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종 선생님
이세종선생은 평생 ‘오직 예수’만을 만족하며 살았다. 성경을 바탕으로 금욕생활(순결, 부부를 남매로 살다), 절대 청빈, 생명 경외를 실천한 신앙은 한국 기독교의 수도원운동의 원류로서 그 의미가 크다. 1961년 3월 1일자 이현필의 일기에 의하면 ‘주님과 똑같았던 이세종 님’이라고 추모하였다. 감리교 신학대학 정경옥교수도 이선생을 가리켜 “한국에 성인이 나왔다”고 소개하였다.
이세종(李空)은 1880년(丙午年) 전라남도 화순군 중촌 등광리(燈光里)에서 출생하였다. 이 동네는 천태산(天笞山) 기슭에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등광교회(예장 대신측, ‘수레기 어머니’의 아들 이원희장로, 현 담임 정칠용목사 시무)가 있다.
이 근처에 있는 ‘천태수양원’은 이선생의 제자인 김광석과 이상복이 40년 넘게 기도하면서 지킨 곳으로 이세종이 복음의 진리를 터득한 산당터이다. 이공의 어릴 때 이름은 ‘영찬’이었다. 어릴 적부터 착실하고 정직하며 부지런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다. 조실부모하여 남의 머슴 노릇을 하면서도 혼자 노력하여 한글을 배웠다.
세인(世人)으로부터 도암의 성자(道岩之 聖者)로 불리우는 이세종은 본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머리가 비상하고 영리했다고 한다. 집에서 부모에게 매 한번 맞지 않고 자라날 만큼 허물이 없었다. 남의 집 머슴을 살다가 결혼하고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아 십 년 새 등광리에서 제일 부자가 되었다. 토지를 백 마지기 가까이 소유한 지주가 되었다.
흉년이 들었던 어느 해에는 먹을 것이 없어 자기가 소유한 땅을 내놓아 파는 가난한 농부의 논 오십 두락을 한꺼번에 사들이기도 했는데, 예수 믿고 나니 그것이 다 후회가 되어 그때 그 사람들이 토지를 헐값에 빼앗기면서 얼마나 원통했겠느냐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손수 땀흘려 번 재산만 남겨두고 그 밖의 재산은 처분했다.
부인 문순희(후대에 ‘한골 어머니’로 불리움)는 14세 때 16세 위였던 이세종과 결혼을 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나이 40세가 되어서도 자식이 없으니까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하는데 무당이 자식을 얻고 싶으면 불당을 짓고 정성을 드려야 한다면서 명당 자리를 찾아 여기 저기 다니다가 바로 이 산당(山堂)터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무당이 시키는 대로 지하방까지 갖춘 2층 짜리 산당을 짓고 몸을 씻기 위한 연못까지 팠다. 거기서 하루 열두 상 차리는 제사를 지내며 기도하던 중 우연히 성경을 얻어 읽다가 그것이 ‘생명의 말씀’인 것을 깨닫고 제구를 치우고는 말씀 공부에 들어갔다. 성경책은 산당을 지은 목수가 놓고 갔다는 설도 있고, 나주에서 이사온 교인이 있어 그에게 빌려주어 읽었다는 설도 있다.
40여세에 복음의 진리를 터득하고 나서 그는 산당에서 본격적인 독수도(獨修道)에 들어갔다. 성경 외에 다른 책은 읽지 않았으며 깨달은 대로 실천을 하였다. 성경 한 구절 읽고는 그대로 실천했다. 그는 독사도 죽이지 않았다.
자기 발 밑에 깔린 개미의 죽음을 보고 울기도 했다. 산길을 걸어가면서 길에 뻗어 나온 칡넝쿨까지도 꼭 옮겨 놓고야 지나갔다. 고기는 물론 생선도 먹지 않았으며 빈대와 파리도 죽이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려는 뜻에서 이름을 ‘빌’공자를 붙여 李空이라 바꾸었다.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자기에게 빚진 마을 사람들의 빚 문서를 불질러 버리고 모조리 탕감해 주었다.
이에 면(面)에서 그의 송덕비를 세워주니 그것을 땅에 파묻어 버렸단다. 가을 추수를 해서 수입된 것으로 지출 항목을 만들 때에는 첫째로 복음 전도비, 둘째는 세금, 셋째는 남에게 갚을 것, 넷째는 구제비, 다섯째로 접대비(인사 차림)로 정했다.
성경을 유일한 행동지침으로 삼고 살아서 주변에서 그를 도인(道人)이라 불렀다. 광주에서 내려온 낙스(R. Knox 노라복)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때 제자 이상복도 함께 세례를 받았다. 소수의 제자들에게 성서를 부지런히 교육하는데 전념을 다했다.
가끔 방산교회에 나갔는데 거기서 대를 이을 제자 이현필을 만났다. 그가 수도하던 화학산 山堂을 ‘유산각’(遊山閣)이라 이름을 바꾸고, 밤이면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청년들을 모아놓고 부지런히 성경을 가르쳤다. 이 가운데 이현필, 이상복, 박복만, 이대영, 광주 이일학교 출신으로 전도부인을 하던 오복희, 등광리로 시집와 살던 수레기 어머니(손임순) 등이 있었고 목회자로는 최흥종, 그의 사위 강순명, 백영흠, 이만식, 최원갑 등이 성경 연구를 하기 위해 모였다.
그의 성경공부는 영해(靈解) 방법이었고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담화식이었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는 말로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훗날 그런 말씀 어디서 받았느냐고 묻거든 나에게 들었다 하들 말고 천태산 바위틈에서 들었다 허시오’라고 하여 ‘이세종파’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이곳이 훗날 동광원 운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세종은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후, 등광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일제 말기 신사참배 문제가 심각해지자 화학산(華鶴山) 한새골로 들어와 3년 동안 산막에서 살았다. 산으로 들어온 후 세수도 목욕도 하지 않았고, ‘벽곡’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도교 수양법)에 가까운 금식 수도생활을 했다. 좁은 토굴을 쌓고 살면서 쑥을 뜯어먹고 지냈다.
동물이나 초목이나 무엇이든지 아끼고 생명을 존중히 여겼다. 살생을 일체 금하여 파리, 이, 쥐, 독사 등 사람에게 해로운 동물조차도 죽이지 않고 피할 길을 주어 그곳으로 가게 했다. 구약의 잠언에서 의인은 육축의 생명도 아끼는 것이란 말씀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금수곤충뿐만 아니라 잡초하나 다치지 않게 했으며, 나뭇가지 하나라도 다니는 길에 방해된다고 함부로 베어 버리지 말고 잘 붙들어 매어 주는 것이 좋다고 가르쳤다. 이공은 생선도 먹지 않았고, 피는 곧 생명이라는 성경의 주장에 따라 고기도 먹지 않았다.
닭을 길러 계란을 교회에 연보하는 것은 좋으나, 닭이 남의 곡식을 헤쳐 먹고 낳은 계란을 연보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남의 것을 도적질해다가 연보하지 말라고 엄히 가르쳤다. 늘 이공을 따라 다니면서 이런 생활을 지켜 본 그의 제자는 말하기를 ‘이공께서는 언제나 말보다 행위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어디 가나 가짜만 많은 세상에서 이공 어른만이 純金人이었습니다’ 고 했다. 깊은 산 속까지 따라온 이현필, 이상복, 박복만, 오복희, 수레기 어머니(손임순) 등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14세에 시집온 부인 문순희는 성격이 불같았으며 외향적이었다. 남편이 득도한 후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는 것도 그래도 참을 수 있었으나, 순결을 지킨답시고 자신을 ‘아내가 아닌 누이’로 부르며 합방(合房)을 거부하는 것만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두 번 가출해서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는데 그때마다 아내의 세간을 옮겨다주고 그 후에도 계속 옛 아내가 사는 집에 심방 가서 전도했다. 그 때문에 남편은 ‘호세아’가 되었으며 자신은 ‘고멜’이 되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문순희는 회개하고 첫 남편 곁으로 돌아와 남편의 마지막 3년 산중 생활을 수발하였고, 남편이 죽은 후 남편 무덤 곁에서 3년 상을 한 후 등광리 집에서 혼자 살다가 병들어 눕게 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생애는 남편따라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하였다.
밤에 잠잘 때는 자기 갚은 죄인이 어찌 하늘을 마주 보고 눕겠느냐면서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잤다. 다른 신자들이 도우려 하면 절대 사양했다. 속죄의 생활을 실천한 것이다.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알고 나서 병 문안하러 온 도장리 정월순(2000년 현재 79세)에게 부탁하여 능주 도장리의 집으로 옮겨져 요양하다가 보름만에 77세의 일기로 별세하셨다(1971년).
이세종과 이현필의 아내를 모시며 병시중을 든 도장리 정월순(79세)과 정월례(75세) 자매는 이세종과 이현필을 만난 적이 없었지만 건너 마을 동두산교회의 송동근으로부터 이세종이야기를 듣고는 ‘이공님의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다. 이들 자매는 제자의 도리로 두 ‘어머니’ 병시중을 들었다.
동광원에서 연락을 받고 달려온 정인세 선생이 그녀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별세하기 전 간호하는 이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는데 특히 그녀가 좋아하던 말씀은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사 54:1)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치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더라”(눅 23:29)이었다고 한다.
이공은 별세하기 전 3년 동안 마지막 혼을 기울여 제자들을 가르친 후 죽기 사흘 전, 제자들을 시켜 나뭇가지로 발을 엮어 자신의 상여를 직접 만들게 했다. ‘좋은 옷 입혀 땅에 썩히면 죄가 되오. 나의 떨어진 헌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는 자는 화를 받소’ 라고 명했다. 1942년 음력 2월 추운 날에 제자들은 그의 지시대로 산막 옆에 무덤을 만들어 ‘헌 옷’을 그대로 입혀 평토장으로 장사를 치렀다. 그의 시신은 화학산(華鶴山) ‘한세골’에 묻혀 있다.
이세종의 수제자로 강순명목사 엄두섭, 호세아를 닮은 성자, pp.15-16; 엄두섭, 맨발의 성자: 한국의 성프란치스코 이현필전, 서울:은성, 1990, pp.90-92.
를 빼놓을 수 없다. 강목사는 이선생을 따르며 그의 생활을 본받고 그에게 성경강의를 듣고 배웠다. 후에 이현필에게 성경을 지도한 목사이며, 광주 YMCA안에서 “독신 전도단”을 조직하여 청년들을 지도하였다.
강목사의 지도를 받던 분들 중에는 이준묵목사(해남교회), 차남진, 윤남하, 고영노, 박철웅, 이현필 등이 있었다. 강순명목사는 마음이 착하고 자비한 분이었고 바로 살아보려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철저히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하신 분이었는데 길을 가다가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입고 가던 자기의 옷을 벗어 바꿔입기도 했다. 또 다리 밑에 있는 불쌍한 고아를 찾아가 안고 울며 “내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살아야겠는데 이러고 있구나 …”하며 어느 날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 자기 집에 돌아가면 아내는 구박을 하며 ‘고아의 몸에서 이가 옮았다’고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여수 애양원에 가서는 나환자들을 가슴에 얼싸안고 위로해 주곤 했다. 어느 날 아내가 없는 사이에 거지 여자가 구걸을 왔다. 그래서 장롱을 뒤져 아내의 세루치마를 꺼내 주면서 빨리 가라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대문에서 아내와 맞닥뜨렸다. 거지를 붙잡고 사실을 안 성난 아내는 강목사에게 싸움을 걸어 왔다. ‘집을 보라고 하니 도리어 남의 장롱을 뒤져 간직해 둔 세루치마까지 거지를 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자 강목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죽은 듯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후에 말하기를 “신학교 때문에 예수 바로 못 믿고 목사 때문에 예수 못 믿고 가정 때문에 예수 못 믿는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세종은 평하기를, ‘그래서야 쓰나. 아무리 부부라도 자기 것도 아닌 아내의 것을 본인 허락도 없이 몰래 거지에게 주다니! 남의 것으로 구제하면 남에게 손해 끼치는 일이다’고 했다고 한다.
1939년부터 1942년 사이 즉 일제 말에 그는 정진철(후에 목사), 여자 두 명을 대동하여 소위 “칼갈이대”를 조직해서 전국으로 전도여행을 다니며 집집으로 ‘면도칼 가시오’라고 소리치고 다녀 칼을 갈아서 번 돈으로 구제사업을 했다. 거리 청소를 하고 남의 집 변소를 쳐주고 다녔다. 사람들은 이렇게 남보다 구별되게 사는 이들을 보고 이단이라 몰아세웠으나 그들은 기쁨이 충만했다.
말년에는 서울 신촌에서 제자들과 함께 남의 집 변소 치는 똥통 인부가 되어 집집으로 변소 치어 주려 다니고 얼마씩 받은 돈으로 남을 구제했다. 평생 몸이 약하여 말년에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세상을 떠날 때 머리맡에 우는 딸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를 위해 울라’고 타이르면서 별세하셨다.
재미 윤 사무엘 교수
이세종(李世鍾, 호:空, 1880~1942) 엄두섭, 호세아를 닮은 성자: 도암의 성자 이세종 일대기, 서울:은성, 1987; 이덕주, “한국기독교 문화유적을 찾아서ꡈ남도의 한과 믿음이야기(5)”, 기독교사상 1999. 5. p.263. (6) pp.268 이하; 최흥욱, “청빈의 길, 사랑의 길ꡈ이세종,” 기독교사상, 2000년 12월 호, pp.14-26.
첫댓글 성경을 읽다가 삶이 성경이 된 이세종 선생을 기립니다. 그 어려운 시대에 하나의 등불로 어둠을 밝혔으니 그로 족할 뿐 남길 것이 무엇이 있으랴...
이공님의 삶과 가르침 속에 길을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