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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4 천안 ubf 주일메시지 심히 당황한 헤롯
누가복음 9장 강해 이부 심히 당황한 헤롯
누가복음 9장 7-11
요절 누가복음 9장 9.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제자들의 전도 여행 후에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전도 여행 후에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났습니다. 헤롯안티파스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죄책감으로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헤롯은 비록 왕이라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자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전도 여행 후 무리들이 몰려오자 피곤을 무릅쓰고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예수님은 목자의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사건을 통하여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배웁니다.
(1) 심히 당황한 헤롯
“7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가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였을 때 예수님의 이름이 유대 전역에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퍼지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죽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가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를 보내기 전에 먼저 엘리야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옛 선지자 중에 하나가 살아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나와 같은 선지자를 보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가 살아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대부분 이런 예수님의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소식을 들은 헤롯은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왜 심히 당황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헤롯이 당황한 이유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여기서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헤롯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죽였습니다. 헤롯이 자신의 제수씨인 헤로디아와 결혼했습니다. 헤롯은 하스몬 왕가인 헤로디아와 결혼하여 자신의 왕위의 정통성을 얻고자 하였고, 헤로디아는 헤롯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남편 헤롯 빌립보 일세가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떠나 시아주버니인 헤롯안티파스와 결혼하였습니다. 제수씨와 시아주버니가 결혼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서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의 왕이 이런 악한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였습니다. “옳지 않소! 회개하시오” 이 말을 듣고 헤롯안티파스는 회개하기보다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전남편 헤롯 빌립보 사이에서 태어난 딸 살로메가 야한 춤을 추었습니다. 술에 취한 헤롯 안티파스는 살로메에게 무엇을 줄까 나라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헤로디아는 딸을 통하여 요한의 목을 베어달라고 하였습니다. 헤롯은 술김에 큰 소리쳤다가 체면을 때문에 요한을 목베어 쟁반에 담아 주었습니다. 그는 의인 요한을 죽였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인 죄로 인하여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니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는 비록 왕이라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에서 왕이라도 죄를 지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배웁니다. 죄를 지으면 양심이 고발하고 사탄이 고발합니다. 사람들의 정죄가 있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우리는 서울 시장이 죄를 짓고 고통하다가 자살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죄를 지을 때 순간적으로 달콤함을 주지만 나중에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둘째, 헤롯이 당황한 이유는 죽은 후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과 엘리야와 다른 선지자의 공통점은 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나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사람입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난다면 죄를 지어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죽은 후에는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신자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자도 부활합니다. 신자는 부활하여 영생을 얻고, 불신자는 부활하여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헤롯은 죄를 짓고 고통하는 것입니다.
헤롯이 죄를 지은 후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느껴야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죄를 짓고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자신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죽일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내 죄짐이 무거워 견딜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고 10년이 흘렀어도 마음에 고통을 느꼈습니다. 윤동주는 바람에 이는 잎새에도 괴로워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책감이 있을 때 회개할 수 있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죄의식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할 수 없습니다. 가안의 후예 가운데 라멕은 죄를 짓고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죄를 자랑하고 노래했습니다. 노아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문화화 되었습니다. 이렇게 죄책감이 없는 자는 죄가 포도송이처럼 익어서 심판이 다가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남은 것이 심판 뿐이 없습니다.
요즘에도 간통죄와 같은 불륜의 죄를 짓고도 죄책감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처럼 되었습니다. 동성애자들도 죄책감 없이 공개적으로 퀴어축제를 합니다. 이들은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이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죄책감이 느낀다고 다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괴로워 할 때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와 같이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는 길입니다. 둘째는 가룟유다와 같이 고통하다가 극단적으로 자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죄를 지은 후에 가룟유다와 같이 자살하는 것이 명예로운 것 같습니다. 사무리이같이 할복자살하는 것이 멋있는 일 같습니다. 죽으면 더 이상 그 사람의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대통령, 서울시장이 자살하자 그들의 잘못을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살을 통해서 명예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살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자살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살인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은 나의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회개하고 살아내야 합니다. 사람들의 비방을 견디면서도 살아내야 합니다. 회개하고 살아내는 그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다윗도 회개하고 고통을 감내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일 년 간 은폐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종일 신음하였습니다. 그는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보고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말랐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였어도 엄청난 후폭풍이 있었습니다. 가정의 고통, 국가적인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고통을 감내하며 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를 메시야의 그림자로서 축복하셨습니다.
유다지파의 조상 유다도 회개하고 살아냈습니다. 며느리와 잠을 자서 쌍둥이를 낳은 것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는데도 회개하고 살아냈습니다. 그는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대속자로 살았습니다. 베냐민이 죄로 잡혔을 때는 자신이 대신 잡히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는 고통하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가 드러나고 부끄러워도 자살하지 말고, 회개하며 온전히 믿음으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고 우리 마음에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역사에 귀하게 쓰십니다.
(2)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헤롯
“9.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헤롯은 심히 당황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요한의 목을 벴는데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니 그 사람 예수가 누구인가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자 한 것은 잘 한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헤롯은 호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싶어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실제 예수님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헤롯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죄사함 받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무슨 표적을 볼까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결국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되 표적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만나고자 해야 합니다.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 지금 살아계신 그리스도 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자 소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큰 자유를 누립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수록 우리의 행복도 깊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더 큰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을 더 깊이 인격적으로 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3) 무리를 환영하신 예수님
“10.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도 여행 보고를 듣고 잠시 제자들과 함께 쉬러 가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벳세다라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제자들이 그곳으로 가는 것을 알고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대단한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나오자 제자들의 휴식과 무리들의 필요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제자들의 휴식을 우선시 한다면 무리를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무리를 돌보기 원한다면 제자들의 휴식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쉬지 못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무리를 섬기는 일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한 중에도 무리를 영접하셨습니다. 영접했다는 것은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피곤했지만 잘 왔다고 기쁨으로 무리를 환영하였습니다. 기꺼이 다시 한번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병을 고치심으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확실하게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는 힘든 순간에 드러납니다. 힘든 순간에 자신의 이익을 선택하는 사람은 삯군입니다. 힘든 순간에 자신을 희생하고 양들의 이익을 선택하는 사람이 선한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섬기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의 어려움을 아시고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피곤해도, 휴식을 포기하고 양들을 섬기셨습니다.
우리는 피곤할 때 다른 사람을 섬기면 나는 더 피곤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피곤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사는 길입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길이 자신을 얻는 길입니다. 우울증 환자가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대부분 우울증 환자들이 자기 자신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점점 더 우울증에 빠져갑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을 관심 갖고 도우면 신기하게 우울증이 치료됩니다.
김연빛나라 양은 목사의 딸입니다. 팔이 커지는 선천성 난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 병으로 세 번의 수술을 받았고 두 번에 걸쳐 감상샘암과 유방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또 40대 이후에는 암이 걸릴 가능성이 50프로인 유전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고 섬기는 일을 합니다. 그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는 말씀을 잡고 섬기는 삶을 삽니다. 한손에 장애가 있으면서 수요일이나 금요일 교회에서 반주를 섬깁니다. 어린이들에게 구연 동화를 하고 뮤지컬 지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번 돈으로 얼마의 구제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행복을 누립니다. 매일 진통제를 먹어야 하는데 때로는 진통제를 가지고 가지 않아서 진통제 없이 아이들을 지도할 때 그 고통이 없다고 합니다. 섬기는 삶이 참으로 아릅답습니다.
(결론 행복의 길)
결론적으로, 사람의 행복은 어디서 오나요? 첫째, 죄사함을 받을 때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진실해져야 합니다. 둘째, 내가 힘들어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죄사함을 받고 섬기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비글부부라는 이름으로 유튜브에 활동하는 하준 아빠가 있습니다. 그가 세바시에서 강연한 내용입니다. 얼마 전 2020년 8월 8일 둘째 아들 이준이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컴패션을 통하여 매달 이십 가정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3억원을 기부하였습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 살아 있는 아들 하준이에게 잘 사는 법을 가르쳐주고자 합니다. 그는 잘 사는 법이 다른 사람을 잘 살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잘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20여 년간 매주일 교회에 일찍 와서 화장실을 청소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명절마다 다른 사람을 도왔다고 합니다. 자신이 세바시에서 강연하는 것도 아들 하준이가 배우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나의 행복에만 관심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분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목자로 산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우리가 후배나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섬기는 삶을 사는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사함 받고 섬기는 삶을 통해서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2020,8,4 천안 ubf 주일메시지 심히 당황한 헤롯
누가복음 9장 문제 이부 심히 당황한 헤롯
누가복음 9장 7-11
요절 누가복음 9장 9.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