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 70세)씨 인터뷰는 3월 26일 미국의 파타고니아(Patagonia) 본사에서 이루어졌다. 취재를 기획한지 2년 만에 성사된 일이다. 취나드씨의 오랜 친구이자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선우중옥씨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전 세계로 바쁘게 놀러(?) 다니는 동선을 추적하다 본사에 귀환할 때를 기다려 기어이 비서에게 허락을 받아낸 것이다. 통역은 UC버클리대학 산악부를 창설하고 지금도 현역인 재미 클라이머 최상범씨, 사진은 유재일씨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글|신영철 편집인 사진|유재일(재미산악인)
캘리포니아의 봄은 눈부시다. 귀한 비가 겨우내 충분했던지 산과 구릉은 온통 초록 세상이다. 그 초록 틈 사이 노란 유채꽃이 무리지어 피었지만 이곳이 사막의 고장이라는 듯 선인장 밭도 눈에 들었다. 101번 프리웨이를 달리는 차창으로 어느새 태평양이 둥글게 떠올랐고 태양은 폭력처럼 눈부셨다. 외다리로 선 듯 키가 겅중한 종려나무 정수리에 달린 비대칭의 긴 입사귀가 해풍에 흔들리고 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리고 있었고 바다에 점점 떠 있는 서퍼들이 흡사 물개처럼 보인다. 그들은 잔물결에 몸을 싣고 높은 파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바다에서 이본 취나드씨는 자신이 쓴 책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란 제목처럼 저렇게 즐겼으리라.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기 안에서 줄까지 치며 읽었던, 그의 책의 원 제목은 ‘Let my people go surfing’이다. 즉 내 사람들, 등산장비와 아웃도어 의류를 만드는 파타고니아 직원들에게 서핑을 권하는 말이다. 그들은 파도가 칠 때면 언제든지 바다에 나갈 수 있도록 자유근무를 누리고 있다. 취나드씨는 저 바다에서 그의 책 제목 영감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캘리포니아 벤추라(Ventura) 카운티 산타클라라 도로 서쪽에 파타고니아 본사가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죽어버린 지구에서 할 수 있는 비즈니스는 없다’라는 글이 눈에 확 띈다. 막강한 미국의 환경단체 시에라클럽의 데이비드 브라워(David Brower) 회장의 어록이다. 파타고니아 창업자 이본 취나드씨의 사상은 이 짧은 글에 함축되어 있다. 세계가 알아주는 역동적 삶을 살았고, 지금도 진행형인 산악계의 영웅 취나드씨는 아주 특별난 사람이자 별난 사업가였다. 하루 인터뷰로 작은 거인 취나드씨를 표현하는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선우중옥씨와 취나드씨는 많이 닮았다. 평생 산과 더불어 산 것도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키가 작았다. 챙겨간 「사람과 산」을 꼼꼼하게 들춰보는 취나드씨는 백발에 눈썹까지 하얗다. 얼굴은 붉었고 태양에 그을린 목덜미 주름이 거북 등짝처럼 보인다. 그는 파타고니아까지 5주 동안 클라이밍과 서핑여행에서 어제 돌아왔다고 했다. 악수를 나누는 아귀의 강한 힘과 함께, 평생 한 길을 갔던 칠순 노인의 고집과 완고함이 슬쩍 엿보인다. 그러나 인생을 달관한 사람 특유의 편안함도 함께 묻어난다. 그 나이면 누구에게 잘 보이거나 가식이 필요 없는 세대다. 아무렇게나 입어도 편하고 아무거나 신어도 눈총 받을 리 없겠다. 그렇듯 취나드씨는 티셔츠에 반바지, 그리고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2007년 매출액 2억 7천만 불. 전 세계에 매장을 가지고 있는 유명 브랜드 파타고니아 회장의 첫 인상도, 그의 안내로 둘러본 회사도 그랬다. 직원들 역시 편하고 느슨한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런 회사 풍경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한 곳이었다.
본격적인 대화가 진행되면서 취나드씨는 독특한 삶을 열정적으로 풀어내었다. 셍최라는 미국 이름으로 더 알려진 최상권씨 통역은 아주 훌륭했다. “5주간이라면 긴 시간인데 남미는 어떤 일 때문에 가신건가요?”
“영화촬영 때문에 간 거요. 이야기는 아주 오랜 옛날로 돌아가요. 1968년이었는데 칠레 해안 따라 서핑을 하며 내려가다 남미의 피츠로이(Fits Roy) 남서벽을 올랐지. 초등이었고 그때 고생 좀 했어요. 두 달간 남극에서 불어오는 폭풍설 속에 설동을 파고 생활했으니까. 그때 촬영한 기록은 이탈리아 트렌토 산악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어요. 최근에 그 필름을 본 영화 프로듀서가 다시 한 번 재현하자데. 그래서 예전처럼 서핑하고 이름 없는 바위도 오르다가 방금 돌아온 거요. 우리 회사 마케팅과 환경담당 부회장으로 있는 릭 리지웨이도 함께 했는데, 그는 두 명의 영화 프로듀서 중 한 명이지. 이번에 첨단기기로 찍은 영상을 그들은 영화관에 걸 욕심을 내더군.”
참 못 말리는 사람들의 조합이다. 칠순 취나드씨의 모험과 그것을 기록하러 다니는 사람. 자본주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언론에 오르내리는 영향력 있는 CEO가 노는(?) 방법이라니. 그렇게 바쁘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그동안 만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 미국에서 주목받는 사람이다. 물론 그가 이뤄놓은 등반 때문에 산악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의 ‘환경경영철학’이 새롭게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 분은 도대체 나이를 먹긴 한 건가?
릭 리지웨이도 꼭 만나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다. 리지웨이는 1978년 미국 최초로 K2를 등정한 산악인이자 유명한 기록 작가이며 사진가다. 내셔널지오그래픽지, ABC, NBC, ESPN 등 방송채널에 수많은 등반과 탐험 기록물을 제공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보다 그를 더 만나고 싶은 이유는, 선우중옥씨가 번역한 리지웨이의 책 「그들은 왜 히말라야로 갔는가」를 읽고 나서다. 1980년 10월 리지웨이는 취나드씨와 당시 내셔널지오그래픽지의 사진가이기도 한 친구 조나단 라이트(Jonathan Wright)와 티베트의 민야콩가(Minya Konka, 7556m) 원정을 간다. 등반 중 취나드씨는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고 라이트는 눈사태로 죽는다. 당시 라이트의 나이 28세, 취나드씨는 42세. 불교를 사랑했던 라이트에게는 16개월 된 딸 아시아(Asia)가 있었다. 산 많은 신비의 땅 아시아를 사랑하여 ‘아시아’라 이름 지었던 딸.
“리지웨이와 아시아는 잘 있습니까? 아시아는 한동안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면서요.”
“지금은 다 커서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내 딸과 친구이면서 선우중옥씨 딸과도 친구지. 잘 성장해줘 고맙게 생각합니다. 내가 일본 선불교에서 영향을 받았듯 리지웨이도 아시아도 불교를 좋아해요. 부회장 리지웨이는 명문 버클리대학에서 박사과정도 그만두고 나와 히말라야 원정을 떠날 만큼 등반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이 한 발자국 물러서 귀가 순해진다는 나이, 이순(耳順)을 거쳐 취나드씨는 고희(古稀)를 맞았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해도 하늘의 이치에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나이가 고희다. 그건 풍진 세상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 돌아갈 때를 기다린다는 은유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동양적 통념이 이본 취나드씨를 만나며 깨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현역으로 서핑과 클라이밍을 즐기는 취나드씨를 노인, 혹은 노익장이라 부를 수는 없다. 늙었다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꿈을 버렸을 때를 말한다는 것을,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며 확인할 수 있었다.
“작년 6월 일본 아사히신문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일본은 자주 가시나 보죠? 거기서는 한국이 지척인데 87년 이후 두 번째 방문을 안 하는 이유는?”
“일본은 자주 가지요. 3~4년마다 가는 편입니다. 큰 시장이니까요. 한국도 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군요. 한국의 열 번째 파타고니아 매장 오픈식에 함께 가자고 선우씨에게 말 했는데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화제는 자연스레 한국으로 이어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파타고니아라는 브랜드보다 이본 취나드라는 이름이 한국 산악계에서 더 유명하다. 그것은 45년 전인 1963년 9월, 인수봉에 낸 취나드A와 B 루트 때문이다. 선우중옥, 이강오씨 등과 함께 코스를 개척한 그는 주한미군으로 복무할 때였다. 깨끗하고 자연스러운 선으로 연결된 취나드A, B 두 코스를 개척하며 취나드는 그의 흔적을 한국에 영원히 각인시켜 놓았다. 누구나 취나드A 코스를 오른 사람은 안다. 특히 제4피치는 손발을 이용한 재밍과 스태밍 등 크랙등반 기술이 총동원 되고 밸런스가 바탕이 되는 코스다. 그때로부터 반백년 가까이 지났고, 장비도 눈부시게 발전되었으나 지금도 난이도가 높은 상급자 루트는 틀림없다.
“군대는 체질에 안 맞았지. 요세미티벨리에 거주하며 바위만 찾아 살 때는 베트콩 이름을 따서 ‘밸리콩’이라 불렸을 때니까요. 레인저 눈을 피해 암벽 틈이나 숲속에서 비박을 했기에 그런 별명이 생겼지요. 그런 자유분방한 삶에서 군대 강제 징집되어 한국에 오니 완전 죽을 맛이었습니다. 불량한 근무 태도 때문에 군대 영창도 갈 뻔 했고.”
산에 다니는 옷은 늘 엉망이었고 등산을 위해 외출허가를 받지 못하면 단식투쟁까지 벌이던 이 희대의 고문관은, 결국 변압기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는 한직으로 발령받는다.
“당시 인수봉 등반 상황은 어땠습니까? 지금은 80개가 넘는 루트가 개척되어 있는데요.”
“그래요? 놀라운 일이군요. 그나마 군대를 버티게 해준 것이 인수봉이었습니다. 휴전이 된지 십여 년밖에 안 되었으니 한국은 참 어려운 때였습니다. 장비도 귀한 때였지요. 인수봉을 본 후 미국에 연락하여 로프와 카라비너와 같은 등반장비를 한국으로 붙여왔습니다. 그것으로 한국 클라이머들과 길을 개척한 거지요.”
“당시 한국 등반 수준은 어떠했습니까.”
“인수봉엔 몇 명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 코스만 오르내리더군요. 내 눈엔 신루트를 엄청나게 만들 황금어장처럼 보였는데.”
그런 면에서, 그가 이듬해인 64년 제대를 한 것이 어쩌면 고마운 일인지도 모른다. 적성에 맞지 않는 군대를 떠난 게 그에게 기쁨이라면, 한국 산악인에게도 행운이 될지도 모르니까. 왜 그런가. 미국으로 돌아간 1964년, 프로스트(F.Frost), 로빈스(R.Robbins) 등과 함께 10일에 걸쳐 엘캐피탄의 노스 아메리카 월을 초등한다. 1965년엔 엘캐피탄의 뮤어 월도 8일 만에 초등을 해내고. 그것뿐일까. 마운틴 워트킨스 남벽, 피츠로이 남서벽, 마운틴 에디스 카벨 북벽과 테톤 산맥, 그리고 뉴욕의 샤왕겅스에서 그는 수많은 초등 기록을 양산해냈다. 그는 제대 후 서른다섯에 이미 미국에서 50개의 주목받는 초등을 기록했다. 북미 등반사를 쓴 크리스토퍼 존스는 취나드씨의 수많은 등반 가운데 캐나디언 로키의 에디스카벨(Edith Cavell) 1200미터의 북벽 등반과, 엘캐피탄의 뮤어 월 초등을 가장 두드러진 업적으로 꼽고 있다. 또한 요세미티 등반 역사를 기록한 스티브 로프의 책 「캠프4」에 의하면, 1957~59년, 17세인 그는 이미 주목받는 산악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인수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거벽을 대상으로 초등시대를 연 그가, 한국에 더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 무수한 취나드 길이 인수봉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미지의 등반을 좋아하는 그의 제대는, 북한산의 자존심 인수봉 개척시대를 원래 주인인 한국 클라이머들에게 돌려준 일도 될 법하기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당시 참 한국은 가난했습니다. 일본의 통치와 한국전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의 나라였으니까요. 인수봉은 미국에서 부쳐온 ‘골드라인’ 자일을 사용했었지요.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인데 음식 중엔 김치가 생각나는군요.”
김치라는 발음이 정확했다. 그러나 인수봉 등반과 김치 정도가 취나드씨가 기억하는 한국이라는 게 조금은 섭섭했다. 그의 책에서도 아주 단편적인 한국 기록 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내 생각은 투정일 수도 있다. 그는 지구를 무수히 쏘다니는 세계인이 아닌가.
이제 환경이라는 또 다른 산을 오르는 취나드
취나드씨는 주지하다시피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산악인 중 한 명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이뤄놓은 등반 업적뿐 아니라 산악계에 대한 끊임없는 헌신에 의해서다. 그는 현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산악인이므로 등반장비 개발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가난했던 시절 그는 자신의 작은 작업실에서 만든 장비를 픽업 뒤편에 실고 다니며 판매할 때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그 장비를 만들던 대장간을 보존하고 있는데, 한때 선우중옥씨가 그 공장 책임자이기도 했다. 선우씨는 취나드씨의 초청으로 71년 여름 도미했다. 부인 선우영옥씨 역시 취나드의 공장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경력이 있다. 선우씨 부부는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 산악인들과 자주 만났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취나드씨가 만든 등반장비가 한국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한국엔 매장도 없고 외환 관리법 때문에 수입할 수도 없던 취나드 상표가 한국 산악인하고 가까웠던 배경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못 말리는 이 노인의 모험에 대한 추구는 수직 암벽에만 묶이지 않는다. 카약이나 서핑보드도 전문가 수준이며 자신의 회사에서 직접 제작하고 있다.
“2007년 4월 경제 전문지 ‘포춘’ 표지 모델로 나온 걸 봤습니다. 친환경 경영으로 파타고니아를 운영한다는 기사에서 ‘이본 취나드씨는 인류 최고의 친구’라고 상찬했던데요.”
“공부 많이 하고 오셨군. 그 책, 별로 좋은 잡지는 아니요. 세계의 갑부들만 다루는 책 아니오? 재벌들에 비하면 작은 기업인 내가 나온 것은 아마 환경기업이라는 측면이 강했을 거요. 총 매출의 1퍼센트를 환경단체에 기부하는 점도 고려되었을 거고. 나와 뜻을 같이하는 기업이 미국에 이미 300개 회사가 훨씬 넘었어요.”
포춘지가 즐겨 다루는, 리 아이어코카, 도널드 드럼프, 잭 웰치 같은 재벌들은 취나드씨의 취향이 아니다. 돈 독 오른, 그 방면에서만 영웅시 되는 인물이라고 취나드씨는 그의 책에서 말한다. 그건 그가 별로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말과 같다. 포춘지에 따르면 그때까지 취나드씨가 환경단체에게 기부한 금액이 총 2천 7백만 달러였다.(하략... 본지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