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달빛이 외 1편
김윤배
달빛이 하얗게 죽어가는 밤이다
길이 달빛을 넘으면 숲을 버려도 좋을
그리하여, 끝내 야반의 강을 버리고도
정한은 눈물겹도록 출렁이었다
달빛이 모련 지우고
연민 지울 수 있다면
무릎에 다시 강줄기 하나 세울 수 있었을
어둠의 길이다
시베리아 횡단의 절망을 버리고
또 다시 어두워 질 수 있을지
가령,
북국의 가파른 시간 넘을 수 있을지
열차는 먼 곳의 자작나무숲을 가까이 불러
눈빛 한번 주고는 순식간에 버린다
침목 위에 숨소리 멎듯 눈이 멎고
눈 위의 달빛 차다
신한촌의 봄
아무르만은 밤마다 구릉을 넘어
기울어진 마음 가득 출렁거렸다
사내들에게 여자였다면
아녀자들에게 남정네였던
아무르만, 유민의 첫 정착 마을 감싸 돌던 위안의 바다
여기서는 아무르만은 보이지 않는다
살구꽃비 신한촌* 언덕을 적시고 있다
까레이스키의 길이었던 하바로브스카야 거리는
북국의 봄이 잠시 머문다
길은 아무르 강물 거슬러 우수리스크나 하바롭스크
혹은 더 멀리 캄차카에 이르러
먹먹한 가슴 쓸어내리며 백야 건너겠다
그 먼 길 위, 수많은 디아스포라의 발자국
더욱 깊어져 생각에 잠기겠다
누군가 신한촌 기념비에 놓고 간 국화 한 송이 시들었다
막연한 그리움이었던 연해주, 이처럼 먹먹한
고국의 언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1930년대 고려인 정착촌
김윤배
1944년 충북 청주 출생, 인하대학교 대학원(문학박사) 졸업.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떠돌이의 노래(창작과비평1990) 외 18권.
시론집 김수영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