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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부터 전염병까지,
역대 美 대통령이 직면했던 위기들은?
탄핵부터 전염병까지,
역대 美 대통령이 직면했던 위기들은?
©Reuters
조지 워싱턴부터 조 바이든까지, 모든 역대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 비상사태, 정치 스캔들, 자연재해, 경제적 재앙 또는
외교 갈등 에 대응하고 조치해야 했다.
어떤 대통령은 이러한 위기에 도전하고 대처하며 성장하고,
어떤 대통령은 위기와 함께 휩쓸리기도 하였다.
모든 대통령은 시대의 갈등과 위기에 대처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으며, 그들에 대한 평가는 이 불확실성과 위험한
시기에 어떻게 리드했는지에 따라 기억된다.
곧 선거를 앞둔 미국, 조지 워싱턴부터 조 바이든까지,
각 미국 대통령이 온몸으로 겪었던 위기들은 어떤 게
있었으며 그들은 후세에 어떻게 평가되고 있을까?
조지 워싱턴 (1789년 - 17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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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고,
대통령직이라는 역할 자체를 규정해야 했기 때문에
무거운 책임이 지어졌다. 헌법은 대통령의 직무와
권한에 대해 느슨한 윤곽을 제시하고 있지만,
워싱턴은 전례나 관례 없이 그만의 정부를 수립해야 했다.
존 애덤스 (1797년 - 18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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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애덤스의 임기는 프랑스와 영국과의 긴장이
최고조 였던 시점이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영국 군주는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고, 결국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애덤스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균형잡힌
양국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토마스 제퍼슨 (1801년 - 18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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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퍼슨은 애덤스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외교 정책적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은 나폴레옹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고, 미국은 물자를 양쪽에 팔아 이익을 챙겼다.
결국 영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1812년 전쟁이 발발했다.
제임스 매디슨 (1809년 - 18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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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은 미국의 두 번째 독립전쟁으로 간주되는
1812년 전쟁을 계승했다.
영국은 계속해서 미국의 선박을 압류했고, 매디슨은
금수조치를 비롯한 징벌적 조치로 대응했다.
이윽고 영국은 다시 미국의 해안에 상륙했다.
미국은 결국 그들을 몰아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악관을 불태우는 등 신생 국가를 뒤흔들었고,
매디슨은 잠적해버렸다.
제임스 몬로 (1817년 - 18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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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로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가장 큰 위기는 1819년 공황으로,
1780년대 이후 어떤 경제 침체보다도 가장 심각한 경기 침체였다.
먼로는 이를 막을 힘이 없었었고 국민들은 그에게 책임을 물었다.
존 퀸시 애덤스 (1825년 - 18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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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정치는 존 퀸시 애덤스가 대통령직을
단 한 번 맡은 기간 동안의 골칫거리였으며,
그의 위기는 합법성과 관련되었다.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들인 퀸시 애덤스는
대중 투표에서 승리하지 않고 대통령직을 획득한
다섯 명 중 하나로 선거인단이 승자를 선출하지
못했을 때, 협상을 통해 하원이 애덤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는데, 애덤스는 안드루 잭슨의 99표에 비해
84표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앤드류 잭슨 (1829년 - 18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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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잭슨의 가장 큰 위기는 남동부에 살고 있는 북미 원주민들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의회는 인디언 이주법을 통과시켰고, 잭슨은 이에 서명했다.
'눈물의 길'로 알려진 이 조치는 딥 사우스의 면화 경제와
노예제의 확대를 가져올 땅을 얻게되었다.
마틴 반 뷰렌 (1837년 - 18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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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밴 뷰렌은 1837년의 경제공황으로 알려진
극심한 불황 때문에 임기가 한 번으로 제한되었다.
수익, 가격, 임금이 하락했고, 서부 확장이
정체되었으며, 실업률이 상승했다.
윌리엄 헨리 해리슨 (18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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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대통령들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외교적인 위기들과 싸웠지만,
건강 위기가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대통령직을 망쳤다.
68세의 해리슨은 춥고 비가 오는 날 동안 8,000개가 넘는
단어들을 읽는데 거의 두 시간이 걸리며,
역사상 가장 긴 취임 연설을 했다. 며칠 후, 그는
폐렴으로 쓰러졌고, 미국 역사상 가장 짧은
대통령이 되면서, 임기 31일 만에 사망했다.
존 타일러 (1841년 - 18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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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퀸시 아담스와 마찬가지로 존 타일러도
해리슨의 죽음으로 인해 대통령직에 오른 후
합법성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해리슨의 부통령으로서, 많은 사람들은 타일러가
자리 매김자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타일러는 자신이 즉시 선서하고 대통령 임시직
권한을 행사 하기를 거부했다.
제임스 폴크 (1845년 - 18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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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크는 급진적인 팽창주의자였고 미국이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뻗어나가기를 원했다.
그의 선택의 위기에서, 폴크는 그가 원했던 멕시코 영토를
미국에게 양도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멕시코와 전쟁을 선동했으며,
그 갈등은 멕시코가 현재의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네바다, 뉴멕시코, 유타, 그리고 와이오밍주를 주도록 강요했던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끝이났다.
또한 조약을 통해, 폴크는 오리건, 워싱턴, 아이다호,
그리고 몬태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존스 워스 (1849년 - 18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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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는 남부 출신이면서 노예주임에도 불구하고
노예제 확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전 국민을 놀라게 했다. 테일러의 가장 큰 위기는
새로운 주가 연방에 자유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노예주로 들어갈 것인가였다.
테일러가 뉴멕시코주와 캘리포니아주에
자유주로 들어가라고 압박하자 노예주들은
분리를 하겠다며 위협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 테일러는 급사했다.
밀러드 필모어 (1850년 - 18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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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미국 전쟁으로 얻은 모든 새로운 영토에서
노예제도의 확장에 대한 문제가 시급했고,
필모어는 테일러의 죽음 이후 이를 처리해야 했다.
전 부통령은 테일러의 확장 반대 정책에 동의 하지 않았고
1850년 도망자 노예법을 포함한 1850년 타협안에 서명했다.
이는 자유인이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또 다시
노예로 살아갈 수 있다는 위협이 되었다.
프랭클린 피어스 (1853년 - 18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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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피어스가 취임했을 때,
북부와 남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피어스는 캔자스에서 노예제에 대한 금지를 폐지했던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지지하고 서명했다.
그 조치는 블리딩 캔자스라고 알려진 치명적인
폭력의 발생으로 이어졌고 국가를 내전의 길로 이끌었다.
제임스 부칸넌 (1857년 - 18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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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뷰캐넌은 노예제 문제를 경시했고, 국가가
내전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치권 양쪽은 계속 분노했다.
그가 퇴임한 지 한 달 만에 남북전쟁의 첫발이 발사됐다.
에이브러햄 링컨 (1861년 - 18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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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은 미국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기에 임기했다.
60만 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남북전쟁에서 죽었고
남부는 크게 파괴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자유로워지면서,
링컨은 두 번째 선거에도 선출되어 두번 연속 재임하였다.
그러나 취임식 직후 포드 극장(Ford's Theatre)에서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안드루 존슨 (1865년 - 18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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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부통령인 앤드루 존슨은 남부 출신으로
연방에 대한 민권법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분열된
주들의 조속한 복구를 지지했던 노예 소유주였다.
이로써 그는 하원에서 탄핵당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또한, 그는 단 한 표로 상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을 피했다.
율리시즈 그랜트 (1869년 - 18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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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군 장군이었던 그랜트의 대통령 위기는
패배한 남부 주들과 그곳에 살았던 400만 명 이상의 새로 해방된
노예들을 북군으로 재결합시키는 일이었다.
러더포드 헤이스 (1877년 - 18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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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당선 부터 논쟁이 되었는데, 공화당과 민주당의
의원 의석 수가 비율로 8:7로 공화당이 우세하므로
조금이라도 우세한 쪽에게 모든 표를 주기로 결정해
19표가 공화당의 것임을 인정하여 민주당 선거 184표,
공화당 선거 185표로 공화당이 1표 더 앞서
헤이스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되었다.
제임스 가프리드 (18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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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가필드의 가장 큰 위기는 신변 보장이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불만이 많은 직장인에
의해 등에 총을 맞고, 몇 주 후 혈액 감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200일에 불과했다.
체스터 아더 (1881년 - 18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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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필드의 부통령 체스터 아서(Chester A. Arthur)는
가필드의 암살로 취임하여 이민의 위기를 물려받게된다.
가필드는 첫 번째 중국 배제법안을 거부했는데, 이 법안은
중국으로부터의 이민을 20년 동안 금지하고
중국계 미국인에게 민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1882년에 개정된 법안이 결국 법으로 채택되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 (1885년 - 18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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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연속되는 임기가 아닌 임기를 건너뛰어
대통령을 두 번 역임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기업편에 섰던 그는 재정난에 빠진 시민들을
구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을 다 하지 않았다.
클리블랜드는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보다도
많은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이 중에는
참전 군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법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밴저민 해리슨 (1889년 -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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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슨의 가장 큰 위기는 기업들이 너무 커져서 경쟁을 억제하고
거의 스스로 정부 역할을 하는 기업들의 등장이었다.
수천 명의 민병대원들과 핑커턴 요원들이 카네기의 철강 노동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개혁가로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 (1893년 - 18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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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슨 이후 클리블랜드는 다시 돌아왔지만,
그의 두 번째 임기는 1893년의 공황으로 특징지어진다.
당시 미국내 가장 큰 기업 필라델피아 & 레딩 철도회사와
내셔널 코데이지 컴퍼니가 붕괴되며, 주식 시장이 폭락했고,
나라는 경제 대혼란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결국,
15,000개가 넘는 사업체가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윌리엄 맥킨리 (1897년 - 19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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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킨리 대통령의 임기는 미국이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승리하는 최대의 외교적 격동기를 겪었다. 맥킨리는
그의 두 번째 임기의 여섯 달 후에 암살자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1901년 - 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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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가장 큰 위기는 산업혁명 기간 동안
수십 년간 지속된 기업 과잉으로 인해 미국의 황무지가
점점 더 파괴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자연 보호 운동에 착수하여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사냥 금지구역, 조류 보호구역, 삼림 지대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미국 산림청과 국립공원 시스템을 설립했다.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1909년 - 19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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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몰락을 가져온 위기는 친구이자 스승이자 그를
승리로 이끈 전임자 테디 루스벨트 사이의 불화였다.
태프트가 계속해서 공화당의 보수 진영 편에 섰을 때,
두 사람은 서로 등지게 되었다. 태프트의 보수 성향과
루스벨트의 진보 운동이 점점 더 확대되자, 루스벨트는
제3당 후보로 출마하여 공화당의 표를 분열시키고
태프트의 자리를 우드로 윌슨에게 넘겼다.
우드로 윌슨 (1913년 - 19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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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 남북전쟁 이후
최초의 남부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유럽이 전쟁으로 불바다가 되자 미국은 중립을 지키려 했지만,
1915년 독일 U보트가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침몰시켜
114명의 미국인이 사망하자 윌슨은 참전 준비를 시작했다.
1917년 4월 6일, 미국은 독일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유혈전에 참여한다.
워렌 하딩 (1921년 - 19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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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의 취임부터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대통령 시기가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스캔들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는 티팟 돔 스캔들인데, 하디의 내무장관이 입찰 없이
사치스러운 석유 비축지를 뇌물을 받고
사설 기업에 임대한 사안이었습니다.
칼빈 쿨리지 (1923년 -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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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미국 전역에서 자신들에게 거부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인종적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에 캘빈 쿨리지가 취임 하게된다.
쿨리지는 인종차별 금지법과 민권법을 제정하려고 애썼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또 다시 그들의 권리를
보장받는 약속을 거부당했다.
허버트 후버 (1929년 - 19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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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후버가 취임한 직후 주식시장은 폭락했고,
세계는 대공황으로 빠져들었다.
국가 경제가 계속 가라앉자 후버는 여러 정책을 펼쳤지만,
연방정부를 구호활동에 직접 참여시키는 것은 거부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33년 -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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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상 최장수 대통령으로
20세기 최대의 위기를 두번이나 해쳐나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임기에 그는 대공황을
극복하는 것에 집중했으며, 이때 루스벨트는
후버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30년대 뉴딜 정책을 통해
연방정부의 총력을 경기침체 해소 노력에 기울였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임기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전으로 초점을 옮겼다.
해리 S. 트루먼 (1945년 - 19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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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루스벨트가 사망했을 때 트루먼은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에게 닥친 가장 큰 위기는 소련의 부상이었다.
냉전 초기, 이 두 강대국의 갈등은 고조 되었고,
1949년 러시아인들은 종전 이후 미국의 전유물이었던
원자폭탄을 보유하게 된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953년 - 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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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두 가지 위기를 동시에 겪었는데,
소련의 팽창과 남북전쟁 이후 계속 거부되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민권에 대한 보장이였다.
존 F. 케네디 (1961년 -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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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36대 대통령인 케네디는
(1963년) 역대 암살당한 네 번째 대통령이었다.
그가 암살되기 1년 전, 그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겼었다.
13일 동안, 미국과 소련은 핵 전멸로 위협하며 전 세계가 숨을 죽였다.
린던 B. 존슨 (1963년 - 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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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가장 격동의 시기 중 하나에 대통령직에 오른
존슨의 주요 위기는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세계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전쟁의 참사가 보도되며 이를
본 국민들은 분노하고 슬퍼하며 나라를 분열시켰다.
결국 58,000명이 넘는 미국인, 수백만 명의 베트남 민간인과
군인들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리처드 닉슨 (1969년 - 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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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의 대통령직은 그가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라는 위기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것은 1972년 6월 17일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오피스 빌딩에 위치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난입한 것에 대한 닉슨 행정부의 개입을 숨기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제럴드 포드 (1974년 -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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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에 대한 평가는 그가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꼬리표를 달게되었다.
1972년 6월 17일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오피스
빌딩에 위치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불법 침입과
도청, 이를 부정하고 은폐하려는 미국 행정부의 조직적
움직임 등 권력 남용으로 말미암은 정치 스캔들이였다.
지미 카터 (1977년 -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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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의 임기동안 에너지 위기와
천정부지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렸지만,
이란 혁명과 인질극은 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979년 이란 혁명가들은 미국이 지지하는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을 세웠다. 같은 해
이란 학생들은 미국 대사관에 난입해 444일 동안
52명의 미국 시민과 외교관을 인질로 잡았다.
로널드 레이건 (1981년 -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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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와 마약은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이란-콘트라 문제는 그의 최대 위기였다.
결국 레이건은 자신의 행정부가 이란에
불법적으로 무기를 팔았고,
그 이익을 의회의 승인 없이 니카라과
대조군 자금으로 몰래 빼돌렸다고 시인했다.
조지 H.W. 부시 (1989년 -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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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의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된 조지 H.W. 부시는
걸프전으로 이어진 외교문제에 직면했다.
그가 소련의 해체가 이루어지는 사이,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전략적 미국의 동맹국인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부시는 국제 연합을 조직하여 대응했고, 이로인해
쿠웨이트를 빠르게 해방시켰지만
후세인을 권력에서 제거하지는 않았다.
빌 클린턴 (1993년 -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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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의 대통령직은 클린턴이 백악관 내부에서
불륜을 저질렀던 젊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항상 기억될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클린턴은 선서를 하고 직접 미국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다.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은 그를 탄핵했지만
상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조지 W. 부시 (2001년 -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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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2,977명의 목숨을 앗아간 9.11 테러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임기내에 발생했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현존하지 않는)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이라크를 처참하게 침공하고 점령하는 등
끊임없는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바라크 오바마 (2009년 -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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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의 두 번째 임기 말은 대공황 이후
가장 큰 경제적 재앙을 겪었고,
미국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그의 대공황을 물려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2017년 -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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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역사상 가장 큰 정치적 격변 중 하나로
힐러리 클린턴을 이겼을 때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논란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의 취임과 임기동안 겪었던
세 가지 주요 위기들로 COVID-19, 고전하는 경제,그리고
심화되는 미국내 인종 차별과 이에 잔인하게 대응하는 경찰이 있다.
조 바이든 (2021년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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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하마스 갈등으로 인해 바이든은
모든 측면에서 분노에 직면하고 있으며,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커져가는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으면서 이스라엘에 대해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진보 세력으로부터 큰 압박을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휴전을 지지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바이든은 현재 그의 대통령직에서 가장 큰 위기를 걸어가고있다.
출처:
(Stacker)
(CNN) (Politi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