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에서 피카소까지' 전시회가 서울에 이어 부산(시립미술관)에서도 열리고 있다고 한다.
지난번 서울 출장갔을 때 잠시 틈을 내어 보고 왔었다.
그 때 몇자 적은 소감을 아래에 옮겨본다.
“모네에서 피카소까지” 전시회를 보고
얼마전 졸업생들의 취업홍보차 서울에 출장을 갔다가 잠시 틈을 내어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모네에서 피카소까지”를 관람하기 위해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체크아웃 한 후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 매표소로 찾아갔더니, 매표소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혹시 휴관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안내판에 관람시간은 11시부터 오후7시까지로 돼 있었다. 은행도 10시 되기 전부터 문을 여는데 미술관은 왜 11시가 되어야 개관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되돌아 갈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내 이외에도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꼬맹이들을 데리고 온 보모들도 보이고, 초등생의 손을 잡고 온 젊은 어머니들도 있었다. 알고 보니 ‘모네에서 피카소까지’외에도 ‘색채의 연금술사 루오전’, ‘볼로냐 국제그림책 원화전’, ‘모나리자의 비밀을 찾아라’ 등이 함께 열리고 있었다. 10시반쯤 되니 매표소 앞에 10여명이 줄을 서기 시작했는데, 그중에는 어린 아기를 업고 온 아낙도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 특히 서울의 젊은 엄마들의 교육열은 대단하여 오바마 미국대통령도 한국의 교육열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가.
관람료는 13000원이었다. 11시 10분전,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산 다음 2층 계단을 걸어 올라가 한가람 미술관으로 갔다. 입구에는 벌써 20~30여 m 넘게 줄이 길게 늘어 서 있는데 대부분은 어린 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이었다. 입구에서는 작품해설 오디오를 유료(3천원)로 대여해 주고 있었으나 그것을 듣고 있을 시간도 없었거니와 작품은 본인이 느끼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내 고집도 한몫을 했고, 작품해설은 도록을 한 권 사면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림이나 유물들은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림이나 조각도 아무런 고정관념이나 그 작가에 대한 아무 선입관 없이 빈 마음으로 보면 그 작품속으로 몰입될 수가 있고 또한 작가로부터 전해오는 영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11시가 되자 입장이 허용되었다. 전시실로 들어서니 실내가 약간 어두웠다. 입구 왼쪽 벽에는 인상주의 미술의 보고이자 미국 현대미술의 산실이라는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개가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는 조선일보 창간9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25만여점의 컬렉션중에서 유럽 인상주의 거장들의 대표작을 중심으로 피카소로 대변되는 20세기 아방가르드에 이르기까지 반 고흐를 비롯해 마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드가, 고갱, 세잔, 파카소, 마티스, 로댕, 브랑쿠시와 같은 세계적인 거장들의 대표작 96점을 전시한다고 소개했다. 약 2년전에도 “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라는 전시회가 열렸던 기억이 났다. 입장료가 약간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명화관람은 정서함양의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대영박물관이나 내쇼날 갤러리에서 관람료를 받지 않고 있는 것은 학생들에게 교육의 장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미술교과서에 나왔던 명화들을 내쇼날 갤러리에서 처음 접했을 때 가슴에 와 닿았던 그 전율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전시된 작품중에서 제일 먼저 만난 작품은 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 1796~1875,프랑스)의 ‘테르니의 염소 치는 목동’이었다. 스켓치풍으로 그린 이 숲속의 정경은 로마 북쪽 골짜기의 풍경을 흐릿한 기억에 의존해 묘사했다고 한다. ‘색채효과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는 이 작품에서 깊은 골짜기의 음영을 표현하기 위해 화면 전체를 어두운 색조로 처리하는 한편 화면 중앙 하단에는 노랑과 오렌지의 밝은 색으로 처리하여 길가에 선 목동이 아침의 일출광경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다. 먼저 입장한 어린 학생들이 작품을 순서대로 보겠다고 작품 앞에 멈춰 서 있는 바람에 어깨너머로 잠시 훑어 본 후 비어 있는 전시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우선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전체적으로 대충 파악한 후에 관심 있는 작품을 꼼꼼히 살펴볼 심산이었다. 주마간산격으로 벽에 걸린 작품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한 바퀴를 돌아보고 난 후에 다시 입구로 되돌아갔더니 사람들이 그렇게 붐비지는 않았다. 두 번째 전시된 작품은 코로의 인물화로 ‘샘터의 집시 여인’이었다. 작품속의 여인은 이웃에 사는 이탈리아 여성을 모델로 고용해 코로 자신이 수집한 의상을 입히고 아틀리에 안에서 소도구를 배치한 뒤 토스카나의 구릉지 같은 로맨틱한 풍경을 배경으로 샘터가에서 집시여인이 선채로 왼발 무릎 위에 비스듬히 세워진 물 항아리의 주둥이를 왼손으로 가볍게 잡고 있는 모습인데 배경처리가 마치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음 작품은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 프랑스)의 ‘숲의 언저리’였는데 작가는 좌파이념에 입각해 소박하고 사실주의적인 노동자와 농부의 이미지를 주로 그렸다고 한다. 작품에 나타난 숲은 아무데나 존재하는 숲이 아니라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60km 떨어진, 한 때 프랑스 왕궁이 있었던 퐁텐블로 숲으로 16세기 이래 많은 화가들의 주제가 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언덕받이에 네 댓 그루의 고목들이 화면전체를 채우고 있는데 작가는 색과 명암을 작은 화면들로 분할한 뒤 붓과 팔레트 나이프로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소위 임페스트 화법을 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숲의 언저리> <시용성>
쿠르베의 작품 가운데서 제일 친밀하게 느껴진 것은 ‘시용성’이었다.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알려져 있는 시용성은 제네바에서 남동쪽으로 약30km 떨어진 레만 호수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10여년 전 가족여행시에 들렀던 곳이다. 시용성은 9세기 때 처음 지어졌으나 13세기 때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개축되었다고 한다. 이 성은 장자크 루소, 퍼서셀리의 작품에도 등장하지만 특히 바이런의 ‘시용의 죄수’라는 작품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쿠르베는 1871년 봄 파리코뮌에 참여하면서 당시 예술가혁명동맹위원장이 되었다고 하며,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제3차 대불동맹군에 승리한 것을 기념해 제작한 방돔 광장 탑도 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쿠르베는 그 책임을 지게 되어 투옥되어 6개월 동안 세 곳의 감옥을 전전한 끝에 스위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제네바의 독재자인 사보이 공작에 의해서 시용성의 감옥에 갇혀있었던 애국지사인 프란시스 보니바르를 알고 있었던지 망명기간중 시용성만 20점정도 그렸다고 한다. 작품을 보면 우리가 보았던 밝고 아름다웠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화면전체에서 배어나오는 음울한 분위기는 작가자신의 이국에서의 고독과 애수 그리고 가난한 처지를 대변한 것이지도 모를 일이다. 또 관심을 끈 작품은 에두아르 마네(1832~1883 프랑스)의 ‘키어사지호와 앨라배마호의 해전’이었는데 이는 작품자체 보다는 바다와 배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은 화면의 2/3가 출렁이는 시퍼런 바닷물로 채워져 있고, 화염에 휩싸인 두 척의 배와 대포를 맞고 선미로부터 침몰하기 시작하는 앨라배마호에서 바다로 뛰어 내리는 선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달려가는 구조선과 화면중앙에는 부서진 배의 잔해에 매달린 선원 한명도 보인다. 그가 어떻게 미국 배들의 전투를 그리게 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는데, 사연인즉슨 미국 남북전쟁 당시 1864년 남군이 파견한 앨라배마호는 석탄을 싣고 가기 위해 프랑스 북부해안 셰르부르항에 몰래 잠입했다. 그런데 8일 후 앨라배마호가 항구를 빠져 나갈 즈음 북군이 급파한 키어사지호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두 전함은 한 시간 이상 서로 쫓고 쫓기며 치열한 공방전을 폈다. 결국 함포에 맞은 앨라배마호가 선미로부터 침몰하기 시작했는데 작가는 해전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나 신문에서 보도된 기사를 보고 전투상황을 그렸다고 한다. 마네의 작품중 비교적 낯익은 그림은 ‘카르멘으로 분장한 에밀 앙브르의 초상’이었다.
<키어사지호와 앨라배마호의 해전> <신성한 산>
그 외 에드가 드가의 ‘발레 수업’, 클로드 모네의 ‘석양에 물든 센강’, ‘수련, 일본식 다리’ , 빈센트 반 고흐의 ‘데이지 꽃이 있는 정물’, 폴 세잔의 ‘오베르 풍경’, ‘사과와 와인 잔이 있는 정물, 호아킨 소로야 이 바스티다의 ’바닷가의 아이들‘, 파블로 피카소의 청동조각 ’올빼미‘, 오귀스트 로댕의 청동조각 ’영원한 봄‘,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키스‘, 마르크 샤갈의 ’물통‘, ’한밤중‘ 호안 미로의 ’페인팅‘, ’말,파이프, 붉은 꽃‘, 파울 클레의 ’디아보로 게임,‘화분에 심은 꽃’, 앙리 마티스의 ‘아침 식사’, ‘무어 병풍’, ‘안락의자의 여인’ 등이 눈길을 끌었고 또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프랑스)와 폴 고갱(1848~1903 프랑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르누아르의 작품으로는 이번 전시회의 포스터에 등장하는 ‘르그랑 양의 초상’과 ‘알린 사리고(르누아르 부인)의 초상’, ‘누드’, ‘기타 치는 여인’이 나와 있었고, 고갱의 작품으로 ‘신성한 산’이 나의 발길을 붙잡았다.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그가 잠들어 있는 마르케사스 군도 히바오아라는 작은 섬으로 가서 그의 묘비 앞에 꽃다발이라도 바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의 혁명정신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산’이라는 이 작품은 마르케사스 군도에 위치한 마라에(Marae)라고 불리는 기도와 희생의 신전이라고 한다. 아이들을 제물로 바쳤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라고 한다. 그림의 화면 중앙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볼록하게 솟아있는 모습인데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그 뒤편 오른쪽으로 약간 검게 보이는 산봉우리가 이어져 있다. 그 검은 돌산에는 거대한 석상이 하나 서 있어 약간 괴기스런 느낌을 준다. 이는 그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에 등장하는 신상의 이미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가운데 있는 마라에를 둘러싼 앞쪽의 울타리는 마오리족 여인들의 귀고리 장식과 같은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그 앞쪽에는 열대의 화려한 꽃들로 채색돼 있어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세심히 관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없어 아쉬웠지만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화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돼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