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 매체, 그리고 지식 (Nature, Media, and Knowledge)
진화의 역사
18세기 말에 칼 린네우스(Carl Linnaeus, 1707-1778)는 현대의 생물학적 분류 체계, 즉
나중에 어떤 생태계 내에서 개체들과 개체군들의 분류 작업을 가능하게 할 식별 체계를 위한
기초를 세웠다.
린네우스의 작업은 자연 세계의 분류학을 만들어내는 데 유용했지만, 신에 의해 질서 잡힌
존재의 연쇄로서의 우주라는 그의 관념은 근대 과학이 서술하는 것과 확실히 달랐다.
린네우스에게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질서 잡혔으며, 그리고 그는 새로운 종들이 출현
한다는 관념을 애초에 지지하지 않았다(그는 결국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을지라도).
자신의 생애 대부분 동안 린네우스는 이미 신에 의해 창조된 종들 사이의 잡종화와 재조합
과정을 보았으며, 새로운 종들의 출현을 결코 보지 못했다.
린네우스는 안정된 순환하는 흐름의 세계를 상상했던 생기론자였다.
린네우스에게 대자연은 균형 잡히고 자애로왔지만 자연신학에서 인간을 통해 표현되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고정된 위계였다.
여전히 고전적인 신학적 사유의 통제 아래 놓여 있던 생물학에 대한 시각을 갖추었던 린네우스는 확실히
생물학에 기여했지만, 그의 관념들은 아직 현대적 의미에서는 진화론적이거나 생태학적이라고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 1744-1829)는, 진화에 관한 그의 판본이 진화론의
현대적 해설에 대한 발전 가능성이 있는 선행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지 여부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참된 의미의 진화가 서술되는 역사에서 첫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라마르크의 획득 형질 이론이 모든 생명 형태들은 원시 조상들에서 나타났다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이론을 구성하고자 한 최초의 주요하고 포괄적인 시도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십구 세기의 신라마르크주의자들이 라마르크가 단일한 조상으로부터의 유래라는 관념에
기반을 둔 현대적 진화론을 최초로 제안했다고 가정했던 반면에, 그 후의 과학사가들은 이제 라마르크의
시각이 진화에 관한 근대 과학적 관념들의 기반을 제공하는 것들과 매우 다른 일련의 원리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진화의 역사에서 라마르크는, 상호 의존하는 유기체적 전일론을 강조했지만 우주에 대한 보편적인 기계
론적 해석을 선호했던 계몽주의 유물론의 통찰로부터 많은 것을 뽑아내었던 낭만주의적 세계관의 이상들
사이에 서 있는 한 자리를 차지한다.
라마르크의 이해에 따르면, 진화의 메카니즘은 이중적이다.
첫째, 유기체는 평생을 통해 자체 형상의 특정한 측면들의 빈번하고 지속적인 사용에 근거하여 능력들을
발달시킨다.
따라서 더 자주 사용되는 것은 강화되고 개선되며, 사용되지 않는 것은 퇴화된다.
그렇다면 어떤 유기체의 강점들은 그 유기체가 시간에 걸쳐 행동하는 방식에 의존한다.
단일한 생애에 걸쳐 축적된 이런 특질들은 유전을 통해 그 다음 세대에 전달될 것이다.
둘째, 환경이 대체로 다른 특질들에 우선하여 어떤 특질들의 사용을 결정하는데, 사용을 통해서 유기체가
변화시키는 측면 또는 특질들은 외부 조건의 요구에 의해 선택된다.
라마르크의 두 가지 가설 가운데 후자, 즉 한 종 내에서 획득 형질들의 환경적 선택은 다윈 혁명을 통해서
여전히 과학적으로 실행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라마르크는 환경의 영향보다 최초의 행동적 변화를 더 크게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현대의 유전학 연구가 획득 형질에 관한 라마르크의 주장들을 무효화시킨 듯 보인다.
마굴리스(Margulis)와 세이건(Sagan) 같은 다른 사람들은 획득 형질에 의한 적응이라는 라마르크의
이론의 변양태들이 "획득된 유전자 집합들의 유전에 의한 진화적 변화"로서 규정되는 공생발생의 특징들
이라고 주장했다.
군터(Gunter)는 라마르크주의가 실행 가능한 진화 메커니즘으로 다시 간주된다고 주장하면서, 두 종류의
획득 형질―일시적 획득 형질과 영구적 획득 형질―을 주장했다.
에뮤, 물벼룩, 그리고 무에 관한 여러 연구들을 인용하면서, 군터는 라마르크적 유전에 대한 증거를 찾아
낸다.
이런 경우들에 있어서 문제는 획득 형질의 이런 유전 과정이 기능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기능하는
가이다.
또한 군터는 마굴리스의 공생발생 이론의 통찰들을 인식하지만, 이런 유전 형식을 신라마르크주의에 대한
자신의 논변과 차별화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진화적 사유에 대해 라마르크가 기여한 점들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른 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굴드(Gould)는 생물학적 진화가 라마르크의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듯
보이지 않을지라도, 사실상 문화적 진화는 그렇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적 진화와는 대조적으로 문화적 진화는 "라마르크적" 양태로 작동할 수 있는데, 한 개인 또는 한
세대가 평생 동안 배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인간들이 문화의 연속성을 보증하기 위해
개발한 글쓰기, 지도, 주입, 의례, 전통, 그리고 일단의 방법들로 그 다음 개인 또는 세대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마르크의 유산에 관해 이런 다중적 시각을 취하게 되면 라마르크주의는 역사에 맡겨졌다고 단호하게
제안하지 못하게 된다.
그의 유산은 불분명하며, 그리고 그가 제안했던 진화의 메커니즘들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고 논쟁
중에 있지만, 진화 사상의 역사에서 라마르크는 논란이 되는 인물이지만 여전히 중추적인 인물이다.
라마르크에 이어지는 인물은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인데, 그는 라마르크의 이론
들을 강하게 반대했으며, 그리고 "퀴비에의 경우에, 종들 사이의 관계들은 그것들의 외적 특징들의 질서
정연한 위계가 아니라 그것들의 내적 구조의 유사점들에 기반을 두었"을 정도로 비교분류학에서 새로운
기법들을 개발했던 생물학자였다.
퀴비에와 그를 높이 평가했던 프랑스 과학 공동체는 대체로 여전히 유신론적이었지만, 린네우스의 신에
의해 질서 잡힌 분류학(가장 단순한 지구 생명에서 시작하여 인간에서 정점에 이르고 신을 향해 직접
전진하는 존재의 대연쇄라는 관념에 의존했다)과 결합된 퀴비에의 비교해부학은 신에 의해 질서 잡힌
설명 원리들로부터의 더 넓은 전환을 가리키는, 사유에 있어서의 또 하나의 패러다임 전환을 특징짓
는다.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은 현대 지질학의 창시자로 서술되었다.
그의 저작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는 "균일론(uniformitarianism)의 방법:
모든 변화의 속도는 시간에 걸쳐 절대적으로 균일하다고 가정된다"을 제시했다.
"관찰 가능한 강도로 작용하는 관찰 가능한 원인들만이 과거 사건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보울러(Bowler)에 따르면, 라이엘은 이렇게 믿었다.
"과학적 진보에 대한 주요한 걸림돌은 과거의 미지의 원인들에 관해 기꺼이 추측하려는 성향과 지구
역사의 엄청난 연장을 숙고하지 않으려는 성향이었다".
지구에 대한 라이엘의 견해는 과학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지만, 신의 본성에 관한 지배적인 직관들에도
관련되어 있었다.
라이엘의 경우에, 세계의 구조와 질서에 대한 신의 참여의 증거는 인간의 탐구가 접근할 수 있었던 전
시기 동안 지구가 명백히 완전하고 자기조절적인 체계를 유지해 왔었다는 관찰 가능한 사실에 의해
직접 증명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은 창조를 "영원한 균형" 상태로 유지시키는 "완벽한 장인"이었다.
고전적 유신론과 지질학 연구를 통한 과학적 진보 둘 다에 대한 라이엘의 신봉은 혼합된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그는 목사가 창세기 이야기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을 여전히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시대에
지질학적 연대의 연장을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여전히 고전적 신학을 신봉했기 때문에, 또한 그의 지구 연대의 확장은 창조 이래로
지구가 거의 변화하지 않았고, 동물들은 전체적으로 멸종되지 않았으며, 게다가 지구의 다른 생명 형식들
가운데서 인간의 출현은 신의 개입의 특별한 사례였다라는 감각과 함께 공진화했다.
라이엘의 경우에, 도덕, 지능, 그리고 영성은 주로 정상 상태로 존재하는 지구의 점진적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었다.
라마르크의 이론들이 최초의 진정한 진화적 패러다임으로 여겨지더라도, 현재까지 역사가 수행했던
주요한 진화 메커니즘―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체계적으로 제시한 것은 1858년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한 것이다.
라이엘의 연장된 연대와 지질학적 변화에 대한 점진론적 시각을 자연 세계에 적용함으로써 다윈(1809-
1882)은 진화를 장기적인 시간 규모에서 주변 환경에 대한 유기체들의 적응으로 해석했다.
다윈의 진화론만큼 큰 문화적 영향을 미쳤던 그 어떤 이론이나 신조는, 그것이 과학적이든,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간에, 반드시 복잡하고 다양한 방향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보울러는 다윈의 이론에 대한 두 가지 주요한 접근방식이 있다고 넌즈시 말한다.
하나는 다윈을 당대의 특정한 과학적 문제들을 풀려고 노력하면서 자기 분야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여기는 내재적 접근방식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경쟁과 투쟁에 대한 다윈의 강조는 십구 세기 경제적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그 자신이 묻어들어가 있던 것의 투사물이라고 시사하는 외재적
접근방식이다.
외재론자는 과학의 문화적 영향과 배태성의 견지에서 과학을 연구하는 데 열중한다.
과학적 노력의 역사성에 집중함으로써 외재론자는 중요한 과학적 쟁점들을 방관한다.
다른 한편으로, 내재론자는 과학적 실천에 대한 비역사적 이해를 통해서 나아가며, 사회역사적 쟁점
들을 도외시하고 관련된 과학적 문제들만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외재론자는 다윈을 이데올로기적 힘들에 의해 통제되는 허수아비로 환원시켜 그의 사회적
편견들을 자연에 대한 동등한 견해로 기계적으로 번역한다.
내재론자는 다윈을 저곳에 존재하는 것을 단순히 바라본, 자연에 대한 자명한 모형의 발견자로 여긴다".
외재론자의 경우에, 자연선택이 당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들과 동조하는 방식 때문에 다윈의 이론은
회의적으로 고려된다.
다윈의 경우에, 자연선택은 경쟁적으로 획득되어야 하는 자원들로 이루어진 유한한 환경이라는 맥락에
서의 생존 투쟁이다.
이쪽의 성공은 저쪽의 실패였다.
이 분야에서의 다윈의 사유는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의 1798년 저작 <인구론>에서 크게
영감을 얻어 구상된 것이다.
맬서스적인 "생존 투쟁"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에 식량 공급을 늘릴 수 있는 능력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한다는 관찰에 근거를 두었다.
보울러는 맬서스를 "신이 도덕적 목적을 위해 인류에게 명백히 매우 가혹한 상황을 창조했었다고 믿
었던 성직자"로 서술한다.
또한 맬서스가 지배적인 경제 체제의 지지자였다는 사실도 다윈이 자연을 당대의 정치적 견해들로
해석했다는 외재론적 입장을 뒷받침하는 데 더해진다.
"맬서스는 확실히 자유방임주의의 지지자였다.
그는 빈자들에 대한 국가의 구호는 그들이 더 빨리 자식을 낳도록 부추길 뿐이라고 믿었다.
공리주의와 개체주의의 원리들이 사회 이론과 생물학 이론들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던 공통 맥락을
형성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토머스 맬서스의 저작과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1776에 출판됨) 같은 다른 저작들은
사회 속의 주요한(그리고 가장 건전한) 동기로서 자유시장에서 행동하는 경쟁적 개인를 상상하는 환경을
벌써 만들어내었었다.
다윈이 비슷하게도 경쟁의 역할을 지지하는 주장을 했던 점은, 이십 세기에 출현할 사회다윈주의적 패러
다임들을 전적으로 명확히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예상할 수 있을 방식으로 당대의 정치적 사유를 자연화
하는 듯 보였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십구 세기 말의 지배적인 정치 체제와 경제 체제에 들어맞는 "투쟁에 기반을 둔 생태학"
이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최소한 당대의 과학적 이해의 범위 내에서 진화를 설명하는 데 적합한 메커니즘이 발견되었던 것처럼 보였다.
다윈이 이해하기에,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어떤 특질들을 지닌 유기체들이 고정된 환경에 더 성공적
으로 또는 덜 성공적으로 적응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환경에 더 적합한 유기체들은 생식적 이점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더 많은 자식―유전 과정들을 통해서
자기 부모와 비슷한 특질을 소유할 자식―을 남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미리 결정되지 않은 채로, 환경은 어떤 개체군 내의 특질들 가운데서 선택한다.
이것이 오랫동안 찾았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들이 변화하는 메커니즘이다.
진화라는 주제에 관련될 때 역사 서적에서, 과학적 사유에서, 그리고 사회적 상상 장치들에서 다윈은
여전히 중심 인물이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 그레고르 멘델(Gregor Mendel, 1822-1884)은 현대 유전학의 기초를 세웠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와 함께 멘델의 연구는 이십 세기에 "현대적 종합"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두 이론의 통찰들을 조합하여 현재 생태학과 진화 둘 다에 있어서 지배적인 이해 방식을 명확히 표현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 출신의 수도사였던 그레고르 멘델은 유전 가능한 특정한 특질들이, 아무 변화도
나타내지 않은 채, 부모와 자식 사이에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었다.
다윈적 진화가 강조한 자연선택의 결과로서 일어난 개체군 내의 변화들은, 유전된 형질들의 변화들이
유기체들의 차별적 생존과 생식을 초래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프란시스코] 아얄라(Ayala)는 유전학에 대한 관심이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
nsky)의 1937년 논문 "유전학과 종의 기원"이 발표된 이후에 출현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아얄라는, 역사적 또는 철학적 맥락에서 "신다윈주의"와 "현대적 종합"이라는 술어들이 가장 일반적
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생물학자들은 더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이론들을 그냥 "진화"로 부른
다고 시사한다.
이것은 현대적 종합이 과학 공동체에 의해 수용된 정도를 가리킨다.
1975년에 E. O. 윌슨(E. O. Wilson)은 매우 논란이 많은 자신의 책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을 출판
했는데, 그는 사회생물학을 "모든 사회적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에 관한 체계적 연구"로 규정했다.
윌슨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진화론(현대적 종합에 의해 표현된)에 대한 신다윈주의의 영향은 심지어
사회과학과 인문학(철학, 시, 그리고 미술을 비롯한)에 연루된 인간의 모든 탐구 양태를 재구성했다.
윌슨의 경우에, 이제 각 분과학문은 "현대적 종합에 포함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생물학의 마지막 갈래들)
로서 통합을 기다린다.
사회생물학의 목적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개체군 유전학의 맥락에서 드러나는 적응적 중요성의 견지에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는 신다윈주의적 패러다임에 동조하도록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윌슨의 사회생물학적 패러다임은, 그 이름이 함축하듯이, 유전학에 대한 이십 세기의 통찰
들과 결합된 다윈의 자연선택 메커니즘으로 설명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의 문화적 행동과 사회학적
행동의 요소들을 설명하려고 감행했다.
윌슨의 목적은 문화적 행동들이 물리학과 화학 같은 다른 과학들에서 연구되는 현상들만큼 정확히 설명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는 한결같이 예측 가능한 과학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1970년대에 윌슨이 최초로 제안한 이래로 이 접근방식은 수없이 많이 비판받았으며, 그리고 자체적
으로 이런 비판들에 대응하여 재구성되어서 일반적으로 현재 진화심리학으로 알려져 있는 분야로 재명
명되었다.
그럼에도, 최근 1998년에 윌슨은 자신의 책 <통섭: 지식의 통일>에서 생물물리학적 원리들의 견지에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설명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계속했다.
유전자 환원주의의 추세를 좇아서 1976년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이기적 유전자>를
출판했으며, 인간들은 자체의 생존과 재생산을 위해 유전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정교한 기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기적 유전자>는 널리 읽혔고 논란이 대단히 많았는데, 논쟁의 대부분이 도킨스의 유전자 규정과
유전자 재생산에 있어서 인간들의 역할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도킨스는 이렇게 적는다.
그런데 그것들[유전자들]은 거대한 집단들로 떼지어 모여서, 외부 세계로부터 차단당한 채,
거대한 볼품 없는 로봇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복잡한 간접적인 경로로 로봇과 소통하며,
원격 조종으로 그것을 조작한다.
그것들이 여러분과 내 안에 존재한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육체와 마음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보존이 우리 현존의 궁극적인 이유이다.
그것들은 복제자로서 많은 진전을 보였다.
이제 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통하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이다.
도킨스의 경우에는 유전자가 자연선택의 중심 단위다.
유전자 재생산이 생명의 유일한 기초이고, 박테리아에서 신경계를 갖춘 복잡한 척추동물까지 모든
다양한 종들은 유전자들이 복제되는 수단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들은 부대현상적인 것이다.
유전자들과 그것들의 재생산이 중요한 것이다.
유전자 재생산의 이기적 본성에 대한 강조 때문에 도킨스가 비도덕적인 탐구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기적 유전자>의 서문에서 도킨스는 자신을 변호하며 이렇게 진술한다.
"이것 때문에 나는 이 책이 관련되어 있지 않는 것에 관해 제기하고 싶은 첫번째 점에 이른다.
나는 진화에 근거하여 도덕을 옹호하고 있지 않다.
나는 상황이 어떻게 진화되었는지 말하고 있다.
나는 우리 인간들이 도덕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지 않다".
비슷하게도, 자신의 책의 미주에서 도킨스는 진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현대 정치 이데올로기들의
견해들 사이의 끈질긴 연결을 지적한다.
"이제 영국은 비열함과 이기심을 이데올로기의 지위로 격상시킨 신우파의 정부가 들어섰으니, 유감스
럽게도 내 말은 연상에 의해 일종의 불쾌함이 덧불여진 듯 보인다".
도킨스와 윌슨은 둘 다 생물학 사상과 진화 사상를 유신론과 뒤섞은 이전의 시도로부터의 단절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린네우스, 라이엘, 그리고 심지어 다윈과는 반대로, 도킨스와 윌슨은 둘 다 확고한 무신론자이다.
이전에 생물학과 결합된 자연신학은 비판의 원천으로서의 역할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연구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에드워드] 라슨(Larson)에 따르면,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와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은 윌슨과 도킨스에 의해 제시된 접근방식을 비판했는데, 그 비판은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유전자들의 자연선택에 대한 배타적인 강조는 유기체들의 적응을 설명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사회생물학 같은 생물학적 결정론의 변양태들에 반대하는 논변을 전개하면서 굴드는 이렇게 적는다.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고전적 논변들은 실패하는데, 집단들을 구분하는 데 그들이 동원하는 특징
들은 일반적으로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인간 집단들 사이의 상이한 태도들과 사유 양식들은 일반적으로 문화적 진화의
비유전자적 산물이라고 믿는다.
요약하면, 인간의 독특함의 생물학적 기초가 우리로 하여금 생물학적 결정론을 거부하게 만든다."고
적는다.
문화적 진화와 변화의 비유전자적 기초에 기반을 둔 생물학적 이유들 때문에 굴드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지지하는 사례가 없다고 시사한다.
사회생물학이 문화 이론에서 자연선택에 대한 현대적 해석("개체들의 차별적인 재생산 성공")을 채택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굴드는 구체적으로 그 분야을 공격한다.
굴드는 사회생물학자들이 개체들 자체가 후속 세대들에 자신들의 유전자들의 분포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유전자 나르개일 뿐이라는 관념 주변에 개체들을 조직하기 위해 다윈적 패러다임을 활용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회생물학은 생물학적 변화를 문화적 행동 위에 덧씌우는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적 패러다임의
투사물이다.
굴드의 경우에, 사회생물학은 경험적 증거에 있어서 거의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 이미 존재하는 자연
선택의 서사에 기반을 둔 문화에 대한 보증되지 않은 서술을 제시한다.
굴드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생물학자들 경우에, 적응의 추론은 충분한 설명적 원리로서 정리되지만,
단단한 데이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
르원틴과 도킨스 둘 다 대중 집단 및 과학자 집단에서 널리 읽히는 책들을 여전히 출판하고 있는 한편,
생물학적 결정론과 문화적 진화는 여전히 강하게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각 패러다임이 인간 행동을 추동하는 논리를 재조직한다는 점이다.
도킨스는 문화의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보는 반면에, 르원틴은 그렇지 않다.
각 경우에 연구 패러다임은 문화적 실천과 생태적 실천의 이유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인간 사유의
본성과 정체성을 재조직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1988년에 E. O. 윌슨은 출판된 한 저작에서 최초로 생명 다양성이라는 술어를 사용함으로써 생태학의
역사에 또 다시 중요하게 기여했다.
이 술어는 어떤 주어진 생태계 내에서 생명 형태들의 변이의 정도를 서술한다.
생명 다양성은 유전자 다양성, 종 다양성, 그리고 생태계 다양성을 서술하기 위해 생태계의 다중적 층위
에 다양성을 편입한다.
그 술어는 이른바 "여섯번째 대량 멸종 사건," 즉 윌슨이 지난 1억 년 동안 지구가 경험했던 최악의 가장
빠른 종 멸종 에피소드라고 서술하는 사건과 함께 동시에 출현한다.
이십 세기 말에 도킨스 등의 유전자 환원주의 프로그램과 다른 궤적을 좇았던 대기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과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이제는 유명한 가이아 이론(그 당시에는 가이아
가설로 불렸던)―지구가 단일한 자기조절 체계라는 견해―을 제시했다.
1970년대에 가이아 가설이 도입되었을 때, 러브록은 생명과 유기체들의 행동이 지구 온도, 산화도,
산성도, 그리고 심지어 암석의 형성 같은 것들의 조절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다는 관념을 시험하고자
했다.
가이아 가설은 대기, 대양, 그리고 기후를 생태와 유기체의 활동과 관련시킨다.
생물군은 지구 생명 형태들의 번성의 미래 안정성을 보증하는 항상성의 전지구적 되먹임 과정을 자동적
으로 만들어내고 유지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생명이 진화함에 따라, 지구의 환경 조건과 대기 조건도 진화한다.
가이아 가설은 유기체들과 그것들의 환경들의 밀접하게 결합된 진화에 대해 주장했다.
러브록의 논변에 관한 초기 출판물들은 197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979년에 <가이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이라는 대중서가 출판되었다.
이 견해는, 애초부터 생명이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 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입장을 명확히 표현
한다.
또한 마굴리스는 제목이 "분열하는 진핵 세포의 기원"이라는 1976년 논문에서 "공생발생"(원래 1926년
에 콘스탄틴 메레쉬코브스키에 의해 표명된 관념)에 대해 주장한다.
공생발생은 두 개의 개별적 유기체들이 공생 과정을 통해서 하나가 되는 과정인데, 진화론의 핵심 요소
로서 협동의 역할을 강조한다.
마굴리스는 "공생발생" 또는 "공생"이 1873년에 독일 식물학자 안톤 데바리(Anton deBary)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술어였다고 지적한다.
마굴리스의 경우에, 공생은 진화 과정의 주요한 구성 요소인데, 여기서 "어떤 동거의 사례들에서는 장기
적인 생활이 공생발생, 즉 새로운 육체, 새로운 기관, 새로운 종들의 출현을 초래한다".
진화적 사유의 대중적인 이데올로기와는 대조적으로, 마굴리스는 공생발생을 진화적 참신성과 다양성의
주요 기관으로 여긴다.
도킨스와 윌슨과는 다른 접근방식을 취하는 마굴리스는 진화적 추동력을 설명하기 위해 이기적 유전자
들의 경쟁이 아니라 공생을 제시한다.
굴드와 르원틴과 달리, 마굴리스는 현대적 종합의 요소들을 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그는 이것도 행
하지만), 공생이 진화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연구함으로써 진화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발달시킨다.
마굴리스에 따르면, "우리가 보기에 충분할 만큼 큰" 모든 유기체들은 사실상 이전에는 독립적이었던
개체들의 생태계들이다.
마굴리스의 공생발생 이론은 공생발생적 "육체 융합"의 과정을 통해서 식물 세포 및 동물 세포의 기원을
설명하고자 한다.
마굴리스의 경우에, 세포 생물학은 세포 생태학이 되는데, 그것은 세포의 자율성을 인정하지만, 또한
세포의 출현을 이전에는 개별적이었던 개체들의 단단히 결합된 결합들의 역사로 설명한다.
현재 한 세포 내의 소기관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한때 환경에서 독립적으로 작동하던 완전한 유기체들이
었다.
이십 세기 전반에, 현대적 종합이 최소한 일차적으로는, 사소한 세부 사항들만 남겨 놓은 채, 진화적
과정을 둘러싼 논쟁을 종결시킨 듯 보였다.
그렇지만, 보울러가 인정하듯이, "단속적 평형"―종의 순 변화는 종의 생존 대부분 동안 대체로 정태적이
지만, 멸종 시기의 효과를 포함하여 큰 변화를 초래하는 갑작스럽고 빠른 종 분화 사건들에 의해 "단속"
된다는 견해―같은 진화에 대한 더 새로운 해석들이 다윈적 의미에서 점진적이고 연속적이라고 여겨지는
진화 과정 내의 부가적인 불연속성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종합은, 특히 '경화된' 형식의 종합은 진화가 적응의 요구들에 의해서만 추동된다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이에 대응하여, 이런 초적응주의가 너무 지나치다고 제안하는 새로운 세대의 비판가
들이 나타났다."
종합에 대한 보울러의 예들에 대한 이의 제기로서 굴드, 르원틴, 마굴리스, 그리고 러브록에 의존하는
앞에서 언급했던 저작들도 덧붙일 수 있다.
이것에 덧붙여, 바렐라, 톰슨, 그리고 로쉬의 "자기생산", 르원틴과 레빈스의 "변증법적 생물학", 그리고
"적소 구성 이론" 같은 [...] 여러 이론들도 신다윈주의적 패러다임에서 멀어지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그것들은 모두 진화론에 대한 접근방식을 제시하는데, 그것들은 다윈의 적응에 의한 자연선택의 역할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환경과 차별되지만 그것에 의존하는 독립적인 자기생산적 통일체로서의 세포의
역할을 지적하고, 유전자, 유기체, 그리고 환경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지적하며, 유기체들이 자체의
환경을 구성하는 데 발휘하는 창의적 역할을 지적한다.
바렐라, 톰슨, 마굴리스, 르원틴, 굴드, 그리고 오들링 스미(Oddling-Smee)의 저작들에 덧붙여, 군터
[일리야 프리고진의 비평형 열역학에 의존하는]는 자연선택에 대한 전통적인 다윈주의적 접근방식들의
확장된 일곱 가지 판본을 제시한다.
(a)"양자 진화"(양자 결풀림에 의존하는),
(b)"열역학적 진화",
(c)"혼돈 진화"(또 다시 새로운 형태들의 비선형적 출현을 탐구하는 물리학을 사용하는),
(d)"신라마르크주의"(바바라 매클린톡의 역동적 유전체에서 도출된 지지 증거를 갖춘),
(e)화워드 테민(Howard Temin)의 역전사효소의 발견,
(f)"볼드윈적 진화"(유기체의 삶에서 선택 압력이 다른 새로운 환경으로 이주하는 선택의 역할을 탐구
하는), 그리고
(g) 이미 언급한 린 마굴리스의 공생발생이 있다.
이런 대안들은 여기서 더 이상 탐구되지 않겠지만, 현대의 진화론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식들을 규정하기
위해 언급되었다.
진화 동역학의 복잡성은, 하나의 이론으로서 진화는 여전히 변화와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점을 요구하고,
어떤 경우들에서는 과학적 이론에 있어서 패러다임 전환의 경우에 필요한 것으로 쿤이 가리키는 그런
종류의 과학혁명을 요구한다.
생태의 역사
생태에 관한 연구는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 1834-1919)에서 시작되는데, 1866년에 그는 유기
체들과 그것들의 환경들 사이의 관계들에 관한 연구로 규정되는 생태학이라는 술어가 만들어진 <유기체
들의 형태학>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헤켈이 그 술어를 확립한 영예를 부여받지만, 그의 의도는 다른 과학적 분과학문들과 별도로 새로운 연구
분야를 만들어내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생존 투쟁"이라는 다윈의 관념이 과학 안에서 새로운 분석
방법에 대한 필요성을 예상한다고 제안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헤켈이 오에콜로지에(Oekologie)라는 낱말을 도입했던 <유기체들의 형태학>은 "유기체들을 그것들의
맥락―생활 주기, 환경, 그리고 에너지 사용의 순환에 있어서의 지위―에서 바라본" 더 전일론적인 생물학
으로의 전환을 특징짓는다.
헤켈이 그 술어를 사용했던 점은 분과학문들에 걸쳐 존재하는 여러 관련 개념들의 출현에 대응되었다.
"근본적인 생물학적 관념들"과 "생물학적 행동학" 같은 술어들은 "물리권, 즉 태양, 물, 식물, 그리고
동물들 사이에서 순환되는 에너지와 자원들로부터의 관계망을 확대하는" 유사한 생태적 관념들을
표현했다.
그것은, 동물, 그리고 묵시적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서식지와 동물, 집단과 개체, 본능적
충동과 학습된 적응이 함께 그리고 맥락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브램웰(Bramwell)에 따르면, 헤켈은 자기 분야의 다른 연구자들 사이에서 부상하고 있었던 과학적
관념을 표현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생태적인 것으로서의 생명에 관한 그의 견해도 그 자신의 정치적
믿음과 형이상학적 믿음에 의해 고무되었다(그리고 그 믿음들에 기여했을 것이다).
브램웰은 헤켈의 생태적 전망은 세 가지 주요한 직관에 의해 뒷받침되었다고 주장한다.
첫번째 직관은, 헤켈의 경우에, 우주가 균형 잡히고 통일된 유기체로 가장 잘 해석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청년 시절과 경력의 대부분 동안 무신론자였지만, 우주에 관한 그의 일원론적 견해는 결국
신과 자연은 동일한 개념이라고 진술하는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이다(Deus sive Natura)'라는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생태적 사유에 대해 그를 준비시킨 두번째 관념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인간과 동물이 근본적
으로 같은 층위에 있다는 믿음이었다.
자신의 비인간중심주의 덕분에 그는 생태적 태도와 통섭하는 사유 양식을 가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또한 브램웰은, 헤켈의 경우에, 생태적 사유가 과학적 주장이 인간 문화의 가장 적절한
구조를 확립할 사회 조직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었다고 시사한다.
그의 믿음들 가운데 많은 것이 이십일 세기 생태학과 정합적인 듯 보일지라도, 최소한 철학적으로,
여전히 헤켈은 생명과학에 대한 대부분의 현대적 해석들에 수용될 수 없는 많은 관념들을 고수했다.
순수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그래서 폴리스의 조화로운 조직을 낳을 수 있는) 과학의 능력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사회다윈주의 영향을 받은 헤켈은 민주주의 사회의 이상들을 지지할 수 없었으며, 그
대신에 비정치적인 과학―인간들의 관리에 있어서 덜 정확한 정치 기술을 대체할 수 있는 명료한
합리적 방책으로서의 인류학―으로 민중을 이끄는 것을 선호했다.
생태학과 진화론은 둘 다 당대의 종교적 세계관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다윈적 진화 메커니즘들은 낭만주의적 전통에 의해 취해진 접근방식과 자연신학에 의해 특징
지워졌던 과학에 대한 접근방식을 위협하고 있었다.
후자는 1802년에 출판되었던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의 책 <자연신학>에 의해 최초로 제안되
었다.
일반적으로, 자연신학은 자연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신에 대한 더 큰 이해를 낳을 것이라고 상정했는데,
이것은 헤켈의 입장과 스피노자의 입장 둘 다와 합치되는 관념이다.
페일리의 경우에, 시계와 시계공이라는 그의 유명한 비유를 사용하여, 우주에는 질서와 지각되는 설계가
있다는 사실이 설계자, 즉 신에 대한 논리적 필요성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이전 세기에, 갈릴레오, 데카르트, 그리고 뉴턴(그들 모두가 여전히 유신론자들이었다)의 저작
들은 우주를 운동 중인 물질로 서술하고 있었고, 또는 아마도 더 적절하게, 우주를 모든 크기와 규모에서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서로 연결된 거대한 기계로 간주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중요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세계가 물질적 입자(고대 철학자들이 불렀듯이, 원자)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어떤 근거에서 그
체계를 창조했고 돌보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기계론적 입장과 낭만주의적 입장의 영향을 받은 자연신학적 입장은, 헤켈의 일원론에 의해 이미 예상
되었듯이, 생태학이라는 분야에서 그것들의 존재를 느끼게 만들었다.
생명과학의 맥락에서,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 같은 계몽주의 시대의 과학자들의 뒤를 이어 나중에
임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셸링, 그리고 G. W. F. 헤겔 같은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적 전통의 사상가
들이 다윈주의가 생태학적 설명 원리로서 출현할 수 있는 맥락을 창출하는 데 합류한다.
계몽주의 시대에 정초되었던 과학적 접근방식은 "인간의 정신과 자연의 숭고성을 강조했던" 낭만주의와 "
역사가 일련의 구별되는 단계들을 통해 전개되고 개별 인간들의 통제를 벗어난 보편적인 정신력에 의해
추동된다고 여겼던" 관념론과 혼합될 것이다.
워스트는, 생태를 정신적 이상과 문화성 이상의 더 큰 맥락 속에 위치시키면서, 당시의 낭만적 사유
속에 존재했던 생태에 대한 철학적 선행 관념들도 포함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윌리엄 워즈워드, 랄프 왈도 에머슨, 그리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같은 작가들의
영향을 추적하면서, 워스트는 유럽 낭만주의와 미국 초절주의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던 생태의 낭만적
시기라는 관념을 지지한다.
워스터는 자연에 대한 낭만적 접근방식은 관계, 상호의존, 그리고 전일론 같은 특질들을 강조했다.
그것 자체로 낭만적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생태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워스터의 경우에, 낭만주의와 생태 사이의 관계는 소로의 저작에서 가장 명백하다.
"그의 삶과 저작에서 우리는 더욱 더 복잡하고 정교한 생태철학뿐 아니라 지구를 향한 낭만적 태도의
핵심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소로의 낭만적으로 고무된 생태적 관념들은, 다윈에 의해 특징지워지고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했지만,
생물학자들의 사회적 상상을 지속되는 방식으로 사로잡지 못했다. 그
들은 제라미 벤담의 공리주의적 이상 같은 이데올로기적 선행 관념들로의 개종과 이전 세기들의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 경제로의 진입을 통해 (완전한 무신론을 전적으로 신봉하지는 않더라도) 뉴잉글랜드
초절주의의 낭만적 관념들로부터 점차적으로 멀어지고 있었는데, 벤담과 스미스 둘 다는 인간 정체성의
중심에 놓인 개체주의적인 경쟁적 충동을 옹호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윈은 생태라는 개념의 전환점을 특징짓는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1800년대 말에
생태 사상에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워스터는 다윈을 "지난 이 내지 삼 세기 동안 생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한 사람"으로 서술하며,
그리고 또한 다윈을 토머스 맬서스 같은 다윈에 영향을 미친 다른 사상가들이 공유했던 더 비관적인
견해를 향해 낭만적 자연관에서 멀어진 인물로 특징짓는다.
라슨은 이 점을 긍정하며, 다윈 자신은 무신론자가 아니었지만, 그가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지구 생명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성공한 점은 신의 창조 사건을 시간적으로 더욱 더 뒤로 밀어붙였다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라슨은, 신성한 창조자의 그 어떤 지속적인 참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진화 메커니즘을 제공함
으로써 다윈은 사실상 자연신학의 기반을 약화시켰다고 시사한다.
게다가, 이것은 영어권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데, 과학이 여전히 자연신학(즉, 자연 세계에
관한 과학)이 중요한 지적인 필수품이라는 관념을 둘러싸고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다윈의 통찰―진화는 생존하고 생식할 수 있는 능력을 향한 변화를 동반하는 유래에 의해 일어난다―은
소로와 낭만주의자들의 접근방식과 패러다임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그것은 낭만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묘사되었던 상호의존적인 유기적 전일론이 아니라 개체들의 경쟁적 충동에 바탕을 둔 상이한 세계상을
제시한다.
이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은 세계관의 더 큰 변화 속에 함축될 수도 있다는 쿤의 주장을 확인한다.
이런 식으로, 패러다임들 자체는 주어진 연구 주제에 대한 그것들의 적응적 '적합도'의 견지와 분리되어
연구될 수 없다.
오히려 어떤(그러나 전부는 아닌) 패러다임 전환을 수반하는 세계관은 당대의 더 큰 정치 운동과 문화
운동에 재귀적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페일리의 설계 논변은 여전히 창조자의 여전한 필요성에 대한 강력한 요구인 듯 보였다.
그렇지만 다윈은 설계 논변에 호소할 그 어떤 필요성도 보지 못했으며, 자연선택을 진화 과정들에 대한
충분한 설명으로 확신했다.
논쟁을 초래하는 이런 믿음은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기가 어려웠는데, 만약 참이라면, 자연선택은 진화적
과정들을 둘러싼 믿음의 전환뿐 아니라, 확장하여 신과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의 전환을 강요했기 때문
이다.
다시 말해서, 상황이 다윈이 제안했던 대로―정신 능력 또는 심지어 인간 본성 자체도 순전히 자연적인,
심지어 기계론적인 과정들에서 비롯될 수 있었다―였다면, 자연신학은 설명의 심각한 위기에 당면했다.
자연 세계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그것의 창조자(신)의 본성을 드러낼 것이라고 상정했던 자연신학은
생명 형태들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매우 정확히 서술하는 듯 보였던 자연선택의 명백히 무작위적이고
무자비한 과정들을 어쨌든 설명해야 했다.
이 위기에 대한 해결책들은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고, "이런 어두운 추리 노선으로부터의 도피는 자연
신학, 신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다윈주의를 부정하게 되었다"는 점을 필연적으로 함축했다.
세계에 대한 신의 참여 가능성, 심지어 일반적으로 신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에 관한 후속적인 명확한
표현은 이 연구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렇지만, 생태와 진화가 신학과 더 큰 철학적 개념들에서 끌어내는 함의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독자
에게 틀림없이 명백할 것인데, 관념들은 자기충족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오히려 지속적이고
생태적으로 재귀적인 방식으로 자체의 문화적 환경과 연구 대상들에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제시한다.
자연신학 논쟁을 떠나서 우리는 지구를 둘러싼 생명 권역 전체를 서술하는 "생물권"이라는 낱말의 첫
번째 사용을 다루자.
원래 1875년에 에두아르트 쥐스(Eduard Suess)에 의해 고안되었던 그 술어는 1926년에 러시아 생물
학자 블라드미르 베르나드스키(Vladmir Vernadsky, 1863-1945)가 <생물권(La Biosphere)>라는
저작을 출판하고 나서야 대중화되었다.
이 책을 출판한 직후에 베르나드스키는 프랑스 고생물학자이자 예수회 신부였던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hard de Chardin, 1881-1955)와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 후에 샤르댕 "인지권(noo
sphere)"이라는 술어를 고안했다.
베르나드스키는 그 술어의 사용을 통해 두드러진 기여을 하였으며, 물리학, 화학, 그리고 생물학의 요소
들을 결합하여 지구 규모에서 지구의 지질학적 층들을 둘러싸고 있는 "생명 외피"를 서술하였다.
테야르는, 베르나드스키에 바탕을 두고, 생물권에 덧붙여 인간의 집단적인 자기 성찰 능력에서 비롯되는
"인지권"―"마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누스(nous)에서 유래된―을 서술할 이유도 있다고 제안했다.
초기 생태학의 맥락에서, 두 명의 다른 사상가, 지리학자 엘스워스 헌팅턴(Ellsworth Huntington)과
식물생태학자 프리더릭 에드워드 클멘츠(Frederic Edward Clements)는 새로운 과학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접근방식―각각 인간생태학과 일반생태학―을 서술했다.
헌팅턴의 경우에는, "인간들이 무대 중앙에 위치해야 하며, 그래서 변화하는 토지에 대한 인간의 적응
문제들이 유기적 적응에 관한 더 넓은 연구의 고유한 일부로서 탐구되어야 한다".
반면에, 클레멘츠는 "유기체들의 '자연적' 공동체, 즉 인간 활동을 참조하지 않은 채 연구될 수도 있는
공동체들"에 집중하는 접근방식을 선호했다. "
[클레멘츠의] 견해에 따르면, 생태학은 인간 보건과 진화의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접근방식들은 대립적이었지만, 킹스랜드(Kingsland)는 두 과학자 모두 세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
이 세계를 제어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거의 유토피아적인 미래의 이상을 채택했다고
말한다.
헌팅턴의 경우에 이것은 인간들의 필요에 더 잘 적합한 환경의 기술적 조작을 통해서 성취될 것이고,
반면에 클레멘츠는 생태학적 지식이 이상주의적인 인간의 미래를 확보할 토지 관리 전략들을 낳을 것이
라고 믿었다.
"생태계(ecosystem)"라는 낱말은 1935년에 영국 식물학자 아서 탠슬리(Arthur Tansley)가 "살아 있
는 유기체들과 물리적 환경을 하나의 체계로 결합한 전일론적이고 통합적인 생태학적 개념"을 가리키기
위해 그 낱말을 고안한 이후에 어휘로 편입된다.
킹스랜드는 생명 형태들의 진화에 덧붙여 환경 속의 무생물적 인자들의 포함에 의존한, 생태에 대한
탠슬리의 접근방식의 변화를 인식한다. "생태학자들은 어떤 공동체의 유기체들을 연구할 뿐 아니라,
그것들이 살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는 환경을 형성한 물리적 인자들도 연구한다".
또한 탠슬리는 인간들과 인간 사회들을 하나의 생태적 시각으로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관한 연구 때문에 중요하다.
탠슬리는 상이한 종류들의 생태계들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지지했다.
이것들 가운데 일부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만, 이것은 탠슬리와 무관했는데, 그는 "인간이 만
들어낸" 생태계들과 "자연적 생태계들" 모두가 동일한 기본적인 과정들에 의해 산출된다고 믿었기 때문
이다.
자신의 전일론적 시각에 따라, 탠슬리는 "인간들을 체계의 고유한 부분으로 포함하는 방식으로 전체를
묘사하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탠슬리의 전일론은 인간들이 "다른 유기체들 사이의 생태적 관계들과 풍경"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탐구하려고 노력했다.
생태학의 중심으로서의 생태계로 전환된 이후에, 유진 오덤(Eugene Odum)은 1953년에 <생태학의 기초
(Fundamentals of Ecology)>를 출판했다.
오덤의 경우에 "생태계는 구체적 정의와 추상적 정의 둘 다를 포괄했다.
상식적인 구체적 접근방식은 자연을 유기체들의 공동체 또는 자연적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태계는 상호작용하여 안정한 체계를 만들어내는 생물 부분과 무생물 부분을 포함하는 자연적 단위였다". 생물 요소들과 무생물 요소들 사이에 교환되는 물질들의 순환적 흐름으로서의 생태계라는 자신의 관념
덕분에 오덤은 생물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일지도 모른다고 가정하게 되었다.
이런 규모의 관념들이 생태계 과학에 관해 생각함에 있어서 오덤 같은 사람들에게 중요했고 생물권의
기능을 서술함에 있어서 베르나드스키에게 중요했다.
둘 다의 경우에,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에 의해 최초로 개발된 사이버네틱스라는 새로운 과학이
필수적인 요소였다.
사이버네틱스라는 과학의 경우에, 자기조절과 양 또는 음의 되먹임 고리들이 필수적인 특징들이었고,
신흥 생태계 과학들에 핵심적인 요소들이었다.
생태계는 생태적 공동체들의 조직과 연구를 향한 모범적인 안내자로서 유용하지만 어떤 측면들에서는
문제적이기도 했는데, "생태계들은 쉽게 식별할 수 있는 경계들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태계들은 수많은 다른 체계들과 연결된 열린 체계들이었다". 자연적 연구 단위들을 식별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에 덧붙여, 생태계 과학에 대한 유진 오덤의 접근방식은 그의 동생이자 공동 연구자인
토드 오덤(Todd Odum)과 대단히 달랐다.
유진은 유기적 상상과 은유들을 사용하여 생태계에 접근했는데, 이는 그에게 생태계는 항상성 과정들에
의해 유지되는 일종의 살아 있는 유기체였다는 점을 의미했다.
마찬가지로, 토드도 항상성 메커니즘의 견지에서 생태게를 생각했지만, 토드는 유기체라기보다는 생태계
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되먹임 메커니즘들의 기계 같은 인터페이스를 보았다.
그러므로 "그의 접근방식은 유기체와 기계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매혹에 있어서 사이버네틱적인 사고
방식을 반영했다.
그는 보다 더 기계론적인 방향으로 생태계 개념을 고려했고...에너지 회로 도표들을 사용하여 생태계
내의 주요 기능들을 서술하기 위해 전기공학의 기호들을 도입하였다".
생태계 생태학에 대한 토드 오덤과 유진 오덤의 접근방식들에 의해 증명되듯이, 연구 주제들에 적용되는
은유들과 패러다임들은 유기체를 조직한다고 하는 기능적 장치들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유기체론적 은유들은 질적으로도 그리고 기능적으로도 기계론적 은유들과 다르다.
오덤 형제들이 생태계 생태학을 진정한 탐구 패러다임으로 확립하는 데 필수적이었지만, 그들조차도
생태계가 구체적인 의미에서 무엇인지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은유들과 설명적 연구 도구
들에 있어서 달랐던 것 같다.
이런 추세는 기계론적 투사의 증가에 의해 더욱 더 선도된 생태에 대한 체계적 접근방식이 생태계들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가능하다는 인상을 주게 될 1970년대까지 계속된다.
예측은 제어를 함축했다.
생태계 생태학은 생태계들을 설계하고 제어하게 되는 것과 관련이 있었고, 생태계 생태학자
들은 자신들이 그런 목적들이 부적절하다고 인식한 동료들로부터의 저항에 마주칠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생태계 생태학은 생물학과 공학을 새로운 종합으로 결합했다.
인간들은 단순히 생태계들의 성분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체계들의 설계자이자 조작자들이
었다.
연구가 수행되는 패러다임적 맥락뿐 아니라 자연적 체계들의 기능을 서술하는 데 사용되는 은유들도
이 논문의 중심 테제를 다시 새긴다.
역사적 분석은 생태과학과 진화과학에서 벌어지는 현대적 쟁점들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을 제공하지만,
아마도 더 중요하게도, 또한 역사는 과학이 무엇이든 연구 현상들과 관련된 패러다임과 은유적 서술들에
항상 의존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대체로 이것은 쿤과 다른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언급되었다. 그렇지만 이 논문에서 이루어지는 중대한
구분은, 실제로 살아 있는 생태적 공동체들의 조직과 복지를 관리하고, 서술하며,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것들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할 때 범형적 생태계들이 담당하는 역할을 설명할 뿐 아니라 지적인
실천들도 재조직할 수 있는 패러다임들의 능력을 가리킨다.
패러다임의 가정들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상상과 정신 생태계들은 살아 있는 세계들에 실제적 영향을
미친다.
범형적 체계들은 살아 있는 체계들의 색조와 특징을 서술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것들 자체
가 필수적인 연구 요소들이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제안하듯이, 어떤 주어진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에서 사용되고 있는
개념들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우리는 "인지적 실천들의 민족지학"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워스터는, 로버트 맥아더(Robert MacArthur)의 환원주의적 학파와 유진 오덤의 전일론적 학파의 현대적
통합을 검토하는 그가 "생태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을 향한 운동으로 자신의 생태 역사를 끝맺는다.
이 두 학파는 각각 진화생태학과 체계생태학으로 모습을 갖출 것이다.
통합적 자연생태학을 향한 진화와 체계
이제 나는 생태과학에 대한 접근방식들 사이의 "균열"로 서술될 수 있는 것을 둘러싼 현대의 생태학적
논쟁들에 초점을 맞춘다.
두 개의 상이한 진영, 체계적 전일론을 향하는 경향이 있는 한 진영과 환원론을 향한 나머지 다른 한
진영이 분과학문 고유의 패러다임과 은유들의 채택을 통하여 생태계 활동의 더 자세한 복잡성을 재배치
하고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나는 이 논쟁을 쿤이 패러다임과 세계관 사이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는 것과 이런 관계가 한 연구분야
내에서 어떤 종류들의 존재자들이 출현하는지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의 일례로 제시한다.
<생태학의 기초(Fundamentals of Ecology)>의 제5판이자 가장 최신판에서 유진 오덤과 게리 바렛은,
생태학이라는 술어는 1866년에 에른스트 헤겔에 의해 만들어진 이래로 일련의 패러다임 전환들을 겪고
나서 결국 두 개의 주요한 사유 학파―진화생태학에 의해 제시된 환원론적 접근방식과 체계생태학의
전일론적 접근방식―를 연결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주장한다.
오들릴 스미(Odling-Smee), 랄랜드(Laland), 그리고 펠드먼(Feldman)도 이 구분을 인식하는데, 그들은
확장된 진화론은 그들이 과정기능적 생태학(체계적)과 개체군-군집 생태학(진화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 접근방식은 나름의 강점들과 약점들이 있으며, 상이한 과학 연구 패러다임들에 의해 조직된다.
별개의 학문으로서 체계적 접근방식과 진화적 접근방식은 생태계 기능의 매우 다른 측면들을 밝힌다.
일반적으로 진화적 패러다임은 유전자, 유기체, 개체군, 그리고 종들, 주어진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
그리고 종들이 자연선택 과정들에 순응할 때 그것들 사이의 상호작용 유형들에 관한 연구를 선호한다.
이런 강조 때문에, "그러므로 개체군-군집 생태학자들이 묻는 의문들은 대단히 유기체지향적이다.
그들의 주제들에는 개체군 상호작용들의 동역학, 개체군 규모의 요동, 유기체들의 풍부함, 그리고 군집
내에서의 상이한 유기체 종들의 분포가 포함된다."
진화적 접근방식은 전체 유기체들의 통합성을 강하게 주장하지만, 생태적 상호작용의 생물적 차원과
무생물적 차원을 포함할 전체 체계들을 놓친다.
전일론적 또는 체계적 접근방식은 체계 전체를 통과하는 물질 에너지 흐름들에 초점을 맞춘다.
체계생태학자들은 열역학의 원리들을 사용하여 생태계를 통과하는 물질 에너지 흐름들을 연구하고
생물지질화학적 순환, 생물에너지학, 그리고 생태계의 생물적 측면과 무생물적 측면 사이의 상호작용
들에 초점을 맞춘다.
체계 수준의 생태 연구에 대한 과정기능적 접근방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과정기능적 생태학의 주요 목적들 가운데 하나는 에너지와 물질이 어떻게 생태계들을 통과하여
흐르는지, 그리고 더 특수하게는, 에너지 흐름들이 어떻게 생태계의 생물적 부분과 무생물적
부분 둘 다를 통과하여 흐르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루는 통화는 에너지와
물질이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물리적 열역학의 법칙들, 자유에너지의 이용 가능성, 에너지와
물질의 보존에 유의한다...
체계생태학은 두 가지 열역학 법칙의 견지에서 생태계를 연구한다.
제1법칙은, 에너지는 만들어지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으며 전환될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제2법칙은, 닫힌 계의 경계 내에서 에너지의 모든 변환은 미래의 일을 행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손실과 체계 전체에 있어서 엔트로피의 산출의 증가를 초래한다고 말한다.
체계적 접근방식은 본질적으로 전일론적이지만, 또한 생태계 전체가 비진화적 존재자라는 점을 함축한다.
전체 생태계는 유기체가 진화한다는 의미에서 진화한다고 할 수 없는데, 물질 에너지 흐름들이 생태계의
미래 배치들에 의해 세대적으로 계승되고 유전될 수 있는 유전 가능한 특질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물리적 계는 진화한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체계적 접근방식과 진화적 접근방식 사이의
균열에 있어서 핵심 요소이다.
나는 나중에 이 문제를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체계적, 과정기능적 접근방식은 생태계 내의 생물지질화학적 순환들과 총체적인 에너지 조절을 모형화
하기 위한 강력한 틀이지만, 체계적 접근방식이 전체 유기체들과 그것들이 생태계적 순환과 흐름들에
미치는 영향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는 약점이 있다.
골리(Golley)는 이런 불일치를 이렇게 적는다.
진화생태학의 도전은 애초에 생태계 생태학자들에 의해 무시당했는데, 그것이 그들의 관심사와
무관한 견지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을 영양 단계 같은 범주로 축소시켰기 때문에 종에 비교적 거의 관심이 없었다...
이런 연구에 대해, 진화론은 생태계 데이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거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아니
었다.
진화생태학과 체계생태학 사이의 긴장은 연구 패러다임이 자체의 연구 주제들에 깊이 함축되어 있는
방식을 드러낸다.
상이한 패러다임적 시각들에서 바라보면, 가변적 존재자들이 생태계 내에서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연구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패더라임적 전제들에 의해 규정되는 과학자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다른 세계들이 아니라 어떤 종류들의
세계들에 관한 연구를 제출하고 있다.
이런 세계들 가운데 하나는 유기체들이 아니라, 영양 구조들과 에너지 물매를 바라보며 풍경을 규정
한다.
나머지 다른 하나는 환경이 다소 고정되어 있고 그것을 대면하는 개체군들에 불변의 제약을 가하는,
유기체의 진화 세계를 바라본다.
생태에 대한 초학제적 신흥 접근방식의 핵심 요소는 살아 있는 세계의 특징들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패러다임들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이다.
환원론/전일론 분리에 의해 입증되듯이, 패러다임들은 살아 있는 세계 공간들의 배치에 실제적 영향을
미친다.
1950년대에 처음으로 표현된 대로의 유진 오덤의 접근방식은 전일론적인 체계적 접근방식을 선호했는데,
그는 "생태학이 어떤 실제적 가치를 지닐 수 있으려면, 생태학은 정확한 수학적 술어들과 통계적 술어들
로 서술되는 생태계에 대한 통일 이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버트 맥아더 같은 다른 과학자들은 종합된 전일론적 체계에 대한 견해가 너무 거대하며, 과학은 이런
식으로 진전될 수 없다고 믿었다.
체계가 아니라 생태계의 가장 작은 구성 요소들에 관한 상세한 연구가 실증적인 지식을 낳을 것이라고
맥아더는 주장했다.
워스터에 따르면, 오덤 학파에 회의적이었던 맥아더의 접근방식은 진화적 시각을 옹호했다.
[맥아더는] 오덤에 의해 제시되었던, 공기, 바다, 그리고 산호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통과하는
에너지와 물질의 거대한 흐름에 거의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동물 개체군들에서 상세한 유형들을 알아내기를 바랬다.
생태학은 일차적으로 서로에게 반응하는 종에 관한 학문, 즉 개체군 통계, 변동하는 수들, 경쟁,
포식 관계, 분산, 지리적 분포에 집중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
연구되는 종들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연구의 결실은 더욱 더 풍성하다.
동물학자 G. 이블린 허친슨(Evelyn Hutchinson)의 제자였던 맥아더는 개체군 생태학으로 알려지게 된
것에 관심을 가지고 개발하게 되었는데, 개체군 생태학은 어떤 군집 내의 유기체들의 다양성과 생태적
군집의 전체적 구조의 맥락에서 먹이 연결망들의 복잡한 배치들을 강조했다.
오덤의 <생태학의 기초(Fundamentals of Ecology)>(제5판)에 의해 표현되듯이, 현대 생태 이론은
맥아더와 오덤 학파들의 초학제적 종합이다.
이런 접근방식은 "홀로로지적(holological)"이라고 불리우며 전체 내에서 일어나는 상호의존적인 여러
위계들에 관한 연구를 포함한다.
그것 자체로 현대 자연생태학은 진화생태학과 체계생태학의 원리들을 하나의 복잡한 전체로 결합한다.
그런 노력은 필연적으로 초학제적이며 물리, 지질학, 화학, 생물학, 그리고 지리학이라는 학문들을 끌어
들인다.
변증법적 생물학으로서의 진화
변증법적 생물학은 하버드 대학의 유전학자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과 리처드 레빈스(Rich
ard Levins)가 최우선적으로 옹호한 진화론에 대한 접근방식이다.
두 유전학자들에게 주요한 관심사는 유전자-유기체-환경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
이다.
레빈스와 르원틴의 경우에, 이 세 가지 범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그것들은 더 복잡한 체계의 공진화적 요소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변증법적 생물학은 전체성, 상호연결, 그리고 역사적 우연성을 강조하여 통합적이고 복합적이며 역동
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변증법적 생물학자의 경우에, 유기체들이 고정된 환경들에 적응하는 것은
맞지 않으며, 여기서 그들은 진화에 대한 전통적인 다윈주의적 접근방식에 비판적이다.
다윈이 보기에, 유기체들은 환경의 작용을 받았으며, 그것들은 수동적 객체였고 외부 세계는
능동적 주체였다.
외부 세계로부터 유기체의 이런 소외는 외부 세계가 유기체들에 독립적이고 그래서 그런 유기
체들에 의해 바뀔 수 없는 자체의 법칙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유기체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찾아내어 적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
르원틴이 언급하는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소외는 오덤과 바렛의 홀롤로지컬한 접근방식이 행하는 구분
에 의해 반영된다.
즉, 복잡한 방식으로 생태계들의 본성을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기체들과 환경들이 결합되어야
한다.
고정된 환경의 맥락 내에서 유기체의 진화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생물학자는 유기체의
활동을 고정된 "적소"에 "적응하는 것"으로 서술하는 것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는 그런 중대한 방식으로
유기체가 자체 환경의 변형에 능동적으로 개입한다고 이해한다.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변증법은, 진화하는 것은 그저 유기체들이 아니라 복잡한 체계이며, 유기체-
환경이 공진화한다는 결론을 낳는다.
유기체들이 환경을 변형시킴에 따라 그런 새로운 환경은 다음 세대의 유기체들에 대한 선택 압력들을
변화시키고, 그 다음에 다시 연이어 환경을 변화시킨다.
이런 재귀적인 고리가 유기체들의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르원틴은 주장한다.
오덤의 목적과는 다르지만, 르원틴의 목적은 진화를 전일론적 체계로도 파편화된 환원론으로도 단순화
하지 않는 진화에 대한 접근방식의 필요성을 반영한다.
변증법적 생물학자는 "제3의 견해를 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이 시각은 세계를 "영구 불변의 전체"로 간주하지 않거나, 또는 "모든 층위에서 세계는 분리될 수 있는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고 분리되어 연구될 수 있는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는 마찬가지로 바르지는 않지만
현재 지배적인 견해"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변증법적 생물학자의 경우에, 세계에 대한 환원론적 설명도 전일론적 설명도 목표에는 미치지 못하고,
"우리가 자연에서의 상호작용의 전적인 풍요로움을 보지 못하게 막는다".
이런 제3의 복잡한 견해를 좇아서 변증법적 생물학자는 진화적 담론에 있어서 현재 논변들을 중단시
킨다.
유전자 환원론에 대한 단호한 비판자인 르원틴은, DNA는 자기생산적이지 않고,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유기체들은 그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인용된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르원틴은 경험적 데이터로부터 여러 가지 설명적 원리들과 사례들을
도출한다.
한 번에 하나씩 그의 주장을 분해하면 그의 논변은 더 명료하게 이해된다.
첫째, DNA는 자기생산적이지 않다.
자기복제/자기생산적 DNA라는 은유는 일반적이지만, 르원틴은 이것이 은유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하
도록 촉구한다.
DNA는 자체적으로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무로부터 스스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살아 있는 존재자는 전혀 없다.
르원틴은, DNA가 아미노산 생산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참이지만, 그런 아미노산들의 실제적
인 물질적 구성은 세포체 전체 내에서 일어난다.
세포는 DNA에 의해 제공되는 정보를 사용하여 아미노산들을 형성하며, 그 다음에 아미노산들은 세포에
의해 사용되도록 단백질들로 조직된다.
또 다시, 이것이 수행되는 데는 그저 DNA가 아니라 세포 전체의 구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후속 연구에 의해, "DNA는 자기생산적이다"라는 진술은 경험적 증거에 어긋난다.
둘째, DNA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DNA는 아미노산들의 생산에 대한 명령들을 제공하지만, 자체적으로 그리고 그것
만으로는 실제로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세포의 지속적인 현존에 필요한 아미노산들의 생산과 그것들의 단백질로의 후속적인 변환은 세포체
전체에 의해 수행되는 활동이다.
단백질 생산에 있어서의 가변성은 여러 가지 인자들―세포들의 환경, 기존 단백질들의 상태, 그리고
자체 환경과 관련된 유기체의 더 큰 조건―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DNA가 자체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화이다.
DNA의 기능은 세포체, 유기체, 그리고 환경의 우연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항상 간주되어야 한다.
셋째, 유전자들은 유기체를 결정하지 못한다.
여기서 르원틴은, "유기체의 DNA의 완전한 염기서열과 충분히 큰 컴퓨터가 있다면 유기체를 계산할 수
있을 것"라고 주장하는, 시드 브레너(Syd Brenner) 같은 다른 유전학자들에 대해 비판적이다.
르원틴이 이런 관념에 비판적인 이유는 또 다시 그의 변증법적 접근방식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 점과 두 번째 점을 고려하면, 유기체를 "계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데, 유기체는 자체
도 "계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르원틴은 이렇게 말한다.
발달이라는 은유에 포함된 일반적인 설명 도식과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나쁜 생물학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한 유기체의 완전한 DNA 염기서열과 무한한 계산 능력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유기
체를 계산할 수 없을 것인데, 유기체는 자체를 계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기체의 개체발생
은 그것이 나르는 유전자들, 유기체가 자신의 삶 동안 겪는 외부 환경의 시간적 추이, 그리고
개별 세포들 내의 분자적 상호작용들의 무작위적인 사건들 사이의 독특한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점을 예증하는 큰 증거 뭉치가 존재하며, 그리고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유기체의 발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변증법이 필요하다.
환경이 유기체를 변형시킬 때 유기체는 환경의 변형에 능동적으로 개입한다.
또 다시, 유기체와 환경이 공진화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렇다면 유기체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유기체의 유전체를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변증법적 과정으로
서 유전자들의 복잡한 표현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의 모든 요소를 추적하고 그것들의 지도도 그려야 할
것이다.
그때조차도, 유기체의 유전체와 평생 동안 존재하는 모든 환경 조건 전체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 하더라도, "발달 잡음(developmental noise)"으로 불리는 양자 층위에서의 발달 방해물에 여전히 직면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기체는 자체의 DNA로부터 계산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인간 과학자들이 필요한 계산을
행하는 데 충분한 컴퓨터 처리 속도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DNA로부터 스스로를 계산하는 유기체에
관한 의문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르원틴과 레빈스는 이렇게 적는다.
간단히 말해서, 유기체는 자체의 유전자들과 그것이 겪는 환경들의 시간적 추이 둘 다의 독특한
결과이며, 일반적인 견지를 제외하고, DNA 염기서열로부터 유기체가 어떤 모습일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환경들의 어떤 추이에서도 우리는 사자가 사자를 낳고 양이 양을 낳는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사자들이 다르다.
여기서 요약하면, 생물학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방식은 유전자, 유기체, 그리고 환경 사이의 관계에서
표현되는 여러 위계적 층위들 사이의 복잡한 전일론적 상호연결들에 초점을 맞춘다.
유기체, 개체군, 또는 종의 발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환경과 유전자 둘 다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과학철학자들은 진화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복잡한 접근방식을 옹호하며, 발달은 "유전자 명령들의
직접적인 수행"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단의 조건과 자원들이 특수한 생태적 맥락 내에서
부모 세대에 의해 입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창발적인, 역동적인, 다중 층위의, 자기조절적인
구성 과정들을 통해 일어나는 생명주기의 재생으로 더 포괄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변증법적 패러다임에 타당성을 더 부가하기 위해, 르원틴과 레빈스는 유기체의 발달에 있어서 환경이
담당하는 중대한 역할을 강조하는 복제 연구 형식으로 증거를 제시한다.
유전자적으로 동일한 복제 식물들이 서로 다른 환경의 맥락에서 발달하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 변증법
적 접근방식이 경험적 장점을 어떻게 획득하는지 알게 된다.
서로 다른 환경(예를 들면, 고도가 다른)에서 성장된 유전자적으로 동일한 식물 종은 별개의 환경에서
성장한 복제 식물들이 동일한 환경에서 성장한 비복제 식물들에 비해 더 큰 수준의 형상적 변화를 겪는
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유전자만이 서로의 복제물이 아닌 식물들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환경이 유전자적으로
동일한 식물들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더 큰 경우들도 있다).
이것은, 유전자적으로 동일한 식물 종은 브레너 등이 주장하는 의미에서 "계산"될 수 없으며, 유전자-
유기체-환경 관계가 복잡한 상호의존성의 견지에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점을 밝혀준다.
복제 식물들의 발달 궤적들의 일반화와 관련하여 초래되는 우려는 초파리에 대해 행해진 시험들과
인간들의 형상적 발달과 심리적 발달에 관해 쌍둥이 연구에서 행해진 시험들로부터 얻어진 비슷한
결과들에 의해 반박될 수 있는데, 이 결과들은 또 다시 발달에 있어서 역사적 조건에 근거하는 두드러진
변이를 보여준다.
자기생산으로서의 진화
변증법적 생물학과 적소 구성 이론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부동으로서의 진화는 진화론의 현대적 종합에
이의를 제기한다.
바렐라(Varela), 톰슨(Thompson), 그리고 로쉬(Rosch)는 이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현대적 종합은] 변화들이 유전 가능한 단위들, 즉 유전자들에 의해 특정 가능한 유기체적
특질들의 작은 변이들에 의해 일어난다는 견해를 확립했다.
특질들의 집합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적 구성이 차이가 나는 재생산 속도를 초래하고, 그래서
여러 세대에 걸쳐 동물 개체군의 유전자적 구성의 변화를 초래한다. 진화란 상호교배하는
개체군들의 이런 유전자적 변화들의 총체일 뿐이다.
현대적 종합에 의해 서술되는 대로의 진화에 관한 이런 서술은 이제 독자에게 틀림없이 친숙할 것이다.
바렐라 등에 의해 제시되었던 대안은 변증법적 생물학과 적소 구성 이론과 비슷한 노선을 따른다.
그렇지만, 변증법적 생물학이 유전자들에 초점을 맞추고 적소 구성 이론이 환경 변화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자기생산은 생물학의 근본적인 특징으로서의 세포에 초점을 맞춘다.
톰슨은 진화의 동역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세 가지 주요한 접근방식을 서술한다.
한 접근방식은 생식 개체군들과 유전학을 바탕으로 생명을 특징짓는다.
이것이 현대적 종합에 의해 서술되는 진화에 대한 표준적인 견해인데, 여기서 생명은 유전자적으로
연결된 개체군 세대들의 역사적 연속성에 의존한다.
두 번째 접근방식은 성질에 있어서 더 생태적인데, 생식적으로 연결된 개체군들의 중요성을 감안하고,
한편으로 주어진 환경과 건설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데 있어서 유기체들의 역할을 이 관념에 덧붙인다.
이런 접근방식은 변증법적 생물학과 적소 구성 이론 둘 다의 접근방식과 유사하다.
바렐라 등을 좇는 톰슨의 세 번째 접근방식은 "지금 여기, 단일한 개별 존재자 또는 유기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톰슨의 경우에, 이런 세 가지 접근방식은 현재 진화적 담론에 있어서 균형을 잃은 채로 나타나지만
적대적이지는 않다.
지구 생명―현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생명―의 경우에, 완전한 의미에서의 "생명"은
생태적으로 묻어 들어가 있는 능동적인 개별 유기체들의 생식적으로 연결된 개체군들을 의미
한다.
그렇지만, 현대 분자생물학은 생명의 개체적 특징짓기를 무시했으며 유전자적 개체군 특징
짓기를 거의 배타적으로 채택했다.
그러므로 톰슨의 경우에, 그가 현대적 종합이나 변증법적 접근방식에 반대하기보다는, 환경에 대해
차별적으로 그리고 창의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개별 세포의 능력에 주목함으로써 진화 과정에 대한 더
완전한, 또는 더 통합적인 규정을 요구하고 있다.
자기생산 패러다임의 주요 지지자들인 마투라나, 바렐라, 톰슨, 그리고 로쉬는 기본적인 의문을 제기하
면서 평가를 시작한다.
무엇이 생명을 구성하는가?
이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생명과 비생명 사이의 구분이 네 사람 모두에게 살아 있는 체계들을 규정하는
특질인 자기생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자기생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포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세포는 자기생산 이론에 중요하다.
열역학적으로 열린 체계로서 세포는 환경과의 끊임없는 물질 및 에너지 교환에 관여한다.
이런 계속되는 과정은 세포가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체의 구성 요소들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순환적인
생산 체계이다.
그 다음에 이 구성 요소들은 계속해서 세포 전체를 구성하고 유지한다.
이런 복잡한, 그렇지만 근본적인 과정이 자기생산을 규정한다.
가장 기본적인 규정에 있어서 모든 살아 있는 체계들은 자기생산적이다.
게다가, "세포는 그것의 구성 과정이 동일한 과정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구성 요소들을 생산하는 방식
으로 조직된다".
세포는 자체의 막―그것 자체가 세포의 계속되는 갱신의 특징이다―으로 유지되는 경계로 규정된다.
이런 자기생산적 존재자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것이 원핵 생물―단세포 박테리아―이다.
세포막은 자기생산 과정에 중요한데, 그것 덕분에 세포 전체 내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과정들이 세포
바깥에서 일어나는 가변적인 것들과 별개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포벽은 분리 매체일 뿐 아니라, 세포로 하여금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을
통해 자체를 갱신할 수 있게 하는 세포 자체의 특징이다.
세포의 능력은 주목할 만한데, 주변 환경과의 구분을 유지하지만 그것과 관계를 맺는 이런 이중 과정
덕분에 세포는 주변 환경과 반(半)독립적으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자체의 내부 요소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톰슨은 이렇게 적는다.
요약하면, 자기생산적 조직의 형식 또는 유형은 상호연결된 자기재생 과정들의 연결망과 경계
의 자기생산 사이의 독특한 순환적 상호의존성의 형식인데, 그래서 전체 체계는 공간적으로
별개의 개체로서 연속적인 자기생산을 지속한다.
여기에서 비판적인 독자는 자기생산적 패러다임의 어떤 신조들이 앞에서 서술되었던 자기생산에 대한
르원틴의 비판과 직접적으로 상충되는 듯 보인다는 점을 인식했을 것이다.
이 중요한 인자는 톰슨에게서 상실되지 않는데, 그는 개별 세포들의 통합성을 유지하기를 원하지만,
그것들의 근본적으로 생태적인 본성도 인식한다.
자기생산은 항상 생태적으로 묻어 들어가 있다고 톰슨은 우리에게 말한다.
"자기생산"이라는 술어는 세포를 개체로 만드는 필연적으로 순환적인 과정들을 사실상 가리키는 은유
이다.
세포는 환경과 별도로 자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
게다가, 세포의 생태적으로 묻어 들어가 있는 본성은 생명이 최초로 출현한 이래로 그것이 지구의 전체
표면을 변화시키는 즉각적이고, 변형적이며, 진화적인 과정을 시작했다는 점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기생산이 개별 세포들의 자기생산을 강조할지라도, 그것이 이런 세포들이 아무튼 진공 속에서 생산된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기생산에 대한 르원틴의 비판을 존중하면, 배경 환경과 구분되는 독특한 개체들의 출현에 대한 여지를
여전히 남기는 반면에, 일단 개체들이 존재하게 되면 환경을 극적으로 변형시키기 시작한다.
복잡한 견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난점들은 적응주의적 판본들의 진화 패러다임들에 대한 공공연한
신봉에서 비롯될 것이다.
앞에서 예증했듯이, 패러다임의 가변성과 분과학문적 가변성에 따라서 선택 단위들이 변한다.
생태학적 담론에서 그 긴장은 진화생태학자들과 생태계 이론가들 사이에 놓여 있다.
이 긴장은 신다윈주의와 톰슨에 의해 제안된 더 통합적인 접근방식들 사이의 갈등에 의해 예시되는
진화적 담론들에 반영된다.
<육화된 마음>의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또한 적응주의적 프로그램은 개체가 진화와 선택의 유일한 단위라는 거의 의문시되지 않은
가정 때문에 비판받았다.
반면에, 나란히 작동하는 다중의 선택 층위 또는 단위를 강조하는 이론들은 전적으로 개연적
이며, 선택이 개체적 층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 많은
현상들에 대한 수정된 해석들을 제시한다.
다중의 선택 층위 또는 단위를 강조하는 이론들이 바로 이 논문에서 명확히 표현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여태까지 다루어진 각 접근방식―변증법적 접근방식과 자기생산적 접근방식―은 진화적 담론에
접근하기 위한 대안적 패러다임들을 나타내며, 그리고 이해했듯이, 각 패러다임은 유전자, 유기체, 그리고
환경의 통합을 뒷받침하는 다중 층위 접근방식으로 진화를 해석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패러다임들 각각은 생태과학에 관해 생각하는 데 건설적으로 도움이 된다.
이런 패러다임 전환의 중요성은 더 통합적인 접근방식의 지지자들에게서 상실되지 않으며, 또한 이런
전환은 진화적 담론의 맥락 내에서 과학적 신뢰성의 상실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여러가지
새로운 비판적 의문들을 제기한다.
<육화된 정신>의 저자들은 이렇게 논평한다.
"적응주의적 틀을 넘어서는 데 있어서 어려움의 일부는, 모든 구조, 메커니즘, 특질, 또는 성향이 생존
가치에 대한 기여로 해명될 수 없도록 주요한 설명으로서의 자연선택이라는 관념을 포기한 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일찌기, 적응주의적 패러다임에 대한 르원틴과 레빈의 비판은 유기체가 고정된 환경에 적응하는 것으로
여기는 견해로 서술되었다.
이 견해는 어떤 주어진 생태계에 적소들이 미리 주어져 있고 유기체들은 그 적소들에 적응하거나 아니면
사멸된다고 진술한다.
이것이 맞지 않다는 점을 가리키는 충분한 증거가 제공되었으며, 그리고 적응주의적 견해의 수정에 대한
필요성을 나타내는 여러 대안적 패러다임들이 제시된 한편, 자연선택을 더 복잡한 과정 내의 한 요소로
간주하는 것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생태론자에게는 곤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자연선택이 아니라면, 진화를 진전시키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그 저자들은 계속 말한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런데 사물들은 도대체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는가?
진화생물학의 과업은 설명되는 항목들 사이의 뒤얽힌 순환적 정합 관계들은 연구함으로써 논쟁의 논리
적 지형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저자들은 이 의문에 대한 대답에 여러가지 기여를 하는데, 그것들 각각은 자기생산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한 요소로서 그들이 자연적 부동(natural drift)이라고 부르는 것에 정초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자연적 부동은 모든 진화적 변화가 최적의 적합성에 기반을 둔 적응들의 결과
라고 이해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자연적 부동은 유기체들이 생존 가능성과 생식 가능성이라는 가치들에만 근거하여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실행 가능성에 근거하여 선택된다고 제안함으로써 이런 이해를 전환시킨다.
실행 가능성은 분석의 초점을 유전될 수 있는 특정한 특질들에서 개체의 삶의 역사에서 표현되는 유기체
적 유형들로 전환시킨다.
마투라나, 바렐라, 톰슨, 그리고 로쉬에 따르면, 실행 가능성은 개념적 은유들의 변환을 필요로 한다.
"적응"이라기보다, 자연적 부동은 "브리콜라주(bricolage)", 즉 "어떤 이상적 설계를 충족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분들과 항목들을 복잡한 배열들로 결합하는 것"이라는 술어
를 제시한다.
실행 가능성에 대한 자연적 부동의 강조는 신다윈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데, 그것이, 생존과 생식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유기체는 이런 기준들에 의해 과소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시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종들이 환경들을 변형시키는 데 가하는 영향(그리고 그 역의 영향)과 결합된, 복잡하고 다양
한 종들의 배열은 공동으로 연루된 것으로 서술될 수 밖에 없는 진화적 맥락을 만들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유기체와 환경이 서로 감싸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환경이 유기체 안에 있고, 유기체는 환경 안에 있다.
바렐라, 톰슨, 그리고 로쉬는 (발달 체계 이론가 수전 오야마를 인용하며) 유전체들을 "생태적으로 묻어
들어가 있는" 것으로 서술한다.
이런 술어들은 틀림없이 변증법적 생물학의 이전 서술들과 유사한 듯 들릴 것이다.
서술의 유사성은 두 패러다임에 의해 탐색된 공통의 근본적인 직관, 즉 유기체들과 환경들이 주류의
진화 사상 학파들에 의해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복잡한 방식들로 결합되어 있다는 직관에서 비롯된다.
마투라나, 바렐라, 톰슨, 그리고 로쉬의 경우에, 이런 관계는 "구조적 연계(strcutural coupling)"로
서술된다.
구조적 연계는 "두 개(또는 그 이상)의 체계들 사이에 구조적 정합성을 낳는 반복적인 상호작용들의
역사"를 가리킬 뿐이다.
여러가지 다른 종류들의 구조적 연계가 가능하다. 시간에 따른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연계, 유기체와
다른 유기체와의 연계, 또는 다중의 유기체들과 환경들의 복잡한 상호작용들이 가능하다.
첫 번째 종류의 구조적 연계는 자체의 환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자기생산적 통일체(무엇이든 세포
같은 살아 있는 조직적 구조)를 다룬다.
이 경우에, 세포라는 통일체는 자체의 환경과 분리되지는 않지만 구분되는 구조적으로 결정된 나름의
대사를 갖는다.
그러므로 환경이 세포의 활동을 교란할 때, 그 세포는 자체의 구조적 능력들, 자체의 자기생산적 조직의
견지에서 반응한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한 통일체[자기생산적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변화들이 일련의 연속
적인 상호작용들을 통해 환경에 의해 '선택되는" 듯 보인다.
따라서, 환경은 유기체가 자체의 개체발생에서 겪는 구조적 변화들의 지속적인 '선택자'로 간주될 수
있다".
역으로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진술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진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생물체들이 자체의 구조적 변화의 선택자들로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기체들은 환경들의 상태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환경들도 유기체들의 상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인과율의 고리는 순환적이지 선형적이지 않다.
자연적 부동에 존재하는 서로 감싸기라는 관념을 다시 강조하면, 유기체와 환경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명령이라기보다 교란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둘의 차이가 중요하다.
명령적 변화는, 예를 들면, "행동을 명령하는 것"처럼 환경이 유기체에 직접적인 인과적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일 것이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세포막을 통한 개체의 자체 환경으로부터의 분화 때문에 조작적 폐쇄성(operati
onal closure)이 초래되어 환경은 유기체의 궤적을 고정된 방식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교란
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 저자들은 주장한다.
유기체(또는 환경)는 자체의 구조적 본성에 근거하여 반응을 해석하는 복잡한 일련의 동역학을 갖는다.
이런 관계를 구조적 연계라고 불린다.
두 번째 형식의 구조적 연계는 두 개의 층―일차 자기생산적 체계와 이차 자기생산적 체계―을 둘러싸고
조직화된다.
톰슨의 서술에 따르면, 이 구별은 일차 자기생산적 체계, 즉 개별 세포(단세포 유기체 같은)를 이차 자기
생산적 체계, 즉 다세포 유기체, 군체, 그리고 사회 같은 다수의 개체들로 구성된 구조들을 포함하는
"메타세포적 개체"를 차별화한다.
그래서 반복적 상호작용들이 같은 층위의 자기생산적 통일체들 사이에서, 그리고 일차 및 이차 자기
생산적 통일체들 사이에서(여러분의 육체에서 세포들의 구조적 연계와 관련된 경우에서처럼) 가능하다.
자기생산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대부분의 구조적 연계들은 일차 및 이차 구조적 연계들이며, 일차 연계
들은 박테리아의 층위에서만 일어난다.
삼차 연계들은 신경계도 지니고 있는 다세포 유기체들 사이에 일어나는 반복적 상호작용들과 관련이
있다.
이런 유형의 연계는 특히 흥미로운데, 그것이 "구조적 부동"이라고 불리는 것, 즉 적응과 조직에 대한
일종의 공동 개체발생적 보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삼차 연계]가 일어날 때, 공동으로 부동하는 유기체들은 신경계가 존재할 때 특히 복잡해질 수 있는
어떤 새로운 현상학적 영역을 초래한다.
구조적 연계를 고려할 때, 새로운 현상학적 영역들의 창발이 가장 흥미롭다.
그것은 환경과 호혜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다양하게 배치된 유기체들로 구성되는 새로운 경험 세계들이
새로운 세계 공간들을 발제한다.
발제(enaction)라는 낱말은 구조적 연계 과정들에 기반을 둔, 지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의 전환을 서술
하는 데 사용되는 전문 용어이다.
그래서, "그런 접근방식에 따르면, 지각은 그저 주변 세계 안에 묻어 들어가 있지 않으며 그것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다.
지각은 이 주변 세계의 발제에도 기여한다".
경험의 현상학적 영역은 유기체들의 미리 주어진 구조적 요소들에 이런 식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환경에
의해 부가된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을 어떤 자기생산적 통일체를 둘러싸고 배열된 생태
적 활동들의 전체 복합체 안에 처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발제론은 이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간극을 연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철학적
전통에 상관물들이 있다.
"해석학이라는 술어는 원래 고대 텍스트들을 해석하는 분과학문을 가리켰지만, 그것은 확장되어 해석
현상 전체를 나타내게 되었으며, 이해의 배경으로부터의 의미의 발제 또는 산출로 이해되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의미는 본질적으로 유기체적이기도 하고 환경적이기도 한, 구조적으로 연계된
사건들의 생태적 매트릭스에 상대적인 형태를 취한다.
유기체에게 유의미한 것은 그것의 구조적 연계와 공동으로 연루되어 있다.
이런 접근방식은 특정한 생태적 환경으로부터 항상 이미 창발하고 있고 그것을 변형시키는 것으로서의
지식과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한다.
애덤 로버트(Adam Robbert), <자연, 매체, 그리고 지식(Nature, Media, and Know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