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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출현품의 원성정각圓成正覺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은 입법계품과 함께 쌍벽을 이룬다. 여래의 출현은 정각의 성취를 근거한다. 이 글은 여래출현품의 십문 중에 일곱째 열 가지 무량한 성정각成正覺 문이다. 이를 “여래출현품의 원성정각”이라 제명했다. 청량국사의 견해에 따라 전문을 십문으로 나누었다. 이 글의 소제명은 아래와 같다.
1. 총명체상總明體相
2. 인현만기印現萬機
3. 체상심심體相甚深
4. 삼륜평등三輪平等
5. 인과교철因果交徹
6. 체리휴영體離虧盈
7. 상무증감相無增減
8. 용해동적用該動寂
9. 주어법계周於法界
10. 보변제심普遍諸心
11. 총결總結
12. 게송 6수
13. 설청전수說聽全收
14. 결어
1. 총명체상總明體相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응당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이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응당 알아야 한다. 여래는, 일체 경계에 관찰하는 바가 없고, 일체 법에 평등하여 의혹하는 바가 없으며, 이성二性이 없고, 체상도 없으며, 심행心行이 없고, 주지住止도 없으며, 한량이 없고, 변제도 없으며, 멀리 이변을 여의고 중도에 머무르며, 일체 문자나 언설을 벗어나는 곳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느니라.”(佛子 諸菩薩摩訶薩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成正覺 佛子 菩薩摩訶薩應知 如來成正覺 於一切義無所觀察 於法平等無所疑惑 無二無相 無行無止 無量無際 遠離二邊住於中道 出過一切文字言說)
해설: 이 초장의 제명은 총명체상이다. 정각 성취의 체상을 총괄하여 천명한다. 초발심시 변성정각이란 말이 있다. 통상 정각을 성취하는 주체는 일승보살이거나 대심범부이다. 그런데 어째서 보살은 여래 응공 정등각이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는가? 일승보살의 정각 성취와 다르기 때문이고, 또 여래의 출현경계를 알려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응당 알아야 한다.” 보살마하살이 제1문 전체 문장의 주어이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열 가지 문마다 모두 여래가 정각을 성취하는 곳이다. 여래는 첫째 일체 경계에 관찰하는 바가 없는 곳에서 정각을 성취하고, 열째 일체 문자나 언설을 벗어나는 곳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한다.
2. 인현만기印現萬機
“여래는 일체 중생의 심념으로 행하는 바 근성과 욕락 번뇌 염습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요점을 열거하여 말한다면, 여래는 일념 중에 삼세의 일체 제법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모두 알아야 하느니라.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대해가 사천하 중에 일체중생의 색신 형상을 두루 투영시켜 나타낼 수 있는 것과 같으며, 이 때문에 모두 일념을 대해로 삼는다고 말하느니라. 제불의 보리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일체중생의 심념이나 근성 욕락에서 두루 나투시지만 나투시는 바가 없느니라. 이 때문에 이름을 제불보리라 설하시니라.”(知一切衆生心念所行根性欲樂煩惱染習 舉要言之 於一念中悉知三世一切諸法 佛子 譬如大海普能印現四天下中一切衆生色身形像 是故共說以爲大海 諸佛菩提亦復如是 普現一切衆生心念根性樂欲而無所現 是故說名諸佛菩提)
해설: 대해는 만기를 투영시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인현만기라 한다. 일체중생의 심념을 만기로 보았다. “인현만기는 곧 해인삼매이다.”(印現萬機 即海印三昧) 나는 평소 직역을 원칙으로 삼고, 의역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문단은 부득이 의역했다. 직역하면 아래와 같다.
“일체 중생의 심념으로 행하는 바 근성과 욕락 번뇌 염습을 알아야 하느니라. 요점을 열거하여 말한다면, 일념 중에 삼세의 일체 제법을 모두 알아야 하느니라.”(知一切衆生心念所行根性欲樂煩惱染習 舉要言之 於一念中悉知三世一切諸法) 무슨 뜻인가? 모두 알면 그 결과는 또 어떠한가? 답이 없다. 앞 문단의 보살마하살이 이 문단의 주어이기도 하다. 이를 의거하여 해석하면 위 번역과 같다. “여래는 일체 중생의 심념으로 행하는 바 근성과 욕락 번뇌 염습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요점을 열거하여 말한다면, 여래는 일념 중에 삼세의 일체 제법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모두 알아야 하느니라.” 뜻이 명확하지 않는가? 앞 제1문은 법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밝혔고, 이 제2문에서는 비법에서 정각을 성취함을 밝혔다. 원각경도 또한 청정혜보살장에서 여래 경계를 설하고 있다. 아래와 같다.
“선남자야, 일체 장애가 곧 구경각이니, 정념과 망념이 해탈이 아님이 없고, 성법과 파법이 모두 열반을 일컬으며, 지혜와 우치가 죄다 반야가 되고, 보살과 외도가 성취한 법이 함께 보리이며, 무명과 진여가 다른 경계가 없고, 모든 계정혜와 음로치가 함께 범행이며, 중생과 국토가 한가지로 법성이고, 지옥과 천궁이 모두 정토가 되며, 유성과 무성이 가지런히 불도를 이루니, 일체 번뇌가 구경의 해탈이다. 법계해의 지혜로 조견하면 모든 형상이 마치 허공과 같다. 이를 여래의 수순각성이라 일컫느니라.”(善男子 一切障礙 即究竟覺 得念失念 無非解脫 成法破法 皆名涅槃 智慧愚癡 通爲般若 菩薩外道 所成就法 同是菩提 無明眞如 無異境界 諸戒定慧 及婬怒癡 俱是梵行 衆生國土 同一法性 地獄天宮 皆爲淨土 有性無性 齊成佛道 一切煩惱 畢竟解脫 法界海慧 照了諸相 猶如虛空 此名如來 隨順覺性)
법계해의 지혜로 모든 형상을 조견하면, 모든 형상이 마치 허공과 같다. 이는 총상이고, 나머지는 모두 별상이다. 별상 중에 첫째 일체 장애가 곧 구경각이고, 마지막 일체 번뇌가 구경의 해탈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일체 장애와 해탈이 곧 구경각이고, 일체 번뇌와 보리도 구경의 해탈이다. 장애와 번뇌가 같고, 구경각과 구경 해탈이 동의어이다. 그래서 중간의 9개 대구도 또한 모두 구경각이 되고 구경 해탈이 된다.
“선남자여, 다만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이 일체 시각에 머물러 망념을 일으키지 말고, 모든 망심에서 또한 가라앉혀 없애지도 말며, 망상 경계에 머물러 명백히 알려고 힘쓰지도 말고, 명백히 알려고 함이 없는 곳에서 진실을 변별하지도 말지니라. 저 모든 중생이 이 법문을 듣고서 신해하고 수지하며 두려움을 내지 않으면, 이것이 곧 청정각성을 수순하는 것이니라.”(善男子 但諸菩薩 及末世衆生 居一切時 不起妄念 於諸妄心 亦不息滅 住妄想境 不加了知 於無了知 不辨眞實 彼諸衆生 聞是法門 信解受持 不生驚畏 是則名爲 隨順覺性)
화엄경과 원각경의 경문이 모두 여래의 평등경계를 밝혔다. 둘째 인용 경문은 난해하다. 여기서 자세한 주석은 생략한다.
3. 체상심심體相甚深
불자여, 제불의 보리는 일체 문자로 선설할 수 없고, 일체 음성으로 미칠 수 없으며, 일체 언어로도 설할 수 없는 것이니라. 다만 응현하는 바를 따라 방편으로 열어서 보일 따름이니라.”(佛子 諸佛菩提 一切文字所不能宣 一切音聲所不能及 一切言語所不能說 但隨所應方便開示)
해설: 체상이 매우 깊고 깊다. 심심은 여래경계를 말한다. 이 문단의 해설은 유마경의 문수보살과 유마장자의 불이법문이 제격이다. 이전 글에서 자세히 밝혔기 때문에 생략한다. 일체 문자나 언설은 차치하고, 불음은 어떠한가? 능가아발다라보경은 전4권이 모두 오직 일체불어심품一切佛語心品 일품뿐이다. 상본화엄 1사천하미진수품을 일품으로 정의하면 아마도 불심품 또는 불음품이 아닐까 한다.
4. 삼륜평등三輪平等
“불자여, 여래 응공 정등각이 정각을 성취할 때, 일체중생 총량의 등신을 얻고, 일체 법 총량의 등신을 얻으며, 일체 국토 총량의 등신을 얻고, 일체 삼세 총량의 등신을 얻으며, 일체제불 총량의 등신을 얻고, 일체 언어 총량의 등신을 얻으며, 진여 총량의 등신을 얻고, 법계 총량의 등신을 얻으며, 허공계 총량의 등신을 얻고, 무애법계 총량의 등신을 얻으며, 일체 행원 총량의 등신을 얻고, 일체 덕행 총량의 등신을 얻으며, 적멸열반경계 총량의 등신을 얻느니라. 불자여, 얻은 등신과 같이 여래 언어와 불심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은 등량의 무량 무수의 청정한 삼륜을 얻느니라.”(佛子 如來應正等覺成正覺時 得一切衆生量等身 得一切法量等身 得一切刹量等身 得一切三世量等身 得一切佛量等身 得一切語言量等身 得眞如量等身 得法界量等身 得虛空界量等身 得無礙界量等身 得一切願量等身 得一切行量等身 得寂滅涅槃界量等身 佛子 如所得身 言語及心亦復如是 得如是等無量無數清淨三輪)
해설: 불신과 불어 그리고 불심을 삼륜이라 일컫고, 이 삼륜이 모두 각 등량과 같아서 무량 무수 등 아승지수에 이르기 때문에 구경에 평등하며, 이에 삼륜평등이라 한다. “일체중생 총량의 등신을 얻는다.” 등신等身은 자기 신체의 키나 무게 생김새 등이 똑같은 형상을 말한다. 일체중생 총량이 곧바로 등신이다. 일체 등신이 모두 그러하다.
5. 인과교철因果交徹
“불자여, 여래가 정각을 성취할 때, 그 불신 안에서 일체중생이 정각을 성취함을 두루 보고, 더 나아가서 일체중생이 열반에 들어감을 두루 보는 것이니, 모두 동일한 체성이며, 이른바 체성이 없느니라. 어떤 체성이 없는가? 이른바 상성이 없고, 진성도 없으며, 생성이 없고, 멸성도 없으며, 아성이 없고, 무아성도 없으며, 중생성이 없고, 무중생성도 없으며, 보리성이 없고, 법계성도 없으며, 허공성이 없고, 또한 정각을 성취하는 체성도 없느니라. 일체 법이 모두 체성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에 일체지를 얻고, 대비로 연이으며, 중생을 제도하느니라.”(佛子 如來成正覺時 於其身中普見一切衆生成正覺 乃至普見一切衆生入涅槃 皆同一性 所謂 無性 無何等性 所謂 無相性無盡性 無生性無滅性 無我性無非我性 無衆生性無非衆生性 無菩提性無法界性 無虛空性 亦復無有成正覺性 知一切法皆無性故 得一切智 大悲相續 救度衆生)
해설: 세상에는 알고 보면 재미있는 일이 많다. 이 교철交徹을 사전에서 찾기 어렵고, 보통 사무칠 철徹이라 말하는데, 철徹 자에는 사무치다는 뜻이 없다. 꿰뚫다, 통하다, 관통하다, 막힘이 없이 트이다, 밝다, 환하다, 통철하다 등의 뜻이 있다. 이에 인과가 서로 관통하는 것을 인과교철이라 한다. 확연무성廓然無聖의 확연과 확철대오廓徹大悟의 확철은 동의어이다.
“여래가 정각을 성취할 때, 그 불신 안에서 일체중생이 정각을 성취함을 두루 보고, 더 나아가서 일체중생이 열반에 들어감을 두루 보는 것이니, 모두 동일한 체성이며, 이른바 체성이 없느니라.” 이는 무슨 뜻인가? 여래가 정각을 성취할 때, 그 불신 안에서 일체중생이 팔상으로 성도하는 것을 말한다.
무상정각을 성취할 수 있는 중생은 단지 두 부류뿐이다. 일승보살과 대심범부이다. 이승과 삼승보살은 회심하지 않으면 무상정각을 성취할 수 없다. 이 일승보살 또는 대심범부가 정각을 성취할 때, 찰나제삼매에 들어가며, 이 삼매는 고금이 없고 삼세가 없기 때문에 과거 항하사불찰미진수 부처님과 현재 그리고 미래 항하사불찰미진수 부처님과 함께 일시 성불하는 것이다. 불신 안과 삼매라는 표현만 다를 뿐이요, 그 대의는 다르지 않다. 이를 인과교철이라 한다.
별교에 설청사구說聽四句가 있다. 첫째 유설무청唯說無聽이고, 둘째 유청무설唯聽無說이며, 셋째 설청쌍존說聽雙存이고, 넷째 설청쌍적說聽雙寂이다. “설청쌍존은 이른바 중생과 부처가 서로 그 가운데 존재하여 각각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며, 곧 인과가 교철하여 어떤 성교를 따르더라도 모두 서로 두 마음 가운데 있다. 이 때문에 중생심 중에 부처가 불심 중에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불심 중에 중생은 바로 중생심 중에 부처의 설법을 듣는다.”(說聽雙存 謂衆生與佛互在 各實而不虛 則因果交徹 隨一聖敎 全在二心 故衆生心中之佛爲佛心中之衆生而說法 佛心中之衆生則聽衆生心中之佛說法)
이를 인과교철이라 한다. 전재이심全在二心 앞에 청량국사의 화엄경소는 수일성교隨一聖敎로 되어 있지만, 보현행원품별행소초는 수일성불隨一成佛로 되어 있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인과교철은 그 경계에 사구가 있다.(因果交徹 義有四句)
첫째는 중생이 전부 불심 중에 있는 연고이니, 곧 과문이 법을 남김없이 섭수한다. 그러므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를, “여래가 정각을 성취할 때, 그 불신 안에서 일체중생이 정각을 성취함을 두루 보고, 더 나아가서 일체중생이 열반에 들어감을 두루 보았느니라.”라고 하였고, 또 불성론 제2권 여래장품에서도 이르기를, “일체중생은 다 여래의 지혜 안에 있기 때문에 명칭을 장藏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모든 불심 안에서 중생이 부처가 된다.”라고 한 것이다.(一衆生全在佛心中故 即果門攝法無遺 故出現品云 如來成正覺時 於其身中普見一切衆生成正覺 乃至普見一切衆生般涅槃 又佛性論第二如來藏品云 一切衆生悉在如來智內 故名爲藏也 故云諸佛心內衆生作佛也)
둘째는 부처가 중생심 중에 있는 연고이니, 곧 인문이 법을 남김없이 섭수한다. 그러므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를, “보살마하살은 자기 마음의 염념에 항상 부처가 정각을 성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제불 여래도 이 마음을 떠나지 않고 정각을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자기 마음과 같이 일체중생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으니, 모두 여래가 정각을 성취하고 있느니라.”라고 하였다.(二佛全在衆生心中故 即因門攝法無遺 故出現品云菩薩應知自心念念常有佛成正覺 何以故 諸佛如來不離此心成正覺故 如自心一切衆生心亦復如是 悉有如來成等正覺也)
셋째는 앞의 중생과 부처가 서로 그 가운데 있을 때 각각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니, 곧 인과가 교철하여 어떤 성불을 따르더라도 모두 서로 두 마음 가운데 있다.(三由前生佛互相在時 各實非虛 則因果交徹 隨一成佛 全在二心)
넷째는 중생이 완전히 부처에 있으면 곧 부처와 동일하여 중생이 없고, 부처가 완전히 중생에 있으면 바로 중생과 동일하여 부처가 없다. 양자가 서로 형상을 빼앗으면 두 지위가 가지런히 원융하며, 그러면 성불하거나 성불하지 못함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를, “비유하면 허공은 일체 세계가 이렇게 성주하고 이렇게 괴공해도 언제나 증감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허공은 생멸이 없기 때문이니라. 제불보리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만일 정각을 성취하거나 정각을 성취하지 못해도 또한 증감이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제불보리는 체상이 없고 체상이 없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가령 어떤 사람이 항하사 등량의 마음을 화작하고, 낱낱 마음마다 다시 항하사 등량의 부처를 화작할 수 있는데, 모두 형체도 없고 체상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항하사 등량의 겁수가 다하도록 쉴 때가 없느니라. 불자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저 사람이 화작한 마음과 화작한 부처는 도합 얼마나 되겠는가?”
여래성기묘덕보살이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인자가 말씀하신 뜻을 파해한다면, 화작함과 화작하지 않음은 평등하여 다름이 없는데, 어째서 ‘도합 얼마나 되겠는가?’라고 질문하시는가?”
보현보살이 말씀하셨다. “옳고 옳도다. 불자여, 그대가 말씀한 바와 같도다. 설령 일체중생이 일념 사이에 모두 정각을 성취할지라도 정각을 성취하지 못함과 더불어 평등하여 다름이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보리는 체상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체상이 없다면 바로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느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정등각을 성취함이 보리의 일상무상과 같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해석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총괄하면, 단지 반복하여 서로 대대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구가 있지만, 대지大旨는 인과교철에 불과할 따름이다. 또한 글과 같이 보아도 좋다. 단지 중생이 성불하는 경계뿐이라 마음에서 인가하기가 어렵다. 간략히 묻고 답한다.(四由生全在佛 則同佛非生 佛全在生 則同生非佛 兩相形奪 二位齊融 則無成佛及不成佛 故出現品云“譬如虛空 一切世界若成若壞常無增減 何以故 以虛空無生滅故 諸佛菩薩亦復如是 若成正覺不成正覺 亦無增減 何以故 菩提無相無非相故 佛子假使有人能化作恆河沙等心 一一心復化作恆河沙等佛 皆無形無相 如是盡恆河沙等劫無有休息 佛子於汝意云何 彼人化心化作如來凡有幾何 如來性起妙德菩薩言 如我解於仁所說義 化與不化等無有異 云何問言凡有幾何 普賢菩薩言 善哉善哉 佛子 如汝所說 設一切衆生於一念中悉成正覺 與不成正覺等無有異 何以故 菩提無相故 若無有相則無增減 佛子 菩薩摩訶薩應如是知 成等正覺同於菩提一相無相” 釋曰 上來但以反覆相對 故有四句 而大旨不過因果交徹 亦可如文而見也 但衆生成佛之義 難以忍可於心 略爲問答)
문: “이 중에 성불은 사상事相을 준거한 성불인가? 이성理性을 준거한 성불인가? 만일 사상을 준거한 성불이라면 어떻게 마음과 경계가 동일한 체성이기 때문이라 했는가? 만일 이성을 준거한 성불이라면 어떻게 정각을 성취하고 열반에 들어가는가?”(問 此中成佛爲約事成爲約理成 若約事成 云何同性故 若約理成 云何成正覺入涅槃耶)(良以心境同一性故)
답: “이는 화엄의 대강이다. 만일 제종과 대비하지 않으면 해석하기 어려우며, 이에 오승과 오교를 준거하여 심천을 변별하겠다. 모든 중생이 만일 인천교 중에서 심천을 보면 인아와 법아를 구족하고, 만일 소승교 중에서 보면 단지 오온의 실법뿐이라 본래 무아이며, 만일 대승시교 법상종이면 곧 유식소현이라 설하고, 만일 무상종이면 바로 환유즉공이나 인법구견이라 설하며, 만일 대승종교이면 오직 여래장만이 항사성덕을 구족할 뿐이며, 그러므로 중생이 곧 재전법신이다. 법신과 중생은 경계는 동일하지만 명칭은 다르니, 또한 이성을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만일 대승돈교이면 곧 체상이 본래 저절로 다하고 이성이 본래 저절로 나타나니, 성불하거나 성불하지 못함을 설할 수 없다. 만일 차종의 화엄을 의거하면 구래로부터 정각을 성취하고 또한 열반하지만, 동체를 준거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성불하면 바로 저것이 성불하기 때문이다.”(答 此是華嚴大節 若不對諸宗難以取解 今約五乘及五教而辨淺深然 諸衆生若於人天教中觀之 具足人法二我 若於小乘教中觀之 但是五蘊實法 本來無我 若大乘始教法相宗 則說唯識所現 若無相宗 則說幻有即空人法俱遣 若大乘終教 唯如來藏具恆沙性德 故衆生即在纏法身 法身衆生義一名異 猶據理說 若大乘頓教 則相本自盡性本自現 不可說言成佛不成佛等 若依此宗華嚴 舊來成正覺 亦涅槃竟 非約同體 此成即是彼成也)
문: “만일 그러하다면 무슨 까닭으로 현재 있는 중생이 바로 부처가 아닌가?”(難曰 若爾 何故現有衆生非即佛耶)
답: “만일 중생위를 취하고 보는 이는 오히려 유심이 곧 공적함을 보지 못하는데 어찌 원교 중의 사상을 보겠는가? 마치 사람이 동쪽을 서쪽이라 미혹하면 바로 서쪽을 집착하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정견情見을 단박에 최파하면 곧 법계가 두렷이 나타나서 이미 성불하지 않음이 없으며, 또한 저 오인悟人은 서쪽 처소가 모두 동쪽인 것과 같다.”(答 若就衆生位看者 尚不見唯心即空 安見圓教中事 如人迷東爲西 正執西故 若諸情頓破 則法界圓現 無不已成 猶彼悟人 西處全東)
문: “만일 그러하다면 제불은 어째서 다시 교화하는가?”(又難 若爾 諸佛何以更化)
답: “중생이 이와 같이 알지 못한 소이로 반드시 교화하고, 이와 같이 교화하는 이는 구경의 교화이며, 이와 같이 교화하는 이는 교화하지 않은 때가 없으니, 그러므로 아래 결어로 이르기를, ‘대비로 연이으며 중생을 제도하느니라.’라고 한 것이다. 오교가 동일하지 않지만 모두 성언량이며, 성교는 정식을 취하여 설할 수 없는 것이다.”(答 衆生不如是知所以須化 如是化者爲究竟化 如是化者無不化時 故下結云 大悲相續救度衆生 五教不同 皆聖言量 不可將教就情識說)
6. 체리휴영體離虧盈
“불자여, 비유하면 허공은 일체 세계가 이렇게 성주하고 이렇게 괴공해도 언제나 증감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허공은 생멸이 없기 때문이니라. 제불보리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만일 정각을 성취하거나 정각을 성취하지 못해도 또한 증감이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제불보리는 체상이 없고 체상이 없는 것도 없으며, 일상도 없고 종종상도 없기 때문이니라.”(佛子 譬如虛空 一切世界若成若壞 常無增減 何以故 虛空無生故 諸佛菩提亦復如是 若成正覺不成正覺 亦無增減 何以故 菩提無相無非相 無一無種種故)
해설: 휴영의 원의는 달이 이지러지고 가득 차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기세간의 성주괴공을 달의 휴영에 비유한 것이다. 제불보리의 체상은 휴영을 여의었기 때문에 체리휴영이라 한다.
체상이 휴영을 여읨은 위 무상을 해석한 것이다. 허공은 생멸이 없기 때문에 체상에 증감이 없다. 보리도 체상이 없으니 보리를 성취해도 오히려 다르지 않다.(體離虧盈 釋上無相 虛空無生故 體無增減 菩提無相 成不寗殊) 성불녕수成不寗殊는 성령불수成寗不殊와 같다. 성成은 주어이고, 녕寗은 부사이며, 불수不殊는 형용사이다. 문장의 구조가 좀 어렵다.
7. 상무증감相無增減
“불자여, 가령 어떤 사람이 항하사 등량의 마음을 화작하고, 낱낱 마음마다 다시 항하사 등량의 부처를 화작할 수 있는데, 모두 빛깔이 없고 형체도 없으며 체상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항하사 등량의 겁수가 다하도록 쉴 때가 없느니라. 불자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저 사람이 화작한 마음과 화작한 부처는 도합 얼마나 되겠는가?”
여래성기묘덕보살이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인자가 말씀하신 뜻을 파해한다면, 화작함과 화작하지 않음은 평등하여 다름이 없는데, 어째서 ‘도합 얼마나 되겠는가?’라고 질문하시는가?”
보현보살이 말씀하셨다. “옳고 옳도다. 불자여, 그대가 말씀한 바와 같도다. 설령 일체중생이 일념 사이에 모두 정각을 성취할지라도 정각을 성취하지 못함과 더불어 평등하여 다름이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보리는 체상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체상이 없다면 바로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느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정등각을 성취함이 보리의 일상무상과 같음을 알아야 하느니라.”(佛子 假使有人能化作恒河沙等心 一一心復化作恒河沙等佛 皆無色無形無相 如是盡恒河沙等劫無有休息 佛子 於汝意云何 彼人化心 化作如來 凡有幾何” 如來性起妙德菩薩言 “如我解於仁所說義 化與不化等無有別 云何問言凡有幾何” 普賢菩薩言 “善哉善哉 佛子 如汝所說 設一切衆生 於一念中悉成正覺 與不成正覺等無有異 何以故 菩提無相故 若無有相 則無增無減 佛子 菩薩摩訶薩應如是知成等正覺同於菩提一相無相)
해설: 제불보리의 체상은 증감이 없기 때문에 상무증감이라 한다. 상무증감은 위 무행無行을 해석한 것이다. 담연하여 다름이 없는데, 행동한들 어찌 자리가 바뀔 수 있을까? 처음 비유를 들어 문답했다. 화현하여 형체가 없는 것은 정각을 성취함이 다르지 않음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화작한 마음이 많은 것은 닦을 인이 많음을 비유한 것이다. 화작하여 정각을 성취함이 많은 것은 증득한 과가 많음을 비유한 것이다.(相無增減 釋上無行 湛然不異 行豈能遷 初舉喻問答 以化現無形 喻成不莫異 化多心者 喻修多因 化成多佛 喻證多果)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정등각을 성취함이 보리의 일상무상과 같음을 알아야 하느니라.”(佛子 菩薩摩訶薩應如是知成等正覺同於菩提一相無相)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무상정등정각이고, 삼먁삼보리가 정등정각인데, 이를 정등각 또는 등정각이라 한다. 그리고 삼보리가 정각이고, 보리가 각이다. 그러면 등정각이 보리와 다르지 않다. “정등각을 성취함이 보리와 같아서 일상무상인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라는 역문보다 위 번역이 더 좋다. 곧 성취가 일상무상이다. 그렇다면 일상과 무상은 무엇인가?
“이 법문과 같이 부처는 세간에 출현함이 없고 또한 열반함도 없으니, 본법에 의지하고 정교情敎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법에 의지하는 이는 곧 출입이 없고, 권학에 의지하는 이는 바로 세간의 출현과 열반에 들어감을 설한다. 처음 발심한 십주의 수위로 좇아서 삼매의 위력으로 삼세와 찰나에 계합하니, 삼세가 일제이고, 제법이 일미이며, 해탈과 열반이 상주 적멸한 일미이다. 다시는 시종이 없고, 인과가 일제이며. 제성이 일성이고, 제지는 일지이며, 제상이 일상이고, 제행이 일행이며, 삼세가 일념이고, 일념이 삼세이며, 더 나아가 십세이다. 이와 같은 등류의 법이 자재하고 무애하다. 이 경의 법문은 무시무종이라 명칭을 상전법륜이라 한다. 이 때문에 이 경의 교문은 본법을 의지하여 안립하고 상상근기에 대비하였으며, 본법에 의지하여 일제가 되니 시종을 건립할 수 없느니라.”(如此法門佛不出世 亦無涅槃 爲依本法非情教故 依本法者 即無出入 依權學者 即說出世入般涅槃 從初發心十住之首 以三昧力頓印三界[三世] 三世一際諸法一味 解脫涅槃常寂滅味 更無始終 因果一際 諸性一性 諸智一智 諸相一相 諸行一行 三世一念 一念三世 乃至十世 如是等法自在無礙 此經法門無始無終 名爲常轉法輪 是故此經教門 依本安立以備大根 依本一際不立始終)
위 원문 중에 돈인삼계(頓印三界)는 돈인삼세(頓印三世)가 옳은 듯하다. 삼승법문은 팔상성도의 차제가 있지만, 이 일승법문은 팔상마다 각각 팔상이 있어서 64상이 있고, 전전하면 미진수상이 있다. 그러므로 “이 경의 법문은 무시무종이라 명칭을 상전법륜이라 한다.”라고 한 것이다. 초발심시 변성정각이다. 십신만심이 초발심주이고, 십주초위에 찰나제삼매로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한다. 이 찰나제삼매가 바로 일념이다. 이 일념을 달리 표현하면 일제라 말하고, 또는 일미라 말하며, 다시 일성 일지 일상 일행 등이라 말할 수 있다. 일체법이 이를 여의지 않는다. 일상의 경계가 또한 이와 같다.
“만법은 일미에 귀착한다. 일미는 어느 곳에 귀착하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 통상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가?”라고 말한다. 오십보백보이다. 단지 위 인용문 중에 “제법은 일미이다.”(諸法一味)라는 구절이 있어서 일기지사로 썼을 뿐이다. 제법과 만법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만법은 일미에 귀착한다.” 이는 “제법은 일미이다.”라는 말과 그 경계가 동일하다. 일승법문이다. “일미는 어느 곳에 귀착하는가?” 선문염송 제일칙이다. “세존은 도솔천을 아직 떠나지 않고 이미 왕궁에 하강하시고, 여전히 모태를 벗어나지 않고 중생을 제도해 마치셨느니라.”(世尊未離兜率 已降王宮 未出母胎 度人已畢)
도솔천 내원궁에서 팔상으로 성도하시고, 또한 모태에서도 팔상으로 성도하신다. 그러므로 내원궁에서 중생을 제도해 마칠 수도 있고, 모태에서 왕궁에 하강하실 수도 있다. 화엄에서는 상식이지만, 선문은 이를 공안이라 한다.
“일미는 어느 곳에 귀착하는가?”
“무미이다.”
일미는 무미와 대대하고, 일제는 무제와 대대하며, 일성 일지 일상 일행 일념 등도 또한 무성 무지 무상 무행 무념과 대대한다. 일미가 귀착하는 곳을 찾지 말라. 귀착할 곳이 없다. 무미이다. 일미는 어느 곳에 귀착하는가?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가? 그 질문에서 패궐처를 잡아내면 어떻게 답해도 또한 옳다. 일상무상의 경계가 또한 이와 같다.
훼손할 수도 없고 찬탄할 수도 없도다.
체상이 허공과 같아서 궁극이 없느니라.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맑고 깨끗하다.
찾아보라, 그대는 찾아볼 수 없음을 알 것이다.
不可毁 不可讚 體若虛空勿涯岸 不離當處常湛然 覓則知君不可見
이 일상은 훼손해도 지구 위에 먼지 하나를 없애는 것과 같고, 찬탄해도 또한 먼지 하나를 보태는 것과 같다. 그 체상이 허공과 같다. 허공이 어떠하기에 허공과 같다고 했을까? 막힘이 없이 훤히 트여 환하다. 환하지만 또한 그 끝이 없다. 넓게 보면 이와 같지만, 좁게 보면 어떠한가? 당처 곧 그 자리는 시간과 공간으로 딱 한정할 수 없다. 찰나와 같고 인허와 같다. 당처가 바로 일상이고 일념이다. 이를 여의지 않고 항상 그 묘용을 드러낸다. 담연하다. 명철明徹하다. 밝고 환하다. 이 경계를 찾아보겠느냐? 취할 수 없고, 얻을 수 없으며,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찾지 말지니라.
8. 용해동적用該動寂
“여래가 정각을 성취할 때, 일상방편을 써서 선각지삼매에 들어가셨느니라. 들어간 다음에 하나의 정각을 이룬 광대한 불신에서 일체중생수의 등신을 나투고 불신 가운데 머무시니라. 마치 하나의 정각을 이룬 광대한 불신과 같이, 일체 정각을 이룬 광대한 불신도 모두 또한 이와 같으니라. 불자여, 여래는 이와 같은 등 한량없는 정각을 성취한 문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응당 알아야 하나니, 여래가 나투시는 불신은 한량이 없느니라. 한량이 없기 때문에 여래 불신이 한량없는 법계가 되고 중생계와 동등하다고 설하시니라.”(如來成正覺時 以一相方便入善覺智三昧 入已 於一成正覺廣大身 現一切衆生數等身住於身中 如一成正覺廣大身 一切成正覺廣大身悉亦如是 佛子 如來有如是等無量成正覺門 是故應知如來所現身無有量 以無量故 說如來身爲無量界等衆生界)
해설: 첫째 의거하는 삼매를 제시했다. 정각은 적정에 침체하지 않기 때문에 선각이라 일컫고, 그 일상을 깨달았기 때문에 묘용이 방편이다. 둘째 들어간 다음에 이하는 일신의 묘용을 드러낸 것이다. 이미 일상을 방편으로 삼으면 곧 두두물물이 모두 일상이며, 이 때문에 일신에서 다신을 출현하는 것이다.(一舉所依三昧 覺不滯寂 故名善覺 覺彼一相故 用爲方便 二入已下 顯一身之用 既以一相爲方便 則物皆一相 故一即現多)
묘용이 동용動容과 적정을 겸유하여 용해동적이라 한다. 둘이 있으면 비교 대상이 되어 차별상을 드러낸다. 하나는 절대 평등하여 차별상이 없다. 일상이 그러하다. 반야란 여여를 통달한 지혜의 혜이고, 방편이란 권도를 통달한 지혜의 지이다. 반야는 실지이고 방편은 권지이다. 권지로 평등한 실지에서 현현한 차별상을 관조하는 것이다. 방편삼매는 그 용처가 찰나제삼매와 같다.
“십신종심에 곧 방편삼매로 무명 십이유지를 통달하고 이지대비를 성취한다.”(十信終心 即以方便三昧達無明十二有支 成理智大悲)“이와 같이 경의 십신 중에 자기 마음과 시방의 제불이 성상과 대지혜에 차별이 없는 체성을 철두철미하게 믿고, 십주초심에 방편삼매를 닦은 위력으로 견도한다. 초발심주로부터 이상 십주위가 모두 견도위가 되고, 십행과 십회향 십지는 모두 가행위가 되고, 모두 자량위가 되는 것이다.”(如此經十信之中 全信自心與十方諸佛 性相大智無差別體 十住初心 以修方便三昧力見道 從初發心住及已上諸住 總爲見道之位 十行十迴向十地總爲加行 總爲資糧)
일상방편은 절대 평등한 경계 곧 무상정등정각에 들어가는 방편지를 말한다. 그러면 선각지삼매는 어떠한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로 여래력을 성취했느니라. 무엇 무엇이 열 가지가 되는가? 이른바 일체 중마의 번뇌업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여래력을 성취했고, 일체 보살행을 구족하고 일체 보살의 삼매문에 유희했기 때문에 여래력을 성취했으며, 일체 보살의 광대한 선정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력을 성취했고, 일체 청정한 조도법을 원만하게 하였기 때문에 여래력을 성취했으며, 일체법의 지혜광명을 얻고 잘 사유하며 분별하였기 때문에 여래력을 성취했고, 그 화신이 일체 세계에 두루하였기 때문에 여래력을 성취했으며, 나오는 말소리가 모두 일체 중생심과 평등하였기 때문에 여래력을 성취했고, 신력으로 일체를 가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래력을 성취했으며, 삼세제불의 신업 어업 의업과 더불어 평등하여 다름이 없고 일념 중에 삼세법을 통달하였기 때문에 여래력을 성취했고, 선각지삼매를 얻었으므로 여래의 십력을 구족하였느니라. 이른바 바로 처비처지력과 더 나아가 누진지력이며, 이 때문에 여래력을 성취했느니라. 이것이 열 가지 여래력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십력을 구족하면 바로 여래 응공 정등각이라 일컫느니라.”(佛子 菩薩摩訶薩有十種成如來力 何等爲十 所謂 超過一切衆魔煩惱業故 成如來力 具足一切菩薩行 遊戲一切菩薩三昧門故 成如來力 具足一切菩薩廣大禪定故 成如來力 圓滿一切白淨助道法故 成如來力 得一切法智慧光明 善思惟分別故 成如來力 其身周遍一切世界故 成如來力 所出言音悉與一切衆生心等故 成如來力 能以神力加持一切故 成如來力 與三世諸佛身語意業等無有異 於一念中了三世法故 成如來力 得善覺智三昧 具如來十力 所謂 是處非處智力乃至漏盡智力 故成如來力 是爲十 若諸菩薩具此十力 則名如來應正等覺)
“일체 보살의 광대한 선정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십력을 성취했고,”(具足一切菩薩廣大禪定故) 라는 역문이 옳고, “일체 보살의 광대한 선정을 구족하고자 했기 때문에 여래력을 성취했고,”라는 번역은 옳지 않다.
오직 여래만이 홀로 열 가지 지력을 구족하기 때문에 이를 십력十力 또는 여래십력如來十力이라 한다. 첫째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이고, 둘째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이며, 셋째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이고, 넷째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이며, 다섯째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이고, 여섯째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이며, 일곱째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이고, 여덟째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이며, 아홉째 사생지력死生智力이고, 열째 누진지력漏盡智力이다. 이를 의거하면 선각지삼매 등을 의거하여 여래십력을 성취한다. 곧 선각지삼매는 여래십력을 성취하는 열 가지 방편문 중에 하나이다.
일념에 두루 한량없는 겁을 관찰하시니
가고 옴이 없으며 또한 머무름도 없도다.
이와 같이 삼세의 일을 분명히 아시므로
모든 방편을 뛰어넘어 십력을 성취했도다.
一念普觀無量劫 無去無來亦無住 如是了知三世事 超諸方便成十力
선각지삼매로 십력을 성취하니 선각지삼매가 곧 일념이고, 일념으로 십력을 성취하니 일념이 바로 선각지삼매이다. 일상방편도 또한 이와 같다.
9. 주어법계周於法界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응당 여래신의 한 털구멍 속에 일체중생수 등량의 제불의 화신이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정각을 성취한 불신은 필경 생멸이 없기 때문이니라. 마치 한 털구멍마다 불신이 법계에 두루하는 것과 같이, 일체 털구멍에도 모두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응당 조그마한 분량에도 불신이 전혀 없는 곳은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정각을 성취한 불신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 능력을 따르고 그 세력을 따르며 정각도량의 보리수 아래 사자좌 위에서 갖가지 화신으로 등정각을 성취하시니라.”(佛子 菩薩摩訶薩應知如來身一毛孔中 有一切衆生數等諸佛身 何以故 如來成正覺身究竟無生滅故 如一毛孔遍法界 一切毛孔悉亦如是 當知無有少許處空無佛身 何以故 如來成正覺 無處不至故 隨其所能 隨其勢力 於道場菩提樹下師子座上 以種種身成等正覺)
해설: 여래가 정각을 성취한 불신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이 두루 있기 때문에 주어법계라 한다.
10. 보변제심普遍諸心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자기 마음의 염념에 항상 부처가 정각을 성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제불 여래도 이 마음을 떠나지 않고 정각을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자기 마음과 같이 일체중생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으니, 모두 여래가 정각을 성취하고 있느니라. 넓고 크게 두루 미쳐서 있지 않은 곳이 없고, 여의지 아니하고 단절하지 아니하며 쉴 때가 없이, 부사의한 방편법문에 들어가느니라.”(佛子 菩薩摩訶薩應知自心念念常有佛成正覺 何以故 諸佛如來不離此心成正覺故 如自心 一切衆生心亦復如是 悉有如來成等正覺 廣大周遍 無處不有 不離不斷 無有休息 入不思議方便法門)
해설: 여래의 정각 성취가 일체중생의 마음에 두루하기 때문에 보변제심이라 한다.
11. 총결總結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여래가 정각을 성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佛子 菩薩摩訶薩應如是知如來成正覺)
해설: 총결은 곧 최후 불자 이하이니, 이를 의거하여 알 수 있게 한다. 앞 십문을 비추어보면 유현하여 궁극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 이를 여읜다면 어디에 진보리가 있겠느냐?(總結 即最後佛子 令依此知 映前十門 無幽不盡 離此何有眞菩提耶)
12. 게송 6수
이때 보현보살마하살이 이 뜻을 거듭 천명하고자 하여 게송을 설하셨느니라.(爾時 普賢菩薩摩訶薩欲重明此義而說頌言)
정각을 성취하여 일체 법을 분명히 아시니,
둘도 없고 둘을 여의나니 모두 평등하도다.
자성이 청정하여 허공과 같으니,
나와 나 아닌 것에 분별하지 않느니라.
正覺了知一切法 無二離二悉平等 自性清淨如虛空 我與非我不分別
마치 해인과 같이 중생신을 나투시니,
이로써 그것을 대해로 여긴다고 설하시니라.
보리로 모든 심행에 널리 계합하시니,
이 때문에 이름을 정각이라 설하시니라.
如海印現衆生身 以此說其爲大海 菩提普印諸心行 是故說名爲正覺
비유하면 세계에 성주괴공이 있지만,
허공은 더하거나 덜하지 않느니라.
일체 제불이 세간에 출현하시지만,
보리는 일상이면서 언제나 무상이니라.
譬如世界有成敗 而於虛空不增減 一切諸佛出世間 菩提一相恒無相
가령 사람이 마음을 화작하고 부처를 화작하지만,
화작하고 화작하지 않은 그 체성은 다름이 없도다.
일체 중생이 정각보리를 성취하지만,
성취함과 성취하지 못함에 증감이 없느니라.
如人化心化作佛 化與不化性無異 一切衆生成菩提 成與不成無增減
부처님은 삼매가 있는데 선각지라 일컫고,
보리수 아래에서 이 선정에 들어가셨느니라.
일체중생수 등량의 한량없는 광명을 놓으시니,
수많은 중생을 깨우치심이 연꽃이 피어남과 같으니라.
佛有三昧名善覺 菩提樹下入此定 放衆生等無量光 開悟群品如蓮敷
마치 삼세겁의 세계 중생수와 같이,
심념과 근욕이 있는 바이니라.
이와 같은 수의 등신을 모두 나투시니,
이 때문에 정각을 한량없다고 일컫느니라.
如三世劫刹衆生 所有心念及根欲 如是數等身皆現 是故正覺名無量
해설: 게송은 6수가 있는데 앞에 십문을 칭송했다. 초수와 제2수는 차례로 초문과 제2문을 칭송했고, 다음 3수(제3~5수)는 차례로 6문과 7문 8문을 칭송했으며, 마지막 1수는 제4문과 5문 9문 10문을 함께 칭송했으니, 한가지로 무량한 경계를 두루 나타냈기 때문이며, 그 제3문은 오로지 이언을 드러냈기 때문에 생략하고 칭송하지 않은 것이다.(偈有六 頌前十門 初二次第頌初二門 次三如次頌六七八 後一通頌四五九十 以同是普現無量義故 其第三門但顯離言 故略不頌)
13. 설청전수說聽全收
설청전수는 설청전섭說聽全攝이라 말하기도 한다. 설자說者와 청자聽者가 전부 완전히 다 섭수攝收한다. 설자는 청자를 전부 섭수하고, 청자는 설자를 다 섭수한다. 섭취하고 나서 흡수하는 것을 섭수라 한다. 설자와 청자가 서로 동화되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설청전수는 화엄경소 제3권에 있다. 여래출현품의 위 제5문 인과교철은 그 내용이 설청전수와 동일하다. 그리고 제5문의 인과교철은 보현행원품별행소에도 있는데 후반에 문답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를 제5문에서 인용하고 해석했다.
화엄경소 제3권에 있는 설청전수 전문을 이 글에 첨부한 이유는 무엇인가? 설청전수의 4구를 증명하는 인용문이 대부분 여래출현품 중에 성정각장의 이 글이기 때문이며, 성정각장의 요지가 바로 설청전수이기 때문이다. 설청전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둘째 설청전수는 두 가지로 사구가 된다.(第二說聽全收成二四句)
하나는 동교를 준거하여 사구가 된다.(둘은 별교를 준거하여 사구를 천명한다.) 이른바 첫째는 부처의 진심 밖에 달리 중생이 없으니, 중생의 진심이 곧 부처의 진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직 설자뿐이고 청자는 없으니, 그러므로 설한 성교에 오직 부처만 나타날 뿐이다.(一約同教以成四句 謂一佛眞心外無別衆生 以衆生眞心即佛眞心故 則唯說無聽 故所說教唯佛所現)
둘째는 중생심 밖에 다시 다른 부처가 없으니, 부처의 진심이 곧 중생의 진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직 청자뿐이고 설자는 없으니, 그러므로 설한 성교에 바로 중생 자기만 나타난다. 범행품에 이르기를,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心自性인 줄을 알면 혜신慧身을 성취하되 타인으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二衆生心外更無別佛 以佛眞心即衆生眞心故 則唯聽無說 故所說教即衆生自現 梵行品云 知一切法即心自性等)
셋째는 부처의 진심이 나타날 때 중생의 진심이 나타남을 장애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설자와 청자가 동시에 존재하고, 첫째와 둘째 성교가 일제히 존립한다.(三佛眞心現時 不礙衆生眞心現 故說聽雙存 二教齊立)
넷째는 부처가 바로 중생이기 때문에 부처가 없고, 중생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중생이 없다. 서로 탈취하여 동시에 없어지면 곧 설자와 청자가 모두 적적하다. 그러므로 정명경에 이르기를, “그 설법자는 설함이 없고 보여줌도 없으며, 그 청법자도 들음이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라고 한 것이다.(四佛即衆生故非佛 衆生即佛故非衆生 互奪雙亡則說聽斯寂 故淨名云 其說法者無說無示 其聽法者無聞無得)
둘은 별교를 준거하여 사구를 천명한다. 이른바 체상을 손상하지 않고 중생과 부처가 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二約別教以明四句 謂由不壞相生佛互在故)
첫째는 중생이 전부 불심 중에 있는 연고이니, 곧 과문이 법을 남김없이 섭수한다. 중생도 오히려 불심 중에 있거늘 하물며 설한 성교랴. 부처의 출현뿐만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를, “여래가 정각을 성취할 때, 그 불신 안에서 일체중생이 정각을 성취함을 두루 보고, 더 나아가서 일체중생이 열반에 들어감을 두루 보았느니라.”라고 하였고, 또 불성론 제2권 여래장품에서도 이르기를, “일체중생은 다 여래의 지혜 안에 있기 때문에 명칭을 장藏이라고 한다. 여여한 지혜로 여여한 경계에 칭합하니, 이 때문에 일체중생은 결코 벗어날 기약이 없다. 여여한 경계란 것은 모두 여래가 섭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명칭을 소장所藏이라 하니, 중생이 여래장이다.”라고 하였다. 또 아래 여래출현품 중에서도 삼세의 겁 세계 중생의 심념과 근욕을 천명했으니, 오히려 모두 일신에 단박 나투시거늘, 하물며 불지佛智가 광대하여 허공과 같음에랴.(一衆生全在佛中故 則果門攝法無遺 生尚在佛心中 況所說教 不唯佛現 故出現品云 如來成正覺時 於其身中普見一切衆生成正覺 乃至普見一切衆生入涅槃 又佛性論第二如來藏品云 一切衆生悉在如來智內 故名爲藏 以如如智稱如如境 故一切衆生決定無有出 如如境者 並爲如來之所攝持 故名爲所藏 衆生爲如來藏 又下出現品中明 三世劫剎衆生 所有心念根欲 尚皆一身頓現 況佛智廣大如虛空耶)
둘째는 부처가 중생심 중에 있는 연고이니, 곧 인문이 법을 남김없이 섭수한다. 부처도 오히려 중생심 중에 있거늘, 하물며 설한 교인들 중생심에서 나타남이 아니랴. 그러므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를, “보살마하살은 자기 마음의 염념에 항상 부처가 정각을 성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제불 여래도 이 마음을 떠나지 않고 정각을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자기 마음과 같이 일체중생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으니, 모두 여래가 정각을 성취하고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도 중생심 중의 진여를 증득하고 성불함을 천명한 것이며, 이 때문에 본각과 다름이 없으니 시각으로 본각과 함께 하면 모두 중생심 중에 있다. 각체로 좇아서 묘용을 일으키는 응화신일 때가 바로 중생심 중에 진여의 용대이고, 다시 다른 부처는 없다. 예컨대 기신론 중에서도 이 뜻을 많이 천명했지만, 그러나 이는 자기 마음의 체용이다. 지금 이 경은 마음과 부처 중생이 차별이 없으며, 이 때문에 부처가 중생의 각체를 증득하고 중생의 묘용을 쓰는 것이다.(二佛在衆生心中故 則因門攝法無遺 佛尚在於心中 況所說教非衆生心現 故出現品云 菩薩摩訶薩應知 自心念念常有佛成正覺 何以故 諸佛如來不離此心成正覺故 如自心一切衆生心亦復如是 悉有如來成正覺 此明佛證衆生心中眞如成佛 故本覺無異 以始同本 總在衆生心中 從體起用 應化身時 即是衆生心中眞如用大 更無別佛 如起信中多明此義 而是自心體用 今以此經心佛衆生無差別 故佛證衆生之體 用衆生之用)
셋째는 앞의 중생과 부처가 서로 그 가운데 있을 때 각각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니, 곧 인과가 교철하여 어떤 성교를 따르더라도 모두 서로 두 마음 가운데 있다. 이 때문에 중생심 중의 부처는 불심 중에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불심 중의 중생은 중생심 중에 부처의 설법을 듣는다.(三由前生佛互相在時 各實非虛 則因果交徹 隨一聖教 全在二心 故衆生心中佛 爲佛心中衆生說法 佛心中衆生 聽衆生心中佛說法)
넷째는 중생이 완전히 부처에 있으면 곧 부처와 동일하여 중생이 없고, 부처가 완전히 중생에 있으면 바로 중생과 동일하여 부처가 없다. 양자가 서로 형상을 빼앗으면 두 지위가 가지런히 원융한다. 곧 어떤 성교를 따르더라도 모두 두 마음이 없으니, 그러면 불심 중의 중생은 청법이 없고, 중생심 중의 부처는 설법이 없다. 그래서 현수품에 이르기를, “인연으로 생기하는 것이니 중생이 없고, 제불의 법신도 법신이 아니니라.”라고 하였고, 또 게찬품에 이르기를, “여래는 법을 설함이 없고, 또한 중생을 제도함도 없느니라.”라고 하였으며, 대반야경 제425권에서도 이르기를, “내가 도를 얻은 이래 한 글자도 설함이 없고, 너희들도 또한 들은 바가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이 사구는 어떤 성교에서도 원융하고 무애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구경이 되며, 심심하여 유식의 도리이니라.(四由生全在佛則同佛非生 佛全在生則同生非佛 兩相形奪二位齊融 即隨一聖教俱非二心 則佛心中衆生無聽 衆生心中佛無說 是以賢首品云 因緣所生無有生 諸佛法身非是身 又偈讚品云 如來不說法 亦不度衆生 大般若四百二十五云 我從得道來不說一字汝亦不聞等 是故此四於一聖教圓融無礙 方爲究竟 甚深唯識道理)
14. 결어
위 글에 중복한 경문이 너무 많다고 탓하지 마시라. 금가루가 비록 귀하다고 해도 눈속에 들어가면 삼눈이 돋을 수 있지만,(金屑雖貴 落眼成翳) 이 경문의 금언金言은 눈에 들어가도 오히려 무상정각의 제1문 신문을 성취할 수 있고, 필경에는 구경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
2022년 4월 30일 74세 길상묘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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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체상이 휴영을 여의지 않음은 위 무상을 해석한 것이다.
를
체상이 휴영을 여읨은 위 무상을 해석한 것이다.
라고 수정했습니다.
훼손할 수도 없고 찬탄할 수도 없도다.
체상이 허공과 같아서 궁극이 없느니라.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맑고 깨끗하다.
찾아보라, 그대는 찾아볼 수 없음을 알 것이다.
不可毁 不可讚 體若虛空勿涯岸 不離當處常湛然 覓則知君不可見
이 일상은 훼손해도 지구 위에 먼지 하나를 없애는 것과 같고, 찬탄해도 또한 먼지 하나를 보태는 것과 같다. 그 체상이 허공과 같다. 허공이 어떠하기에 허공과 같다고 했을까? 막힘이 없이 훤히 트여 환하다. 환하지만 또한 그 끝이 없다. 넓게 보면 이와 같지만, 좁게 보면 어떠한가? 당처 곧 그 자리는 시간과 공간으로 딱 한정할 수 없다. 찰나와 같고 인허와 같다. 당처가 바로 일상이고 일념이다. 이를 여의지 않고 항상 그 묘용을 드러낸다. 담연하다. 명철明徹하다. 밝고 환하다. 이 경계를 찾아보겠느냐? 취할 수 없고, 얻을 수 없으며,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찾지 말지니라.
이상을 추가했습니다.