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30/191104]드디어 생긴 ‘나만의 서재書齋’
이렇게 마음이 흐뭇하고 좋을 수가 없다. 드디어 생긴 ‘나만의 서재’. 그것도 내가 태어난 고향집을 회까닥 바꾸어 첫선을 보인 것이다. 어찌 한 마디 소회所懷가 없을 것인가? 사방 벽을 가득 메운 책, 책, 책들. 한 사흘 정리하는데 진이 빠지긴 했어도 ‘오랜 나의 소원’을 푸는데, 재미졌다. 몇 권이나 될까? 1000권은 넘겠지? 1500권? 내가 좋아하는 잡지만해도 족히 500권인 걸. 시집만도 300권이 넘는데(지가 무슨 시인이라고 시집을 사모았을까? 웃긴다). 이것을 어느 세월에 다 읽을 수 있을까? 그동안 읽은 모든 책의 페이지를 다 넘겨보는 게 ‘죽는 게’ 소원所願이었건만. 기억이 생생하지만, 참 벼라별 종류의 책도 다 있다. ‘나중에 읽어야지’ 사놓은, 떠들어보지도 않은 책도 상당수 있다. 잡것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는 법이거늘. 참, 나라는 놈도 별종別種은 별종인 것같다. 관심분야가 왜 그리 많았을까?
밤을 꼬박 새며 정리하는데, 지치기도 했지만, 다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같았다. 하루에 한 권, 1년에 365권, 책벌레가 아닌 이상 어찌 사람이 책만 읽고 산단 말인가? 일주일만에 내려온 아내의 지청구가 대단하다. 모두 버리고 태우라는 것이다. 오메, 그렇게 심한 말을? 몇 마디 대꾸를 하다 입을 다물었다. 큰싸움으로 번질 것같아서. 점차 내 자신도 싫고 미워진다. 그동안 버린 책만 해도 500권이 넘을 것이다. 아아, 나에게 책冊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왜 그렇게 집착했던 것일까?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집에만 아니고 동네 전체에 책이 거의 없었다. 사랑방에 굴러다니는 ‘새농민’(지금도 나온다) 몇 권이 고작. ‘읽기의 배고픔’에 허덕이던 나는 나중에 책방冊房을 차리고 종일 책이나 읽었으면, 그런 나이브한 생각에 빠졌던 게 무릇 기하였던가? 그래서였을 것이다. 별 욕심 없는 놈이 ‘책욕심’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76년 겨울, 촌놈이 서울에 올라와 맨먼저 ‘종로서적’을 갔었다. 그렇게 많은 책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북적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전주 홍지서림과는 게임이 안됐다. 나의 못된 버릇이 도벽盜癖이 발동했다. 슬그머니 훔쳐나온 책이 포켓북 원서原書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왜 그랬을까? 지금도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통도 크고 겁도 없어서였을까? 그렇다고 그 책을 읽어본 기억이 없다. 만약에 그때 발각됐다면 얼마나 쪽을 팔렸을 것인가? 이미 홍지서점에서 바둑의 고전 ‘현현기경玄玄碁經’ 5권을 군용잠바에 넣어 훔쳤던 경력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 책들을 꼭 읽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지금도 알 수는 없지만, 도둑질은 일단 스릴이 있다. 책을 감추고 나올 때, 들킬까봐 조마조마, 가슴이 콩닥콩닥거리는 마음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다행인 것은 바늘도둑이 소도둑은 되지 않은 것이다. 10여 차례 후에는 그 나쁜 손버릇은 없어졌다.
책을 정리하다 50년도 더 된, 치졸했던 기억이 생각나 피식 웃기도 했다. 결론은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것이지만, 읽지도 않을 책을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도 이날 평생 끼고 살았던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책 공해book pollution’인 셈이다. 책을 사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내가 읽지 않더라도 우리 아들들이 나중에 읽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그 소싯적 ‘책에 고파봤기’ 때문에. 이제 와 생각하면 어림반푼도 없는 얘기이지만. 아무리 책을 읽지 않는 세상이 왔다해도 책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더 좋은 책으로 진화進化를 하여. 그런데, 무얼 그리 애태우며 책을 산단 말인가. oh my god이닷! 다시는 책을 사지 않으리라, 맘 먹은 적은 또 몇 번인가? 그런데도 발길은 언제나 책방, 요즘은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향한다.
서울 대학시절 3년, 시내 대학교 앞 헌책방들을 전전했다. 버릇이나 습관치고는 나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평화시장 헌책방은 백 개도 넘었고, 늘 성업盛業중이었다. 지금은 초라해져 50여개나 될까? 그것도 맨 중고생 참고서 나부랭이만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 그때 제대로 헌책 수집하는 방법을 알았다면, 지금쯤 그 책만 팔아도 재미가 쏠쏠할 것인데. 그저 내가 흥미로운 책들만 사들였다. ‘씨ᄋᆞᆯ의 소리’와 ‘뿌리깊은 나무’ ‘문학사상’ 과월호들, 그게 무슨 보물이라고 모아모아서 고향으로 소포로 부쳤다. 아버지는 십리도 더 떨어진 오수우체국에 도착한 나의 ‘분신같은 책들을 자전거로 실고 오셨다. 방학만 되면 고향 모정에서 그 책들을 읽어제치며 ‘르포작가’를 꿈꾸었었지. 그래서 ‘작가’가 되었던가? 한없이 못난 놈이다.
서재의 당호堂號를 ‘구경재久敬齋’로 정하고, 편액을 현관문 위에 터억하니 달아놓으니 아주 그럴 듯하다. 내가 무슨 학자學者라도 된 듯하다. 일종의 ‘고급 사기꾼’인 것이다. 그 흉내라도 내며 살아야지, 내 인생이 ‘보상報償’이나 되는 듯싶어서다. 아니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구경재’는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의 “자왈(子曰) 안평중(晏平仲)은 선여인교(善與人交)로다. 구이경지(久而敬之)온여”에 출처를 둔다. 공자가 제나라 대부 안평중이 여러 사람을 사귀기 좋아하면서도 (우정이) 오래 된 친구들을 처음처럼 공경하는 것을 보고 칭찬한 말이다. 이 말은 무릇 세상사람들이 가벼이 사귀고 쉽게 (관계를) 끊지만, 친한 친구일수록 예절을 지키며 서로 공경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붕우유신(朋友有信)이 바로 이것일 것. 자칫 친하다고 서로 예의를 잃기도 하고 우정을 빌미로 사기 등을 치기도 하는 경박한 풍토를 경계한 것이리라. ‘포도주와 우정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서양 속담에서도 우리는 그 의미를 성찰할 수 있겠다. 이 구절은 나로서도 친구들과 한 세상 헤쳐가면서도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겸손謙遜하게 살아야겠다며, 진즉서재의 당호로 찍어놓은 것이다. 제법 그럴 듯하지 않은가.
나는 이 꼭두새벽(2시 13분)에 나의 서재 ‘구경재’에서 아무 영양가 없는 생활글 나부랭이를 쓰느라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아마도 거의 매일 이런 말도 안되는 악습惡習은 계속 될 것이다. 쓰다말고 가끔 멍하니 앉아, 어머니가 물려준 재봉틀책상에서 페달을 돌리기도 한다. 돈도 되지 않을 일을, 죽을 때까지 읽지도 못할 책 들 속에 묻혀 허허롭게 노년을 보낼 것이다. 허허실실虛虛實實,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이겠거지, 그렇게 되기를. 부디, 시력視力만큼은 93세 아버지를 닮기를, 허리만큼은 아버지를 닮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첫댓글 잘 읽었소이다
친구의 책사랑하는 마음을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님의 따뜻한 마음을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