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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와 중공군의 2차 공세(동부 지역)
1. 장진호 전투('50. 11. 27~ 12. 11)
가. 전투 개요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유엔군의 최종공세계획에 의거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의 우전방과 연결하기 위해 미 해병 제1사단에 서쪽의 무평리(희천과 강계중간 지점)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공격 개시일은 미 제8군의 11월 24일보다 3일 후인 11월 27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미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 부대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서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 중에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가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하여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가지 2주간에 걸쳐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미 제10군단장은 11월 1일, 국군 제1군단을 우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좌측으로 하여 국경선으로 진격 명령을 내렸다. 이 무렵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간에는 80마일의 공백지대가 발생하여 맥아더 사령부는 미 제10군단장에게 이 공백을 엄호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해병사단은 제1연대 전투단이 흑수리에서 지경-진흥리-고토리-하갈우리를 따라 북상 중이었고, 제5연대전투단도 장진호 동쪽에서 유담리로 향했고, 제7연대 전투단은 이미 유담리로 이동하였다. 또한 미 제7사단의 1개 혼성연대가 장진호 동쪽에서 전진하여 제5연대 전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유담리 신흥리
장진호
덕동산 1,653m
신흥리 하갈우리
고토리
황초령
나. 전투 경과
(1) 유담리 전투('50. 11. 27~12. 4)
미 제10군단의 명령에 다라 미 제1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최초 목표를 유담리 서쪽의 용림동으로 정하고 고개동-무평동으로 기동하여 중공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만포진을 점령하는 공격계획을 수립하였다.
제5연대는 11월 27일 08:00시에 제7연대를 초월하여 남쪽으로 진격하여 용림동을 점령하고 계속 서진할 준비를 하고, 제7연대는 유담리를 확보하고 제5연대의 초월을 보장하며 유담리-신흥리간 보급로를 방호하며 제1연대는 사단 예비로써 진흥리-고토리-하갈우리에 위치해 사단의 후방지역과 주보급로를 방호하도록 하였다. 또한 영 제41해병특공대는 유담리로 이동해 사단의 좌익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한편 중공군은 제20군단과 제27군단으로 기온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유담리로 공격을 해왔다. 이들은 신흥리와 유담리, 하갈우리 지역에서 유엔군을 포위격멸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제27군단은 1개 사단(+)으로 신흥리 지역에서, 1개 사단으로 유담리 지역에서, 1개 사단으로 미 제7사단을 저지하여 군단 좌측의 안전과 유엔군 주력의 섬멸을 보장하는 것이였다. 그리고 이어 하갈우리로 공격을 확대하여 제20군단과 협조하여 이 지역의 미군을 섬멸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미 제1해병사단의 각 연대들은 진출간 애로지역의 주요고지마다 방호병력을 배치하였고 유담리 하갈우리간 덕동 통로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11월 27일 18:30분경 중공군의 유담리 지역 대규모 공격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백병전이 벌어지며 미 해병대는 결코 물러서지않고 진지를 사수하였으며 야간에 피탈되면 주간에 항공폭격을 지원받아 다시 역스으로 확보하며 혈투를 이어갔다.
결국 사단은 111월 28일 11:00를 기해 서진을 취소하고 현위치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며 보급로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11월 30일, 하갈우리에 위치한 제1해병사단 지휘소에서 제10군단장과 해병사단장은 긴급회의를 갖고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지역으로 철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 해병사단장은 제5 . 7연대를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철수시킨 후 하갈우리와 고토리에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철수계획을 수립하였다.
모든 부대는 12월 1일 11:00시에 21km에 달하는 하갈우리로의 철수작전을 단행하여, 제5연대 3대대가 진격로의 양측 감제고지를 점령하면서 후속부대 엄호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전사자는 유품을 보관 후 현지 매장으로 조치하였다.
12월 2일 선두인 제5-3대대는 중공군 제59사단의 차단부대를 격파하고 덕동통로를 돌파하여 지역일대를 확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제5-3대대는 437명의 병력이 194명으로 줄어들 정도로 피해가 컸다.
유담리의 전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영 해병 제41특공대가 16:30분경 하갈우리로 출동하여 북쪽의 도로를 점령한 후 철수부대를 엄호하였고, 마침내 19:00시에 유담리에서 철수하는 부대의 선두가 하갈우리에 들어왔고 12월 4일 14:00시 무렵에 마지막 부대인 제7-3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이 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전사164명, 실종 55명, 부상 921명 등, 총 1,140며의 인명손실이 있었으며 이 중 동상에 의한 비전투손실이 1,194명이었다.
[여기서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전쟁 회고록을 통해 중공군 제9병단의 참전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9병단은 조선에 들어오기 전 추운 지역에서의 전투경험이 모자랐다. 월동준비 등의 준비도 부족했다.
이 병단은 군사위의 명령을 받고 서둘러 조선에 들어갔다. 부대는 동북으로 가는 열차에서 참전통지를 받고 솜옷을 건네받았으나 일부는아예 받지도 못했다. 솜신발, 솜모자도 없이 수건으로 머리를 두르고 모포로 몸을 감씬 병사들이 적지않았다. 영하 30도의 혹한을 무릅쓰고 조선동부의 험한 개마고원으로 몸을 숨겨 잠입하는데 15만명이 미군 공중정찰에 발견되지 않아 미군들을 경악시켰다.
미군은 아군의 세찬 공격을 받더니 전투기의 엄호아래 자동차나 트럭 등을 타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동부전선은 높은 산들로 미군 기계화부대의 공격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아군 대부분이 밀어붙이고 미군은 뒤로 철수하는 꼴이었다. 그들은 평원작전에 적합했던 것이다. 함흥까지 밀려나서는 그들은 후퇴하지 않았다. 함흥을 지나면서 평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군도 형편이 어려웠다. 동부전선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대포는 가져갈 수 없었고박격포를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데도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손에 쥘 수 있는 경화기에 의존해야 했다. 이 밖에 미군이 흥남항으로 철수하는데는 군함의 화력이 엄청났다. 그들은 해. 육. 공군화력으로 세밀한 화망을 구축해 엄청난 화력을 아군에 퍼부었다.
제9병단은 이같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며칠 밤낮에 걸쳐 투혼을 발휘해 포위망에 갇혀 있던 미해병 제1사단 소속 1개 연대 병력의 대부분과 국군 수도사단 일부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미군전투기가 수시로 우리를 찾는라 혈안이 되어 있어 연기를 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병사들은 밤낮으로 행군을 계속해 상대를 추격해야 했기 때문에 한가롭게 밥을 지어 먹을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숫가루가 한동안 지원군의 주요 야전식량이 되었다. 미숫가루는 70%의 보리에 콩, 수수, 또는 옥수수를 섞어 볶은 다음 갈아 0.5% 식염을 넣어 만든 것으로 휴대나 보존에 편리했다.
(2) 하갈우리 전투('50. 11. 27~12. 7)
장진호 남단의 분기점에 위치한 하갈우리는 간이 활주로가 설치되어 있는 등 작전의 중심지였으나, 단지 미 제7연대 제2대대(-2)가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26일 야간에 제1연대 제3대대(-)와 임무 교대를 하고 제7-3대대(-2)는 덕동통로에 배치하였다.
11월 28일 야간에 중공군 제58사단이 하갈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영 해병 제41특공대가 투입되어 제10전투공병이 방어중인 동쪽 고지정상을 재탈환하였다. 이 과정에 미 제1-3대대는 전사 43명, 실종 2명, 부상자 270명의 손실이 발생하였으며 전투 및 지원 부대의 손실도 이와 비슷하였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 고립된 미 제7사단은 구출이 지연되자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제31연대 제1대대장이 부대를 지휘하여 하갈우리로 향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격으로 대대장이 부상을 당하는 등 악전고투 긑에 개인별로 탈출하여 12월 2일 새벽까지 미 제7사단의 생존자중 670명이 하갈우리에 복귀하였다. 아침 일직 생존자 구출 작전에 나선 수색부대는 장진호 부근의 전투에 투입된 3개 대대 2,500명 중 1,050명을 구출하였는데 전투가능한 병사는 385명뿐이었다. 또한 전사자는 300명만 확인되었고 나머지는 실종되었다.
하갈우리에서 함흥으로 철수를 명받은 해병사단은 12월 2일부터 5일까지 4,312명의 부상자는 물론 병기와 대량이 병참물자를 후송시키고 후송이 불가한 것들은 파기를 하여 철수준비를 완료하였으며 598명의 증원병력을 공수받아 전력을 보강하였다. 이날 밤 중공군은 7개 사단을 전개시키고 있었다. 돌파작전 개시일인 12월 6일 새벽, 제7연대를 선두로 돌파작전이 개시되었으며 22:00시경 하갈우리 남쪽 5km 지점의 "불지옥의 계곡"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새벽이 오면서 공군의 지원을 받아 돌파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12월 7일 결국 계곡을 돌파하였으며, 하갈우리 동쪽지역을 방어하던 제5연대는 중공군의 야간공격에 악전고투하면서 200여 명의 포로도 획득하며 진지를 사수하였고, 제1연대 제3대대와 함께 정면으로 공격해 오는 적을 1,000여 명을 사살하였다.
하갈우리에서 후방을 차단하던 제5연대가 이동을 개시하고 마지막 폭파작업으로 하갈우리는 불길에 휩사이고 10,000명의 병력과 1,000대의 차량이 실시한 돌파작전은 종료되었다. 기간 중에 사단은 전사 103명과 실종 7명, 그리고 부상병 506명이 발생하였다.
(3) 고토리 전투('50. 11. 28~12. 11)
제1연대는 고토리에 연대지휘소를 설치하고 진흥리-하갈우리간 보급로를 방호 중에 있었다. 이 무렵 중공군 제60사단은 이미 고토리가지 남하하여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11월28일 사단으로부터 하갈우리 보급로를 확보하라는 명을 받은 제1연대장은 일부 병력을 진출시켰으나 곧 고토리로 복귀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영 해병 제41특공대와 제3대대 G중대, 그리고 제7사단 제31연대 제1대대 B중대로 기동부대를 만들고, 2개 전차중대를 포함하여 하갈우리진출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고토리 북쪽 6km 지점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각 부대는 단위제대별로 야간방어태세에 돌입하고, 새벽에 다시 공격을 해왔다. 이때 중공군은 미군 포로를 이용한 심리전으로 항복을 권유하여 결국 제31연대 B중대는 부상자는 후송한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한편 행군제대의 전위인 전차대대 D중대와 제1연대 3대대 G중대 및 영 해병 제41특공대는 후위와의 연결이 끊어진 채 전진하여 하갈우리에 진출하였으며, 이 진격에 전사 및 실종 162명,부상 159명이었다. 이로서 중공군의 11월 29일, 30일에 단행된 중공군의 대공세는 일단 막아낼 수 있었다.
12월 7일 미 제1해병사단은 진흥리에 배치된 제1연대 제1대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병력을 고토리로 집결시키는데 성공하고 즉각적으로 고토리 돌파계획에 착수하였다.
이때에 상황은 중공군 제9병단 예하의 제20군단과 제26군단이 고토리 일대를 점령하고 고토리-진흥리간 보급로 차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병사단이 추진중인 이번 작전의 성공여부는 고토리-진흥리간 도로 중간에 있는 1,081고지 확보에 달려 있었다. 해병사단은 12월 8일 08:00시에 제7연대를 선두로 철수작전을 개시하여 제1대대가 12월 9일 02:45분에 진흥리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진흥리의 제1연대 제1대대는 1,081고지 점령을 위한 공격을 12:00시에 감행했으나 기상악화와 일몰로 중지하고 다음날 12월 9일 15:00시에 고지를 점령하여 이후 사단의 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2월 10일 08:30분에 차량제대의 선두가 진흥리를 통과하고 사단 지휘부는 10:30분에 흥남으로 향하였다. 제1연댄ㄴ 오후부터 고토리에서 철수를 개시해 산발적인 적의 저하을 물리치고 순조롭게 남진하였다.
진흥리를 통과한 후에는 미 제3사단의 엄호를 받으며 함흥으로 이동하여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21:00시에 함흥지역으로 진입하였으나 고토리 돌파작전간 전사 75명, 실종 16명, 부상 256명이 발생했다.
다. 전투 결과
함흥으로 철수한 미ㅣ제1해병사단은 연포비행장 일대에서 정찰활동을 전개하였고 12월 15일 흥남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중공군은 제9병단 예하 3개 군단 12개 사단 중 7개 사단이 투입되어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전투손실과 비전투손실이 막대하였는데 제24군단의 경우 90%가 동상 환자였고, 제27군단은 10,000명의 비전투손실이 발생하였다. 미해병대와 접촉하지 않은 부대들도 미군의 강력한 공중폭격과 혹한에 시달렸다.
따라서 중공군 제9병단은 3개월에 걸쳐 재편성을 해야했고 '51. 3월 중순에야 전선에 복귀하였다.이번 전투에서 중공군은 지상전투에서 전사15,000~37,000명과 부상 7,500명, 항공 포격으로 전사 10,000명과 부상 5,000명이 발생하였다.
[일본인이 쓴 한국전쟁과 비교(제3권)]
무평리 공격
1. 미 제10군단의 공격계획
군단은 공격개시일을 11월 27일 아침으로 정하고 주공을 미 제1해병사단이며, 미 제7보병사단은 조공으로 사단의 우측방을 보호하게 되었다.
무평리는 유담리 서방 약 90km에 위치한다. 미 해병사단은 이곳에서 양호한 도로를 따라 북방으로 진격, 강계를 지나서 만포진을 향하여 진격하게 되었다. 이 명령으로 사단의 후방지경선이 하갈우리 부락의 남단으로 추진 조정되었으며, 스미스 사단장은 군단장에게 건의하여 진흥리까지를 후방책임지역으로 하고 진흥리와 고토리에도 사단의 경계부대를 배치하도록 했다.
2. 미 제1해병사단의 공격
사단은 27일 주공을 제5연대 전투단으로, 제7연대 전투단은 유담리를 확보 점령하여 주공연대의 초월공격을 지원하면서 덕동고개-유담리 사이의 병참선을 방호하는 것이였다.
11월 26일,
미 제7연대 전투단 주력은 유담리에 위치하고, 제2대대는 하갈우리를 점령, 확보하고 있었는데, 전진해 온 미 제1연대 3대대와 임무를 교대한 후, D중대와 E중대는 27일 유담리로 전진하여 미 제7연대 제1대대장의 지휘하에 들어가고, F중대는 같은 날 저녁 덕동고개를 점령하여 주보급로의 엄호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러나 제2대대 본부와 대대 화기중대, 제11포병 연대 H포대는 차량이 부족하여 아직 하갈우리에 머물고 있었다.
한편 제5연대 전투단은 최초 장진호 동쪽으로 진출중, 명령이 바뀌어 서쪽으로 진출을 위해, 교대부대인 제7사단 제32연대 선발대인 제1대대에 25일 인계하고 26일에 먼저 연대 본부와 제2대대가 유담리로 이동하였으며, 27일 제1대대와 제3대대는 유담리로 이동했다.
또한 제1연대 전투단은 병참선을 방호하는데 있으며, 전투단 본부는 고토리에 위치하고, 다만 제3대대는 차량 부족으로 G중대를 지경(함흥, 서남 10km)에 남겨 두고, 하갈우리에는 H와 I 중대만 대대장 휘항 있었다.
별도로 영국군 제41코만도와 수색중대로 하여금 사단의 좌우 측방을 방호하도록 했으나 아직 작전지역에 들어오지는 안했고, 사단 사령부는 28일 흥남에서 하갈우리로 추진할 예정이었다.
11월 27일,
조공부대인 제7연대 제3대대가 유담리-무평리간 1426고기와 1403고기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사이, 주공인 제5연대 제2대대는1271고지를 공격했으나 중공군의 저항으로 점령하지 못하고, 인접부대인 제7-3대대의 1403고지로부터 박격포와 항공기 지원으로 점령했으나 의외로 중공군이 저항이 대단하여 야간 방어를 위한 진지구축 작업에 들어갔다.
전면방어진지 전투
1. 혹한이 전투에 미치는 영향
11월 말경 북한지역은 낮 기온이 영하 20~25도, 04시경에는 영하 28~45도까지 내려갔다. 눈은 60cm가 쌓이고 눈보라로 시계가 제한도어 15m 이내도 잘보이지않아 중공군의 백색 군복이 보호색이 되었다.
칼빈소총은 혹한으로 기름이 얼어붙어 사겨을 할 수 없고, 백병전에서는 총대가 약해서 잘 부러졌다. M1소총은 칼빈총에 비하면 추위에는 강하지만 윤활유를 많이 발면 얼어붙어 사격을 할 수 없기에 엷게 발라야 했다.
자동소총은 불발과 단발이 많고, 경기관총은 얼어서 2시간마다 사격을 해애 하고, 중기관총은 물대신 부동액을 사용해야만 했다. 박격포는 땅에 부딪쳐 금이 가기도 하고 곡사포는 복좌작용이 더디어 발사속도가 느리고 수류탄도 불발이 많았다.
트럭과 전차는 2사간마다 시동을 15분간격으로 걸어야 여 기도비닉에 문제가 되었고, 땅 표면이 35cm로 얼어 굴토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며 미군의 휴대용 야전삽보다 노획한 중공군의 대형삽이 도움이 되었다.
군화는 물이 땀이 차서 동상에 잘 걸리어 수시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갈아신거나 발을 비벼야 하고 얼어붙은 전투화 끈을 푸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2. 11월 27일 저녁의 상황
미 제1해병사단의 전방 연대인 제5연대와 제7연대는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였고, 하갈우리에는 제1연대 3대대장이 지휘하는 2개 소총중대와 105밀리 2개 포대, 각종 보급정비부대가 위치하고 , 사단사령부가 28일 이동할 에정이라 사단 본부중대와 각 참모부의 주력이 하갈우리에 도착해 있었으며 공병이 수송기용 활주로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고토리에는 제1연대 전투단 2개 대대와 105밀리 곡사포 1개 포대가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고, 고토리 밑의 신흥리에는 제1연대 전투단 제1대대와 105밀리 포대가 있었다.
하갈우리에서 유담리에 이르는 보급로상 요충지 덕동고개에는 제7연대 전투단 F중대가 도착하고 있었다.
또한 하갈우리 북방 10km 지점의 신흥리에는 미 제7사단 1개 특수임무부대(보병 연대장이 지휘하는 보병 2개 대대와 105밀리 1개 포대)가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 시각, 서부전선의 미 제8군 정면의 중공군이 용산동부근에 있는 미 제25사단에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구장동 부근에 미 제2사단과의 전투지경선을 따라서 돌파하고있었다. 이에 미 제8군은 정주 부근까지 진출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에게 철수하라고 명하였다.
이 시각, 중공 제4야전군 예하 제9병단의 12개 사단 12만명은 장진호부근에 부대 전개를 마치고, 미군에 대한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그 세부내용은 제20군단 예하 제89사단은 유담리 서방에 전개하고, 제59사단은 하갈우리-유담리 도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유담리를 우회하여, 덕동고개에 잇는 미 제7연대 F중대의 방어진지와 유담리 남쪽의 제7연대 C중대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58사단은 28일 밤에 하갈우리의 미군을 공격하느 임무를 받고 하갈우이 서남방을 향하여 진격하고 제60사단은 고토리-하갈우리도로를 차단하려 고토리부근에서 북쪽을 향하여 이동 중이었다.
중공군 제27군 예하 제79사단은 유담리를 북방에서 공격하기 위해 공격대기지점으로 이동이었고, 제80사단은 장진호 동쪽인 신흥리의 미군 방어진지에 대한 공격준비를 끝내고예비로 2개 사단을 보유하였다.
중공군은 낮에는 동굴이나 민가에서 쉬고 밤에 산길을 걸어 목적지로 향하여 전진하였다.
3. 유담리 전면방어진지
11월 27일 저녁, 제5. 제7연대는 유담리 주변에 10개의 소총중대를 배치하여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미 제5연대전투단 3대대는 연대주력과 함께 무평리에 대한 공격을 하기 위해서 장진호 동쪽기슭에서 출발하여 27일 정오경에 유담리 서쪽 지역에 집결하였고, 2개 대대는 유담리에 집결하였다.
그 밖에 방어진지의 남쪽 주보급로상에는 미 제7연대 C중대(-1)가 있었고, 유담리와 하갈우리 중간인 덕동고개에는 제7연대 F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량 부족으로 제7연대 제2대대는 대대본부와 화기중대, 그리고 제7연대 대전차중대는 하갈우리에 남아 있어서 유담리의 제7연대 제2대대 소속의 D 및 E 중대는 제1대대장이 지휘하게 되었다.
27일, 제1근무대대의 분견대가 유담리에 도착하여 사단 보급소를 개설하였는데 식량과 연료는 각각 3일분, 소화기 탄약은 2일분, 포병탄약은 기본 휴대량 외에는 극하 적은 수량을 보유하였다.
제1자동차수송대대가 보급품을 실고 유담리에 도착했는데 유담리 부상자는 이 차량을 이용하여 전부 후송시켰다.
18시 30분경, 중공군은 제89사단으로 서북에서, 제79사단으로 북쪽에서 미 해병대를 야간공격으로 돌파하고, 제59사단으로 하여금 퇴로를 차단하게 하여 유담리의 2개 해병연대 주력을 섬멸하려 했다.
유담리-덕동고개
중-79사
1,384m 장진호 신흥리
중-89사 미5-I-1개소대/ 한국 경찰 1개소대
1,403m 1,282m 미7-E 미7-H 미5-G
미5-E 1,240m 미7-D
미5-3대대
1,271m 1,167m
미5-F 유담리
미7-1중
1,426m 1,294m 미7-A
미7-G
1,276m 미7-B
중-59사 1,419m
미7-C(-)
덕동산 1,653m
신흥리 , 덕동령 하갈우리
미7-F
가. 서북지역 산악전투
주공군 제89사단은 소부대로 하여금 간단한 위력수색을 실시하고, 미 제5연대 제2대대와 7연대 H중대를 정면에서 27일 21시 30분부터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28일 03시부터 재차 공격을 개시하여 제2대대의 1271고지는 탈취하지 못하고 H중대의 1403고지는 06시경에 탈취하였다.
나. 북쪽 산악지역전투
중공군 제79사단은 1384.1240.1167고지를 공격했으나 실제 미군은 1240고지뿐이었다. 그런데 1240고지를 공격하려던 중공군이 고지를 잘못 식별하여 미 제7연대 E중대가 방어중인 1282고지로 향하였고 피비린내 나는 혈투속에 고지는 지켜졌고 많은 사상자가 났다. 이에따라 미 제5연대 전투단 제1대대장은 A중대의 2개 소대를 증원하였다.
다시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되고 결국 고지는 피탈되었다. 이어서 도착하는 증원부대 제5연대 전투단 C중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결국 미군이 고지를 다시 탈환하였으며 모든 부상자를 신속히 후송시켰다. 유담리에 벌어진 미군의 가장 격렬한 전투다.
※ 미군 자료중 일부 소개
중공군은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진격해 왔다. 1.2.3 제파식 공격을 감행했다. 피아가 혼전상태가 되어 총검으로 찌르고 때리는 격투가 벌어졌다. 케네모아 중사는 사상자로부터 수류탄을 모아 중대원에게 분배하고 날아오는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고 발로 차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수류탄이 터져 양다리를 잃고 눈밭에 굴러 떨어졌다. 중대장은 착검이 된 소총을 얼어붙은 대지위에 곶아놓고 " 이 선에서 한 발자욱도 물러나지 마라. 부상자를 놓고 물러설 수는 없다. 우리는 E중대가 아니냐." 하지만 중대장도 곧 전사하고 말았다.
미 제5연대 C중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결국 중공군 제235연대 1대대 3중대가 공격하여 생존자는 6~7명에 불과했다. 결국 계속된 공격에도 미군의 용감무쌍한 감투정신에 중공군 제1대대는 무려 4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무력화 되었다.
미군측의 피해는 E중대가 176명중 사상자 120명, 증원부대인 제5연대 A .C 중대는 전사 15명, 부상 67명이었다.
1240고지에 대한 공격은 28일 01:00시에 중공군 제236연대 제3대대가 개시하였으며 미군은 제7연대 D중대가 방어중이었다. 중공군의 압력으로 정상이 피탈되며 제5연대 B중대의 1개 소대가 증언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전투에서 D중대는 거의 전원이 살상되었고 증원부대도 소대의 과반수가 전사 또는부상했다.
"장진호 전투에 참여한 한국 경찰 1개 소대"
1384고지에 대한 공격은 28일 02:00시가 넘어서 시작되었다. 제5연대 제3대대는 전면 방어태세를 갖추고 I 중대의 1개 소대를 1384고지 남쪽 능선에 배치 하였고 그 남쪽 300m지점에는 기간총 2정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경찰 1개 소대가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중공군에 돌파되어 미군과 한국 경찰은 격멸되었으며 대대는 다시 G중대 역습으로 진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27~28일 어간에 1282고지와 1240고지가 돌파되어 포병진지에 대한 위협이 증가되었다.
28일, 서북방의 1271고지는 미 제5-2대대가 점령하고 있었으나 1403고지를 피탈당하여 중공군이 점령함으로서 감제당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제5 및 제7연대자은 협의하에 서남쪽 산으로 철수하여 진지를 재편성할 것을 합의하고 통합지휘를 제7연대 지휘소에 위치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5연대장은 제2대대를 철수시키면서 I중대로 1282고지를, B중대로 1240고지를 확보토록 하였으며, 제7연대장은 덕동고개의 F중대(바아버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제1/2대대를 하갈우리 방햐으로 공격시켰으나 중공군의 저지로 구출에 실패하였다.
덕동고개 점령
유담리-하갈우리를 연결하는 도로는 유일하게 1차선도로 하나 뿐이고 그 중간지점에 덕동고개라는 중요한 요충지가 있었다. 사단은 양 연대의 보급로를 보장하기 위하여 덕동고개와 그 서북방 약 3km떨어진 무명고지에 1월27일 11시 30분경 하갈우리의 제7연대 F중대를 점령토록 명령하였고 중대장 바어보 대위는 지형정찰을 통하여 신흥리 도로 북쪽 도로에 진지를 선정하고 21시경 진지편성을 완료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 제79사단과 89사단이 유담리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고 서측방에서 제59사단이 유담리와 덕동고개 도로를 차단하고 먼저 덕동고개 서북쪽 제7연대 C중대 1개 소대가 점령중인 고지를 28일 02:30분에 공격하여 전사 15명, 부상 44명으로 완전 포위되어 있었으나 28일 저녁 때 제7연대 1대대가 도착하여 구출하였으나 F중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4. '50. 11월 28일의 상황
흥남에 있는 사단장은 28일 아침, 고토리 제1연대장에게 고토리-하갈우리간의 도로개통을 명령하고 헬기로 직접 하갈우리로 날아가 11시에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28일 오후에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모든 지휘관이 하갈우리 해병대 지휘소에 모여 작전회의 개최하였으나 맥아더사령부의 별다른 통보가 없기에 그대로 공격명령은 유효한 것으로 되었다.
사단장은, 16시30분경 제7연대 전투단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공격하여 하갈우리로 통하는 주보급로를 개통하도록 명하고, 제5연대 전투단에게는 서쪽으로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 제7연대 전투단과 협조하여 바어진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날 유담리에 낙하산으로 각종 보급품이 투하되었다. 유담리의 연대들은 중공군에 포위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토리에 저녁때에 영국 제41코만도 보병 2개 중대가 도착하였지만 하갈우리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5. 하갈우리의 전면방어진지
가.하갈우리진지의 미군부대
11월 26일, 저녁때 미 제1연대 제3대대장 리지 중령은 하갈우리를 확보하기 위해 소총 2개 중대와 화기중대의 주력(G중대와 화기중대의 1개 소대는 차량부족으로 지경에 잔류)을 이끌고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하갈우리 진지 배치도"
← 유담리
근무대대 제7연대 대전차중대 분견대
분견대
수송대대
장진강
제2항공통제대 군단사령부분견대 중58-173연대
하갈우리
제7연대 화기중대/ 해-사령부 대대 전투공병중대
군단통신대대
제3대대 본부중대 제1연대 화기중대
비행장 공병중대 고토리→
제11-D포대(105)
제3-I중대 제3-H중대
중58-172연대
다음날 27일, 제1연대 3대대는 그때까지 하갈우리를 방어하던 미 제7연대 2대대와 교대하였으나 차량이 부족하여 제7-2대대장과 대대본부, 화기중대의 주력은 하갈우리에 남았다.
27~28일 사이에 중공군 2개 사단은 유담리의 미군을 공격하여 16개 소총중대 가운데 3개 중대를 격멸하고 1403고지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다른 1개 사단은 유담리-하갈우리 보급로를 차단하고 덕동고개 F중대를 고립시켰다. 한편 장진호 동쪽 중공군 제27군단은 예하 80사단이 페이스특수임무부대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중군군 제20군단 예하 제80사단이 하갈우리-고토리 보급로를 차단하고 , 제60사단은 고토리 서쪽에서 공격중이고 그 일부는 진흥리 미군에 대해 위력수색을 실시했다.
28일 저녁, 유담리를 공격하던 중공군 제79, 89사단은 전력이 약화되어 공격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신예의 제58사단이 하갈우리를 공격하기 의해 진출하고 덕동고개의 중공군 제59사단이 또다시 공격 준비를 하였다.
28일, 하갈우리의 미 제7연대 2대대장은 덕동고개 F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제1연대 소총소대와 전차의 지원을 받아 보급로르 공격했으나 실패해쇼고, 제1연대-3대대도 고토리로 향하는 도로를 개통하여 했으나 실패하였다.
나. 미군의 중공군에 대한 판단
마침 I중대의 척후대가 홍문리 방향을 정찰했는데 중공군 1개 중대와 조우하여 되돌아왔다. 이로서 하갈우리가 중공군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고 하갈우리에 대한 긴급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하는 제1연대 3대대장은 원산지역 경계임무중 마전리에서 원형으로 진지를 편성하고 17일간 고립바어를 효과적으로 실시한 전례를 거울삼아 당시에 허용하여 효과가 좋았던 지역 주민을 이용한 정보수집으로 북한군의 기습을 방지했던 당시 미 육군 제181 CIC가 이번에도 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대대는 주민의 자치를 허용하고 리사무소, 경찰, 등도 그대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주민 스스로 출입통제. 기밀보장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하갈우리에 침투한 한국인 방첩대 2명"
하갈우리에 들어오는 주민은 대부분이 중공군이 진입하여 거주지에서 쫒겨난 주민들로 해병대에 검사를 받고 경찰서에 인계되어 정보과에서 심문을 받은 후 리사무소에 인계되었다.
이러한 피난민으로부터 많은 정보로 중공군이 가깝게 포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지만 무조건 믿을 수만 없기에 27일 아침부터 두 명의 한국인 방첩대를 주민속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토록 하였다
침투된 첩자들은 하갈우리주변에서 중공군도 만나고 주변 주민들도 만나고 수집된 정보로 중공군 부대가 하갈우리 남쪽과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방어준비"
미 제1-3대대장 리지 중령은 하갈우리에 주둔한 모든 부대의 지휘권을 사단에 요청하여 받았으며, G중대와 영국 제41코만도부대를 신속히 이동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28일, 흥남 사단으로부터 헬기로 하갈우리 지휘소에 들어와 지휘소를 개소하였고, G중대 등 추가 부대들이 오지 못하기 때문에 리지 중령은 미 제10군단 사령부 분견대와 해병 제1근무대대에게 담당시켰다.
하갈우리에는 육군. 해군.해병대. 한국군 등 58개 부대 3,913명이 있었으나 대부분 10명 이하의 선발대나 파견대였다.
다. 하갈우리의 공방
28일 저녁, 하갈우리는 적막 속에 잠기어 있었고 때때로 소화기의 총성이 울렸다. 이때 중공군 제58사단이 하갈우리 진지를 향해 남으로부터 제172연대, 동으로 제173연대가 접근하였다.
남서정면의 전투는 H중대와 I중대는 25cm 정도 지면을 파서 호를 구축하였다. 28일 22:30분경 중공군이 피리를 불고 이어서 수류탄을 던지며 시작되어 일시적으로 중공군에 돌파되면서 진내에 들어온 중공군은 전과확대보다는 약탈에 더 관심을 가져 미군들의 의복이나 소지품들에 달려들어 소지하기에 바빴고 바로 이어진 미군의 역습에 29일 04:00시경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H중대는 전사 16명, 부상 39명, I중대는 전사 2명 부상자 16명이 발생하였으며 중공군은 수백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났다.
"하갈우리 동부고지에 있는 한국군 90명의 정체는?"
동부고지전투는 G중대가 도착하지 않고 있기에 혼성부대로 편성하여 미 제10전투공병대대 D중대는 미군 27명, 한국군 90명으로 편성되었으며, 도로가 차단하기 전에 28일 12시에 고토리에서 하갈우리에 도착한 부대였다.
중공군은 29일 02: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 제10군단 사령부를 경계중인 한국군 제1개소대를 돌파하고 산 정상에 있는 미군을 격퇴시켰다. 미 제10군단 공병 D중대는 77명 가운데 전사 10명, 부상 25명, 실종 9명이었으며, 하지만 중공군은 더이상 밀어붙이지 않았다.
라. 미군의 역습
동부고지를 상실한 미군은 목에 비수를 들이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지 중령은 05:30분에 부대대장 마이야 소령에게 모든 에비병력으로 동부고지 탈환을 명했으나 동부고지 서남쪽의 2개 소대, 서북 반사면에 1개 소대가 산정상의 중공군과 대치하는 가운데 29일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무렵 고토리에서 중원부대가 중공군의 사격을 무릎쓰고 하갈우리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라-1 : "드라이스텔특수임무부대"
11월 28일 저녁때, 미 제1연대 3대대 G중대, 영국 해병 제41코만도, 미 제7사단 제31연대 B중대가 고토리에 도착했다. 모두가 하갈우리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고토리에는 미 제1연대 2대대가 11월 24일부터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병력은 제1연대 본부 및 본부중대, 대전차중대, 박격포 중대, 제11포병연대 2대대(105밀리 E포대뿐), 제1의무대대 D중대 등이였다. 제1연대장 풀러는 이곳에서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에 분산된 부대를 지휘했다.
이 무렵 중공군 제60사단이 고토리 서쪽지역으로 접근하여 27일 고토리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동북부의 1개 소대진지가 유린되었다.
"갈수 없는 드라이스텔특수임무부대"
28일, 미 제1해병사단장의 명에 의해 제1연대 제2대대는 1개 소총중대로 고토리-하갈우라 통오를 개통시키려 했지만 중공군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사단장은 고토리에서 하갈우리로 가야할 모든 부대를 영 제41코만도를 지휘하는 드라이스텔 중령에게 임무를 부여하였고, 그 드리이스텔 특수임무부대는 하갈우리로 갈 수가 없었다.
29일 09:45분, 드라이스텔특수임무부대가 포병과 박격포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하갈우리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29일, 사단 수색중대가 고토리에 도착하여 진지내 병력은 증강되었다.
드라이스텔특수임무부대는 출발 즉시 동북부고지를 공격하여 중공군 제58사단 예하 일부를 격파하였고, G중대는 북쪽의 1236고지에 이어서 1182고기를 공격했고, 후방에는 미 제31연대 B중대가 예비로 대기하고 있었다.
29일 13:30분경, 클라아크 대위가 지휘하는 제1전차대대 D중대와 여기에 배속된 제5연대 대전차중대의 전차소대가 특수임무부대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제1전차대대 B중대가 15:00시경 고토리에 북상하여 이 부대를 지원할 예정이었다.
드라이스텔특수임무부대는 공격 개시 4시간후에 불과 4km 밖에 진출이 안되었으며 16시 15분경에는 고토리 북방 6.5km 지점에서 행군이 멈춰버렸다. 미 제1전차대대 D중대, 제5연대 대전차중대의 전차소대, 미 제1연대 G중대, 영 제41코만도 부대가 선두그룹에 있었다.
따라서 사단에 계속 진출여부를 확인하였으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갈우리지역의 방호를 위해 진격해야 한다는 명에 따라 계속 진출하기로 하고 제41코만도 후속 탄약차량에 불이 붙어 도로는 폐쇄되어 후속부대는 전진할 수 없게 되었다.
선두부대는 후속부대의 차단당한 실태를 모르는 가운데 피해를 감수하며 전차를 선두로 진격하여 하갈우리로 들어섰다.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선 미군"
반면 차단당한 후속부대는 영 제41코만도 부대 일부, 미 제31연대 B중대, 사단 사령부 및 보급정비부대 주력으로 군수보좌관 챠이데스타 중령이 지휘하게 되었지만 전방부대를 통과 시킨 중공군이 소화기와 박격포로 맹공을 가해와 전투력 회복불가능 상태가 되어갔다. 뒤따라 오게 되어 있는 제1전차대대 B중대가 구출할 것으로 판단했으나 이 부대도 진출 중에 중공군의 공격으로 고토리로 돌아가 버려 완전히 고립된 후속부대는 죽거나 아니면 포로가 되거나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였다.
11월 30일, "항복, 부상자는 보내주라~!"
포로가 된 미군 중사가 특사로 후속부대 선두인 맥롤린 소령에게로 왔다.
"중국 사람 좋다해, 이제 끝났다 해" 포로가 된 중사는 중공군의 선무공작대원이 되었다.
"안돼, 우리도 명예가 있지"
"명예 좋다해, 그런데 총알도 없고 대포도 없는데 뭘로 싸울건지?"
"마지막 한 몸이 남을 때까지 우린 버틴다. 곧 전차가 온다"
"전차 안온다 해. 우리가 부셨다 해"
"우리는 부상당한 전우를 놓고 손들 수는 없다"
"좋다 해, 부상자는 풀어준다 해"
이렇게 해서 맥롤린 부대는 항복을 하고 무장을 해제당했다. 중공군은 무장해제보다도 전리품 챙기기에 더 정신이 팔렸고 이 틈을 이용하여 많은 인원이 서쪽으로 탈출하여 장진강을 건너서 고토리로 향했다.
중공군은 경상자는 포로로 연행하고 중상자는 도로변의 민가에 두고 갔다. 주민들은 이들 중상자에게 몰래 물도 주고 식량도 모포도 주고 간호를 해 주었으며 며칠 후에 미군이 이 지점을 통과할 때에 소속부대로 보내 주었다.
후속부대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소수의 인원이 포로가 되었지만 상당한 인원이 어둠을 이용하여 포위망을 뚫고 하갈우리나 고토리로 탈출하여 왔다.
선두에서 진격한 드라이스텔부대는 드라이스텔 중령이 부상으로 G중대장 싯다 대위가 지휘하여 29일 19시 15분에 하갈우리에 들어 갔으며 2개 중대 규모의 병력밖에는 없는 하갈우리는 약 300명의 인원이 증가되어 기지를 확보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고토리도 복귀한 인원도 약 300여 명으로 고토리 방어작전에 투입되었다.
라-2 : 하갈우리에 대한 중공군 제2차 공세
30일, 하갈우리의 총성은 먼저 미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갈우리에 도착한 G중대는 리지 중령의 명으로 동부지역 피탈된 고지를 공격했다. 탈환은 못했지만 인근 고지에 올라서 중공군을 견제하게 되었고 이어서 중공군이 24:00시에 I중대와 G중대 있는 곳으로 공격을 감행해 와 I중대는 진지를 고수하였고 전사 2명, 부상 10명인 반면 중공군은 사망자만도 500~750명이 되어 퇴각하였다. G중대 지역은 12월 1일까지도 저투가 게속되고 제41코만도부대까지 지원하여 진지를 회복하였다.
중공군 제58사단은 이번 두번의 전투에서 확인된 사망자만 1,500명에 이르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반면 리지대대의 손실은 전사 33명, 부상 270명, 실종 및 기타 12명이이었다.
6. 진흥리 전면방어진지
황초령 남쪽 진흥리를 점령하고 있는 부대는 미 제1연대 제1대대였다. 대대는 4.2인치박격포소대, 75밀리무반동총소대, 105밀리 곡사포 1개 포대를 배속받아 진흥리를 방어했다.
이 진지는 11월 26일 중공군의 탐색공격을 받았으며 , 27일 밤에도가벼운 공격을 받았다. 29일에는 진흥리-고토리간 도로가 차단되고 대대는 주민의 제보와 척후의 보고에 의해 진흥리 서쪽 계곡 부락에 약 1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매복하여 공격준비중임을 알았다.
30일, 대대장은 포병과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중공군을 기습하여 격멸하였으며 이 가운데는 1개 중대규모의 중공군 기마병도 있었다. 대대는 가옥을 불태워버리고 부락민은 진흥리로 이주 시켰다.
긴 애로지역 철수
1.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 결정
가. 전반적인 상황
미 제8군과 제10군단은 북한군을 포위, 격멸하여 전쟁을 승리로 종결지으려던 유엔군의 크리스마스공세는 중공군의 전면개입이라는 예기치 않았던 사태 발생으로 수초로 돌아갔다.
이미 공격 준비를 완료한 중공 제4야전군의 18개 사단은 25일 밤으로 서쪽의 미 제8군에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그 주공을 덕천지역으로 지향함으로써 제8구늬 우측방을 위협하였다. 그리고 중공 제3야전군 예하 12개 사단은 27일 밤부터 미 제1해병사단을 공격하여 긴 애로지역에서 해병대를 포위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 행정부는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게 되고 이에 놀란 영국 수상 애틀리가 워싱턴에 날아가 트루먼 대통령과 세게대전의 위험성을 언급하며 핵무기 사용의 자제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나. 맥아더 원수의 철수 결의
사태의 심각성을 논하기 위해 11월 28일 밤부터 29일 아침까지 동경에서는 미 제8군사령관과 미 제10군단장이 날아와 정세를 검토한 결과 철수를 결정했다.
다. 미 제10군단의 철수명령과 미 해병사단의 조치
29일 저녁, 미 제10군단은 해병사단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고 1개 연대 전투단을 신속히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전용하여 장진호 동안의 육군부대 페이스특수임무부대를 구출하라 명령하고 1대 전투단은 유담리-하갈우리 도로를 개통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미 29일 아침부터 해병사단 명령으로 공격을 중지하고 유담리의 미 제7연대 전투단은 제5연대전투단 A중대와 제7연대 B. G 중대를 혼성대대로 편성하여 덕동고개의 제7연대 F중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유담리간 도로를 개통하려 하였다.
2.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가. 양 연대장의 협조
유담리와 하갈우리는 유선은 두절, 무선은 지형적 영향으로 불통이었다. 하지만 두 연대장은 제7연대 전투단의 리젠버그 대령이 선임이었지만 통합지휘체계없이 양 연대장이 긴밀한 협조로 아무런 문제없이 원활한 작전을 수행하였다.
나. 돌파 준비
미 제7연대 전투단은 유담리-하갈우리의 도로를 돌파하여 하갈우리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방어진지 남쪽 출구의 요충지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미 제7연대장은 1246고지의 제7-3대대를 차출하기로 하였으며 이르 위해 제5연대 전투단도 그 배치를 변경하기 위해 30일 아침 제5연대 2대대가 배치를 변경했다.
대대의 우측방은 미 제5-3대대와 인접된 상태로 두고 좌익을 철수시켜 1294고지에 진지를 구축했다. 한편 제7-3대대는 유담리 남쪽 4km 지점에 신진지를 구축할 예정이었고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한 경비행기 활주로 작업이 한창 진행 되었다.
11월 30일, 중공군이 제5-3대대에 공격을 해왔으나 실패하였고 오후에 군단으로부터 명령이 하달되어 양개 연대 동시에 하갈우리로 철수하도록 지시되었다.
이에 양 연대장은 협조를 통해 12월 1일 08;00시에 제5-3대대를 전위대대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먼저 보병이 도로 양측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일부 병력이 적의 간격을 돌파해 산길을 따라 은밀히 덕동고개로 진출하여, 바아버중대를 구출함과 동시에 고개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주력의 통과를 엄호한다.
산길로 기동하는 부대는 제7-1대대로 하고, 남쪽으로 공격하기 전에 제7-3대대가 1542고지를, 별도의 1개 중대를 가지고 1419고지를 탈취하여 주력이 공격개시할 발판을 마련토록 하였다.
유담리 장진호
1294m 5-2대대 : 5-1,3대대 철수엄호 후 1276고지에서 7-1대대와 교대후 주력의 서북방면 엄호 및 후위
1100m
5-1대대 북쪽엄호/주력통과후 좌익 엄호
1276m 후위대대 5-2대대 ↓
1376m 우익엄호 5-1대대
1542m 좌익엄호
제7-3대대(-)
1419m 7-3-H중대
1581m ↓7-I대대 : 1276고지에서 5-2대대에 인계후 야간 기동으로 H중 대를 초월하여 산악기동으로 7-F중대 구출작전
전위대대5-3대대
덕동산 1653m
덕동고개 제7-F중대
신흥리 →하갈우리 8km
※ 유담리에 매장한 전사자 유해는 휴전 후에 본국으로 봉송되었다.
3. 중공군의 구상
사실 중공군은 미군을 포위 했으나 미군이 각개 진지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여 중공군은 마치 밤송이를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따라서 주 공격목표는 하갈우리 해병대로 하고, 유담리의 2개 연대는 철수로상의 애로상에서 공격을 가하여 포착, 격멸하도록 하고 황초령에서 미 해병사단의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도로 연변의 고지진지를 강화하여 유담리에서 탈출을 시작하는 즉시 공격 하도록 하였다.
4. 철수개시
12월 1일 아침, 제5-1/3대대는 북쪽에서 중공군 제79사단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제5-2대대는 1294고지를 점령하여 서쪽으로부터의 중공군 공격을 저지하고 , 1276고지에는 제7-1대대가 점령하고 있었으며 야간에 제5-2대대에 인계후 덕동고개로 산악전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7-3대대는 1542고지와 1419고지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으며, 08:00시에 미 제5-1/3대대가 철수를 시작했다. 항공기, 포병과 협조된 이탈작전으로 피해없이 철수를 하였으며 제5-2대대도 1276고지로 철수하여 제7-1대대의 덕동고개로 전진을 보장했다.
한편 제7-3대대는 1542고지와 1419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저항에 종일토록 격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철수 부대인 제5-1대대는 1100고지 일대를 점령하여 북방엄호에 돌입하였으나 제5-3대대는 제7-3대대가 1542고지와 1419고지를 점령하면 이것을 넘어서 전진하려 했으나 공격에 진전이 없자 바로 도로를 따라 15시에 남쪽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1419고지의 중공군 저항이 의외로 거세 대대는 H중대만으로는 점령이 어렵다고 보고 A중대에 이어 B중대도 투입하여 19시 30분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제7-1대대가 피해가 컷기 때문에 연대장은 H중대를 이 대대에 배속시켜 제7-1대대는 A.B.C.H의 4개 소총중대로 재편성하고 부상자를 도로변으로 모두 옮겨 전위인 제5-3대대 구호소로 후송했다. 그리고 다시 목적지인 덕동고개로 산악기동을 계속했다.
5. 덕동고개 부근의 전투
유담리-하갈우리간 치대의 요충지인 덕동고개는 27일 저녁부터 제7연대 F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중대장 바아버 대위는 중대장으로 보직된 것은 11월 7일이었다. 그는 1940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병사로 2년간 근무하면서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1943년 11월 소위로 임관했다. 그 후 유황도에서 승리로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단련된 장교였다.
그는 진지에 도착하자마자 천막설치를 뒤로하고 바로 진지구축에 들어가 전면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각종 장애물을 보강하며 포병과의 협조체계도 갖추었다.
영하 29도가 내려가는 혹한에, 중공군 제79. 89사단이 유담리에 공격을 개시하고 중공군 제59사단이 유담리-하갈우리 도로를 차단하고 F중대로 육박해 오고 있었다.
28일 02:30분경, 중공군이 바로 진전 동서남북에서 귀신처럼 일어나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무너지면 또 밀려오고 무너지면 또 밀려드는 제파식 공격으로 사면에서 압박을 가해 왔다.
하지만 F중대에는 유항도 전쟁의 영웅 중대장이 있고 제2소대에 "카페라다"일등병이 있었다. 서측을 방호하던 제2소대 소속 카페라다는 참호속에서 얼어 있는 발을 문지르고 침낭안에서 전투화를 벗고 있는데 총성소리를 듣고 양말 바람에 뛰어나와 호 속에서 우뚝서서 소총으로 침착하게 조준사격으로 10명이상을 쓰러뜨렸다. 그런데 이제 소총이 작동하지 않는다.
"일등병 카페라다의 분전"
"너희들 잘 만났다. 어디를 감히 치고 들어와, 탕탕탕~"
"우리 쌀람 미군 좋아해"
"무슨 소리야, 너희는 적군이야, 탕탕탕~"
"우리 시계 하나만 주면 봐준다 해, 화내지 말고 살아야지"
"헛튼 소리마라, 우리는 물러나지 않는다, 탕탕~"
일시 적막이 흐른다.
앞에 있던 중궁군이 모두 쓰러지고 그들의 앞잡이 역활을 하던 미군포로도 어디있는지 사라졌다.
그런데 총알이 없다. 아니 총이 얼어붙어 작동이 안된다.
이걸 눈치챈 중공군이 다시 기어오르고 있다.
"총을 달라, 총을 달라~" 외치는 카페라다
"여기 있다. 수류탄도 있다"
"던져, 빨리 던져. 저기 바로 적이야!" 호안에 부상병이 본인들의 총을 던져주고 수류탄을 들고 호밖으로 굴린다
이어지는 전투는 1 : 20의 전투다.
기어오르는 중공군이 방방이 수류탄을 던진다.
달빛에 하얀 눈은 대낮처럼 주변을 훤하게 하고 있다. 포병부대에서 조명탄이 오르고 박격포 지원 사격도 이어졌다.
"에이, 퍽" 옆에서 총검으로 찌르는 백병전이 벌어져 두개고리 터지는 소리가 난다.
누가 고꾸리지는지는 알 수 없다.
날아드는 수류탄을 손으로 주어 호밖에 굴려보낸다.
때로는 양말밖에 안신고 있는 발로 수류탄을 발길질로 차내며 총을 당긴다.
중공군은 쓰러지면 또 올라붙고 쓰러지면 또 올라붙고 끝이없이 몰려든다
이번에는 남측으로 몰려들어 박격포 반장 등 10여 명이 살상되었다. 중대 지휘소로 몰려든다. 하지만 중대장 바아버가 있다. 중대장이 이리뛰고 저리뛰고 때로는 기관총을 당기고 날아오는 수류탄을 군화발로 차서 중공군에게 날려보냈다.
하지만 동측 I소대는 피해를 입지않았다. 즉시 남측의 침투한 중공군에게 조준사격이 가해졌다
새벽이 온다.
1,000미터 이상의 고지, 덕동에 해가 오르고 드디어 비행기의 출격이 시작되었다. 항공관측반에서 무전을 날린다.
06:30분, 덕동고개의 전투는 끝났다. 중대의 피해는 전사 20명, 부상 54명으로 약 31%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중공군의 유기체는 약 450구가 되었다.
중대는 부상자들의 화기와 탄약, 중공군 시체에서 수류탄 드을 모아 재분배하고 공중보급을 요청했다. 부상자는 눈속에 구멍을 파고 침낭을 깔아서 보호하고 교대로 천막에 들어가 온기를 찾도록 하였다.
28일에 하갈우리와 유담리에서 F중대를 구출하려 부대가 들어오지만 이미 도로가 차단되어 접근이 안되고 공중보급은 때로는 잘못 낙하되어 적진에 더러는 떨어지는 악순환을 하면서 소모된 탄약과 부상병을 위한 들것과 몰핀주사액등이 보급되었다.
29일 02:15분, 중공군이 다시 북측에서 시작하여 공격이 개시되고 아침에 재편성을 하니 전사 5명, 부상 29명이었으며 중공군은 200명 이상의 시체를 남기고 일단 후퇴하였다.
30일 02:00시경, 영어로~
"F중대 너희는 독안에 든 쥐다, 항복해라~"
"우린 절대 항복못해 못한다고~"
"우린 따듯한 옷을 주고 밥도 준다, 빨리 항복하라"
"우린 못해, 살고 싶으면 빨리 물러나라"
"카페라다야, 총을 버려라. 우리는 여기서 추위도 없고 인간답게 대우받고 있다. 카페라다야 총을 버려"
펑,펑 하늘에 조명탄이 터지고 대낮처럼 주변이 밝아졌다.
이 때다, 서북방 바위산에 거치된 중공군의 4정의 기관총 머리 위에 105밀리 포탄이 명중하였다.
"꽝 꽝꽝꽝~" 중공군 기관총이 하늘로 날라갔다.
12월 1일, 산발적인 중공군의 공격이 있었으나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유담리에서 출발한 제7-1대대가 적진지를 돌파하여 F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12월 2일 11시 25분, 드디어 제7-1대대가 F중대 진지에 도착하였다. F중대는 5일동안 피해는 47%로서 전사 26명. 부상 89명. 실종 3명이었으며 장교는 7명중 1명만 부상당하지 않았다. 진전에 나뒹굴고 있는 중공군 시체는 1,500구에 달했다.
중공군은 숫적 우세만 믿고 인해전술로 제파식 공격을 감행하다 미군 1개 중대에 연대병력이 죽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6. 야간침투 돌파
"야간에 도로가 아닌 산악기동을 택한 미군의 판단"
유담리-하갈우리간의 전투에서 미 제7-1대대가 취한 행동은 극히 드문 전례중의 하나다.
미 제7연대 전투단장 리젠버그 대령이 일부러 이런 전술을 택한 동기에 대해 "중공군은 반드시 미군은 도로를 따라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항공기나 포병 그리고 박격포의지원이 별로 유효하지 못한 야간에 도로가 아닌 지형으로 미군이 기동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따라서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해 야간에 도로가 없느 곳으로 기동하여 적의 간격을 돌파했던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산악지형 돌파에 맞는 장비와 고립을 고려한 준비"
제7-1대대장 데이비스 중령은 조지아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해병대에 입대하여 제2차세계대전에 참여한 대대장 출신이다. 그는 출동에 대비하여 통신장비로 좀더 통달거리가 먼 무전기 AN/GRC-9을 휴대하고, 포병은 포병용 SCR-610을 휴대하고, 항공연락장교는 연대본부 위치에서 찦차에 장착된 무전기로, 전방항공통제관 등은 무전기로 항공기와 연락하여 대대정면세서 근접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식량은 각자 기호에 맞는 4끼분을 휴대하고 전원이 침낭을 준비하며 개인하기와공굥화기 탄약도 기본휴대량보다 많게 보유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갖고 이동하도록 하였다.
대대는 12월 1일 21시, 1419고지를 출발했다. 방향유지방법으로 나침반과 하늘의 별, 산봉우리의 생김새, 포병의 신호탄 등을 활용하게 되었지만 막상 깊은 산속에서 이러한 것은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나침반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실제 기동간 선두부대가 방향을 잃어버려 그대로 진출하며 결국 도로로 나가 중공군의 먹이감이 되게되고 아군의 포병화력이 무용지물이 되게 된다. 이유는 아군의 머리위에 포탄을 쏘아야 하기 때문이다. 무전기는 불통이고 귀덮개를 하고 있어 구두로도 어려운 처지였다. 이때 대대장이 앞으로 직접 나가 선두에 방향을 바로 잡았다.
12월 2일 06시, 대대는 덕동고개 북쪽 1653고지를 공격하게 되는데 지형이 험준하여 공격이 어려웠다. 이때 무전도 어려웠는데 바로 F중대와 교신이 되어 F중대에서 항공지원이 요청되어 고지를 탈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7. 사단주력 철수
가. 전위대대(미 제5-3대대)
12월 1일 15시에, 미 제7-3대대를 초월하여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타플리트 중령이 지휘하는 이 대대는 인천상륙작전시 선발대로 월미도를 점령한 부대로서, 전차 1대를 선두로 도로 양측의 감제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중공군에 대해 2개 중대를 도로 좌우에 전개시켜 공격하면서 전진했다.
심야에 중공군의 맹공으로 선두인 I중대가 피해가 심했다. 대대는 2일에 미 제7-2대대 D.E중대를 배속받았다. 이 부대들은 유담리 서북방 1282고지와 1240고지 전투에서 피해가 많았고 따라서 두개 중대를 재편성하여 1개중대로 하여 D.라 하였다.
12월 3일, 02시에 덕동고개 F중대에 도달하게 된다
나. 주력
12월 1일 밤, 유담리에서 철수하는 제5/7연대 전투단의 주력은 중공군의 심야공격에 많은 피해를 받았다. 그러나 1542고지를 점령하게 되어 있는 제7-3대대는 고지 정상을 점령하지 못하고 그 동쪽 경사면에 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여기에 공격을 하게 되었고 도로를 엄호하는 제7-3대대는 중공군이 효과적으로 도로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날이 밝자 중공군의 압력은 누구러 졌다.
다. 후위
미 제7-3대대의 북방에는 미 제5-2대대가 위치하여 1276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는데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후위가 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12월 2일 0시부터 제5-2대대는 1276고지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정상이 일부 피탈되기도 하면서 전투기의 야간 근접지원도 받으며 진지를 사수해 차량종대의 통과를 엄호하였으며 전폭기의 엄호를 받으며 후위로 출발했다.
라. 측위
미 제5-2대대 동북방에는 동 연대의 제1대대가 북쪽을 향해 진지를 점령하고 유담리분지와 장진호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12월 1일 21시경에 장진호 위를 걸어서 약 100며의 중공군이 공격을 해왔으나 박격포와 포병화력으로 격퇴하였고 밤새 침투는 게속되었으나 진지를 사수하였다.
대대는 2일 정오가 지나면서 진지를 철수하여 주력 종대의 좌측방을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 미 제5-3대대와 미 제7-1대대의 연결
12월 3일 아침, 전선은 15cm의 강설에 덮혀 있었다. 전위인 제5-3대대는 선두 전차를 따라 진출하며 공병소대가 후속하였는데 최초 48명이던 소대원이 17명만 남았다. 나머지 중대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덕동고개에 다가서고 있었다.
한편 덕동고개의 제7-1대대는 F중대와 합류하였으며 일부러 불을 피워서 중공군의 사격을 유도하여서 그 위치를 알아내 격멸하고 데이비스 대대장은 덕동고개를 감제하고 있는 북쪽의 덕동산 1653m를 직접 C/H중대를 지휘하여 탈환하였고, 부대대장은 덕동고개 남쪽의 중공군을 A/B중대를 지휘하여 공격하여 제5-3대대의 H중대와 협동공격이 되어 격멸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12월 3일 13시, 미 제5-3대대와 미 제87-1대대는 함류하게 되고 돌파작전도 성공을하게 되었다. 4일간의 전투에서 전위대대의 손실은 약 56%에 달했다.
8. 덕동고개에서 하갈우리로
차량종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중상자를 수용하였다. 경상자는 하차하여 중상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양 연대장 짚차에도 부상자로 채워졌다.
종대의 이동간 상공에는 정찰기 둗대가 더서 적 부대의 동정을 통보했다. 전방과 양 측면에는 전폭기가 엄호했다. 해병전투비행대는 12월 3일 총 145회의 출격으로 종대를 엄호 하였고 필요시에는 공중보급도 하였다.
12월 3일 19시에 선두가 하갈우리에 들어서고 12월 4일 14시에 후위의 제7-3대대가 들어옴으러서 22km의 1단계 철수작전은 성공리에 끝났다.
전원이 8일만에 난방이 된 천막에서 식사를 하였다. 기간중 부상자는 1,500명이고 이중 600명은 들것에 실린 환자였다. 이중 1/3이 비전투손실로 동상환자였다.
22km를 돌파하는데 선두는 59시간, 후미는 77시간이 소요되었고, 한시간에 약 286m~370m 전진하였다.
반면 중공군은 하갈우리에 병력을 집중하지 못했고 유담리로부터 축차적으로 공격을 해 옴으로써 미해병대의 압도적인 화력에 피해가 막심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 하갈우리-고토리간 철수작전은 차후에 언급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