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사유
3장 4, 윤회하는 생존은 시작이 없다.
왕은 물었다.
『그대가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근원적 시작]이란 무엇을 의미합니 까.』
『대왕이여, 사라져 버린 과거 시간은 모두 근원적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근원적 시작은 어느 것이 인식되지 않습니까.』
『어떤 것은 인식되고 어떤 것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인식되고 어떤 것이 인식되지 않습니까.』
『대왕이여, 무명 이전에는 전혀 존재한 일이 없는 그러한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습니 다. 그러나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은 생겨나고, 생겨나기 시작하자 다시 사라 져 가는 그러한 시작은 인식됩니다.』
『존자여,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 이제 생겨나고, 생겨나자 곧 다시 사라져 간다면, 전 후 양 끝에서 끊겨 없어지는 것입니까.』
『대왕이여, 만일 그것이 양 끝에서 끊겨 없어진다면 끊겨진 것은 증대(增大)할 수 있습니 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증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묻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끊긴 지점에서 다시 증대될 수 있습니까.』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존자는 나무와 씨알의 비유를 되풀이하고, 오온(五蘊)이 모든 괴로움을 낳는 씨앗이라고 설명했다. 왕은 아주 만족했다.
(<밀린다팡하>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듯이, 주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감싸 주신다.
의인이 불의한 일에 손대지 못하게 하려면, 의인이 분깃으로 받은 그 땅에서 악인이 그 권세를 부리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주님, 선한 사람과 그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비틀거리면서 굽은 길을 가는 자를 벌하실 때에, 악한 일을 하는 자도 함께 벌받게 해주십시오. 이스라엘에 평화가 깃들기를!
-(<시편> 125편)
오늘 <밀린다팡하>에서 “대왕이여, 무명 이전에는 전혀 존재한 일이 없는 그러한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은 생겨나고, 생겨나기 시작하자 다시 사라져가는 그러한 시작은 인식됩니다."를 보자.
인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인식하면서 시작되었고, 일어난 인식을 없애기 위해 또 인식적 실천을 한다는 것 같다. 이게 공부라는 것 같다.
오늘 시편에서 “이스라엘에 평화가 깃들기를!”를 보자.
계속 성경을 봐야 하나?
<꽃의 제국>에 나오는 글이다.
[한해살이식물은 환경변화가 많은 서식지에서 일시적으로 살기 때문에 빨리 꽃피우고 씨앗을 만들어 널리 퍼뜨려야 한다. 일생에 한 번 꽃피우기 때문에 이들은 크기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자원을 번식에 투자하여 씨앗을 생산한다. 그래서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꽃피고 열매를 맺는 새팥, 고마리, 들깨풀 같은 한해살이식물을 흔히 볼 수 있다. 두해살이식물은 많지 않으나 강둑이나 산의 사면같이 주기적으로 환경변화가 일어나는 곳에서 살아간다. 달맞이꽃, 꽃마리, 냉이는 잎이 방석처럼 깔린 로제트를 형성하여 겨울을 나고 다음해에 번식을 한다. 일생에 단 한 번 꽃을 피우기 때문에 이들도 남아 있는 모든 자원을 꽃피우고 열매 맺는 데 투자한다.]
단 한 번 피우는 꽃, 그래서 강렬하고 아름다운 것 같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보자.
[이 밖에도 많은 양떼가 골짜기를 돌아다니고 있고,
많은 양떼가 숲으로 가려져 있으며, 많은 양떼가 동굴의
우리 안에 있소. 그대가 혹시 그것들이 얼마나 많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가 없소. 양떼를 세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오.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내 칭찬의 말을
믿으려 할 필요가 없소. 그대는 그것들이 젖이 불어
간신히 걸어 지나가는 것을 육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니까요.
그보다 더 어린 가축도 있어, 따뜻한 우리 안에는 새끼 양들이
들어 있고, 또 다른 우리에는 같은 또래의 새끼 염소들이 들어 있소.
내게는 눈처럼 흰 젖이 늘 풍족하오. 그중 일부는 마실 용도로
보관되고, 일부는 응유효소가 치즈로 굳혀 주지요.]
양 비유 들어본 지 오래된 것 같다.
<켈트족>에 나오는 글이다.
[드루이드라는 말의 근원
현대 유럽 언어에서 사용되는 드루이드라는 말은 그리스와 라틴 문헌을 통해 대륙의 켈트어에서 유래되었다. 예를 들자면 카이사르는 druies로 키케로는 druidae로 표현했다. 이런 단어들은 라틴어의 복수형이다. 현존하는 도서 켈트어의 drui(단수)와 druad(복수)가 오래된 아일랜드 문헌에 나오는 같은 단어의 형태들이다. dryw는 웨일스어의 단수형에 해당한다. 단어로서의 druid는 ‘참나무의 지혜’ 또는 ‘위대하거나 깊은 지혜’를 뜻하는 어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플리니우스는 그 단어를 그리스어의 참나무에 비교했다. 플리니우스의 글을 보면 드루이드와 참나무 사이의 관계를 참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플리니우스는 드루이드가 참나무에서 겨우살이를 잘라냈고,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제식이 부족 축제와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했는지는 모른다. 플리니우스는 마음속으로 올림피아의 참나무 숲을 그렸을 것이며, 그 참나무 숲은 그리스 제식에 존재하는 인도유럽적 요소로 켈트의 성수(聖樹)와, 특히 갈라티아인의 참나무 신전(드루네메톤)과 비교된다. ‘참나무의 지혜’는 초자연물과 함께 명상을 했던 사람들에게 적절했을 것이다.]
참나무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나오는 글을 보자.
[범석호의 <국보서>에 이렇게 되어 있다.
“산림의 호사가들이 혹 국화를 군자에 비유한다. 그 설은 이러하다. 한 해가 저물면 초목이 시들지만 오직 국화만 훤하게 피어나서 거만하게 바람과 이슬을 노려보니, 이는 숨어 사는 은자나 선비의 절조이다. 비록 적막하고 황량한 환경에서도 심오한 도의 경지를 맛볼 수 있어 그 즐거움을 다른 것과 바꾸려 들지 않는 것이다. 신농서에 국화를 양생술에서 가장 좋은 약으로 여겨 몸을 가볍게 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남양 사람들 중에 국담의 물을 마신 자는 모두 백수를 누렸다고 한다.”]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는 지금 시대에 군자는 어떤 꽃으로 비유될 수 있을까?
<길고 긴 나무의 삶>에 나오는 글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사이프러스는 멜랑콜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열여섯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뛰어난 소년 시인 토머스 채터턴을 애도하는 시에서 에이번 강변을 홀로 헤매는 이 어린 천재를 생각하며 상상의 ‘사이프러스 리스(wreath)’를 엮었다. 퍼시 비시 셀리의 <알라스토르 또는 고독의 영혼>에서 시인인 젊은 주인공은 환상적인 동양의 풍경을 헤매고 다니다가 결국 너무 멀어서 ‘눈물 흘리는 꽃’이나 ‘봉헌된 사이프러스 리스’도 없는 황폐한 황야에서 죽음에 굴복한다. 열정은 덜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버나드 바턴은 실제로 <사이프러스 나무에게> 시를 읊으며 ‘애도하는 사람들은 사이프러스 나무를 사랑한다’고 선언했다. 한편, 후대에 훨씬 덜 알려진 시인 조지 달리는 사이프러스에 대한 소네트를 ‘오, 우울한 나무여!’라고 진심어린 돈호법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바이런의 시에 등장하는 이유 없는 반항아. 매혹적인 차일드 해럴드가 무엇에 이끌려 고국을 떠나고 점점 더 먼 곳으로 갔던 간에 그가 지중해의 사이프러스 숲에서 위안을 찾은 것도 놀랍지 않다. 그보다 더 놀랍지 않은 것은 토머스 러브 피콕이 당대의 자아도취를 경쾌하게 풍자한 <악몽 수도원>에서 이 우울한 나무를 끌어다 쓴 것이다. 피콕은 바이런 경을 풍자하면서 제멋대로 늘어뜨린 앞머리와 끝이 말려 올라가는 입술, 늘어뜨린 망토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이 희극적인 인물을 그저 ‘사이프러스 씨’라고 부리기만 하면 되었다.]
사람을 나무로 부를 수도 있구나.
<나무처럼 생각하기>에 나오는 글이다.
[나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말 그대로 변태 중이다.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 급변하는 시대이니만큼 놀란 만한 사실은 아니다. 우리는 이 변화하는 세상에 다시 적응하고 싶어 한다.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러나 자연에 질서를 만드는 것은 더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에게 우리의 존재 방식을 재정비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우리가 자연이라는 샘에서 물을 긷기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위 글에서 “나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말 그대로 변태 중이다.”를 보자.
여기서 말하는 변태는 변화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 같다. 압축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문장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자연에게 우리의 존재 방식을 재정비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를 보자.
나무 사유를 이렇게 표현하면 될 것 같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그러나 비록 그랬다 하더라도 자기의 생활은 그들의 생활보다 훨씬 비참하였고 훨씬 빈약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표가 자기 목표가 될 수는 없고, 마찬가지로 그들의 걱정 근심도 자기의 걱정 근심이 될 수는 없으며, 또 카마스와미류의 인간들의 전체 세계라는 것이 사실 자기에게는 고작해야 단지 한 판의 놀이, 구경삼아 보는 한 바탕의 춤, 한 마당의 희극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왜 남의 삶이 희극에 불과할까? 자신의 정신 상태를 높이기 위해 너무 많은 힐난이 들어가는 것 같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나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말 그대로 변태 중이다,라는 문장을 보았다.
우리는 자연에게 우리의 존재 방식을 재정비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라는 문장을 보았다.
나무 사유가 삶에 대한 시선을 혁명적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열심히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