 떠났다. 1차 대마초 파동 때문에 공식석상에 서지 못했던 음지의 멤버 이철호와 이남이는 끝내 햇볕을 보지 못했다. 각자 흩어져 당분간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사랑과 평화가 없어도 가요계는 여지없이 굴러갔다. 다만,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윤수일밴드의 ‘제2의 고향’이 사랑과 평화로부터 시작된 흐름 속에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1980년대 초는 꼭 1970년대의 연장 같았다 캠퍼스 밴드들이 신선함을 뽐냈지만 밤무대의 생존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한 가지. 몇 년 후 김명곤은 나미를 만나 강도가 더욱 센 또 한 번의 파격을 준비한다. 그의 손길은 나미를 거쳐 이문세, 소방차, 신승훈으로 계속 이어진다. ‘세상을 바꾼 노래’ 시리즈에서 그의 활약을 여러 차례 더 보게 될 거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